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그러니까…. 벌써 한 해가 훌쩍 지나갔던가요.
그리운 고향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산정강 일대에서 병사들을 이끈 장군이자 당신의 형인 유이현理賢은 앞서 말에 박차를 가해 앞으로 달려나갑니다.
어쩐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니 많은 것들이 떠오릅니다.
무가의 가문 일원으로서 산정전 참전을 통보받았던 그 날, 그러니까.
무관들을 여럿 배출한 장군 가문인 유 家와는 반대로
그 가문
은, 전쟁이 막 시작되었을 적 전쟁물자를 팔기 시작하며 막대한 부를 거머쥔 졸부입니다.
명예도 역사도 없이 그저 돈으로 신분을, 관직을 사 우뚝 오른 그 자들은 비열한 술수로 조금씩 조정을 장악해가고 있었습니다.
유 가문의 가주인 당신의 아버지는 이 家를 탐탁치 않게 여겼습니다.
우직하고 충직한 성정을 지닌 그는 약삭빠르고 비열한 그들을 영 좋아할 수 없던 모양입니다.
자기네 입맛에 맞지 않으면 정계에서 내쫓으려 손을 쓰고, 자기네 아래에 빌빌 기는 자들만을 남겨 조정을 채우려고 한다 했습니다.
그러니 성향이 맞지 않는 유 가문이 눈엣가시인 건 그네들도 마찬가지였겠죠.
살얼음판 위를 기어가듯 침묵만이 자리하던 그 호수 위로 돌을 던진 건, 이 家였습니다.
“잠깐의 불화는 모두 잊고 새 시대를 위해 화합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때마침 저희에게 혼기가 찬 막내딸이 있는데….”
새하얀 머리카락은 곧 부서질듯 햇빛에 닿아 찬란하게도 빛나고,
금빛 품은 눈동자는 유약하게 흔들리며 당신의 형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곱디 고운 비단옷을 걸쳤어도 왜 그리 어깨가 무겁게 짓눌린 듯 굴던지요.
여인은 어딘가 불안한 미소를 그리며 고개 숙여 인사하길.
그렇게 몇 번의 만남이 계속해 이어지나 당신의 형은 묵묵히 당신에게 이를 뿐이었습니다.
"이혜야. 이 家의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
"백년가약으로 불릴 터이나 진짜 혼인으로 볼 수 없다."
유이현:이 家가 어떤
꿍꿍이를 품은 것인지 알아내야 한다. (바라보며,) 알겠느냐?
유이혜:... ... 하지만 형님. 정말 화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답잖게 무른 소리를 늘어놓았던 건,
그 여자라고 불렸던 그에게서 제 형이 논하는 의뭉스럽고, 수상스런 기색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리 유약해보이는 자에게는 억지로라도 악의를 담게 할 수 없으리라고 그는 쉽게 확신했다.)
유이현:(그러나 고개를 젓는 행동은 단호했다.) 넌 마음이 너무 약해서 탈이다. (혀를 차는 소리는 명백히 당신을 질책하고 있었다.) 곱디 고운 얼굴을 보여도 속에서 어떤 칼을 갈고 있을지 네가 어찌 아느냐?
유이혜:무릇 모든 일은 겪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법이니, 먼저 마음을 닫고 있을 필요는 없단 의미입니다. (질책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그의 의사는 명확하다. 무인의 그릇에 맞게 잘 다듬어진 그에게서 중립적 의견을 전하는 건 늘 자신의 역할이었다.) 섣불리 굴었다간 잘 될 일도 그르치는 법이지요.
유이현:(이현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며 단지 눈을 감는다. 당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겪어본 적이 있어서 그런 걸까. 그저 말하길.) ─사람에게 너무 마음을 내어주지 말아라. 마음을 완전히 닫진 말되, 지켜보는 선을 유지해.
결국 상처입는 건 네가 될 거다.
결코 사랑으로 나아갈 수 없이 꿰인 첫 단추.
미묘한 답답함과 함께 혼례의 날은 성큼성큼 다가오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유 家의 일원으로서 직접 이 家로 그 여자를,
화려하게 꾸며진 붉은 가마를 뒤에 둔 당신은 애마를 이끌고 이 家로 나아갔습니다.
방 안에서 부름을 기다리고 있을 신부를 데리고 당신의 가문으로 돌아가는 역할을 맡게 되었었죠.
자, 그렇다면 이제 말에서 내려 직접 문을 열고 신부를 대신 맞이하면 될 터인데….
안쪽에서부터 느껴지는 인기척에 당신은 발걸음을 머뭇거렸습니다.
먹구름처럼 흐린 음성이 방 안에 떠다니고 있으매,
유이혜:(
사람에게 너무 마음을 내어주지 말아라. 단단히 경고하던 음성이 자연스럽게 기억을 스쳤다. 응당
유 가의 일원이라면 소리를 죽이고, 기척을 숨겨 그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두어야함이 마땅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사돈. 가족의 울타리 안에 넣어둬야 할 존재들이었으니. 그는 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고, 밖에 있는 하인 중 하나에게 '그쪽 고름이 흐트러져있으니 다시 매어라.'고 하며 자신이 가까이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나서야.) 게 계십니까. (자신이 당도했음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내부에는 형님의 신부와 함께….
이신강: ……. (묵묵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그의 오라비가 신부의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유이혜:(함께 고개를 가볍게 숙여 마주 인사했다.)
이신강: 신아야, (달디 단 목소리가 동시에 왜 그리 쓰게 들리던지.) 가야 할 때가 왔구나. (그리 말하며 신부의 손을 당신에게로…. 인계했다.)
이신아:아, 도련님…. (고개를 숙이며 당신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그맣게 손을 움찔거리며 당신의 손을 붙잡았다.)
유이혜:(신아에게도 마찬가지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길이 길고 험하니 편히 모시겠다고는 말씀드리기 어렵겠지만. ... 목적지까지 안전히 가실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신강에게도 예를 차려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그렇게 형님의 신부는 손을 붙잡고, 당신을 따라 빛으로 나아갑니다.
이제 이 家를 떠나 유 家의 일원이 되니 이곳에서의 연은 끊기고 형님의 신부로서 새로운 삶을….
붙잡은 힘에 당신을 따라가던 여자가 걸음을 멈춰섭니다. 신부의 오라비입니다.
알 수 없는 기분이 당신의 발걸음을 무겁게 잡아내립니다.
애초에 이 혼례는 그들이 제안한 혼례이지 않습니까? 물론, 가문의 뜻과 그 일원의 뜻이 완전히 같으리란 법은 없겠지만은,
이건 꼭 당신이 악역이라도 떠맡은 듯한 기분을 들게 합니다.
어둑어둑한 낯으로 신부는 가마에 오르고, 당신은 가마의 앞이 아닌 옆에 서서 유 家로 향합니다.
자그맣게 열린 창문 너머로 새신부의 옆모습이 눈에 담깁니다.
심란해보이던가요? 아니면 어딘가 결연해보이던가요?
이신아:(침묵 속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흐린 미소를 짓는다.) 거, 걱정이 많으셔서…. 그래요.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니 별 다른 생각은 않으셔도….
유이혜:(늘 그랬듯 조용히 말에 올랐다. 주인을 알아보는 명마는 푸릉대며 가볍게 고개를 턴다. 목덜미를 가볍게 두드리다, 들리는 말소리에 그제야 시선을 옮긴다.) ... ...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하게, 제 의사를 전했다. 조금 특이한 광경이긴 했지만 이상할 것도 없었다. 대개 혼인한 여인은 친가에 발걸음 하는 일이 드물고, 더구나 그의 가문은 산을 몇 개는 넘어야 할 만큼 제법 먼 곳에 위치해있었다. 그러니 평소 각별히 지내던 오누이라면 특이한 일도 아니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핑계를 늘어놓듯 불안해보이는 동작이 시선에 걸리긴했지만.) 그리 어려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긴장한 것이 역력해보였는지, 부러 무겁게 말하지 않으려하며 말을 잇는다.) 형님께선 무뚝뚝하고 표현에 서툰 편이십니다만. 말꼬를 트면 대화에 적극적인 사람이 되니 어렵지 않게 친해질 수 있으실 겁니다.
혹여나 우려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런 경고를 했으니 신아가 바로 적응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않았다. 다만.) ―제가 도와드릴테니 언제든 찾아오셔도 괜찮습니다. 원래도 그건 제 역할이었으니까요. (마치 야생마를 다루는 방법을 알려주듯한 투였다.)
이신아:(당신의 애마, 유린적이 푸릉거리는 소리에 긴장한 것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어깨가 움찔거렸던 것 같다. 이상하게 보이진 않았나? 고개 숙인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아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어. 믿지 말라 하였으니까. 당신의 말이 제 몸의 떨림을 가라앉혀주는 것을 모르는 척 하며, 도리어 다른 질문을 건넬 뿐이었다.)
이현,님은….
…….
지금 저를 기다리고 계실까요?
유이혜:(당연한 말이었다. 혼인을 앞두고 있는 두 사람. 비록 그것이 계약에 묶인 것이라곤 하나 본디 계약이란 의무를 동반해야했다. 좋든 싫든. 그가 가진 감정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현은 신아를 기다리고 있을테다. 그러니 이런걸 묻는 저의 자체에 대한 의문이 들 수밖에. 시선이 여지껏 머무른다.) ... ... 걱정되십니까?
이신아:아, 그, 그게. (본심을 찔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다소곳하게 무릎 위로 모은 손이 불안하게 꼼질거린다. 솟아오른 어깨가 조금씩 가라앉고서야 입을 연다. 눈꼬리가 조금 떨어진다.) 제가…. 성에 차지 않으실 것 같아서…. 아. 아니.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감춰본다.) 금방 건 못 들은 걸로 해, 해주세요….
유이혜:(성에 차지 않는다니. 그는 눈만 꿈뻑인다. 다시 말했듯, 이 혼인은 철저한 계약과 거래에 묶여 있다. 그러니 사실,
성에 차도, 성에 차지 않아도. 뭐. 어쩔텐가? 성에 차지 않는다 한들 이현이 어찌 할 도리는 없다. 이런 류의 혼인은 원래 그런 법이었다. 이현도 분명 알고 있으리라.) 걸리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 ... 혹, 따로 마음에 품은 이가 있었다던가. (그러니 신아의 말이 이혜에게 있어
무언가를 암시하는 말처럼 들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신아:예? (순간 고개를 퍼뜩 들며 소리를 냈다가,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고개를 절레절레절레….) 아. 아닙. 아닙니다. 제, 제가 그런. 그런 걸 할 리가…. (다급한 변명!)
유이혜:(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쉰다. 긴장서린 표정은 지우고서.) 그런거면 됐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시간이 흐르다보면 이윽고 유 家의 문에 도달합니다.
활짝 열린 그 너머로 옷을 차려입은 형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가마에서 내리는 신부의 표정은 여전히…. 아니, 조금은 나아졌을까요?
본래라면 이곳에서 신부의 아버지가 신랑에게로 신부를 인도해주어야함이 맞습니다만….
어째서인지 이 家에서 미리 ‘사람을 보내지 않겠다’고 말한 터라, 당신이 그 역할을 대신하기로 내부 회의가 끝난 뒤였습니다.
유이혜:(신아가 편히 가마에서 내릴 수 있도록 손을 내밀었다.)
이신아:……. (손을 붙잡고, 완전히 땅에 내려선다.)
저 앞에서 신부를 기다리는 형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설렘은 하나 보이지 않고 미묘한 경계와 가식적인 웃음으로 그려진 얼굴.
화창한 봄날, 이토록 햇빛이 따스한데 마냥 기뻐하며 웃는 이 하나도 없는 혼례라니.
머지 않아 당신은 그의 손을 놓아주고, 활짝 열려있던 유 家의 대문을 닫습니다.
혼례가 마쳐질 때까지 이제 이곳에서 문을 지키고 서야 합니다.
이제, 이 家의 여식은 영락없는 유 家의 일원으로써….
저 멀리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은 황제의 전령.
