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하는 판
헝거 게임이 시작한 지 6일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얼추 상처를 치료한 이스피어는 둔해진 근육을 일깨우기 위해 당장 동굴을 떠나진 않더라도 아이작과 함께 식량을 구하려 근처로 움직였다. 이동하는 동안 시답잖은 대화가 오갔다. “그러고 보니, 물고기를 잡아 왔었지? 난 강 본 적 없는데.” “강이 아니라 호수야. 그리고 그건 단순히 네가 못 본 거겠지.” “이게 진짜.”
세콰이어 숲과 전나무 숲의 경계에 자리한 작은 연못은 꽤 두껍게 얼어있었다. 창대로 표면을 콕콕 찌른 이스피어가 아이작을 흘끔 바라보았다.
“저번엔 어떻게 잡았어?”
“얕은 곳이 있어. 얼음을 깨서 맨손으로 잡았고.”
“맨손으로? 미친 거 아니야?”
혹여나 손가락이 이미 얼어 붙어있는 것 아니냐며 이스피어가 아이작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던 때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내디딘 발아래 하필이면! 작게 얼어붙은 웅덩이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어,”
몸이 기울어 추락감이 온 머리를 휩쌌다. 눈을 감으면 안 돼! 바짝 눈에 힘을 주며 그대로 이스피어가 낙법 자세를 취하려 했다.
아이작이 텁 이스피어의 허리를 감싸 붙잡아주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아이작의 황당함 서린 음성이 이스피어를 불렀다.
“뭐 해.”
“…….”
“…….”
“……아직 발목이 다 안 나아서 그래.”
“…….”
“진짜야.”
“퍽도 그러겠다.”
우이씨. 아이작이 이스피어를 제대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자 발끝을 땅에 대 발목을 한 차례 빙글 돌린 이스피어는 괜히 아이작의 어깨를 툭 쳤다.
이전처럼 아이작이 맨손을 꽝꽝 언 호숫물에 냅다 집어넣으려 하자 이스피어는 결국 창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해야 물고기를 잡는 일 따위에 창을 쓰고 싶지 않았는데, 아니, 써서는 안 됐지만!
결국 창의 귀재 이스피어는 총 네 마리의 물고기를 잡아내었다. 허기가 끊임없이 배를 두드리고 있어 어쩔 수 없었다. 정말이다.
이스피어는 돌아오며 창의 날을 몇 번이고 닦다, 문득 아이작을 불렀다. “어제 말이야.” 아이작이 이스피어를 돌아보면 곧 눈이 맞았다. 뜬금없는 말머리에도 아이작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똑같았다. 이스피어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나 안 버리고 간다고 했잖아.”
“그래서.”
발아래 눈이 사박사박 밟혔다.
“그럼 네가 나 좀 도와줘. 난 우승하기에 마땅한 사람이니까.”
그 둘이 걸어가는 길은 저 위에서 보았을 때 하나의 기다린 꼬리를 남기고 있었으므로, 머지않아선 흔적을 해치우며 길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스피어는 유구하게 발아래 밟히는 눈 소리를 마음에 들어 했다. 난 겨울을 좋아했나? 언젠가의 질문에 대한 답 중 하나였다.
빤히 아이작을 바라보던 이스피어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너 왕따잖아.”
특별히 그 말에 상처받지 않은 아이작은 조용히 생각했다. 그건. 뭐. 맞지. 이스피어를 제외하고선 다들 자신을 피하니까. 이스피어같은 사람과 자신이 함께 다니지 않는 이상 자신은 모두의 눈 밖에 나 있는 존재라고, 아이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도와줘?”
서로의 발아래에서 발자국이 남고 있었다. 함께 뒤엉키고 있었다. 이스피어가 그런 아이작을 불렀다. 이봐.
“난 다쳤을 때 원래 도움을 받으면 안 돼. 난 그렇게 배웠어. 근데 네가 날 도와줬잖아. 내 계획이 다 엉망이 됐어!”
이스피어가 아무리 너스레를 떨어봤자, 되려 어깨를 한 번 으쓱인 아이작은 기껍다는 양 답했다.
“그래? ……네 계획을 엉망으로 만든 건 좀 좋네. 거슬렸거든.”
