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귀旋歸 자국
그럼에도 해가 떠올랐다. 아이작은 동굴 속에서 홀로 눈을 떴다.
새벽까지만 해도 품에 있던 이스피어가 사라졌다. 이스피어가 품을 떠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이작의 몸의 상태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시야가 두 갈래로 나뉘다 합쳐지질 않나,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마자 절로 고통에 찬 소리가 터졌다. 고개를 돌렸다. 다친 팔의 상태가 제일 심각했다. 동굴 안을 유일하게 밝혔던 불꽃은 거의 꺼져가는 상태였다.
잿가루에 파묻힌 붉은 빛이, 아이작은 공연히 그것이 이스피어의 생명을 나타내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꺼져가고 있다. 그렇게 생겨난 불안감은 아무리 그가 고개를 젓고 숨을 들이켜도 지워지지 않았다.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 어둠 안쪽에서 생각한다.
살았을까? 죽었을까?
의식을 선명히 잡을 수 없던 지난 밤 그는 언뜻 들려왔던 방송 소리를 기억할 수 있었다. 새롭게 설치할, 아니, 이미 설치했을 보급품 창고에는 식량이든 식수든 치료 물품이든,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었다. 아이작은 다친 쪽의 팔목을 붙잡았다. 고통으로 온 몸이 떨렸다. 그런데도 그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떠났나. 자신을 위해 떠난 걸까.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꿰뚫렸던 상처는 이미 덧나, 거진 썩어가는 상태였다. 염증 앓아 온 머리가 무거웠지만 아이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몇 번 발을 헛디디면서도 넘어지진 않았다. 눈밭 위를 걸었다. 발자국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것이 흔적을 남겼다. 뱀이 기어가는 꼴이었다.
보급품 창고로 가까워질수록 작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에겐 여자와 함께 눈을 맞은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숱했지만, 떠나간 자가 웃음 지을 때 살며시 휘어지던 눈꼬리나 낭랑한 목소리가 연상되고 마는 것은 차마 막을 수 없었다. 환청이 분명했을 목소리가 그에게 물었다.
“왜 가?”
아이작에게 이스피어 틸다라는 존재는, 여러모로 참 규정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그가 아이작에게 있어 최초로 선의를 품고 그에게 다가온 사람인 것은 확실했다. 비록 그것이 계획된 선의였을지라도, 그는 괜찮았다.
“벌써 죽었을지 모르잖아. 살아있다면 네가 죽여야 하잖아.”
그는 제대로 발을 뗄 힘도 없어 자꾸만 눈을 기다랗게 긁었다. 그는 뱀처럼 매사 땅을 기어 다녀야 했기 때문에 하늘을 바라본 적 없었지만, 마지막이 가까워진 탓일지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의 색이 그의 눈에 담겼다. 그것을 따라 환각 속의 이스피어도 고개를 들었다.
왜 가느냐고. 죽었다면 허사고 살았다면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데, 왜 멈추질 않느냐고. 가랑눈이 쌓이나 그것은 그가 지나온 길을 덮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글쎄. 그는,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냥. 이스피어가 불행해지길 바라지 않았다. 그가 환각 속의 이스피어를 지나쳐 걸었다. 얌전히 서 있던 환각이 그의 뒤를 따라 걸어왔다.
그는 여자의 얼굴 위로 종종 자신이 겪었던 우울이며 절망이 드리울 때면, 여자를 그 진창 속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어 가슴이 탔다. 여자의 뺨 위를 덮은 석탄 가루가 얼마나 해묵었든 간, 얼마나 짙었든 간에 이미 새카매진 손으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닦아내 주는 것이다.
나랑 똑같아지지 마.
어쩌면 아이작은, 그런 말을 건네고 싶었다. 콧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환청이다. 새벽 날 들렸던 자장가다.
드디어 그가 절정 앞으로 달했다. 발끝으로 동백꽃을 해쳐 걸었다. 자장가 소리가 멀어진다, 어른거리던 금색 눈동자며 깜빡일 적 자그맣게 떨리던 속눈썹의 모양이 흩어진다. 환상이 아닌 실재가 있었다.
