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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EAR&MARPASHI/ORPG 플레이 로그

[2024/유진은하] 반야매화인몽향 플레이 로그

by 여우비야 2024. 10. 26.

 
밤중의 매화는 꿈에 들어와 향기롭다.
 
반야매화인몽향半夜梅花人夢香
 
0. 유록由鹿의 태자
 
세상을 다스리는 천제께서 친히 손으로 빚어 만든 신령한 짐승. 우리는 그것을 신수라 부릅니다.
 
늦은 봄날 한아름 핀 매화를 구경하기 위해 신수들께서 직접 이 땅에 내려오시니, 역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던 인간들을 때마침 가엾게 여겨 은恩을 베풀어주시다….
 
그렇게 세워진 땅이 이곳, 유록由鹿국입니다.
 
'사슴으로 말미암은 땅'이라는 그 이름답게 숲 곳곳에 뛰어노는 사슴들로 가득한 이 땅은, 유독 매화 나무가 가득합니다. 유록의 정경은 매화가 피어나는 3월이면 천지가 붉게, 또 하얗게도 물들지요.
 
그리고 그 매화가 가장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3월 끝자락에는 5년에 한 번씩, 신수가 처음 이 땅에 내려온 날을 기념하기 위한 '희영제嬉映第'을 엽니다. (*즐길 희, 비칠 영)
 
구전된 전설로는 희영제의 첫 날은 별무리와 함께 신수가 지상으로 내려와 하늘길이 열린다던데, 과연 오늘도 그리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 노유진은 유록의 유일한 황태자입니다.
 
오늘은 희영제의 첫 날이나, 당신은 희영제를 즐기기보단 당장 숲 속을 헤매느라 바쁜 상태입니다.
 
근래, 효안 황후의 몸 상태가 급격히 약해졌습니다. 걷기도 어려워질 수준이 되어 당신도 만나지 못하게 된 지 벌써 몇 주가 지났던가요.
 
그러던 중 당신이 나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된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습니다.
 
나인: 그거 들었어? 왜, 사실 환양지還陽池는 희영제 날 진짜 신수가 내려오는 곳이라고도 하잖아.
 
또 다른 나인: 그런데 가끔 신수가 발걸음하시는 그곳에 신과神果가 떨어져있다 하지 뭐니.
 
나인: 그것을 먹이면 어떤 죽어가는 사람이든 살려낼 수 있대….
 
전설로 내려오는 신수가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할까요?
 
신수가 내려오면, 정말 죽어가는 사람도 살려내는 하늘의 과실을 이 땅에 두고 가는지요?
 
다만 당신에게 당장 필요했던 것은 확신보다도 '가능성'이었나봅니다.
 
노유진:(솔깃.)
 
당신은 말로만 듣던 환양지를 찾기 위해 궐 옆의 숲으로 무작정 뛰어들었고, 숲을 헤매고 있는 채였습니다.
 
다리가 욱신거리고 나뭇가지에 쓸렸는지 팔뚝이 따끔거립니다. 날은 어두워져 가는데 이곳이 어디인지, 당최 모르겠습니다. 평범한 아이였다면 닥쳐드는 두려움에 와앙 울어버렸을지도요.
 
지친 몸을 추스르기 위해 잠시 발걸음을 멈춰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때,
 
해까지 전부 저물어 어슴푸레한 푸른빛으로 물드는 하늘 위로 새하얀 별똥별이 하나, 둘, 떨어지는 모습이 당신의 눈에 담깁니다.
 
긴 꼬리를 남기며 떨어져내리는 별빛이 작금의 상황을 죄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워, 당신은 잠시 고개를 꺾어 저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부스럭.
 
옆 수풀에서 들려오는 어떤 이상한 소리만 아니었더라면요.
 
어린 사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면 푸른빛의 눈동자와 딱 눈이 마주칩니다.
 
비단결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털은 분홍빛 매화의 색을 빼닮았습니다. 백매화꽃이 등에 떨어진 것처럼 동글동글한 하얀 무늬가 보입니다.
 
새끼…. 새끼 사슴입니다. 이런 빛깔의 사슴도 이 숲에 있던가요? 어미를 잃은 걸까요?
 
당신에 대한 경계심도 없이 어린 사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자리에 서있기만 합니다.
 
어린 노유진:... ... ... (둥근 눈을 꿈뻑거리기만 하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본다.)
 
어린 사슴:(다가오는 모습에도 어딘가 멍한 사슴은 눈만 꿈뻑이며 제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입을 열어,) …맹! (울었다.)
 
어린 노유진:(얜... 뭐지? 왜 도망을 안 갈까? 생각하며 슥 손을 내밀어 본다.)
 
어린 사슴:(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다 주둥이를 들어 촉촉한 코로 당신의 손바닥을 눌렀다.) 맹! (또 울었다.)
 
어린 노유진:넌 도망가는 법을 모르느냐? (앳된 목소리에서도 나름 황실에서 자란 티가 났다. 슥슥... 턱밑을 쓰다듬어본다.)
 
어린 사슴:(푸르르, 소리를 내며 손길을 받아들이다가, 돌연 싫었는지 고개를 팩 기울이며 타박…. 가까이 걸어가 코로 당신의 배를 슥 밀어낸다. 머리를 스스로 쓰다듬는 것 같기도 했고, 그냥 당신을 밀쳐내려는 것 같기도 했고.)
 
어린 노유진:요상한 놈이로구나. (변덕스럽게 굴긴. 라며 불만스러운 소릴 냈지만, 호기심도 많을 나이, 보드라운 털을 가진 여린 짐승과 이리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건 황태자라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은 여전히 반짝이며 아쉬운 티를 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게냐? (뭘 하고싶어하는지 한 번 지켜본다.)
 
어린 사슴:(뿔도 없으면서 머리로 쓰윽 쓰윽 당신의 배를 밀어내려 드는데, 그냥 품에 안기고 싶은 건지 뭔지. 도통 저의를 알 수 없었다. 뭐든간,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는지 뒤로 물러난 사슴은 당신을 올려다보다, …털퍽.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다리를 핥기 시작했다.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어린 노유진:(고개만 갸웃대며 뭘 원하는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뒤늦게 상처를 발견했다.) 다친게냐? 작은 것이 어딜 그리 쏘다녔는지. (이곳에는 사냥꾼이 없을텐데. 환양지가 있을수도 있단 소문이 있었고, 어린 황태자가 돌아다니는 궐 바로 옆에 있지 않은가. 이 어린 황태자는 세상엔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는 무법자들이 존재한단 사실을 잠시 잊었나보다.)
이리 와보거라. 내가, (하며 주머니를 뒤적이지만 급히 나왔으니 챙겨둔 게 있을리가. 더군다나 연고같은 것은 그와 같은 신분의 인간이 들고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끙... . 졸졸 쫓아다니는 식솔들을 떼어두고 몰래 빠져나온게 이제와 후회된 모양이다.) 아. (곧 주변을 둘러보다보면 큰 나무 옆에 자란 작은 풀잎 하나가 보였다. 그걸 곧장... 입에 넣는다!)
(몇 번 우물대더니, 뱉어내곤 무른 풀잎 뭉치를 상처 위에 조심스럽게 덮었다.) 책에서 보니 이것이 약이 된다 하였다. (암만 그래도 이런 숲에 나는 정체불명의 약을 냉큼 입에 넣다니. 심마니들도 곧잘 헷갈려하는 것이 산나물이 아니던가. 입에 넣자마자 곧장 요절하지 않은 걸 보면 운은 타고났나보다.) 아마 도움이 좀 될 것이다. (묶을만한 걸 찾다가, 이번엔 자신의 머리끈을 풀어 다리 위에 둘둘 둘러주었다. 좀, 엉성하긴 했지만. 아주 뿌듯해보인다.) 됐다!
 
어린 사슴:맹! (쏘다녔다는 말에 뭘 알아듣긴 한 건지 우렁찬 음성으로 운다. 당신이 다짜고짜 풀잎 하나를 입에 넣었을 땐 놀라 벌떡 일어났다가, 뭔진 모르겠어도 상처에 발라주는 걸 보니 자신을 위함인 건 알겠는데….) 맹…. 맹…. (아파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다 툭, 엉덩이가 나무에 닿다 못해 바짝 들렸다.)
(곧이어 엉성하게 묶인 풀잎이 불편했는지 당신의 주위를 다각다각 걸어보는데, 딱 자세가 어딘가 고장이라도 난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어떤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하! 어디 계시는지요!"
 
"태자 저하!"
 
아차! 나인들이 목소리를 높여 당신을 찾는 목소리입니다. 그곳을 바라보다 급히 고개를 돌리면,
 
어라.
 
…사슴은 이미 이 자리에서 떠나간 뒤였습니다.
 
어린 노유진:어어, ... (몸을 숨겨야한다는 사실도 잊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전하!"
 
어린 노유진:앗!
 
그리고 급기야, 헐레벌떡 달려온 나인의 눈에 발각되어….
 
그렇게 짧은 만남을 끝으로 당신은 나인들의 안내를 따라 숲을 벗어나옵니다.
 
그런데 나오는 과정 또한 이상했습니다.
 
워낙 헤매느라 숲의 한 가운데로 깊게 들어간 것 같은데 막상 빠져나오니, 궐의 바로 옆인 것이 아닙니까?
 
돌아온 궐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고,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한가득이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나인들의 손에 발견되었는데도요.
 
만약 당신을 찾기 위해 사람을 푼 것이 아니라면…. 저들은 왜 뛰어다녔던 걸까요?
 
…….
 
옅은 잠에 든 새벽녘, 당신은 문득 어느 '소리'를 듣습니다.
 
퍼뜩 잠에서 깨어난 당신은 복도 저 너머로 누군가가 급히 뛰어나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순간 당신의 직감에 스치는 인물. 혹시,
 
혹시 어머니가?
 
급히 방을 빠져나옵니다.
 
분명 조용해야 할 이 시간대의 궐이 한참이나 어수선합니다.
 
조정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대신들 몇이 숙덕이며 사라지는 모습도 그러하고,
 
촛불이 켜져있는 교선전橋宣殿(*황비의 생활공간이자 침전)도 그러하고요.
 
어린 노유진:허억, 헉, (채비를 그리 중요히 여겼음에도 잠옷 차림으로 궐 안을 쏘다녔다. 생기로 가득해야할 뺨은 창백해지고, 손끝이 찼다.)
 
당신은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급히 교선전의 내부로 무작정 들어갑니다.
 
워낙 흐트러진 분위기 탓에 당신을 미처 말릴 새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문을 연 곳 안에는,
 
효안 황후:─태자!
 
당신의 아버지, 황제와 효안 황후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침상에 반쯤 누운 황후의 낯은 여전히 파리하기만 하나, 당신을 바라보는 눈빛엔 빛이 총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소란은 무엇일까요?
 
어린 노유진:... ... 어, 어머니. (저도 모르게 안심했다. 다행이다. 그런데, ... 그럼. 대체 무슨 일인거지? 슬쩍 올라가던 입꼬리가 애매하게 걸렸다.)
 
효안 황후:…악몽이라도 꾼 모양이지요? 자, 어미의 품으로…. (황후는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로 손을 벌렸다.)
 
황제:…태자. 무슨 일이더냐? 이리 급히 달려오다니. (그때에서야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그때, 당신은 문득 이 공간 안에 황제와 황비 뿐 아니라 '제 3의 인물'이 있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연 대감:…태자 전하를 뵙사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다.)
 
그 자는 이 나라의 개국공신 가문, 연 가의 주인.
 
이 늦은 시각에 그가 왜 이곳에 있었던 걸까요?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어린 노유진:소, 송구합니다. 그게. (궁이 소란스러워서. 그제야 제 꼴을 깨닫고선 부끄러워졌는지 효안 황후의 품으로 숨듯 안겼다.)
헌데, 이 자는 누구이옵니까? (잠이 달아났는지 동그란 눈을 가만 깜빡인다.)
 
황제:(흐리게 웃던 황제는 손을 뻗어 유진의 머리를 쓸듯 덮었다. 그러나 정확한 대답은 없이, 대감을 돌아보며.) 그렇지 않아도 황후의 걱정으로 산을 쏘다녔다 하더니, 잠까지 설친 모양이오. …우리는 자리를 옮겨 마저 대화하지, 대감.
 
연 대감:(알 수 없는 눈으로 유진을 바라보던 대감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뵙지요, 태자 저하. (하며, 황제와 함께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당신은 아직은, 살아있는. 효안 황후의 품에서 쿵쾅거리던 심장을 진정시킵니다.
 
"자, 이 어미와 함께 잠들면 악몽도 찾아들지 못할 것이랍니다."
 
따스한 손길, 따스한 품 안.
 
그런데도 가슴 한 켠에서 이어지는 이 불안은 무엇일지요.
 
어린 노유진:(안정을 되찾자 금세 평소의 묘한 거만섞인 표정을 보였다.) 태자인 제게 이름도 밝히지 아니하고 가다니. 사대부의 배움이 부족한 자입니다.
(옹알대길 몇 번, 그렇게 잠에 들었다.)
 
