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 보류
깜빡 잠들었던 정신을 다시 깨우니 어느새 이스피어는 푹신한 옷가지들-혹은 배낭 조각?-위에 누워있는 상태였다. 어둑한 천장, 아니. ……동굴이었다. 이스피어가 눈을 깜빡였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히 덫을 놓으려다 되려 덫에 걸렸고, 도망치던 와중 아이작과 만나 이렇게 되었지. 아이작의 은신처는 세콰이어 숲 안의 동굴이었다. 이런 곳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스피어가 삐걱대는 몸을 애써 일으켰다.
그러고 보면 잠결에 “여기 얌전히 있어. 장작 좀 가져올 테니까.”라고 말하는 아이작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그게 꿈이 아니었나 보다.
조용히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카락을 한 차례 쓸어 넘기던 이스피어는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잠기운에 둔해져 있던 통각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야…….”
뼈가 보일 정도로 살점이 패인 발목은 다행히 진물이 나 있거나 살이 괴사해가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스피어는 생각을 멈추지 않아야 했다. 만약 덫을 놓은 자들이 날에 독을 묻혔을 가능성은? 이스피어가 지금까지 지나온 숲은 겨울날 자랄 수 있는 독초가 없었다지만, 보급품을 받았을 수 있었다. 적팀에 독을 잘 다루던 남자애가 있었던 것 같기도……했으니까.
무엇이든 확신할 수 없었던 이스피어는 고민 끝에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찌르르 울리는 고통에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동굴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세찬 바람이며 한기가 점점 몸을 파고들었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은 그쳐있었다. 온통 잿빛인 하늘에서 연상되는 누군가를 떠올린 이스피어는 그제야 자신이 동굴 안에 창을 놓고 온 사실을 깨달았다. 하. 헛웃음도 잘 나오지 않았다. 오스틴의 딸이, 그리고 그를 닮아 무섭도록 창을 잘 다룬다는 이스피어가 정작 창을 놓고 오다니? 누가 이런 상황을 상상이라도 했을까.
다만 자책은 짧았고, 비교적 행동은 빨랐다. 이스피어는 다치지 않은 쪽의 다리를 굽혀 무릎을 대고 바닥에 쌓인 눈을 두 손으로 모았다. 이걸로라도 상처 부위를 씻을 생각이었다. 죽도록 아프겠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닥쳐올 고통을 곱씹는 것은 행위만 지체시길 따름이었다.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제,
“……?”
그대로 상처를 씻으려 했는데.
서늘한 바람이 불었나, 그도 아니면 단순한 직감이라 표현해야 했을까. 이스피어가 더디 고개를 들었다. 나무 사이로 언뜻 보이는 검은 형체의 사람은 이상할 만큼 그에게로 경계를 가질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속닥이는 음성은 익숙한 단어를 그려냈다.
“Twelve?”
아이작이었다. 이스피어의 입술이 자그맣게 벌어졌다.
불원(* 오래지 않아서) 아이작은 이스피어를 발견했다. 그에게로 다가오는 아이작의 얼굴은 처음 황당함에 물든 뒤론 어처구니없다는 뜻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스피어는 저를 냅다 일으켜주는 아이작에게 히죽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체 뭐 하는 건데?”
“아야야, 살살 일으켜. ……뭘?”
“그런 몸 상태로 혼자 나와?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봐, 난 널 마중 나오거나 한 게 아니라 상처를 소독하려고 나온 거야. 난 여기서 우승하고 나서도 발목을 잘라내고 싶진 않거든?”
“소독?”
아이작의 시선이 이스피어의 손을 향했다. 아이작이 이스피어를 일으켜주며 눈은 태반 떨어져 나갔지만 여전히 붙어있는 눈이 있었다. 그런 다음 그는 어정쩡하게 이스피어의 몸을 지탱시키는 다리를 보았다.
아이작이 눈을 맞추며 말했다.
“눈으로? ……제정신이야? 불을 피울 생각은 안 해?”
“Wait, 넌 왜 나를 이렇게 다그쳐? 네 말마따나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런 몸 상태인 더 먼 곳으로 장작을 모으러 나가? 눈으로 하는 게 베스트였단 말이야.”
