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내가 끝내 뱀이 되어 눈도 다리도 잃고
번들거리는 독니만 남아 네 목 아래로
그것을 찍어누르겠다 말할 뿐인 이지만 남았다면,
만약에.
태동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몸이 만들어낸 새로운 허공을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움직임이 있었다. 분명하고 명백한 살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오래 가지 않을 것을 알았다.
카가각─
예리한 책의 단면이 어깨를 톱날처럼 긁고 지나갔다. 선혈이 튀었지만, 그것-마녀의 품으로 파고드는 움직임은 한 치 머뭇거림 없었다. 느리게 지나가는 시야 가운데 그가 한 차례 눈을 깜빡이며 유려하게 손을 헤쳐 들면, 썩어가는 시체 한 구를 발견한 독수리 무리마냥 칼날들이 날아갔다. 흡사 기관총을 남발한 듯 무자비한 소리가 울렸다. 기잉, 파공음이 귀를 찢어낼 것처럼 울려오는 와중에 그는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마녀의 눈, 눈, 번뜩이는 형광등 불빛과 네온사인과 교탁의 분필 자국이 안광으로 빛나는 눈.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깨에서의 통각이나 몸 곳곳이 지르다시피 하는 비명은 벌써 예전에 무시하는 방법을 터득한 지 오래였기 때문에, 그는 추리소설의 애독자인 마녀를 찰나 안타깝게 여겼다.
그 안타까움이 스침과 식칼이 마녀의 심장을 꿰뚫어버린 순간은 같았다. 탓, 몸을 뒤로 물려 땅에 안착하기 위해 밟았던 부위가 마녀의 어깨였던 점은 결코 고의가 아니었으리라.
핏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녀가 산화한다. 곧 그는 본래 모습을 되찾는 세계 가운데서 떨어지는 하나의 그리프 시드를 볼 수 있었다. 탁하면서도 영롱한 검은빛을 보이는 알. 무릇 비늘을 지닌 것들이 태어나기 위해 누리는 세계.
그는 마녀를 상대하며 읽었던 글을 곱씹어보았다. 그는 책을 좋아했다. 사랑했다. 그래. 주제넘게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할 정도로 활자와 종이가 이루는 이야기를 사랑했다. 손에 쥔 그리프 시드를 계속해서 내려다보는 까닭이 그것이었다. 어쨌거나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가슴 정중앙의 소울 젬에 그리프 시드를 대었다. 혼탁해진 소울 젬에서 다시 별이 떠올랐다. 그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마녀를 상대할 때부터 붙어오던 질긴 시선이 있었지만, 그는, 라미아는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걸음을 절뚝일 날도 머지 않았다. 언젠가는 배로 기어가게 될 테니까. 단지 그가 종종 곱씹는 문장은 하나였다. 밑바닥만을 바라보는 시야, 울퉁불퉁한 단면이나 고깃덩어리를 단번에 삼켜낼 때 느끼는 포만감.
나는 무슨 존재인가.
* * *
그를 이루는 단어를 나열해보자면 이렇다. 나고 자란 곳은 낡은 고아원. 이름은 뱀과 인간. 부모 불명. 생일 불명-우선 8월 24일로 기재됨-. 좋아하는 것은 독서와 글. 싫어하는 것은 인간이라든지, 세상이라든지, 삶이라든지…… 다수. 재학 중인 곳은 유카 학원. 2학년. 보건위원. 창가 끝 자리. 동아리는 없음. 그리고.
마법 소녀.
“자, 그리고 오늘은 새롭게 전학생이 왔습니다! 다들 정숙하세요!”
봄에 새롭게 싹튼 순이 햇빛에 달궈져 여름에 이르렀을 때 보이는 녹색에, 그는 어렵지 않게 전날 따라붙었던 시선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라미아는 녹색 칠판에 하얗게 적어 내려지는 이름의 철자를 보았다. 적혀있는 글자는 그런 단어를 이루고 있었다.
멜로타 카프릴리스. 눈이 마주쳤다. 그는 속으로 활자를 이어붙여 보았다. 마법 소녀.
“……멜로타라고 합니다. 옆 도시에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전학을 왔습니다.”
흐르는 시퍼런 전율과 눈 안에서 비치는 막대한 기록들, 혹은 지혜들. 라미아는 상대가 자신과 같은 마법 소녀임을 단번에 직감했고, 이 직감이 비단 자신에게만 끼친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런데 저, 몸이 조금 안 좋아서 그런데. 자리만 배정받고 양호실에 먼저 들려봐도 좋을까요?”
“어어, 그러니? 그렇다면 자리가, ……아. 라미아의 뒷자리가 비어있구나. 저곳으로 가면 된단다.”
“네.”
“우리 반 보건 위원이 누구였지? 멜로타를 양호실까지 안내해주렴.”
멜로타가 안내된 자리로 완전히 다다르기 전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울렸다. 라미아였다. 일어난 다음에서야 하얀 손이 올라가는 모습이 교실 안 모두에게 보였다. 제가 안내해주겠습니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둘은 긴 복도를 걸었다. 기이하리만치 붉은 햇살이 반투명한 유리를 통과해 커다란 격자무늬 빛을 만들어냈다. 그 아래를 앞서 걸어가던 라미아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고, 그것은 멜로타도 마찬가지였다. 햇살 가운데 부유하는 먼지가 보였다. 넓은 공간을 크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두 개. 앞서 입을 연 것은 라미아였다.
“왜? 나 혼자 이 도시를 감당하기엔 너무 독식하는 것처럼 보였나?”
창살에 가로막혀 중간중간 어둠을 그려내는 순간이 있었다. 그때마다 라미아는 곧 눈을 찌르는 붉은 햇빛에 눈을 찡그려야만 했다.
“……딱히.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는데.”
라미아는 고개를 돌리는 대신 빛이 들어오는 반대편의 유리로 눈을 돌렸다. 단지 무감할 뿐인 녹색 눈을 보았다.
“독식이라는 건 네가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 때에야 나올 수 있는 말이지. 인큐베이터는 그럴 수 없다고 판단해서 도움을 청했고, 나는 동의하기 때문에 받아들였을 뿐이야.”
그리고 라미아의 시선을 진작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멜로타 또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 그러면 짧은 탄성이 멜로타의 입 안으로 지나갔다. 환멸인지 증오인지 분노인지 모를 것이 뒤엉켜 밤하늘 담은 눈에 잔재하고 있었다. 인큐베이터의 말로는 그가 마법 소녀가 된 지는 거의 1년이 다 되어간다고 했었다. 그런데 눈동자 안으로 체념 하나 보이지 않는다니? 멜로타는 무심코 고개를 기우뚱했다. 그가 알고 있는 하나의 진실-혹은 진리-에서의 모순이 생겼다.
그러니까, 마법 소녀는 희망에서 비롯돼 절망으로 추락하는 존재이지 않나.
그런데 왜 저 마법 소녀는 이미 절망으로 가득한 눈을 하고서도 사람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지, 멜로타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 가운데서 흥미가 번뜩이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므로, 또한 멜로타는 그것을 대놓고 드러냈을 때 상대방이 더 기분 나빠할 것을 알았으므로. 그는 라미아가 '인큐베이터'라는 단어를 홀로 곱씹고 있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한 명의 마법 소녀에게 도시 하나를 오롯하게 짊어지라고 한다면 부담스러운 게 당연하니까. 그럼에도 나의 지원이 못마땅하다면 미안하게 됐어.”
