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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썰&연성

[에반메이] 사슴 숲의 꽃은 5월에도 지지 않는다 上

by 여우비야 2022. 3. 17.

 

 

 그러니까 에반 가르시아가 옛적에 소멸되었다 일컬어지던 고대 정령의 실마리를 찾아내게 된 것은, 정말이지 우연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는 사슴 숲 근처에 적당한 집을 짓고 사는 정령사였다. 과거에는 마법사가 두려움의 눈초리를 받으며 뭐, 박해도 받고 핍박도 받으며 인가와 떨어진 숲 속에서 살았다지만, 그는 그런 사정과 매우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우선 그는 왕실이 공인한 '협력 마법사'에 속해 신분과 신뢰를 인정받은 자였고, 입만 꾹 다물고 손해보는 상황을 묵인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고보면 어떤 금지된 마법에 손을 댄 자는 마법 학회에서도 추방받고, 결국 화형대 위에서 생을 마감하였다지만…… 그는 적당한 지식욕과 적당한 실력을, 거기에 적당한 담력을 지닌 마법사였다.

 문제는 그 '적당한' 수준의 지식욕이었다. 괜히 변명을 덧붙여보자면 그, 마법사들에게 있어 적당한 지식욕이라 하면 당연히 마법 학회에 소속하지 않은 일반인들과 차이가 있기 마련인지라. ……어쨌건 거두절미하고 말하면-에반 가르시아는 어느 날 사슴 한 마리가 심상치 않은 마력이 서린 목걸이를 물고 가져왔을 때,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끝내 참을 수 없었다. 그 자취를 쫓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동물에 정을 붙여서 사슴에게 이따금 먹이를 챙겨주었던 것이 아니다. 사슴은 눈이 맑고 성질이 청명하여 저도 모르게 마력의 흐름에 곧잘 이끌리는 습성을 지닌 동물이었다. 다른 동물들 중에서도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개체는 많았으나 에반과 성향이 맞는 동물은 사슴이 제일이었다.

 뭐, 먹이만 꼬박꼬박 챙겨주면 온화하고, 울음소리도 적당하고, 물론 사고를 치지 않는 동물이 어디 있겠냐만은 이 정도면 합격점이지.

 그런 생각을 곱씹으며 에반이 사슴 숲의 미로를 겨우내 통과했다. 그의 눈에 서렸던 마력이 나뭇잎과 맞닿은 햇빛처럼 흩어졌다. 다만 얼굴은 조금 찌푸려져 있었는데, 그래도 5년을 넘게 이 숲에 거주하며 그가 이 '마법 미로'를 발견한 게 이번이 처음이었던 이유였다.

 당최 어떤 자가…… 이런 미로를 만들어낸 거지? 에반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그래도 정령 마법에 있어선 7서클(* 대마법사, 현자)에 가까운 수준이라 생각했던 에반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자연에 녹아들어 있는, 노에스(* 상급 대지의 정령) 정도의 정령에게 길안내를 받아야만 겨우 빠져나올 수 있는 미로가 떡하니! 이 사슴 숲에 놓여있었다니.

 곧 그는 서리 수정이 담쟁이넝쿨처럼 돋아난 동굴을 발견했다. 그리고 문득 발목을 붙잡아오는 시린 한기가 있었다. 동시에 그가 벼락처럼 깨달았다.

 

 이 동굴 안에, 수 세기 전 소멸되었다던 정령이 잠들어 있었다.

 

 ……제국 아래 마법 협회에서 소환 및 계약을 허락한 정령은 총 네 종류밖에 없다. 물의 정령, 바람의 정령, 불의 정령, 그리고 대지의 정령. 이렇게 제한을 둔 것은 과거 한 정령사가 계약한 자연의 정령이 자칫 제국을 멸망시킬 '뻔' 했기 때문이라는데. 에반이 동굴 안을 걸어가며 미간을 좁혔다. 그 정령은 정령계의 원칙을 어긴 대가로 소멸에 이르렀다 했는데.

 마법사, 그중에서도 정령을 다루는 마법사인 에반은 본능적으로 갈림길을 지나 봉인된 정령에게 이르렀다. 발끝이 무언가와 맞닿았다. 한순간 숨을 멈췄다. 그는 바보처럼 입술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얼음 결정 속 잠들어있는 여인의 형상이 있었다. 사람인가? 그런 물음이 불쑥 올라오다가도 그는 알았다, 사람일 리 없었으며 사람일 수 없었다. 그가 손을 뻗자 전류가 흐르듯 허공에서 사수須에 번쩍이는 마법진이 보였다. 견고한 결계 마법은 결계 속의 생명체를 그 시간 그대로 보류시켜놓았다.

 결정 안은 아예 시간이 흐르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니 짧은 시간 마법진을 얼핏 살펴보았던 에반은 이어 알아차렸다. 이만한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에서 순환하여 정제되지 않은 마력 그 자체가 쉴 새 없이 공급되어야 한다. 그러니 마법을 행한 자는 정제된 마력을 사용해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령이며, 그렇기에 이 결계를 근처로 한 공간은 겨울이 없는 이 제국에서 온기를 빼앗아 서리가 돋아난 것이고, 그렇다면 미로를 설계한 것도. 모두 얼음에 갇힌 이 정령이 행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왜? 절로 떠오르는 의문은 이 정령만이 해소시켜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말하자면 에반 가르시아는 '적당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마법사들의 기준에서!

 한숨을 내쉬나 곧 삐뚠 웃음을 그린 남자가 결계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 작업이 될 예정이었다.

