때는 태자비의 간택날이자, '희영제'의 3일 전 날.
태자비로 간택된 규수는 아마도 예상했듯…. 연 가의 연새하입니다.
10년이란 세월 사이 연한 분홍빛을 띄던 머리카락은 분홍색 매화마냥 짙은 색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뺨마저 비슷한 색으로 물들인 채 당신 앞에서 웃어보이며, 그가 곧 있을 희영제의 날을 이야기합니다.
연새하:제대로 희영제에 참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옵니다. (상당히 기대되는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노유진:그대에게는 더욱이 경사스런 날이니까요. (이젠 제법 자리에 어울리는 얼굴로 웃을줄 알았다.)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대가 신경쓰기도 전에 주변에서 도와주지 못해 안달일테니.
연새하:(그런 당신을 바라보다 살며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태자 저하께서는 이번이 두 번째이겠군요. 지난 희영제 때는 어떠하셨습니까?
기억을 더듬어봐도 당신이 제대로 희영제에 참여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야 첫 날엔 효안 황후를 위해 숲을 헤매다 어린 사슴을 만났고,
노유진:... ... (함께 떠오르는 얼굴에 잠시 침묵했다. 아니. 떠오르지 않았다. 벌써 10년이다. 강산이 바뀐다하는 시간이지 않나. 비록 자신의 연으로 결정된 이의 뒷모습에서 자꾸만 그 흐릿한 얼굴의 이가 떠오르긴 하지만. 그래도.) ... 저 또한 제대로 참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듯 하군요. (옅은 미소를 보이며 부드런 성정을 내보이듯 연새하의 손을 살짝 덮듯 붙잡아주었다.) 긴장이 되거든 그대의 손이나 이리 잡아야겠습니다. (단란하고 사이좋은 예비 부부. 그렇게 보일테다. ... ... 명백한 의도가 섞여있겠지만.)
"아, 그게, 저…!" 당신의 행동에 연새하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갈 때였습니다.
문득 저 멀리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이 당신의 걸음을 멈춰 세웁니다.
한낮, 하필이면 황제는 자리를 비운 터라 사람들이 당신에게 급하게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보입니다.
하필이면 이런 날 화소재에서, 그 신수가 기거하던 곳에서 사건이 일어났다니요?
노유진:... ... ... (미간을 찌푸린다.)
허리를 숙이며 말하는 자들의 얼굴엔 묘한 두려움이 서려 있습니다.
"저하께서 귀빈을 살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10년 전 끊긴 인연. 그것을 다시 당신의 손으로 쥐러 가야 할 것 같노라고.
흐릿한 얼굴의 이를 다시 선명하게 두 눈에 박아야 할 것 같다고….
노유진:(새어나오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삼켜내곤, 아무일 없단듯 연새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급한일이 생겨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급한 일이 생기거든 종을 시켜 편지를 보내세요. 내 한달음에 달려올테니.
연새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당신의 위치는 '황태자'이긴 하나, 그래요. 지금은 '황제'의 대리로서 화소재로 향하는 길이니까요.
달빛 아닌 햇빛이 천장에서부터 그 작디 작았던 신수의 정원을 밝게 물들입니다.
한껏 자라난 신수가 눈을 깜빡이며 태자를 바라봅니다.
…당신 뒤로 따른 신하 둘이 당황하며 고개를 숙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들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답하겠지요.
노유진:... ... ... (죽을 때까지 다시 볼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우리가 이전에 무슨 대화를 했더라. 아니, 이전에 대화란걸 한적이 있긴했나. 잠시 과거를 회상하듯 그 모습을 가만 눈에 담다가, 고개를 돌려 동행한 이를 바라본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지?
"귀, 귀빈께서 화소재 바깥으로 나오려 하셨습니다."
"귀빈을 화소재 안쪽으로 보호하여 두라는 폐하의 명이 있으셨기 때문에…."
거기에 내부를 살펴보면, 기억과는 다른 부분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자신을 상대하지 않는 당신의 모습에 신수의 입이 다시금 열립니다.
노유진:(엉망이 된 내부를 보고선 이번만큼은 차마 한숨을 삼키지 못햇다.) 하아... (피로감이 몰려오듯한 기분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자해라도 한 것이냐? (여전히, 신하에게 물을 뿐 시선을 두진 않았다.) 사람을 불러 귀빈께서 머무는 방을 깨끗이 치우고, 깨지거나 찔릴 수 있는 위험한 물건들은 미리 없애두어라. (그제야 살며시 시선을 두고선.) 치료도 필요해보이는군. (눈이 마주치진 않았다.)
마주치지 않는 시선에 애가 타는 건 신수 하나 뿐입니다.
제자리에 서 있던 몸을 기어이 움직여 당신에게 걸어오기까지 합니다.
바닥에 스며든 핏물은 질질 끌리는 옷자락이 닦아내고 있을까요.
노유진:그리고 이것은... (착착. 마치 정해진 순서라도 있는 것처럼 막힘없이 명을 이어갔다. 평생을 권력자로 살아왔고, 권력자로 키워진 사람답게. 의무와 책임만이 자신의 삶을 잇게 한다는듯. 그리고 거기엔 '당신과 결코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도 있었다. 다만 지척까지 훌쩍 다가와 느껴지는 인기척에 잠시 입을 다물었고. 잠시 시선을 들어 당신... ... 의 발 밑, 핏자국으로 가득한 바닥을 주욱 훑었다.) 평소 귀빈께선 어떻게 생활하시지? 이런 일이 자주 있었나?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갖다드리고 있는건가? (당신의 편의를 논한다. 그쪽은 보고있지도 않으면서.)
망설이지 않고 하명하는 말들을 기억하는 통에 신하들의 허리가 계속해 숙여집니다.
그것이 당신, 이 유록의 황태자니까요. 하물며 지금은 황제를 대신하여 이곳에 발걸음한 것이 아닙니까.
"…이전엔 없던 일입니다. 필요를 청하던 일은 지난 시간동안 한 차례도 없었나이다."
당신도 당신이었겠지만 이 좁은 공간에 갇힌 신수는 어떤 심정으로 이곳에 있었을까요?
그리고 왜 하필, 조용히 지내다 이때에서야 이런 일들을 벌인 걸까요?
신수는 말없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의 말이 당신에게 닿지 않는 것을 알아차린 걸까요?
그러나 10년이란 세월을 지나 '이제는', 우린 그 사이의 시간을 헤아릴 수 없기에 모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당신과 신수는, 어떤 관계도 없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노유진:(가만 침묵한다. 습관처럼 머리를 굴렸다. 앞으로 희영제까지는 3일. 귀빈께서 떠나는 시간도 3일이다. 지금껏 어떤 불만이나 요구사항도 없던 '귀빈'이 돌연 패악을 부린다면 분명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일 터. 외부세력에 의한 문제일수도 있고, 희영제를 앞두고 있는 만큼 이 '신수'께서 뭔가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단은 주변 기강을 바로하고 마음을 달래 이 3일을 곱게 보내는 게 가장 우선이다.) ... 희영제가 끝날 때까지 경계를 강화하고 외부에서부터 침입한 흔적이 없는지 살펴라. 그리고 청소를, (까지 말하다 입을 다문다. 가만. 외부의 침입이 있었더라면 이곳을 다녀가는 사람 모두를 의심해야만 한다. 보통 그런 일들은 가장 의심을 받지 않는 궁녀로 대체되는 일이 많으니... ... .)
... ...
빗자루와 걸레를 가져와라.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연고와 붕대도. 그대들은 나가있어.
(직접 하는게 가장 편하다.)
"하오나 태자 저하…." 같은 말이 따라붙지만, 머지 않아 그들은 명에 순복하여 화소재에서 물러납니다.
기이한 침묵 속, 이윽고 빗자루와 걸레, 연고와 붕대를 가지고 온 나인이 물러나기까지 신수와 당신의 시선은 마주한 적이 없었습니다.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말한 신수답게 내부의 모습은 당신이 기억하던, 거의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정말 당신과 자신, 둘만이 남자 그제야 신수가 절뚝이며 당신에게 다가옵니다.
은하:…낮에는 기운이 잘 나지 않아. (그리고 그는 마치 헤어졌던 시간이 없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을 붙였다.) 그러니까 네가 곁에 있어줘, 진아.
노유진:... ... 기운이 나지 않는다는 것 치곤 멀쩡한 것 같은데. (난장판이 된 내부만 해도 그렇다. 중얼거리듯 하다, 소매를 걷고선 큰 조각부터 주워 치우기 시작했다.) 희영제가 바짝 다가온 만큼 몸이 들뜨는 것은 이해하지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물건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불러 청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곳에 있는 자들은 귀빈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들어줄텐데요. (딱딱하고 경직된 말투와 행동. 당신과 달리 그에게 10년이란 시간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은하:(그리고 붙잡기 위해 뻗은 손은, 허공만을 쥐었다. 멍하니 당신의 손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신수는 직접 난장판이 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당신에게 시선을 돌렸다. 느껴지는 벽과, 거리감. 가까이 있는데 당신이 멀리 있는 것 같다.)
널 부르면? …그럼 와줘? 지금처럼. (당신의 옆으로 또 한 걸음, 다가선다.)
노유진:저는 일국의 황태자입니다. 하루 일정이 빠듯하고, 이번 희영제를 맞이해 준비할 것이 많아 귀빈께서 원하는 걸 얻긴 어려우실 겁니다. (왜인지 모르게, 연새하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당신의 요구를 거절했던 것과는 달리 그에겐 직접 '부르면 한달음에 오겠다.'고 했기 때문이리라.)
은하:……. (또, 또 걸어갔다. 이번에는 잡힐 거리. 조각을 치우는 당신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줄 거라며. 난, 진아.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청나게 많은 돈도, 반짝거리는 보석도, 값비싼 이불도 원하지 않아. (다만 그의 눈은 확고하게 당신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오직 너 뿐이야.
(그리고는, 문득 그런 당신의 앞에서 서서히 몸을 낮췄다. 무릎이라도 꿇으려는 건가? 지고하신 신수가? 아니. 막상 그가 보인 동작은.) ……나 졸려, 진아. 같이 있어줘. (파편이며 핏자국으로 어지러운 한 가운데 옆으로 드러눕는 것. 눈이 가물가물, 반쯤 닫혀있었다. 이미.)
노유진:(피곤하다. 자신은 그때와 전혀 다르게 장성한 사내가 됐건만. 신수라 그런가? 우리와 시간을 다르게 쓰기라도 하는 건지 여전히 어린애같은 구석이...) 아니, ㅡ! (다만 그 예측할 수 없는 모습에 끝내 시선이 돌아가고, 파편 한가운데 냅다 드러누우려는 몸을 간신히 받쳐 안았다. 순식간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만약 귀한 신수의 몸에 또 상처라도 났다간... ... 안심과 동시에 몰려오는 감정들에 결국.) 크, 큰일날 뻔 했잖아! (급한 마음에 경어는 냅다 버렸다.) 이해할수가 없네, 대체 뭐하잔 거야?!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해, 말을!
은하:(찔리든 베이든, 그것은 은하에겐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통이나 아픔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예를 들면, 그래.)
……. (지금같은 순간들이. 가물가물 잠기려던 눈이 다시금 뜨여 당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만 몇 초 뒤 눈은 다시금 감기기에 이른다. 되려 당신의 품에서 몸을 고쳐 눕듯 부스락거리기까지. 옆머리를 당신의 품에 기댄다.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으니까.) 난 계속 말했어…. (졸음기 묻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원하는 거.
노유진:그러니까, 원하는 게 나라는둥 이상한 소리 말고. 말했잖아. 난 바쁘다니까. (애초에 그냥 투정부리려고 한 말이잖아, 그건. 그렇게 덧붙이려다 가물가물 눈을 감으려는 당신의 행동에 퍼뜩 놀라 몸을 흔든다.) 헛소리하다 졸리다고 자면 그만인 줄 알아? 일어나! 일어나라고!! (흔들흔들.)
은하:…으으으응. (흔들거리는 손짓에 싫증 섞인 소리가 새어나왔다. 얼굴을 찌푸린 뒤 당신이 바라는대로 눈을 뜨긴 했지만, 여전히 몸에선 쫙 힘을 푼 상태였다.) 왜 바쁜데? 얼마나 바쁜데? …내가 옆에 있는 것도 안 될 정도로 바쁘단 거야? …말이 안 되잖아. (느릿느릿 중얼거리며 햇살 들어오는 천장의 창을 바라보았다.) 일하느라 바쁜 거면 옆에서 자고만 있을게. (시선의 궤적, 그 끝에 당신이 닿았다.)
네가 없는 이곳은 너무 외로워.
노유진:바빠. 엄청 바빠. 무지하게 바빠. (안돼. 안 된다고! 이럴줄 알아서 일부러 무시하고 있었던 거였는데. 한 번 말문을 트기 시작하면 정처없이 말려들고 만다. 유쾌한 감각은 아니었다. 자국의 황태자, 나아가 황제가 될 몸이거늘. 날고기는 달변가들과 다퉜을때도 지지 않았는데 이런 맹추같은 이의 행동에 휘둘리다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아니. ... 아니지. 얘는 신수니까. 그래. 어쩌면 당연한걸수도 있겠네. 가까스로 마음을 안정시킨다.) ... 3일만 참아. 그 뒤엔 집에 돌아갈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정 그러면 말동무 할 사람을 찾아달라고 하면 되잖아. 네가 부탁하는 거면 폐하께서도 들어주실텐데.
은하:그냥 옆에만 있는 게 안 될 정도로? …그건 너무하잖아. (다시금 평정을 찾는 당신의 얼굴이 두 눈 안에 새겨진다. 소매를 잡은 손을 꼼지락대다, 슬그머니 움직여 당신의 맨손을 붙잡는다. 살갗이 닿는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손가락이 당신의 손가락 사이를 타고 들어가 손등까지를 덮는다.) 진이 아니면 안돼. (그저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천치처럼.) 너여야 해. (왜냐하면.)
