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한 아이가 살았습니다. 메밀꽃 흠씬 피어난 마을은 외진 곳에 위치했어도 마을 사람들끼리 돕고 의지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죠. 부모가 없었던 아이도 그 마을에서만큼은 다른 곳에서처럼 천대받지 않고, 배곯지 않고 따스하게 지낼 수 있었답니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한 외지인이 방문했습니다. 외지인은 스스로를 '마법사'라 소개하였고, 아이를 지목하여 돈을 줄 테니 아이를 사겠다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당연히 펄떡 뛰며 반대했죠. 사람의 목숨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더니 마법사는 대번 얼굴을 찌그러뜨리며 마을 사람들에게 화를 냈습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니, 아이를 내놓지 않겠다면 이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어주마!'
아이의 바람과는 다르게, 마을 사람들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마법사는 끝내 마력을 끌어올려 거대한 화마를 일으켰습니다, 아니, 그것은 불이었으나 불이 아니었습니다. 말의 형상을 뛴 그것은 산들바람에 힘입어 아이가 사랑했던 언덕을 질주했고, 아이를 종종 저녁 식사에 초대했던 방앗간 집을 들이박고, 아이의 터전을 말 그대로 불사르니.
아이는 끝내 소리쳤습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저를 이곳으로 안내해주셨으니, 이곳이 더는 침범받지 않도록 제 힘을 끌어다 쓰세요, 도와주세요!
……그리고 단숨에 일대는 서리꽃으로 뒤덮였습니다. 그래요. 아이는 사실 어떤 정령의 가호를 힘입은 존재였던 것이에요. 태어날 적부터 정령의 말을 알아듣고, 정령을 다룰 수 있고,
정령에게 사랑받는.
메밀꽃 틔는 봄 마을에 바야흐로 서리가 지기 시작한 날이었습니다. 화마는 얼어붙었으나 이 나라는 사시사철 추위가 찾아들지 않는 곳이었으니, 아이는 끝내 정령의 손을 붙잡고 마을을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왕궁에서 파견된 병사는 메밀꽃 위에 얹은 서리를 보며 쑥덕거렸습니다. 겨울이 탄생한 날이었습니다.
정령은 귀를 기울여 이 마을보다도 아이를 사랑해줄 곳을 헤아렸습니다. 갈수록 회갈색 머리카락은 새하얗게 식고, 눈 안에 틘 서리꽃은 만개해나가고…….
끝내 아이를 두번째 마을로 인도한 정령은 아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그런 겁박을 피하지 못했던 건, 나쁜 마법사가 저의 자취를 쫓았기 때문일 것이에요.'
이별을 직감한 아이가 손을 붙잡아왔습니다.
'그래도 나는 정령님이 떠나지 않길 바라요. 겨울이 닥친 들 사람들은 추위를 이겨낼 방법을 찾을 거고, 눈 내린 설원을 사랑하는 법을 깨우칠 거예요.'
부모 없이 먼 외딴 설원에 버려진 아이를 본 순간부터 아이를 사랑하고 만 정령은 울음을 삼키고 웃었습니다.
'저는 살아있는 겨울이에요. 제가 계속해서 눈을 뜨고 있다면, 언젠가는 가을이 사라지고, 봄이 사라지고, 종래엔 여름마저 잡아먹을지 몰라요.'
'떠나지 마세요, 정령님.'
'당신은 여름 아래에 있을 때 제일 행복해 보였어요.'
그렇게 정령은 스스로를 제일 깊은 숲 속으로 이끌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찾을 수 없도록 미로를 만들고, 가장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시간을 아예 멈추었습니다. 사라진 겨울이 다시 찾아들지 않는 세계를 바라며,
그렇게…….
* * *
자료를 얼추 정리한 에반은 머리를 짚었다. 아니, 생각보다도, 뭐라 해야 할지.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인간적이라서…….