그가 보급품 벽에 기댄 채 쓰러진 이스피어를 봤다.
그는 이스피어의 행복을 바랐다. 그는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은 과거에서 무너져……제일 낮은 땅을 기어 다니는 운명에 순복했지만, 이스피어는 아니었다. 이스피어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스피어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명예나 영광이라 말했으나 그것은 행복해지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새벽같이 나와 창을 휘두르던 모습이 그랬다.
비늘 위로 햇빛 부서지듯 빛을 띠는 창날의 궤적이나,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응시하는 곳, 내리는 눈 쌓일 틈 없이 치열하게 움직이는 근육들이 만드는 자그마한 그림자들이었다. 그 모든 순간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작에겐, 그냥, 자신과는 다르게.
이스피어는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 같았다. 헝거 게임이 끝난 뒤로도 아침을, 저녁을, 또 그 다음 날을 맞으며 살아가야 할 사람 같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신보다 한참 작은 여자애가 자신을 뭘 도와주나 궁금해서 지켜보다가, 자신을 놀리며 괴롭히는 모습에 살짝 학을 떼기도 했다. 실제로 밤늦게 자신을 찾아왔을 땐 골머리를 앓았다. 그런 다음엔 새벽부터 창을 다루며 연습하는 모습엔 조금 놀라기도 했다. 무슨 심보인지 그 뒤로 자신에게 일절 접근하지 않거나, 게임이 시작하자마자 자길 죽일 사람을 보낼 땐 또 특유의 변덕스러움이 도진 것인가 싶었다. 또, 그러다 비명을 들었고, 뒤쫓았고, 날 선 채 자신에게 창을 던지던 이스피어를 본 뒤로는, 아이작은 이스피어를 지켜주고자 했다. 이스피어는 그럴 만한 사람이니까. 그걸 돕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참 많은 대화를 나눴다. 턱없이 긴 밤을 지새웠다, 함께 겨울을 견뎠다.
그러니까 당장 눈을 감으면-언젠가 온 세상에 어둠이 드리운 때 ‘더 잘할 수 있다’라며 흐느끼던 이스피어의 떨림이 여태 선명했다, 떠나기 전 제 팔을 손가락으로 찔러보며 ‘이러다 아예 자르게 생겼네’라며 말하던 이스피어의 망설임 섞인 목소리가 있었고, 그리고,
“Twelve, 너는 엄마 기억 못 한다고 했지?”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손길이,
“난 그래도 조금은 기억하고 있거든.”
그 희미한 웃음이,
“그래서 내가 그 기억을 너한테 조금, 공유해주려고 해.”
그에겐, 아직도,
“잘 들어, 알겠지?”
자장가 소리가 생생한데.
……그러니 왜 가느냐고. 죽었다면 허사고 살았다면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데, 왜 멈추질 않느냐고. 아이작이 이제야 답한다. 누군가가 죽는다면, 죽어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어야 했다고.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이스피어가 아닌 자신이라고. 겨우내 오늘날까지 살아낸 자신이라고.
나, 아이작 딜라이트라고.
“…….”
그리고 언제나, 세상은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희망이나 염원, 겨울철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든 행동 말이다.
죄가 있다면 그가 감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 까닭이겠다. 그의 발치에 새빨간 핏물이 연접했다. 그는 애써 헐떡이는 숨을 억누르려 했다. 내린 눈송이 하나가 그의 뺨 위로 앉았다.
그대로 아이작이 물었다.
“죽을 거야?”
추위 때문인지, 눈앞이 아플 만치 달아올랐다. 그가 다시 물었다.
“죽기로 결심했어?”
그 말에 이스피어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린 하늘 아래 선명하지 않은 금빛이 나타났다. 꺼져가던 불꽃을 떠올려버리고만 아이작은 순간 눈을 감고 말았다. 여자의 속눈썹에 붙어있던 하얀 눈꽃이 팔랑팔랑, 그의 꿰뚫린 복부 위로 떨어졌다.
감은 눈 아래 보이는 어둠은 절망을 닮았다. 겨울에 피어나는 꽃이 비단 동백만이 아닌 사유였다.
* * *
에이미는 울며 말했다.