네가 내 이름을 지어줬잖아.
노유진:(꼼질거리며 손을 붙잡은 손을 어디! 하며 쳐내고 싶었지만, 축 늘어져 있는 몸을 안은채 버티고 있느라 여유가 없었다. 당최 이해가 되질 않는 말만 해대는 당신에게 설명을 요구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바라만보다 한숨만 푹 내쉰다.) 하... (당신의 행동으로 보건데, 침입자가 없었던건 확실한 것 같다. 그러니 그냥 모른척하면 알아서 해결될 일... 이지만, 반대로 오늘 이런 일을 벌였다는건 앞으로 남은 3일 내내 이런 일을 벌일 가능성이 크단 것이었다. 고통에도 묘하게 둔감한 눈치니 또 자해라도 했다간 희영제때 돌려보내기로 한 '신수'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지도 모른다. ... ... 그래. 3일만 참으면 돼. 자신이 했던 말을 자신이 되내이며 결국엔.) ... ... 보러온다고 하면 말썽 안 피울거야?
은하:……. (그리고 당신이 끝내 원하던 말을 내놓은 그때. 감기던 눈이 번쩍 뜨이며 둥글게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들어오는 한낮의 햇빛이 넓은 호수의 물결 위를 반짝반짝 물들이니, 산란하는 빛의 파편이 여러 색으로 빛나더라. 흐느적거리듯 힘이 들어가지 않고 있던 몸에도 살며시 힘이 들어가다, 말았다.)
약속이야?
노유진:... ... ... (어머니와 했던 약조가 떠올랐다. 얼굴엔 또다시 죄책감이 드리운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 이게 모두를 위한 길이다.
황태자의 의무다.) ... ... 그래.
약속할게.
은하:(
약속. 이미, 당신이 한 번 어겼던 그것. …그래도 그는 여전히 당신의 말을 믿고 있는 걸까? 어두운 얼굴로도 내뱉은 언어에 멍하던 얼굴에 가랑비 떨어져 젖듯 웃음이 스며들었다. 착각인가? 싶을 즈음에,) (
확, 흐물거리며 늘어져있던 두 팔이 움직여 그런 당신의 목을 끌어안고, 어느 순간 쿵! 당신의 등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런 당신의 위를 신수가 덮는다. 분홍빛 매화꽃처럼 머리카락이 한순간 허공에 휘날렸다가,) ……매일 와주는 거지?
노유진:악, (소리와 함께 바닥에 매다꽂히듯 넘어진다. 전신으로 퍼지는 얼얼한 통증은 곱디곱게 자란 그가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오, 진짜. 성질내듯 눈을 뜬 순간 벚꽃이 휘날리듯 흩어지는 머리카락이 보인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존재도.) ... ... ... 희영제까지만이야. (몸 어딘가 한구석이 술렁거리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건 단순한 착오일 뿐이다. 난 눈 앞의 이 자를 아주 번거롭고 귀찮아하니까. 그래. 스스로를 달랜다.) ... 비켜.
은하:(희영제까지는, 고작 3일도 채 남지 않았는데도.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신수는 눈을 꿈뻑이며 당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나 졸려, 진아. (맹추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다가.) 이름 불러주면서 재워줘. (이건 또 색다른 요구긴 했는데….)
노유진:뭐?! 아니 잠은 네가 알아서 자야지 왜 나한테 재워주기까지 하래! (반항한다.)
은하:그치만, 같이 못 잔 지 오래 됐으니까…. (웅얼거리며 변명하는데, 아니. 누가 들으면 이렇게 오해 할 소리를? 다만 당신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선 힘이 떨어지지 않았다. 되려 꾸우욱, 힘만 더 들어갔지. 답답할 정도로 당신의 몸을 제 몸으로 내리누르고 있다.) 재워줘.
노유진:내가 너랑 언제 같이 잤는데. (금시초문인 소리를 마구 늘어놓는걸 보고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무거우니까 좀 내려와아앗...! (숨막힌다.)
은하:……. (그 말에 끌어안던 팔을 풀고 제 손을 들어올려 하나, 둘, 손가락을 접어 셌다. 모두 다 접히고 난 뒤에서야.) 10년 전…? (꾸물꾸물 당신의 옆으로 내려와 이번엔 멋대로 당신의 팔을 베고 누워 허리를…. 끌어안는다…?)
노유진:... ... ... ... (가만히 있다가.)
...............
비켜!!!!! (밀쳐낸다!)
이게 진짜 한번 봐주니까 아주 끝을 모르고...! (오랜만에 볼 꼬집어서 마구마구 늘린다.)
은하:아얏. (밀쳐졌다. 내밀려 옆머리가 차가운 바닥에 쿵 떨어지고, 특유의 멍한 눈으로 당신을 올려다보다,)
아하아아아…. (꼬집혔다!) 으에으우……. (늘려졌다! 급기야 두 팔을 바동거리기 시작했다.)
노유진:이상한 어리광 부릴 생각하지 말고 졸리면 얌전히 잠만 자! 알겠어? (엄한 표정 보였다.)
은하:(팔다리를 바동…. 바동…. 거리다가, 엄한 표정 앞에서 얌전해졌다. 조금 시무룩해진 것 같기도 하고?)
…….
책에서 봤는데, (또 무슨 소릴 하려고?) 잘 땐 노래를 불러준대. 인간들은.
(그리고 당신을 봤다. 빤히.)
서, 설마 지금.
(본인에게 손가락질... 그리고 당신에게 손가락 끝을 스윽 돌린다.)
노유진:...........................
노유진:...................................................
노유진:...............................................................................
은하:(그리고 또다시 슬금, 슬금. 다가와 당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팔에 뺨을 기대 누우며.) 노래….
알았으니까 떨어져. (허리 안은 손 찰싹!)
노유진:여긴 왜 그 흔한 침구도 없어선... (불만스레 중얼거리다가 자신이 입고 온 겉옷이라도 벗어 예비 베개라도 만들요량인듯 둥글게 접었다.) 여기 누워봐. (툭툭.)
은하:(있었는데 사용하질 않아 어느 순간 치워진 상태였다. 당신이 겉옷을 벗는 걸 멀뚱히 바라보다 살금살금 몸을 일으켜 당신이 짚은 곳에 가 누웠다.) …….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옷가지에 코를 박고 킁킁대본다. 사람보단 짐승에 가까운 행동.)
베고 누우라고, 베고! (결국 또 성질내며 팍! 빼앗아 둥글게 말고, 또 당신을 그 위에 눕혀 머리를 기대게 하고... 가만보면 참 성질 급하다.)
은하:(그리고 일련의 사건이 지나 정말 얌전히 누운 신수, 은하. 그 사이에 또 당신의 소맷자락을 꾹 붙잡고 있었다.) 이 옷 나 주는 거야?
노유진:... 안준다고 하면, 돌려줄 생각이 있긴 해? (불만...)
……. (소중히 제 것이 된 베개에 머리를 한 차례 부빗거렸다.) 나 준비 됐어. (그리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
노유진:(저 옷 내가 좋아하는건데... 생각하며 하아. 깊은 한숨을 뱉을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자장가는 그리 많지 않은데... ... . (기껏해야 어머니나 유모가 불러준 것 정도였다. 그마저도 좀 예전의 것이었고. 기억을 더듬느라 시간이 지체된다.)
... 미리 말하는데, 원래 황태자들은 가무를 멀리하기 때문에 음악에 소질이 없는 경우가 많아. 물론, 소질이야 있겠지만 아무래도 다른 공부가 우선되니까 시간을 쏟을 수 없어 그렇지 분명 연습만 하면... (그리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자신이 없긴 한 모양.)
은하:…진, (얌전히 기다리며 듣고 있다가, 눈을 감은 채 한 마디.)
자신 없어?
(다만 그의 성격상 당신의 속을 긁으려 내뱉은 말은 결코 아니기 때문에, 잔잔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난 진의 어떤 목소리든 좋아하니까…. 괜찮아. (하얀 손은 여전히 당신의 옷 소매를 붙잡고 있었다.) 정 듣기 싫은 노래면 다른 생각을 하며 잠에 들게.
노유진:누, 누가 자신 없다는거야. (연습할 시간이 없었던 것 뿐이라니까. 핑계가 덧붙여진다. 끝내 당신의 위로에 우물우물 입을 열려다가도.) ... 그렇게까지 별로는 아니니까 하지마. (열받는 말새에 결국 딱딱한 말을 던진다.) ... 그럼, ...
(그리고 더듬더듬, 노래를 시작했다. 어머니가 불러주셨던 것처럼 감미롭거나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저 정말, 흥얼거리거나 드문드문 생각난 가사를 더듬어가며 읊조리듯 부를 뿐. 그마저도 중간중간 뒤늦게 생각나 다시 부른 구간도 있었다. 기교도, 눈에띄는 음색도 없다. 다만 기억을 더듬어 들은 자장가를 당신에게 들려주듯 제가 받은 그 순간들의 모든 행동을 따라하며 도닥도닥. 당신의 손을 배 위에 올려 그 위를 두드린다.)
감미롭지도, 그렇다고 따스하지도 않은 노래가락이 한적한 화소재 안을 채웁니다.
그러니 지금이 낮임에 감사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따스하게 내려앉는 햇빛이 당신의 자장가를 다정한 축으로 이끌어주고 있었으니까요.
눈을 감은 신수는 어떤 미동도 없이 고른 숨소리만을 뱉습니다.
노래가 끝난 뒤, 당신이 붙잡혀있던 손을 빼내어보면….
스르륵, 쉽게 빠지는 것에서야 그가 잠들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 신수의 기행에 얼마나 시간을 잡아먹혔는지 모르겠습니다.
희영제가 오기까진 계속 이런 나날이 반복되는 걸까요?
짜증과, 무어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당신의 속을 두드리는 것 같았습니다.
유진, 화소재를 벗어나 당신의 자리로 돌아갑시다.
유록의 유일한 황태자. 연새하의 단 하나뿐인 약혼자의 위치로, 백성들의 고고한 하늘로 군림하기 위해….
뒤늦게 돌아와 소동을 접한 황제가 당신을 불렀습니다.
10년이란 세월 사이, 황제의 상태는 다음과 같이 변모하였습니다.
'낮' 동안에는 당신이 알던 황제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할 때 즈음부터 황제는 어딘가 사람이 확 변한 것마냥…. 미묘한 광증이 돋보입니다.
사람이 대놓고 죽어간 적은 없습니다만, 그것도 '아직'입니다.
하여 당신은 즉위하지 않은 현 상황에서도 밤만 되면 황제를 대신하여 이미 몇몇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당신은 잠든 신수를 두고 하필이면, 해가 진 이후에 황제의 처소에 들어갑니다.
황제:…태자. 왔느냐? (어둑한 내부 탓에 황제의 눈빛이 잘 보이지 않았다.)
노유진:... ... 예, 폐하. 소자 도착했사옵니다. (짐짓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더욱이 깊게 고개를 숙인다. ... ... 광증을 피해 도망가듯. 혹은 그저 현실을 부정하듯.)
황제:(그런 당신의 속내를 아는지, 아니면 알지 않아도 되니 모르는 그대로 상황을 두는 건지. 뒷짐을 진 그는 느리게, 당신의 앞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신수께서 작은 소동을 벌이셨다지?
무슨 일이 있었느냐.
…이미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일을 전해들었을 텐데 말이죠.
부러 이런 질문까지 건네며 당신을 견제하는 모습이 우스웠던가요? 아니면….
노유진:... 희영제가 다가옴에 따라 신수께서 저희는 느끼지 못하는 어떤 격동을 느끼신듯 했습니다. 돌연 심기가 불편한 모습을 보였으며, 내부의 물건을 던지거나. (잠시 말을 멈췄다.) ... 자해를 한듯 몸 곳곳에 상처가 있었습니다. 다만 지금은 안정된 상태입니다.
황제:격동?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을 몇 초간 내려다보다, 돌연 또 휙. 몸을 돌려 침상 쪽으로 걸어간다.) 상처라 함은, 정확히?
노유진:(기억을 더듬었다. 침상으로 돌아가는 발소리를 듣자 그제야 온몸에 스미던 긴장감의 끈이 살짝 느슨해졌다.) 옷깃 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 다리를 절기도 했고요.
침상 곁으로 다가간 황제의 손이 그 옆 탁자 위로 향합니다.
손에 쥐어 그 안에서 느리게 굴리는 것은
붉은 환
하나.
당신의 말을 듣고서도 그는 한참 말이 없습니다.
정적이 이어질수록 벌레를 닮은 긴장감이 당신의 발끝을 타고 오르는 성 싶습니다.
최근 타국과의 교류도 늘어난 이런 상황에서, 황제 폐하는 어디까지 괜찮으실 수 있을까요.
황제:신수께서 돌아가고 싶어하시던가? (문득 물었다.)
하늘로.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습니다만.
돌아가고 싶으실 거라 감히 추측합니다.
황제의 손 안에서 붉은 구슬이 소리 없이 굴러다닙니다.
황제:그래…. 희영제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니…. (긴긴 침묵을 깨트리며, 당신을 돌아본다. 어둠 속에서 눈이 희게 번뜩이는 착각이 인다.) 그렇담 태자. 곁에서 신수의 안정을 돕거라. (그가 미묘하게 웃음지었다.)
응당 모르겠지만…. 신수의 발작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도 하니. (알 수 없는 말을 흘리기도 했고.)
노유진:(
곁에서 도우라니. ...지난 시간, 절대 그 안으로 발을 들이지 말라 했던 것은 잊으신 걸까? 상황이 급변하니 대처가 달라지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혹여나. ... ... 이것조차
광증의 증거인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건 질문이 아니라.) ... 예, 폐하. (응답. 복종하듯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당신에게 신수와 만나지 말라 으름장을 놓았던 과거와 달리 '곁에서 도우라'고 친히 명령하신 것도.
축객령이 내려지니 당신은 얌전히 처소를 벗어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말입니다.