짧지는 않은 시간 동안 라미아는 말없이 멜로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그가 재차 다리를 움직이면 어느덧 멈추어 있었던 시곗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복도를 나와 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이 터벅, 터벅, 소리를 낼 즈음엔 더는 서로의 얼굴을 살펴보기에 유용한 공간이 없었다. 계단을 두 개 남겨놓은 시점에서 라미아가 다물린 입술을 비틀 듯 열어 말했다.
“그래, 못마땅해.”
그 말에 살짝 콧잔등을 찡긋거린 멜로타가 답했다.
“……이곳에서 지내다, 내가 정말 필요가 없어 보인다면 원래 있던 도시로 돌아갈 거야.”
답을 들은 라미아에게서 순간적으로 이상한 기류가 찌릿, 하고. 전기처럼 흘렀다. 멜로타가 무의식적으로 이어질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이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법 소녀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분명, 그것은 희망일진대.
“난 도시에는 미련 없어. 내 죽음에도.”
비록 마법 소녀가 된 뒤로 이어진 삶이 이전보다 더한 지루함과 고단함, 거추장스러움이 가득한 삶이 되었을지라도 분명 마법 소녀가 되었을 때는 희열로 벅차오른 순간이었을 텐데 말이다. 멜로타가 그러했듯이.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이 도시는 네가 가져. 어차피 큐베……가 알아서 조절하겠지만.”
그런데 대체 왜 눈앞의 마법 소녀는……. 멜로타는 한 단어에 감돌던 머뭇거림을 감지했으나, 그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절망과 희망의 상관관계를 되짚어보았다. 희망. 마법 소녀. 절망. ▒▒. 연달아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 그러니까, 그의 전 동료. 전 마법 소녀의 최후. 희망이 절망으로 교차는 순간과 그때의 에너지와 인큐베이터의 발언과 멜로타 카프릴리스가 그 발언을 듣기 직전에 막대한 지혜로 깨닫고야 만 것은, 이 세계가 유지되는 이치였다. 세계를 굴러가게 만드는 톱니바퀴의 설계도가 눈 앞에 펼쳐진 느낌을 받았을 때의 멜로타 카프릴리스의 감정이란.
“네가 주로 활동하는 구역은 겹치지 않도록 움직일 거야.”
“마음대로 해.”
양호실은 여기야. 하얀 손가락이 문을 가리키면 멜로타의 시선이 저절로 그곳을 따랐다. 확인한 라미아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멜로타도 머잖아 양호실의 문을 열었다.
수업이 끝나 하교하기까지, 둘은 다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 * *
헉, 허억, 짙은 피일지 사념일지 모를 것에 물들어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노라면 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이, 또 있었다. 그가 이 도시에 온 뒤로 항상 그랬다.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살펴보아야 성에 차겠다는 사람처럼 잊을 만하면 시선을 붙인다,
거슬리게.
하필 오늘은 그의 머리가 반쯤 날아갔던 날이었다. 채찍처럼 휘어지던 넝쿨 줄기들이 어찌나 질겼는지, 식칼들이 줄기 하나하나를 베어내는 데 시간이 째깍째깍 지체되어 눈 깜빡이는 사이 커다란 이빨에 머리가 싹둑. 물론 가슴의 소울 젬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었으나, 아무리 신경을 돌려 고통을 잊어버린들 머리가 씹혀나가던 감각이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뇌는 생각마저 자꾸, 끊기게, 두어, 서, 지금까지는 묵인했던 모든 방관을 더는 좌시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눈 뒤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금의 상태로는 책의 단 한 문장조차 쉽게 읽을 수 없겠지. 때로는 본인이 이성적인 상태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행하고 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지금은 라미아의 발을 움직이게 했다. 손을 뻗게 했고, 기어코 멱살을 쥐게 했다.
“내가 우스워?”
절룩대는 다리만큼이나 퍼붓는 언어가 위태로웠음을, 서로가 알았다. 어차피 아슬아슬하게 쌓아지던 젠가가 무너진 꼴이라 멜로타는 새삼 놀라지도 않았지만, 숨통이 틀어막히는 기분과 감각은 응당 좋은 것이 아니었다. 손목을 힘주어 뿌리친 멜로타는 구겨진 옷깃을 털었다. 무감한 시선이 깔렸다.
“아닌 걸 알 텐데.”
“그 태도가 상대방에겐 얼마나 같잖게 보이는지 모르지, 넌.”
“흥분을 가라앉혀. 그래서야 제대로 된 대화가 되겠어?”
“내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 이야기한 사람들은 많았지. 나를 때리던 자들이 그렇게 비웃었고, 나를 맡았던 선생님이 그랬어. 나를 마법 소녀로 만든 큐베 또한 그렇게 판단했지, 그래서 널 데려왔고. ……아, 아니지.”
비웃음이 불씨처럼 튀었다.
“큐베가 아니라. 뭐? ……인큐베이터?”
아.
멜로타는 그 순간 무척이나, 생경한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심장보다도 크게 뛰며 심해보다도 깊이가 있었고, 매 순간을 내달리는 것. 피보다 붉고 하늘보다 푸르며 자유롭고, 통제할 수 없는, 숨 쉬는, 깜빡이는, 흩날리는, 울고 웃는,
“너, 무얼 알고 있는 거지?”
바야흐로 생 生, 살아있는, 살아가는, 이곳에 존재하는 것. 다름 아닌 멜로타의 시야 안에서.
그는 당장 앞의 마법 소녀가 살아있는 것을 깨달았다. 더러는 이해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인지되자마자 묘한… 것이 가슴 안에 들끓기 시작했다. 잔잔하던 호수 안에 누군가 돌을 던진 것처럼 파문이 일더니 곧 파도가 되어 속을 휩쓸었다. 출렁이는 수면 위 부표가 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슴이 뛰었다.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에 멜로타는 마른침을 삼켰다.
다만 그의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은 일절 없었고, 답하는 음성도 차분하기 짝이 없었다.
“……큐베는 줄여 부르는 이름이고. 정식 명칭은 따로 있지. '인큐베이터'라고.”
“무엇을 기르는데. ……우리를?”
“정확히는 마법 소녀를 기르는 의미에서.”
하얀 물에 새까만 물감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그 물은 금방 탁하게 물들고 만다지만 그것도 물의 양과 물감의 양에 따라 다른 상황이 연출되리라. 멜로타 카프릴리스라는 사람은 원초 물 한 컵의 사람이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마법 소녀가 된 뒤 호수만큼의 물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물감 몇 방울을 떨어뜨린다 해서 그의 본질은 바뀔 수 없었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는 것은 물의 표면뿐, 수면 아래 물은 요동조차 없지 않나.
이어 라미아 레크탈리아라는 사람을 이야기하자면, 기실 그는 물감이 아니었다. 그 또한 물이었다. 단, 평범한 물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그는 구리와 철의 농도가 짙어 높은 산도를 띄는 붉고 탁한 물이었다. 수영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자체만으로 사람들에게 위험했다.