혼인식을 올리고 있음을 알 텐데도 이리 급작스럽게 내용을 전달한단 것은,
전령: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하고.)
황제 폐하의 명령이십니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방증하고 있었습니다.
굳게 닫힌 대문을 열어야 함을 이르고 있었습니다.
열리는 문 너머, 때마침 부부의 술을 나누어 마시고 있는 형님과 그 신부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밝은 햇빛을 나누어 받고 있어서,
돌아온 현재. 당신은 형님과 함께 마지막 길목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곧 있으면 그립기 짝이 없던 유 家의 채가 당신을 반기겠죠.
유이현:내내 돌아가고 싶다 노래를 부르지 않았더냐? (장난기 서린 음성이다.)
유이혜:형님께서 곱절은 더 하셨던 것 같은데요. (절대 져주지 않고서 고개를 빳빳이 든다. 다만 눈밑에 침침하게 그늘이 진게, 암만 유가의 장수라 하더라도 피곤한 건 어쩔 수 없는듯 싶다.) 형님께서 제 엉덩이를 뻥 걷어 찰 때까지 잠이나 자보렵니다. (참 그다운, 재미없는 얘기들이다.)
유이현:돌아가자마자 걷어 차야겠군. (표정은 참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데.) 예정보다 일주일 쯤 이르게 가니, 다들 지금쯤 예정에 없던 맞이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테다.
…하니 당장은 편히 어울리도록 해.
그리고 어느덧 저 멀리서 보이기 시작하는 유 家는 식솔들이 무언가를 준비하며 부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다 당신들을 확인한 하인 중 한 명이 “도련님들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큰 목소리로 외치고,
곧 버선발로 뛰쳐나온 당신들의 어머니, 정 부인이 소매로 눈가를 찍어냅니다.
정 부인: 다들 무사히 돌아왔구나!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친 곳은 없고? 많이들 피곤하지, 응?
다만 정 부인과 열린 유 家의 대문, 그 안을 살피던 이현이 묻습니다.
부인께서는 어디 계시는지요? …소식을 들었다면 나와야 할 것이 아닌가?
정 부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이현과 당신을 바라봅니다.
정 부인: 갑자기 이틀 전에 웬 소식을 받고 이 家로 향해야겠다 하지 뭐니?
혼자 짐을 싸들고 가버려서 붙잡을 새도 없었단다. 아니, 아무리 너희가 원래는 더 늦게 온다 했었지만은….
아무리 당신들이 일주일 빨리 오게 되었다지만 이제 남이나 다름 없을 이 家에 쏠랑 향해버렸다니요?
거기다 이틀 전에 갔다 하면, 벌써 3일이나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게 아닙니까.
이현은 한숨을 푹 쉬며 미간을 누르다, 무거운 표정으로 당신을 돌아봅니다.
유이현:돌아오자마자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하지만….
부인을 좀 데리고 와줄 수 있겠느냐.
이런 자리에 부인이 없다면 유 家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 않아.
유이혜:왜 제게 안 시키나 했습니다. (장난스레 말을 덧붙인다. 대번 무거워진 공기를 조금이라도 띄울 의도였다.) 준비가 끝나기 전에 돌아올테니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또 어딜 가려는 거냐며 저를 원망스레 바라보는 애마의 목덜미를 가볍게 두드리며 달랜 뒤에서야 위에 올라탔다.)
유이현:(한숨을 푹 쉬었다.) 엉덩이를 걷어차는 건 안 할 테니,
해가 뜨기 전까지는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거라.
그렇게 당신은 살벌하기 짝이 없는 전장터에서 돌아오자마자, 형님의 신부를 찾으러 다시금 같은 길로 말머리를 돌립니다.
화려한 가마도 없고 날도 그리 푸르지 않은 해 질 녘 오후.
그곳에 다다르면 완연한 밤이겠습니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때와 같은 기묘한 감정이 당신을 휘감아 잡는 듯 했습니다….
어둑어둑해지는 이 때 고개를 굽이굽이 넘어갑니다.
유린적은 자비 없는 행군에 심통이라도 난 듯 했지만 얌전히 당신의 뜻대로 땅을 박차며 달려나가고, 저녁 공기는 당신의 뺨을 아프게 스쳐갑니다.
첫날밤도 채 치르지 못한 새신부가 1년간 유 家에 남아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 전부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겠지만은…. 떠나기 전 정 부인은 당신과 형님에게 신부의
기행
을 낱낱이 전달하였습니다.
“아니 글쎄,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 애가 집에 들어온지 한 달 째에 암소 한 마리가 죽은 게 시작이었어.”
“건강하던 하인이 픽 쓰러지는 일이 있지 않나, 수탉이 괭이에 물려죽질 않나….”
여우누이라도 되지 않는 한 어찌 새신부가 암소를 죽이고, 하인을 기절시키고, 수탉의 목을 물어 죽인단 말입니까?
전투를 치르는 중에 소식을 전해들었죠. 어명을 우선하는 것이 장군 된 도리이니 돌아가지 못했을 뿐, 갑작스러운 죽음임엔 틀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단지 ‘신부의 존재’와 엮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밖에요.
이 家의 대문 앞에 다다른 당신은 유린적을 멈춰세우며 상념에서 벗어나옵니다.
목소리를 높여 하인을 부르면, 급히 문을 열고 나온 자가 당신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하인: 유 家에서 무슨 일로…. 주, 주인나리를 불러드릴까요?
유이혜:형수께서 사흘 전에 이곳으로 걸음하셨다 들었는데, 혹시 안에 계시는가? (말 위에서 흘끗 담장 너머의 불을 가늠하듯 잠시 목을 빼었다가, 마저 하인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부군께서 예정보다 이르게 승리를 거머쥐고 부인을 위해 서두른 탓에 오늘 돌아오셨다 전해다오.
하인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안채로 들어섭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기다리던 사람은 나오지 않고, 도리어 명을 전달받았던 하인이 다시 나와 이릅니다.
"아가씨께서 나오실 생각이 없으신 듯 하, 합니다요."
"도련님께서 혹시 직접 아가씨를 데려가주실 수 있으실지…."
…말 끝을 흐리는 것이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모양입니다만, 당장 캐묻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군요.
유이혜:(그제야 평온하던 그의 표정이 구겨진다.) 연고를 말씀하시던가?
난감한 표정의 하인은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더듬습니다.
"시, 신아 아가씨의 이복 오라비 되시는 분께서 급사하시어서…."
"지금, 상 앞에서 나오지 못하고 계십니다…."
유이혜:(사유를 알고나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좀 더 사정을 자세히 말하고 왔더라면 어머니께서 그리 부산스럽게 구는 일도 없으셨을텐데. 초야조차 치르지 못하였으니, 유 家내의 신아는 늘 위치가 불안정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말이 그러했듯, 겹겹이 몰아치는 불행은 그로하여금 가족이 아닌, 어중간한 손님이자 이방인인 신아를 어떻게든 고립시키려 애썼을테다. 그러니 혼인한 몸이라한들, 이 家에 더 마음을 붙였을 수 밖에. 애틋하게 굴던 남매의 모습이 흐릿하게 눈꺼풀 뒤로 비쳤다 사라진다.) ... ... 잠시 만나고싶다 전해다오.
하나 이상하군요. 아무리 그래도 '아가씨'의 오라비나 되는 자인데, 급사라고 한들 보이는 하인들은…. 상복을 차려입지 않고 있습니다.
고개 숙인 하인이 신아를 부르기 위해 다시금 향하고 얼마간 시간이 흐릅니다.
힘없이 터덜터덜, 휘청휘청 걸어와 문을 열어 보이는 건….
초점 잃고 흐리던 눈동자가 당신을 마주하자 간신히 빛을 되찾습니다.
이신아:(급히 고개를 숙였다.) 도, 도련님.
유이혜:급히 소식을 접해 차림이 좋지 않습니다. (
죄송합니다. 가볍게 목례하며 우선, 망자를 향한 예를 갖춘다. 흙먼지로 더러운 손이 신경쓰였는지 그는 제 옷가지에 손을 벅벅 문지르고 나서야 꽃을 집었다. 망자의 이름 앞에 올린 꽃이 덩그러니 놓인 게 참. 초라해보인다. 물론, 신아에게 있어선 난데없는 상황이었을테다. 1년만에 본 남편의 아우가 갑자기 나타나선 조문이라니.)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이런 인삿말도.)
이신아:(그러니까, 자그마치 1년만의 만남이구나.) ─이, 이르게 돌아오셨네요. 아니. 그러니까. 몸은, 어디 다치지 않으시고…. (순간
당신을 막아서듯 앞을 가로막아 서지만, 눈치를 살피며 몸을 바로 했다. 가문의 어떤 자들도 신경쓰지 않아 자신이 홀로 조촐하게 차린 상. 그 위로 덩그러니 놓인 꽃 한송이가 이상하리만치 눈에 박힌다. 아,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였다.)
(숨을 한 차례 가다듬고.) 다,치진 않으셨나요…?
유이혜:행군이 서둘러 진행된 걸 보니 다들 집이 그리웠던 모양입니다. (가벼운 말투로 말을 전하고선,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을 가만 바라본다. 보이지 않는단듯 부러 어떠한 감정도 전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다행스럽게도. 멀쩡합니다. 저도,
형님도요. (당신이 기억해야할 존재를 가만 일러주고선. ... 잠시 침묵했다.
그러니 이제 저와 함께 갑시다.라는 말은 차마 나오질 않았다.) ... ... 장이 마련된건 오늘로 며칠 째입니까?
이신아:…아, (단말마같은 말이 신음처럼 새어나왔다.) 이현 님께서도…. (새신랑이 무사히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다 말을 전해들어도 마냥 기쁘지 않은 듯 차게 식은 제 손을 매만지고만 있었다.) 죄,송해요. 급히 이야기를 전해듣게 되어서 어머니께도 제대로 이르지 못하고…. 경황이, 없어서. (횡설수설하며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오늘이 이틀째…예요.
그리 말하는데, 대문 안에서 누군가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걸어옵니다.
상대를 알 수 없음에도 신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 같습니다.
이황옥: (미간을 찌푸리며 신아를 바라본다.)
무관께서 괜한 발걸음까지 하게 만들다니.
…이황옥. 이 家의 당주이자, 여자의 아버지입니다.
그가 이곳까지 걸음한 당신을 바라보더니 뱀처럼 잠시간 웃음짓습니다.
이황옥: 미안하오. 돌려보냈어야 했던 것을 이곳까지 발걸음하게 만들었군.
…장은 잘 마칠 터이니, (잠시 시선이 당신을 향한다.) 이만 돌아가거라.
유이혜:오랜만에 뵙습니다. (가볍게 목례로 인사한다. 이황옥. 종종, 그조차 소름끼치게 만드는 작자. 늘 느슨하게 풀려있던 자신의 경계심조차 이 사내 앞에만 서면 무의식적으로 매듭이 지어지곤 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서 그의 딸을 숨기려는듯 몸이 조금 기울었던건.) 아뇨. 상 중인데도 잔치를 준비하라 이를 순 없는 법이지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희 집안 어른들께서도 분명 이해하실 겁니다. ... 형수께서 하루 더 지내고 오시길 바라신다면요. (슬쩍 시선을 돌려 신아의 의사를 물었다. 제 마음대로 있어라, 가라.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유家에선 그가 방패막이 되어줄 의향이 있지만, 이곳에선 그도 외부인인 것은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몸과 입을 칭칭 묶어두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신아:저, 저는…. (마른 침을 삼켰다. 눈에서 빛이 사라진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도련님. 전. (고개를 들어 그때에서야 눈을 마주쳤다. 빛이 죄 사라진 눈동자가 당신을 향한다.) 이만 돌아갈게요….
이황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신아의 등을 대문 바깥으로 밀어냅니다.
"이제는 이 家와 관련 없는 사람이니 데려가면 될 뿐이오."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고작 국화꽃 한 송이를 남긴 채.
푸르릉, 내내 밖에서 당신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유린적만 다가와 당신의 어깨를 코로 밀어대는군요.
