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엘 립턴이 자신의 삶을 첫 시작부터 잘못되었다고 여긴다면, 또 무엇이 문제겠는가. 그의 삶이 탄생하는 순간부터 저무는 순간까지, 모든 것이 자신에게 속했는데.
그러니 소녀의 얼굴을 가르는 붉은 실선, 비로소 떨어지는 방울 소리에 그는 흐드러지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속으로 다정하다 못해 끔찍하게 속닥였다. 그거 알아, 야엘? 자고로 재災라는 것이… 피와 상성이 좋기 마련이라서.
* * *
소녀는 악마의 것으로써 태어났다. 그는 소녀의 얼굴에 흉을 남겼다. 악마의 권속으로써 가지는 문양을 남겼다. 그의 눈동자를 담아 목줄을 채웠다. 그렇게 소녀는 여인이 되었다. 칸으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는 이제 피가 멎어 짙은 흉으로 남은 여인의 얼굴을 볼 때마다, 핏빛 옅게 어린 그의 입술을 볼 때마다 차오르는 만족감이며 충동에 심장을 태웠다.
그러니까, 야엘. 나의 엘. 악마는 뜨겁기 짝이 없는 지옥의 구덩이에 처박힐 운명이잖아, 신에게. 이미 패배한 운명이라 무저갱에 추락하기 전 최대한 많은 인간들을 붙잡아 끌어내리려는 거잖아. 그만 말하라는 눈으로 보지 마, 그런 생각 한 적 없다고? 하하. 거짓말쟁이. ……말하고 싶은 건, 평범한 인간이라면 원죄를 지고 태어났을지언정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신께 붙어 악마를 떨쳐낼 수 있단 말이지. 그런데 너는 그럴 수가 없어.
원죄의 이야기를 떠나서. 너는 태어날 때부터 나와 운명이 얽혀버린 거야. 아, 너무 재밌지 않아?
네 삶이 잘못되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게. 참고로악마의말은믿지않는게좋아너도잘알겠지만.
함께 어린 시절부터 몸을 성장시킨 칸은 20년에 가까운 시간만에 본래 애용하던 신체로 돌아왔다. 곧게 선 몸, 호감 주는 미소는 수려한 얼굴 위에 떠올라 뭇 인간으로부터 선망과 경외로움을 곧잘 받는다. 남자는 비록 신의 옷자락조차 미치지 못하는 미물이었을지언정,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보다는 세상을 틀어쥐는 능력이 뛰어났다. 칸은 인간의 그러한 습성을 애정하면서도 경멸했다. 감히 신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신을 부정하는 꼴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진리를 목도하는 인간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인간은 악마의 유혹으로 인하여 타락해갔고, 그렇게 칸이 인도한 인간만 해도 몇 자리 수에 달하던가. 적어도 마지막 심판이 도래하기까지 이 세상은 악마들의 포식장이었다. 그는 진리-반대되는 의미이겠지만-를 목도한 인간 중 하나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아, 나의 충직한 숭배자들아, 어쩌면 이런 시대에서조차 내게 생명을 바치겠다는 깜찍한 생각을 했을까. 손가락 안쪽에서 박동하던 두려움을 기억한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숨을 애써 진정시키려 자신을 억누르던 눈동자를 기억한다. 악몽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도망쳐 깨어나던 소녀를 기억한다. 그가 다정한 음성을 내어 이른다.
"야엘."
나의 엘.
바람 불어 한순간 허공을 수놓는 머리카락은 어떻게 해서도 더럽혀지지 않을 듯 희다. 돌아보는 눈동자를 마주할 적 남자의 눈매는 본능처럼 휘어진다. 생기 도는 입술, 그가 남자의 것임을 증명하는 흉터와 문신, 남자의 눈. 그가 자연스럽게 인파를 헤치고 여인의 손을 그러쥐었다. 그 위로 가져온 꽃다발을 쥐어준다. 흑장미와 리시안셔스, 기만적인 델피늄. 야엘의 눈이 꽃 하나하나를 훑어보며 미미하게 굳어지는 것을 목격한 그는 다만 웃었다.
"졸업 축하해."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한 번도 야엘 립턴이 학기를 쉬지 않은 것은 칸으로서도 꽤나 의외의 일이었다.
처음 맛보는 자유가 문득 두려웠나,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나. 어느 생각이었든 그에게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곧 그가 다정하게 야엘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경직된 검은 눈동자로부터 그는 야엘의 어떤 감정을 읽었나.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였다.
"나들이는 즐거웠지?"
"…."
"그동안 보고싶었어. 참느라 힘들기도 했고."
여자의 어깨를 문대듯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야엘을 뱀처럼 옭아매는 그림자는, 분명히 재의 향을 가지고 있었다. 어둠이며 타 타오른 뒤의 잿더미며 인간을 유혹해 무저갱으로 빠뜨리는 악마가 야엘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할 수 있었다면 영영 낫지 못할 상처를 만들 걸 그랬다. 피가 눈물처럼 사시사철 뺨을 타고 흘렀더라면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 지금도 충동을 억누르기 벅찬데. 만약 그러했다면 그의 이성이 소진消盡되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을까.
그는 쾌락을 닮은 충동을 혀와 함께 삼켰다. 악마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가 속닥이며 발을 옮겼다. 이만 돌아가자. 공기가 아직 그렇게 쌀쌀하지는 않지? 야엘은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곧,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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