“그들은 왜 마법 소녀를 육성하지? 왜 마법 소녀를 만들지? 왜 마법 소녀를 통해, 마녀를 처치하게 만들지?”
“……적어도 인큐베이터가 소녀들의 간절함을 이용하는 사실은 알고 있나 보네.”
그러기에 흥미가 갔다. 어떤 화학적 결합이 발생하듯 이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분자 단위가 변해갔다. 에너지가 꿈틀거렸다! 저 물에 손을 담그면 어떻게 될까? 애초에 어떤 경위로 만들어지게 된 거지? 방대한 사고가 팽이처럼 휙휙 돌아가고 있었다. 라미아는 흡사 멜로타의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어 내뱉는 음성은 퍽 견고했다. 그가 겪어온 지난 삶처럼, 지난至難했던 삶처럼.
“애초에. 마녀들은 어떻게 생겨나는 거지?”
멜로타는 라미아가 궁금해졌다. 호기심이 들었다. 악다문 듯하면서도 힘이 하나 들어가지 않은 턱 근육이나 동시에 핏발선 눈 하며 울렁이는 등 뒤의 식칼들 하며.
그는 어떤 소원을 빌었길래 이 자리에 있을까? 낙망했던 순간을 어떻게 넘길 수 있었지? 그렇다고 체념하지도 않아, 마음이 꺾인 채 있도록 허락하지도 않아. 살아가면서, 대상 없는 복수를 이어나가며 가슴 한편에 응어리진 불꽃들을 끌어안고서 내일도 일어나.
아슬아슬한 삶과 죽음의 경계는 한 사람의 일생 몇 번 마주할까 말까 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라미아를 지켜본 멜로타는 단 몇 주 만에 그것이 쉴 새 없이 간격을 두고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 경계는 마법 소녀와, 마법 소녀가 아닌 사람들에게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당사자에게 다가오는 섬뜩함과 공포는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종합하여 멜로타는 문장을 세웠다. 첫째, 그가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타 마법 소녀보다 절망에서 잘 버티고 있다. 둘째, 그는 죽음의 공포에도 타 마법 소녀보다 강한 면역을 지니고 있다. 셋째, 그는 대상 없는 복수심으로 그 절망과 공포를 감내하고 있다. 넷째, 그는 살아가고 있다. 다섯째, 그러나 이것이 어디까지 그의 삶을 '연장'시켜줄지는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멜로타가 알고 있는 하나의 진실-혹은 진리-가 그의 귀로 들어갔을 때. 아마 그는 몸소 그 진리를 실현할 것이다. 그래서 멜로타는 현재 망설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라미아에게 진실을 알려주어야 했을까. 사실 라미아가 고민하는 모든 것은 인큐베이터에게 질문하기만 해도 답을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멜로타가 라미아에게 호기심을 확정지은 지금, 그에게는 라미아의 호기심을 얼추 해소해줘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래야지만 라미아가 이상의 절망으로 떨어질 가능성을 막을 수 있으리라.
“우선 이야기할 점은, 난 널 우스워한 적 없어. 이건 알겠지? 너도 어느 정도 다시 생각할 시간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작은 한숨.
“우리가 마법 소녀가 된 것을 어떤 과학이나 공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표기할 수 있듯이, 마녀가 발생하는 현상도 어떤 과학이나 공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 하지만 이유가 어찌 되었든, 마녀는 생겨나니까. ……인큐베이터들은 이 세계가 멸망하는 걸 바라지는 않아. 때문에, 간절함을 가진 소녀들을 찾지. 마법 소녀로 만들기 위해서.”
멜로타는 본인이 말한 것처럼 마법 소녀와 마녀의 상관관계를 어떤 과학이나 공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어떤 논리로는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을 혀 뒤로 삼켜내었다.
“……그리고? 더 아는 게 있을 텐데.”
날카롭게 벼려진 눈에 멜로타는 콧잔등을 옅게 찡긋거렸다. 예리하긴. 전투를 지켜봤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육감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로 발달하어 있었다. 거기다 막 마녀를 해치운 뒤였으므로 그 기감은 최고조로 세워져 있었을 테고. 입술을 달싹이던 멜로타는 반 박자가 지난 뒤 답했다.
“육체의 고통을 완전히 지워낼 수 있는 건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 모쪼록…… 편리한 몸이 되었지.”
“원리는 알고?”
“몰라.”
“이거.”
그의 손가락이 빗장뼈 가운데에 있는 리본을 툭툭 두드렸다. 매서운 보랏빛이 그리로 향하면, 광채가 찬란한 녹색의 소울 젬이 보였다. 순간 밤바람이 솨아아 하며 어깨를 스쳐 지나갈 즈음이면, 라미아는 보석 안으로 우거진 수풀이 서로 부딪혀 부서지는 틈 사이, 반짝이는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각할 새 없이 그가 흠칫 어깨를 떨며 뒤로 물러난 이유였다.
“소울 젬?”
“……우리의 영혼이자 본체야.”
라미아는 그 말을 듣고서도 눈살을 찌푸리는 이외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더 이야기해도 상관없겠다는 직감이 스쳐지나간 멜로타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마법 소녀로 변신하기 위한 매개체이기 이전에, 우리의 영혼을 형상화한 모습이야. 그래서 빈 껍데기일 뿐인 몸은 얼마든지 다쳐도 금세 회복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전에 통각을 어느 정도 떼어놓는 것이 가능하지. 고통은 마녀를 상대하는 데 걸림돌로서의 구실을 할 가능성이 크니까. 적합하니까. ……완전히 떼어놓지는 못하지만 말이야. 몸이 너무 둔해져서, 오히려 못 써먹어.”
“…….”
“소울 젬을 몸에서부터 멀리 떨어뜨리게 되어도 육체는 기능을 정지하고 죽어. 소울 젬을 누군가 다시 가까이 가져와 준다면 몸은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지체되면 그만큼 육체와의 적합률이 떨어지게 되어서. ……쉽게 말해 육체가 부패한다는 거지. 썩어서. 그건 못 고쳐.”
“……큐베가 말한 것들과는 다소 다른데.”
“뭐, 그렇지.”
정확히는 큐베가 '이야기하지 않은 것'들이지만 말이다. 굳이 이야기해줄 필요는 없었으므로 멜로타의 입술은 다시 다물릴 뿐이었다. 대신 그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 몸을 굽혀,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그리프 시드였다.
“소울 젬의 색이 탁해지면 탁해질수록, 강도도 떨어지니까 주의하고.”
뭐.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멜로타는 태연한 얼굴로 툭, 라미아의 손등에 그리프 시드를 가져다 댔다. 어떤 기이한 울림과 함께 라미아의 소울 젬으로부터 그리프 시드로 탁해진 부분이 연기처럼 옮겨갔다. 곧 드러나는 밤하늘 빛에, 멜로타는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괜히.
“……그런 것쯤은 나도 알아.”
탁, 날카롭게 내치듯 그리프 시드를 훔쳐 붙잡은 라미아가 멜로타를 바라보았다. 몸을 돌려 걸어가는 와중 변신은 풀려 라미아는 곧 평상시의 하복을 걸쳐 입은 모습이 되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몇 걸음 가지 않아 그는 멈춰서 멜로타를 돌아보았다. 떨어졌던 시선이 맞닿았다.