“넌 지옥에 떨어질 거야. 나도 마찬가지고.”
이스피어는 그 얼굴이 언젠가의 밀 에버그린과 흡사하단 생각을 가졌지만, 배에 난 구멍 때문에 웃을 힘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었지. 가랑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스피어는 힘겹게 보급품 창고 안쪽에 겨우 기대 앉았다. 반쯤 기어 지나온 그대로 자국이 남았다.
이스피어가 힘없이 말했다.
“너, 걜 사랑했구나?”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었지만, 그 질문의 답만큼은 꼭 듣고 싶었다. 그러니까-대체 무엇이 에이미 뮐러를, 그렇게 아득바득 움직이게 만들었나 싶은 의문이었다. 어떻게 그는 포웨나보다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자신을 상대했을까, 어떻게 죄악감 짙은 얼굴로도 제 배를 꿰뚫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어떻게 이스피어를 무너뜨렸을까.
점점 혈색을 잃어가는 에이미의 입술이 움직였다.
“……카이클을?”
“응. ……걔랑 같은 구역이야? 이렇게 된 참에, 여자들의 대화(Girl's Talk)나 해보자고, 우리.”
“넌, 하, ……쿨럭,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
희미한 호흡 가운데 희미한 웃음이 에이미의 얼굴 위로 떠오르면, 이스피어도 그를 따라 웃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어쩌면 여자와 자신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우습게도 이런 때에 그런 생각이 찾아왔다.
“카이클은, ……나랑 같은 구역, 이야. 4구역, 사실, 원래 잘 알던 사이는……아니었어.”
“그래. 뭐. 그 많은 아이 가운데 뽑힐,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대부분 모르던……사이였겠지.”
“걘 4구역 출신이면서도……수영을 못했어. ……어릴 때……뭐라 했지, 빠져 죽을 뻔, 했다나…….”
잿빛 구름이 하늘을 둥실둥실 떠다니다 문득 태양을 가리면, 에이미의 위로 옅은 그림자가 생겨났다. 에이미에게 먼저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스피어는 축음기가 재생하던 아들의 외침을 떠올렸다. 아버지, 아버지는 마왕이 보이지 않으세요? Siehst, Vater, du den Erlkonig nicht?
에이미, 그렇다면 네게는 마왕이 보이니? 이스피어는 에이미에게 차마 그런 물음을 건넬 수 없었다. 그림자는 이미 이스피어의 위로도 드리워진 상태였다. 눈이 가물가물 감겨왔다. 약과 식량을 구해서 돌아가려고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하지만 꼬인 실타래는 이미 손아귀를 벗어나, 바깥으로 툭 굴러간 상태였다.
손댈 수 없는 것 뿐이었다. 어쨌건 이스피어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걸즈 토크에 집중하기로 했다.
“같은 구역이라 친해진 거야?”
“아니, 우린. ……걔가 날 도와줬어. 난. ……불을 피우는 걸……못 했거든. 걘 물을 무서워했으니까, 우린 서로를 도와주기로 했어, ……그땐 경기장이, 어떻게 될지 몰랐으니까,”
“그건 우리랑 같네.”
“……‘우리’?”
“걔 있잖아. 너희들이 음침하다고, 막, 호박씨 깠던 애.”
그 말에 에이미는 힘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키득키득 웃다가도 그는 목을 부여잡고 숨을 가라앉혀야 했다. 자그마한 움직임에도 기민하게 피가 빠져나왔다. 피를 멎게 할 때는 이미 지났어도 한참 지난 형편인 것을 알았다.
에이미 뮐러는 이곳에서 죽는다. 그 사실이 한없이 무겁게, 또 한없이 가볍게 에이미를 짓누르고 있었다. 다만 때때로 사경을 헤매는 자들이 그 순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이한 해방감이 있었다. 그것이 에이미로 하여금 입을 열도록 했다.
“걔를, 사랑했을지도 모르겠어…….”
“……확정은 안 짓는구나.”
그의 눈꼬리를 타고 작은 눈물방울이 흘렀다.
“어차피 이젠……상관이 없잖아.”