콧방귀 뀌는 이스피어의 눈앞으로 아이작이 모아온 장작을 보여주자 의기양양하던 이스피어의 콧대가 아주 조금 낮아졌다. 그것도 잠시, 아이작을 째려보는 시선에 그는 한숨을 푹 쉬며 저번처럼 몸을 숙였다. 그가 이스피어를 들쳐 안았다.
그렇지만 심통난 심정이 풀리지 않았던 이스피어는 아이작의 목을 끌어안고서도 고개를 돌려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곁눈으로 살펴본 아이작의 눈이 얇게 뜨이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아이작이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분명히 너도 인간이라 아플 텐데…….”
“흥.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운을 띄우는 거야?”
“아직도 네 입이 살아있는 걸 보면 누가 쳐들어온다고 해도 넌 살아있을 것 같긴 하다.”
이스피어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새침하게 답한다.
“욕인 것 같지만 칭찬으로 들을게.”
동굴 안으로 들어온 아이작은 다시 이스피어를 바닥에 내려주며 동굴 한편에 모아온 장작을 놓았다. 그 모습을 안 보는 듯해도 다 보고 있었던 이스피어는 아이작과 눈이 마주칠 것 같아 보이자 냅다 등을 돌려 누웠지만, 종내 아이작 쪽으로 되돌아 누웠다.
그동안 이스피어 쪽으로 시선 하나 주지 않던 아이작은 본격적으로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스피어가 물끄러미 그 모습을 관찰했다.
그러던 이스피어의 입술이 열린 것은, 막 장작 사이로 불꽃이 피어날 즈음이었다.
“여전히 내가 알려준 대로는 안 하네.”
장작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났다. 어둑한 동굴 안에 주황빛 빛이 타올라 그림자가 옆으로, 또 옆으로 출렁거렸다. 아이작은 꺼지려는 불꽃을 두 손안에 가둬 숨을 불어넣었다. 불꽃은 몇 차례고 꺼질 듯 말 듯하다 기어코 몸집을 부풀렸다.
그리고 나서야 마른 장작을 하나 더 던진 아이작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이냐며 묻는 것 같은 남자의 얼굴에 이스피어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너한텐 그 방법이 제일 편한가 봐.”
아이작은 특별히 그 말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입술을 달싹였다. 이스피어는 그답지 않게 답을 기다리는 인내를 보였고, 침묵하던 아이작은 느릿하니 입을 열었다.
“내가 교양하곤 좀 뒤떨어진 인간이라.”
그렇지만, 인내 끝에 나온 답이 고작해야 저거라니! 이스피어는 저렇게 쑥맥 같은 남자를 처음 봤다. 지금으로선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잠재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런 이스피어의 심경을 알 리 없던 아이작이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아무튼. ……불도 피웠으니까 넌 여기 가만히 있어.”
“가만히 누워서, 뭘 하는데?”
“……눈 좀 담아올 테니까, 그걸 녹인 물로 상처 소독해. 눈으로 냅다 상처 후벼파지 말고.”
“어머.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누가 들으면 내가 되게……야만적인 사람 같잖아? 시청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어!”
“잔말 말고 누워나 있어.”
“꺅!”
들썩거리는 이스피어의 어깨를 잡아 누르고 일어나려 했던 아이작은 손이 닿지도 않았는데 비명을 지르며 그를 바라보는 이스피어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물론 이스피어는 뻔뻔함을 재능처럼 타고난 여자라, 하나도 상처받지 않았다.
더 말하면 아이작의 입만 아팠다. 고개를 절레 저은 아이작이 동굴 바깥으로 나섰다.
배낭에 든 작은 냄비로 눈을 녹여 차갑지는 않게 된 물이 모였다. 아이작은 이스피어의 상처를 씻어준 뒤 그 위로 붕대를 감았다. 약은 없었다지만 뒤늦게라도 상처를 씻었으니, 이대로 덧나지 않고 상처가 잘 아물길 바랄 뿐이었다.
