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함께 죽자,
아니, 살자.
달 지는 밤
이스피어가 돌아왔을 때 아이작은 이미 반쯤 정신을 잃어가던 중이었다. 그렇지, 화살이 어깨를 꿰뚫어버렸으니 비단 독이 아니더라도 상처 자체만으로 평범한 사람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고통을 버틴 게 용할 정도였다.
꺼져가던 불을 살린 이스피어는 천조각으로 아이작의 땀을 닦아주고, 그의 입술 위로 물을 흘려주었다. 이스피어는 답지 않게 아이작을 정성스레 보살폈다. 어지러움 속 아이작이 눈을 떠 이스피어를 바라볼 때면, 그 눈을 마주한 이스피어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어떤 상념을 떨쳐내야 했다.
무심코 시선을 피한 이스피어는 괜스레 쭈뼛대다 말했다.
“일어났어? ……뭐. 그러니까 말이야. 나 물고기도 잡아 오고, 장작도 가져오고, 흔적도 지우고 돌아왔어.”
“…….”
“감사 인사는 따로 안 해도 돼. 나 착하지?”
답 없이 이스피어를 빤히 바라보는 회색빛 눈동자에, 이스피어는 끝까지 뻔뻔하게 있을 수 없었다. 기어이 사과를 내뱉었다.
“──알겠어. 알겠다니까. 다음부턴 그런 계획에 너는 안 포함시켜볼게. ……알겠지?”
아이작는 마지막 말에서야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뚜렷하게 보였다.
“너는? ……‘너는’?”
“왜애, 또.”
“너 설마 그거 또 하겠다고 말하는 거야?”
“어물쩍거리다간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것도 순식간이야.”
“너 진짜,”
아이작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겨주던 이스피어는 냅다 얼굴을 찌푸리곤, 잔소리를 장전하려던 아이작의 눈 위를 손으로 푹 덮었다. 차게 식은 살갗에 아이작이 주춤거렸다. 그 기세를 몰아 이스피어가 속닥였다.
“잔소리 좀 그만해!”
그러더니 이스피어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이작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겹쳤다. 순전히 잔소리를 틀어막기 위해 한 행동이라, 그사이에 아마 어떤 감정이 뒤엉켜있지는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하간 그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아이작은 이전과는 달리 입맞춤을 거절했다. 고개를 틀어 입술을, 손을 뻗어 제 눈을 가린 이스피어의 손도 떼어냈다. 그에게서 제법 성난 티가 났다.
그가 또박또박 말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내가 하는 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스피어의 심리를 콕 짚어 말하는 말에 이스피어의 표정도 살짝 찌푸려지기 일쑤였지만, 아이작은 그에 아랑곳을 하지 않았다.
“애먼 짓 해서 개죽음 내지 마. 제대로 상의해. 네가 내 영역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좋든 싫든 내 동맹의 이름으로 있어야 하니까.”
결국 이스피어의 심기를 건드린 단어는 명확했다.
개죽음. 그 단어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양 이스피어의 가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당연했다. 그는 과장해서 태어날 적부터 불명예스럽게 살아남을 바에야 실상 개죽음인-명예스럽게 보이는 죽음을 맞이하라 아버지께 배웠다.
모든 생을 매도당한 기분에 이스피어의 생각이나 감정도 침전했다. 한껏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다 느릿하게 뱉는 말도, 평소보다 훨씬 날이 서 있었다.
“네가 지금 나 때문에 다친 게 아니었다면 난 여길 바로 나갔을 거란 거, 기억해. 나는 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똑같이 행동할 거야. 난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행동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
“……그래도 네가 싫다니까, 최대한 그 방법은 피해 볼 거지만!”
끝에 가서 습관적으로 웃는 이스피어를 바라보는 아이작에겐 역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개짓거리투성이였다. 명예를 위해 죽음을 택한다? 늘 바닥을 기어 다니며 살아남은, 그 바닥에서 무슨 일이라도 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아이작에겐 도통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작은 딱딱하게 굳은 빵 한 덩어리를 얻기 위해 평화유지군들 앞에 넙죽 엎드린 적도 있었다. 아이작은 나이에 비해 체격이 컸던 덕분에 어릴 적부터 온갖 궂은일들이란 일들은 다 했다. 자존심? 명예? 그런 것들은 목숨을 부지시키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매일같이 진창 속을 구른 아이작 딜라이트가, 여기까지 살아남았다.