흘린 눈물은 이른 시간 내로 얼어붙겠다. 그리고 그 전에 에이미 뮐러는 영영 눈을 뜨지 못할 것이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온다. 하지만, 이렇게 이른 나이에 찾아오는 건 조금 너무하지 않나.
이스피어도 에이미도 사후 세계를 믿지 않았다. 이스피어는 에이미의 심정을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정말 죽는다면, 그 뒤에 카이클을 만났으면 했다. 그 카이클이 환상이라도 좋았다. 물론 이스피어의 바람願은 바람風처럼 무게 없이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라, 그런데도 누군가의 죽음을 돌이킬 방법은 없었다.
눈을 감기 직전, 에이미가 중얼댔다.
“그래도, 진짜 살고 싶어, 나…….”
바람은 잦아들어 서리 같은 한기만 남는다. 이스피어가 감았던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렸다. 여전히 눈이 내린다. 구름에 가려졌던 햇빛이 살며시 벌판 위로 다리를 뻗어오나, 눈을 녹이기엔 한참 옅다.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혼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동굴을 떠나기 전 남자를 한 번이라도 깨워볼 걸 그랬나. 언제나 후회는 늦었다. 시간은 매정하게 흘러간다. 이스피어는 배를 덮던 손을 들었다. 손바닥 안에 끝내 담기지 않고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만 같다.
그 위로 눈 알갱이 하나가 나풀나풀 내려와 떨어질 때에서야 이스피어가 차게 식은 입술을 열었다. 묻는다.
“에이미,”
죽은 자는 답이 없다.
“죽었어?”
겨울은 한결같이 길다.
외톨이가 된 이스피어는 점점 말하는 법을 잊어 눈을 감았다. 확실히 죽을 때가 되니 눈앞에 떠오르는 사람이 확실해졌다. 바로 전까지도 좀, 긴가민가했던 것은 비밀이다.
환각이 이스피어의 앞에 섰다. 목전의 신기루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이 몇 가닥 나 있었고, 그 무심해 보이는 얼굴 위론 은색 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대상의 손은 두껍다. 거칠거칠했다. 하지만 따스하지는 않다. 이스피어는 이제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 허상의 실재가 부재한 것이, 또 죽음이 닥쳐온다는 것이 마냥 두렵진 않았다.
시간이 흐른다. 감각은 멀어져갔다. 마치 꿈에 빠져드는 것처럼 세상과 유리되는 느낌이 발밑에서부터 온몸을 뱀처럼 휘감아 올랐다.
그 과정에 순응하여 눈을 감고 있노라면, 저 멀리서부터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힘겹게 눈을 뜨면 묘연한 형상이 있다. 그의 환상을 닮았다. 아니,
남자다. 이스피어는 다시 힘없이 눈을 감는다.
실재하는 아이작이 이스피어에게 묻는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죽을 거야?”
그러나 그 물음을 들은 뒤, 이스피어는 왠지 그가 울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죽기로 결심했어?”
그러니 이스피어가 감기던 눈을 뜬 사유는 명확했다. 흐린 하늘 아래 선명하지 않은 금빛이 나타났다. 속눈썹에 붙어있던 하얀 눈꽃이 팔랑팔랑, 그의 꿰뚫린 복부 위로 떨어졌다. 이스피어가 아이작을 봤다. 저 위 어디선가 경박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던 것도 같았다. < 자, 드디어 두 명의 조공인만이 남게 되었군요! 이 자리에서 헝거 게임의 승자가 가려지게 됩니다! >
눈을 굴리던 이스피어가 웃었다.
“안 죽어. 아직은 안 죽지. ……하지만 이젠 너랑 나밖엔 안 남았잖아, Twelve.”
“…….”
“혼자……생각해봤거든. 내가 널 직접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
“…….”
“무슨 결론이 나왔을 것 같아?”
그리 묻는 이스피어는 차게 식어가는 몸과 반대로 얼핏 따스한 기운을 담고 아이작을 보고 있었다. 분명한 허세였다. 이스피어가 실시간으로 죽어가고 있단 사실쯤은 이 자리의 모두가 알았다. 그나마 걸리는 점은 아이작의 팔인데, 썩어가는 팔이야, 뭐. 캐피톨이 알아서 잘 고쳐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힘겹게 이어 나가는 이스피어의 앞으로 아이작이 천천히 몸을 낮췄다. 한쪽 무릎을 핏물 밴 눈 위로 얹어 지탱하고, 한쪽 손으로 그 옆을 짚어 이스피어의 흐린 눈을 본다.