날 세워져있던 얼굴은 한 꺼풀 꺾여 이전보단 침잠된 상태였다.
“그래서. 보아하니, 떠날 생각은 못 품겠나.”
단어 사이로 섞인 자조를 멜로타 카프릴리스가 읽어내지 못했을 리가.
“……여름 방학 때까진 어차피 있어야 해. 교칙이 그렇더라.”
그런데도 그 초탈하던 얼굴에 떠오른 미미한 웃음은, 차마 멜로타 카프릴리스가 예측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그런가.”
맑은소리를 울리며 땅에 떨어져 바닥을 구르는 그리프 시드와 함께 뱀의 그림자는 태양 빛이 사라지매 함께 땅에 녹아들었다. 당연했다. 온 세상에 그림자가 졌으므로.
지금은 비록 초저녁 늦봄이었으나 서늘한 공기가 불 때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남아 있었음이라. 이상할 만치 마지막으로 저물기 전의 햇빛이 사이사이 스며들었던 보랏빛 머리카락이며 그 자태가 눈부처처럼 박혀 들어, 멜로타는 땅에 떨어졌던 그리프 시드를 주워들고서도 한참 눈을 끔벅이고만 있어야 했다.
이번의 감정은 앞선 희열이나 섬찟함, 전율 따위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었다. 기묘했고, 이상했다.
균열
그때를 기점으로 멜로타는 이제 라미아가 마녀를 쓰러뜨리며 질긴 숨을 가다듬는 광경을 2층 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묵인받았다. 원래도 시력은 좋았던-정확히는 남들보다 좌우 시각이 넓었다-멜로타라지만,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오곤 했다. 뭐, 기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라미아의 처절함을 보았으며 가끔은 생사를 가볍게 넘나드는 자해 행위를 보았다. 굳이 자신을 벼랑까지 몰아붙이는 가혹함은 어떤 것에서 비롯되었는지, 속죄하는 듯 날아드는 공격을 막지 않고 있다가도 느닷없이 시뻘건 불길은 그의 눈을 감싸는 것이었다, 새파란 원한이 손끝마다 저며 드는 것이었다.
멜로타 카프릴리스라는 자는 멀찍이 동정심이나 공감 같은 부분을 마음에서 떼어내 묻어둔 적 있었다. 하여 그것에서 새삼스럽게 라미아를 다시 본다든가 하는 일은 응당, 없었다. ……다만 생겨난 호기심이랄 것이 꾸역꾸역 제 몸집을 불리는 게 아니던가. 더 알고 싶고, 더 파헤치고 싶었다. 세상 모든 것을 깨우친 그에게 있어서 라미아라는 난제難題는 혜성과도 같았다. 불타 사라져가고 있으나 그 궤적만큼은 빛났다, 눈을 멀게 했다. 몇 부나방들이 눈을 까뒤집고 달려간대도 그는 말릴 생각을 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 또한 멍하니, 그 보랏빛 광휘만을 바라보고 있건만.
그가 마녀의 머리 부분인 새파란 석류알을 손아귀 안에서 터트리면 공간은 소멸되어 흩어지기 시작해, 멜로타는 기대어 서 있던 난간을 밟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발굽 닿는 양 맑고 짤막하게 울리는 소리에도 라미아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늘의 상태는 평소보다도 심각해 보였다. 너절해진 팔뚝 하며, 이상한 쪽으로 돌아간 발목 하며. 멜로타는 그 모습에서 기인하는…… 아마도 부당하다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들을 통해 입술을 벌렸다.
이 당장이 아니라 다음 날. 노을 지는 육교 위에서 말이다.
학교 축제를 준비해야 했던 시기였다. 하필이면 학급 회의 도중 우연이 맞아 라미아와 멜로타, 둘에게 같은 준비 역할을 줬었고, 학교에서는 아는 척 하지 않고 같은 반 학우로서 지내기만 했던 둘은 교실 안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게 되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라미아였다.
“언제 시간 비나.”
“……지금.”
“도서관?”
“도서관보단, 내 자택이 낫겠지.”
“그래? 그렇담 앞장서지.”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해는 몸집을 불렸고, 빨갛게 이글거리는 것은 길고 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육교 다리는 흡사 바닥을 기는 철창의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라미아는 묘한 불쾌감과 함께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그러나 햇빛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하늘 제일 높은 지점을 지나갈 적의 태양 빛보다 작금의 붉음이 그의 눈을 아리게 만들고 말아 세상이 온통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나누어져 보일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언젠가의 마녀를 해치울 때도 그랬다. 삼원색으로만 이루어져있던 둥지 안에서 싸우고 또 싸우다 하마터면 울렁거림이며 기분 나쁜 감각들에 구토할 뻔했지.
다행히 그 정도의 인식은 찾아들지 않아 상념은 잦아들고 고요하게 가라앉은 감정의 상자들만 남았다. 라미아는 그중 열릴 듯 말 듯 했던 상자의 손잡이를 확 당겨 열었다. 하늘이 피처럼 붉었던 까닭이었고, 어제 제 자리를 맞추었던 발목이 아직도 삐거덕거렸던 까닭이었으며 난도질 되었던 팔에 욱신거림이 남아있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내용물이 흘러넘쳐 섞였다. 걸음이 멈추지는 않았다. 나긋하나 어딘가 음울한 발음으로 그가 말했다.
“난 차라리, 이 세상이 멸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러나 라미아 레크탈리아가 예상했던-멜로타 카프릴리스의 발걸음이 멈추는 순간은, 느리게 인지되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째깍, 째깍이 아니라 째-깍, 째-깍 흐르는 것처럼.
“왜?”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나.”
“멸망을?”
“아니.”
“멸망되어야 하는 이유를?”
빛 가라앉는 눈은 말 없는 긍정이었다.
그는 이어 이 세상에 얼마나 쓰레기 같은-사람들이, 얼마나 남을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서 얻는 같잖은 희열로 하루하루 어깨 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넘쳐나는지, 왜 그들이 죽어 마땅한 생명이 감히, 맞는지 설파했다. 음성은 같은 감정을 끌어안고선 욕심껏 환멸이나 혐오의 옷을 입었다. 위로 뜨거나 아래로 가라앉지 않는 목소리는 그 탐욕과 사색이 얼마나 빛바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었다.
멜로타는 이전만큼 빛나며 이전보다 턱없이 뚜렷한 윤곽의 분노를 볼 수 있었다. 모든 부조리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이치가 어떻게 세상에서 몇 사람을 효율적으로 죽여가는지. 그는 당연히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만 있었다.
라미아 레크탈리아가 말했다, “만약 내가 마녀를 죽이지 않아도 계속 살아갈 수 있었다면, 난 마녀의 편에 섰을 거야.” 순간 육교 옆 세워진 교량으로 기차가 지나가 세찬 바람이 휘몰며 둘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으나, 동시에 여전히 세상은 붉고 검었으나. 둘은 서로의 눈동자를 또렷하게 들여다보았다. 라미아는 고요한 호수 앞에 서 있는 심상을 느꼈고, 멜로타는 적어도 그가 울고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지친 듯 말했다.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전기가 통하듯 이상한 감각이 멜로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관통했다. 지성의 첨탑이 말했다, 저것이 라미아 레크탈리아가 마법 소녀가 된 이유라고. 지지부진한 삶을 기우면서도 끝내 포기할 수 없어 복수도 목표도 손에서 놓고 엉망진창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근원이라고. 멜로타는 그 모습에서 기인하는, ……아마도 부당하다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들을 통해 입술을 벌렸다.