그렇게 까무룩, 잠이 듭니다.
 
그리고, 다음 날.
 
…….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해 희영제의 둘째 날,
 
유록의 모든 매화가 피처럼 붉게 물들었습니다.
 
1. 꽃의 기상
 
난데없이 유록의 매화가 죄 붉게 물든 사건에 대하여 천제가 노하신 일이느니 무엇이니, 말은 많았습니다만. 시간이 흘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사람들은 점차 입을 다물었습니다.
 
대신 궐 안쪽으로 특별한 일이 생겨나기야 했습니다.
 
네, 숲의 근처로 바삐 오가는 저 인부들 말입니다!
 
듣자하니 새롭게 재齋를 하나 짓는다고 했던가요. 그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지만 직접적으로 밝혀진 사실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이 바로 앞에 있었네요.
 
당신의 어머니, 효안 황후입니다.
 
다행히도 최근 몸상태가 부쩍 좋아진 황후는 그간 만나지 못한 당신이 그리웠는지, 몸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나아지자 바로 당신을 불렀습니다.
 
아직 병색이 남아있지만 훨씬 혈색이 나아진 얼굴입니다. 황후가 꿀처럼 달고 단 목소리로 당신에게 묻습니다.
 
효안 황후:하여, 태자. 희영제의 첫 날에 숲을 헤매었다 들었습니다. 평소에 잘 가지 않던 숲은 왜 향했던 건지요?
 
어린 노유진:앗. (달갑게 품에 안긴것이 무색하게 화들짝 놀라며 몸을 물리고자 했다. 어미가 그리웠던 건 어린 황태자도 마찬가지였는지라, 끝내 멀어지진 않았지만... ) 그것이. ... (머뭇.) 혼내지 않는다 약조해주시면 말씀드리겠사옵니다.
 
효안 황후:(자그맣게 웃던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지요. 감히 이 유록의 태양이 될 태자를 제 어찌 혼내겠습니까만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손길엔 애틋함이 가득했다.) 무슨 일로 향했던지요?
 
어린 노유진:실은... ... (약조한다 일렀음에도 한참이나 머뭇대다 고백한다.) 희영제 날에, 환양지에 신수께서 걸음하시는데 그곳에 신과가 떨어져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물쭈물. 계속 눈치를 본다.)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영약이라기에 어머니께 선물로 드리고 싶어서... (흘끔. 또 눈치.)
 
효안 황후:(순간…. 미묘하게 굳었던 얼굴이 풀어지며 뒤늦게 황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혼내는 반응은 아니었으나, 당신에겐 비웃는 듯 하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숲은 일찍 밤이 찾아드니 다음부턴 가지 않으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있었다면 태자가 아닌 나인들이 일찍이 찾아오지 않았겠습니까? (조곤조곤, 타이른다.)
앞으로 위험할 테니 숲은 가지 않도록 이 어미와 약속하도록 하지요, 태자. 어떠십니까? (하며, 새끼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장난스러운 손짓.)
 
어린 노유진:어, 어찌 웃으십니까! (눈치를 보았던 것이 무색하게 발끈 화를 내며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새끼 손가락을 보이며 하는 말에는 다시금 원래의 기저를 찾더니.) 그치만... . (아무일도 없었는데. 오히려 귀여운 사슴을 만나지 않았던가. 하지만 어째서인지 말하면 안 도리 것 같아 쭈뼛대며 손가락에 제 손을 걸었다.)
 
효안 황후:(새끼 손가락을 걸어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가지 않아야 할 곳은 또 있습니다, 태자.
근래 지어지고 있는 곳을 보았나요?
 
어린 노유진:아. ... 재를 짓는다 들었습니다.
 
효안 황후:꽃 화, 깨어날 소를 붙여 화소재花蘇齋라 합니다. (황후의 미소는 그린듯 아름다웠다.) 그곳은 황제께서만 출입이 가능하신 곳이니, 근처에는 되도록 가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어린 노유진:... 저는 장차 황제가 될 태자인데도요? (삐쭉.)
 
효안 황후:'아직' 황제는 아니지요? (이마 툭!)
 
화소재. 꽃 화, 깨어날 소를 붙인 건물.
 
황제께서만 출입이 가능한, 당신은 발걸음하지 않아야 한다 말하는 곳.
 
몇 주가 채 지나지 않아 완공된 화소재의 입구 곁에는 거대한 홍매화나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경비가 무척이나 삼엄한 화소재는 창문 하나 보이지 않아 도통 안을 들여다볼 수 없군요. 그 안으론 어의와 무사 한 명만이 주로 드나들고, 때때로 황제가 친히 행차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대체 저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이길래 그러는 걸까요?
 
다만…. 이상하게도 밤이 되면 저곳에서부터 아주 짙은, 그리고 아주 단 매화 향이 이곳 동궁까지 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그러하였고요.
 
밤만 되면 잠을 설치니 날이 갈수록 화소재의 안이 궁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인내심이 동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깜빡 잠이 든 사이 꿈에서는 환양지를 찾아다녔던 희영제의 첫 날 보았던 분홍빛 사슴이 나와 당신을 톡톡 건드렸습니다.
 
"맹!"
 
깊은 호수처럼 잔잔한 푸른 눈동자가 깜빡이며 당신을 봅니다.
 
어린 노유진:어라, 너는. (같이 눈을 깜빡인다.)
 
사슴은 꿈 속의 당신의 옷자락을 물어 어딘가로 자꾸 끌고 가려 합니다.
 
그러다 문득, 창문같은 것을 번쩍 넘어 달아나는데….
 
…그대로 당신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어린 노유진:가, 같이 가야, ...? (깼다.)
 
어? 그런데 조금 이상하네요.
 
당신이 창문을 열고 잠에 들었던가요?
 
열린 창문 틈으로 매화 향기가 솔솔 풍겨져 들어옵니다.
 
어린 노유진:(킁킁. 향기가 어디서 오는 걸까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본다. 장소는 확실하지만, 그래도.)
 
자리에서 일어선 당신은 고개를 내밀어 밖을 살펴봅니다.
 
그러자 순간 환한 달빛 아래로 무언가가 눈에 들어옵니다.
 
하얀 빛을 받아 빛나는 분홍색 빛.
 
…사슴. 사슴입니다!
 
그 날 보았던 사슴이 창 너머로 당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린 사슴:푸르르….
 
그런데, 몸 곳곳에 붕대가 감겨있는 채입니다.
 
다친 곳이 제대로 치료된 걸까요? 하지만 그렇다기엔, 수가 부쩍 늘어있습니다.
 
어린 노유진:어어, (순간 목소리가 높아졌다가.) 어찌 이곳에 있느냐? (목소리를 낮춘다.)
(누가 없나 요리조리 주변을 살피고선.) 이리 다쳐서는... 무얼 하고 돌아다닌게야? (들어오라는듯 손짓해본다.)
 
하지만 사슴은 당신과 눈이 마주친 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러자마자 몸을 돌려 화소재의 문으로 쏠랑 들어갑니다.
 
"맹!" 소리를 외치면서요.
 
그리고 그 장면은 무척이나 이상해보였습니다.
 
그렇게 엄중하게 화소재를 지키고 선 수많은 경비가….
 
그 새끼 사슴 하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태연히 제자리에 서 있는 모습이 말이나 되던지요.
 
어린 노유진:어어! (이번엔 분명 소리를 높였다.)
그곳은 황제 말곤 가면 안 된다고 했단 말이다...! (사슴도 해당이 되나? 어린 황태자에겐 그랬나보다.)
(아바마마께 들키기 전에... 라고 말하며 서둘러 사슴을 쫓아갔다.)
 
당신이 반신반의하여 밖으로 나서보면 나인들이며 경비며, 어떤 사람도 당신을 보지 못한 것처럼 그대로 서있기만 했습니다.
 
이따금 밤샘 근무가 졸린지 하품을 하는 자들도 보였고요.
 
이 와중에도 짙은 매화 향기는 당신을 화소재의 안으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아바마마께 들키기 전에.
 
그런 명목으로, 당신은 밤의 화소재에 침투합니다.
 
어린 노유진:(허억, 헉.) ... ... 사슴아, 사슴아! (목소리를 낮춰 사슴을 찾았다.)
 
창문은 없으나, 태자인 당신이 머무는 곳보다 더욱 화려하게 꾸며진 안이 보입니다.
 
특이한 건 그리 공들여 지어놓았음에도 어딘가 답답하게…. 길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내부를 설계해 놓았다는 점입니다.
 
당신이 길을 찾지 못할 적마다 당신을 안내해주듯 저 끝마다 빼꼼빼꼼 모습을 보이는 새끼 사슴이 아니었더라면, 정말 꼼짝없이 이곳 안에 갇히고 말았을 겁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은 게 확실한데 어딜 자꾸 그리 도망가는지.
 
그렇게 끝 길에 들어선 당신은 마지막 문 앞에 섭니다. 분명, 이곳으로 들어간 것이겠지요.
 
어린 노유진:이리 와야한데도, 어딜 자꾸 가는게냐...! 들키면 크게 혼날텐데... (결국엔 짐승이니, 사람의 말을 어찌 알겠는가. 마음이 참 답답해졌다.)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마음과, 들어가야한다는 마음이 공존한다. 들어가지 않아서 사슴때문에 곤혹을 치르는 것. 그리고 들어간 것이 들켜서 혼나는 것... 두 개를 저울질하다, 결국 어린아이의 단순한 생각이 밀려온다. " 들키지 않으면 그만! ")
... ...
으으~!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가본다. 혹여나 안에 사람이 있나없나 바삐 살피면서.)
 
기어이 문을 열자 끼익, 달빛이 문 너머에서부터 새어듭니다.
 
…문 안쪽의 광경은, 마치 숲의 한 곳을 그대로 가져온 양 꾸며져 있었습니다.
 
이 작디 작은 후원의 한 가운데로는 달빛이 둥글게 들어와 있었는데, 높디 높은 천장에 난 하나의 창으로 들어온 그 빛을 받고.
 
한 소녀가 앉아 있었습니다.
 
??:…….
 
새끼 사슴과 똑같은 분홍색 머리카락, 깨끗한 호수를 옮겨담은 것처럼 잔잔하게 흘러가는 푸른색 눈. 입가에 콕 박힌 점과 달빛만치 새하얀 피부.
 
당신과 비슷한 나이일까요. 소녀가 입은 굽이치며 바닥을 장식하는 비단옷은 한 걸음만 딛어도 곧장 넘어질 것처럼 너무도 길었습니다.
 
이 늦은 밤, 잠에 들지 않고 영명靈明하게 뜬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는 소녀가 천천히 손을 들어,
 
??:…색깔.
 
무엄하게도 당신을, 당신의 머리카락을 가리킵니다.
 
??:낮의 하늘, 색이랑…. 똑같아.
 
어린 노유진:(눈만 가만 꿈뻑인다. 왜 여자애가 여기에. 하던 것도 잠시.) 뭐?
(사슴은 어디에 있지? 고개를 돌리며 열심히 사슴의 잔상을 찾다가...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건 소녀도 마찬가지란걸 깨닫고 성큼성큼 다가간다.) 너는 누구냐? (사슴을 간절히 부르며 애달파하던 것이 방금인데, 금방 황태자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여기 있으면 안 된다! 얼른 나가거라! (나도 들어오면 안 되는데 왜 네가 여기에 있어?! 같은 심술도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소녀는 멍하니 눈만 깜빡이며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곧장 대답은 안하고 고개를 돌리며 생각에 잠기기까지. 모든 행동이 느릿느릿하기 짝이 없어 당신의 복장만 터트릴 생각이었나보다.) 나…. (그냥 그렇게 앉아있는 채로, 고개를 들어 당신을 본다.) 여기에 있으랬는데? (누가?)
 
어린 노유진:지금 내가 말하는데 어딜 보는게냐! (방방 뛰며 성만 냈다!) 누가 그리 말했느냐? 아니지. 알 필요도 없다. 어차피 여긴 아바마마를 제외하곤 올 수 없는 곳이니까. 언 놈인진 몰라도 내 신분이 더 높을게다. (흥. 하며 고개를 치켜올린다.) 그러니 잔말말고 일어나거라, 어서! (방방!)
 
??:(멍하니 바라보다, 양 손을 내밀었다.) 나, 손. (…갑자기? 아니, 대답은 않고 대뜸 뭐라 하는 걸까?)
 
어린 노유진:...? (알아듣지 못하고 가만 바라보다가.) 잡아달란게냐?
 
??:응…. (끄덕.)
 
어린 노유진:(일단은 손을 내밀었다.) 장차 황제가 될 이 몸에게, (웅얼웅얼.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그리고 내밀어진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쪽도 두 손을 내민 채였는데, 먼저 잡을 생각은 않고 보기만 한다. 계속. 또 계속. …당신이 잡아주길 기다리는 걸까?)
 
어린 노유진:... ... ... 멍하니 뭘 하고 있는게냐? 어서 일어나래도! (결국 참을성 없는 쪽이 움직일 수 밖에. 두 손을 덥썩 붙잡아 일으키려는듯 당겼다.)
 