아이작은 먹을 것을 구하러 간다며 또 동굴을 나섰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이스피어는 바닥을 뒹굴뒹굴하며 불이 타들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도 아니면 누운 상태로 창을 어루만졌다. 상념에 빠지는 것 말곤 특별한 놀거리가 없었다. 한마디로, 이스피어는 심심했다.
언제 발소리가 들려올까 집중해서 귀를 기울여봐도 기다림은 길어져 갔다. 들려오는 바람 소리 사이로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건지, 그도 아니면 눈이 내리는 건지. 유추할 수 없는 것만 많아진다. 이스피어는 자신의 이런 모습도 캐피톨의 카메라를 통해 생중계되고 있을까 머릿속으로 꽃잎을 하나하나 뗐다.
어쨌거나 모든 기다림엔 끝이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희미해지는 의식을 일깨우는 발소리에 이스피어는 벌떡 일어나 상대를 불렀다.
“……왜 이리 늦게 와!”
그리고 이스피어는 돌처럼 딱딱한 청년에게서 딱히, 답이 돌아오리라 생각하지 않았었다.
지금, 이 순간 아이작의 입술이 열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말이다.
“늦었나? 빨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는 남자의 모습이 크게 뜨인 눈 안으로 담겼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이스피어가 꽃답게 웃었다. 장난스럽게 말했다.
“기다리다 목이 빠질 정도로 늦었어.”
* * *
그날 밤은 헝거 게임이 시작된 이래 제일 평화로웠다.
“설마, 지금 저걸 먹으라고 가져온 거야?”
“물고기 싫어해?”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아마도? 그랬다.
이스피어가 손으로 이마를 탁 치며 눈을 감았다. 참담한 표정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그가 살며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심지어 무엇이 문제인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아이작의 얼굴이었던지라, 이스피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외쳤다.
“물고기에 흙이 철퍽철퍽하게 붙어있잖아!”
“…….”
하지만 그러고서도 아이작은 ‘왜 하필 철퍽철퍽 이란 단어지?’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입만 떡 벌리고 있던 이스피어는 직접 바닥에 떨어진 물고기를 주워들었다. 한숨이 비처럼 내렸다.
“그래,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어?”
내 팔자가 이 모양이니 뭐니 중얼거리는 이스피어는 꽤 익숙한 솜씨로 물고기에서 흙을 털어 씻었다. 곧 아이작에게서 빼앗아 온 잭나이프로 물고기를 해체하기 시작한 이스피어는 칼 손잡이로 머리를 쳐 물고기를 기절시킨 뒤 날을 눕혀 비늘을 벗겨냈다. 옆에서 물고기의 배를 갈라 내장을 빼내고 물로 헹구는 모습을 본 아이작은 속으로 조용한 감탄사를 흘렸다. 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손질한 물고기를 구워 먹고 난 뒤부터였다. 이스피어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그의 숨은 미세하게 들끓었고 때때로 갈라졌다. 아이작과 눈이 마주칠 때의 이스피어는 무슨 문제냐는 양 웃음 지었으나, 아이작은 그런 것을 그냥 넘어갈 남자가 아니었다.
끝내 그의 손이 이스피어의 앞 머리카락을 해치고 이마의 살갗 위를 덮자, 그는 특별히 당황하지는 않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끈한 체온이 옮겨붙었다. 더는 거친 숨소리를 숨기지 못하는 이스피어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동굴 벽에 기대있던 몸을 옆으로 사르르 늘어뜨리면, 머리가 바닥에 닿기 전 누군가의 두꺼운 손이 그사이를 덮어주었다. 이스피어가 경각에 생각했다. 아버지의 손과는 한참 다르네.
눈을 깜빡일수록 한층 무거워지는 눈꺼풀은 어질거리는 기분을 안겨다 주었다. 열 기운에 눈을 감은 이스피어가 아이작에게 물었다.
“나한테 왜 이래?”
어쩌면 그것은 아이작이 처음 이스피어를 데리고 도망쳤을 때 물어봤어야 할 질문이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아이작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제 몸을 살며시 들어 올려 그나마 푹신한 바닥 위로 올려주는 아이작의 몸짓은 언제나 단단하게 느껴졌다.
여느 때처럼 묵묵한 음성이 답으로 돌아왔다.