유이혜:(신아를 데려가는 것이 제 역할이긴 하나, 이렇게 쫓겨나듯 데리고 나오게 될 줄은 몰랐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길게 머무는 침묵에 그는 괜히 유린적의 목을 쓸어주었다.) 형님께 얘기해 저희 가문 안에서라도 마저 인사를 마칠 수 있게 해보겠습니다. (따위의 심심찮은 위로를 전한다.)
이신아:(닫힌 대문을 어둑어둑한 눈으로 돌아보다, 건네지는 위로에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오라버니는. (입 안이 마르는 기분에 입술을 달싹였다.) 잘…. 보내주시겠죠.
(그리고 시선은 당신의 말로 향한다.) 도련님의 마, 말인가요?
유이혜:예. 성격이 조금 나쁘긴 합니다만... ... (본인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한 번 정을 붙이면 곧잘 따르는 편입니다. 아. 처음보는 사람은 좀 싫어하는 편이라서... ... (괜찮으려나? 혹시 무서워하는건 아닐지 걱정하듯 당신을 빤히 바라본다.)
당신의 말에 유린적은 발굽을 한 번 구르며 당신을 노려봅니다.
그 모습에 어깨를 움찔거린 신아가 반 걸음 뒤로 물러나기도 했고요.
이신아:…처, 처음 보는 사람은 아, 안 태워주나요? 억지로 떨어뜨리려 한다던지…? (자기도 모르게 유린적에게서 당신의 팔 뒤로 몸을 반쯤 감춘다.)
숨는 듯한 신아의 모습에 유린적은 꽤 불만스러워하는 모양이기야 했습니다.
푸릉, 소리를 내며 한 걸음 물러나며 당신을 바라보았으니 말이에요.
유이혜:(피식. 웃음소릴 낸다.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한 모양인지 통 갈무리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더니 멀어진 한 걸음만큼 가까워지고. 곧 제 옷을 붙잡고 있는 당신의 손을 부드럽게 끌어 유린적의 턱 밑으로 살며시 얹었다.) 말은 생각보다 똑똑합니다. 머리를 잘 굴리지요. 특히 이 녀석같은 놈들은 그리 겁을 집어먹었다간 만만히 보기 십상이니 부러 대담하게 구는 것이 좋지요. 자. (하더니 쓰다듬어 보라는듯 겹친 손을 천천히 움직여 유린적을 쓰다듬어볼 수 있도록 이끌었다.)
이신아:(아, 그, 같은 소리는 웅얼거리는 통에 사라지고, 부드러운 손길 아래 긴장한 손은 조금씩 풀어진다. 말조차도 날 만만히 보는 건…. 역시, 조금 그러려나. 유린적의 미간에 손이 닿자 움찔, 떨었다가 조금씩 부드러운 손길로 쓸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면 마음이 놓이는지 자그맣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나, 나 미워하지 마. (말간 말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보면 금방까지의 일이 잊히는 것만 같았다.)
신아의 손이 얹어지자 유린적은 잠시 푸릉, 거리다가도 얌전히 손길을 받아줍니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 성격이 워낙 고약하긴 했지만….
유이혜:얼씨구. (그걸 눈치채곤 황당하단듯 유린적을 은근히 노려보았다.)
슬슬 출발하지요. 더 늦었다간 내일 몸이 더 곤할 겁니다.
이신아:(얼씨구, 소리에 순간 자신에게 향한 말일까 움찔거리다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 (난감하게 유린적을, 유린적의 등을 바라본다.)
그, 저…. (우물우물.) 어, 어떻게 올라타야 할까요?
유이혜:(이런 질문은 처음 듣는지라 그는 한참이나 눈만 꿈뻑거렸다.) ... ... 어. 말에 타본 적이 없으... 십니까?
(푹 숙인 고개. 어둑어둑한 밤에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신아:(입술 달싹달싹…. 눈을 질끈 감았다.) 죄, 죄송해요. 제가. 그러니까.
…….
뒤에서 뛰어갈까요…?
그럼. (하더니 유린적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제 무릎을 손으로 툭툭.) 밟으시죠. (사람에따라 제법... 당황스러울 장면이었다.)
이신아:(갑자기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꿇어앉는 당신의 모습에 치맛자락을 쥐어잡으며 놀라 바라봤다.) 예, 예? (믿기지 않기보단…. 지금의 상황을 믿기 힘들어하듯 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빛이 사라진 눈보단 울망거리는 지금의 눈동자가 더 나아…보였나?) 저, 저. …
저 무, 무거…운데….
유이혜:(정작 제안한 사람은 뭐가 문제냐는듯 마주한 눈을 꿈뻑거린다.)
그런데요?
그런 당신의 머리를 주둥이로 콱 가격한 유린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이로써 당신의 무릎을 쓰지 않고도 쉽게 올라탈 수 있게 되었네요.
이놈이 아주 주인을 바꾸고 싶나봅니다. (머리 한쪽이 마치 쥐어뜯기기라도 한듯 헝크러져있다.)
이신아:(도련님의 머리가!!! 경악하며 유린적을 바라보면…. 몇 가닥이 입에 물려 있었나?)
고, 고마…워…. (의도를 눈치채곤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말은 정말 똑똑하구나. 그럼에도 처음 타보는 것이니 다소 망설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치맛자락을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말의 목에 손을 얹어 지탱하며 간신히 탑승에 성공했다.)
저 타, 탔어요. 도련님. (그리 말하자마자.)
겨우 신아가 탑승하자마자 유린적은 지체없이 몸을 일으킵니다.
'어차피 넌 쉽게 탈 수 있잖아?'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네요.
유이혜:... ... (이자식이? 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신아:어, 어어! (일어섰다! 깜짝 놀라 중심을 잃어, 반쯤 유린적의 목을 끌어안듯 앞으로 엎어졌다. 오들오들오들.)
유이혜:나참. (중얼거리며 익숙하게 안장 위로 펄쩍 올라탔다. 앞에 누군가를 태우는건 ... 적어도 유린적으론 처음인지라 조금 어색했다.) 아무래도 이녀석이 형수님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한탄하듯 중얼거리며 고삐를 잡는다. 오들오들 떠는 당신을 보더니 평소같은 속도로 달리는건 엄두도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리 몸에 힘을 주시면 안 됩니다. 몸에 힘을 빼고 제게 기대보세요.
이신아:(뒤에 확 올라타는 인기척에 더 목을 끌어안듯 들다가, 마지막 말에서야 간신히 허리를 세우기 시작했다.) 제, 제가 마음에요? 그리고. 하지만, 제가 기대면 도련님이…. 힘드실 텐데…. (덜덜 떨며 고개를 돌려 당신을 바라본다.)
유이혜:... ... 지금 유 家의 차남을 무시하시는 겁니까? (반쯤 농이었기에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역시나 당신에겐 딱딱한 얼굴로 보였을 것이다.)
이신아:(힉!!! 고개를 팍 앞으로 돌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게 아니라. 죄. 죄송…. (눈을 질끈 감으며 떨다가, 억지로 힘을 빼며 조금씩 등을 뒤로 기울였다. 어, 이쯤에 도련님의 몸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아직도 안 닿나? 아직도? 하다가. …
툭,)
(등이 닿았다.)
유이혜:(묵직한 무게감이 가슴팍으로 느껴졌다.
작구나.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상념은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지워낸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고삐를 잡은 손을 움직인다. 이랴!)
이랴! 소리와 함께 땅을 박차고 유린적이 앞으로 달려나갑니다.
스치는 밤공기는 적어도 이 家의 대문 안 공기보단 상쾌하고, 시원할 텝니다.
그것이 추위로 느껴진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만,
적어도 맞닿은 당신의 몸이 확연한 온기를 전달할 테니.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은 신아도 결국엔 천천히 눈을 뜨고 유린적의 속도에 맞춘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이신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휘영청 달은 높게 떠있고, 밝은 별들이 콕콕 박혀있고.)
이신아:(눈을 잠시간 감았다가, 입을 열어 묻는다.)
이마에….
못 본 흉터가 남았어요, 도련님.
(입술을 달싹였다.) 아프셨나요?
유이혜:아. (뒤늦게 그 존제를 자각했다는듯 손을 더듬어 상처부위를 만지려다, 행여 제게 기댄 당신이 균형을 잃을까 멈칫거릴 뿐이다.) 고작 이런 걸로 우는 소릴 할 사내는 없을 겁니다. (덤덤한 투로 답한다. 아프지 않았다던가, 끄떡 없다던가. 그런 말은 덧붙이지 않는다.)
이신아:(말을 타고 달려가는 내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경치를 구경하거나 당신에게 기대어있는 것밖에 없었던지라. 어색하게 모아 잡은 손가락이 꼼질거릴 뿐이었다.) 그래도 아, 아프셨을 테니까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통은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니까…. (마치 겪어본 사람처럼.)
바람결 사이에 자그마한 목소리가 흩어져 사라집니다.
그렇게 밤이 다 가기 전에는 겨우내 돌아올 수 있었군요.
시원한 공기도 오래 맞으면 차가워지는 법이라 그런지, 말에서 내린 형수께서는 몇 차례 기침을 합니다.
도착한 유 家의 대문 안쪽은 밤임에도 밝은 빛들로 일렁이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소리들이 시끌벅적하게 담장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 틈에서 어울려 웃고 있던 이현이 당신과, 그 옆의 신아를 향해 눈을 돌립니다.
미묘함이 스며드는 표정으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유이혜:다녀왔습니다, 형님. (가벼운 인사를 건네며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살며시 비켜섰다.)
이신아:(어색한 미소가 그려진다.) 무사히…. 돌아오셨다고는 들었지만…. 다행이에요, (무어라 불러야 할지 입술을 달싹이다.)
이현님.
“이제야 오다니! 이게 아니지. 어서 와서 좀 거들어주렴, 얘야.”
주방에서 정 부인이 치맛자락을 붙잡고 뛰어나옵니다.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신아를 끌고 가는군요.
유이혜:어머니, 형수께선, (그리고 역시. 설명하려다 놓치고 만다.)
이현은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당신에게 눈짓합니다.
유이혜:(가벼운 한숨을 내쉰다.) 형수의 오라비께서 상을 당하신듯 합니다. 어머니께 언질할 수 없었던 건 갑작스런 소식에 놀라 그런 것 같고요. (대신하여 핑계를 덧붙인다. 본래는 사실만을 전하는 편이지만... ... 이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어차피 제 형수께선 형에게 어떠한 핑계도 대지 못할 것이라 확신한 탓이다.) 친밀한 관계였던 것 같은데... ... 며칠간은 위로가 필요하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말에 이현은 놀란듯 눈을 크게 뜹니다.
유이현:(턱을 매만지다.) 오라비라면…. 내가 아는
친오라비는 하나 뿐이다. 그 자는 아직 나향에서 전투 중일 터인데. (그러나 유이현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상'보다도 이 家 그 자체인 모양이었다.) 이름이 어찌 되더냐?
유이혜:... ... 예?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지 고개만 갸우뚱댄다.) 신강... 이라 들었습니다만. ... 모르시는 이름입니까?
이현은 침음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당신에게 눈짓을 합니다.
전쟁에 나가있는 도중 따로 이 家에 관한 정보를 모아놓으라 맡겨둔 듯 합니다.
모여있는 문서 중 하나를 꺼내 살피던 그가 당신의 앞에 내려놓습니다.
유이현:이신강.
서자이군. 그것도 넷째. …적녀인 부인과는 따라서
이복남매다.
아무리 친밀했다 한들 거의 관련도 없는 자의 상을 치르러 간 격이구나. (그리고 다른 서자들의 이름을 잠시 눈에 담아둔다.)
유이혜:(잠시 생각하다가.) ... 친밀했으니 관련이 없는 건 아니지요. (듣는 이가 거슬려할 문장을 뱉는다.)
그 말에 이현의 시선이 묵묵히 당신을 향하다가.
이현의 허락 뒤에 문이 열리자 작은 다과상을 든 신아가 안으로 들어섭니다.