??:(하지만 당신이 일으키려고 잡아당기는 듯 하자, 처음으로 호수처럼 잔잔하던 얼굴에 균열이 갔다. 그래, 얼굴을 찡그린 것이다. 그대로.) 가만히 좀 있어봐. (하며, 무려 당신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대로 가까이 서게 된 당신. 당신의 배에…. 고개를 폭 박는다.)
 
어린 노유진:어엇, (어디 감히 황태자에게! 말끝마다 붙이는 소리를 뱉지도 못하고 끌려갔다. 그리고선.)
... ...
지, 지금. 지금 무엇하는 게냐!!! (자고로 남녀칠세부동석이거늘! 이제 일곱이 넘었으니 노유진은 자중을 해야만 했다. 물론, 또래 친구가 없어 이런 모든 행동들이 낯선 것도 있었지만. 허둥지둥하며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내, 내, 내가 누구인지 알고, 건, 건방지게~!
 
??:(그리고 당신이 한참이나 버둥거리자, 눈썹을 안쪽으로 모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당신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품에서 놓아준 건 동시의 일이었다.) 누군데? 네가. (정말 몰라서 물은 것이었지만 당신에겐 다르게 들렸겠지.)
 
어린 노유진:나를 모른단 말이냐?!? (그러는 본인도 상대가 누군지 모르지만. 그치만. 본인은 황태자가 아닌가?! 그는 상대의 얼굴을 몰라도 궁에 온 자라면 응당 황태자인 노유진의 얼굴을 알고, 그의 기분을 맞춰주려 노력해왔다. 그러니 이런 행동 자체가 치욕처럼 느껴져 화가 치밀었다.) 이 몸은 장차 유록의 태양이 될 태자란 말이다! 근데, 근데 너는 계속하여 말을 높이지도 아니하고, 예우를 갖추지도 않고!! (그게 화가 났나보다. 나 황태잔데! 황태잔데!! 억울함이 가득한 고함소리가 가득찬다.)
네 이름을 당장 말하거라. 내일 해가 뜨면 곧장 너를 찾아 혼쭐을 내라 이를것이다! 황명이니, 어서! (황태자에게도 황명을 내릴 권한이 있던가? 어디서 본 것은 많아서. 애초에 혼쭐을 낼테니 이름을 말하라 이른다면 누가 말한단 말인가? 비위를 맞춰주는 것이 하도 익숙하다보니 이리 된 것일지도.)
 
??:(그리고 당신의 그, 분노에 찬 일장연설을 들은 소녀의 반응이 어떠했느냐. 그것은 바로.)
(귀를 틀어막고 눈을 꾹 감고 있기였다!)
(당신의 얘기가 끝나고도 한참 시간이 흘러서야 살며시 한쪽 눈을 떠 당신을 보고, 귀를 막았던 손을 떼어낸다.) 얘기 다 끝났어? 그래서…. 어…. (눈을 도르륵 구르고, 무엄하게도 당신을 손가락으로 가르킨다.) 네 이름은 '태자'야?
…그리고, 난. (이어 당신이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꺼낸다.) 몰라. (눈을 꿈뻑이며 말하는 얼굴엔 거짓이 하나 없었다.) 기억나는 게 없어…. 네 이름을 들으면 내 이름이 기억날까 했는데, 모르겠어.
(그러더니 덥썩! 당신을 붙잡곤.) …그래서 말인데, 난 누구야? (대뜸 묻는다.) 알아?
 
어린 노유진:지, 지금. 지금, (귀를 막은 것이냐?!? 나이가 많았다면 노유진은 지금 뒷덜미를 붙잡고 뒤로 고꾸라졌을 게 틀림없었다.) 아니이, 태자란 것은 내 이름이 아니라. (대체 얘는 뭐지? 의문만 가득차오를 무렵, 덥썩! 붙잡힌다.)
내, 내가 너를 어찌 아느냐! 오늘 여기서 처음 봤는데! (분노보다 당황이 우선시되며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갔다. 뱉어내려는 많은 말은 그렇게 머릿속에서 슬며시 자취를 감췄다.) 진짜로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느냐? 여기 어찌 왔는지도? (백치인가? 뭐, 그렇다면 자신을 모르는 것도 이해는 간다. 황태자란 백성을 굽어살피고, 귀하게 여겨야하는 법이었으니. 뭐. 그정도 온정을 베푸는 것은 당연하지.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목소리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 (멍하지만, 그러나 맑은 시선이 당신을 바라보았다. 마치 사람의 속내를 꿰뚫듯한 눈빛으로.) 그럼…. 네 이름이 뭔데? (그러나 역시 착각인 모양이지.)
(어느덧 분위기가 소강된 듯 하자 뻗을 자리는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 소녀는 다시 손을 뻗어 당신의 소맷자락을 쥐고 제게로 당겼다. 그대로 폭, 일전처럼 가슴, 배 부근에 얼굴을 파묻는다. 붙어있는 게 좋은 걸까?) 길을 잃었어. 돌아가야 하는데 가는 법을 몰라….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리고 여긴 너무 심심하고. 또 외롭고….
 
어린 노유진:(눈 앞에 있는 이 애는 백치다! 그렇게 결론이 들자 이런 행동들이 크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 물론, 몸을 바짝 붙이는 행동에 어중간하게 몸이 굳어버리긴 했지만... .) 내 이름은 노유진이다. (기억이 없으니 길을 잃을 수 밖에. 아무래도 숲을 헤매다 이곳에 들어오게 된 거겠지? 싶었다.) 정녕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것이냐? (이를 어쩌지. 하다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장차 황제가 될 몸이지 않은가. 황제란 백성을 굽어살피는 존재이고. 그러니 곤란을 겪은 사람이 있으면 그것이 해결될 수 있게 돕는 것 또한 황제의 역할! 어쩌면 이건 신께서 그의 황제 자질을 시험하기 위해 내린 과제일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응. 응! 맞을거야. 이 곤혹스런 상황을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정 그렇다면 내 너를 친히 도와줄 수 있다. 저어기, 산 밑에 내가 지내는 궐이 있다. 그곳에 가면 사람도 아주 많고. 거기서 널 아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면 되지 않겠느냐? 없다 하더라도 내가 책임지고 네가 집에 갈 수 있게 해주겠다! (엣헴. 가슴을 당당히 내밀었다. 해결보다는 자만에 취해있는 것 같긴하지만... 도와주겠단 말 만큼은 진심일 것이다.)
 
??:그럼…. 노유진이라고 부르면 돼? (성과 이름을 분리하지 못하고 이름 자체가 '노유진'인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눈을 꿈뻑이며 당신을 올려다보는 표정은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었다.) 기억 안 나. …노유진이, 네가 보였어. 그거 말곤 몰라. (입술을 우물거리다.) 나…. 집으로 돌려보내줄 수 있어?
(침묵하다가.) 근데. 황제라는 사람이 난 여기서 나가면 안 된대. 그래서 난 여기서 못 나가. 그래서 말인데. (어려보이는 외향답게 말을 조리있게 잘 하진 못했다.)
밤의 이곳은 너무 심심해…. (눈을 마주한다.)
나한테 와서 대화해주면 안 돼?
 
어린 노유진:... ... 그냥 유진이라 부르거라. (태자 저하라고 부르라 했다간 "그럼 네 이름은 유진 태자 저하야?", "태자 저하는 뭐고 유진은 뭐야?"같은 질문을 받게 될 것 같았다. 그래, 그래. 이것도 다 시험의 과제니까. 이정도 아량은 베풀어야지.) 아바마마께서? (그럴리가 없을텐데.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닌가? 고개만 갸우뚱거린다. 혹시 대신 중 하나의 딸인가? 비단 옷을 입은 걸 보면 그럴수도... 아니, 그치만 그럼 대체 왜 제 여식을 두고 떠났단 말인가? 의문만 가득하고 결론은 맺어지지 않았다.)
엇, 그치만 나는... (원래 이곳에 오면 안 되는데. 어머니와 했던 약속이 마음에 걸렸다. 손가락까지 걸었지 않은가. 장차 황제가 될 몸인데 벌써부터 거짓을 몸에 익게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이건 황제가 될 시험인데... ... . 끙. 끙. 고뇌 가득한 소리만 낸다.) ... 정녕 나가지 못하는 것이냐? 한 발자국도? 아. 혹시 아픈게냐? 다리를 다친 것인가? (그런거라면, 나가지 못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저가 들쳐업기에 당신은 너무 커다래보였다. 옷 때문이겠지만.)
 
??:…아까는 노유진이랬으면서 왜 갑자기 유진이 됐어? (그리고 당신의 불안을 적중하듯, 이런 말에도 이런 질문이 뒤따르니, 원. 다만 소녀는 일전보다 부드러워진 당신의 태도에 만족하는 듯 했다. 어느덧 소맷자락을 타고 올라간 손이 당신의 손을 붙잡고 꿈지럭꼼지락 매만지기까지 했으니.) 유진의 아바마마가 황제야? 유진은, 나에 대해 황제에게 아무 것도 못 들었어?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이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자 자각하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눈꼬리가 살며시 처지기 시작했다. 고뇌 가득한 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소녀의 손은 당신의 손을 꼬물꼬물 매만졌다. 온 몸으로 이리 감정의 티를 내는 게, 감정을 감추며 살아야 하는 황족과는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응, 아파. 황제가 그러는데, 나는 여기서 오래오래 치료받아야 한대. 보호받아야 한대. 그래서 난 나가면 안 돼….
 
어린 노유진:... ... 그냥 유진이다. (설명은 생략하는게 낫겠군. 나도 백치가 되지 않게 열심히 공부해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 손을 매만지는 손길이 조금 불편했다. 그의 신분이 신분이었고, 아직 나이가 어려 그와 직접 접촉한 사람은 기껏해야 식솔 몇 명과 황제, 황후였다. 여지껏 또래 친구를 제대로 사귀어본 적도 없었고.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자꾸만 손을 빼려는듯 몸이 움찔거렸다.) 너에 대해? ... (기억을 더듬었지만, 역시.) 듣지 못하였다. (걱정할까봐 그런 것인가? 하던 의문은 당신의 뒤이은 설명에 확신으로 변했다.)
아무래도 아바마마께선 내가 걱정할까봐 널 이곳에 두신것 같다. 궐 내에 의원이 왔다갔다 하면 보기 안 좋기도 하고. (어머니께 갈 의원들이 옆으로 새면 안 되기도 하고. 궐 안에 환자가 둘이라니, 음. 정신없겠지. 응, 응. 스스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이 일을 아바마마 대신 해결한다면 그 역시 좋아하겠지? 아마 기특하다며 상을 내리실지도 모른다. 흐흥.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코웃음을 흘린다.) 좋아, 내 가끔 들르도록 하마. 나도 잠을 자야하니 매일 오진 못하겠지만. ... ... 대신 내가 이곳에 왔단 사실은 절대! 결코! 그 누구에게도 말하면 아니된다! 알겠느냐?
 
??:(걱정? 의원? 무슨 얘기인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당신의 손을 놓는 일은 없었다. 당신이 웃는 소리를 오래오래 기억하기 위해 소녀는 눈과 귀를 열어 한껏 당신을 인지하고 있었다. 당신이 웃으면, 그냥 좋다. 그래서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응, 응. (어차피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곤 몇 없었으니까. 헤어질 때가 온 걸 직감했는지 자꾸만 당신의 손을 만지고, 또 매만지다 천천히 놓아주었다.) 가끔 말고. 자주. (투정부리듯 말을 얹기도 했지만.) 기왕이면 계속. (점점 바라는 게 많아지는데?)
계속 와 줘야해, 진아. (그러더니 이번엔 이름 중 또 한 글자를 제 마음대로 빼 이야기했다. 노유진에서 유진이 되었으니, 진도 될 거라 생각한 까닭일까? 호수같이 맑은 눈이 가만 당신을 올려다봤다.) 난 너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달빛 새어드는 화소재의 안.
 
그토록 경비도 삼엄하고 황제의 관심이 쏠리는 중요한 공간입니다만,
 
어째서인지 소녀와 당신만의 '비밀기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은 숨길 수 없었습니다.
 
이 인연이 오래오래 이어질 것 같단 직감이 스쳐갑니다.
 
2. 연連의 딸
 
근래 연家의 사람들이 자주 눈에 들어오는 느낌입니다. 종종 만나뵙는 황제의 안색은 날이 갈수록 피로해지는 느낌입니다. 별개로, 효안 황후의 건강은 더욱 나아지고 있었지만요.
 
그런 사유에서 몇 년을 통틀어 아주 오래간만에, 당신은 황후와 외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적지는 다름 아닌 연 가문입니다.
 
아무리 연의 안주인과 효안 황후가 친우였다지만, 이리 직접 행차하는 건 그만큼 연 가의 위세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연連은, 유록의 개국공신 가문입니다.
 
당시 연의 수장이 태조 노환조를 이끌어 친히 신수와 대면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연 가문엔 '신수'라는 전설에 있어선 어떤 가문보다도 깊이 있는 연구 자료가 수북히 쌓여 있을 겁니다.
 