지금까지 황제의 처소에서 직접 그와 대면한 적은 손에 꼽았기 때문일까요?
당신의 손짓을 따라 당신의 뒤로 조용히 당신의 심복이 붙습니다.
황제가 내내 손에 쥐어 굴리고 있던 '붉은 환'.
익숙한 향기가 당신의 온 신경을 그리로 곤두세우게 하였습니다.
노유진:... ... 폐하의 상태를 살피고, 가지고 계신 그 붉은 환. ... 그것이 뭔지 알아오거라. 혹여나 평소보다 눈에 띄는 변화가 있으면 내게 즉각 보고해. (
나의 아버지이자, 주군이여. 존경하고 경외하던 시간은 거짓인 것처럼 나는 이제 당신을 감시하라 명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가늠할 수 조차 없었다. 신경이 곤두선다. 그것이 오늘따라 유독 지리멸렬하게 굴었던 제 아비 때문인지, 아니면 만날 적마다 변함없이 제 머릿속을 뒤집어놓는 신수 때문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 딱. 희영제까지만. 하나씩 천천히 하다보면. 하다보면... ... .)
(명을 마치면 물러나도 좋다는듯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밤은 오늘도 길테니.)
언제부터 일이 이렇게 꼬이기 시작했던 걸까요?
당신의 삶은 탄생부터 축복이요, 죽음까지 지고할 터인데.
대관절 누가 매듭을 잘못 지었길래 당신이 이리 발을 절기 시작한 것인지….
혹여나 신수가 또다른 사고를 칠까, 황제께서 내린 명도 있겠다 당신은 화소재로 걸음을 옮깁니다.
그렇게 가는 길을 막아대던 경비들은 태자 앞에 고개를 조아린 채입니다.
신수께서 더 사고라도 칠까, 황제는 아닌 척 해도 꽤 조바심이 났던 모양이지요.
다만 예기치 못한 손님 하나가 당신의 앞에 나타나 고개를 조아립니다.
연새하. 붉게 물들인 입술이며 고운 분을 바른 얼굴이며, 무거운 꽃향이 머리를 어지럽게 합니다.
연새하:태자 저하…! 오늘도 바쁘신지요.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노유진:아. (피곤해보이는 얼굴을 완벽히 숨기지 못한 채 미소지었다.) 여기까지 어찌 걸음하셨습니까. 서를 넣으면 제가 갔을텐데요. (그는 스스로 이것을 실수라 여겼지만, 그의 무의식속에선 눈치채 먼저 물러나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연새하:아…. 그것이. (당신의 말에 민망해지기라도 한 양 하얀 뺨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서보다야 제가 걸음하는 것이 빠르기도 하니…. 물론 저하의 일정을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만. (우물쭈물 눈치를 보며 몇 걸음 다가온다.) 어딜 향하시던 길이셨습니까?
노유진:(연새하가 비록 곧 자신의 비가 되어 황가의 식구가 될 몸이라고는 하나, 화소재의 실상을 낱낱이 밝히기엔 그 비밀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웠다. 더군다나 그가 비가 되는 날에는 전설로나 남을 진실일 뿐이므로.) ... 폐하의 명을 수행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진실을 섞어 적당히 둘러댄다.) 잠시 산책이라도 하고 계시면 제가 금방 일을 마치고 찾아뵙겠습니다.
연새하:(당신과 이렇게 빠르게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던 모양이다. 풀이 죽은 얼굴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하는 게 태자비의 재목에는 썩 걸맞지 않았으나.) …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하. (고개를 숙여 당신을 배웅한다.)
그리고, 저,
혹시 저번의 약속도….
그때, 화소재를 지키던 경비 하나가 바쁜 걸음으로 당신에게 다가옵니다.
연새하는 눈치껏 입을 다문 채 상황을 살핍니다.
노유진:(그 이상의 정보가 새는 것을 막겠다는듯 손을 들어 말을 멈추게 했다.) 알았다. ... 낭자께서 행여나 고뿔에 들지 않게 주의하거라. (새하 곁에 선 하인에게 당부하고선 가볍게 고개를 숙여 끝인사를 마친다. 그리고 다시금 걸음을 옮긴다.
뒷 얘기는 또 듣지 못한 채...)
뒷 얘기는 또 듣지 못한 채, 당신은 또. 새하를 뒤로 하고 화소재로 향합니다.
어쩌면 당신의 생이 하나 둘 꼬이기 시작한 게 발길 닿는 끝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아주 잠시 스쳐 지나갑니다.
그리하여 만나게 된 신수는, 어째 불만스러운 표정입니다.
당신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자리에 벌떡 일어서더니, 절룩이는 걸음으로도 성큼성큼 다가와서 한다는 짓이.
은하:(당신의 어깨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대뜸.)
누구야? (묻는다.)
노유진:... ... ... 뭐? (대뜸 뭔소리냐며 미간만 찌푸리고 있다.)
은하:(킁킁. 킁킁. 반대편 어깨에 또 코를 박고 킁킁. 킁킁. 고개를 팍 들고는.) 냄새 나. 다른 인간. 머리 아파. (얼굴을 찡그렸다.)
노유진:냄새? (그럴리가. 하며 저도 제 옷에 코를 박고 킁킁댄다. ... ... 하지만 당연히, 맡아지는 게 있을리가 없다. 결국 고개만 갸우뚱댈 뿐.) 나는 잘 모르겠는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 ... 너 또 무슨 사고를 친거야?
은하:내 냄새 아니야. 꽃 냄새. 다른 인간…. (웅얼거리며 말하지만, 그런다 해서 당신이 이 요상한 신수의 말을 알아들을 일도 만무했다. 뭐가 그리 분했는지 발을 동동 구르다 찌릿,한 통증에 허리를 반쯤 숙이다 핀다. 어쨌거나 당신의 옷자락을 쥔 채 가까이 붙은 채로.)
사고? …내가? (금시초문이라는 듯 한 표정.)
노유진:... ... 안쳤어? (그랬으면 경비가 그리 바삐 찾으러 오지도 않았을텐데... ... 진짜 아닌가? 일단 한 번 주변을 살펴본다. 어제와 달라진 점이 뭐가 있을까?)
안을 살펴보면, 음. 어제와 달라진 점이 있긴 합니다.
난장판이던 내부가 아주 깔끔하게 정리된 채입니다.
도자기 파편이나 핏자국도 다 치워져 있습니다.
당신의 명령대로 날카로운 면이 있는 물건들은 싹 빠진 채로군요.
은하:그냥, 네가 언제 오는지 궁금해서 계속 물어본 것밖엔 없는데…. (우물거리며 말하다 안을 둘러보는 당신처럼 함께 고개를 돌려본다. 뭘 보는 거지? …그러다 당신의 품에 폭싹 안겨들었다.) 늦게 왔어. 진. (질책인가?)
노유진:... ... ... (그 경비 얼굴을 기억해줘야겠어. 라고 생각하며 험악하게 허공을 노려보다, 폭삭 안기는 감촉에 퍼뜩 정신이 들은듯 품을 내려다본다. 원래였다면 질색팔색하며 떼어내야 마땅하긴하지만... ... .) 이번 한 번은 봐줄게. (당신은 뜻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두기로 했다. 어제 일부터 해서, 도저히 연새하를 평소처럼 대하기 어려웠으니까. 이번만큼은 당신의 쓸데없는 조름이 기꺼웠다.) 어차피 일찍 왔다고 해서 딱히 할 것도 없잖아.
은하:한 시진동안 물어보더니 거의 울 것처럼 보이긴 했어. (눈을 한 바퀴 굴렸다.) ……. (떼어내지 않네. 여전히 당신이 무슨 얘길 하는진 잘 모르겠지만, 자신이 뻗은 자리를 용납하여주니. 은하로서도 서서히 다리를 뻗어나갈 뿐이었다. …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할 거 있어. (그리 말하며 제 뺨이나 머리카락을 당신의 품에 부빗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며 충격적인 말을 뚝 떨어뜨려놓는데.)
내 냄새를 네게 묻혀야 해.
노유진:... ... (기억하지 말아주자. 당신이 어떤 식으로 사람을 괴롭히는지 아주 잘 알기에 마음속으로 애도를 표할 뿐이었다.) ... ... 뭐, 뭐? (하지만 도저히 이것만은 그냥 넘어가줄수가 없었다. 그래. 내가 왜 잊었을까. 이 건방진 신수께선 한 번 봐주기 시작하면 끝도 모르고 계속해서 요구사항이 늘어나기만 한다는 걸!)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결국 당신을 떨어트리려 힘을 주기 시작했다!)
은하:다른 인간 말고, 내 걸록…. (그리고 밀리기 시작했다. 몇 초 간은 버티나 싶더니, 당신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는지 끝내 떨어져나와선 당신을 한껏 노려본다.) 뭐가 말이 안 되는데? (당당하기까지.) 지금 진의 냄새가 얼마나 독한지 모르겠어?
노유진:아니, 애초에 난 냄새같은거 잘 모르겠다니까! 그냥 네가 막 지어낸 얘기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은하:진 냄새가 아닌 사람의 냄새가 묻어있어. 그리고 그게 독해. 누구냐니까? 말하지 않으면…. (흘끔, 문 쪽을 노려보는 게 명명백백 협박이렷다.) 다른 사람 냄새 싫어. (다시 발을 쿵 구르려다, 움찔 떨며 살살 내려놓는다. 결국 쿵 소리는 하나도 나지 않은 채다.)
노유진:아니. (허. 헛웃음을 뱉어낸다. 이게 이제 협박까지 하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맹랑하기 짝이없다. 신수에게 이런 감상을 남겨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전에 만난 사람이면... ... ... 설마 새하 낭자? (향낭을 달고있었던건지 그와 만났을때 유독 무거운 꽃향을 느꼈던 것 같다. 그 냄새인건가?)
은하:(당신이 생각에 잠긴 듯 하자 떨어졌던 몸을 그사이 다시 붙여, 또 뺨을 부비적거리기 시작했다. 성애적인 접촉이라기보단 말 그대로. 정말 냄새를 '묻히겠다'는 것처럼. 다만 그런 행동도 당신이 내뱉은 이름 앞에서 뚝 멈췄다.) …그게 누군데? (미묘하게 목소리가 어둡다.)
노유진:아니 하지, (말라니까! 말하려다가 뚝 멈추자 괜히 당황한듯 같이 말을 멈췄다.) 내... ... 미래의 비? (아는 이름이기라도 한 건가 싶어 눈이 묘하게 가늘어진다.) 알아?
은하:(눈을 꿈뻑이다, 고개를 젓는다.) '비'가 뭔데? (여기서부터 시작이야?)
노유진:(아득해진다.) ... ... 아내. (이건 아나?)
뭔데?
(머리 지끈!!!!!)
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자신과 연새하는 사랑과의 감정과는 멀었다. 적어도 자신은. 엄. 그러니까...) 상호 동의하에 남은 여생을 함께 하자고 약속하는 사람...? (정도가 적당하겠다.)
은하:(한참 말이 없었다. 이리저리 들쑤시며 사고를 치기 일쑤였던 신수라 하기엔, 너무도 조용하게….)
약속했어, 진? (무거운 음성이다.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 진은, 진의 아내보다 날 더 좋아해? (또. 지독히도 이상한 질문이었고.)
노유진:곧. 약속할 사이지. (굳이 따지자면 말이다. 왜 조용하지? 뒤늦게 당신의 얼굴을 살폈다.) 그... 게, 중요해? (애초에 이런걸 왜 묻고, 자신은 또 왜 대답을 해야하는건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난 장차 황제가 될 자야. ... '좋아한다'같은 단순하고 치기어린 감정같은 건 불필요하다고. (애둘러 말을 돌리는듯한 대답이다.)
은하:(허공을 잔잔히 부유하던 시선을 들어 당신을 바라본다. 10년이란 세월동안 이 작디 작은 곳에 갇혀 지낸 것이나 다름 없는데도, 그 눈빛은 무척이나 자유롭다. 너무도 자유로워 그 무엇도 그를 사로잡지 못할 것처럼 느껴질 만큼. 하지만 신수는, 은하는 너무도 올곧게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진을 좋아해. 그래서 진이 필요해.
그럼…. 진은 내가 필요하지 않아?
노유진:(당신의 말이 너무 이상하게 들렸다. 우리가 만난건 고작 3일. 길게 잡아봤자 어제까지 4일. 그 짧은 기간동안 좋아하니까, 필요하다느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생소한 일이었다. 감정은 죽이고, 의도는 숨기고. 평생을 이런 교육만 받아왔던 그에게 당신의 모든 행동은 낯설고, 어리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 ... ... 너에게는 네 자리가. 나에게는 내 자리가 있잖아.
집으로 돌아가고싶지 않아?
은하:그렇지만, 그렇지만, 진아…. (겨우 하나 난 창문 위로 구름이라도 드리웠나. 들어선 햇빛이 겨우 안을 밝히던 때에 그늘이 들어차기 시작하니, 그의 흐린 목소리만큼이나 얼굴도 그늘 아래 가려진다. 이유는 단 하나다.)
네가 내 이름을 지어줬잖아….
……. (천천히 몸을 떨어뜨리고 뒤를 돌아본다. 절뚝, 절뚝, 침상이 놓인 곳으로 걸어간다. 그러나 음성은 계속 당신을 붙잡고 있으니, 곧.)
만나지 못한 동안….
무슨 일이 네게 있었는지 궁금해. (걸음이 불안정하다.) 들려줘. 나한테.
노유진:(저번부터 여러차례 언급하던 그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 당신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는 것 말곤. 덧붙여, 어쩌면 제게도 아주 중요한 일이었으리란걸. 물론 지금은 의식하지 못한 채 무의식에서 피어난 생각이었지만.) ... ... ... (축 처진 분위기처럼 그의 표정도 묘하게 가라앉아있었다.)