계획에 매달리다 보면 사람은 저절로 망가지는 법이었고, 아이작은 이스피어가 망가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는 건. ……그건. 보고 싶지 않았다.
어느덧 매섭게 불기 시작하는 바람에 그가 눈을 길게 감았다. “어떻게든 결승전까지만 가면 되는 거 아니야?” 그가 중얼댔다.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데?”
그리고 이스피어는 그런 아이작에게서 ‘거슬린다’라는 말이 대체 왜 나온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곱씹어댔다. 그러다 고개를 돌렸다. 아이작을 본다. 언제나 같은 표정을 봤다. 이스피어가 생각했다. 참 태평하다.
자신이 끝에 달해 죽어달라 부탁받은 것도 모르고선.
이스피어가 무심코 숨을 들이켠 것은 그런 문장이 머리를 강타한 직후였다. 고개를 급하게 앞으로 돌렸다. 조용히 숨을 뱉었다. 들이켰다. 심호흡한다.
그러다 입술을 열면 꽤 담담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뭐. 간단하지. 미끼 역할을 해줘야 할지도 모르고…….”
어떤 말을 삼킨 이스피어는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너 사람 죽이는 거 싫어해?”
눈을 굴리던 아이작이 답했다.
“사람 죽이는 건 내키지 않아.”
“……그럼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만 만들어줘. 저번에 우리 애들한텐 팔 하나만 부러뜨렸잖아. 그거 말고. ……양팔을 부러뜨리면 무기도 못 들겠지? 그게 좋겠다.”
그렇게 시선을 들어 올리면 여전히 케케묵은 색으로 덮여 흐릿해 보이는 인공 하늘이 보였다. 언제라도 눈을 내릴 수 있는-그 너머로 준비된 장치도 덤으로 보였고.
귓가로 매서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숨을 들이켤 적 폐부까지 번지는 한기에 어깨를 떤 이스피어는, 돌연 제 어깨를 붙잡아오는 아이작으로 하여금 시선을 떨궜다.
뭐야? 그렇게 물어보려 입술을 떼려던 참이었다. 이스피어의 눈 안으로 아이작의 옆얼굴이 담겼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각이 서려있던 남자의 눈빛이 보이고, 그곳에서 번진 섬찟함이 이스피어에게까지 미쳐오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을 본다.
인영이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본능이 있었다. 소름이 돋아오른다, 뇌를 거치지 않고 대번, 이스피어가 고함쳤다.
“숙여!”
반사적으로 아이작이 이스피어의 어깨를 팔로 둘러 몸을 낮추었다. 그러자마자 둘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꿰뚫은 화살로부터 파도처럼 바람이 일었다. 세찬 겨울 공기가 몸 곳곳을 찢어내는 듯했다. 덜컥 숨을 흘린 이스피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지럽게 눈을 굴렸다.
활을 쏘는 게 하나, 달려드는 게 둘. 저 달려드는 것들과 뒤엉키기 전까진 활을 통해 우릴 견제할 테니까,
저들의 시야를 방해해야 한다. 생각을 마친 이스피어가 땅바닥에서부터 허공으로 창을 크게 휘둘렀다. 창대를 통해 쓸려 휘날리는 눈 알갱이들이 허공에 퍼트려져 햇빛과 맞닿았다. 작은 빛무리들이 산란할 때 아이작이 옆으로 물고기가 든 가방을 던져놓았다. 그래. 먹을 건 소중하지! 싸움이 끝나면 멀쩡히 돌아가서 물고기를 구워 먹을 거다. 몸을 일으킨 이스피어가 속닥였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일단 하나씩 맡아. 넌 더 덩치 큰 놈을 상대해. 활 쏘는 놈 견제 잘하고.”
“잠깐,”
“내가 아까 했던 말 기억해.”
이스피어는 아이작의 답도 듣지 않고 튀어 나갔다. 눈바람이 걷혀가자 상대가 단검을 뽑아 던졌다. 날아오는 궤적이 퍽 정직하지는 못해, 달려가던 이스피어는 눈밭을 굴러 공격을 피했다. 눈 먼지가 일었다.
캉!
“대낮부터 습격이야? 진부하다곤 생각하지 않아?”
급히 창대로 막아낸 마체테의 날이 선뜩하니 빛났다. 힘에 부친 이스피어의 팔이 떨려왔다. 맞붙은 남자는 대뜸 이상한 말을 지껄였다.