“그럼 넌 ‘그날 밤’에 나한테 왜 그랬는데?”
그 대답에 픽 웃음을 흘린 이스피어가 눈에 힘을 주어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불분명한 상이 붙잡혀 아이작의 얼굴을 담았다. 얼굴 하나는 참 잘났단 말이야. 이스피어가 생각했다. 새까만 아이디어가 번뜩 떠오르는 것은 그 직후였다. 예로부터 시청자라면 이런 장면에 흥분하기 마련이었으니, 무슨 소리냐 하느냐면.
─이거, 스폰받을 각이다!
계산을 끝마친 이스피어의 얼굴 위로 능글맞은 웃음이 드리웠다.
“그날 밤?”
그리고 이제 아이작은 이스피어의 저런 표정을 볼 때면 불안감부터 느끼게 되었으니, 그가 나름-다급하게 입을 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뭘 하려는 건데.”
고민하는 척하던 이스피어가 아이작을 꾀듯 간질거리는 음성을 내어 말했다.
“네가 키스하기 좋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랬지.”
아이작의 입술이 다물린 것을 확인한 이스피어가 키득키득 웃었다. 남자에게로 손을 뻗는다. 소곤거렸다. 왜.
“지금도 그래 보이는데. ……거절할 거야?”
아이작은 제 옷깃을 잡아 오는 이스피어를 내치지 않았다. 언뜻 보기엔 거절하지 않는 모습이다. 뜸을 들이던 아이작이 답했다.
“응. 거절할 건데.”
남자의 말과 행동이 등을 보이자 이스피어는 얼굴을 찌푸리듯 웃었다. 이해되지 않아 물었다.
“왜?”
끌어당긴다.
“이 와중에도 머리 굴리는 게 떡하니 보이는데……냉큼 무는 사람도 있나?”
그리고 아무래도. 그 ‘냉큼 무는 사람’은 여기 있던 모양이었다.
이스피어가 입술을 벌리며 아이작의 입술 위로 제 것을 겹쳤다. 말캉한 감촉, 그리 따뜻하지만은 않은 온기가 느껴진다, 아마도 제 열이 심해 상대적으로 아이작의 입술이 차갑게 느껴지는 것일지 몰랐다. 영원 같던 시간은 언제나 별 무리처럼 흐른다.
이스피어가 지척에서 속삭였다.
“물어줘……. 또, 지금은 내가 너무 힘들 때란 말이야.”
몸을 일으킬 여력이 없었던 이스피어에게 끌려, 손으로 바닥을 짚었던 아이작은 기어코 팔 전체로 땅을 짚었다. 그의 당혹스러운 숨이 위로 쏟아졌다. 이스피어의 팔은 그런 아이작을 옥죄듯 목뒤로 뻗어져 머리를 끌어당겼다. 마치 도망칠 수 없다고 말하듯이 그의 손가락이 아이작의 목덜미나 목덜미 쓸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아이작은 끝내 작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따라 속닥거렸다.
“너 진짜 악취미야, 이거. 알아?”
그런데도 그는 연잇는 입맞춤을 거절하지 못했다. 스폰을 받고자 하는 이스피어의 속뜻을 알아차렸든지, 아니면 어떤 다른 감정 때문이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이스피어가 그 순응을 깨닫지 못할 리 없었다. 입맞춤을 따라 점점 달뜨는 감정이나 기분에 이스피어의 손끝에만 힘이 들어갔다. 가쁜 숨을 억누르던 이스피어가 자그맣게 물었다.
“그럼 왜 거절 안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넌 이럴 정신이 있어?”
“거절 안 하는 거 보면……너도 좋다는 거잖아.”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은 둘이 뒤엉켰다. 헝거 게임이나 조공인, 구역, 캐피톨과 아버지, 그리고, 모르겠다. 떠오르지 않는다. 열기에 모든 생각마저 뭉그러져 갔다. 스폰을 받기 위해 시작한 입맞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노골적인 양상을 띠었다.
이스피어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넌 참 이상해.”
“뭐가.”
“눈 감고선, 그냥. 버리고 가면 편할 텐데도.”
“내가 왜 널 버리고 가. 아니면 버리고 가 달라고 비는 거야?”