... ... 듣고싶은 얘기라도 있어? (이런 당신은 익숙하지 않아서, 평소라면 멀쩡히 밀어내고 거절할 말들도 쉽게 받아들이며 걸음을 옮기곤 했다. 결국엔 평소의 당신으로 돌려놓으려는듯한 시도따위였을까.)
은하:(10년 사이 부쩍 자란 매화나무 곁, 침상에 눈을 감고 몸을 뉘인 은하의 표정은 평온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적어도 겉으로는.) 네가…. (꿈결을 거니는 것처럼 음성이 희미했다.)
찾고 싶었던 것은 찾았는지.
숲에서 계속 뭔갈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잖아. 그런 네가 궁금했었어.
노유진:숲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채 되묻는다. 내가 그랬던가? 하며 숲을 헤매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는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숲. 이란 단어 하나만으로 선명한 기억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으니.) ... ... 찾은 것 같아. 아마.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폐하께서 찾으신거지만.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주기 위해 신수고 땅에 두고 떠난다는 신과를 찾으려 헤맸었던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제 과거에 피식 웃음이 샜다. 근데. 그러고보니. 그때 봤던 사슴이. ... ... ... 저도 모르게 시선이 당신을 향한다. 매화를 닮은 분홍색 털. 하늘처럼 맑았던 푸른 눈동자. 이상할 정도로 당신과 닮아있었다.)
... ...
(시선이 멍하게 멈춘다. 그러고보니 얘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얘랑 만난건 화천지 안에서였는데. 그렇다는건. ... ... .)
... 그게, ... ... 너야?
은하:뭘 찾고 있었는데? (느릿느릿 묻는 음성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 안으로 얼마나 무겁고 눅한 감정이 지나갔었는지 누구도 모를 만큼.)
……? (길어지는 침묵 가운데 감았던 눈꺼풀이 살며시 위로 들리고, 자그마한 물음에는 급기야 몸을 돌려 당신을 바라본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눈이 두어 번 깜빡인다.) 뭐가 나야?
노유진:그. (차마 그 단어가 입밖으로 나오지 않아 손으로 투명한 형상만 계속 그리고 있었다.) 그거. (그거, 뭐?)
은하:(꿈뻑. 꾸우움뻑.) 그거. (따라하라는 게 아니다.)
그거…. 나. 은하.
…….
나는 은하가 맞아. (끄덕.)
네가.
... ... ...
사슴? (말했다.)
사슴. 나.
…….
(살며시 상체를 일으켜세웠다.) 보여줘?
노유진:뭐, 아니. 보여... 줄 수 있는거야, 그게?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뒤로 물린다.)
은하:(눈을 꿈뻑이다, 손을 들어 겉옷을 벗기 시작. 어?)
진은 그럼 사슴으로 못 변해? (시작, 어?!)
은하:잘 봐. (그리고 옷고름을 쭉 당겨 풀었다.)
노유진:아, 아니. (막기 위해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푸르르, 소리를 내며 앉아있는 분홍색 사슴이 눈에 들어옵니다.
눈을 꿈뻑이던 사슴은 고개를 숙여 당신의 배에 코를 가져다댑니다. 그리고는,
사슴:(삥. 소리를 내며 당신의 배를 뒤로 민다.)
노유진:어, 어어. (밀린다.) ... ... 진...짜 너야? (생경한 투로 중얼거리며 조심스레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보려 했다. 인간일땐 참 어려운데 사슴이니 쉬워보였나.)
사슴:(당신을 바라보다 손이 머리에 닿기 쉽게 더 고개를 숙여준다.) 뺑. (대답이라도 하는 걸까? 다만 조금이나마 더 친근하게 대해주는 당신의 태도엔 확실히,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인 채 당신의 손을 기다리다 상처투성이의 다리를 혀로 삭삭 핥기 시작했다.)
노유진:(확실히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니 대하기에 마음이 편했다. 괜히 죄짓는 기분도 느껴지지 않았고. 아른거리던 얼굴을 이제야 좀 지워냈다.) 엇. ... ... 아직 안 나았어? (여전히 상처가 많은 다리를 보다 누우란듯 슬며지 등을 누른다.) 신수라도 딱히 빨리 낫거나 하는 건 아닌가보네. (따뜻하다. 생각하며 영 떨어지지 않는 손으로 계속 이곳저곳을 문질문질 쓰다듬었다. 보들보들하고. 따끈하다.)
사슴:삐이잉, (살며시 등을 누르는 손길에 다리를 핥던 것을 멈추고 당신을 바라보다, …
털푸덕! 말도 참 잘 듣는다. 옆으로 침상이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를 내며 거대한 몸을 눕힌다. 손길이 나른한지 길게 눈을 감았다 뜬다.) 뺑. (뭐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한참 그런 당신을 바라보다, 옷깃을 물어 누운 제 쪽으로 당긴다.)
노유진:같이 누우라고? (확실히 누그러졌다. 지금처럼. 인간의 형태였다면 헛소리말라며 이마를 확 밀어내고 너나 자! 소리 쳤겠지만 사슴의 형태를 한 지금은... 못이기는 척 어느새 스르륵 자리를 잡았으니. 여러 제약으로 주변에 동물조차 쉬이 들일 수 없던 그에게 있어선 이런 경험 자체가 생소하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사슴:(……
너무해. 내가 사람이었을 땐 밀어내기만 했으면서.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래도 당신이 옆으로 못 이기는 척 자리하니까. 그 온기에 집중할 뿐이다. 제 옆에 누운 당신을 바라보다 핥아주기라도 하려는 걸까? 혀를 날름 내밀어 당신의 뺨을 두어 번 삭삭 핥았다.)
(따스해. 그리고 네 향기.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다. 눈이 가물가물 감기는 기분이 들었다.)
노유진: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얼른 자기나 해. (입을 밀어내고 어서 잠들라는듯 바닥에 고개를 뉘이게 했다. 비교적 얌전해졌을 뿐 잔소리를 안하는 건 아니었다. 역시나. 다만 그런 얼굴을 보다 옅은 한숨만 한 번 푸욱 쉴 뿐이다. 이렇게 시간이 거릴 줄 알았으면 정무를 볼 것을 좀 준비해올 걸 그랬군.)
사슴:……삐잉. (여기서 인간으로 변하면, 너는 바로 훌쩍 떠나가려나. 적어도 멀어지겠지. …이 모습의 나도
나인데. 밀어내는 손바닥을 또 날름 핥다가 입을 다문다. 인간은 참 이상해. 약속도 어기고 몇 년이나 나를 방치하질 않나, 하지만 그런데도 또 다시 보니까. 계속 닿고 있고 싶고 붙어있고 싶어. 미운 마음이라곤 하나도 들지 않아.)
빼앵. (그건 너라서일까? …천천히 눈이 감긴다. 숨소리가 고르게 새액새액 튀어나온다.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자면 안 되는데. 점점 정신이 흐리멍덩해진다. 온기가 멀어져간다.)
고른 숨소리, 일정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분홍색 털.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신수는 단잠에 빠져듭니다.
부드러운 털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새빨간 상처가 이상하리만치 선명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해야 할 일이 있고, 밤은 아직 멀었으니.
잠든 신수를 두고 나와 문을 닫으려던 때였습니다.
잠기운에 흠뻑 취한 음성이 당신을 배웅합니다.
"'별이 내리는 날'에도 나랑 함께 있어야 해."
그날 밤, 당신의 그림자가 당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사한 것을 전달합니다.
평범한 의원들에게 환에 관한 것을 물었을 땐 다들 짐승의 '피'로 만든 것 같단 말밖에 나오지 않았으나, 전前 연의 일원이었던 의원에게 환을 맡기니 다음과 같은 자료를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심복: 예전 연에서 벗어난 자의 이야기라,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였습니다만….
그래도 충분히 신뢰할 만 해보였습니다.
노유진:(눈을 꾹 감았다 뜬다. ... ... 이 안에 적힌 내용을 이미 알고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 착각이다. 착각. ... 착각. ... ... 약제서를 펼친다.)
[신수들은 어린 아이와 같이 순박하고 사람에 대한 의심이 없어, 피를 청하면 고통을 참으면서 쉽게 내어준다.]
[그렇게 채취한 피나 살은 다른 물은 결코 아니되고, 오로지 신수가 먹는 환양지의 물로 섞는다.]
[피가 세 방울이라면 물은 한 방울이면 족하다. 햇빛에 닿지 않게 이 섞은 것을 그늘에 3일간 보관한다.]
[죽어가는 사람마저 살리는 최고의 환약이 된다.]
[어쩌면 사람의 노화와 죽음을 늦춰줄 것으로….]
네 다리
모두에 새로운 상처가 나 있던 것을 기억하나요, 유진?
당신은 신수의 피와 살로 만든 환이 당신의 어머니의, 그리고 연새하의 목숨을 살려낸 것임을 쉽게 깨닫습니다.
황제의 침상에 놓여져있던 붉은 환. 그리고 근래 타국에서 온 사신들이 온갖 진상품을 들고 오던 연유도 어쩌면….
내 아비께서 노망이 나신 모양이군. (저도 모르게 불충한 말을 중얼거렸다.)
노유진:... ...연새하도 이 일에 가담했다더냐?
심복: …확실치 않습니다. 적어도 연 가는 확실해보입니다.
노유진:이 뒷얘기는 없는건가? 부작용이나. (이런걸 물어야한다는 게 끔찍해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 ... 섭취자의 후유증같은 것.
심복: …그 약제사의 말로, 환은 많이 복용하려 들수록
화를 입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심복: '천상의 것을 탐한 업'이라 말했습니다. 하늘의 것이 인간의 몸에 쌓일수록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요. 그리고 아마도….
…….
폐하께서 그 부작용을 겪고 계시는 것 같으십니다.
당신의 머릿속으로 근래 광증을 주체하지 못하는 황제의 모습이 스쳐 지나갑니다.
낮은 천제의 시간이요, 밤은 신수의 시간이나니.
신수의 기운이 인간의 몸에 조금씩이라도 계속 쌓이게 된다면,
그렇담 그 인간은 해가 떠있는 동안에는 어찌 제정신으로 머무를 수 있을까요?
노유진:어머니께선 이 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지?
다만 황비 마마를 유폐시킨 행동에서 볼 때, 황비 마마께서는 황제 폐하와 반대의 의견을 지니지 않으셨는지, 그리 추측할 뿐입니다.
노유진:... 어머니라면 그리하셨겠지. (자신 또한 크게 다르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서, 손을 내둘러 물러갈것을 은유적으로 전했다.)
이미 예상하던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되니, 기분이 어떻던가요?
그 누구도, '아직' 어떤 죄도 저지르지 않았던 그 때.
어디서부터 일이 이렇게 잘못된 걸까요? 도무지 알 수 업습니다.
드러난 진실과 온갖 잡다한 생각으로서 밤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해가 뜨자마자, 당신이 어떤 계획을 세웠든간, 당신의 일정은 무산됩니다.
당신의 잠을 깨운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람의 비명소리입니다.
당신은 가쁜 발걸음으로 방을 뛰쳐나와 소리의 근원지로 향합니다.
궐의 안에서 도망쳐나오는 것은,
다친 팔을 부여잡은 어의
.
문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절그럭, 절그럭, 쇠사슬 소리가.
만개한 홍매화나무는 피보다도 짙게 물들었고, 하늘하늘 꽃잎 떨어지는 아래로 걸어나오는 것은.
짙은 매화향 사이로 연한 피내음이 섞여듭니다.
경악의 한가운데서 신수는 그저 속삭이듯 말합니다.
그가 당신에게 손을 뻗다 콰당! 발이 묶여 제자리에 털썩 넘어집니다.
비명과 흡사한 사람들의 소리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집니다.
신수의 길고 긴 옷자락 아래로 선명히, 새하얀 발목을 묶어둔 족쇄가 보였기 때문이겠습니다.
누구보다 어리숙해보이고 어리게 굴던 신수의 이 행동 하나가,
신수가 세운 이 나라에서 감히 '신수'를 박대한 황제와, 그런 '신수'가 자발적으로 손을 뻗은 태자의 위치가 얼마나 흔들리게 될지를.
달려나온 황제는 비명을 지르며 대신들에게 들으라는 양 외칩니다.
"하늘이 노할 일이다, 하늘이 노할 일이야!"
신수는 그런 황제를 향해 얼깃 시선을 주나, 다시 당신의 품에서 벗어나려 들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당신과 자신의 모습을 각인시키려는 양 더욱, 몸을 밀착시킬 뿐.
황제의 명으로 급히 사람들이 물러나매, 이 부지에는 이윽고 당신과 신수, 황제 뿐입니다.
신수를 바라보던 황제는 당신을 쏘아보며 말합니다.
제가 대답해야하는 일입니까? (더없이 찬 목소리였다.)
황제:그럼, 네가 아니면 누구에게 내가 물어야 하느냐? (비소에 찬 음성이다.)
노유진:(어디부터 따져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깊은 한숨만 뱉었다.) ... ... 일단 치료부터 해야겠습니다. (하며 신수, 은하를 안아들려했다.)
"어딜 무엄하게 신수의 육신에 손을 대느냐!"
핏발이 선 눈은 그의 분노보다도, 어딘가 피폐한 심성을 곧이곧대로 드러냅니다.
노유진:폐하. ... ... 신수께선 지금 다치셨습니다. 안 보이십니까? (내가 당신을 아버지이자, '폐하'라고 부를 날이 이제 얼마 남았을지.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던 지난 시간이 모두 거짓처럼 느껴졌다.) ... ... 일단은 진정하시고, 치료를 하는게 우선입니다. 폐하께옵서도 많이 놀라셨을텐데 쉬러 들어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신수는 제가 돌보겠습니다.
희영제가 있기 전까지는 제게 맡기겠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의 명을 다시 한 번 언질하며 짚어준다.)
황제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당신과 신수를 번갈아 바라보다, 그가 직접 내린 '명'을 다시금 언급하고서야 한 걸음 물러섭니다.
"신수의 치료를 마치고 화소재에서 안정을 취하게 돕거라."
