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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썰&연성

[밀리비] 삭월 오르는 밤

by 여우비야 2022. 3. 19.



달 없는 밤이었다. 밀라니 애키드너는 싸늘한 구가 된 뱀파이어를 질질 끌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적막한 가득한 숲은 어둠에 둘러쌓여있어, 무릇 인간이 근원적으로 암흑에 가지는 공포를 불러 일으키곤 했다. 알싸한 고통은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고, 눈앞을 어지러뜨리는 현기증은 이를 악물며 견뎌냈다. 그렇게 그는 다소 탈인간적인 의지를 통해 고성 언저리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포식자는 피냄새를 감지하는 데 누구보다 뛰어나기 마련이었고, 안타깝게도 고성의 주인-리비안 르로이는 특별히 그런 감각이 발달된 개체였다.

겁도 없이, 누가 포식자의 터전에 다른 피 냄새를 묻히고 들어오는가.

밤 산책이라도 나온 것마냥 경쾌한 발걸음이 들려왔다. 밀라니 애키드너는 본능을 따라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총알의 남은 개수는 두 개, 성수도 없고, 빌어먹을 단검도 직전의 전투로 이가 다 빠졌다.
평범한 인간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찾아왔더니 또다른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꼴이 되고 말았다. 그가 헛웃음을 터트리는 것과 동시에 요요한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존재를 드러냈다. 동물이 포식자 앞에서 마땅히 가지고야 마는 공포감이 뱀처럼 몸을 꽁꽁 쥐어왔다. 밀라니는 눈을 한 차례 감았다 뜨며 어깨에 매고 있던 시체를 내려놓았다.
붉은 눈이라면 밀라니가 쫓고 있는 뱀파이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총알이 단 두 발 남은 총을 꺼내들었으나, 곧 내려놓았다.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들어올린다. 여유롭게 그것을 바라보던 리비안의 눈썹이 한 차례 들렸다. 그가 곧 물었다.

“뭐 하는 거지?”

그가 곧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상처를 입어 도와줄 만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만, 길을 잘못 든 모양이지.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테니 보내주겠나?”
“제 발로 찾아와놓고서 ‘보내달라’는 말을 하는 거야? 겁도 없네.”

리비안이 허,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불쾌해보이는 기색은 그리 없어 보여 밀라니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붉은 눈동자가 밀라니의 복부를 훑어보았다. 축축한 피가 줄곧 새어나오고 있는 게 보인다. 군침이 돌기도 돌았지만, 그보다는 여자의 정신력에 감탄하게 된다. 내장까지 다쳤겠는데 저걸 용케 버티고 있네.
인간이. 그가 삐뚜름하게 웃음을 짓곤 말했다.

“거기다 뱀파이어의 터전에 다른, 그것도 죽어버린 걸 들고 오다니. 무슨 생각이야?”
“…다시 말하지만 이곳이 뱀파이어의 터전인지 몰랐다. 나는 인간이니, 너희들은 서로를 구분할 수 있다 쳐도 나는 아니지.”

정신력도 좋고, 무엇보다 본인같은 뱀파이어를 앞에 두고 따박따박 말하는 기개도 마음에 든다. 간만에 재미있는 걸 만났잖아? 리비안의 눈동자가 위험한 빛을 띄며 한순간 빛났다. 잡아두면 적당한 유희거리가 되겠어.
그리고 밀라니는 슬슬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피를 많이 흘린 탓에 눈앞이 어지러워지기까지 하니, 하, 목표하던 뱀파이어 중 하나를 붙잡아 다른 뱀파이어의 거처를 알아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무튼 망했군.
리비안이 소리 없이 밀라니에게로 걸어왔다. 밀라니는 흑표범과 같은 동물들이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는 모습을 쉽게 연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계하지는 않았다. 포식자는 겁에 질린 동물을 관찰하는 재미를 알고 있는 법이므로.

“…인간들은 이까짓 상처도 혼자 못 고치나? 하룻밤만 지나면 다 낫는 것을 말이야.”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리비안의 손가락이 짙은 자상 남은 밀라니의 배를 툭 건드렸다. 자그마한 미동은 있었지만 밀라니는 묵묵히 시선을 들어 리비안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인간들은 보통 치료가 필요하지. 따뜻한 거처도, 따스한 음식까지도 말이야.”

때는 삭월의 밤이라, 희미한 달빛조차 들지 않는 고성의 앞에서 두 존재의 눈빛이 맞붙었다. 붉고 푸른 빛이 뒤엉키는 듯 했다. 몇 분 같은 몇 초가 지난 뒤에서야 리비안이 샐쭉 웃음을 지었다.
그가 먼저 뒤돌았다.

“죽은 건 바깥에 버리고 따라와. 내 특별히 옷까지도 내어줄 테니까.”
“…….”

앞서 걸어가는 몸짓 뒤로 희미한 향이 났지만, 밀라니는 그것이 당최 어떤 향인지 알 수 없어 얼굴을 찌푸렸다. 새어나오는 한숨을 막지 않았다. 옆으로 버려둔 시체를 내려다보지만, 그래, 우선은 상처가 깊으니 쉬도록 하자.
저 뱀파이어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려는 셈이니까. 밀라니 애키드너의 눈동자가 더욱 푸른 빛으로 낮게 가라앉았다.

밤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