신수를 신성시하는 유록에선 그것 자체가 어느 권위를 상징하곤 했고요.
 
문득 황후가 말합니다.
 
효안 황후:태자, 오늘은 연의 장녀를 만나게 될 겁니다.
 
…연의 장녀, '연새하'는 약한 몸으로 태어나 최근 들어서까지 병상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대체 얼마나 오래 앓은 건지, 어느 정도의 병증이었냐면 새까만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색이 빠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린 노유진:오래 앓았다 들었습니다만... ... 이곳까지 직접 온 것입니까?
 
효안 황후:연은 그만큼 유록의 한 부분을 지탱하는 기둥이니 말이지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당신을 돌아본다.) 이 어미와 함께 하는 외출이 성에 차지 않습니까?
 
어린 노유진:아, 아니요, 그게, (허둥지둥하며 열심히 부정하다 쑥스러운지 잡은 손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그것이 아니라... ... . (스스로 황태자라 칭하며 고개를 바짝 치켜드는 날이 부쩍 많아졌지만, 이런 순간마다 여전히 아이에 불과하단 걸 보여주었다.) 어, 어머니와 함께 외출하는 것은 아주 좋지만, 그것이. 기껏 건강을 되찾으셨는데 고뿔에라도 걸리실까 하여... (슬쩍 눈치를 살핀다.)
 
효안 황후:(그 모습에 소매로 입을 가리곤 나직히 웃은 황후가 붙잡은 당신의 손등을 부드러이 쓸었다.) 날도 따스하니 고뿔에 걸릴 일은 없을 겝니다. 보세요, 태자. 따스한 날을 증명하듯 꽃향기가 참으로 짙지 않습니까? (물론, 유록의 온 매화가 붉게 물든 일은 무시하고 넘길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린 태자는 몰라도 될 일에 틀림이 없었으니.)
 
머지 않아 도착한 연 가문은 개국공신이라는 명성답게 으리으리한 사택을 자랑했습니다.
 
버선발로 나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연의 안주인과, 그 치맛자락을 잡고 서있는 연새하.
 
막상 마주한 연새하는 최근에서야 병상을 벗어난 것 치곤…. 제법 생기가 도는 얼굴이었습니다. 새하얀 머리카락은 언뜻 분홍빛이 도는군요.
 
"황후 마마와 태자 저하를 뵈옵니다."
 
연새하:화, 황후 마마와 태자 저하를 뵈옵니다…. (따라 고개를 숙였다.)
 
황후가 손을 내젓습니다.
 
효안 황후:그래, 잘들 지냈는가.
 
어린 노유진:(저도 모르게 '연새하'라는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후와 연의 안주인은 따로 자리를 옮기고, 졸지에 당신과 연새하만 이 자리에 덜렁 남습니다.
 
연새하는 당신을 어색해하면서도 계속 시선을 흘긋거리는 것이, 당신에게 조금 관심이 있어보이네요.
 
연새하:(머쓱하니 자리에 서 있는다.)
 
유진, [연새하]와 대화를 나누거나, [연 가문]의 안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어린 노유진:(눈이 마주친 김에 연새하에게 말을 걸어본다.) 네가 연가의 장녀인게냐?
 
연새하:(사람, 특히나 또래를 대해본 적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연새하는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그렇사옵니다. 연의 장녀, 연새하라…. 하옵니다. …하옵나이다, 태자 저하.
 
어린 노유진:(또래를 상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건 그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아무래도 이 방면에선 그래도 내가 우선인 것 같군. 큼. 괜히 으쓱한다.) 너무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연가는 우리 황가와 연이 아주 깊으니, 너는 내 친족이나 다름이 없지 않겠느냐? (엣헴. 옆에 어미가 있는 것도 잊고 평소처럼 거만하게 굴었다.) 오래 앓았다 들었는데, 몸은 좀 괜찮느냐?
 
연새하:(창백하기만 한 허연 얼굴이 그제야 좀 핏기가 돌아 발그레해졌다. 흘끔거리는 시선은 계속해 이어졌으나.) 이, 이렇게 아프지 않은 것은 처음이옵니다. 지금까지는 계속 누워서만 지냈는데…. (손을 꼼지락댔다.) 드, 듣기론 황후 마마께서도 근래 건강이 많이 나아지셨다고 들었나이다. 다행이에요. (어려서 그런지, 말투가 이리저리 뒤엉킨다.)
 
어린 노유진:(어쩐지 노유진은 눈앞의 소녀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래, 그래. 지엄하신 황태자께서 납시면 이리 당혹스럽고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것이 당연하지. 에잇. 근데 지난밤 그 건방진 것은 지지도 않고 그리 눈을 치켜뜨는게... ... 아. 아니지. 큼. 누군가를 떠올리자 미간이 팍 구겨지는 바람에 노유진은 고개를 털듯 저으며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그래, 우리 어머니께서도 최근 건강을 회복하시었지. 신수께서 직접 굽여살펴주시는 것이 아니면 무어겠느냐? 이번에도 아바마마께서~ (하며 현 황제에 대한 자랑질따위를 늘어놓으려다 문득, 연 가문 쪽을 눈으로 훑었다.) 헌데, 이곳엔 너 뿐이더냐? 형제는?
 
연새하:(어쩐지 당신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소녀의 얼굴엔 난감함이 번져가는 것 같았다. 그렇군요. 네, 네.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다, 문득 말이 끊길 땐 자기도 모르게 밝은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형제….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기울이던 연새하는 곧 고개를 저었다.) 저는 외동이옵니다. 태자 저하께서도 그러지 않으십니까?
 
어린 노유진:그래? (이쪽도 고개를 기울인다.) 별 것은 아니고... '외동 딸'이라 칭하지 않고 장녀, 라 칭하기에 형제가 있는 줄 알았다. (어머니쪽을 흘끔 보고선, 이곳에 계속 있다간 방해가 되겠다 생각했는지 먼저 발을 옮긴다.) 헌데, 이곳엔 무어가 있느냐? 좀 둘러보고 싶은데. (연가문 내부를 소개해달란듯 운을 띄운다.)
 
연새하:(먼저 발을 옮기는 당신을 보며 당황한 얼굴을 그리던 새하는 다급하게 뒤쫓기 시작했다.) 아, 그게. 이곳엔….
 
곧이어 연새하의 가문 소개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깊은 곳은 어른들이 들어가면 안 된다 하였지만 [서고]로는 곧장 향할 수 있었죠.
 
…….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는 이곳은 연 가문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한데 모아둔 서고입니다.
 
입구 근처에 놓여있는 [책장]과 [책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어린 노유진:(일단은 책장을 살펴본다.)
 
책장의 책을 살펴보면, 대부분 신수와 관련된 설화가 적혀있는 내용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려운 글이 많아 모든 내용을 습득하는 데엔 무리가 있네요.
 
대신 당신이 읽는 것을 흘끔거리던 연새하가 옆에서 더듬거리며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추가해줍니다.
 
연새하:(우물거리다 말을 뱉었다.) ─저, 저하께서는 낮과 밤이 생겨나게 된 이유를 아시나요? (옛날 얘기라도 해주려는 건지.)
 
어린 노유진:낮과 밤? (동화라도 읊어줄듯한 서두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흥미는 없었지만... ... . 어차피 마침 무슨 말인지 알아보지도 못하겠다. 흥미있는척 고개를 돌린다.) 무어더냐?
 
조금 얼굴이 밝아진 연새하는 자신이 가진 지식을 알려줍니다.
 
천제께서 온 세상 만물을 다스리고 있을 때에, 악한 것들의 범람으로 한참 노고하셨던 까닭에 그는 자신의 힘을 나누어 '신수'를 따로 만들었다 합니다.
 
자신과 다를 것 없는 신수들을 부리어 세상 만물을 다스리기 시작하시니,
 
어느덧 천제는 '낮'의 시간을, 신수들은 '밤'의 시간을 담당하여 세상을 돌보기 시작했다 하는군요.
 
연새하:…그렇게 낮과 밤이 나누어진 것이라고, 아,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끄덕.)
 
어린 노유진:... 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지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내가 천제라면 신수는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버려진 손톱을 먹고 인간으로 둔갑했다는 쥐 요괴만 해도, 인간으로 사는 것에 감사하진 못할망정 몸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천제라한들 나와 같은 힘을 가진 신수들이 내게 대들기라도 하면 큰일인것을. (흥. 오만한 말들을 늘어놓는다. 겸손과 침묵을 익히기에 그는 아직 너무 어렸다.)
 
연새하:…그. 그래도요. 신수께서는 인간들을 위해 역병도 몰아내주시고, 또…. (동화나 다름이 없는 옛 이야기를 입에 담으며 신수들을 변호해보지만, 당신의 귀에 들릴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이어 당신은 책상을 살펴봅니다.
 
책상 위에는 잘 알아볼 순 없지만….
 
아마도 어떤 약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배합하는 방법이 적혀있습니다.
 
당신의 시선이 별 생각 없이 그리로 이끌립니다.
 
햇빛에 곱게 말리고 환양지의 물에 적시기를 세 번 반복한 붉은 매화꽃 여섯 잎,
 
달맞이꽃을 삼일 밤낮으로 우린 물 여섯 방울,
 
그리고 신수의─
 
"저, 저하."
 
그때 연새하가 당신의 앞을 가로막으며 섭니다.
 
연새하가 어색한 미소를 짓고 바깥을 눈짓합니다.
 
"황후 마마께서 저하를 찾으시는 듯 하여…."
 
…정말입니다.
 
때마침 대화가 끝이 났는지 저 멀리서 당신과 연새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당신이 급히 돌아가보면 연의 안주인과 대화를 나눈 효안 황후가 당신을 보며 희미하게 웃습니다.
 
이제 떠날 시간인 모양이군요.
 
효안 황후:(조심스레 당신의 뺨을 어루만지곤.) 지루하진 않았는지요?
 
어린 노유진:(거만하게 굴었던 게 언제였냐는듯 한달음에 달려가 폭삭 안긴다.) 서고를 살피느라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황실 서고에서 보지 못하였던 것들도 많았습니다. (하루 일과를 자랑하듯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황후는 그런 당신을 애정 어린 눈으로 보다, 연의 안주인과 몇 마디 더 나눈 뒤 연 가문을 떠납니다.
 
황후의 손을 붙잡고 따라나서는 당신의 뒤로, 문득 연새하가 갑작스레 당신을 불러세우곤.
 
연새하:태, 태자 저하!
(다소 수줍은 얼굴로.) 저하께서는…. 혹 사슴을 좋아하시나요? (뜬금없는 질문을 건넸다.)
 
…화소전에 있을, 지금도 당신을 기다릴지 모를 소녀 한 명이 생각나는 물음입니다.
 
사슴을 좋아하느냐고? …무어라 답할 건가요?
 
어린 노유진:(좋...아한다. 원래는 말이다. 그렇지만 어쩐지 그 얄미운 얼굴이 연관되는 것 같아 좋아한다. 고 말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서.) 좋아하고 말고, 할 것이 어디있느냐? 한낱 짐승이라한들 이 나리에 발을 붙이고 있으면 먼저 황가의 자손인 나를 받들어야하는 것을. (한마디로, 뭐. 난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닌데~ 걔들이 날 좋아하더라. 뭐. 그런 얘기다.)
 
당신의 답에 연새하는 멋쩍어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 그러시군요."
 
"무사히 돌아가시길, 저하…."
 
돌아가는 길, 만개한 붉은 매화꽃은 이따금 팔랑이며 떨어져 바닥을 수놓습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노라면 꼭 핏자국만 같아, 흐리게 바라볼 수 없는 요즈음입니다.
 
3. 이름
 
천제가 주관하는 낮이 지나가면 신수의 때인 밤이 오매, 이것은 바뀔 수 없는 섭리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또다시 화소전으로 걸음하는 이 행동은, 이 마음은 무엇인가요?
 
동정? 흥미? 여러 것들이 섞였을지도요.
 
짙은 꽃 향을 따라 화소전의 미로를 굽이굽이 해쳐가 문을 열면 저번과 같은 자세로 달빛 아래 앉아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입니다.
 
??:…안녕, 진.
 
그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고개와 시선만 움직여 당신을 본 소녀가 눈을 한 차례 깜빡입니다.
 
??:계속 기다렸어…. 낮이 너무 길다. (그리곤 가까이 와달라는 양 손을 뻗었다.)
 
어린 노유진:진이 아니라... (아니다. 됐다. 그래, 포기했는데 이제와 뭘 또 덧붙인다고. 에휴. 깊은 한숨이나 푹, 내쉰다.) 내가 네 놀이친우라도 되는줄 아느냐? (어딜 오라가라 하느냔 말이야? 맘에 안든단 티를 팍팍 내고선 가까이 가... 긴 하는데 반만 갔다.)
 
??:(그리고 다가오는 모습에 눈을 꿈뻑이며 손을 내렸는데. …왜 오다 말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오다 말아? (소녀는 생각을 생각으로만 두지 않았다. 내렸던 손을 다시 들어, 당신을 향해 뻗었다.) 진…. (손이 공중에서 허우적거렸다.)
 