"그리고 그런 뒤에는…. 따로 보지, 태자."
이윽고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품안의 신수만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올려 당신을 봅니다.
노유진:... ... ... 미안해. (뭐가. 화가 나서? 아니면. 지금까지의 일을 말하는건지.) ... 이제 이런 일은 안 생길거야. ... 내가 막을거니까.
은하:(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겠어, 진. (하지만…. 기민한 짐승의 감은 많은 것을 알려준다.
내가 뻗을 수 있는 자리가 더욱 늘어났구나. 그것에 묘한 기분이 들어 입매가 꿈틀거린다. 두려움에 찬 사람처럼 고개를 숙여, 당신에게서 그 얼굴을 감출 뿐이지만.) 이젠…. 그럼 나랑 계속 있어주는 거야?
그래. (당신이 가장 바랐을 답이 떨어진다.)
은하:(그 말에, …이번엔 확실하게 웃었나. 마냥 기뻤나. 글쎄. 잘 모르겠어. 그저 당신의 옷자락을 더욱 세게 쥐며 어깨에 뺨을 기댄다.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야 넌 이미 나와의 약속을 한 번 어겼잖아.)
(그러니까, 새로운 약속을 들어도 기쁘지 않아.)
……나 다리 아파, 진아. (그저 칭얼거린다.)
노유진:조금만 참아. ... 의원을 부르라고 할 거니까. (일단은 자신의 방쪽으로 향했다. 당신은 제 침소 위에 조심스럽게 앉혀주고, 놀라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시녀 하나에게 의원을 불러오라 이른다. 그리고 당신의 앞에 가, 여전히 절그럭대는 소리를 내는 쇠사슬을 매만졌다. 떼어낼 수 있을까?)
화소재가 아닌 곳으로 이끄는 당신의 모습에 신수는 제법 당황한 모습을 보입니다.
다만 당신의 방에 들어서니, 당신의 향을 맡기라도 한 걸까요? 당신이 쇠사슬이나 상처를 살피는 행동에도 아랑곳 않고 방 안을 둘러보기에 바쁩니다.
은하:(이불자락을 끌어와 코를 박고 킁킁댄다.)
그것을 청하려면 아마…. 다시 황제를 대면해야할 겁니다.
은하:(이불에 코를 박은 채 중얼거린다.) 진 냄새.
…근데 뭐 해? (심각한 표정의 당신을 바라본다.)
이상한 짓좀 그만해. (결국 그러면 안된다는걸 알면서도 콩. 머리에 꿀밤.)
은하:아야! (이불을 놓고 머리를 부여잡는다. 끙,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괜히 발 끝을 까딱거린다. 그럴 때마다 잘그락대는 쇳소리.)
진이 자꾸 이상한 표정을 지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하지만 이번엔, 어쭈. 반박까지 한다.)
노유진:내가 언제 이상한 표정을 했다고... (한대 더? 하는 시늉을 하다 계속 쇠사슬을 살폈다.) 나랑 화소재에서 만났을 땐... 이런거 안 하고 있지 않았어?
은하:(움찔! 머리를 방어한 채 어깨를 수그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자 질끈 감았던 눈 중 한쪽을 살며시 떠 당신을 보는데.) …진이 떠나고 나서 채웠어. 나가면 위험하댔어. 난.
노유진:(누구의 명이었을진 뻔했다. ... 황제와 대면하게 되면 일단 이것부터 해결해야겠군. 생각한다.) 안 답답해? (괜히 이런 것들을 묻고.)
은하:(발끝을 자꾸만 까딱거리거나 작게 돌리는 등 발장난을 친다.) 별로. …어차피 진이 없을 땐 할 것도 없어. (주변을 휘 둘러본다. 이런 주제는 딱히 흥미가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여긴 어디야?
노유진:할 거 없다고 이딴걸 하는 사람이 어디있... (아니다. 원래 이상한 애한테 내가 또 무슨 소릴 하는거람... 하는 생각에 깊은 한숨만 푹 내쉬었다.) 내 방이잖아. 치료만 하면 다시 화소재로 보내줄게. ...내 사람을 붙여줄 거니까 지난 번이랑 같은 일은 없을 거야.
은하:(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당신의 방이란 얘길 듣자 이불을 끌어 다시 코를 박는다. 킁킁.) 그래서 진의 냄새가 났구나.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절그럭, 절그럭. 대놓고 안을 탐방하기 시작한다. 킁킁, 킁킁. 냄새를 맡고 다니다가….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는 개어 놓여진 외투를 집어 코를 박고 또 냄새를 맡는다.)
…….
나 이거 마음에 안 들어. (대뜸 얼굴을 구긴다.)
노유진:... ... 아니. 가만히 있으라니까. (이젠 잔소리할때 딱히 화도 안 난다. 쇠사슬이 불편하지도 않은지 절그럭대면서도 잘도 뽈뽈대고 다니는 모습을 조금 신기하게 바라보듯 하다가 당신의 말에 뭐? 하고선 그 개어 놓여진 외투를 바라본다. 무슨 옷이지?)
찢을 듯 바라보고 있는 옷은…. 그냥 평범한 외투입니다.
단지, 그 옷을 입고 만났던 사람이 문제였겠지요.
당신이 그랬던 과거를 떠올릴 수 있었을진 모르겠지만요.
은하:(눈썹을 좁히고 옷을 바라보다 팍, 바닥에 던진다.)
(그리곤 자기 외투를 벗어 대신 걸어놓는다.)
(그제야 만족한 표정.)
노유진:아니. (패악질에 황당해지기만 하고...)
(하아.............................. 깊은 한숨 뱉으며 바닥에 내팽개져친 옷을 잘 개어 ... ... 일단 눈에 안 띄는 곳에 둔다.)
이상한 짓 하지말고 도로 입어. (외투 내린다.)
은하:(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당신의 행동을 바라보다 외투까지 내려지자. …이번엔 당신의 옷을 들어 제 얼굴이나 머리카락에 부벼댔다. 냄새라도 묻히려는 것처럼.)
노유진:아니 뭐, (하냐고 또 뭐라고 하려다가 말고 저리갓! 대충 밀어둔 뒤에.) 들라하라.
그렇게 들어선 자는 아까 팔을 부여잡고 도망치던 자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고개를 한껏 숙이며, "어찌하여 부름하셨나이까."
노유진:여기 이 여(...인이 아니지.) ... ... 이 분의 다리에 난 상처를 살피고 치료하라.
고개를 숙인 의원은 조심스레 침상에 앉은 신수의 치맛자락을 걷어냅니다.
선명히 보이는 쇠사슬, 그리고, 자해흔과…. 무수한 자상의 흔적.
어의는 미묘하게 굳은 얼굴로 치료를 시작합니다.
이따금 통증에 움찔거리며 미간을 좁히기는 하나, 신수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는 관심사는 오직 당신을 향해서만 있으니까요.
노유진:아니. (당연한걸 왜 묻는담. 싶다가도. 저 무수한 상처들을 보자면 또 마음 한 켠이 답답해져서.) 여기서 자고싶어? (또 어리광을 받아줄듯 서두를 꺼낸다.)
은하:(그 말에 미묘하게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어? …들어줄 거라 생각 안 했는데. 들어주네. 들어주려 하나봐. 욕심만 더 커져간다.) 응.
노유진:(역시나 먼저 물었음에도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는지. 연신 끙. 소릴 내며 알았다. 라는 그 쉬운 말 한마디를 못해 몇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았다만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 또 한참이 지나고서야... .) ... 침구를 하나 더 들여오라 일러라. 가져오거든 옆방에 두고.
은하:(멍하니 당신의 말만 기다리다, 끝내 허락이 떨어진다. …이번엔,
확실하게 기뻐. 네가 내 말을 들어준 건 내가 아파서야? 내가 네 죄책감을 자극해서야?) …진은 바보같네. (아주 자그맣게 속삭인다. 이까짓 상처 아프지도 않고, 내게 있어선 단지 수단인데.)
(다시 또 입매가 꿈틀댈 것 같아 당신의 옷자락을 끌어 당신의 팔을 제 품에 가둬 안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상한 표정을 지을 것 같아.)
어느덧 치료가 끝난 신수의 두 다리는 붕대로 꽁꽁 동여매졌습니다.
"상처가 다리 뿐 아니라 팔에도 있으신 듯 한데…. 이 또한 치료하나이까?"
붕대로 감긴 다리가 이제야 불편한지, 신수는 그저 묘한 표정으로 다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노유진:... ... 모두 함께 치료하라. (옅은 한숨을 뱉었다.)
은하:…나 불편해. 싫어. (꿍얼거리듯 말을 꺼내며 끌어안은 당신의 팔에 고개를 박는다.)
노유진:무시해도 좋다. (라고 쉽게 말하며 이어 하라는듯 손짓한다.)
은하:진. 나 이거 이거 불편해. (라고 말은 하지만….)
신수는 당신에게 착 달라붙은 상태로, 그러나 어의의 치료를 얌전히 받습니다.
생생히 드러나는 시뻘건 상처들. 그 아래 보이는 무수한 흉터가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이윽고 치료가 끝나면 어의는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서고,
붕대가 불편한지 손톱으로 긁어대는 신수와 당신 둘 뿐.
노유진:(상처를 만든 이가 누군지 알게 된 지금 그걸 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다만 마주해야만한다는 사실은 알고있기에.) 뜯지마. (저지하듯 당신의 손을 붙잡아내렸다.) 이거 떼면 약속이고 뭐고 너 갈 때까지 내 얼굴 못 볼 줄 알아. (선전포고까지 한다.)
은하:……. (당신의 말에 입술을 꾹 다물고 노려보기나 하던 신수는, 그러나 입매만 꿈틀거릴 뿐 무어라 반박하지 않았다.) …진은 자꾸 내가
갈 것처럼 얘기해. 왜? (다만 다른 말꼬리를 붙잡고는.)
노유진:(당신의 말에 되레 눈을 꿈뻑거리고는.) 그럼. 안 가려고?
은하:(붕대와 자신이 끌어안은 당신의 팔, 당신의 품, 이어 얼굴을 올려다보다 눈을 깜빡인다. 그리고는 당신의 팔을 스르륵 놓아주곤, 침상 위로 몸을 옆으로 뉘였다.) 내가 가지 않으면….
진에게 더 좋지 않아? (여러 의미로.)
노유진:(침상에 스스슥 몸을 기대 눕는 당신의 모습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그러다 당신의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 눈치채지 못했다는듯 잠시 시선을 돌려 침묵하더니.) 어떤 점이? (하고 되물어왔다.)
은하:(당신을 바라보다,
툭 붕대를 감은 팔 한쪽을 내민다.) 난, 진이라면 뭐든 줄 수 있어. (고요한 눈이 당신을 향한다.) 그리고 그건 진과 진의 주변 사람에게 도움이 될 거야. (지금까지 그래왔듯.)
노유진:(제게 내민 팔을 바라본다. 제
아비도 같은 조건을 들이밀며 당신에게 말했던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이 모든 상처들이 당신이 말하는
뭐든이란 것처럼 들렸다. 그는 내민 손을 바라보다, 시선을 올려 다시금 당신을 바라보았고. 이어서 그 손을 붙잡아. ... 내려주었다.)
넌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돼.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은하:(하지만. 어라? …마주잡는듯 하던 당신은 제 손을 내린다. 이해할 수 없어 되물었다.) ─왜? (당신을 바라본다.) 인간들에게
나누는 건…. 우리의 쓸모고 호의야. 나는 진이 좋으니까, 주고 싶은 건데….
…내가 주는 게 싫어, 진?
노유진:아니. 싫다기보단...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그는 당신 쪽으로 몸을 아예 돌리고 앉았다. 끙... . 고뇌 섞인 신음소리가 잠시 입 안에 머물렀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야. 네가 준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원래 너만의 것이잖아. 그게 정말 호의라면. ... 널 다치게 해선 안 되는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어린 동생을 대하듯 천천히 문장을 읊었다. 그마저도 불안한지 당신을 빤히 보는 시선엔 묘한 불안감이 감돌았다.)
은하:(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뻔히 보이는 표정으로 눈을 꿈뻑, 꿈뻑. 왜 내가 다치지 않게 해야 하는 거지? 모르겠어. 멍하니 당신의 손을 주무르듯 계속 만지고만 있었다. 살며시 시선을 거두며 몸을 뒤척이다가, 다른 손으로 함께 당신의 손을 조물거리며 말할 뿐.) 내일 밤은 나랑 함께 있자, 진아. (…거기다 완전히 다른 말이잖아!) 이제 난 낮에도 너랑 함께 할 수 있으니까…. (서서히 눈이 감긴다.)
노유진:... 아니. 내 말 듣고 있어? (왜 또 딴 소리야! 일어나. 일어나! 그렇게 말하듯 당신이 주물대는 제 손을 빼 어깨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필요 없다니까? 주지마! 강매시키지 말라고! 듣고있어?!
은하:...........................................................................
................................
.........
.....................................쿨….
노유진:.....................................................
아아아아악..................... (비명......)
그렇게 신수는 곤한 잠에 빠져들고, 당신은 어떤 수단으로도 그를 깨울 수 없었습니다.
대체 혼자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정말…. 이 신수는 아예 하늘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인 걸까요?
그렇게 신수를 두고 방을 빠져나오면, 황제의 부름이 당신 앞에 남아있습니다.
노유진:... ... (어떤 식으로든 담판은 지어야만 한다. 부름에 응한다. 단, 이각이 지나도록 자신이 나오지 않거든 불러두라 명하고서.)
직접 호랑이 굴에 발길을 딛는 기분이 이것과 비슷할까요?
미묘한 긴장감과, 그것보다 훨씬 더한 여러 감정들.
윤허함에 안으로 들어서면, 뒷짐을 지고 선 황제가 당신을 돌아봅니다.
과거의 온정은 온 데 간 데 없이 찾아볼 수가 없군요.
노유진:치료를 마친 뒤. (부러 강조하고선.) ... 지금은 곤히 잠드셨습니다.