“그러는 넌. 진짜 아무런 감정도 없냐?”
일그러진 얼굴이나 추위 탓인지 새빨갛게 번진 눈가를 보자면, 이스피어로서도 떠오르는 심상이 있기 마련이었다. 제일 쉬운 추측을 내뱉어봤다.
“……내가 죽였나?”
그에 남자, 토마스의 얼굴이 야차처럼 비틀렸다. 그 안으로 담기는 막대한 원한이나 분노에-이스피어는 할 수만 있다면 혀라도 차주고픈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아득바득 힘이 담긴 공격을 내치는 것도 벅찼다. 정확히는 벅찬 것처럼 보여야 했다.
예상치 못한 기습 때문도 있었고, 아이작과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서 무리하게 파고들었더니 사정거리를 너무 허용해버렸다. 본래 창은 적과 자신의 거리가 잘 벌려진 상황에서 그 유용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으니, 토마스도 그 점을 알고 어떻게든 거리를 두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지금의 이스피어는 쉴 틈 없는 공격을 방어하고, 서포터를 견제하고, 이후의 계획을 얼기설기 구상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였다. 얘를 해치운 다음에 서포터를 처리하는 게 문제다. 이스피어는 누굴 미끼로 써야 할지 찰나 고민했다.
“!”
그러다 기어이 날아온 화살이 다리 바깥쪽을 빗맞혀버렸다. 이스피어가 주춤거렸다. 불처럼 고통이 번졌다. 그런 이스피어를 가만히 좌시해 둘 적은 없었다. 이스피어는 이 꼼꼼한 견제와, 견고한 공격을 어디서부터 꿰뚫어야 할지 고민하며 접전을 이어 나갔다. 그러던 중 이스피어가 몸을 비틀어 토마스의 공격을 피할 때였다.
남자는 복부를 강타하려는 이스피어의 창대 자체를 붙잡아 우악스러운 힘으로 이스피어를 끌어왔다. 본능적으로 창대를 놓을 수 없어 힘을 준 이스피어는 얼굴을 찌푸리는 사이 속절없이 당겨졌고, 그사이 이스피어는 절절한 절망으로 찢어진 남자의 얼굴을 목도했다. 한순간 주변의 시간이 늦장을 부렸다. 남자가 말했다.
“너 때문에 죽었어, 네가 애초에, 이 헝거 게임에 참여하게 된 이후로,”
……이스피어는 잔재하는 상념 탓에 가까스로 고개를 틀었다. 마체테의 날은 이스피어의 뺨을 옅게 베어낸 이후 허공만을 긁었다. 핏방울이 튀겼다.
이스피어는 남아있던 반동과 남자의 힘을 역으로 이용해 몸을 옆으로 비틀어, 무릎으로 그의 머리를 세게 찍었다. 관자놀이를 강타당한 토마스가 한순간 휘청거리는 통에 드디어 이스피어는 그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단숨에 창으로 그의 다리를 베어냈다.
얼굴 위로 뜨거운 피가 튀겼다. 이스피어가 무감하게 중얼댔다.
“그게 내 탓인가?”
비명이 울렸다. 하지만 남자는 즉시 쓰러지지 않았다. 그의 공격은 질기게도 이어졌다.
“네가 참여한 것 때문에 게임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우리가 왜 너 때문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데!”
“그럼. 이 게임에 참여한 애들이 다 운이 있어서 참여하게 된 거겠어? 아닌 걸 알잖아!”
이미 판은 이스피어의 손 위에 있었다.
기어코 날붙이 소리를 내며. 마체테가 땅에 떨어졌다. 그의 황망한 눈빛이 보였다. 궁지에 몰린 토마스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떨며 외쳤다.
“네, 네가 죽인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도 않아? 뻔뻔한 년! 스물세 명의 시체 위에서 살아남는다고 한들 네가 얼마나,”
콱!
“너 참 웃긴다.”
“……아, 이,”
“어차피 너도 여기까지 오면서. 최소한 사람들 죽는 거 방관하고 온 거 아니야? 그것 말고도 반박할 수 있는 말은 많지만.”
“씨파알…….”