그런 그가 눈앞의 여자에게 말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그럼 난 그때도 네 계획을 망쳐야겠네.”
그날 이스피어는 아이작과 함께 자지 않겠다 선언했지만-“혼자 추위에 끙끙 앓으면서 잠들어보라지!”-, 밤이 깊어짐에 따라 몸이 독에 중독된 탓일까, 한기가 송곳처럼 온몸을 파고들었으므로.
종내에 이스피어는 스스로 아이작의 품을 찾았다.
그러면 귓가 근처로 아이작의 한숨 소리가 스쳤다. 종내에 남자 또한 이스피어를 꼭 끌어안는다. 그에 이스피어가 무어라 구시렁거리려던 것은 그가 더욱더 세게 안아주는 것으로 막았다. 아이작의 귓가에 아주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헤헤 웃은 이스피어는 편하게 자세를 고쳐 누워 아이작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작게 속닥였다.
“너 아프지.”
“……자자, 좀.”
“땃쥐코풀의 해독제는 여기선 못 구한단 말이야.”
“……설마 했는데. 독이었어?”
“너. 그대로 가다간 죽을지도 몰라.”
“…….”
이스피어로선 아이작의 침묵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물었다.
“너 내가 죽는 거 싫어?”
“……싫지, 그럼.”
“왜?”
“……글쎄.”
“내가 불쌍해?”
묵묵하던 아이작이 잠시 뒤척였다. 그가 곧 답했다.
“넌 누가 불쌍해 보이면 키스하냐?”
“……갑자기 키스 얘기가 왜 나와?”
“아무튼 난 아니야.”
이스피어가 감았던 눈을 떴다. 아이작의 얼굴이 보인다. 곧게 뻗어진 콧대나 감긴 눈, 속눈썹, 짙은 눈썹과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리고.
그가 다문 입술.
이스피어는 순간의 충동을 억누를까, 내뱉을까 고민했다. 평소였다면 ‘네가 그런 말이나 하니까 갑자기 키스하고 싶어!’ 이런 말로 아이작에게 책임을 떠넘겼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아이작의 거친 숨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이스피어가 조심히 손을 뻗었다. 짚은 이마가 아주 불덩이였다.
그 열기는 느닷없이 남자가 픽 죽어버리는 상상을 가져왔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잘 잤냐는 목소리나 눈꺼풀 아래 감춰진 남자의 눈동자, 거친 손의 감촉을 가져온다.
그래서일지, 이스피어가 뒤따라 묻는 말이 퍽 조급해 보였을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넌 언제부터 혼자였어? 12구역에서 혼자 자랐다며. 부모님은 언제 돌아가셨는데?”
그는 내심 아이작이 뜬금없는 물음 속에 숨어있는 그의 저의를 꿰뚫어 볼까 봐 가슴 졸였지만, 다행인지 아닌지 아이작은 벌써 이스피어의-예상치 못 하는 행동들에 이골이 나 있었다. 그러니 아이작으로선 특별히 이스피어의 속내를 파헤칠 생각도 않는 것이다.
그는 슬쩍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려 어딘가의 허공을 더듬다 픽 눈을 감았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몰라. ……그래도 한 여섯 살까지는 할머니가 있었지. 마찬가지로 잘 기억 안 나지만.”
“여섯 살? 그럼 그때 너, 되게 쪼꼬맹이였겠다. ……그때는 지금이랑은 달리 좀 귀여웠겠는걸.”
“그때도 여섯 살치고는 좀 컸겠지.”
말을 하면서도 이스피어의 시선은 종종 아이작의 입술을 향했다. 추위 때문일지, 고통 때문일지, 심장이 쿵, 쿵, 뛰었다. 누구의 것인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스피어는 공연히 고개를 기울여 아이작의 콧대에 제 콧대를 툭 맞댔다. 마치 억누를 수 없는 애정을 표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지척에서 아이작에게 속살거렸다.