당장. 이 노을 지는 육교 위에서 말이다.
“누구처럼?”
그는 라미아의 분노나 원한이 만약, 해결된다 해도. 그 끝이 결코 좋지 못할 것이라는 직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혓바닥을 칼처럼 갈던 라미아가 느릿느릿 입술을 열었다.
“내가 죽인 놈들처럼.”
남겨진 신발, 높은 바람이며 절벽, 혹은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과 비명 지르던 나뭇가지들.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에 멜로타는 무심코 눈살을 찌푸렸다. 퍼즐이 맞춰졌다. 멜로타는 이제 라미아의 한쪽 이마에 남은 상흔의 출처를 깨달을 수 있었고, 갈 길 잃은 불꽃이 어디로 내달리는지는 어떻게 해도 알아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기차 꼬리마저 둘을 지나가 점점 자취를 감췄다. 둘은 다시 걸었다. 언젠가부턴 라미아가 멜로타를 두어 걸음쯤 앞서 걸어가던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고로 해 질 녘이라는 것은 평소라면 가지지 못했을 감정을 만들게끔 하는 마법을 품고 있는 현상이었던지라……. 그것은 이미 '마법'소녀로 재탄생한, 더불어 이성만이 철저하게 남은 멜로타 카프릴리스에게도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놀랍게도.
“너. 그 집에서 살고 있구나.”
철벽같은 담을 두드릴 뿐이랴, 멜로타의 행위를 빗대어 표현하자면 그보다는 '꿰뚫으려 들었다'라는 문장이 맞았을 테다. 이번에는 라미아의 걸음이 멈추었지만 그는 멜로타처럼 뒤돌아보지 않았다. 철창처럼 늘어선 육교의 그림자만을 아득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네게 친척이 없다는 것쯤은 알아.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근처 보호 시설에서 머물렀고, 아니면 기숙사에서 지냈지.”
“…….”
“그리고 유카 학원엔 기숙사가 없어.”
“그 간단한 문장들을 어떻게 이어붙였길래.”
“원한다면, 더 말하기도 어려운 일은 아니야.”
“……너.”
기어코 그가 몸 돌려 멜로타를 바라볼 때면, 멜로타는 사람의 것보단 파충류의 것을 닮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새삼스럽게 무섭지도, 소름이 끼치지도 않았다. 태연히 어깨를 으쓱거린 멜로타는 말을 이었다. 참고로 말하는 것이었다.
“마법 소녀가 되는 대신 그런 소원을 빌었지.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고, 깨우칠 수 있게 해달라고. ……덕분에 지루한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감히 미래의 어떤 기대를 예측한 적은 없었다. 모든 것이 멜로타의 손바닥 안에 존재했으니, 하다못해 인큐베이터나 강력한 마녀마저도 그의-칼같이 예측된 삶에 커다란 오차를 발생시킬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정말 어째서인지 멜로타는 라미아의 내일이나 모레, 일주일과 한 달 뒤, 일 년을 지나 수년을 넘긴 후의 라미아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희미한 형체다. 불쾌감이나 찝찝함보단 다른 감정이 샘솟았다. 이를테면 활력, 옅은 즐거움.
“네가 잊지 않는 자라고 해서, 이렇게 가까이서 날 능멸하나.”
전만큼 라미아는 분노하지 않았고 멜로타는 그것을 곧장 알아차렸다.
“그렇게 받아들여졌다면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네가 앞으로도 마녀와 대치하고자 한다면 이 말은 들어두는 게 좋을걸.”
“그러니까 지금까지 필요 없다고 말했어.”
“인큐베이터는 이런 걸 이야기해주지 않지.”
“…….”
“나와 협력해.”
난 네가 마음에 들어. 그런 말은 혀 아래 곱게 덩어리 만들어 깔아둔다. 마녀를 상대할 때 만큼이나 멜로타는 신중했다. 떠도는 괴담 가운데서 어떤 마법 소녀는 시간을 만질 수도 있다고 하던데, 감당해야 할 인과율은 둘째로 치더라도 어차피 멜로타에겐 그런 능력이 없었으니 말이다.
라미아 레크탈리아에게 가장 필요한 조건을 계속 그가 생각하기로 나온 답은 이러했다.
“난 너의 선을 침범하지 않아.”
“뭐?”
“거추장스럽게 다른 말들을 더 하고 싶진 않네. 단지… 저게 내 진심이야.”
“여태껏 가만히 있다가, 왜?”
“지금이 아니면 다신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너는 끔찍해.”
“모두가 다 그렇지.”
“씨발, 사는 건 왜 항상 이렇게 좆같지?”
“그래서 우리는,”
“말 조심해.”
“……그만 도피해, 라미아 레크탈리아.”
“개 같다고, 네가.”
육교 위로 내려앉은 적막과 함께 태양빛이 완전히 저물었다. 공기는 벼려진 한기를 품고 다리를 사각사각 갉아먹고 있었기에, 돌연 그 모든 감상과 들끓는 감정에서의 가치를 내려놓은 라미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느르막히 가슴을 갉아먹는 벌레의 존재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상처 입은 사람은 없었다. 언젠가는 터트려야 할 둑이기도 했으며 이 정도의 반응이라면 예측한 것보다도 얌전한 편이었다. 물론 라미아는 그의 손바닥 위로 자기 자신이 올라온 기분에서 올라오는 구토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빌어먹게도, 그는 확실히 멜로타가 내건 조건이 이보다도 효율적이거나 먹음직스러울 수 없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 속이 메스꺼웠고 그래서 더 군침이 돌았다.
그는 서로에게 시간이 남아있는 것을 알아 입을 열었다.
“……다시 걷지.”
그것을 알면서도 뒤에 서 있던 그림자는 마지막으로 땅을 굳히고자 발을 한 차례 굴렀다.
“다음 주 안까진 대답해줘.”
울림이 멎어 든다. 호수의 물이 침범한 그의 삭막한 땅이 다시 굳어 들지만 어쩌면 라미아는, 굳은 땅 위로 균열이 생겨날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그래. 속삭이듯 답하면서도 그는 주로 끝이 좋지 않게 끝나는 소설을 누리던 치였다. 거기다 우리는 감히 희망을 탐내 힘이나 지혜를 가진 마법 소녀가 아니었던가. 발등 위로 박혀있던 못을 뽑았다.
빛 저문 세계 아래 두 명의 마법 소녀가 그림자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하도 어두워서 핏방울조차 보이지 않는 저녁이었다.