황제:(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내일이 희영제임은 알고 있겠지.
황제:외국 사신들이 활발히 드나들기 시작하는 요즘과 같은 때에….
유록이 더욱 굳건해지기 위해선 신수의 도움이 필요하다.
신수께서 환양지로 가지 않도록 잘 붙잡고 있어라.
폐하.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합니까?
나는 이 나라의 황제이고, 태자. 너는 곧 황제가 될 자이지.
황제는 언제고 유록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 처럼 보이나?
노유진:폐하께선 어린 제게 신수란 한낯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은 미지의 존재이며 자유를 사랑하고, 세상 그 무엇보다 순수하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무언가에 물들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하셨지요. (너무나도 먼 얘기였다. 그래.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기 전의. 정말, 아득한 이야기.)
폐하, 우리의 신수는. ... ... 여전히 순수합니까?
황제:(당신의 이야기에 그는 마치 두통을 느끼는 사람처럼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눌렀다. 황제는 그 시절의 기억을 아직 가지고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이제는.) 신수께서는….
…….
이미 인간 세상에 떨어지셨다. (그러니.) 이제 돌아갈 수 없겠지.
(그는 꽤 오래도록 침묵했다.)
폐하의 뜻, 잘 알았나이다. (고개를 숙인다. 명 받들겠나이다. ... 그리 말하진 않았다.)
마지막 말은, 문이 닫히는 통에 잘 들려오지 않았지만요.
신수는 모로 누워 몸을 웅크려 새근새근 잠들어있고,
노유진:... ... ... 게 있느냐. (제 그림자를 향해 누르듯 말한다.)
머지 않아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당신의 심복.
그림자 아래 몸을 숨겨 조용히 고개를 숙입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신수를 환양지로 보낸다. (그리하여 총명하고, 사랑받는 태자는. ... ... 버린 것과 다름없는 자식이 되리라.)
알아들었느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말입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떠날지 말지의 결정은 자신이 아닌 은하. 본인이 해야하므로.)
떠날지 말지의 결정은 황제도, 당신도 아닌 은하. 본인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밤이면 신수들이 환양지로 내려오겠고, 그때 열리는 길을 통해 신수는 언제든….
아침까지도 신수는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고 곤히 잠에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당신은 한 곳에 머물러있기가 어려운 상태였죠. 아무래도 이 유록국의 유일무이한 황태자가 아니덥니까.
당신에게 찾아온 손님은 다름이 아닌 태자비입니다.
그 부름에 곤히 잠자고있던 은하가 몸을 뒤척이며 당신의 소맷자락을 붙잡습니다.
노유진:(남의 속도 모르고 퍼질러 잘도 자는구나. 생각하다 태자비가 온다는 소식에 옷을 고치... ... 려다, 제 소맷자락을 붙잡는 손길을 돌아본다.) 곤히 자다 왜 갑자기 일어나느냐? 누굴 좀 만나고 와야하니 여기 있거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은하:……진아아. (잠꼬대처럼 웅얼거렸다.) 어디 가. 나도…. 같이 가…. (눈도 제대로 못 뜨고선.)
노유진:그냥, 더 자라. (한숨 쉬듯 말하며 은하의 몸을 이불로 꽁꽁 묶어 쌈처럼 만들었다.)
은하:............................
...쿨....
결국 당신은 신수를 쌈처럼 묶어두고서야 방을 빠져나옵니다.
복도를 불안히 서성거리고 있던 태자비는 당신을 보자 얼굴을 피며 고개를 숙입니다.
연새하:전하! 잠시, 둘만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노유진:(후. 숨을 몰아쉬기도 전에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에 금방 미소를 덧그리다가... . 묘하게 불안해보이는 모습에 살며시 미소를 지운채 답했다.) 예, 괜찮습니다만... ...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연새하:(초조하게 흔들리는 시선, 조심스레 당신의 소매를 붙잡으려다 주먹을 꾹 쥐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나온 말은.)
신수…님과 관련하여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없는 곳이 있을까요?
노유진:(신수? 연새하가 신수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아니. 할 말이 있을수가 있나...? 문득 의문점이 솟구쳐 살며시 구겨지는 표정을 숨기기 어려웠다. 연새하에게서
안 좋은 향기가 난다는 신수, 은하의 말도 같이 떠오르는 바람에... . 다만, 제가 아는 이 여인은 거짓말이 서툰 이였다. 연정이 아닌 신뢰로 구축된 관계였으니, 그 초조한 낯은 그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 ... 알겠습니다.
(자신의 방으로 들이려했으나... . 은하가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반박자 늦게 깨닫고는 급하게 발걸음을 돌려 옆방으로 향했다. 마땅히 앉을만한 곳은 없어보였으나 급한 일처럼 보였으니 그리 불편하지는 않으리라.) 열 보 떨어져있고, 다른 이들이 이 근처에 오지 않도록 지키거라. (일러두며 문을 단단히 닫아둔다.)
당신의 명을 따른 나인들과 새하의 시종들이 물러가고, 이윽고 단 둘이, 옆 방에 남게 됩니다.
태자비는 의자에 앉지도 않고 불안히 계속 주변을 서성거리다….
결심한 표정을 짓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당신에게 전달합니다.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새까만 날의 단도입니다.
연새하:…저하, 이것은. (입 안이 마르는 것처럼 자꾸만 입술을 달싹였다.)
저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입니다.
저는 이게…. 저하께 아주 유용할 것이라 생각이 되어 가져왔습니다.
노유진:... ... 새하 낭자. 이게 무슨. (구겨지는 표정을 부러 숨기지 않았다.)
신수님과 관련하여 할 말이란 게. ... ... 이것입니까?
연새하:(단도를 든 손이 조금씩 떨리나, 애써 입술을 짓씹으며 떨림을 없애려 했다.) 이건…. 이건,
이건 과거 신수의 뼈를 깎아 만든 것으로…. (기이한 빛이 감도는 눈으로 당신을 본다. 그 빛은 연정인가? 아니면.)
…….
신수에게 무엇보다 치명적인 칼입니다.
이걸로 신수를 찌른다면, 희영제 동안에는 돌아가지 못하실 겁니다. (그리고 연새하는 웃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하였으므로.)
이걸 대체,
어찌. 연 가에서 갖고 있는 것입니까? (어찌 웃을수 있단 말인가? 순간 서늘한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당신의 어미와 아비가 시킨 일입니까? 아니면, 폐하께서, (급히 말을 붙인다. 그래. 연정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순수히 눈을 빛내던 그 얼굴만은 믿고 있었기에.)
연새하:ㅇ, 예?! 저하. (그러나 뒷걸음질치는 모습에 어깨를 움찔 떨며, 연새하는 명백히 당황했다.) 저희, 저희 가문은 신수께 예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
(무언가…. 자신의 뜻이 어긋났다. 그리 생각이 뻗치자 단도를 쥔 그의 손이 다시금 떨리기 시작했다.) 아, 아닙니다! 이것은 제 생각입니다. 제가, 독단으로 아버지께서 지니고 계시던 이것을…. (남의 뜻에 휘둘리는 꼭두각시같아 싫어지신 걸까? 반 걸음 당신에게 다가갔다.)
저, 저하. 저를 믿어주세요! 이것만 있으면 적어도 10년간은…. 이 유록이 그 어느 때보다 태평성대하리라고, 저는….
도움이라면.
내내 앓던 당신이 씻은듯 나은 걸 말하는 겁니까?
제 어미가 그러했듯이.
당신의 물음에 태자비는 영문을 모르겠단 양 얼굴을 일그러뜨릴 뿐입니다.
하오나 그것은 신수께서 지니신 마땅한 성질이시라고, 저희 아버지께서는….
노유진:마땅한 성질. (음절을 짓씹듯이 발음했다. 평생에 걸쳐 감정을 가다듬는 법을 배웠건만. 가까운 이의 배반이기 때문일까. 심란한 마음이 통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분노, 슬픔, 절망. 그 간단한 단어들을 아득히 뛰어넘는, 아주 복합적인 감상들이 제 몸을 집어삼키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노유진은.) 예. (비집고 나오는 따지듯한 문장을 뒤로하고 기꺼이. 연새하의 손을 붙잡아 그가 내민
단도를 마주 쥐었다.) ... ... 어려운 걸음을 해주어 고맙습니다, 새하 낭자. 낭자의 고운 손에 있기엔 너무나 위험한 물건이니 이것은 제게 주시지요. (
빼앗기 위해서. 그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그러기 위해 친히 저를 찾아온 것이지요? (느껴지는 힘과 달리 살며시 짓는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 완벽했다.)
연새하:(변명거리를 찾으려 바쁘게 굴러가던 눈이 간신히 멈추고 당신을 바라본다. 순간 그는 뭔갈 직감한듯 단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지만…. 서서히 손에선 힘이 빠져나갔고,
단도는 너무나 손쉽게 당신의 손 안으로.) 저, 저하…. (위화감을 짚기엔 결코 명확하지 않은 것을, 연새하는 차마 붙잡을 생각도 못하고 어리벙벙하게 말만 더듬을 뿐이었다.)
…예, 예, 저하. (곧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되기 전 사용하시면 될 겁니다. 저는, 아버지의 부름이 있어 이만….
그렇게 '선물'을 쥐여주곤 급히 떠난 연새하와, 남겨진 당신.
손에 들린 흉기의 무게가 어찌 그리 무겁게 느껴지던지요.
옆 방에는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를 신수가 곤히 잠들어 있겠고….
당신의 손엔 그런 신수를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칼이 들려 있습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일이 눈앞을 어두컴컴하게 가립니다.
머지 않아 움직이지 않는 걸음을 옮겨 방으로 돌아가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곧 한쪽 눈을 뜬 신수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은하:…뭐 해? 진….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적대며 다시 눈을 감았다.)
빨리 와서 누워. 같이 자자….
아무 것도 모를 음성이 야속하게만 느껴집니다.
노유진:(태연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에 옅은 한숨만 내뱉는다. 일단은,
단검은 제 품 안에 숨겨두고서.) 해가 중천이니 일어나.
은하:해가 떠있을 동안에는 원래 자야 하는 거야…. (당신이
무엇을 들고 있었고
무엇을 숨겼는지, 하나 모르는 상태로 눈 감은 채 이불더미에 고개만 부빗거렸다.) 빨리 와. 같이 눕자.
노유진:(그 모습에 팔짱만 낀 채 바라보다가.) 습관이 아주 잘못 들었군. (잔소리를 장전하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혼자 있을 때 늘 이렇게 보내는가보지? (당신의 손이 닿지 않을 즘까지만 가까이 와 섰다.)
은하:(그리고 당신의 예상대로, 당신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자 흐느적, 흐느적…. 손을 뻗어 휘저어보지만 당신의 팔이 붙잡힐리가. 결국엔 살그머니 한쪽 눈을 떴다. 눈 부셔. 찡그린 채로.) …왜 가까이 안 와?
노유진:해가 떠있는데도 요 위를 서성이는 팔푼이로 산 적은 없어서. (하지만 행여나 당신의 손이 닿을까 몸을 뒤로 주욱 뺐다가 팔이 멀어진 뒤에야 바로선다.) 오늘 바빠.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은하:팔푼이…가 뭔데? (결국 허공만을 휘적이던 손은 턱, 힘없이 침상 위로 떨어진다. 이젠 다른 쪽 눈까지 떠 온전히 두 눈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
길은 밤에 열리는데?
노유진:... ... 대충 너랑 비슷한 거. (팔푼이같은 얼굴을 가만 들여다본다.) 너만 덜렁 보내고 끝나는 일이 아니니까. 그리고. ... 몇 번이고 말한 것 같은데 난 엄연히 황태자야. 너처럼 천 년이고, 만 년이고 뒹굴며 시간을 낭비할 수 없는 신분이라고. (욕...인 것 같다.)
은하:나? (맹한 눈을 깜빡였다.) 여덟…푼……. (혼자 중얼거려도 그 뜻을 알 수 있을 리가. 당신을 바라보다 끄응, 소리를 내며 뒹굴대던 상체를 일으켜세운다.) 어디 가, 진아? 나도 같이 가?
노유진:(고민된다. 두고가기에도, 데리고 가기에도 영 불안해서... ... .) 따라오려고?
은하:(바라보다 꾸물꾸물, 이불을 걷고 일어난다.) 나도 갈래. 어디로 가?
노유진:일단은 성벽쪽으로. 축제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가장 좋은 장소니까. (물론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면 좀...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속으로 생각하며 그 원인이 될 인물을 빠아안히 보았다.)
은하:(손등으로 눈가를 부비적거리고 선 신수는 당신의 생각일랑 하나 모르고 당신의 옆에 붙어서서 손을 꼭 잡을 뿐이었다. 걸음걸이가 조금 어색해보이긴 했지만.) 성벽? (…이쪽은 화소재를 벗어난 적이 없을 테니, 온통 처음 딛는 곳이겠다.)
노유진:(당연하단듯 제 손을 붙잡는 온기가 어색해 잠시 내려다보았다가,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 통 손끝이 오므라들지 못했다.) 거기서 보면 이 나라가 다 보인다지. ... 반쯤 허풍이지만. 석양을 보기에 그만한 곳이 없다. ... 물론 석양이 아니라 다른 걸 볼 거지만. 분명 말하는데, 중간에 돌아가거나 쉬었다 가자고 해도 안 들어줄거야. 알았어? (단단히 경고한다.)
은하:석양…. 나 알아, 하늘이 빨갛게 되는 때. 그때면 내가 일어나.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단단히 경고하는 당신을 본다.) 쉬었다 가자고만 안 하면 돼?
노유진:(갑자기 몰려드는 불안감.) ... ... ... 그거 말고 뭐라고 할건데?
은하:(오히려 이쪽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노유진:... ... '일단은' 그럼 그런걸로 하자. (불안하다...불안...불안... 아니. 괜찮을거야. 속으로 가다듬지만 계속 불안했다.)