창에 꿰인 토마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양손으로 대를 붙잡았지만, 아무리 손을 벌벌 떤다고 한들 지금의 상황이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었다. 창대를 타고 그의 피가 흘렀다. 하얀 눈밭 위로 피는 너무 자극적인 색을 띠고 있었다.
곧 그는 손을 떨궜다. 그의 손가락은 이제 세찬 바람 가운데도 흔들리지 않았다. 퍽 허무한 결말이었다.
“…….”
죽음을 확인한 이스피어가 고개를 돌렸다. 아이작이 상대하는 남자는 이미 전의를 잃은 것처럼 보였지만, 처리해야 할 사람은 하나 더 있었다. 흘끔 시선을 주면 잠복한 상대는 계속 나무 뒤에 숨어 있었다. 기회가 잡히면 곧장 몇 남지 않은 화살로 아이작이나 이스피어의 머리를 꿰뚫을 테다.
토마스의 몸 아래 숨은 이스피어는 그의 옷을 찢어 만든 천으로 허벅지를 세게 둘러 묶었다. 차근차근 세운 계획을 고민하다, 아이작에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냈다.
“Twelve, 나 얘 처리했거든? 넌 걔 바로 처리하지 말고, 바로. 자연스럽게 외곽 쪽으로 빠져서 처리해. 그런 다음에 활 쏘는 애를 급습하는 거야. 알겠지? 시선을 분산시켜야 쟤 잡을 수 있어. 쟤 놓치면 나중에 성가셔진다, 알겠지?”
“……아까부터 넌 네 계획만 우다다 말하고 가면 다야?!”
“그래봤자 결국 따라줄 거면서. 알아들었다 생각하고 난 간다!”
남자를 방패로 써서 상대에게까지 다 향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남자의 무게도 무게고, 그런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스피어를 멍청히 바라만 보는 적이 어디 있을까.
이스피어는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토마스의 허리춤에 남아있는 단검을 하나 빼 상대에게로 던져보았다. ……탁! 여자의 머리통이 급하게 나무 뒤로 숨었다. 생각보다 거리가 있다. 이스피어가 혀를 찼다.
원거리를 통제하는 적은 성가시다. 제가 죽인 남자의 말을 들어보면, 이 팀은 자신에게 원한이 꽤 큰 편 같았으니-이유는 하잘것없었지만!-, 이대로 상대가 도망쳐서 자신을 죽이고 싶어 안달 난 포웨나나 에이미와 합류하게 된다면……그것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시나리오였다.
아까 이스피어는 아이작에게 ‘네가 미끼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기실 그 뒤로 삼킨 말에는 ‘내가 미끼가 될지도’ 모른다는 문장이 숨어있었다.
지금은 후자인 상황이었다. 저들은 이스피어 틸다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고, 당장 적을 처치하기 위해선 그런 이스피어가 미끼가 되어야 했다.
이스피어는 자신이 무대 체질을 타고났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설령 자신이 죽게 될 위험이 있었을지라도, 그리고 그 때문에 자신이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이스피어는 그 순간까지 캐피톨의 스타로 자리해야 했다.
찬 공기에 코가 얼어붙는 느낌이 들 때까지 대치가 길어졌다. 슬슬 아이작이 숲 안쪽으로 진입했을 것 같다. 적의 신경을 자신에게만 집중시키는 것이 이스피어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잠깐. 이렇게 하니까 나, 마치 질투하는 사람이라도 된 것 같잖아. 생뚱맞게 든 생각 탓에 이스피어가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이스피어가 소리쳤다.
“이봐! 다 들었어. 너희들 내가 싫다며? 그래서 죽이려고,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온 거야?”
하지만 그런 시도가 무색하게도 상대는 잠잠했다. 하긴, 여기서 렉서드같이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대답해주겠어. 이스피어가 심호흡했다. 바람 부는 소리가 들렸다. 눈밭 위를 짚은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 안으로 뭉개지는 눈 소리가, 차가움이 정신을 일깨웠다.
그렇게 이스피어가 제 몸을 가려주던 남자를 치워냈다.
눈밭을 달려 온 이목을 집중시킨다. 생각한다. 화살 수엔 한계가 있다. 겨우 창으로 머리를 노려 날아온 화살을 쳐냈다. 생각한다. 머지않아 화살을 다 떨어뜨린 적은 직접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도망가지 마, 내가 이렇게 직접 몸-미끼-까지 드러냈잖아, 자신은 그걸 믿어야 한다, 생각한다,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화살이 날아든다.