아이작은 끝까지 여자를 거절하지 못했다. 다만 그림자를 드리우며 입 맞추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이스피어의 행동이 본인의, 본연의 욕구보단 열 기운에 더욱 기인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될 따름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직후 불편해지는 속은 사뭇 날카로워, 아이작은 불편한 숨을 내뱉었다. 작게 욕을 중얼거리기도 해야 했고.
단단히 미쳤다. 아이작이 생각했다. 몸을 지탱하던 팔을 세웠다.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스피어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젖어있어 그는 다시금 욕을 중얼거렸다.
몸을 일으킨 아이작은 이스피어의 모든-붙잡아오는 손길을 떼어내며 이스피어의 옷가지를 단단히 여며주기나 했다. 열 기운이 가득한 이스피어를 꽁꽁 싸맨 뒤엔 그를 끌어안고 누웠다. 혼곤함 중에 있는 이스피어가 눈만 끔뻑이며 물었다.
“뭐 해? ……더 안 하고…….”
아이작이 눈을 감았다.
“네 몸이 좀 정상적으로 돌아오면 어울려 줄 테니까.”
“어울려 줘?”
“그래. 그러니까. 지금은 얌전히 좀 있어.”
작게 말하는 그 음성에 이스피어가 속으로 생각했다. 난 항상 얌전했는데.
그런데도 그예 몰려오는 어지러움과 수마에 이스피어의 몸짓이나 숨소리, 목소리는 시간 따라 작아지기 마련이었다. 아이작은 그런 것이 느껴질 때마다 이스피어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이스피어가 생각했다. 혹은 속닥였다.
“따뜻해.”
대범(* 마지막에 가서는 기어이) 뱀은 땅속에서 겨울을 지새기 마련이었다.
* * *
열 기운에 잠들었는지도 모르겠고, 깨었다가 어둠을 확인하면 눈을 감았고, 분간되지 않는 꿈결 목소리에 어깨를 떨며 몸을 둥글게 말 때면 더 깊게 끌어안아 주는 손길이 있었다. 그것만이 이스피어에게 현재를 알려주었다.
그가 갈라진 입술을 움직였다. 중얼거렸다.
“너 자?”
머잖아 아이작이 답했다.
“……너 때문에 깼어.”
“저런.”
“그러니까 다시 자.”
“잠이 안 와.”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하고 묻는 듯한 음성에 이스피어가 희미하게 웃었다.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아이작의 허리를 감싸 안는 것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아이작은 굳이 그것을 헤아리기 위해 가라앉은 정신을 띄우고 싶지 않아 생각을 끊었다.
간간이 파고드는 고요함에 이스피어의 정신은 몇 차례고 점멸되기를 반복했다. 이스피어는 그 찝찝한 과정을 벗어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우리 아빠는 헝거 게임의 전 우승자였어. 알아?”
아무 생각이나 바로 끄집어낸 탓에 그리 좋은 소재의 서두는 아니었다. 계속 타들어 가는 장작보다도 더 빨리 사그라들 문장이리라고, 이스피어가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저 문장 자체만으로 달갑지 않은 심정이 확 올라와, 바로 전 억지로 생각을 끊어냈던 본인의 노력을 배반할 수밖에 없었다. 뜸을 들이던 그가 말했다.
“그럼 너희 아빠는, 여기서 이렇게 사람을 죽여서 살고 있는 거면서. 이 바닥에 너도 내보낸 거야?”
낯선 것은 대놓고 아버지를 폄훼하는 아이작의 말에도 이스피어의 기분이, 그리 나빠지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렇지만 허리를 둘러 안은 손끝이 움찔대며 오므라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이스피어는 괜스레 제 발 저리는 기분을 안고 변명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아빤 당연히 날 그렇게 키울 의무가 있으셨어. 아버지는 헝거 게임의 승리자셨고, ……그 꼬리표는 2구역 안에서 계속, 아버지를 쫓아왔으니까.”
“그건 네 아빠 사정이지. 네 사정은 아니잖아.”
“아냐. 넌 아무것도 몰라, Twelve. 난 그런 아버지의 자랑이 되려고 여기 온 거란 말이야. 내 영광을 얻으려고, 아버지의 영광이 되려고.”