다음 주가 지난 뒤에도 라미아는 확실한 답을 하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둘 모두가 육교 위의 그 날에. 그가 이미 답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부화
흘러가는 나날들을 그의 입으로 표현해보자면 누린 시간은 놀랍게도, 괜찮았다. 그러니 세월이라는 것이 참 무섭다. 설마하니 그 자신이 누군가와 밥을 먹는다거나 함께 길거리를 걷고 마녀의 앞에 섰을 때 등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심장 안쪽을 뭉개거나 종종 속을 뒤집는 듯한, 그런 감각을 느끼게 되었다니.
죽을 때까지 그는 그것을 거북함이라고 읊을지 몰랐으나 날이 갈수록 그의 가시가 끝을 향해 세운 고도를 낮춰가고 있음은 명백했다. 물론 라미아는 잠이 들기 전마다 곱씹었다. 지금에 익숙해져선 안 된다고, 뜯어질 홈이 그 모양대로 파여있는 것은 다른 곳에 붙이지도 말아야 한다고, 발밑 젖어 들다 눈 깜빡이면 코를 넘어 차올라있는 상태일 거라고.
라미아든 멜로타든 서로 자존심이 강한 편이었다. 라미아는 내세울 것이 악착스러움밖에 없었고 멜로타는 마땅히 자신이 이 땅을 밟는 인류 중에선 제일 지혜로웠으니 그런 태도가 옳다 여겼다. 또한 둘은 눈치가 좋았다. 라미아는 살아남기 위해 그러했고 멜로타는 이미 세상의 이치를-대다수 통달한 자였다.
구구절절 서론을 왜 이리 길게 풀어놓는가 하면, 라미아 레크릴리스가 기어코 자신의 힘으로 찍어누를 수 없는 마녀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마녀의 결계에서부터 라미아는 지금까지 그가 상대해왔던 마녀와 이 마녀가 수준이 다를 것을 예감하고 있긴 했다. 그럼에도 스스럼없이 마녀 안으로 들어가려는 라미아를 말리던 것이 멜로타였다.
“왜?”
물음은 짧았으나 그의 손목을 붙잡는 멜로타의 손가락은 마치 덩굴 같았다. 그 물음 속에 ‘죽을지도 모르는 것을 알면서 왜 들어가려 하느냐’는 의미가 존재함을 알았다. 눈살이 찌푸려지다 말았다.
“나는 항상 그렇게 살아왔어.”
그들은 서로의 접근을 허용했지만 그렇다고 어떤-라미아가 생각하기에-상투적인 대화가 오간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너도 죽고 싶은 건 아닐 거 아냐.”
“나는 도망치지 않아.”
“도망치는 게 아니야, 어쩌면 더 나은 수를 도모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겠지. 조금 더 현명하게 생존하는 것을 왜, 도망친다고 표현하지?”
“네가 생각하는 더 나은 수는 뭔데?”
라미아는 멜로타가 말을 돌려 말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어쨌거나. 멜로타는 짧은 시간 동안 상념에 빠져들었다. 함께 싸워줄 마법 소녀를, ……이건 라미아의 성격상 무리다. 그렇다면 뭐, 마녀의 습성을 연구해서 더 나은 공략법을 찾자고? 그러려면 우선 부딪혀봐야지 알 수 있을 텐데. 생각나는 방법들이 더 여럿 있었지만 모두 다 라미아에게 맞지 않거나 그가 거절할 방법들 뿐이었다. 자주 접할 일 없던 감정이 살짝 머리를 내었다. 짜증이라던가, 생각이 잘 풀리지 않는 데서 오는 답답함 같은 것들이.
결국 둘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계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하여, 지금의 상태를 보라. 그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탈출의 마녀-그 성질은 열기-였다. 단단한 껍질의 과육 표면을 닮은 발톱이 바닥에 찍혀들 때면 해일을 모방해 이는 꿀 덩어리에 그는 몇 번을 구르고 혹은 삼켜지고 찢겼다. 타오르는 거품 가운데 피부가 분해되는 감각과 장면은 통각을 아예 제외시킨대도 그 모양새 자체로 사람의 어떤 인격을 추락시키는 데 몹시 능력이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멜로타는 이성 안쪽을 갉아먹는 감정의 이름을 고민하고 있었다. 위태로움, 불안, 초조, 아마도 걱정인가? 스스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지난 나날들이 그를 비웃는 듯했다. 그야, 멜로타에겐 생각지도 못한 선물 같은 존재가 라미아였으니 말이다. 이대로 죽는 꼴을 볼 수 없었다.
그가 닭 쫓던 개가 지붕만 바라보던 심정을 흡사하게 가지고 있었든 말든 라미아는 또다시 경계 위에 서 있었다. 무수한 칼날들은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와도 같았다. 마녀가 허공을 비행하고 있었다면 그의 무기는 하늘을 헤엄치는 열대어 무리였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날 하나하나가 차례대로 번뜩일 때면 그만큼 아름다운 비늘을 가진 생명체는 확실히 이 세계에 존재하지는 않았으리라.
Ἴ , ςςρος , Ἴκακοκ , , κοςκαρἼοςςροἼ, , , , ,
고막을 찢을 것처럼 파고드는 중얼거림이 부리 사이로 튀어나올 때마다 라미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불꽃의 형상을 가진-아마도 사역마일 존재들이 오감을 교란하고 있었다. 쥐새끼 같은 것들. 더러운 눈빛이.
가장 오래된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그랬다. 보통의 인간들은 왜 보통에서 다른 존재를 그렇게 미워하는지, 흠이 아닌 것들까지 모조리 상한 것으로 묶어 잡아 나를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지, 아예 이마를 처박고 땅에 긁어대는지, 끝까지 나는 뱀이라고, 하늘이라곤 쳐다볼 수 없는 생을 살도록 밑을 기어 다니는 존재라고 내게 지울 수 없는 자국을 남기는지.
빌어먹게도 이 마녀 또한 고개 아프도록 다리를 펄럭거리고 있었다. 빛이 눈 부셨다. 아득함에 절어 그는 불꽃에 휩싸였다. 타들어 가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기억이다. 한낱 미물을 바라보는 눈동자와 제 뇌를 뒤흔들던 주먹 쥔 손, 입 안에서 퍼지는 비린 향, 흙 알갱이. 그는 끝내 현실과 과거를 구분할 수 없어 외치고 말았다.
날, 씨발, 감히 내려다보지 마!
그리고 그는 그다음에서야 저를 내려다보는, 그늘진 녹음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
스스로 목을 조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야 멜로타가 자기 팔목을 이렇게, 강하게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다만 의아한 것은 한 가지였다. 멜로타 카프릴리스는 어떤 이유에서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나. 그가 묻기 전에 물음이 문장으로 맺혔다.
“왜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아?”
답을 알면서 너는 왜 묻나. 그가 생각했다.
“알아, 네가 그러지 않을 사람인 거. 그렇지만 누구나 다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법이잖아.”
때로는 죽어도 상관없겠다는 마음이 살고 싶어 하는 본능을 억누르기도 하는 법이었다. 그가 콜록댔다.
“저번처럼 굳이 답하지 않아도 돼, 대상이 너라면 난 이미 많은 것을 눈치챌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런데, 내게 살라 이르던 자가 있었던가. 그가 가물거리는 눈을 짧게 감았다. 어둠이 갖가지 색채를 가지고 눈앞을 떠다녔다. 다행히 눈을 갉아 먹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갈라진 숨통을 가다듬듯 그는 한 차례 더욱 깊게 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너는 왜 내가 살길 바라나.