“윽!”
하필이면 다친 발목을 크게 스친 화살 탓에 이스피어가 땅 위를 굴렀다. 손에 힘이 들어간다. 엄밀히 말해서, 이렇게까지 필사적일 이유는 없었다. 미끼 역할을 자처한다 하더라도 정도가 있지 않나. 적당히 이목을 끌고 아이작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겨도 좋았을 텐데. 자신은 왜 이렇게까지,
……이스피어는 이전과 같이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없을 테다.
달렸다. 달리다가도 눈밭을 굴렀다. 어쩌면 거미줄 위를 나뒹구는 중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발버둥 칠수록 줄이 몸을 옥죄어오고, 그렇게 결국. 적에게 삼켜지고 마는 먹이가, 지금은 이스피어라는 이름을 입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엔 늑대처럼 달려가는, 검은 신형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하게 활촉은 제 가슴을 선명히 겨눈다. 심장이 뛴다. 동공이 수축한다. 이스피어는 눈앞까지 다가온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아이작의 눈동자가 커진다. 그것이 이스피어의 눈에 담겼다. 아이작이 생각했다.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 그것을 직감한 아이작이 같은 때에 화살촉이 향하는 끝. 이스피어를 보았다.
이스피어는 웃었다. 외쳤다.
“그를 죽여!”
당겨진 활시위가 적의 손을 떠나갔다.
그리고 이스피어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아이작의 등을 보았다. 그러니까. ……피가 떨어졌다. 아이작의 어깨를 꿰뚫은 화살촉으로부터 피가 떨어졌다.
그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멈추어있던 아이작은 어깨가 꿰뚫린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로 달려드는 적을 상대했다. 화살이 떨어진 여자는 도망치지 않았다. 맨몸으로 아이작과 맞붙었다. 아이작의 입매가 꿈틀대는 순간을, 이스피어는 보았다.
아이작이 여자의 목을 꺾었다.
이스피어는 그의 첫 살인에 주목할 새도 없었다. 여자가 눈밭 위로 쓰러졌다. 핏발 선 채 홉뜬 눈이 마주쳤다. 그때 누군가가 제 어깨를 잡아챘다. 고개를 든다.
아이작이다. 그가 단단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이스피어는 다짜고짜 화를 낸 아이작의 얼굴을 한 번, 그의 어깨를 한 번 바라보다, 그제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더듬거리던 손길이 끝에 가서 아이작의 팔을 붙잡았다. 황당함이 갈무리되지 못해, 음성에 엉망진창 뒤엉켜 흘러나왔다.
“그러는 너는,”
“네가 뒈질 수도 있는 계획을, 나한테 하라고 해?”
“……잠깐, 왜 내가 널 속인 것처럼 구는 건데? 왜 거기서 내 앞을 가로막아? 놓치면 더 성가셔지는 적이란 말이야. 확실히 잡아야 했다고! 아니, 그러기 전에 왜, 대체 네가……!”
“그럼 그냥 그 상태로 네가 뒈지게 내버려 두라고?”
아이작은 도통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처음 목격하는 그의 모습에 이스피어는 어찌할 줄을 모르다, 결국 붙잡은 팔을 놓아주어야 했다. 답답함에 항변했다.
“내가 그렇게 죽었을 것 같아? 죽을 만큼 다쳤을 진 몰라도 정말 죽지는 않았을 거라고! 나, 이스피어야. 이스피어 틸다!”
서로 바락바락했지만, 아이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다치지 않은 쪽의 팔로 이스피어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그리고 그 언젠가처럼 그를 들어 올렸다. 그때처럼 이스피어의 반항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다른 한쪽 팔이 얼마나 너덜너덜해졌던 간, 아이작은 아예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 듯싶었다.
이거 놔! 소리치며 발버둥치던 이스피어는 아이작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 뒤에서야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이 배신감으로 얼룩덜룩 물들어있었던 까닭이다. 아이작이 짓씹듯 말했다.