자연스레 문서를 정리한 이현은 당신에게 눈짓합니다. 허튼 소리 말라는 것이겠죠.
유이혜:(설마 얘기를 들은 건 아니겠지? 잠시 눈이 커졌다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난다.) 말씀 나누세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신아:네, 네? (당황하며 다과상을 내려놓은 그대로 멈췄다.)
유이현:…아직 너는 남아 할 말이 있으니 남거라. 그리고 부인은….
형님은 미묘한 미소를 그리며 신아를 바라봅니다.
그리곤 바닥에 내려놓은 신아의 손을 붙잡는군요.
유이현:며칠 동안은 바쁠 예정이니 먼저 주무시지요.
이신아:(손이 붙잡히자 긴장으로 굳은 어깨가 보인다. 당황해선 이혜를 흘끔대며 바라보다,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유이혜:(지금까지 독수공방 시킨 것도 모자라 또... ... . 자신들이 돌아왔음에도 결코 바뀌는 것고, 나아지는 것도 없으리란 생각에 저도 모르게 옅은 한숨을 뱉는다.)
당신의 한숨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이현은 눈썹을 까딱이곤 신아의 손을 놓아줍니다.
탁, 문이 닫히고도 기척이 멀리 떠나가기까지 침묵하던 이현은,
유이현:내가 아버지의 일을 처리하는 동안은….
네가 맡아 감시하거라. (대상은 명확하다.)
유이혜:감시할 필요도 없는 유약한 여인입니다. (한 눈에 봐도 그런 권모술수들과는 거리가 멀어보이지 않나? 다정한
척이나 해대는 제 혈연의 모습에 기가 찬지 망설임없이 얼굴을 구겼다.) ... ... 지난 1년간 마음 놓을 이 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 마음고생이 심했을텐데 안쓰럽지도 않으십니까?
유이현:(이번엔 그도 한숨을 숨기지 않았다.) 본인의 성질이 얼마나
나약하든, 그조차 무기로 쓸지 모른다는 소리다. 이 家의 놈들은. (마주본다.) 동정하는 게냐?
유이혜:나약한 성질을 어찌 무기로 쓴단 말입니까? (하다못해 칼을 휘두른다 한들 전장에서 날고 기었던 이들을 제압할 수 있을리가 없다. 게다가... 이 家의 주인은 형수를 그리 예뻐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제 형님은 이미 마음을 닫았을테고, 어차피 이런 걸 얘기해봤자 그 또한 술수라 생각할 것이다. 이리저리 구박받는 게 훤히 보이는데 다들 눈이 멀기라도 한듯 한뜻으로 미워해대니 동정하지 않을수가.) ... ... 적당히 하잔 겁니다. 무기를 쓰려한들 자리를 잡아야 쓰겠지요. (그러나 그는 설명을 않기로 했다. 구구절절 늘어놓으며 형을 설득하다 저조차 형수를 돕지 못하게 되는 것보단 나을테니.)
유이현:그 자들은….
항상 얘기치 못한 무기를 사용해 틈을 찔러오니까. (그리고 무어라 말하려다, 그저 입을 다문다.) …넌 항상 예전부터 그랬지, 이혜. 어머니나 아버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법이 없었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다가.) 부인이 무해한 자라는 걸 증명하고 싶거든, 그걸 위해서라도 모레까지는 동향을 살펴보아라. 네 형이 아닌 유 家의 가주로서 하는 말이다.
실타래가 꼬이고 또 꼬여, 속이 답답해질 지경입니다.
결국 당신은 꽉 막힌 형님을 설득하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고요.
결국엔 '감시하라'는 명령과 일치하는 말이지 않습니까.
2. 그 여자
아무리 번듯한 장군가의 며느리로 들어왔다 해도 정 부인이 그토록 정정하니, 막상 신아에게 맡겨지는 일은 별 것 없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별 것’의 일만 그에게 맡겨졌다고 해야 할까요?
1년이란 시간 사이 형수는 정 부인께 단단히 미움을 산 모양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오늘부터 이현의 명을 따라 새벽부터 형수님의 족적을 따라다녀야 합니다.
이제 전쟁에서 돌아왔으니 형님과 부부로서 같은 방을 써야 하는 것이 맞지만,
전 날 보았듯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밀린 일을 바쁘게 처리하고 계신 형님께선 아직 동침의 뜻이 없는 모양인지라.
홀로 잠들고 홀로 일어난 형수의 하루는 새벽 다섯 시 경부터 시작합니다.
간략한 세안과 몸단장을 마친 뒤 처음으로 하는 일은 빨랫감 중 일부를 떠안고 시냇가로 향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찬 공기에 수 차례 기침을 하며 불안하게 걸음을 옮기는 형수의 뒤를 조용히 따라 나섭니다.
이미 몇 아낙네들이 옹기종기 모여 빨래를 하며 수다를 떨고 있는 시냇가는 형수께서 도착하자마자 싹 말소리가 잦아듭니다.
자기네들끼리 음험한 시선이 교차되며 형수를 향하길 몇 번. 대화는 재개되지만….
“‘그’곳에서 시집왔다더니, 단단히 미움받고 있는 모양이지요.”
“몸도 약해 할 줄 아는 게 없어 빨래라도 시키는가봐.”
“들었어요? 그 집 수탉이 또 들짐승에 물려 죽었대요.”
“하인도 쓰러졌다면서요? 불길한 일이 끊이지들 않네.”
그네들끼리 소리 높여 웃는 소리에도 신아는 묵묵히 물가를 찾아 돌아다닐 뿐입니다.
이신아:(물의 상류는 저 자들이 쓰고 있으니, 조금 밑에 가 빨래를 해야겠는데…. 물이 영 더러워 고민이다. 주변을 잠시 서성거린다.)
형님의 '명'을 따라 이혜, 당신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나요?
유이혜:(본래
감시라고 한다면 말 없이. 무슨 일이 있든간 지켜보는 것이 관례이다. 제 형님이 일을 맡겼을 땐 분명 그런걸 기대했으리라. 다만 이어지는 대화, 숙덕거리는 목소리, 눈빛따윌 지켜보고 있노라면.)
― 형수님! (어쩐지 자꾸만 가만둘 수가 없다.) 형님께서 부인께 준다며 약과를 사오셨는데 어찌 이런 곳에 계십니까? 늦어졌다간 제가 혼날테니 저도 거들겠습니다.
(종종 장에 나오던 광대놀음을 따라하듯 큰 소리로 말하고선, 망설임없이 손을 걷어 빨랫감을 빼앗아든다. 이곳은 물이 너무 더럽네요. 이쪽이 좋겠습니다. 덧붙이며 성큼성큼 상류로 걸음을 옮겨 아낙들보다 더 상류 쪽에 자리를 잡고 빨래를 시작한다. 행여나 자신이 이곳에 있던 이유가 감시였단 걸 당신이 눈치챌까 시선은 빨랫감에만 고정돼 있었다.)
이신아:(자신을 부를 사람 없을 곳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니…. 그것이 정말 자신일까 싶지만. 너무도 선명한─당신의 목소리였던지라.)
도, 도련님?!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활짝 피며 당신을 돌아보았다.)
(참 이상한 일이지. 해가 제대로 밝아오지 않아 어둑어둑하기 짝이 없는 이곳에 당신이 온 것만으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야. 겨우 며칠 보았다고? 몇 번이나 대화했다고? 그러니 착각하지 말자. 기대하지….) …도, 도련님! 빨래는 제가 할게요! 제게 주세요! (하지만 그런 상념들은 성큼성큼 상류로 향해, 냅다 빨래를 시작하는 당신의 모습에 눈 녹듯 사라지고 만다. 당황한 마음만이 가득해져 당신의 빨래감을 빼앗듯 손을 뻗어 힘을 주었다.)
유이혜:둘이서 해야 더 빠릅니다. (어차피 당신의 손을 저지하고 치우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전쟁터에선 이보다 더한 일도 해봤습니다. 자신 있으니 걱정 마시고 제가 드리는 것들만 헹궈주세요. (찬물에 손을 넣는다. 자연스레 좀더 쉬운 일을 당신에게 넘긴다. 시선은 여전히 퍽, 퍽 두드리는 빨래에 고정돼 있었다. 결코 제
임무를 잊지 않았고 지금은 단지. 잠시 도와줄 뿐이라고 핑계대듯.)
이리저리 옥신각신 하다가도, 아낙네들의 시선을 의식한 신아는 반항을 멈추고 묵묵히 빨래를 해나가기 시작합니다.
시냇물에 손이 얼어 벌겋고, 새벽 공기에 기침이 몇 번 튀어나오기야 했지만요.
당신의 등장에 무어라무어라 수군거리던 아낙네들은 다행으로, 다른 화제로 넘어가 입방아를 찧어댔습니다.
“그나저나 옆 마을 황 대감 댁 소식 들었어?”
“아니 글쎄, 조정 회의에서도 목소리 안 밀리기로 정정하신 양반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잖아.”
순간 빨래감을 씻어내던 신아의 손길이 멈춥니다.
잠시 살펴보면, 꼭 체한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있는 얼굴이 보입니다.
…머지 않아 빨래는 다 끝이 나고, 당신들은 빨랫감을 정리해 바구니에 담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느덧 떠오른 해가 산등성이를 아슬아슬하게 타고 올라오는데도 형수의 표정은 썩 좋지 않습니다.
밥도 먹지 않았는데 속이 불편한 사람처럼 가슴께를 두드리질 않나, 걸음이 자꾸만 느려지질 않나.
유이혜:(그 모습을 보자 괜히 마음이 또 안 좋아져선.) ... ... 어디 불편하십니까?
이신아:네? (화들짝 놀라 당신을 돌아보았다.) 아, 아뇨. 괜찮아요. (고개를 젓는다.) 죄송해요. 제가 걸음이 느렸죠…. (다리를 더 바삐 움직였다.)
돌연 ─차디찬 빗방울이 콧잔등에 툭 떨어집니다.
형수가 의아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해는 쨍쨍하게 떠 있는데….
여우가 심술이라도 부린 것인지 조금씩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젖어가기 시작하는 옷과 바구니에 주변을 둘러보아도 마땅히 몸을 피할 만한 곳이 없어, 어쩔 줄 몰라하는 형수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나 낭패 어린 눈은 조금씩 체념에 물들어가는 것처럼 빛을 잃습니다.
바삐 움직이던 다리에서 힘이 빠져 끝내 걸음을 멈추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멀지 않게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나무 아래라면 소나기를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음을 압니다.
유이혜:... ... (가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쪽입니다, 형수님. 이러다 고뿔에 드시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덥썩. 손목을 붙잡아 목련 나무 쪽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무언가에 잠겨들어가던 형수를 일깨우는 건 전날 밤과 같은, 당신의 온기 하나 뿐입니다.
붙잡힌 손목에 어어,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은 형수는 허둥지둥 뱁새가 황새 따라가듯 발을 옮기고,
끝내 조금의 달음박질 끝에 당신은 목련나무 아래에 도달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 끄트머리에 우뚝 선 목련나무는 족히 몇 백 년은 될 크기를 자랑하며 당신과 형수를 비에서부터 숨겨줍니다.
아직 꽃봉오리 상태인 목련꽃은 곧 큼지막한 꽃을 틔우며 좋은 향기를 자아낼 것만 같습니다.
꽃봉오리를 올려다보던 신아가 툭, 나무기둥에 등을 기대 섭니다.
유이혜:하늘이 흐리지 않고 맑은 걸 보니 금방 지나갈 여우비일 겁니다. (슬쩍 하늘을 쳐다보는듯 하다 자신 또한 나무기둥에 등을 기대 선다.)
... ...
저,
죄송합니다, 형수님. 사실 아까 제가 한 말은... ... (형님이 약과를 사들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라고 한 거짓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끝끝내 고백하려 말문을 튼다.)
이신아:(그러나 그의 시선은 땅바닥에 박혀 있었다. 돌밭, 그 위로 떨어진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 하나. 달싹이던 입술을 열어 말했다.)
거짓말이죠?
…….