“어떻게 살아왔어? 어른들이 널 도와주진 않았을 것 같은데. 거긴 어린 애가 혼자 잘 살 수 있을 만한 환경은 아니잖아. 할머니가 죽은 다음엔 어떻게 했어?”
아이작은 구태여 고개를 무르지 않는다.
“……장례를 치를 돈은 없었어. 날이 더운 게 다행이었지. 냄새가 많이 나서 다들 어거지로라도 결국 장례를 해줬거든. 일단 땅에는 묻히셨지.”
“응.”
“그리고 그 뒤에는. ……뭐. 별수 있나. 내가 어리다고 해서 남들이 날 봐주는 것도 아니고, 어린 취급을 받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사는 게 내 최대 목표야. 그것 말곤 더 없었어.”
아이작의 목소리는 중간중간 고장 난 테이프처럼 늘어지기 일쑤였고, 중간중간 열이 들끓어 갈라지기도 했다. 이스피어는 아이작의 뺨을 쓸다 그의 한쪽 손을 끌어당겼다. 손바닥 위를 조물조물하며 만졌다. 아버지의 손과, 확실히 다르다. 그런 생각이 또다시, 무심코 스쳤다. 희미한 웃음을 그렸다.
“……어쨌거나 지금까지 잘 살아남았네. 장하다.”
아이작의 손은 상당히 거칠었다. 자잘한 흉터로 가득한 손은 아버지의 손보다 컸고, 따스했다. 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눈을 감고 중얼댔다.
“그렇게 해서 날 만났잖아? 네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날 지금. 껴안고 있기 위해서야. ……이걸 기억해. 알겠지?”
만족스러운 기분을 양껏 누린 이스피어는 붙잡았던 손을 풀어 다시 눈을 감으려 했다.
하지만 떠나려는 이스피어의 손을 단단히 쥐는 손길이 있었다. 손가락이 얽힌다, 단단히 묶인다, 손가락을 움찔 떤대도 엮인 것은 견고하다. 이스피어의 숨이 찰나 멈췄다. 쿵, 쿵, 심장이 뛰는 소리가 온몸을 울렸다.
그리고 이스피어는 자신이 이 순간을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기억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 묘하게 긴장 서려 굳은 몸짓을 느낀 탓일지, 아이작은 바람 빠지듯 웃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네.”
말은 그렇게 해도 아이작은 내심 나쁘지 않단 생각을 했다. 그러면 이스피어도, 곧 아무렇지 않게 대꾸해주었다.
“넌 지금 이곳에서 제일 축복받은 남자인데, 그것도 모르네.”
아이작도 다시 눈을 감았다.
“그래, 그래. 그렇다고 치자.”
손은 풀리지 않았다.
“알겠으니까 잠이나 자. 피곤해.”
추위가 몸을 파고들지 않는 밤이었다. 이스피어는 아주 긴 꿈을 꾸게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둠이 깊어진다.
꿈의 환영이 이제는 익숙해진 누군가의 얼굴을 그렸다.
그것을 마주하며, 이스피어가 조용히 웃었다.
* * *
─아이작이 팔짱을 꼈다. 고개가 작게 기울어진 채 그가 말했다.
“도와줄 게 없다고 하지 않았어, 방금? 오늘따라 말을 잘 바꾸네.”
무언가의 기시감에 휩싸인 이스피어는 뜸을 들이다 말했다.
“뭐……. 글쎄? 변덕스러운 여자가 매력 있는 법이지.”
“그래서 더 신뢰가 안 가기도 하고.”
엉덩이부터 침대 끄트머리에 걸쳐 드러누운 상태라, 이스피어는 제게로 가까이 다가온 아이작의 다리를 타고 오르듯 다리를 들어 올렸다. 발끝을 까딱이며 아이작의 허벅지를 찔렀다. 느릿하니 웃음 지을 때면, 불현듯 순간적으로 세계를 어그러뜨리는 심상이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었다. 이스피어가 눈을 깜빡였다.
아. ……이거 꿈이다.