자신의 꼬리를 먹으며 자라는 우로보로스처럼 그의 생각은 쳇바퀴를 돌았다. 마녀가 장송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태양이 가까워지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뚝 뚝 녹아 흐르는 깃털이 둘의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라미아는 그 가냘프고 애처로운 궤적에 골몰할 새도 없이,
“레크,”
멜로타를 끌어안고 바닥을 굴러야 했다. 시야가 반전된다. 그는 제 그림자 안에 가둬진 멜로타를 바라보았다. 주변으로 하얀 눈송이 닮은 깃털이 마구마구 떨어지고 있었다. 이 시간만큼은, 모든 세계가 물속에 빠져든 것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듯했다. 누군가가 생각했다. 해 질 녘뿐만이 아니라, 이런 광경도 마법을 품을 수 있었구나. 달큼한 향을 풍기며 빠져 내린 것에 절망한 마녀가 종소리를 울리며 울었다. 댕, 댕, 댕…….
더는 습관이 아닌 충동으로 하여금 그가 물었다.
“내가 왜 살아가야 하는데?”
답은 자각 못 한 다급함에 기인하여, 돌아온다.
“내가 필요해. 네가 내게 필요해.”
장담컨대 멜로타는 현재의 자신이 이다지도 절박함 뒤엉킨 목소리를 내었던 것을, 앞으로도 모를 것이었다.
“네 언어로 설명해봐.”
그러나 라미아는 멜로타의 말에 휩쓸리지는 못했다. 어쩌면 멜로타가 그에게 철저히 숨기고 있는 어떤 문제-혹은 진리-의 존재를 직감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보라색 소울 젬은 평상시보다 더 탁한 빛으로 엉켜 들어가 밤하늘 위로 뜬 별빛마저 찰랑이는 어둠에 잠겨들었으니, 무릇 헤엄치지 못하는 사람이 코 밑까지 차오른 물을 보고 죽음을 직감하는 사유처럼 말이다.
꺼져들기 직전에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불꽃이 있었다. 이 순간 멜로타는 그것을 생명이라 명명했다. 깃털이 땅바닥에 스며들어 하얀 석산으로 피어나고 있어 시간은 초침보다 빠르게 좁아 들고 있었다. 멜로타는 그런 상황 중에서도 거짓이며 확실한 기만을 언어에서 제하는 작업을 거쳐야 했다. 그 과정을 낱낱이 꿰뚫어 보는 뱀의 시선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마주한 멜로타는 모든 작업의 과정을 내려놓고선 가늘게 숨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홀린 것처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
“내가, ……네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왜?”
그가 입술을 움직여 그리 물었으나 멜로타는 라미아의 그림자 아래에서 손을 내미는 행동만을 보였다. 하얀 석산이 물든다. 붉게, 또 붉게. 멜로타는 그것에 본바탕 그대로 고스란한 답을 내뱉지 않았다. 너무도 현명했기에 그에게는 내버려지는 감정들이 많았다.
“너도 이런 곳에서 이렇게 죽긴 싫잖아. 어쩌면 매번 그랬잖아.”
“너는 여전히 끔찍해…….”
“이젠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되어볼게.”
“또 사람을 믿으라고, 내게.”
“난 사람이 아니야, 너도 아니지. 알잖아.”
우리는 마법 소녀인걸. 그 문장 하나를 읊던 수많은 마법 소녀들이 얼마나 비탄이나 절망에 침몰당하였는지 알고 있었던 멜로타도 지금만큼은, 라미아에게 내민 손이 희망에 젖어 있었을 것이다.
결국 라미아 레크탈리아가 멜로타 카프릴리스의 손을 붙잡았으므로.
붉고 탁한 물이 뱀처럼 요동쳐 흘러와 호수와 뒤엉켰다. 멜로타는 맞잡은 손으로부터 탁 튀어 오르는 짙은 희열이 낯설어 저도 모르게 다물린 입술에 힘을 주었다. 다시 말하지만 낯설었다. 어색했다. 마녀가 시퍼렇게 뜬 눈으로-비유다-둘을 응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감정을 곱씹고 있는 것은 참으로 비효율적일뿐더러, 뭐, 어쨌거나 손해가 큰 행동이었지만. 멜로타는 그런 순간들마저도 기껍게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치켜든 뱀으로 하여금 그는 실로 오래간만에 본인이 살아있는 것을 느꼈다. 라미아가 멜로타를 일으켰다. 장송곡의 연주를 끝낸 마녀가 우는 것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종소리며 깃털이 물을 혼탁하게 만들 듯 추락했다. 그들은 붙잡은 손을 풀었지만, 온기는 화상처럼 남아 길게 머무를 것이었다.
걸음을 절뚝이는 나날이 길어진다, 물론 라미아는 자신이 배로 기어가게 될 날이 머지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으나. 그는 당연히, 마법 소녀였지만.
* * *
라미아도 한때 인간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끝이 이전처럼 좋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때때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습성은 인간 대다수에게 묻어나오는 특성 같은 것이다. 그의 인간성은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 때마다, 소울 젬 속에서 번뜩이는 광채를 눈에 담을 적마다 마모되곤 했으나. 그에게는 말하지 않은 비밀이 단 하나 있었다.
그는 사실, 꾸준히, 자신을 스스로 인간이라 여기고 싶었다.
멜로타가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진실이 있음을 알았고, 그가 바라는 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것'보다 더 음습하고 결이 뒤틀린 소망임을 알았다. 그것을 깨닫게 되는 날은 그가 끝끝내 추락하는 날이 될 것이다. 라미아가 고려하고 있는 바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멜로타 카프릴리스가 지혜를 택한 마법 소녀인 점이다. 그가 자신을 통해 썩 올바르지 못한-열받는 소망을 추구하고 있다고 하더래도 라미아는 그것이 자신의 시야 안에만 들어오지 않으면 어 느정도 모르는 척해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둘째는 그와의 교류, 혹은 약속으로 인해 라미아가 얻을 수 있는 인간성이다. 인간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그의 내면에 남아있는 이상 그는 높은 확률로 이것이 잘못된 선택이 될 것을 알면서도 그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누이가 내려온 동아줄을 어떤 심정으로 붙잡았겠나. 그것이 썩었던 것이더래도 붙잡고 마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었던 라미아 레크탈리아였다.
사람을 죽일 힘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냥, 라미아는 살고 싶었다. 그는, 이제는 인간조차 아니게 된 마법 소녀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싶었다. 이제는 바라기도 힘들어졌지만.
툭.
맑은소리를 울리며 마녀의 그리프 시드가 라미아의 소울 젬과 맞닿았다. 그의 어둠이, 혹은 절망 비스름한 모든 감정이 사그라들었다. 불씨가 완전히 꺼질 순 없었으나 기세는 크게 줄었다. 그렇게 그가 다시 숨을 내쉬었다. 라미아는 멜로타가 감추고 있는 비밀을 깨달았다. 이미 여러 차례 드나들었던 경계선이 삶과 죽음뿐 아니라 다른 것을 가르고 있었던 것을, 그 위에 서 있던 거대한 형상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다.