저를…. 도와주려 하신 말씀인 것 같았어요. (품에 안은 바구니를 만지작거렸다.)
유이혜:(말 허리를 자르며 건네는 문장에 잠시 턱. 숨이 막힌다. 하긴. 초야조차 치르려하지 않는 부부가 웬 선물이란 말인가. 거짓말이란 걸 굳이 고백하지 않았어도 당신은 알았을 것이다. 근데, 왜일까. 거짓말인 걸 당신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젖은 천처럼.) ... ... 이런 걸로는 돕는다 할 것도 못 됩니다. 본질적인 건 나아지지 않았으니까요.
이신아:(본질적인 것.
그것은 제 태생을 의미하는 건가요, 도련님? 하고. 신아는. 이 家의 신아는 차마 묻지 못했다. 그러나 물음은 응어리로 남아 끝없이 속을 갉아먹으며 자신을 괴롭힐 뿐이다. 조용히, 보이지 않는 쪽의 손가락이 곱아들어 손바닥을 찌른다. 아릿한 고통에라도 정신을 일깨우라고.) 도련님은…. 무얼 하다 이 시냇가까지 오게 되신 건가요? (대신 다른 질문을 건넸다.)
유이혜:어, (하지만 그 질문도 그를 곤란하게 하긴 마찬가지였다.
당신을 감시하란 명을 받아서요. 차마 그렇게 말할순 없으니. 핑계 거리를 찾다가 길가에 핀 꽃을 보고는.) 어. 어머니께 드릴 꽃을... ... 좀 꺾어가고 싶어서요. (
그 유 家의 차남이? 핑계도 참. 급히 말을 뱉다 그는 스스로의 언사를 믿지 못하겠단듯 손끝으로 입을 틀어막듯 매만졌다. 저가 느끼기에도 어리숙한 거짓말이다. 고작 나이가 여덟이던 시절에도 이런 실수는 한 적 없는데. 왜 그랬지?)
이신아:(당신의 대답에 한참 말이 없었다. 놀라기라도 한 걸까? 하긴,
그 유 家의 차남이 어머니께 꽃을 꺾어가려 들렸다니. 말이 되는 소리어야지.) 어머님…께요? (역시 그런 당신의 말에 실망한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그것도 거짓말임을 눈치챘던가. 하지만.)
…….
어머님께선…. 큰 꽃을 좋아하시나요? (어라?)
유이혜:(속았나? 확신할 수 없었다. 당신이 제 예상보다 훨씬 더 순진한 사람인건지, 아니면 이것이 형님이 그토록 주의하라 일렀던
술수중 하나인건지. 어느 쪽으로도 확신할 수 없기에, 뒤이은 대답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해내려 애썼다.) 예. ... ... 하지만 작은 꽃도 좋아하십니다. 꽃은, 크든 작든 아름답고.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니까요.
여우비이기도 했던만큼,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하는 비에 형수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봅니다.
아니, 그 전에 형수는…. 어떤 사람인 걸까요?
수선화가 한아름 자라났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신을 바라보는 얼굴은,)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던 것 같다.) 드릴 것이라면, 기왕이면 향이 좋은 꽃이었으면 좋으니까….
(하나 그때에서야 다시 품에 안은 바구니의 존재가 생각이 난 듯, 걸음을 머뭇거렸다.) 도련님이 바쁘시다면…. 물론 어쩔 수 없는 이, 일이지만요.
유이혜:아. 아뇨. (물러서듯한 태도에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말이 급히 튀어나온다.)
... ... 잠시 들렀다가죠. 좋아하실테니.
이신아:아…. (뒤늦게 민망해진 모양인지 고개를 숙이고 빨래 바구니를 만지작거렸다.) 조금 외곽에 있는데…. 괜찮으세요?
유이혜:괜찮습니다. ... 비가 멎을 때까지 조금 기다려야겠지만요. (시선을 옮기다 슬며시 하늘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빗소리가 유독 큰 것처럼 느껴졌다.)
점차 잦아들기 시작하는 비는 머지 않아 뚝 멈추고 맙니다.
비의 흔적이라곤 머리카락과 옷에 남은 약간의 물기와, 나무 잎이며 가지에서부터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뿐이군요.
비가 그친 하늘을 올려다보며 꽃망울이 봉오리를 벗어나 톡 퍼져나가 아름드리 꽃을 피워내듯, 형수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꽃이 그려집니다.
창백하던 뺨에 살며시 붉은기가 돌고 입술은 곱게 휘어져 호선을 보입니다.
빨래 바구니를 안고 향하는 곳은 마을의 외곽에 위치한 돌담길.
산과 인접해있는 곳까지 쭉 걸어가면 어느 순간부터 수선화 향이 물씬 풍깁니다.
나린 여우비에 물방울 맺힌 꽃들은 노오란 색을 뽐내며 싱그럽게 피어있습니다.
바구니를 옆에 내려놓고 치맛자락을 붙잡은 신아는 그 앞에 쪼그려앉아 제일 큰 꽃망울을 가진 수선화부터 톡, 톡, 끊어내 손에 모으기 시작합니다.
이신아:(그리고는.) 수선화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계시나요, 도련님?
유이혜:수선화 말입니까? (되물으며 눈을 깜빡인다. 당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꽃망울을 잠시 시선에 담았다.) 아뇨. 들어본 적 없습니다.
당신처럼 영 세심치 못한 사내들이 꽃을 딴다면 줄기는 되었고 꽃머리만 따기 일쑤이겠지만,
줄기 밑부터 꽃을 끊어가는 형수의 손을 바라보고 있다보면….
확실히 대여섯송이가 모인 자태가 곱디 곱군요.
흙알갱이나 몇 물방울까지 톡톡 털며 일어난 형수는 당신을 돌아봅니다.
이신아:수선화가 새해에 피면…. 가정에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했어요. (조금은 수줍은 표정이다.)
비록 지금이 새해는 아니지만, 이 얘기와 함께 어머님께 드린다면 기, 기뻐하실 거예요. 도련님.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애, 자존심, 고결, 신비. …
기대.
작은 기대를 품고 그가 당신에게 꽃을 건넵니다.
유이혜:... ... (가만히 꽃을 받아든다.)
... ... 형수께서 말씀해주셨다 이르겠습니다.
이신아:(그 말에 물기로 저며드는 천처럼, 시선이 가라앉는다.) 그건 말씀하지 않는 편이 좋으실 거예요.
이신아:(손가락 끝이 꼬물거리다 만다. 살펴시 시선을 피하며 웃었다.) 도련님이
직접 전해드리시는 거니까, 제가 끼어들면 기분이 나빠지실 거예요.
유이혜:저희 어머니라면, (무언갈 곰곰 생각하듯 잠시 침묵했다가.) ... ... 안하던 짓을 한다며 전쟁에 나가 귀신이라도 씌여온 것이 아니냐 할 것 같은데요. (그런 서정적인 얘기까지 곁들인다면 더더욱.)
이신아:(하지만 그 말엔 고개가 자그맣게 기울었다.) 그런데….
왜 꽃을 꺾어 가져다주겠다 하신 건가요? (옆을 향했던 시선이 조심스레 당신을 향한다.) 그냥,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면 될 텐데요.
유이혜:어, (갑자기 입을 다문다.) ... ... ... (잇따른 침묵.) 너무 오래 밖에 있었던 것 같으니, 얼른 가죠. 찾으실 겁니다. (대답은 않고서, 급하게 빨래 바구니를 옆구리에 낀 채 일어났다. 호롱불이라도 피우고 나온 사람마냥 딛는 걸음이 급했다.)
급히 돌아가는 당신의 모습에 당황한 것 같던 형수는 뒤늦게 당신을 뒤따릅니다.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거리에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던 것도 같았고요.
어쨌거나, 집으로 귀환한 뒤엔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됩니다.
다시 '감시'를 해야 하나 핑계거리도 떨어진 지금 당신은 정말 몸을 숨기는 것밖에 못 했으니까요.
어머니는 당신의 말마따나 "갑자기 이게 무어니?" 하며 놀란 반응을 보이셨지만….
그래도 은근슬쩍 미소를 보이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 뒤로도 형수의 하루는 자잘한 허드렛일의 연속입니다.
설화 속 콩쥐라도 되는 모양인지, 몸이 두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일을 바쁘게 처리해나갑니다.
이 정도면 며느리가 아니라 하인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왜 어떤 반항도 말도 없이 이 모든 일을 감내하고 있는 건지 답답한 마음도 한 켠 차오릅니다.
심부름을 가고, 마을에서 장을 보거나 텃밭을 가꾸고….
유이혜:(늘 그랬듯 옅은 한숨.) 특이한 점이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유이현:아침엔 웬 꽃다발이나 손에 들고 부인과 함께 오던데. …특이한 점이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고? (눈썹을 까딱였다.)
유이혜:그건 어머니께 드린 거고요. (그의 표정을 살피다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기라도 한듯 함께 눈썹을 까딱인다.) 뭐 짚이는 점이라도 있던 겁니까?
유이혜:찾는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반대죠. ... ... 마을 사람들 모두 수근거리니 형님도 주의를 하셔야합니다. (아침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유이현:수근거린다고? (고개를 기울인다.) 무슨 얘길 들은게냐?
유이혜:뭐겠습니까? (되묻는 게 황당한지 허, 하고 헛웃음을 뱉는다.) 미움을 받나보다, '그' 이 家에서 시집왔으니 미움받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 것들이죠. ... ... 이제라도 좀 미안해하세요, 형님.
유이현:(눈썹을 꿈틀거리나, …그래. 이번에는 별다른 반론이 튀어나오는 일이 없었다. 한숨을 푹 쉬긴 했지만.) 더 할 말이 없다면 가보거라. (손을 휘적였다.)
그렇게 방을 벗어나온 당신의 발 끄트머리로 연한 달빛이 닿습니다.
달은 높고 밝고, 찬 밤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웁니다.
봄날이라 하여도 밤에는 햇빛이 들 일 없으니, 뺨이 얼어붙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같았고요.
워낙 늦은 시간이라 그랬던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잠에 들기 위해 방으로 걸음하던 차였는데….
─저택 어딘가에서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하인일까요?
저택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만 해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소리소문없이 문이 닫히는 저 너머
새하얀 머리카락
이 보입니다.
막상 문을 열고 나갔음에도 어딘가로 향하지 않고 대문 앞을 서성입니다.
당신은 그 너머를 볼 수 없어 어둠 가운데 귀만 기울입니다.
…이곳 유 家에서 1년이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는 집과 가족을 잃은 고아처럼 대문 밖을 방황합니다.
덜컹,
곧이어 작은 울림이 닫힌 문에서 느껴집니다.
이 밤 중에 굳이 집을 나가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을 이유엔 무엇이 있을까요?
매번 이해가 닿는 선, 그 너머에 형수가 계셨습니다.
당신도 몇 년 전부터 그 녀석을 본 적이 있었지만 음식을 줘도 먹기만 하고 도망가고, 손을 내밀면 콱 물어버리려 하니 친해질 겨를이 없던 놈입니다.
그런데 이 놈…. 이렇게 애교섞인 목소리도 낼 줄 알았던가요?
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대문 앞까지 도달합니다.
…아무래도 저 고양이가 부산스럽게 주저앉아있는 형수의 주변을 돌아다니는 게 틀림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닭을 죽인 건 너무했어.”
삭, 삭, 아마도 그 사나운 놈을 쓰다듬는 소리까지요.
“어머니께 혼났지 뭐야. 네가 잡히지 않아 다행이다만은….”
“나는 괜찮으니 이 집엔 되도록 가까이 오지 마.”
끊어내듯 터져나오는 기침 소리에 고양이가 놀라 부산스럽게 도망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간신히 기침이 멎은 형수께선 그게 못내 아쉬웠던 모양인지 침음성을 흘립니다.
중얼거림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는 소리가 들립니다.
유이혜:(숨길 이유가 없으므로, 그저 가만 서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 기다렸다.)
끝내 문이 열리고,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있던 형수의 시선이 서서히 들려,
도, (목소리가 떨린다.)