어린 노유진:... ... ... (또 한 걸음만. 아직도 세 걸음이나 남았다.) 네 건방진 태도를 좀 고쳐야할 것 같아서 말이다. 내게 감사하고는 있는게냐?
 
??:(……휘적휘적. …휘적. 그러다 손을 내렸다. 왜 안 오지? 물끄러미 올려다볼 뿐.) 건방지다는 게 뭐야? 감사한다는 건? (급기야 무릎을 땅에 딛고!)
(당신에게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남은 세 걸음은 무슨, 네 걸음을 좁혀 당신의 다리를 끌어안고 옆에 뺨을 붙였다.) 내가 진에게 왜 감사해야 해?
 
어린 노유진:... ... ... (아프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도 저렇게 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데. 오랫동안 병을 앓은 어미가 있었기에, 노유진은 아픈 사람에게는 참 약했다. 지금도, 원래라면 흥! 하고 더 새침하게 굴어야 하는것을 이렇게나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안절부절하니까.) ... ... 내가 고된 발걸음을 친히 옮겨주었으니 당연히 감사해야하는게지. ... 너는 진정 천치인게냐? (맹한 눈빛을 보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닌 것 같긴한데...)
그러니까, 감사란건... ... (끙. 노유진도 그 정확한 뜻을 알진 못했다. 손가락을 다 펴도 아직 그의 나이에 닿지 않을만큼이나 어렸으니.) ... ... 감사가, 감사지 뭐겠느냐!
 
??:(아픈 건, 확실해 보였다. 생채기 가득한 뺨이 당신의 다리에 닿았을 때 미세하게 얼굴이 찌푸려졌으니까. 다만 안절부절 못하는 당신의 얼굴을 눈치챈 것 같진 않았다. 거대한 호수처럼, 바위가 떨어지지 않는 한 저 표정엔 미동도 없을 테다.) 천치가 뭔데? (그런 요소들과 이런 물음들이 한 데 모여 당신의 의심을 확실하게 만들어주고 있었겠지만.)
……. (꿈뻑.)
(꾸우움뻑.)
감사해. 진. (이게…. 맞아?)
 
어린 노유진:... ... ... ...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한 번, 노유진은 포기했다. ... 이젠 자기가 뭘 포기하는지도 모른채... ... .) 오늘은 좀 어떻더냐. 몸은 괜찮아졌느냐?
 
??:(눈이 도르륵 굴러가다 바닥을 향했다. 말 없이 뺨을 붙인 채 고개만 도리도리 내젓자니, 또 상처가 쓸려 미간은 좁아들었다.) 아파…. 잠이 잘 안 와.
(그리곤 혼자 뭔갈 골똘히 생각하다, 당신을 본다.) 진은 잠 잘 자? (그 잠을 포기하고 여기로 온 것이거늘!)
 
어린 노유진:난 아프진 않다만 누구 덕분에 단잠을 자기엔 글른 것 같은데. (너말야, 너! 하지만 씨알도 안 먹힐 눈치밥이다.) ... 그런데,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게냐? 떨어져, 떨어졋! (다리를 휘적거린다.)
 
??:아픈데 왜 잠을 못 자? (그래. 씨알도 안 먹힐 눈치였다.) 아야! (휘적거린 다리에 종잇장마냥, 소녀는 옆으로 떨어져나갔다. …그대로 옆으로 누운 채 아무런 움직임도 안 보이는 게 참 태평하다고 해야 할지, '천치'답다 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진 않았지만 말이다.)
진은…. 나랑 붙어있는 거 싫어? (옆으로 누운 채 그리 물을 뿐이었다.)
 
어린 노유진:... ... 좋을 이유도 없지 않느냐? (황당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다 에휴. 한숨을 뱉고선 주섬주섬 옆에 앉았다.) 자고로 대화를 할땐 상대의 얼굴을 보고 해야하는 것이다. (예법 선생이 알려준대로 제법 그럴듯한 바른자세를 보여준다.) 덥썩덥썩 다리를 붙잡는 것도 안 돼. (규칙만 마구 늘어놓는다. 황실의 예절 선생이 이럴적엔 그는 아주 질색을 하곤 했었는데, 자신이 딱 그 꼴이었다.) 그리 누워있지도 말고! (잔소리만 많아진다.)
 
??:그렇지만. (미묘하게 눈이 가늘어졌다.) 난 따끈따끈하고, 부드럽고, 또, 누가 그랬었는데. 누가 그랬더라? 예쁘다고…. (없는 기억을 더듬듯 말꼬리만 길게 늘어졌다.)
……. (곧이어 당신의 잔소리엔 꾸물꾸물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당신의 말대로 얼굴을 보고.) 다리를 안 붙잡으면 어딜 잡아야 해? (이런 질문이나.)
 
어린 노유진:... 기억도 없다는게 그런 건 또 어떻게 기억한대. (여기서 들은 얘기인가?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할만한 위인은 없을텐데. 기껏해야 의원이 드나들테니. 따끈따끈하다느니. 그런건 어린애가 할 법한 문장들이었다.) ... ... ... 꼭 어딜 붙잡아야 하는게냐? (눈만 마주한다해서 될리가 없지. 싶었다.)
 
??:몰라…. 들었던 것 같아. 근데 누가 말한 건진 몰라. (그 말을 하곤 조금 우울해진 사람처럼 두 다리를 끌어모으고, 그 위로 턱을 얹어놓았다.) 잡는 게 마음이 좋아. 편해. …진도 따끈따끈한걸. (그런 이유였단 말이야?)
 
어린 노유진:... ... 황태자를 난로취급하는게냐? (콩. 정수리 때린다. 곧 한숨을 쉬더니 옆에 털썩 주저앉아선 팔을 내밀어준다.) 잡을거면 다리 말고 팔을 잡거라. 다리를 잡는 것은 굴욕을 감수해야할 자들이나 하는게다. 정 원하거든 먼저 행동하지 말고, 내게 말을 하고 허락을 받으란 것이다. 알겠느냐? (어린나이에 벌써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배우고 있다.)
 
??:(난로가 뭔데? 라고 물으려다,) 아야! (맞았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마를 부여잡고 있다가, 내밀어진 팔을 쏠랑 잡는다. 굴욕을 감수해야 할 자들이 하는 행동이라고?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응, 잡을게. (...잡고 나서 통보를 한다. 잘 이해한 거 맞아?)
근데 진아, (우물거리다 입을 연다.) 넌 '진'이잖아. (노유진이래도!)
 
어린 노유진:(잘 이해한 거 맞아? 싶었지만 일단은 내버려두기로 했다.) 노, (유진이라니까. 라고 말하다가 또 한 번 그냥 포기하고.) ... 그래. 그게 왜?
 
??:(잡은 팔을 꼬물꼬물대며 만지작대다가, 슬쩍 제게로 당겨 품에 끌어안는다. 덕택에 당신의 무게중심이 이쪽으로 훅 기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난?
난…. 뭐야?
 
어린 노유진:너?
(눈만 꿈뻑거리다가... ... ... .)
넌... ... ... 너지. (그걸 왜 나한테 묻지? 싶다가 기억을 더듬는다.) 너, 네 이름도 몰라? (라고 전에 말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보면 자신은 당신을 부를 때 '이봐', '너', '건방진 것'같은 호칭만 사용해왔었다.)
 
??:(그 말에 눈이 살며시 가늘어지더니, 곧이어 미간이 좁아들질 않나. 입술이 빼꼼 튀어나오지 않나. …그래. 명백히 '불만스러움'을 얼굴로 표현하고 있었다!)
(끌어안은 팔을 다시 제 쪽으로 휙 가져왔다.) 나도, 나도. (그러니까, 뭘?) 나도…. 가질래.
 
어린 노유진:... ... 뭐, 뭘? ... 이름... 말하는게냐? (그걸 '가진다'라고 보통 표현하던가?)
 
??:이름. (그 단어를 찾고 있었던 것처럼 날름 잡아먹는다.) 나도 이름. …나도 가질래. 진아. (그리고 이번엔, 당신을 조르기만 하면 이름이 나온다는 것처럼 당신을 계속 바라만 봤다.)
 
어린 노유진:... ... ... ... 그, 건 보통... 부모가 주는 것인데. (자신의 이름도 스스로 얻은것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자면 말이다. 그러니까.) 기억을 잃은 것이니 기억을 되찾거든 다시 떠올리게 될 것 아니더냐? 부모가 준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가질수도 없는 노릇이고... ... .
 
??:……. (언제나 일직선을 그리고 있던 눈썹이 안쪽으로 천천히 기울기 시작했다.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한 채로, 시위라도 하듯 당신의 팔을 흔들기 시작했다.) 나도. 나도. (흔들흔들흔들흔들.)
 
어린 노유진:아, 아니. 아니이...! 내게 지어달래도 방도가 없다니까아아아... (흔들린다.) 내게 이럴 것이 아니라 네 머리를 붙잡고 흔들란 말이다! (머리! 붙잡는다!) 기억해내봐! 어서! (흔들흔들...)
 
??:내 머릭, (머리! 붙잡혔다!) 기어허어어억을…. (그리고 흔들흔들….)
……. (헉! 뭔가 반응한다! 효과가 있는 건가?!)
우엑…. (다른 반응이었다.)
 
어린 노유진:으아아아아악!!!!
(뭔가가... 밖으로 나왔나?!?)
 
??:에……. (주르륵…하고!)
(침이 나왔다.)
 
어린 노유진:... ... ...
 
??:……씁. (홀랑 삼켰지만, 남은 게 턱으로 떨어졌다.)
 
어린 노유진:... ...
놀랐잖느냐!!!! (딱콩!)
 
??:으에. (어정쩡하게 입을 벌린 채 맞았다.)
…….
아파…. 축축해….
 
어린 노유진:... ... (기억을 찾는다고 해서 과연 달라지는게 있을까? 영원히 백치면 어쩌지? 기묘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오는걸 애써 모른척하고 침... 을 일단 닦아줬다.) 어찌됐건, 이름이란 것은 함부로 줄 수 없는게다. 나는 네 부모가 아니고, 이름에는 아주 큰 의미와 축복이 담겨있는 것이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단 말이다.
 
??:(얌전히 닦인다…. 축축한 게 사라졌어. 눈을 꿈뻑이며 멍하니 턱을 더듬다 당신을 본다.) 난 부모님이 없는데? (…기억이 없어 그런 건 아니고?) 그럼, 그냥 진이 의미랑 축복을 담아서 지어주면 안 되는 거야? 부모가 지어주는 것보다 많이많이 담아주면 되는 거잖아.
 
어린 노유진:그, 그건... ... (그러게. 부모가 없을수도 있구나. 몇 해 전, 아버지의 사찰을 따라가 보았던 더벅머리의 소년을 기억해내곤 곧장 난처한 표정을 보였다. 끙... 소릴 낸다.) 그, 그치만. 난 아직 모르는 글자도 많은데... ... . (늘 자신이 중요한 인물이라 믿어의심치 않지만 정작 중요한 역할을 맡으면 고민이 많아지는 나이였다.) 정녕 내가 지어주길 바라는게냐?
 
??:진, 모르는 글자가 많아? (그 질문에 당신이 마치…. 글도 다 떼지 못한 백치로 보는 사람같이 눈을 떴다. 마주했으면 당신이 아마 발작을 했겠지.) 괜찮아, 모를 수 있지. 내가 대신 읽어줄게. (글은 또 알고?) 응. (다만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은 단호해보이기까지 했다.) 진이 아니면 안 돼. (의뭉스런 말을 남기기도 했고.)
 
어린 노유진:... ... 너보단 많이 아니까 걱정 안해도 돼! (괜히 또 버럭. 이후로도 한참이나 씩씩댔다. 당신의 예상대로.) 이름도 모르는 게 무슨 글을 읽는다고. (흥. 괜히 아픈구석을 콕 찔러 말하는 건 토라졌단 티를 내는 행동과도 같았다. 다만 이어지는 단호한 문장에 그런 기분은 채 느낄새도 없이 흐물흐물 스러져갔고... ...) 하아. (끝내 깊은 한숨을 뱉어낸다.) ... ... 정 그러면, 내가 내일 글공부하는 책을 가져올테니 거기서 네 마음에 드는 글자를 골라보거라. 내가 독단으로 맡길 생각은 말고! 알겠느냐? (절대로 혼자 책임지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
 
??:(한참이나 씩씩댄 당신이 겨우 진정했을 때 소녀는 무얼 하고 있었느냐. 어느새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다가, 살그머니 손을 내리고 있었다. 당신이 '왜' 그런 행동을 보이는진 몰라도 이렇게 하면 귀가 아프지 않단 걸 습득하긴 한 모양.) 모르는 게 아니야. 없는 거야. (또박또박 말하기까지.) …마음에 드는 글자만 고르면 돼? 한 열 개 고르면 되나? (굳은 의지를 보이는 당신과 달리 이쪽은 별 생각이 없어보였다.) 진이 골라줬음 좋겠는데…. (꿍얼꿍얼.)
 