“네가 누구든 간, ……아니면 너 설마, 거기에 너 죽는 거 보라고 나 부른,”
그때 이스피어가 아이작의 입술 위를 아예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아이작의 눈썹이 꿈틀댔지만 이스피어도 확고했다. 서로의 감정은 여태 격해진 상태였다. 그렇지만, 이미 기를 쓰며 사방이 시끄러워진 상태였다. 이스피어는 애써 화를 가라앉히며 생각했다. 이 상태에서 만약 다른 생존자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정말 낭패다.
심호흡한 뒤 얼추 감정을 가라앉힌 이스피어가 중얼댔다.
“별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내가 죽는 걸 너한테 왜 보여주는데? ……그리고 어차피 내가 죽는다면, 온 판엠의 시민이 그걸 볼 거야. 어차피.”
이스피어의 뾰족뾰족한 말에 아이작은 무어라 더 항변하고 싶어 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스피어의 가라앉은 기분을 따라 아이작도 일단 심경을 가라앉히려 했다.
은신처로 돌아갔다. 둘은 동굴 안으로 돌아와 서로의 상처를 살피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처치를 했다. 약이 다 동나버린 것을 확인한 이스피어는 동굴을 나서기 전 작은 불을 피웠다. 그때까지 이런저런 불만이며 문장을 곱씹어 다듬고 고치던 아이작은, 이스피어가 불씨를 막 피워낼 때에서야 입을 열었다.
“판엠의 시민들이 보든 말든, 어차피 그것들은 관음증 병자들이고.”
그 말에 이스피어의 손이 삐끗했다. 기껏 피워낸 불씨가 꺼졌으나 그것에 신경 쓸 통 없이 이스피어는 급하게 아이작을 뒤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봐, 그거 다 방송으로 나가면 어쩌려고 그래!”
“네가 진짜 죽는다면 그걸 봐줄 사람은 나밖에 없잖아.”
“……세상과 저에게 한참 반항적이신 아이작 딜라이트 씨.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사춘기가 왔다기엔 너무 늦은 나이 아닌가? ……아닌가? 적기인가?”
“사람은 원래 뒈지기 직전엔 혼자 있기 싫어한다더라.”
그 말에 한숨만 푹 내쉬던 이스피어의 등이 움찔거렸다. 그 정도는 무척이나 작아 누구라도 손쉽게 놓칠만한 반응이었지만, 그 ‘누구’에 아이작은 포함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이작의 눈썹이 다시금 까딱이는 것을 무시하며, 이스피어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휙 돌렸다.
“……그 뒈진다는 말 좀 쓰지 마! 교양 없어 보이잖아.”
“교양 떨다 뒈지면 그게 요절이지.”
“그리고 설령 내가 죽어간다 해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고 싶으면 어쩔 건데. 흥.”
드디어 피어오른 불씨에 장작 몇 개나 더 넣어주던 이스피어는 흔들리는 불꽃을 바라봤다. 일렁이는 그림자나 빛을 따라, 바로 눈앞에 있을, 눈앞에 있었던 죽음을 막연히 상상해본다.
어릴 적 자신이 죽는 순간을 떠올려보았을 때 눈앞을 아른거리던 것은, 주로 아버지의 모습-정확히는 자신을 질책하는 오스틴의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당장, 그런 순간을 떠올려보라 하면. 어째서인지 오스틴의 얼굴은 흐릿하게 뭉개지고 뜬금없이 웬, 남자 하나가 눈앞에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스피어가 소리 없이 고개를 돌렸다. 어지러움에 눈을 감고 누워있는 아이작의 모습이 보인다.
그래, 딱 저 낯짝이다.
아이작이 마른 입술을 열었다. 흘러나오는 건 언제나처럼 무감한 탈을 썼다.
“그럼 그냥 네가 날 그 사람인 척 생각하는 거지.”
그 말을 듣고 나갈 채비를 막 끝마쳤던 이스피어가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눈썹이 씰룩였다. 뭐라 한 마디 쏘아붙이고는 싶은데, 마땅한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끝까지 찾아낼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다녀오겠단 말을 할지 찰나 고민했지만, 이스피어는 어떤 말도 없이 동굴을 벗어났다. 적막한 공기가 머리를 싸맸다. 눈밭 위로 선명히 흩뿌려진 핏방울이 보였다. 눈살을 좁혀 떴다. 이스피어는 다시금 생각했다.