도련님?
(대문을 채 넘지 못하고 걸음이 머뭇거린다.) 이 늦은 시각에 왜, 여기에….
유이혜:이 시간에 외출을 하는 사람이 있나 싶어 잠시 나와봤습니다. 행여, 나가는 게 아니라 들어오는 것일수도 있으니까요.
방금 그녀석과... ... 제법 친해보이던데요.
이신아:(그 말에 얼굴이 다시금
화르륵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저. 그. 그게. 아니. 그 고양이는, 제가 따로 챙겨준 적이 어. 없어요. 정말이에요. 그냥 마을을 오며가며 많이 보게 되니까 좀 치. 친해진 것 뿐이고. (이렇게까지 열심히 변명을?)
…….
전부…. 들으셨나요…? (화끈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꾹 눌러낸다.)
유이혜:... ... 아무래도요? (저렇게까지 민망해 할 이유가 있나? 싶었다. 물론,
이 곳을 떠나야 한다. 라던가.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 당신이 이 집에서 받는 취급을 생각해본다면 이상할 것도 없었으니. 물론, 제 가족들의 의견은 정반대겠지만 말이다.)
이신아:(뭔가. 뭔가
수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겠지? 입술을 감쳐물며 방황하던 손으로 제
어깨를 붙잡았다가.) 자. 잠이 안 와서. 잠시 산책을…. 나온…. 거예요.
유이혜:산책치곤. (거리가 많이 짧던데요. 덧붙이려다 입을 다문다. 온 집안 사람이 어떻게든 캐물으려 애쓰는데 자신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 어차피, 굳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그는 이미 감시역이니까.) ... 그래서, 산책은 끝나신 참입니까?
이신아:(어깨가 저리다. 마치
그 날 처럼. …추위에 떨듯 몸을 떨며 시선을 돌렸다.) …….
…네, 네. 이제 돌아가도록 할게요. 도련님도…. 조, 좋은 밤 되세요. (모두 모르는 척 하며 옆을 지나쳐 걸어간다.)
그리 말하며 당신의 옆을 지나쳐가는 형수의 걸음이 순간 멈춥니다.
저 멀리 팔짱을 끼고 선 형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의 질책하듯한 시선이 잠시 당신을 향하는가 싶더니, 다시 형수에게로 돌아갑니다.
이신아:(입술을 달싹이다가.) …잠이 오지 않아서…. 잠시 산, 산책을 좀 했어요.
대화하는 둘이 ‘부부’라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삭막한 대화입니다.
당신 옆에 멈춰서있던 신아가 마저 걸음을 옮깁니다.
유이혜:(건조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에 한숨만 뱉는다.)
그래도 이번 한 번은 봐주겠단 얘기인 걸까요?
이현은 당신에게 시선을 주지만 무어라 말을 덧붙이진 않습니다.
다가온 신아의 어깨를 감싼 이현이 등을 돌립니다.
“그리고…. 슬슬 일이 마무리되어가는 참이니.”
다음 날. 그 날 하루를 대체 어떻게 보낸건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형님의 명을 따라 형수님을
감시
해야 했습니다만,
실수로 옷을 거꾸로 입었던 것에서 눈치채야 했습니다.
그야 새벽부터 시냇가에서 뒷말을 나누던 아낙네들도 없었고, 허드렛일을 하는 것은 어제와 같았지만 전날보다는 정도가 덜해 형수께는 ‘좋은 하루’였겠습니다.
특별히 나설 일이 없어 ‘감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당신도 모습을 감춘 채 그를 따라다녔고요.
신아가 집을 나설 때마다 돌밭 끄트머리, 커다란 목련 나무가 서있는 길을 꼭 지나쳤다는 점을 빼면 특이한 점도 없었습니다.
나무를 지나쳐 걸어갈 때면 신아의 고개가 그리로 돌아가며, 시선이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에 꽂힙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다보면 문득 생각이 듭니다.
순탄하게 시간은 흘러흘러, 저녁 즈음이었습니다.
형수는 아까부터 집에 돌아와 더 외출하지 않으니 당신의 임무도 끝이 난 셈이었습니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며 마루에 걸터앉아, 멍하니 정원의 느릅나무를 바라보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신아:(무언가를 들고 다가온다.) 쉬고 계세요?
유이혜:아. 형수님. (고개를 돌려 당신을 보다가, 자연스레 들고온 것에 시선이 머무른다.)
형수가 들고온 것은 수정과와….
약과 서너 개입니다. 우습게도 말이죠.
이신아:(다과상을 옆 마루에 내려놓으며 다소곳이 앉는다.) 어, 어머니와 이현 님께는 먼저 드렸어요. 도련님께서도 조금 드시겠어요?
유이혜:제게는 남는 것만 주겠단 얘기신가요? (괜히 농담따윌 건네고.)
이신아:(움찔!!! 손이 치맛자락을 쥐었다 폈다 거렸다.) …나. 남는 건 제가 먹으니까, 도련님의 것은 남는 게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항변했다.)
진. ………………………………진짜……………인데…………………….
(머뭇거리다 결국 다과상을……. 다시 들고…………….)
새, 새 걸 새로 내어올게요. (이것도 새 거지만.)
유이혜:아, 아뇨.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당황해서 그제야 붙잡았다! 손이 잠깐 스쳐 후다닥 손을 다시 뒤로 물렸다.)
큼.
어쨌든 그런 거면... 같이 드시죠. 괜히 '진짜' 남은 것 드시지 말고요.
이신아:……? (스친 손을 후다닥 물리는 모습에 빼꼼 한 쪽 눈에서 눈물이 삐져나온 상황에서 눈만 꿈뻑였다.)
……. (입술을 달싹이며 눈치를 살폈다.) 믿어주시는 거예요?
안 믿는 것도 웃기니까요.
이신아:(치맛자락을 붙잡고 놓아주길 반복하며 일으키던 몸을 바로 앉힌다. 머뭇거리다.) 괜찮으세요? (뜬금없는 질문을 건넨다.)
유이혜:예? (괜찮느냐. 라는 질문이 나올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들리는 질문에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의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듯 그는 답 없이 당신을 멀뚱거리며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신아:(멀뚱거리는 시선을 흘끔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며 흐리게 미소지었다.) …
고민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유이혜:아. (이해는 했지만... ... . 이제는 다른 이유로 대답할수가 없다. 고민이야 있는데. 그게 당신을 감시하느라 생기는 고민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그 외로도
어딘지 알 수 없는,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있엇지만... . 아니. 이건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상념을 지워낸다.) 제게 고민이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운 좋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적당히 책임이 없는 둘째 아들이 되어. 적당히 공적도 쌓았으니... . 고민이 있다고 하는 게 오히려 엄살이겠지요. 부모님께서
혼처를 찾겠다 하시는 게 아니라면 모를까... .
이신아:(치맛자락을 매만지다, 손에서 놓아준다.) …그,렇게 평탄하게 살아왔다 한들. 누군가가 엄살이라 말해도 그게 고민이 아, 아니게 되는 일은 아니니까요…. (그러니 결국엔 당신에게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나. 그나저나.)
혼처…인가요? (눈을 꿈뻑이며 당신을 본다.) 도련님, 나,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유이혜:올해로 열 여덟입니다. 어릴 적 친구들은 이미 혼처를 구해 일찍이 장가를 들었으니 또래에 비해서는 늦은 편이지요. (말하다 문득 무언가 생각났는지 옅은 웃음소릴 내곤.) 형님에게 견줄바는 아니겠지만.
무인이란 칼을 들고 있을 때 망설임이 없어야하는 법이다.라는 말을 닳도록 들었으니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약과를 우물거렸다.) 전장에서 목숨을 잃는 것은 우리 가문 사람들에게 영광이라 칭해지는 일이지만, 영광은 남겨진 사람들을 책임져주지 않으니까요.
이신아:(열 여덟. 그 소린, …순간 눈이 동그랗게 뜨여 화답했다.) 저, 저도요. (자기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눈치를 살피다 조용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와…. 나이가 같으시네요. 도, 도련님. (당신이 우물거리는 약과를 흘끔 바라보다 다시 앞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도련님은…. 조, 좋은 남편이 되실 거예요. (자그맣게 웃었다.) 다정하시니까요….
유이혜:(외침과 같은 한마디에 눈을 크게 떠 바라보다 미소지었다.) 그럼 우린 친우로 먼저 만났을수도 있겠네요. (유 家와 이 家의 핏줄들이? ... ...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입에 담으면서도 그는 그저 맑은 미소를 보였다.) 제가 말입니까? ... ... 실례되는 말이지만, 형수님... . (침묵.) 사람 보는 눈이 좀 없으신거 아닌가요? (다정하다니. 집안 자체가 워낙에 낯간지런 소리를 주고받는 분위기가 아닌 탓이었을까. 저와는 영 안 어울리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야. 다정하다는 사람들은 대개 실실 웃고다니기 바쁘니까.)
이신아:친…우요? (맑은 미소를 멍하니 바라봤던 것 같다. 아니, 바라보고 있다보면…. …다시 고개를 돌린다.) 저, 저는 한낱, 아니…. 이 家의 여식인 것을요. 어려웠을 거예요. (하지만 정말 그리하였더라면.
그 날에 만약 당신이 있었다면….)
……. (순간 심장이 차게 식는 것 같아 가슴께를 붙잡았다. 아니. 일어날 수 없던 일에 생각을 돌리지 말자. 애써 웃으며 당신을 돌아본다.) 그, 그럴 리가요. 그냥…. (우물쭈물거리다.) 제가 만난 사람 중에선 도련님이 제일…. 친절하셔서…. (그래. 단지 그 뿐이다. 단지.)
유이혜:저는 어릴 적부터 말을 아주 잘 듣는 효자는 아니었으니, 제가 고집을 부렸을지 모르지요. (
제가 만난 사람 중에선 도련님이 제일... 그 문장이 가슴에 박힌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베인 상처에 더운 물을 들이붓기라도 한 것처럼 손끝에서부터 몸으로 퍼져나가는 아린 통증을 느낀다. 당신을 바라볼 때면 종종 느끼는 낯선 감각이었고, 그는 이것을
동정이라 이름 붙였다. 그 날, 빨래터에서 바라보았던 쓸쓸한 얼굴이나 방 한 켠 내주지 않는 아비에게 맞서 죽은 오라비의 곁을 지키던. 당신이 이곳에 온 이래 늘 당신을 짓이기던 고통에 대한 동정.)
... ... 오라비께서 아시면 서운하다며 제 꿈에 찾아오시는 건 아닐지요. (질나쁜 감정은 미소와 함께 덮는다. 들키지 않도록.)
이신아:(당신이 어떤 것에 괴로워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미소 앞에서 그는 잠시 무너져내린다.
오라비. 아, 신강 오라버니. 그 이름을 들으니 쿵, 쿵, 불안하게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하는 것 같다. 손발이 차게 식고 입술이 떨려오는 것 같아, 조용히 주먹을 꽉 쥐어낼 뿐.) 오라버니
들은, 그냥…. (중얼이듯 말하려던 때.)
정 부인의 목소리입니다. 무언가 시킬 일이라도 있는 걸까요?
네, 네, 어머니…!
(순간 고통을 잊고 당신을 돌아보며.) 도련님, 전 이만 가볼…. 앗!
제 치맛자락을 밟고 미끄러진 건 그야말로 한순간의 일이었습니다.
─어어! 당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노라면….
가까이서 홉뜨인 눈동자는 노란 꽃술만 같습니다.
이신아:(당신 위에 엎어져선 상황을 잊고, 멍하니 눈만 꿈뻑이며 당신을 바라보았다.) 어, (바보같은 소리가 튀어나온다.) 어…?
유이혜:(마찬가지로, 멍하니 눈만 꿈뻑이며 제 위에 엎어져있는 당신을 본다.) ... ... 어... . (이쪽도 바보같은 소리만 웅얼거릴 뿐이다.)