 

 * * *

 

 그리고 장장 3일 밤낮 뜬눈으로 지새워서야 결계를 풀어낸 에반은 얼음이 녹아드는 것을 확인하고서 옆으로 쓰러져 누웠다. 샐러맨더, 적당히 따뜻하게. 알지? 진짜 오래간만에 이런 미친 짓이나 해보네. 새빨간 뱀 모양의 하급 불 정령이 에반의 어깨를 토닥였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바라보던 에반이 곧 눈을 감았다. 얼음이 녹기까진 시간이 한참 걸릴 테니까.

"……해서, …… 정말요?"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 얕게 잠든 터라, 누군가의 수군거림에 에반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보이는 건 백색의 실타래. 아니, 아니. 머리카락. 팔랑이는 하얀 속눈썹, 새하얀 손가락과 낭창낭창한 팔뚝, 눈꽃 내린 검은색 눈…….

 마주친다. 달잎처럼 휘어진다. 

 "─아, 깨어나셨어요?"

 부드러운 음성은 자못 그가 얼음에서 깨어난 정령이라는 것을 한순간 잊어버릴 만큼 달다, 그 아래 기반한 것이 모든 생명체를 향한 애정이기 때문일까. 에반은 어느덧 잠 기운 다 달아난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번쩍 일으켰다. 무심코 떨리는 손가락이 정령을 가리켰다.

 "다, 다, 다, 당신!"

 언제 얼음이 다 녹은 거지? 아니, 샐러맨더는 왜 나를 부르지 않고……. 그런 생각을 하던 에반이 고대 정령 어깨에 축 늘어져 색색 숨을 내쉬는 샐러맨더를 발견했다.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저 녀석이!

 반면 언제 자신을 깨운 마법사가 잠에서 깨어날지 몰라 불의 정령과 담소를 나누던 고대 정령은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제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에반에게로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나긋한 음성이 물었다.

 "저를 깨우신 게 마법사님이 맞으시죠.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적어도 몇 세기만에 봉인에서 깨어난 생명체가 읊을 말은 아니었다. 에반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더욱 찌푸렸다. 정령의 말도 이질감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보다는 '인간'의 형태 그대로를 모방한 저 형상이, 무엇보다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무릇 정령은 하급에 가까울수록 동물의 형상에 가깝고, 정령왕쯤은 되어야 인간의 형태를 얼추 닮아 인간의 언어를 쉽게 구사할 수 있는 법이건만. 눈앞의 정령은…… 겉보기로만 보면 인간 그 자체이지 않나? 에반이 한 차례 얼굴을 쓸어내렸다. 결정 속에 갇혀있을 땐 제대로 보이지 않아 이 정도일 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우선 뒤로 미뤄두기로 하자. 피곤에 찌든 이성이 곧장 동의했다.

 "일단 확실히 할 건, 당신. ……정령이 맞죠? 물, 바람, 불, 대지 속성에 속하지 않는, 다른 속성의 정령이요."

 여자, 아니, 정령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에반을 바라보다 곧 봄바람처럼 웃었다. 에반은 여태껏 냉기 올라오는 동굴 안에서 그런 얼굴을 마주하니, 얼핏 기이함을 느꼈다. 그가 눈썹을 꿈틀거리자 정령이 다급하다 싶을 정도로 재빨리 답했다.

 "네, 네. 우선 저는 정령이 맞아요. 그런데 저는, 어, 제 결계를 풀으셨으니, 아시겠지만. ……제 스스로 봉인해두었던 존재거든요. 아! 그래서 그런데, 지금은 제국력 몇 년인가요? 제가 잠들 때만 해도 알세란더 왕이 통치하던 시절이었는데……."

 일순 흐려지는 눈동자를 마주하니 에반의 심정도 혼란스러움으로 뒤엉켰다. 알세란더 왕? 거의 제국이 세워질 적인, 아주아주 초창기일 때의 이야기지 않나. 대체 몇 세기 전의 이야기야? 에반은 애써 평정을 되찾으려 했다.

 "지금은 그때로부터 몇 백 년은 지난 상황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당신이 스스로 당신을 봉인한 건 진작에 알았어요. 그 이유를 짐작하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말인데요."

 뒷머리를 긁적이던 에반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 앞에 주저앉아있던 정령을 내려다본다.

 "일단은 제 거처로 갈까요. 당신 결계를 푸느라 며칠이고 밤을 새우니까 체력도 딸리고, 뭐, 여긴 춥잖아요. 그것 말고도 여러 이유로,"

 "……."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서요."

 정령의 눈은 순진무구한 여인의 것이나 다름없었던지라, 에반은 다소 껄끄러운 심정으로 눈을 피했다. 이러니까 순진한 사람을 꼬드겨 뭐, 꼭 나쁜 길로 이끄는 심정이 들었다. 애초에 정령에게 존댓말이랄 것을 해본 적 없던 에반은 지금도 나름-정령에게 최대한의 친절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 몰라. 피곤해 죽겠으니까 일단은 집에 가서 자야겠다.

 결국은 저 사람과 똑 닮은 형상이 문제인 모양이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내뻗었던 에반은 정령이 곧 손을 마주 잡고 몸을 일으키자, 생각보다 훨씬 차가운 온도에 눈살을 옅게 찌푸려야 했다.

 정령은 사람보다도 더 맑고 따스하게 웃는다. 상반되는 온도에 에반의 심정은 자꾸만 이상해졌다. 순백의 미소는 사람이 결코 지을 수 없는 표정일 테니, 여자는 정령이 맞았다. 

 그런데 왜, 에반은 그 아래로 스며든 자그마한 슬픔을 발견하고 마는 것이었을까. 정령이 속삭이듯 말했다.

 "네. 그렇다면 갈까요."

 붙잡은 손이 시렸다.

 "당신께서 바라신다면요."

 얼어붙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