어쨌거나 이름 모를, 아니. 본인의 말로는 이름 없는 소녀와 투닥거리며 시간은 계속 흘러갑니다.
 
이제 당신은 떠나야 할 시간임에도,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뚱한 표정으로 당신의 옷깃을 놓아주지 않아 한참 또 시간이 걸렸었죠.
 
끝내 당신을 보내주면서도 내놓는 말은 예상대로입니다.
 
"내 이름…."
 
"꼭 가져와."
 
언제나 잔잔하던 눈이 뭔가의 감정으로 드글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납니다.
 
4. 편전
 
이름. 이름이라 함은 무언가요.
 
평생토록 그 사람을 정의하는 하나의 단어이자 정체성이지 않나요.
 
보통 이름은 부모父母로부터 지어지는 법입니다만, 화소전의 소녀는 백치임에 틀림이 없는지라.
 
본인의 이름마저 다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버려진 존재라 치기엔 당신의 방보다도 화려한 곳에서 지내는 자가 아니덥니까.
 
어쨌건 이름이란 것에 고민하던 당신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책들을 모아두는 집연集連재로 향했습니다.
 
글공부를 위한 책을 가져간다곤 말 했어도 여기서 더 좋은 자료를 찾아갈 수 있을지 모를 일 아닙니까.
 
유진, [서적]을 살펴보거나, 집연재의 [관리]인에게 관련한 것을 물을 수 있습니다.
 
어린 노유진:(일단 서적을 살펴본다.)
 
신수와 관련한 전설이 유록국에 어떻게 뿌리를 박고 있는지 적어둔 책을 발견합니다.
 
대부분은 당신이 알고 있는 전설이고, 눈에 띄는 것이라면 [개국 신화]와 [매화꽃 이야기] 정도입니다.
 
어린 노유진:(개국 신화부터 살폈다.)
 
유록이 어떻게 세워지게 되었는지. 그 최초의 이야기를 소설처럼 적어둔 글입니다.
 
[…역병이 떠돌고 굶주려 죽는 이가 태산보다 높게 쌓이매, 이러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긴 노환조가 때마침 충신이 전한 소식을 듣고 신수를 찾아뵈었다.]
 
[하늘에 자비를 구한 노환조의 간곡한 음성에 신수는 친히 이 땅을 괴로움에서 구해내었고, 노환조는 그러한 은혜를 땅에 새기고자 나라의 이름을 유록由鹿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이후로는 당신이 아는 이야기가 줄줄 적어져 있습니다. 지루해서 하품이 다 나오네요.
 
어린 노유진:(구할만한 단어는 없어보이는군... ... 태조의 이름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해서 나라의 이름을 줄 수도 없으니. 하. 한숨 쉬고 매화꽃 이야기로 넘어간다.)
 
신수와 매화에 얽힌 전설을 적어둔 책입니다.
 
[신수들이 천제께 받은 신령한 힘으로써 괴로움을 이 땅에서 몰아낼 때, 이미 존재했던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형태를 바꾸어, 다만 사람에게서 떨어져 땅에 박혔다.]
 
[그곳에서 자라난 것은 나무였고, 나무는 어떤 꽃보다 이르게 봄의 첫머리를 장식하며 꽃을 틔웠다.]
 
[사라진 굶주림과 재해는 백색의 꽃으로, 떠나간 역병은 홍색의 꽃으로 피어났으니. 황제는 이 꽃을 매화梅花라 이름지었다.]
 
[홍매화는 무자비한 죽음을 거둬간 신수의 은혜를 상징하므로 '희망'과 '인내함'의 뜻을 가지고 있다.]
 
[홍매화는 죽음을 담아낸 탓인지 추후 꽃이 떨어지고 과실이 맺혀도, 먹을 수가 없다.]
 
…그러고보면 올해의 매화꽃은 다 붉게 물들어버렸다고들 했죠.
 
무슨 일인지 정확힌 알 수 없으나, 이런 걸 보면 불길한 징조로 여겨도 무리가 없을 것만 같습니다.
 
어린 노유진:(이런 상황에서 매화란 이름을 줄 순 없지. 하. 또 한 번 깊을 한숨을 내쉰다.)
(일단은... 관리에게 다가간다.) 그, (뭐라고 하지. 이름 지을건데 추천할만한 책이 있느냐고?) 엄. (무슨 이름을 짓느냐고 하면 뭐라고 하지? 짐승을 주웠다고 하면 분명 궐로 데려오라고 할텐데...) 그게... (노유진의 머릿속은 매우 바삐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마 관리가 보기에는 황태자가 대듬 찾아와 어, 음. 그. 같은 의미없는 소리만 내고 있는 중이었다.)
 
책을 정리하던 관리가 황태자의 부르심에 친히 몸을 굽힙니다만은,
 
당신의 애매모호한 반응에 고개가 절로 기울어집니다.
 
관리: 찾으시는 책이라도 있으신지요, 저하? (조심스레 물었다.)
 
어린 노유진:그................... (생각이 매우 많은 표정.) ...........
...........
'그것' 보았는가? (이런 방법을 채택한다.)
 
관리: (덩달아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 그것………………말입니까?
그것……………………
…………………….
그것이라………………………….
 
어린 노유진:..................
그. 그래.
..............
그것! (미안해. 라고 생각중이다.)
 
그러며 관리가 슬쩍 꺼내온 책은!
 
[궁녀들의 익명 인기 투표집~누가누가 최고신랑감인가~] 입니다.
 
어린 노유진:.................
 
관리: 큼! (멋쩍어하는 기색.) 조심히 읽으십시오.
 
어린 노유진:(팍!!!!!!!!!!!!!)(바닥에 던졌다.)
 
관리: 이 책만 있다면 태자 저하께서도 이제 인기가아아!!!
 
어린 노유진:이거 말고 !!!!!!!!!!!!! (미안함은 가시고 분노.)
 
관리가 허둥지둥 책을 줍습니다. "이 귀한 자료가!"
 
관리: 아니, 그러면 대체 무얼 찾으시는 겁니까?
 
어린 노유진:이런 불손한 책을 이런 곳에 숨겨두고 봐왔던게냐? (험악하게 구겨지는 '황태자' 얼굴!)
 
관리: (관리는 그 사이 스리슬쩍 당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책을 옮겨둔 뒤였다.) 한창 황태자 저하 나잇대의 아이들에게 어울릴 책이라 생각하였습니다만…. 아니면 이건 어떠십니까? 바리공주 이야기나 아니면…. (동화책같은 것도 말고!)
 
어린 노유진:궁녀들에게 인기가 많은게 뭐가 나와 어울린단거지? 아홉의 나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는겐가? 한 자라도 더 많은 학문을 익히고 식견을 넓혀부모의은혜를알고공경을이해하여훗날어떤어른으로자랄것인가를정하는아주중요하고신중한시기이거늘이런시간을저딴불손한책을읽는데허비하리라고생각하다니이런불충한자를ㅡ (잔소리잔소리잔소리...)
난 어린애가 아니야!!!!!!!!!!! (팍!!!!!!!!!!!2)
 
관리: 으아아악─!!! (소중한 책이! 주섬주섬.)
(이젠 거의 울고 있었다. 흑흑.) 하여 원하시는 책을 말씀해주시면 좋았을 것 아닙니까! 저하께서는 대체 무얼 원하시는 겁니까?! (소중하게 동화책을 품에 끌어안았다. 어린애들 마음은 정말 모르겠다니까…라고 생각 중인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어린 노유진:됐네!!! 자네에게 물을 바에는 나 혼자 찾는 것이 훨씬 낫겠어! (씩씩대며 책 바리바리 싸들기 시작했다. 일단은 이름과 관련한 책들. 전설에 대한 책들도 몇가지. 그리고 나가기 전에 휙 돌아봐 관리를 쏘아보더니.) 이 일은 아바마마께 고할테니 각오하도록 해! (청천벽력같은 소릴 남긴다.)
 
"끄아아아아! 저하아아아…!!!"
 
같은 소리가 뒤에서 울려퍼지지만, 아무렴 어떻습니까.
 
저 불충한 자는 이제 황제의 손에 아주 혼쭐이 나겠죠!
 
그렇게 당신은 바리바리 책을 싸들고 나갑니다.
 
하지만 화소재에 찾아가기로 약속한 시간은 밤이니까요, 시간이 남아 갈 곳이 없던 당신은 잠시 당신의 침소에 들립니다.
 
[작명서]와 전설과 관련된 책들이 여럿 눈에 들어옵니다.
 
완전히 관련이 없는 책도 몇 개 걸렸군요.
 
펼쳐보면, 윽. 당신이 읽을 수 없는 글자들로 가득한 책입니다!
 
어린 노유진:..............................
이, 이, 이럴수가. (이 내가 모르는 글자가 이렇게나 많다고?!? 인정할 수 없어!!!!!! 부들부들 손이 떨린다.)
 
예시로 어떤 시를 살펴보면,
 
公無渡河歌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
 
어린 노유진:...................
 
그러니까, 저건 없을 무이고.
 
하? 아니, 죽을 사는 알겠는데.
 
어…….
 
어린 노유진:.... 고. 공... 무...
공. 공무... ............. ........ 가. 공......초..........................가?
그........그.....가.........서......녁? 아, 아니. 이건 그 글자가 아니라........ (중얼중얼중얼...)
............
 
그때, 바깥에서 나인의 부름이 들려옵니다. "저하, 황후 마마께서 부름하셨나이다."
 
어린 노유진:(기쁘게! 접는다.) 그, 그래? 그럼 얼른 가야지. 암! (허둥지둥 빠르게 빠져나간다.)
 
기쁘게 책을 접은 당신이 기쁘게 침실을 나갑니다. 아직은 공부보다 놀러다니는 게 더 좋을 나이이지요.
 
황후의 부름에 빠르게 걸어간 당신은, 다정히 웃는 황후를 마주합니다.
 
당신을 부른 황후는 하루간 있던 일을 물으며 나인에게 일러 다과를 내오게 합니다.
 
효안 황후:해서, (자리에 당신을 앉히곤.) 집연재로 갔다 한 관리를 울렸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옛?!)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건가요, 태자?
 
어린 노유진:(헉.) 제, 제가 울린 것이 아닙니다! (억울했다! 아마도?) 그 자가 일을 게을리하여 아버지께 고하겠다 했을 뿐입니다. (흥!) 그런 것에 울다니 자리가 아깝습니다.
 
효안 황후:(당신의 반응에 후후 웃은 황후는 그저 당신의 뺨을 한 차례 쓸어줄 뿐이었다.)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요 근래 수업 때 집중하지 못하고 있단 얘기를 들은 것 같았는데요. (당신의 잠이 부쩍 줄어든 탓이었다.)
 
어린 노유진:그. 그건. (이번만큼은 기세가 꺾인채 눈치를 보았다.) 그것이... ... ... (어머니껜 솔직히 말하는게 좋을까? 하지만 그랬다간... ... .) 자. 잠을 설쳐서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걱정되어서... (거짓과 진실을 섞어 답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어린아이일 뿐이니. 어른이 보기에는 티나는 거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효안 황후:잠을 설쳐요? (고개를 슬쩍 기울이던 황후는 곧이어 살며시 웃음지었다.) 이제 이 어미는 괜찮아질 거라 이야기했지요? 황제 폐하께서 귀한 약재를 찾아주시어 거의 나아가고 있는 상태랍니다. …혹 악몽을 꾸는 건가요, 태자? (걱정스런 시선이 당신에게 향했다.)
 
어린 노유진:(귀한 약재? 자세히는 모르지만 몇 년이나 앓던 어머니를 낫게 해주셨으니 신묘한 약이란 것만은 확실해보였다.) 그. .... 그런 것 같기도... (확실히 악몽같은 사람이기는 했다. 계속해서 애매모호한 대답만을 이었다.) ... 그, 어머니, 그 약재란 것은 만병통치약 같은 것입니까? (문득, 그 약을 조금 얻어다준다면 밤마다 자신을 괴롭히는 그 아이의 백치병()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효안 황후:만병통치약…이라 묻는다면, 그래요. 아마 그런 약재라 생각이 들 정도이긴 합니다. (작게 웃었다.) 하나 정확한 약재의 이름이나 효능은 모르니, 자세한 건 폐하께 여쭈어봐야 알 수 있겠습니다. (어깨를 으쓱이곤 다시금 당신의 뺨을 쓸어준다.)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는지요, 태자?
 
어린 노유진:아.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또 눈을 굴린다. 이번엔 뭐라고 답해야할지.) 어머니께서 이렇게 금세 나아지셨으니, 저도 공부하고,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 여쭸습니다. 여력이 되거든 백성들께도 나눌 수 있으면 좋을것이고, 또... (이런저런 핑계를 늘어놓다 폭삭 뛰어들듯 안긴다.) ... ... 또 아프지 마셔요. 제가 얼른 자라서, 어머니를 꼭 지켜드리겠습니다.
 