이신아:어…. 어, (멍하니 손을 움직여 바닥을 짚으려 하는데, 손은 바닥이 아닌 당신의 가슴 위를 짚는다. 단단한 감촉. 그것에 서서히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아……? (그 채로, 굳는다.)
유이혜:(정작 당하고? 있는 당사자는 별 느낌이 없는지 끙, 소리나 내고서는. ) 저기, (비켜달라는듯 운을 뗀다.)
이신아:(입술을 달싹달싹이다 당신의 말에 화들짝! 손을 짚어 일으키려 하는데. 바닥. 바닥이…. 바닥인 줄 알고 짚으면 당신의 허리춤이고, 바닥인 줄 알고 짚으면 팔이고. 계속 당신을 추행하게 되는 기분에 점점 울상이 되어갔다.) 죄, 죄, 죄송…. 아니. 제가 마, 만지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더듬는 여자가 되었다.)
유이혜:(더듬더듬... ... 기묘한 기분을 느낀다. 뭐. 이것도 실수고, 저것도 실수기는 한데... ... . 여기저기를 막 더듬는게 좀. ... 음.) 제. 제가 일어나겠습니다. (얌전히 있어달란듯 당신의 양쪽 팔뚝을 잡은채 스으윽. 일어났다. 그제야 추행(?)은 멈췄다.) ... ... 큼.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이신아:(입을 꾹 닫고 결국 당신의 자력으로 일어서기까지 얌전히…. 있었다. 과한 부끄러움에 눈물이 빼꼼 흘러나온 것도 같았다.) ……. (어색한 침묵에 손가락을 꼬물꼬물거렸다.) 다. 다. 다치. 다치신 곳은…. 어. 없으…. (고장났다.)
유이혜:어, 음, 어, 예. (이쪽도 똑같다.) 그. 어. 형, 수께선. 안다치... 셨나요? (뚝딱뚝딱.)
새빨갛게 달아오른 형수의 얼굴은 톡 건들면 터질 것만 같고,
어쩌면 당신의 얼굴에도 서서히 열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기다리다 지치신 어머니의 부름에 화들짝 놀란 신아가 제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색하던 분위기는 풀리고 말았지만요.
한 차례 폭풍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정신이 멍합니다.
남아있는 것이라곤 먹다 남은 약과들 뿐. 그리고, 목련꽃 향기.
오늘은 형수께서 밤 외출을 할 일이 없으니, 당신도 일찍 잠자리에 든 참입니다.
한데…. 왜 평소처럼 쏟아지듯 내려오던 잠기운은 다 달아난 채 정신이 멀쩡하기만 한지.
뒤척거리며 잠에 들려 애써도 생각은 어느 순간 누군가의 방으로 향해가고 있습니다.
바람을 불어 촛불을 끄면 복이 달아난다고들 하니, 형님께선 손으로 촛불을 끌 텝니다.
(퍽!!!!!)
(주먹으로 머리를 쳤다.)
(자라. 자. 쓸데없는 생각 말고. 어릴 적 자주 흥얼거리던 노랫말이나 속으로 읊는다.)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그렇게 속절없이 밤이 지나갑니다.
하지만 꿈결에선 누군가가
품에 안겼던
감촉같은 게….
예고 없던 전령이 유 家의 문턱을 넘어옴에 따라 형님 부부의 초야고 뭐고,
잔치집 분위기이던 유 家는 하루 새에 또 초상집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유 家의 무관 한 명은 나향 전투의 동향을 파악하고 보고하도록 하라.」
유 家의 일원이 부름받아 전투에 나선 곳이 삼정목 일대라면, 나향은 이 家의 일원 몇이 부름 받아 지원을 간 일대입니다.
삼정목 전투와는 달리 지지부진하게 전투가 이어져, 아마 조정에서도 골머리를 앓고 있는 듯 했습니다.
정 부인: 안 된다! 갔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할 줄 알고!
찢어질 듯한 외침이 유 家의 안채를 울렸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두 아들을 간신히 전쟁터에서 돌려받은 어머니의 마음은 명령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유이현:…어머니, 진정하세요. 긍지 높은 저희 유 家가 부름에 답하지 않으면 이 얼마나 부끄럽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까?
부름에 응할 만한 사람은 역시나 단 둘 뿐입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을 맡게 된 당신의 형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행여 이현이 먼저 말할까 서둘러 덧붙인다.)
정 부인: 안 된다! 안 돼! 둘 다 아무 데도 못 간다! (이혜의 말에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당신을 조용히 바라보는 형님의 얼굴엔, 뺨에 못 보던 생채기가 나 있었습니다.
유이혜:(머릿속으로 상황을 추측하려다 관두고서 말을 이었다.) 이게 맞습니다. ... 형님께선 이제 집안을 이끄셔야하고, 저는 슬하에 가족을 두지 않은 몸이니 제가 다녀와야지요.
너무 걱정마세요. 제가 도착했을 적엔 이미 상황이 끝나있을수도 있습니다. (어머니를 달래며 손을 도닥인다.)
결국 소리를 지르던 어머니는 제 성을 이기지 못하고 반쯤 쓰러져 방으로 향하시고, 형님과 대화를 나눈 끝엔….
이번 유 家에서 부름에 응답하는 건 당신, 유이혜가 될 것이라고.
논의를 마친 뒤 당신은 착잡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문을 엽니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사람의 모습에, 당신은 순간 얼어붙습니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형수가 당황한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자리를 뜨려 했다.)
턱,
그리고 자리를 뜨려 한 당신을 붙잡은 것은, 놀랍게도 형수의 쪽이었습니다.
스스로도 놀란 모양인지 급히 옷자락을 놓아주었지만 말이에요.
이신아:(입술을 달싹이다 곧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히 옆으로 비켜섰다. 당신이 이대로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기다리듯.)
유이혜:... ... . (무슨 말이라도 덧붙여야할 것 같아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ㅡ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전한다.)
이신아:(유독 얼굴이 창백하게 보였다. 아니, 원래도 표정은 좋지 않았다지만….)
…당신의 말에 형수는 쉽사리 어떤 말로 답하지 못합니다.
다만 문이 닫히고 당신이 자리를 떠나면 문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
형님께 소리가 닿지 않을 때까지 따라온 뒤엔.
유이혜:(왜 자신을 쫓아온 것이지,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단순히
확인하고 싶어서인가?하며 스스로 결론짓는다. 잘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예. 형님께선 안전하실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 ... 제가 위험해질 거라는 얘기는 아니고요. (애써 농담 던지듯 한마디를 툭, 건넸다.)
이신아:(우물쭈물거리다, 손을 뻗어 당신의 소맷자락을 붙잡는다. 문을 나서던 당신을 붙잡은 것처럼 힘있는 손길은 아니었으나. 그늘을 방황하던 시선이 어렵사리 당신을 향했다.) 가지 않으시는 건, (숨을 들이켠다.) 어렵겠죠?
유이혜:(문턱에 가로막혀 안과 밖, 나뉜 세상에 서있는 우리. 간신히 걸쳐져 우리를 잇고있는 작은 손을 내려다본다. 왜일까. 꼭 지금이 마지막으로 보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들어서. 그는 또. 본래의 자신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짓을 한다.) 조정에서 내려온 명이니, 따라야지요. (제 소맷자락을 붙잡은 손을 떼어내, 감싸쥐고. 그렇게 있다가. ... 짧게 도닥인다.) 건강히 지내셔야합니다, 형수님. (호칭에 유독 힘을 주었던 것 같았다.)
이신아:(안과 밖, 나뉜 세상 가운데 겨우 뻗은 손이 떨어지는 걸…. 멍하니 바라본다. 아니, 떨어지지 않는다. 떨어지나 붙잡힌다.
당신의 손으로. 그것이 마치 자신에겐 어떤 선택권도, 어떤 힘도 없음을 다시금 이르는 듯 하여…. 점점 마음이 저 밑으로 떨어져간다. 계속해 밑으로.) 가지…. 가지 않으시는 건…. (힘없이 중얼거리나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이 무엇도 하지 못하리란 걸. 자신의 어떤 말도 당신의 선택을 바꿀 수 없으리란 걸. 그러니, 유일한 선택지는 자신을 속이는 것 뿐이다. 지금껏 그래왔듯.)
……. (끝내 무너진다. 밖의 무게에.)
(입꼬리를 끌어올려도 그려지는 건 흐린 미소 뿐이라.) 조심히 다녀오세요, 도련님…. (먼저 손을 빼내었다.)
그렇게 떨어진 손. 가느다랗던 무게가 신경쓰여도 당신은 몸을 돌리고야 맙니다.
찝찝한 기분과 함께 당신은 떠날 채비를 합니다.
다음 날이면 일찍이 떠나야 할 테니 잠에도 일찍 들어야겠죠.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고, 잠자리를 설치는가 싶다가도 잠은 고요히 찾아들기 마련입니다.
─이윽고 하인 한 명의 외침과 함께 조금 이른, 아침이 시작됩니다.
윤기나는 적색 털을 자랑하는 그 말은 성질이 다소 고약했지만 전쟁터에 있을 땐 그 누구보다 든든한 당신의 친우였습니다.
하룻밤 사이
다리 한 쪽을 다쳐 절뚝거리고 있었습니다.
유린적, 어디서 다친게냐?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린적의 왼쪽 앞 다리에 생채기가 나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생채기를 확인하자마자 쿵 떨어진 것 같던 당신의 마음에, 황당함이 가득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생명에도, 달리는 것에도 지장이 없는 상처입니다.
베이기는 했어도 근육까지 손상된 상처가 아닌데 말이죠.
게다가 유린적 이 놈, 마치 엄살을 부리듯 보란듯 왼쪽 앞 다리를 들고 절뚝이며 다니고 있습니다.
이 녀석, 사람 깜짝 놀라게 호들갑을 피우다니!
뒤늦게 등장한 이현이 소란이 일었던 마굿간 안을 둘러보자 하인이 허리를 숙이며 답합니다.
“그것이, 주인 나리. 아침에 마굿간에 와 보니 유린적이 다리를 다친 것처럼 절뚝거리고 있어서…. 확실히 사람이 해한 흔적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하인은 부산스럽게 눈을 굴리다 곧 고개를 젓습니다.
“보,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떡할깝쇼? 그래도 생채기가 난 정도라 달리는 데엔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되옵-.”
하인의 말에 유린적이 엄살을 피우려 들고 있던 왼쪽 다리로 울타리를 칩니다.
유린적. (가만히 있으란듯.)
하나 그 울음소리에 반응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현 유 家의 가주, 이현입니다.
유이현:…아무래도 나향에는 내가 향해야겠다. (미간을 짚었다.)
아니, 형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녀석은 그냥 엄살일 뿐입니다.
유이현:엄살인 건 알지. (유린적이 히힝! 울었다.) 하지만 전령을 받은 때부터
감이 이상하게 좋지 않았어…. 나는 이게 '나쁜 징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럴수록 더욱이 제가 가야만 합니다. 행여나 형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유이현:생긴다면? (바라본다.) 네가 저 놈과 갔다가 낙마하여 다리라도 부러져서 돌아오게 되면 어떡할 거냐? 거기다 유린적보다 내 말이 더 빠르니, 문제는 없을 게다. (이현의 말이 옆에서 점잖게 울었다. 푸르릉.)
이현의 말이 고개를 들며 우아함을 뽐내자 유린적이 성이 난 듯 몸을 돌려 구석으로 향합니다.
마굿간에 온 순간부터 줄곧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신아입니다.
그 체한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나향’으로 간 자에게 무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그러나 이현은 곧 냉정히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유 家의 명성이 달린 일이니, 불응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오.”
다만 이현은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듯 불안에 떠는 부인의 손을 꼭 잡아줍니다.
유이혜:(그 모습에 어째선지 길게 시선이 걸려있다가, 부름에 황급히 시선을 올렸다.) ... 예, 형님. (따라나선다.)
이신아:아, 아…. (떨어지는 손에 움찔 떨면서도, 끝내 붙잡진 못한다.)
자리에 홀로 남은 신아는 힘없이 두 손을 모아쥐고, 고개를 떨어뜨립니다.