대화하면 대화할수록, 아이작과 이스피어는 서로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잠시나마 서로가 입을 다무는 것을 묵인해줄 따름이었다.
이스피어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인지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마주 본다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에 매몰됐다. 달싹이던 입술 사이로 말을 내뱉었다. 현상이나마 유지하려 못 박는 행위에 불과했다.
“난 당연히, 그러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아이작은 욕을 참는 것조차 버거워 입 안쪽 살을 짓씹어야 했다. 잠기운이 싹 사라졌다. 특히나 반복된 단어는 머리를 어질거리게 할 지경이었다.
아이작이 조용히, 그러나 얼핏 사나운 것을 담아 말했다.
“‘당연히’라는 게 어딨어? 다 자기 욕심이면서.”
힘없이 자꾸만 가물가물 감기던 이스피어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눈썹을 까딱이며 아이작을 올려보지만, 아이작이 어디 그런 것에 위축될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말을 이어갔다.
“이런 세상에 제대로 된 부모가 몇이나 있겠나 싶긴 한데, 난 그런 부모라도 부러워해 본 적 있어서 부모들이 어떤 마음으로 자식을 키우는지 대충은 알아.”
일단 이스피어는 얼굴에 반박하고 싶단 마음을 가득 담아 아이작을 바라보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어디까지 말하나 들어보자. 그런 심정이었나보다. 물론 그를 마주하는 아이작의 눈빛은 한 점 흔들림 없었다.
“그래도 난 부모가 되면 최소한 자식이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정도는 알고 싶어 할 거라고.”
……아무래도 아이작 딜라이트에겐 제가 모르는 또 하나의 재능이 있었다. 이스피어의 신경을 봑봑 긁는 소리를 늘어놓는 재능 말이다!
점점 이스피어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것을 본 것이 분명한 아이작은, 그런데도 발언을 확실히 하기 위해 마지막 말을 뱉었다.
“너희 아빠는 그런 건 좀 아신대? 너희 아빠가 너한테 최면 걸듯이 집어넣은 것들 말고.”
최면. ……최면?
허, 벌려진 입술 사이로 그런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사고를 거치지 않고 이스피어는 아이작의 어깨를 붙잡아 밀쳐내려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터지는 날카로운 음성이 있었다.
“그런 단어, 사용하지 마!”
아이작은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힘을 주었다. 원래도 이스피어의 힘을 손쉽게 꺾을 수 있던 아이작이었으니, 하물며 상대가 앓아누운 상태에서 그 힘을 꺾기란 얼마나 쉬웠을까. 그러나 이스피어는 자그맣게 몸부림치는 것을 관두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를 이렇게 깎아내려서 뭘 하려고? 내가 좋은 분이라면 좋은 분이신 거야. 내가 좋아하는 것보단 내가 더 잘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주시기 위한 거라고. 그렇게 해서 내가 아버지께 도움이 되게 하려고!”
기어코 태초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입 바깥으로 내뱉어 무엇이든 돌이킬 수 없도록 만든 순간, 이스피어는 돌연 비참함이 목뒤까지 차오른 기분에 헛숨을 들이켰다. 움직임이 멎어 들다 말기를 반복했다. 멈출 수는 없어 열기 몰린 눈을 힘주어 감았다. 쥐어짜듯 말했다. 허탈한 웃음이 맺히는 것은 그즈음이었다.
“그리고 난 그걸 바라. 이 문제에 대해 더는 얘기하고 싶지도 않아. 더 뭐라 하고 싶은 거면 이대로 날 두고 나가면 되겠네! ……어차피 이 다리론 널 쫓아가서 때리고 싶어도 못 할걸.”
어딘가 자조 섞인 것으로 말이 끝나자, 이스피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던 아이작이 말했다.
“난 한 번 주운 건 안 놔.”
“……난 물건이 아니야. 난 이스피어-N-틸다야, Twelve.”
“다른 사람 이름도 제대로 못 부르는 애 말은 안 들려.”