잠시간 할 말을 잃은 에반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몰려든 사슴들에게 하나하나 음식을 나누어주고 있는 정령이, 웃고 있었다. 마냥 해맑은 얼굴을 응시하다 보면 속절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짓던 묘한 얼굴이 떠올랐다. 에반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높다란 웃음소리를 토해내며 사슴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나 하던 정령은 에반이 집 바깥으로 나오자 놀라 몸을 돌아보았다. 굽이치는 백발은 정수리부터 드문드문 회갈색 머리카락으로 바뀌어 있었다. 서적 속에서나 나오던, 바다를 넘어 먼 땅에 도착해야지만 볼 수 있다는 '눈'이라는 것이 녹듯이.
에반은 그새 헝클어진 머리를 풀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말해주신 것 말인데요, 얼추 정리가 끝났어요. ……그 대신 이젠 마법 술식에 관해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바쁘세요?"
그걸 물으면서도 에반은 정령이 자신의 말을 거절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정령이 들려준 이야기나 자신을 바라보던 눈짓, 행동 하나하나가 선의와 애정으로 흠뻑 젖어있었으니까. 저 정령은 생명체를 넘어 이 세계, 그 자체를 사랑했다. 인간이 품을 수 없는 막대한 사랑은 흡사 자연을 닮았다. 그로부터 비롯된 존재이니 가능한 일이었을까. 그것만큼은 에반이 헤아릴 수 없는 영역에 걸려 있었으니 파고들고 싶다는 욕구도 차오르지 않았다.
하여튼 정령은 막 사슴을 쓰다듬던 손길을 떼어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바쁘지 않아요."
바보처럼 웃는다. 그가 에반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서면 사슴들이 따라오고 싶어 하는 양 머뭇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에반은 그것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쓰다듬는다고 한들 하나 따스하지도 않을 텐데, 무엇이 좋다고 이렇게 따르는지. 가슴 한편에 남은 씁쓸함이며 미묘함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그리고 여러 마법 술식이나 메커니즘에 관한 이야기가 끝난 뒤, 에반은 질리지도 않고 바깥으로 나가 맨발로 풀잎 위를 즈려밟는 정령의 뒷모습을 묵묵히 관찰했다. 아니, 관찰하려고 한 게 아니다. 그냥,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어떤 걱정도 없이 주변을 쏘다니는 모습이 괜히 신경 쓰여서 그런 것뿐.
직전의 이야기를 되새겨본다. 괜히.
'그러고 보면, 당신 이름은 뭐예요? 계약을 원한다거나 그러는 건 아니고, 다른 정령들은 급에 맞는 명칭이 있는데 당신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니까…….'
답지 않게 말 끝을 흐린 에반은 하필이면 종이 위로 기록을 끄적이고 있던 까닭에 정령의 얼굴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 다만 그런 위로 나긋한 음성이 똑 떨어졌는데.
'그러게요. ……예전에 불렸던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아서…….'
그 말에 에반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던 것 같다. 정령이 가지는 '이름'은 그 자체로 강대한 영향력이 존재하는 성질이었으니까. 이름에는, 힘이 있으니까.
고개를 들어 올린 후 정령은 여느 때와 같이 다정한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나직이 말한다.
'제 아이는 볕 드는 오월을 제일 좋아했어요.'
에반은 막연히 짐작한다. 여자가 스스로를 봉인한 순간 이름마저도 함께 술식에 갈아 넣었을 것이라고.
'메이MAY라고 불러주세요.'
결국엔 착잡함으로 그의 눈동자가 가라앉을 때에도, 정령은, 여자는, 메이는 맨발로 풀잎을 지르밟았다. 해가 가라앉는 숲은 어둠이 이르게 찾아왔으나 펄럭이는 하얀 치맛단과 머리카락에 눈이 부셨다.
에반이 내내 곱씹고 마는 점은 이것이었다. 여자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것을 아끼고 숨 쉬며 행복해하는데, 머리카락에 얹은 서리가 다 질 적이면 다시금 세상에 겨울이 찾아든다는 점이. 그때가 되면 높은 확률로 여자는 스스로를 다시 봉인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 그렇게 된다면…… 이번에는 이름이 아닌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기억까지도, 마법진에 새겨 넣을 것이라는 점이. 어딘가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열린 창문 너머로 그가 소리쳤다.
"밤 너무 늦지 않게까진 돌아와야 해요! 산짐승들이 제법 다니는 편이니까."
여자는 속도 모르고 눈꼬리를 휘어 접는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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