그는 평소처럼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죽어줄까.”
“……하,”
그 말에 이스피어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마자 이는 통증에 힘없이 얼굴을 찌푸려야 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죽여줄까’도 아닌 ‘죽어줄까’라는 말이 저 무뚝뚝한 아이작 딜라이트에게서 나왔다는 게, 이래선 안 됐는데, ……그것이 이스피어에게 꽤 유쾌하게 느껴졌다. 웃음을 억누르는 통에 숨이 들쑥날쑥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이스피어를 바라보던 아이작은 확신의 표를 찍었다. 이스피어는, 역시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 죽일 수 있대도 죽이지 않는다.그가 덧붙여 말했다.
“지금 얘기하면 네 계획에 어울려줄게.”
마치 선심이라도 쓰겠다는 양 말하는 모습에 얼굴을 찌푸리듯, 이스피어가 다시금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언제는, 내 계획을 어그러……뜨리겠다더니.”
“……그러고 있잖아. 넌 혼자 죽을 작정이었는데, 내가 와준 거잖아.”
시야가 깜빡깜빡 점멸했다. 하지만 무섭지 않았다. 정말이었다. 되려 편안하고, 안락한 것이, 꼭 새벽 날 아이작이 자신을 안아준 양 따스했다. 감각을 태반 잃어가는 중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이스피어는 감기려는 눈에 더 이상 힘을 주지 않았다. 잠시 의미 없는 언어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나, 원랜 해가 뜨기 전에 약만 챙기고, 너한테, 돌아가려고……했다?”
“그럴 것 같더라.”
“이렇게 된 거에, 딱히. 화는 안 나, 근데……네가 여기까지 올 줄은, 또 몰랐어, 난.”
“말하지 마.”
아이작은 굳이 이스피어의 배 위를 압박해 지혈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가 디딘 무릎과 지탱하는 손바닥부터 한기가 온몸을 얼리듯 했다. 언제나 그의 말이란 말은 흘러가는 바람처럼 취급하던 이스피어답게, 그가 더듬더듬 말했다.
“있지, 난 내가, 이 순간엔 정말 아빠를 떠올릴 것 같았거든,”
이젠 상도 제대로 맺히지 않는 시야 가운데, 이스피어가 자신만의 그림자에, 함께 겨울을 견딘 남자에게로 손을 뻗었다. 어둠 속 손이 닿았다. 윤곽을 더듬어보다 말았다. 내뱉는 숨이 허공에 그리는 자국도 점차 연해져 갔다.
한없이 외롭던 가슴이 누군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온정에 물들었다. 눈물이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마른 눈은 깜빡이기조차 쉽지 않았다.
“근데, 네가 나타났잖아, 그래서 그래. 네가 보여서…….”
끝내 실토한다.
“……네가 있으니까 좋아.”
“그래?”
“처음으로 외롭지 않은 것 같아. ……너도 그래?”
“내 평생이 외롭지만은 않을 건가 봐.”
“……너도 그렇다면 같이 죽어줘.”
그리고 이스피어는 이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그가 일평생 놓치지 않았던 창을 아이작에게 건넸다. 땅을 짚은 아이작의 손가락이 조용히 굽어들었다. 이제 아이작은 이스피어에게 있어 창이란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닌 물건인지, 그가 얼마나 목숨 바쳐 창을 사랑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것조차 아버지의 잔재란 것을 알았는데도 말이다.
아이작은 끝내 창을 잡았지만, 끝내 그런 이스피어의 창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또 이스피어의 마지막을 그런 식으로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창을 옆에 내려놓았다. 마지막만을 선택할 수 있다는 현실이 무정하다. 마지막이라도 선택할 수 있다는 현실이 그런데도 기꺼웠다. 혼란에 찬 음성이 하늘을 울렸다.