어떤 대나무는 아무리 눈이 내려도 휘어지지도 않는다던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러다 부러진다고 할지라도, 하지만, 세상에. 이스피어-또 다른 대나무-는 저 꿋꿋함에 속으로 혀를 내둘러야 했다.
“어쨌건.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러던가. 하지만. ……글쎄.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울해하거나 힘들어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넌 즐거워 보이잖아. 그게 내 눈엔 좀 이상해 보여서.”
“이봐, 그러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니깐.”
감았던 눈을 뜬 이스피어가 아이작의 뺨을 쏘아보다 고개를 돌려 그의 팔뚝을 물었다. 그래봤자 천 소재에 가로막혀 하나도 아프지 않았던 아이작은 태연했다. 아이작이 말했다.
“미친 상황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밖에 없거든.”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들은 이스피어는, 사실. ……아주 쪼금 기분이 좋아져 버렸다. 살며시 튀어나와 있던 입술이 쏙 들어간 것이 그 반증이었다. 그 다물린 입매가 어딘가 씰룩거린 것 같기도 했다.
이스피어가 냉큼 답했다.
“그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해. 원래 우리 아빠가, 뛰어난 사람은 남들에게 미친 것처럼 보인댔어.”
기분 좋은 콧소리를 흘린 뒤 이스피어는 아이작에게서 뒤돌아 누웠다. 그런다 해도 여전히 아이작의 품 안이라, 아이작이 작은 황당함과 함께 중얼댔다. “미친 게 좋은 줄 아나 보네.” 차게 식어있던 이스피어의 등 뒤가 그의 배와 맞닿아 온기에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스피어는 아무것도 모른 척 아이작의 손을 잡아당겨 제 배를 둘러 안게 했다. 조용히 하라는 의미였다.
양측 다 다시 잠에 빠지려는 것 같아 보였다. 이스피어가 조용히 말을 꺼내기 전까진, 그랬다.
“이봐.”
“……또 뭔데?”
둘 다 잠결에 젖어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스피어는 답지 않게 머뭇거리다 물었다. 눈앞을 가득 채운 어둠이 어른거렸다.
“금방 네가 두 종류가 있다 했잖아. 그럼. 너는 우울하고 힘든 상태인 거야? ……아이작.”
아주 자연스럽게, 이스피어가 평상시의 호칭-Twelve가 아닌 아이작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이작은 뒤돌아 눈까지 감은 이스피어가 확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한참 침묵하다 답했다.
“왜. 지금 내가 우울하고 힘들어 보여?”
그래서 이스피어는 제멋대로 아이작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바로 뒤 돌면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이스피어는 힘껏 눈 감은 채 아이작이 짓는 평상시의-그 무미건조하다 못해 쫙쫙 메말라 갈라진 얼굴을 그려내기에 바빴다.
어둠 속의 이스피어가 아이작의 얼굴을 더듬었다. 남자는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쌓이지 않은 설원 같은 새하얀 얼굴로 이스피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스피어는 모든 것을 감추기 위해 방긋 웃고 남자의 앞에 있다, 눈이 마주친다,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든 게 없는 눈동자로 서로를 본다, 서로만을 봤다……,
이스피어가 꿈을 꾸듯 말했다.
“아니.”
상상 속의 남자가 이스피어를 보고 있었다. 상상 속의 여자가 그에게로 걸어갔다. 팔을 붙잡았다. 발 뒤꿈치를 들었다. 고개를 들었다. 속닥였다.
“그래도 넌 외로워 보여. 나처럼.”
남자와 여자가 어둠 속에서 입을 맞췄다.
* * *
해가 떠오르는 것과 함께 작은 낙하산을 매단 보급품이 동굴 앞에 떨어졌다. 이스피어를 두고 나와 장작과 물고기 몇을 잡아 온 아이작은 동굴 앞에서 보급품을 발견했다. 뚜껑을 돌려 열어보았다. 연고였다. 함께 있던 쪽지는 그대로 찢어 버려버렸다. 그 내용은 평생 아이작만이 알고 있을 테다.
상상을 뛰어넘는 비용을 통해 도착했을 약은 그 성능을 손쉽게 증명했다. 저녁나절이 되자 이스피어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돋아난 새 살이 발목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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