효안 황후:(뺨을 쓸던 손이 조심스레 당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귀한 것을 다루듯 애정이 가득한 손길. 곧이어 뛰어드는 작은 몸을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어릴 때만 누릴 수 있는 일이 있답니다, 태자. 하니 너무 일찍 자랄 생각일랑 마시지요. (일정한 속도로 등을 토닥거렸다.) 얼른 자라고 싶은 마음에 집연재라도 간 겁니까?
 
어린 노유진:저는 황태자인데도요? (어릴때만 누릴 수 있는 것은 원래 어릴때는 모르는 법이지. 어릴수록 자라고 싶어하고, 늙어갈수록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자 한다. 황태자라 한들 마찬가지였다. 연약하고, 지켜줘야하고, 보호받아야하는 제 입지에 불만이 새겨졌다.) 아직도 공부할 것이 아주 많았습니다. (더듬더듬 읽어야만 했던 서책의 글귀들이 떠올라 괜히 더 얼굴을 묻는다. 평화로움에 취하듯 가만 눈을 감았다.)
 
평화로움에 젖은 시간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몸이 회복된 황후와 함께 잠드는 밤이 당최 얼마만의 일이던가요.
 
잠들 적, 황후는 당신에게 옛 이야기를 하나 꺼내 들려줍니다.
 
그것은 한 해에 한 번 밖에 만나지 못하는 연인의 이야기.
 
매년 칠월 칠석은 두 별이 은하수를 가운데에 두고 그 위치가 매우 가까워지는 시기인데, 그런 사실을 기반으로 생겨난 설화라고 하죠.
 
먼 옛날 천제의 손녀로 길쌈을 잘 하고 부지런하던 직녀는 은하수 건너편의 목동, 견우와 혼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신혼의 즐거움에 빠져 맡은 일을 게을리 하였고, 천제께서 노하시어 그들을 은하수를 가운데에 두고 다시 떨어져 살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한 해 중에 칠월 칠석날 하루만 같이 지낼 수 있었다고 하였죠.
 
한데 은하수 탓에 칠월 칠석날도 서로 만나지 못하자, 보다 못한 지상의 까막까치들이 하늘로 올라가 머리를 이어 다리를 놓아 주었다고 합니다.
 
그 다리를 ‘까막까치가 놓은 다리', 즉 ‘오작교(烏鵲橋)’라 하여….
 
칠석이 지나면 까막까치가 다리를 놓느라고 머리가 모두 벗겨져 돌아온다고 하였죠.
 
세상에 이런 이상한 이야기가 어디 있던지요?
 
천제께서도 참 속이 쫌생이 같으시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5. 반창瘢瘡
 
유록의 온 땅을 뒤덮고 붉게 피어난 매화는 오늘도 달빛을 받아 탐스러운 빛을 냅니다. 고개를 들면 밤하늘은 화려한 별빛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저 끝에서부터 벌써 동이 터오려는 양 어슴푸레 해가 떠오르고 있네요. 피로가 누적되었는지 평소보다 시간이 훨씬 늦어버렸습니다.
 
다만 당신의 품에는 책이 안겨져 있습니다. 이름을 지어주겠다 약속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하니 오늘도…. 가야겠지요.
 
잠든 황후는 당신이 품에서 사라진 지 모르고 곤히 잠들어계실 겁니다.
 
당신은 오늘도 경비의 눈을 요술처럼 피해, 화소재 안으로 들어섭니다.
 
…….
 
??:…왔어?
 
재회한 소녀의 안색은 묘하게 좋지 않습니다. 팔뚝을 매만지던 소녀가 고개를 돌려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 당신을 마주합니다.
 
??:오늘은 좀 늦었네, 진.
 
어린 노유진:(오늘 어쩐지 안색이 안 좋은 것 같기도 한데.) ... 어디 아픈게냐? 낯빛이 어두운데.
 
??:……. (입술을 우물거렸다.)
이름…. 내 이름은?
지이인. (손을 뻗었다.)
 
어린 노유진:(일단은 옆에.. 앉았다. 또 다리를 붙잡히면 안되니까.) 알았다, 알았어. 오늘 정할테니 가만히 있어봐. (하고서 서책을 무더기로 늘어놓는다.) 마음에 드는 책은 있느냐?
 
??:아직도 안 정한 거야? (불만스러움을 여실히 드러내듯 입술이 또다시 삐죽였다. 하지만 당신이 무더기로 쏟아낸 책을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이건 무슨 책이야? (<작명서>를 들어 보여준다.)
 
어린 노유진:이름을 지을 적에 도움이 되는 책이다. 내 이름은 워낙 귀하니 이런 곳에서 따지는 않았겠지만. (엣헴.) 그래도 잠깐 사용할 이름을 찾기에는 괜찮을듯 한데. 아마 작명을 업으로 하는 이들이 쓸 것 같은데... 여러모로 도움이 될게다. 거기서 마음에 드는 것이나 찾아보거라.
 
당신과 소녀는 함께 책을 펼쳐 살펴봅니다.
 
제일 앞 장엔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이름을 짓는 것은 상대방과 본인에게 있어 긴밀한 인연의 실을 묶어놓는 행위와 같다.]
 
[부모와 자식의 연은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하니, 이렇듯 이름으로 연결된 관계는 무엇보다도 두텁다. …]
 
??:이름…. 묶, 행위…. (중얼중얼.)
두껍다? (두텁다.)
 
어린 노유진:...
'이름을 짓는 것은 상대방과 본인에게 있어 긴밀한 인연의 실을 묶어놓는 행위와 같다.'
'부모와 자식의 연은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하니, 이렇듯 이름으로 연결된 관계는 무엇보다도 두텁다.'
이리 읽는 것이다.
 
??:이름을 짓는 것은…. (중얼중얼 따라하기 시작했다.)
 
어린 노유진:알겠느냐? 그러니 이름은 쉽게 지어선 안되는것이다. 아무한테나 덥썩 지어달라 해서도 안되고. (너처럼!)
 
??:…이름으로 연결된 관계는…. 무엇보다도 두껍…. 두텁다.
…두껍다가 뭐지?
(꿈뻑.) 그렇지만, 진은 나한테 '아무'가 아니잖아.
 
소녀가 글을 따라 중얼거리는 동안, 순간 책 아래로 툭. 쪽지같은 게 아래로 떨어져 내립니다.
 
서책에 끼워져있던 [쪽지] 같습니다.
 
유진, 다음과 같은 시를 습득합니다.
 
銀河은하
 
은하수 바라보며 없는 다리 한스러워
 
꾀꼬리가 울어 대니 꽃잎은 떨어지고
 
수심에 타는 가슴에 애간장이 끓는구나.
 
시를 모아둔 책에서 뜯어 보관해두기라도 한 걸까요?
 
그나저나 이 내용은 도통 어떤 이야기를 말하는 건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연인 간의 이야기를 다룬 것 같긴 한데 말이에요.
 
어린 노유진:(갸우뚱...)
 
??:(어느새 떨어진 쪽지를 같이 보고 있었다.) 은해…? 다리….
꾀구리…. 개구리…? (중얼중얼.)
애…. 간장. …먹는 간장…? 이…. 끓어.
간장을 끓여.
 
어린 노유진:.... ... ...... ...
 
??:…….
개구리.
 
어린 노유진:개구리가 아니야!!!
꾀꼬리!
 
??:(귀 틀막!)
 
어린 노유진:새 말이다, 새!
 
??:깨…꼬리?
 
어린 노유진:귀 막지마!!! (씨름...)
 
??:(안 막는다….)
 
어린 노유진:꾀. 꼬. 리.
 
??:꾀. 꼬. 리. (중얼.)
 
어린 노유진:새 말이다. 그것도 까먹었느냐?
개구리는 어찌 기억하는지, 참. (황당하다는 시선.)
 
??:새…….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본다. 둥글게 난 천장의 창문 너머 구름을 바라본다.) 봉황은 알아.
꾀꾸리는 본 적 없어….
…해서, 진. (팔을 잡는다.)이건 무슨 내용이야?
 
어린 노유진:음... ... .
오작교와 관련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본인도 확신이 없어서 목소리에 힘이 빠져있다.)
보고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는 다리가 무너지는 바람에 슬프다는 뜻일게다.
 
??:오작교가 뭔데? (고개를 기울이며 시선을 내린다. 푸른 호수와 같은 눈이 당신을 바라본다.) 다리 이름이야? …엄청 깊은 강이 있어?
 
어린 노유진:그. 엄.
정확히 말하자면 까마귀가 만든 다리... 라는 의미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두 사람이 엄청 서로를 그리워하는데, 은하수 때문에 만나지 못하자 그걸 본 까마귀들이 안타깝게 여겨 다리를 만들어주었다는... 뭐, 그런 의미다.
그러니 은하수는... ... 따지고보면 엄청 깊은 강인 셈이지. 이 시는 그 강때문에 연인을 만날 수 없어 슬퍼하는 시고.
알아듣겠느냐?
 
??:까마귀가 어떻게 다리를 만드는데? (같은 질문이 뒤따랐지만, 막상 더 질문이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처럼 얼굴이 찌푸려져있긴 했지만.) ……어려워.
……그래도,
(시의 어느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글도 제대로 못 읽으면서, 은하수를 가리키는데.) 강 이름. 마음에 들어. (그리곤 당신을 본다.)
은하수. 나.
 
어린 노유진:어, ......................... 음. (까마귀가 어떻게 다리를 만드냐니. ... 그런걸 내가 알리가 없잖아! 하지만 어쩐지 모른다. 라고 말하는 게 싫었다. 자존심이 상해였을까?) ... ... 은하수? (똑같이 당신을 가리키곤.) ... 너. ... 말하는거야? 네 이름이 생각난거야?
 
??:까마귀는 작으니까 해봤자 개미들의 다리나 만들어줄 수 있어. 그러니까 진이 말하는 연인은 사람이 아닐 거야. (당신이 곤혹스러워하는 와중에도 말은 또박또박 잘 이어졌다. 다만 이어진 질문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은하수…. 좋아. 그걸로 할래. (눈을 깜빡인다.) 내 이름.
 
어린 노유진:... 그럼 개미라고? (그게 더 황당하다. 천제가 그럼 개미란 얘기야? 하려다 당신이 고개를 휘휘 젓자 말을 멈추고서.) 은하수... 로? (잠깐만, 그럼 이름이...) 하수가 되는건가?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하수라니. 下자를 적을 것 같아 어쩐지 잘 어울리는데, 이거.)
 
??:개미. (중얼거리다, 당신의 중얼거림을 듣고 뭔가 기분이 미묘해졌는지 미간을 좁혔다. 콧대가 움찔움찔 씰룩이다가.) ……. (퍽! 당신의 어깨를 주먹 쥔 손으로 때렸다. 때리고 나서 이쪽도 아팠는지 어깨를 움찔거렸지만.)
 
어린 노유진:아! (이쪽은 엄살도 함께다.) 네가 은하수라며! 그럼 하수지! ... ... 아니, 근데 이게 생각해보니까 황태자의 몸에! (왱알왱알. 또 그 소리다. 감히 황태자의 몸에... 어쩌고 저쩌고. 건방진... 어쩌고 저쩌고.)
 
??:마지막 글자는 빼도 돼. '은하수'가 안 된다면 '은하'로 할 거야. (당신이 하는 말은 한쪽 귀로 들어가자마자 다른 쪽 귀로 빠져나오고 있는 걸까? 그런 의심이 들 정도로 당신의 왱알거림에도 이쪽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문득 팔뚝이 간지러운 듯 소매 위를 손톱으로 벅벅 긁었다가….)
 
은하:은하. (당신을 본다.)
내 이름으로 할래. 네가 지어준.
 
어린 노유진:... ... 내가 지은게 아니잖아, 이러면. (난 널 '하수'라고 불렀다고. 하여간 제멋대로야. 중얼중얼거리는걸 보니 이쪽도 무시당하는 게 제법 익숙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래. ... ... '은하'. (그제야 제대로 불러본다. 은하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은하:(당신을 빤히 바라보다, 두 손으로 덥썩 당신의 옷자락을 쥐었다.) 진아.
밤이 지나서…. 아침이 올 때까지 같이 있어. 나랑. (이곳에서. 대뜸 속삭였다.)
 
어린 노유진:... ... 뭐?! 아. 안돼! 내일은 수업도 있고, 그리고. 잠도 자야하고... ... 혼난다고! (손을 떼어내려 시도한다.)
 
은하:수업 가지 마. 여기서 같이 자면 되잖아. 내가 어떻게든…. 아야! (평소였다면 계속 잡고 있었을 것을, 불에 덴 사람처럼 놀라 손을 떼어내 품에 모았다.)
 
그리고 문득 당신은 평소보다 좋지 않았던 소녀, 은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나쁜 안색.
 
소매 위를 벅벅 긁던 행동.
 
어린 노유진:뭐, 뭐야. ... ... 아. 아팠어? (그제야 놀라 허둥지둥 당신을 살핀다.)
 
그리고 지금처럼 얼굴을 확 찌푸리는 게….
 
문득 기이한 직감이 당신의 시선을 이끌어갑니다.
 
어린 노유진:... ... ...
 
팔을 덮고 있는 소매로.
 