그렇게 이 맹하기 짝이 없는 신수와의 첫 외출을 감행한 당신!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만이 가득한데, 당신의 속 모를 이 신수는 주변이 신기한지 끊임없이 주변을 둘러보네요.
아니나 다를까, 길 가다 나무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 나무 기둥을 품에 안아보질 않나….
길 가다 또 작은 고양이 하나 지나가면 쪼르르 달려가 잡아보려 하질 않나….
대체 이 짧은 시간 무슨 일들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성벽'까진 도달하지도 못한 상태인데 말이죠.
급히 마른 천을 가져온 나인을 통해 물기를 닦아주기야 했지만….
은하:(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 털었다. 물기는 여전히 한가득.)
…추워. (킁.)
진, 나 추워. (말해서 뭐…. 어떡하라고?)
왜... 왜 따라나온거야. (진심으로 중얼거린다.)
…….
은하:어. (그 와중에 또 새를 따라 달려나간다.)
날아간다…. (붙잡히지 않는 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노유진:(부쩍 피곤해진 낯으로 뒤를 따르는 신하에게 이르길.)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거라. 그리고. 그. ... ... 긴 천도 하나. (이건 어디에 쓰려고?)
신하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신수의 눈은 날아다니는 것들에 정신이 팔려 정신이 없고….
머지 않아 신하들에게 연행된 신수는 뽀송해져선 돌아옵니다. 이전에 입던 옷보다 훨씬 간편해보이는 옷을 입기도 했고요.
노유진:(자신과 은하의 손목을.......... 묶는다.)
노유진:이제 네가 방금처럼 멋대로 튀어나가면 내가 다치게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협박! ... 한다.)
어…….
…….
다쳐…? (바라본다….)
나처럼? 많이?
노유진:엄. (그정도는 아니겠지만.) ... ... 조금. 그럴수도 있단 얘기야.
(그러나 많이 얌전해진다.)
(굳이 묶인 손으로 당신의 손을 붙잡기야 했지만. 이 정도면 효과가 상당히 좋은데?)
그리하여 조금은! 조용해진 분위기로 도착한 성벽.
높은 지대에 세워진 것이라 당신의 말대로 한 눈에 유록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어느덧 어슴푸레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하고,
거리의 사람들은 하나 둘 등불을 키기 시작하고,
왁자지껄한 소리가 이곳까지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 싶네요.
저들은 '속사정'을 모르니 아무렴 좋게 흘러가야죠.
다만 당신과 이 옆의 신수는 무슨 생각일지 모르겠습니다.
휘이 부는 바람에 살랑, 살랑, 붉고 하얀 매화잎이 휘날려 떨어지고….
노유진:(흘끔 은하의 표정을 살핀다. 아마, 정말 아무생각 없어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겠지만.)
은하:(알 수 없는 눈으로 저 밑의 백성들을 바라보고 있다. '아무 생각 없어보이는 얼굴'과는 같았지만 조금은 다른…. 미묘함이 있었다.)
(이윽고 자유로운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르킨다.) 저건…. (등불의 빛.)
인간들이 띄운 별이야?
노유진:... (당신의 말이 좀 웃기다고 생각했는지 피식 웃음을 흘리고선.) 그런 셈이지. 해보고싶은가?
은하:나도 별을 만들 수 있어? (고개를 기울이다 곧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본다.) 그럼, 진도 만들 수 있는 거고?
노유진:(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만들 수 있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냐.
은하:엄청 많이 만들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는 별을 하나 둘 헤아려본다.) 인간도….
진도 갈 수 있어? (…어디로?)
노유진:... ... 가? (무슨 의미지 싶어 돌아보며 다시 되물었다.)
은하:(고개를 돌려 당신을 바라본다. 밤하늘의 빛이 눈 위로 서린다.) 하늘로.
그건. 좀.
위험하게 들리는데. (중의적으로.)
은하:왜? (눈이 두어 번 깜빡였다.) 별을 만들 수 있다면…. 인간도 갈 수 있는 거니까…. (이해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지만, 무어라 더 말을 붙이진 않았다. 몇 초간 침묵하다가.)
…….
진. (부른다.)
잠시 어딜 좀 가야겠어. (묶인 손목을 잡아당긴다.) 풀어줘.
간다고? (눈만 꿈뻑... 하다가 좀 불안해져서.) 안 돼. 어디가려고? (괜히 지레 겁먹고서 불안한 시선으로 당신을 본다.)
은하:(불안한 시선을 마주하는 표정은 작은 의아함을 품고 있었다.) 모르겠어.
날 불러…. (손끝을 꼼질거렸다.) 잠깐이면 될 것 같아.
노유진:뭐? (미간을 찌푸린다.) 아니. 뭐가 널 부른다는 건데? (이번엔 이쪽이 손쉽게 놓아주질 않았다. 원래부터 톡 튀듯한 돌발행동을 많이 해온 상대였지만, 어쩐지 이번은 좀 다른 차원으로 불안했다.)
은하:…왜 불안해해? (당신은 뭘 무서워하는 걸까? 하지만, 가야 하는데.) ……. (손을 자꾸만 꼼지락대다 급기야 손을 묶은 천을 혼자 풀기 시작했다.)
노유진:아니, (급하게 막으려고 시도했다.) 자세한 설명을 좀 해보라니까?
은하:(손짓이 막히자 얼굴이 찌푸려졌다. 여전히 천을 풀려 하는 행동은 이어지는 채.) 날 불러….
데리러 온 것 같아. 가서 말해야 해.
…….
왜 자꾸 막아? (성질…을 내는 건가?)
노유진:네가 또 무슨 짓을 하러 갈지 모르니까 그러지. (할 일이 산더미인데. 속으로 몇번이고 고민하고, 고민하다 결국엔.) 정 그러면 같이 가. (이번엔 이쪽에서 동행을 요구했다.)
은하:(삐쭉 튀어나온 입술이 당신의 동행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속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진은 못 가. 인간이니까. (…인간 차별?)
노유진:너는 허구한날 네 마음대로 나랑 같이 간다 안간다 멋대로 정하면서 나한테는 왜 안 된대? (곱씹어보니 좀 열받는다.)
………………………………….
…………………………………………………………………….
음………………………………………….
…………………………….
(뒤돌아 가려다가,) 아. (묶인 천에 당겨 제자리에 선다.)
노유진:(왜... 갑자기 가만히 있지? 일단 본인도 가만히 있어본다.)
은하:(멍…하니 서있다가, 다시 앞으로 걸어간다. 묶인 팔에 힘을 주고.)
은하:(그렇게 향하는 곳은…. 궁궐 옆의
숲.)
(그 언젠가 당신과 처음 마주했던 그곳으로 향한다.)
숲길 속으로 무작정 들어가면, 숲 안은 햇빛이 잘 닿지 않아 점점 더 어둑해지는 것 같습니다.
사락, 사락,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는 와중 풀 밟는 소리만 자그맣게 울리고,
이따금 나뭇잎이며 잔가지가 어깨나 팔을 스치는 통에 짜증이 올라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어딜 가는 건지, 누가 자신을 부른다는 건지….
은하:…
그 날 생각나. (시선은 앞을 향한 채.) 기억해?
노유진:(자꾸만 시야 앞으로 나뭇가지가 달려들어 손으로 가리고 있어야만 했다. 당신의 인영은 흐렸고, 내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는 당최 알 길이 없어서... . 그저 당신의 목소리와, 잡은 손을 방향키 삼아 나아갈 뿐이었다.) 그 날? (계속해서 영문모를 소리만 이어가는 당신을 향해 되묻는다.)
은하:(응. 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아 방향을 짐작할 수도 없었을 텐데,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진이랑 처음 만난 날. (그리고 덧붙이는 한 마디.) 이제는 기억나.
노유진:(이제는? 왜, 이제는. 이지? 그리 생각하며 계속 뒤따른다.) 어, 그러니까. ... ... 네가 지금이랑 다른 모습이었을 때, 를 말하는거야? (사람의 형체가 아닌 다른 것이었던 그 순간을.)
은하:(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전 일까지도. 최근까진 다 잊어버리고 있었거든. 내가 왜 환양지에서 나왔는지, 그리고…. (굵직한 나무 뿌리를 넘어간다.)
어떻게 붙잡혔는지.
노유진:... ... ... (가만 입을 다물었다.)
... ...
어땠는데?
은하:(당신의 침묵을 해석하지 않는다.) 난 진이 숲을 떠나서…. 쫓아가려고 따라갔어. 근데 나가보니까 냄새를 놓쳤어.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눈을 깜빡인다.) 웬 인간들이 날 봤어. 남자들. 그리고 가마에 타 있던
약한 여자애 하나. (묶인 끈이 거추장스러워 자꾸만 손을 꼼질거렸다.)
난 그게 신기해서 다가갔는데 앞에 선 남자가 날 알아봤어…. (느릿느릿 얘기한다.) 그리고 순식간에 붙잡혔어. 그 남자는 무서워. 익숙해보였어….
노유진:(
약한 여자애. 그게 누굴 의미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연가. 어느날부터 황궁을 제집처럼 드나들었고, 끝내 황태자비의 자리까지 고명딸을 앉히던 그들. 그 이후 지어졌던 당신의 감옥. 제 품에 여전히 자리잡은 신수의 뼈로 만든 칼.) ... ... ... 이제 없을 일이야. (당신의 말이 이어질수록 그의 마음에는 확신만이 자리잡는다. 반드시, 너를. 멀리. 아주 먼 곳으로. 도저히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을 곳으로 떠나보내주리라고.)
은하:이젠 없어? (문득 걸음이 멈춘다. 앞을 바라보던 시선이 조용히 당신에게 돌아온다.)
정말?
당신은 어느덧 석양 이후의 온전한 어둠이 이 숲에 한가득 내려앉은 것을 눈치챕니다.
사방이 새카만 와중 신수의 푸른 눈동자는 그럼에도 짐승임을 증명하듯, 빛을 띄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등골을 타고 오르는 기분입니다.
신수가 당신의 팔을 끌어 제 품에 끌어안습니다.
노유진:(본능적으로 그 소란스러움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 고개를 돌리다가,) 엇 ㅡ. (하고 몸이 기운다.)
그러자
휘익
! 날아들어 그의 어깨를 관통하는 건….
은하:(얼굴을 찌푸리곤,) …진, 날 붙잡아.
신수의 모습으로 변한 그가 당신의 옷자락을 물어 휘익, 고개를 들어올려 제 등에 당신을 앉히더니….
노유진:(황태자, 아니. 신수에게 활을 들이민다는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던터라, 멍한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뭐? 대체 어쩌려, 고,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히고, 어지러워졌다.)
끈임없이 날아드는 화살이 신수와 당신의 몸을 빗나가고, 일부는 거대한 몸에 박히기 시작합니다.
무슨 일이 있더래도 여전히 신수를…. 이 땅에 붙잡고자 하는 것일까요.
노유진:(무엇이 정답이든간에 최악인건 마찬가지였다.)
내려왔던 것을 억지로 붙잡아둔 것도 그들이건만, 어찌하여 순리를 거스르며 이따위 짓을 하는지….
은하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니, 분명 짐승의 울음소리인데…. 뜻이 전달되는 이상한 기분.
휘익! 날아드는 화살이 옆 나무에 매섭게 박힙니다.
순간 움찔한 신수가 고개를 숙이며 더욱 내달립니다. 박힌 화살들로 절뚝이는 다리가 위태로운 형상을 그립니다.
노유진:됐고 네 걱정이나 해! (지금 도울 수 있는 건 어떻게든 매달리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며 팔에 힘을 주었다.)
등허리 사이로 꽂힌 화살에 순간, 신수가 크게 앞으로 넘어집니다. 당신도 함께 흙더미 위를 구르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었고요.
몇 초 사이 정신을 잃고 겨우 시야를 되찾으면, 어느덧 인간의 몸으로 돌아온 은하가 땅에 엎어져 있습니다.
한낱 짐승처럼 사냥당한 흔적들이 기껏 갈아입은 새 옷을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노유진:윽! (몸뚱이가 거칠게 튕겨져나가 바닥을 굴렀다. 황태자 된 신분. 가장 귀한 것처럼 길러져 이런 꼴이었던 적은 없었다. 간신히 돌아온 시야에 잡히는 이를 향해 기어 다가간다.)
허억, ... 헉. (정신없는 와중, 서둘러 상처를 살폈다.)
몇몇 화살촉은 부러지고, 몇몇 화살촉은 거칠게 뽑혀있어 피가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은하:(느리게 눈꺼풀을 떨며 뜬다. 흐린 시선으로 당신을 본다.) …진…. (땅바닥을 기어 하얀 손을 뻗는다. 당신에게로.)
노유진:(빌어먹을, 일단은 급한대로 제 옷을 찢어 상처부위 위를 단단히 묶어둔다. 움직이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정신차려봐. 어? (상대에게 의식이 있긴 한지. 급하게 당신의 상체를 안아들었다.)
은하:나, 아. (상처 부위를 묶는 손길에 몸을 크게 떤다.)
아파….
그러던 때 다급히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경계를 세우며 어둠 어딘가를 핏발 선 눈으로 바라본 그 때입니다.
그가 당신에게 무기를 전달하며 고개를 숙입니다.
"폐하께서 연 가에게 명령을 하달하여…. 지금,"
노유진:(그제야 안심한듯 경계를 살며시 풀며 무기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주변을 부산스럽게 살피는 시선은 여전했고,) ... ... 몇이나 따라붙었지?
"열댓 명 정도입니다. 다른 자들이 간신히 막고는 있으나…. 오래 가지 못하리라 생각됩니다."
…묵묵히 그 말을 듣던 은하가 입을 열어 나직히 말합니다.
은하:진, (바닥을 기던 손이 당신의 옷자락을 쥐었다.)
가야 해. 곧이야….
노유진:(초조하게 주변을 살피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을 따라 움직인다.) 곧이라고?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난 여전히 모르겠어. 그치만. 그래도. 네가 하는 일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으니까.) ... ...