아이작 딜라이트는, 자신의 계획을 어그러뜨리는 데 아주 재주가 있는 남자가 틀림없었다.
* * *
흔적을 지워나가던 중 이스피어는 화살이 스친 부분에서부터 번져오는 둔통에 신음했다. 처음에는 그 정도가 작아 무시할 수 있었지만 동굴로 돌아올 즈음엔 통증이 극심해져, 눈앞이 어지러워질 지경이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졌다. 원인이 뭐지? 이스피어는 필드의 구조를 떠올렸다.
이번 경기장은 구역별로 다른 나무 종이 모인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임의 출발 지점은 보급품이 한데 모여있던 원형 벌판이고, 숲 중간중간에도 그와 같은 벌판이 종종 위치했다. 숲의 순서를 떠올리자면 가운데와-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중심으로 6시 방향에 자리했던 소나무 숲과, 그 옆의 자작나무 숲, 세콰이어 숲, 전나무 숲,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나무 숲이었다. 독초를 얻을 수 있던 곳이 없었을 텐데. 겨울이란 계절 아래, ……잠깐.
삼나무 숲?
이스피어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양호랑삼나무.”
캐피톨이 개량한 종인 하양호랑삼나무는 계절을 거스르도록 개수된 까닭일지, 겨울만 되면 시큼한 향을 풍기는 독초-땃쥐코풀을 나무 몸통에서 피워냈다. 그 때문에 2구역에 시범 삼아 심어두었던 삼나무 종이란 종은 캐피톨이 죄 뿌리Wo 뽑아갔기 때문에, 어린 시절 이후로는 볼 수 없던 나무라 하필이면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지금 이렇게 발목을 붙잡히게 되었다니! 통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화살 촉에 땃쥐코풀을 짓이긴 액을 발라두었던 모양이다. 갓 채취한 땃쥐코풀의 독 자체는 독성이 약하지만, 특이하게도 그 액은 그대로 방치해둘 때 시간이 지날수록 독성이 짙어지는 특성이 있었다. 주된 증상은 마비, 오한, 발열, 호흡 곤란이 있었고, 무엇보다 신체의 면역력과 재생 기능을 떨어뜨린다는 성질이 중요했다.
궁지에 몰렸던 판을 뒤집은 줄 알았더니, 여전히 밑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찬 손으로 얼굴을 덮는다. 이스피어는 좌절하길 허락받은 적 없었다.
때마침 참 빌어먹게도 사이렌 소리가 온 경기장을 울렸다.
주최 측의 방송이 들려왔다.
< HAPPY HUNGER GAME ! >
“What the *…….”
시작부터 이스피어가 욕을 중얼댔지만, 어차피 그 말을 들을 수 없던 주최 측은 꿋꿋하게 방송을 이어 나갔다.
< 다들 치열하게 살아남고 있군요. 어느덧 이번 49회 헝거 게임도 끝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습니다. >
이스피어는 보일 리 없는 하늘 너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언젠가 아주 찰나에-자신에게 활이 있었더라면 날아가는 새를 죽음으로 묶어둘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처럼 지금의 이스피어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곱씹고 있었다.
활이 있었더라면, 저 콱 막힌 하늘-캐피톨을 꿰뚫어버릴 텐데.
< 그런 의미에서, 남아있는 생존자들이 모두 적지 않은 부상이 있는 지금! >
“……모두?”
<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줄까 합니다. >
이스피어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회복할 기회는 무슨. 모두가 다친 상황이라면 서로 접촉을 꺼리게 될 테니까,
< 다음 날 새벽. 첫 경기가 시작했던 장소에 보급품 창고를 새로 설치할 예정입니다. >
아마도, 더 이상 움직이기 힘들 것 같은 조공인들로 하여금-보급품을 쟁탈하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함일 것이다.
지금은 클라이맥스의 바로 전 단계인 셈이다. 눈을 감았다.
< 식량, 식수, 상처 회복을 위한 물품, 보온 물품……모든 게 다 들어 있습니다! 다음날 그를 먼저 쟁취하게 될 사람이 누구일지 궁금하군요. >
빌어먹을 캐피톨, 그리고 빌어먹을 판엠. 이스피어가 읊조렸다.
< 확률-행운-의 신이 언제나 당신 편이기를. >
─그대의 영광은 무궁토록 빛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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