라미아는 절망과 희망의 상관관계를 되짚어보았다. 희망. 마법 소녀. 절망. ……마녀.
그는 죽음에 가까워질 때마다 거대한 뱀을 볼 수 있었다. 하반신은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뱀의 몸통이요, 그 상반신은 활자나 하얀 안개꽃에 뒤덮여 있다. 검은색 얽힌 보라색 갈빗대가 척추를 따라 감싸면 대마다 박힌 만년필 촉에서부터 은하수가 뚝 뚝 떨어졌다.
∴∃∫∂<∀, 굳이 번역해 MILOVA라 칭할 수 있는, 반인 반사의 모습을 띤 마녀. 그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의 미래였다. 그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하여 그는 새삼스럽게 절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항상 요동치던 물결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는 반투명한 유리창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서늘했다.
멜로타 카프릴리스는 라미아에게 있어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그늘 아래 새까만 알로 퇴화한 마녀들이 생전 어떤 삶을 삶았는지, 그가 더 이를 데 없이 정말로 바닥을 기어가는 날 그의 목을 베어낼 마법 소녀가 멜로타가 될까 말까 궁금하지 않았다.
상대가 해줄 일은 단 하나였다. 그가 자신에게 바라고 접근해온 무언가를, 소망을 제게 들키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는 상관없어 묵인했다지만 시간이 흐른 뒤 그것을 발견하게 될 때면, 아마도 자신이 아주 비참해지고 말 것 같아서.
둘은 도시의 불빛이 가득한 광경 한가운데 존재했다. 공사장의 타워크레인 제일 위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있노라면 바람에 실려 두 다리가 조금씩 살랑살랑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반딧불이처럼 유동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한 불빛은 이 도시의 목숨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당연히 라미아는 그 무게에 책임을 느낀 적이 없었지만, 오늘따라 그것은 유독 깊은 자국을 남겼고 잔잔한 심장 박동을 울리게끔 했다.
계절이 넘어가고 있었다.
“너는 현명하지.”
“……그래.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네가 끝까지 그러길 바라.”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가 났지만, 착각이겠거니 싶었다. 이곳은 지상에서부터 한참 떨어진 상공 중에 있었으니까.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내지 못한 멜로타가 미간을 죽 찌푸리다 답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그리고 그 답에 어째서인진 모르겠으나, 라미아는 웃음이 났다. 그는 그것을 참지 않았고 그 점은 멜로타에게 놀라운 것이었다. 도시와 도시, 건물과 건물, 2층 난간과 1층 홀을 지나서. 둘은 이제 지브의 격자와 격자 사이만큼의 거리를 향유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너에게 이만큼을 용납받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사고가 그 누군가의 가슴을 두드렸다. 지금 이곳에 살아있다고, 숨 쉬고 있다고.
“그냥 모르고 있어, 너는.”
“……지금 날 놀리는 거야?”
“그런 건 아닌데.”
때때로 그런 감정은 전염되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라미아는 고개를 들어 도시의 불빛 닿지 않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늘한 바람이 스쳤다. 온 도시에 그림자가 내렸지만 새까만 밤에도 빛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세상에 홀로 났던 날부터 그의 고향을 밤하늘, 혹은 동굴 밑 축축하고 서늘한 그늘에 빗대어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밤하늘에 별이 떠오르는 것처럼, 동굴 안에도 풀잎이 돋아나거나 넝쿨이 자라나 안을 파고들 듯 세상에는 홀로 온전할 수 있는 생명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밤공기를 들이켰다.
“시간을 가늠하고 있었어.”
매일같이 쓸리고 헤집어지던 상처가 겨우 숨을 돌렸다. 곧 여름이 다가오게 될 테다. 여름이 오게 되면 그와 자신은 전과 같이 학교에 다닐 것이고, 수업이 끝난다면 종종 함께 마녀를 처치할 수도 있겠다. 자신은 덜 다칠 것이다. 그는 더 삶에 재미를 찾을 테고. 죽음은 한시적으로 멀어지겠다.
라미아는 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호흡
“준비됐어?”
“뭐, 그럭저럭.”
“이번 마녀는 대충 생각해선 안 돼.”
“알아. 네가 몇 번이고 말했으니까.”
“사실 좀 걱정되긴 하네.”
“네가 긴장이란 것도 하나?”
“겪어본 적 없으니까. 그리고 마법 소녀들 사이에서 워낙, 자자하거든.”
“그렇다고 해도 그들과 함께할 생각은 없어.”
“그런 말 한 적 없어.”
“알아.”
“계획을 여럿 생각해두긴 했으니까, 최선을 다해보는 수밖에.”
“……두렵나?”
“무엇이?”
“죽음이.”
“아니.”
“그렇다면?”
“두려운 것?”
“그래.”
“죽음보단, 글쎄. 따로 있어.”
“너에게 그런 것도 있었나.”
“잠깐, 애초에 네가 먼저 물어봤잖아.”
“글쎄. 찔러본 것일지도.”
“……그러는 너는?”
“두려운 것?”
“아니면 죽음.”
“익숙했지.”
“과거형이네.”
“이젠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
“무엇을?”
“둘 다.”
“……좋네.”
“그런가?”
“그럼.”
“그럼. 이제 가 볼까?”
“가 보자.”
“참, ……이상하지.”
“……라미아?”
“너와 함께라면, 무엇에도 질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어.”
“……갑자기? ……낯간지러운 말을. 그렇게 하는 타입은 아니었잖아.”
“그렇지. 하지만 말하고 싶었어.”
“꼭 유언 같네.”
“그렇게 되지 않게 해야지.”
“……그래도 좋다고 생각해, 나도.”
“……함께라는 말?”
“그렇지.”
곁에 있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 것, 걸어가며 발치로 스쳐 지나가는 풀잎과 들꽃의 모양새를 눈에 담는 순간이 있다는 것, 저 멀리서 들리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가 있다는 것, 해가 저무는 순간의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는 것, 자신의 존재를 고찰하는 것, 혀끝으로 닿는 커피 향을 계속 음미하게 되는 것, 비가 쏟아지는 날 우산 없이 그 아래를 걸어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그런 순간이 우리에게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특별히 정의하지 않아도 좋았다.
아픔을 알았고 눈물 흘릴 줄 알았으며 웃을 수 있었다. 분노하며 분개하며 가슴 찢어지는 격통에 때때로 주저앉을 수 있었다. 모두가 느끼는 감정이 있었다.
우리는 마땅히 사람이었다.
* * *
“가자.”
“그래.”
커다란 발리스타에 겨눠진 창대와 함께 검은 칼 몸의 식칼들이 허공을 부수듯 날아갔다.
여름방학을 3일 앞둔 낮이었다.
> 20210630
가장 완벽한 ■■의 여름으로 이어짐.
'1차 > 썰&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반메이] 사슴 숲의 꽃은 5월에도 지지 않는다 中 (0) | 2022.03.17 |
---|---|
[에반메이] 사슴 숲의 꽃은 5월에도 지지 않는다 上 (0) | 2022.03.17 |
[카일로즈] 아침 (0) | 2021.04.30 |
[카일] 한 번만 욕심낼게. (0) | 2021.04.09 |
[체르밀로] 烏飛梨落 (0) | 2021.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