그는 원래 꿈을 잘 꾸는 사람이 아니었다. 피곤이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 그런 것들이 악몽의 형태로 이스피어를 괴롭힌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이처럼 자각몽을 꾼 적은 정말이지 드물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이작의 얼굴이 이상토록 선명했다. 주변의 방은 불꽃처럼 일렁이고 휘청였다. 제게로 다가오는 아이작만이 상이 분명히 맺혀있다.
돌연 어떤, 선명한 욕망이 가슴 안을 들끓게 했다.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다. 이빨이 근질거렸다.
이스피어가 홀린 양 중얼거렸다.
“아무튼, ……빨리 와봐. 네가 내 옆에 눕지 않고서야 알려줄 수 없는 것인걸.”
꿈인 것을 자각하니 꿈속의 아이작은 우직한 그의 성정을 꺾고 고분고분 이스피어의 옆으로 와 드러누웠다. 이스피어가 손을 뻗어 아이작의 뺨을 쓸었다. 맞지. 헝거 게임이 시작하기 전에 우린 이랬었지. 이러다 싸우고, 난 널 죽이려 하고, 넌 날…….
이스피어가 아이작의 손을 끌어당겼다. 남자는 순종적으로 이스피어를 안았고, 머잖아 가슴부터 맞닿아 몸이 밀착했다.
심장 소리는 단 하나뿐이었다. 이스피어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뭔지 알아?”
“…….”
“이렇게 끌어안고 있으면 심장이 박동하는 게 같아진대.”
“…….”
“느껴봐, 쉽게 알 수 없는 거야.”
꿈속의 아이작 딜라이트는 현실의 아이작 딜라이트처럼 쥐뿔만치도 재미없는 사내였다. 이스피어는 현실에서의 아이작이 반응했을 상황을 생각해봤다. 일단, 당황하지 않았을까? ‘이런 건 굳이 눕지 않아도 알려줄 수 있는 거 아냐?’라고 말하며 얼굴을 찌푸리거나, 아니면 냅다 도망가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이스피어는 당황에 물든 남자의 얼굴을 참 좋아했다. 꿈속에서 그가 눈을 감았다. 꿈속의 남자가 현실의 남자처럼 그를 깊게 끌어안았다.
심장 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것이다.
이제 이스피어는 그 진원지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독인지, 가슴 안을 두드리는 감정인지를 구별할 수 있었다.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가만가만 말했다.
“내가 널 좋아하나 봐.”
“…….”
“네가 날 구해줬잖아, 들어봐. 난 원래 도움받지 못하도록 자랐단 말이야, 아빠가 그랬어. 위기가 닥친 순간에 스스로 해쳐 나갈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기 시작하면 사람은 나약해진대. 그렇게 패배하는 거래.”
“…….”
“네가 그게 싫었다면……싫다면, 그러니까 그때 내가 죽게 내버려 두었어야지.”
“…….”
“영영 외로워지게 뒀어야지, 남의 품이 이렇게 따뜻하다는 사실을 모르게 했어야지, 네가 날 안아주지 말고, ……차라리.”
“…….”
“아이작.”
“…….”
“난 이제 정말 두려운 게 뭔지 알 것 같아.”
“……그게 뭔데?”
“다시 혼자가 되는 거.”
“그리고?”
“네가 죽는 거.”
이제 이스피어는 헝거 게임의 산 두려움이 아니었다. 함성과 박수갈채 소리와 ‘풍요로움’을 통해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없었다. 당부하신 말씀을 수행하지 못한다.
달 지는 밤이었다.
해가 뜨면 이스피어는 시작점으로 되돌아간다, 창을 들고 동굴을 떠날 테다, 아예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자장가의 곡조도 잊고 12구역의 케케묵은 이야기도 잊는다. 지워온 모든 흔적을 더듬어 거스를 때였다.
새벽. 이스피어가 창을 쥐고 은신처를 떠났다. 혀끝에 자장가의 선율이 달라붙어 있었다.
'IFEAR&MARPASHI > 눈결 뱀 꼬리 그릴 때 (헝거 게임 AU)'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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