(그리하여 노유진은 지금,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을 행하기로 했다. 힘이 빠진 은하의 몸을 제 등에 업은 후 거추장스러웠던 옷가지 몇개로 단단히 제 몸에 동여맨다.) ... ... 어느쪽이야. 말해봐. (어떠한 계획도, 대비도 없이. 사냥터를 향해 몸을 던진다.)
"뒤는 엄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림자는 묵묵히 칼을 빼어들어 당신의 뒤를 지키고, 은하는 짐덩이처럼 당신에게 업혀 고통에 찬 숨을 흘립니다.
힘 없는 손을 들어 가르키는 곳은 어둠, 한 가운데.
저기. (그럼에도 음성은 흔들림 없었다.)
당신은 암흑 속 사냥터를 향해 걸음을 내딛습니다.
잃어버렸던 기억을 모두 되찾은 것 같은 이 신수는, 가쁜 숨만 내쉬며 당신의 등 위에 축 늘어집니다.
노유진:절대로 정신 놓지마, (밭은 숨을 뱉으며 몇 번이고 당부한다.)
그 가운데 당신을 만났던 순간까지도 모두 기억하는.
어쩌면 이 신수를 10년동안 붙잡고 있던 것은 화소궐이란 작은 감옥도, 인간들도, 무엇도 아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로지 당신만이 그의 감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걸어가는 그 끝에 점차 짙은 매화 향기가 스쳐오기 시작합니다.
환하기 짝이 없는 달빛이 거대하게 내려앉은 환양지.
별빛을 한가득 담은 연못은 은하수처럼 흐르고….
거대한 매화 나무는 물 속 그 한 가운데 자라나 하얗고 붉은 꽃잎을 우수수 떨어뜨립니다.
그 아래 앉아있던 것이 몸을 일으켜 한 걸음, 한 걸음, 호수 위를 걸어와 당신들 앞에 다다릅니다.
영명한 푸른 눈을 가진 것이 당신 등에 업힌 은하를 바라봅니다.
푸르르, 우는 소리에 은하가 간신히 눈을 떠 떨리는 손을 뻗습니다.
거대한 신수는…. 묵묵히 고개를 숙여 콧잔등으로 은하의 손을 툭 밀어냅니다.
노유진:(지친듯 정신없이 숨을 몰아쉰다.) ... ... 저게, 너희, 엄마라고? (은하가 좀더 거대한 신수와 가까이 있을 수 있도록 발걸음을 더 가까이 옮겼다.)
신수는 묵묵히 당신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제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입니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그 뜻을 합하여 전달됩니다.
신수: 다시 돌려받으러 왔거늘. 인간의 손에 이미 붙잡혔구나.
노환조의 후손이여…. 내 딸을 데려온 이유가 무엇이지?
노유진:(그의 말에 화들짝 놀란듯 덧붙이길,) 아닙니다! 은하는, 아니. 당신의. 딸은... ... 잠시 인간에게 붙잡혔으나, 이젠 당신의 영역으로 돌려보내고자 합니다. 신수여. 이곳은 당신과 당신의 아이가 머무르기에 너무나 위험한 곳입니다, 그러니... . (은하를 부디 데려가달라고, 그리 간청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눈으로 당신과, 이제는 거의 정신을 잃은 은하를 바라보던 신수는….
신수: 인간들이 무슨 수를 쓴 건진 모르나 이대로는 데려갈 수 없어. 삿된 것이 몸 안에 가득 퍼져서….
노유진:(얼마 남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설마. ... ... 거대한 신수가 입에 담지 않았던 단어를 가늠한다. 파랗게 질리기 시작한 낯은 숨기려고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바, 방도가 없단 말입니까? 무엇이라도 하겠습니다. 이 아이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한낱 인간이 소리높여 외쳤다. 죄책감, 혹은 분노에 둘러싸여 혼란한 음성이었다.)
신수는 몸을 돌려 환양지의 수면 위를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향하는 곳은
신과
가 맺혀있는 중앙의 매화나무.
그곳에서 백색 과실을 입에 물고 돌아온 신수가 툭….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습니다.
신수: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노환조의 후손이여.
신수: 지금 내 딸은 신수의 격을 잃어가매, 미물로 전락하는 중이다. 살리고자 한다면 그 격을 되찾아야 할 터.
신수: 첫째는 자네가 품에 안은 동족의 뼈로 날 찔러 나의 살을 내 딸에게 먹이는 것.
하면 내 격을 딸에게 넘겨주니, 다시 신수임을 되찾은 아이는 하늘로 돌아갈 수 있겠지.
노유진:(제 품을 더듬는다. 단단한 칼의 모양이 손 아래, 제 몸뚱이 위로 느껴졌다.) ... ... 다른 방법은 무엇입니까.
신격을 박탈하는 과실이네.
더는 신수가 아니게 된다면….
몸 안에 도는 것은 더 독이 아니게 되겠지.
인간이,
된다는... ... 말입니까?
당신이 그 자신을 죽이는 선택지를 기꺼이 내어놓고서도 신수는 담담하기 짝이 없는 모습입니다.
은하의 어미 된 이 신수를 죽여 은하를 살리고, 하늘로 돌려보내는 것.
점점 당신에게 업힌 은하의 숨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화살촉을 타고 그의 몸 안에 돌기 시작한 독이 심장까지 가 닿기,
희미한 숨소리 끝, 그가 혼미하게 중얼거립니다.
나 이제 안 아파… 그러니까…. (감각의 소실, 붕 뜨기 시작하는 정신. 간신히 중얼거리다 입술이 닫힌다. 그리고는 다신….)
노유진:(등에 업혀있던 은하의 몸을 내린다. 여린 숨이 점점 멎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이제는 자신을 향해 뻗지 않는 손을 먼저 붙잡았다. 잠시 그는 괴로운듯 얼굴을 찌푸렸고, 곧 거대한 신수를 올려다보고선.) ... ... 청이 있습니다.
신수는 고개를 돌려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저 눈이 애수에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들에게 인간의 생은 찰나와 같을터. 그럼에도. 당신이 사랑하는 아이의 존재를 해치고, 영원할 명줄을 끊어낸 그들과 같은 피가 흐르는 나의 부탁이라고 한들. 그래도. ... ... 이 아이는 당신의 자식이지 않습니까.
내려와 저주를 내려도 좋습니다. (황태자가 입에 올릴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의 분노가 만든 모든 일의 책임은, 제 몫입니다.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 백색 신과를 들었다.) 신수여. 부디. 유록을 찾아주십시오.
저주를 내려도 좋으니 유록을, 인간으로 전락한 가엾은 딸을 찾아와달라고.
신수는 끝내 눈을 감았고, 그 끝에 매달린 눈물방울은 뺨을 타고 흘러 떨어집니다.
윤허하는 답은 없으나 당신은 그 모습에서 신수의 답을 손쉽게 읽어냅니다.
한참 뒤, 어딘가 먹먹한 음성으로 그가 묻습니다.
이름….
자네가 지어준 내 딸의 이름은 무엇이지?
은하.
당신의 딸이 이 땅에 내려올 때 다리가 되었던 별무리의 이름과 같은. 은하입니다.
신수의 눈물은 마르지 않고, 그 길이 마치 쏟아지는 별무리와 같습니다.
신수: …그대는 신수의 가호를 등에 없은 노환조의 후손이니, 그대가 내 딸과 함께 하는 한 신수는 유록을 축복하노라.
생애 어떤 역경도 자네의 걸음을 막아서지 못하며, 어떤 고난도 악몽을 부르지 않으리라.
신수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여 잠든 은하의 하얀 이마를 콧대로 툭 밀어봅니다.
이름을 짓는 것은 상대방과 본인에게 있어 긴밀한 인연의 실을 묶어놓는 행위와 같다 하였으니,
부모와 자식의 연은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하고.
당신이 은하의 거대한 감옥이었음을 짐작하고서도, 그는 당신에게 저주가 아닌 축복을 내립니다.
신수라는 것들이 본디 그러한 존재이지 않습니까.
축복을 내린 신수는 이윽고 별길을 밟아, 환양지를 떠나갑니다.
쏟아지는 별무리가 서서히 희미해지며 환양지의 물은 담아두었던 별빛을 하나 둘 토해냅니다.
이제 이곳에 남은 건 당신과 죽어가는 신수 하나 뿐.
(신수가 떠나는 뒷모습을 눈에 담다가, 몸을 돌려 은하의 곁으로 돌아왔다.) ... ... 하늘로 돌려보내주겠다 약조해주었거늘. (지키지 못하였다. 너는 나를 원망할까? 가만 숨을 몰아쉬는 당신을 빤히 바라보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그래. 원망하고, 분노하라. 그것 또한 자신이 짊어질테니.)
(백색 신과를 한 입 베어물곤 몇 번 우물거렸다. 제게는 아득했던 아주 먼 과거가 떠오르는듯 했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대뜸 주변의 산나물을 뜯어 네 상처를 치료해준다고 설치던 어린 자신이. 너는 나를 만난걸 후회할까. 그 순간 눈이 마주쳤던 과거를 돌이키고자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곧이어 허리를 내려서,)
(입을 맞추었다.)
(백색 신과를 삼킬 수 있도록. 그리하여 당신, 영원하던 삶을 끊어내고 찰나의 존재로 거듭나, 분노와 저주와 함께 나와 살아가달라고. 그리하여 우리, 다시금 생으로 돌아갈 수 있게... .)
사방은 매화 향으로 가득하여, 이제는 피비린내마저 아래로 저물어 사라집니다.
짙은 향기 아래로 백색 신과는 어떤 향이었는지, 어떤 맛이었는지도 느낄 새 없이 은하의 숨결 아래로 넘어갑니다.
그 과정을 증명하듯 핏기 없던 얼굴에 서서히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옷 곳곳을 물들였던 핏방울이 단지 흔적으로 남고,
심장을 죄이던 독이 무엇도 아닌 것으로 돌아갑니다.
조용히 눈꺼풀을 들어올려 맑은 밤하늘을 올려봅니다.
별빛을 담은 눈이 한 차례 깜빡입니다. 이어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어지는 것은 당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표정입니다.
은하:진이다…. (그리고는 또, 하얀 손을 당신에게 뻗었다.)
나…. (멍하니 눈을 깜빡인다.) 왜 살아있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엄마는…?
노유진:... ... 돌아갔다. (이번엔 그 손을 피하지 않았다.) ... 자신의 세계로. (이제는 네 세계가 아닌.)
그리운가?
은하:(눈이 한 차례 감기고 뜨인다.) 갔구나. (허탈하지도, 슬픔이 묻어나지도 않는 음성.) 봤으니까 됐어…. (천천히 몸을 일으켜세운다.)
엄마가 날 불렀어. 그래서 온 거니까, 봤으니까 됐어. (닫힌 별길을 올려다보다 당신을 돌아본다.)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자. 나 아파, 진아.
노유진:널 보러 다시 올 것이다. (당신이 묻지 않은 것을 답해주다가.) 아파? 어디가. 여기? (화살이 박혀있던 자리들을 더듬어 급히 살폈다.)
은하:날? …언제? (고개를 기울이다,) 아야! (더듬는 손길에 움찔 떨며 당신을 노려보았다.) …….
노유진:... ... ... 마, 많이 아프더냐? (노려보는 눈길에 한풀 꺾여 소극적으로 물었다.)
그래, 일단. 일단은 돌아가서 생각하자. (하며 다시 업으려는듯 당신에게 등을 내민다.)
은하:(삐뚜름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다, 등이 보이자 눈을 크게 뜨며 꾸물꾸물 몸을 움직였다. 답싹 달라붙어 목을 끌어안지만 확실히 힘이 많이 빠져있었다.)
진아, (또 부른다.)
돌아가면 같이 잘 거지?
노유진:... ... 네 머릿속에는 정녕 그런 것밖에 없는 것이냐? (어라? 이번에도 안된다는 말은 안 한다. 잘 받아주는데?)
은하:몰랐어, 진아? (느릿느릿 말하며 어깨에 뺨을 기댄다.) 진은 따끈따끈해서 잠이 잘 와…. (그리곤 입술을 다물었다.)
세상을 다스리는 천제께서 친히 손으로 빚어 만든 신령한 짐승. 우리는 그것을
신수
라 부릅니다.
늦은 봄날 한아름 핀 매화를 구경하기 위해 신수들께서 직접 이 땅에 내려오시니, 역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던 인간들을 때마침 가엾게 여겨 은恩을 베풀어주시다….
'사슴으로 말미암은 땅'이라는 그 이름답게 숲 곳곳에 뛰어노는 사슴들로 가득한 이 땅은, 유독 매화 나무가 가득합니다. 유록의 정경은 매화가 피어나는 3월이면 천지가 붉게, 또 하얗게도 물들지요.
그리고 그 매화가 가장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3월 끝자락에는 5년에 한 번씩, 신수가 처음 이 땅에 내려온 날을 기념하기 위한 '희영제嬉映第'을 엽니다.
구전된 전설로는 희영제의 첫 날은 별무리와 함께 신수가 지상으로 내려와 하늘길이 열린다던데…. 실로 그리하였군요.
유록의 유일한 황태자인 당신은 이번 희영제 때에도, 생기로 넘치는 축제를 즐기기보단 인적 드문 숲에 몸을 던져 신비로운 일을 마주하였습니다.
그러나 후회하고자 한다면 5년 전, 바보같은 부탁에 넘어가 신수에게 이름을 지어준 그 날로부터 모든 생을 탓해야겠지요.
밤에서 비롯되었던 한 인연이 이제는 낮까지 번져 당신의 온 시간을 거머쥡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의 등에 업힌 은하는 어느덧 색색 숨소리를 흘리며 곤한 잠에 빠져 있습니다.
희미해져가던 숨소리와는 한참 다른 소리에 살며시 웃음이 새어나왔을지 모르겠습니다.
은하는 인간으로 전락하며 당신과 함께 여생을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