어린 노유진:너, 설마...
 
흐르는 물길을 막을 수 없듯 당신이 이어 할 행동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섬뜩하니 가라앉은 심정으로 소맷자락을 걷어보면….
 
어린 노유진:(소매를 조심스럽게 들춰본다. 사대부 된 자로서 아홉이 넘으면 이런 행동이 금기시된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그래도. '이것'을 반드시 확인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칼을 댄 흔적들이 고스란히 눈에 박혀옵니다.
 
어린 노유진:... ... ... (순식간에 안색이 파랗게 질려버린다.)
 
새빨간 상처는 채 아물기도 전의 모습입니다.
 
당장 어제 칼을 대었다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붉음.
 
정작 은하는 당신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에 의아한 표정입니다.
 
은하:……진? (부른다.)
 
어린 노유진:이, 이게. ... ... 이게 뭐야?!? 누. 누가 이런 짓을. (질문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답이 도출됐다. 노유진은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영특함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밀스럽게 지은 공간. 그곳은 방문이 금기시되고. 그 안에 머물고 있는 소녀와. 그리고. ... ... ... 존경해 마지 않는, 아버지가 머무는 공간에 놓인 '보호받지 못한' 존재.) ... ... ... (이 모든 일에 지엄하신 유록의 태양께서 관여됐으리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누, ... 누. (누가 그랬어? 라고 물어야만 하는데도.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 입에서 '황제'란 말이 나올까봐.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할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그래서.)
... ... ...
(노유진은 침묵을 택했다. 비겁하게도.) ... ... 언, 언제 이런 거야? 아파? (그러나 죄책은 여전히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은하:(이게 정확히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게 만드는 것인지 알 수는 없어도…. 당신이 이걸 본 것으로 괴로워하고 있음은 이해할 수 있어, 은하는 뒤늦게 팔뚝을 소매 안으로 숨겨 끌어안았다. 그러나 당신은 한참이나 생각이란 호수에 잠긴 사람처럼 말이 없어, 은하는 숨겨두었던 손을 뻗어 당신의 어깨를 이리저리 흔들기 시작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진아. 진. …….)
……. (침묵 가운데 눈을 깜빡였다. 흔드는 동작마저 멈춘 상태로,) 여기에…. 오기 전에? (고개가 살며시 기울다 말았다.) 진, 갑자기 왜 그래?
 
어린 노유진:... ... 전? (당신의 말에 그제야 정신이 든듯 눈동자에 잠시 빛이 돌아왔다. 그러나 곧장 다시 혼란스러운듯 미간이 구겨진다.) .... 전? 이라고? (어린 나이임에도 노유진은 사냥 경험이 있었다. 상처입은 짐승을 본 적이 있고, 가엾게 여겨 거둬 치료하라 이른 일도 있었다. 그러니 이게 최근의 상처인것만은 확실한데... ... 근데, 그럼 넌 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걸까? 아니. 이 모든게 사실일수도 있다. 당장은 물을 수 없는만큼, 당장은 생각하지 말자. 당장은... ...) 아, 안 아파? 방금 전에도 분명... ... . (아파서 그런거지? 뒷말을 삼킨다.)
 
은하:(여전히 호수같은 푸른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그 밑의 것을 보여주질 않았다. 다만 소녀는 마치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꿰뚫어보듯 말하는데,) 진. (부르고선.) 난 괜찮아.
…그러니까 오늘은 나랑 여기 있자. 하루 쯤은 괜찮잖아, 응? (어느덧 당신의 옷자락을 붙잡은 손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눈높이로 난 창이 없는 화소재에서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라곤, 오로지 천장에 난 둥그런 창 하나 뿐이었습니다.
 
밤이 물러나기 시작하매 연한 햇빛이 들어차기 시작해, 떨어지는 빛으로써 소녀를 감쌉니다.
 
이렇게 밤이 아닌 때에 마주한 것은 처음이던가요?
 
햇빛을 받은 머리카락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눈동자조차 윤슬 서리듯 밤과는 다른 색을 띄기 시작합니다.
 
새벽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겁니다, 유진.
 
팔뚝에 난 저 상처 쯤이야 뭐 어떻습니까. 나아가는 중이라 하였고,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본인이 괜찮다 말하는데….
 
…….
 
들리나요, 태자? 저 멀리서부터 발소리가 들려 옵니다.
 
이따금 보였던 어의와 무신일까요? 그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불안일지 뭘지 모를 것으로 크게 뛰고 있는 당신의 심장소리만큼 점점 커져갈 즈음에,
 
쿠궁…. 문이 열립니다.
 
6. 복귀
 
아, 끝내 문이 열립니다.
 
소녀는 그 작은 몸으로 어떻게든 당신을 제 품으로 옷자락으로 덮어 숨겨보려고 하나, 그것이 먹혀들 일은 만무하여서.
 
"…태, 태자 저하! 어찌 이곳에!"
 
소란이 이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황하던 자들이 당신을 밖으로 이끌려는 양 손을 뻗습니다.
 
떠나려는 당신을 붙잡는 것은 오직 소녀 뿐입니다.
 
"가지 마. 가지 말아, 진아."
 
애처롭게 당신을 붙든 손이 보입니다.
 
"오래도록 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하지만 억센 힘으로 손은 떨어지고, 당신은 어찌할 도리 없이 이끌려 나갑니다.
 
닫히는 문 틈으로 소녀의, 얼굴이 보입니다.
 
그 눈동자는 어떤 색을,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던가요?
 
어린 노유진:(끌려나가기 직전, 머리끈을 풀어 상처가 난 소녀의 팔목에 감아주었다. 그 사슴에게 했었던 것처럼. 이것은 이별의 선물이 될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죄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아비를. 그래. 정말 만약에. 그가 당신의 일과 관련된다 하더라도. 염치 없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 ... 조금은, 용서해주길 바랐으니까.)
(그렇게 문이 닫힌다.)
 
쿵.
 
끝내 문이 닫힙니다.
 
…….
 
화소재를 나온 당신은 황제의 부름을 따라 황제와 황후를 함께 대면합니다.
 
자리로 향하면 어둡게 굳어있는 황제의 낯이 당신을 향하매, 등골이 섬짓하게 굳는 착각이 입니다.
 
다만 그런 기색은 착잡함으로 금세 무너집니다. 한 차례 얼굴을 쓸어내린 황제가 묻습니다.
 
황제:그래, 화소재에 침입하였다 들었다, 태자. …왜 들어간 것이냐?
 
어린 노유진:(입을 열지 않았다. 황제의 입장에선 건방지고 예를 어긋난 행동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녀에게 그 상처가 제 아비와 관련이 있느냐고 묻지 않았듯, 제 아비에게도 그 상처가 당신과 관련이 있느냐 묻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 입을 열 수 없었다. 운을 떼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걸 알고, 그러면 끝내 당신에게 그걸 물을 것이기에. 그래서 실망하고 무너질 제 마음을 차마 견딜 자신이 없어서... ... .)
 
당신을 바라보던 황제는 끝내 깊은 한숨을 터트리며 뒤를 돕니다. 하늘을 가로막은 천장을 올려다본들, 시선이 과연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요.
 
그를 대신하여 상황을 설명해주는 것은 황후의 쪽입니다.
 
효안 황후:……태자. (부드럽게 부른다.) 놀라지 말고 받아들이세요.
 
어린 노유진:... ... ... (듣고싶지 않단듯 눈을 꾹 감았다.)
 
효안 황후:(숨을 들이키곤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화소재에 소녀가 갇혀있다 생각했겠지만…. 그곳에 있는 자는 감히 인간이 아닙니다.
태자,
그곳에 있는 건 하늘에서 떨어진 신수이십니다.
저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요.
 
어린 노유진:... ... 예?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도로 눈을 떠 상대를 보았다.)
 
효안 황후:……며칠 전이 희영제였던 것은 기억하지요? (둥글게 뜨인 눈을 마주하며 흐리게 웃었다.)
 
어린 노유진:... ... 예, 예에... ... . (말끝을 묘하게 흐린다.)
 
효안 황후:…태자가 알다시피 유록은 10년에 한 번씩 희영제를 엽니다. '전설'로는 희영제의 첫 날에 별무리와 함께 신수가 지상으로 내려와 하늘길이 열린다 하였죠.
그것은…. 사실 전설이 아닌, 진실로 있는 일입니다. 신수는 정말로 있어요.
하나 이번 희영제 때 길을 잃어 숲에 떨어진 어린 신수가 있었으매, 숲을 헤매다 곤혹스러운 일을 겪은 모양입니다. (미간을 좁혔다.)
하여 유록에서는…. 10년 후, 하늘길이 다시 열릴 때까지 신수를 보호하기로 하였어요. 인간들의 손이 최대한 닿지 않는 곳을 만들어서라도.
 
어린 노유진:... ... ... 그럼... (얼굴에 찬찬히 희망이 들어찬다. 누구도 나쁘지 않고, 누구도 상처입지 않았다는 얘기인가?) 그럼, 그 아이의 몸에 난 상처는... ... . (그제야 입을 열어 질문을 꺼낼 수 있었다.)
 
황제는 여전히 돌아선 채, 그러나 황후는 흐리게라도 미소짓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누구도 나쁘지 않고, 누구도 상처 입지 않았다면.
 
당신의 허상 속 죄책감을 말끔히 지워낼 수 있다면.
 
어린 나이를 앞에 두고…. 그리 변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이야기일까요.
 
효안 황후:'곤혹스러운 일'에 포함되는 것이겠죠. 지금은 아침마다 어의가 치료를 하고 있답니다. 그렇지요, 폐하. (고개를 돌려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그렇소. (묵묵히 고개만을 끄덕였다.)
 
어린 노유진:(확답을 듣자 그제야 안심한듯 얼굴이 생기로 가득했다.) 어머니! (덥썩, 품에 안기는건 분명 그 사실이 만들어낸 벅참 탓이리라. 여전히 자신이 믿고, 의지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에.) ... 근데. 그럼 이제 그 아이는... ... 어찌 되는 것입니까?
 
황제:(이번에 답한 것은 의외로 황제의 쪽이었다.) 10년 후. 하늘 길이 다시 열릴 때까지 유록에서 보호토록 할 것이다. (그때에서야 고개를 돌려 어린 유진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태자라 하여도 신수가 머무는 화소재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 될 터다.
신수는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도 깨끗하고, 순수한 존재이니…. 인간과의 접촉을 최소로 하는 것이 맞아.
 
효안 황후:(품에 안기는 당신을 끌어안는 얼굴이 다소 착잡해보였으나, 그 시선을 받는 황제는 여전히 변함이 없음이라. 단지 당신을 끌어안는다.) 보호하기 위함이니 어쩔 수 없답니다, 태자. …유록을 위해서. 그리고 신수님을 위해서.
…만나지 않겠다 약조할 수 있으시겠지요?
 
어린 노유진:... 그. 그치만... (핑계를 늘어놓으려는듯 입을 연다. 항상 와달라고 한 건 그가 아니라 '신수' 쪽이었다. 그래. 이제는 은하라는 이름이 붙은... ... .) 외롭고 심심해보였습니다. ... ... 하다못해 책이라도 나눠주면 안 되는 것입니까?
 
효안 황후:(…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황제와 황후는 생각보다도 강경한 태도로 당신에게 이릅니다.
 
명목은 신수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함이라곤 하지만….
 
기억을 잃어 불안정해보이던 소녀, 은하의 얼굴과 상처, 말이 자꾸만 기억에 화상처럼 남아 욱씬거립니다.
 
그러나 황제의 그림자가 당신의 손발에 붙으니 화소재로 향하는 길은 영락없이 막혔고.
 
밤마다 느껴지던 짙은 매화 향도, 종종 달빛 아래 서있던 사슴의 모습도 더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토록 가까운데도, 그렇게 약속했는데도,
 
시간은 야속하게만 흘러갑니다.
 
가끔 꿈에선 소녀의 모습이 지나갑니다.
 
비단결…이라기엔 많이 헝클어졌었던 분홍빛 머리카락.
 
잔잔한 호수같던 눈이며 조곤조곤 고저 없던 맑은 목소리와,
 
상처며 피딱지 내려앉은 팔.
 
…….
 
반야매화인몽향半夜梅花人夢香.
 
밤중의 매화는 꿈에 들어와 향기롭다던데,
 
실로 그렇습니다.
 
도무지 붙잡히지가 않습니다. 가까이 둘 수가 없습니다.
 
손에 그러쥐어도 눈을 뜨면 사라져있는 꿈결처럼, 약속의 끈으로 이어져있는 그 소녀 또한 허상과 같군요.
 
그럼에도 당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 없습니다.
 
없었습니다.
 
오직 단 하나.
 
소녀의 팔에 묶어주었던 머리끈을 제외하곤….
 
그렇게 무력함 가운데 10년이란 시간이 흐릅니다.
 
당신이 모르고 소녀가 모르는 그 시간 사이.
 
많은 것들이…
 
변했겠지요.
 
반야매화인몽향半夜梅花人夢香. END.
 
낮 중의 매화도 꿈에 들어와 향기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