< ─잠깐, 지금 무얼 하는 거죠? >
그는 일전 챙겨온 마체테를 꺼내 들었다. 피가 채 닦이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만, 마지막을 장식하기엔 충분히 예리했다. 그가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팔로 벌벌 떨며, 간신히 이스피어를 끌어안았다. 힘껏 안았다. 그를 마주 안을 힘이 없던 이스피어는 겨우 한 손만 들어 아이작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캐피톨은 아마 난리가 나는 중이겠다. 이스피어가 경각에 생각했으나, 아버지의 얼굴까진 떠올리고 싶지 않아 생각을 관뒀다.
아이작이 칼날을 이스피어의 등 쪽으로 향해 세웠다. 영원무궁할 판엠이여, 우리는 한 명만의 생존을 용납할 수 없어 함께 죽는다.
< 아이작, 이스피어! >
아이작이 말했다.
“다음 생에선 좀 제대로 살아보자.”
우리는 한날한시에, 함께 죽는다. 차라리 죽으련다.
“응. 다음 생에선, 우리…….”
어차피 또 만날 테니까. 아이작이 칼을 높게 치켜들었다. 그대로,
꿰뚫으려던 순간이었다.
< ──그만! >
……한순간 온 경기장에 적막이 흘렀다. 칼날이 직전에서 멈췄다. 아이작이 고개를 들었다. 숨이 멈춘다.
판엠이 선언한다.
< 이번 헝거 게임은, 아이작과-이스피어의 공동 우승입니다! >
“…….”
< 이로써 제49회 헝거 게임이 끝이 났군요. 여러분, 공동 우승자가 나오다뇨! 헝거 게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 정도의 러브 스토리는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흘러도 다시 나오지 않을 것 같아요. 한 편의 영화라도 본 기분입니다. 모두 그렇지 않나요? >
“……뭔, ……뭔, 상황이야?”
이스피어가 힘겹게 더듬거렸다.
< 축하드립니다, 아이작, 그리고 이스피어. >
아이작이 말 없이 마체테를 떨궜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세토록 위대할 판엠은, 언제나처럼 일방적인 판결을 내렸다.
< 여러분은 헝거 게임에서 생존하셨습니다. >
헛웃음 진 아이작은 정말, 까무룩 기절하기 직전인 이스피어를 끌어안았다. 다음 생까진 가지 않아도 좋겠구나. 그런 생각이 파고들었다.
“……우린 멀지 않은 순간에, 다시 볼 예정인가 보다.”
영원무궁할 판엠이여, 우리는 한 명만의 생존을 용납할 수 없어 함께 죽는다. 우리는 한날한시에, 함께 죽는다. 차라리 죽으련다.
그렇게 죽기를 결심한 그 순간 모순적이게도 죽음이 물러간다. 멀어져갔다. 혼자가 아닌 자신이 살아남았다. 삶을 내던져 자신과 함께 죽어주겠다고 말한 남자가, 곁에 있었다.
조금이나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겨울 구름이 걷히고 패널이 점멸했다. 진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이스피어는 눈을 감았다. 캐피톨의 공표는 때마침 내려온 동아줄이었지만, 앞으로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절대 없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게임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이스피어와 아이작에겐 만만찮은 압박이 들어올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모든 건……일단 나중에 생각하고 싶었다. 아이작의 옷깃을 붙잡은 손이 스르르 떨어졌다.
“……이스피어. 아직 잠들면 안돼.”
“나, ……졸려.”
“안돼. 조금만 더 견뎌. ……할 수 있잖아. 곧 헬기가 올 거야.”
“조금만 잘게. 잘래.”
“안돼.”
“…….”
“……이스피어.”
“…….”
그러나 아이작도 서서히 눈을 감았다. 차라리 겨울이라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점은, 추위가 통증마저 얼어붙게 한다는 점이 아니었을까. 헬기에서 둘을 구조하기 위해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잘 자, 이스피어…….”
나란히, 우리는 긴 꿈에 빠졌다.
꿈에는 네가 나왔다.
'IFEAR&MARPASHI > 눈결 뱀 꼬리 그릴 때 (헝거 게임 AU)'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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