애써 보지 않은 채 형님의 뒤를 따를 뿐이었지만요.
당신을 데리고 창고로 향한 형님은 어느 문서를 당신에게 건네줍니다.
유이현:마지막 전투 때…. 적들의 동향이 기묘했던 것을 기억하느냐?
분명 적이었던 호족들이 고통을 잊은 사람처럼 당신들에게 달려들었던 모습을 일컫는 말이겠죠.
아무리 전쟁터라 한들
본인의 목숨을 불사르며
적에게 뛰어드는 장수는 몇 없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거의 모든 적들이 그런 모습을 보였던지라….
형님의 지휘가 아니었더라면 까딱 큰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신 이마의 흉터도 그때 얻은 것이었고요.
유이현:근래 호족들 사이에서 기이한
약재
가 돌고 있다 하는구나.
잠시나마 고통을 잊게 만들고, 신체의 힘을 강하게 만들어준단 우스갯소리가 돌아.
하지만 내가 이것을 네게 언급하는 이유는…. 그 약재의 부작용이라 일컬어지는 현상을 겪어본 적 있기 때문이다. (문서를 눈짓한다.)
형님께서, 말입니까? (영문을 모르겠단듯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 몰랐겠지만 너 또한.
그곳에 적혀있는 건 어느 ‘병’에 걸려 죽은 사람들의 기록이었습니다.
아니, 이걸 병이라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인死因은 모두가 다릅니다. 폐혈증으로 죽거나 전쟁 중에 죽거나, 고열을 앓다 죽거나, 기타 등등.
하나는 사망자 그들 대부분이 조정에 속해있거나 나랏일에 나름 자리를 잡고 있는 중요 인사들이라는 점이고,
그들 모두의 시체가 상을 치르는 도중
새까맣게
썩어가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유이현:전해들은 바, 네겐 알리지 않았다만….
유이현:아버지의 시체도…. 그런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유이현:내가 돌아오기까지 이 일을 대신 맡아 조사하도록 해라. 감히 유 家의 당주를 건드려놓고 그들이 발 뻗고 편히 잠들게 만들 순 없지. (비소가 흐른다.)
호족들 사이에서 돌던 기이한 약재
의 부작용은…. 신체 일부분이 검게 썩어들어가기 시작하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하지, 그리고 죽게 되면 신체 전부로 퍼진다고.
이혜야. 나는 이것이 어떤 집단에 의해 주도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눈을 감았다 뜬다.) 그것도 우리 나라 안에서.
유이혜:... ... 허나, 정녕 그 약재 때문이라 하더라도 아버지께서 대체 그것을 어찌 구하셨단 말입니까. 설마... . (명예를 중히 여기는 유 家였다. 영광을 더럽히느니 기꺼이 죽겠다는. 그리하여 끝내 전장 안에서 불길에 뛰어드는 나방들처럼 살아가던 이들이다. 그것을 가장 중히 여기던 제 아버지가. 유 家의 주인이란 자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믿어 약재에 손을 댔다고? 머리가 어지럽다.) ... ... 일단. ... 일단, 알겠습니다. 형님이 오시기 전까지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러니 형님께선... ... . 무사히 돌아오는 것에만 집중하십시오.
유이현:약재가 아닌 다른 방식을 두어 병을 전파한 것일수도 있다. 하니…. 너무 한정된 곳에 생각을 두지 말고, 넓게 알아보도록 해 봐라.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그 또한 아버지께서 그런 것에 손을 댔으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으니.)
(이어진 말을 곱씹다 조금 웃었다.) 네가 있으니 안심이다.
당신에게 일을 맡긴 이현은 재빨리 채비를 마치며 집을 떠나갑니다.
시간이 워낙 지체되었으니 어머니와 형수께 안부를 대신 전해달라는 말과 함께요.
“내가 다녀오는 동안 가문을, 부인을 잘 부탁한다. 이혜야.”
그렇게 이현은 자신의 말을 끌고 대문을 넘어 떠나갑니다.
유이혜:... ...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유린적만이 푸릉,하며 코웃음을 치듯 소리를 냅니다.
당신이 그를 돌아보자마자 왼쪽 발을 번쩍 들어올려 절뚝이는 행세를 보였지만요.
문득 마굿간을 관리하는 하인이 당신과의 대면을 청합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돌연 무릎을 꿇는 모습에 얼마나 놀랐었던가요.
“새, 새벽에 마굿간에 출입한 사람을 본 것 같습니다유….”
유이혜:... ... ? 뭐라? (놀람, 경악. 이어진 감정은 분노였다.) ―어찌하여 아까전엔 말하지 않은 것이냐!
하인: 그, 그, 그것이….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로 하인은 더욱 고개를 납작 숙였다. 하나, 그러고도 망설임이 한참.)
…그것이….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작은 마님께서 마굿간에 들어가신 걸 본 것 같아서…. 이걸, 이걸 주인 어르신께 그대로 고하기에는….
형수께서 지금 새벽에 마굿간에 향하였다 말하는 건가요?
형수께서 유린적의 다리를 그렇게 만들었다고요?
유이혜:... ... 정말로, 확실히 본것이 맞느냐? 만에 하나라도 이 말이 내 형수를 욕보이기 위해 꾸민 또다른 거짓이라면... ...!
하인: 겨. 결코 아니예유! 저도 망설였지마는, 유, 유씨 가문에서
하얀 머리카락이라고는…. (침묵이 길어진다.)
잘 알았다.
이 사실은 너와 나만 알고 있는 것이다. 알았느냐?
결코.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고하지 말거라. 형님께도, 어머니께도. 전해야하거든 내가 전할테니.
하인: …지, 지가 말하면, 안 그래도 미움받으시는디. 더…. 그러실까봐…. (웅얼이듯 변명하며 고개를 숙인다.) 예, 예, 도련님. 소인 어디에도 말하지 않겠구만유. 절대….
그리 말한 하인은 땀을 닦으며 방에서 물러납니다.
이혜. 이 고발에 관해 어떤 행동을 취하나요?
(사실을 확인해야한다. 그래. 지금 형수라면 마음이 심란할테니. 상태를 살필겸. ... 진실을 캐물을 겸 ... ... .)
(형수의 방으로 향한다.)
형수의 방으로 향하면, 어둑해지는 날 탓인지 벌써부터 촛불이 켜져 있습니다.
아른아른 불빛이 안에서 타오르고 있습니다. 형수는…. 그저 방에 앉아있는 모양이군요.
형수님. 실례하겠습니다. ... ...잠시, 얘기 좀 나누어도 괜찮으실지요.
안에선 놀란 듯한 숨소리가 나오더니, 이윽고 들어오라는 말이 떨어집니다.
창문을 살며시 열고 문 너머를 바라보던 형수가 일어서서 당신을 마중 나옵니다.
이신아:......도련님? (당신이 무슨 일로 찾아온지 하나 모르고서.) 어쩐 일이세요?
유이혜:(결백한, 혹은
순진한 척 하는 얼굴을 보고있자니 다시금 말문이 턱 막혔다. 뭐부터 물어야할까. 나의 말에게 손을 댄 게 당신이느냐고? 형님을 부러 나향으로 내몬 것이냐고? 정말, 그의 말대로 어떤 목적을 갖고 이 집에 오기로 한 것이냐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 家 놈들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형님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끝내 뱉은 말은.) ... ... ... 밤이. 심란하실 것 같아, 안부를 여쭙고자 왔습니다. (방 안으로는 차마 걸음을 딛지 않고 말을 잇는다.) 괜찮으신지요?
이신아:(방 문은 열렸으나 나가는 이도, 들어오는 자도 없다. 어두운 날, 희미한 촛불 빛만이 일렁이며 당신을 비추니.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서, 그저 말갛게 눈만 깜빡이고....) ...아, 그것이.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직접 안부까지 묻기 위해 오셨다고? ...낯선
호의에 입술을 달싹였다.) 저, 저는 괜찮아요. 도련님. 굳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애써 미소를 지어보인다.)
유이혜:아뇨. (단호히 말한다.) ... ... 형수께는 서러울 밤이 아닙니까. 일 년만에 돌아온 지아비가 다시금 떠나버렸는데요. (
그래야만 한다는듯 얘기했다.) 역시, 제가 가야 옳았는데. ... 말도 되지 않는 핑계따윌 대며 도망자 노릇을 한 것 같아 죄송할 뿐입니다.
이신아:(이 집에서….
유일하게 나를 걱정하고 챙겨준 사람. 당신은 이런 순간까지 내 마음을 살펴주려 하는구나. 착각은, 온기라는 힘을 입어 자꾸만 불어난다. 촛불이 열린 창문에서 틈타고 들어온 바람에 살랑, 살랑인다.) 아니에요, 도련님. 어차피 이현님께선, (손을 내저으며 말하다
뱉지 않아야 할 말이 걸린 탓에, 급히 입을 다물었다.)
…무, 무사히…. (밤임에도 그 얼굴이 유난히 희더라.) 무사히 돌아오실 거니까. (꼭 체한 사람처럼.) 도련님께서 사죄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돼요. (문틀을 붙잡은 채 있다 고개를 들어 당신을 본다.) 아무튼, 도련님께서도 이만 쉬러 가시는 게 좋겠어요. (뭔가 숨기는 것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급히 대화를 마무리지으려 했다.)
(결국 뱉어야 할 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 ... 예.
그게 좋겠습니다. (도망친다.)
... ...
평온히 주무십시오, 형수님.
이신아:(바라보다, 다시 촛불만이 일렁이는 방 안으로 반 걸음 물러선다.) 좋은, 밤 되세요. 도련님….
그렇게 당신은 해야 할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형수의 방 앞에서 도망칩니다.
그 어떤 전투에서도 죽음의 위기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맞선 당신이 처음으로, 발길을 먼저 돌린 날입니다.
등 뒤는 식은땀으로 축축한 것만 같고, 주먹은 자꾸만 세게 쥐어집니다.
그렇게 형님이 떠난지 약 일주일 가량의 시간이 흐릅니다.
그 사이 당신이 알아낸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잘 알려진 저주로는 ‘고독’이나 ‘염매’와 같은 방법이 있습니다.
독사와 독충을 한 항아리에 집어넣고 서로가 잡아먹는 아비규환이 일어나게 하고,
어린 아이를 굶겨 대나무 안에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까지 학대한 뒤 단번에 죽이고.
그런 저주들을 거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주술呪術
이라 칭해졌습니다.
저주는 대체로 ‘매개체’를 통하여 상대에게 작용됩니다.
고독의 경우는 아비규환이 일어났던 항아리 자체를, 염매는 대나무 안 아이의 사체 자체를.
상대를 해하기 위해 저주 인형을 만들어 그 집 마루 밑에 묻어두거나 장독대 사이에 숨겨놓는 것 또한 인형을 매개체 삼아 그 집에 저주를 내리기 위함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형님이 조사하라 말씀하신 저주. 임의로
흑시黑尸
라 부르는 저주는 대체 무슨 매개체를 통하여 저주를 내리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돌아가신 아버지께선 그런 걸 드신 흔적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먹을 이유도 존재하지 않고요.
시신이 새까맣게 썩어들어가는 것 말고는 공통점 하나 없으니, 조사엔 도무지 진척이 없었습니다.
오늘도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부여잡게 되는 날입니다.
진척도 없고 몸도 찌뿌둥하니, 잠시 나와 바람을 쐬던 중이었습니다.
당신이 머리가 아파질 정도로 조사에 열중하게 만든 이가 하필, 딱 말을 걸고 말았지만요.
마당에 말려둘 나물을 한아름 바구니로 품어 안은 신아가 당신을 발견하곤 총총 다가옵니다.
이신아:요즘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니세요? (걱정스런 시선을 보냈다.)
유이혜:... ... 아닙니다. 전쟁통에 있다 돌아오니 몸이 좀 늘어졌나봅니다. (그 얼굴을 보니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형님의 명때문도 있었지만. 사실, 애초에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의 결백을 대신 증명해주고 싶은걸까. 아니면, 그 날 들었던 그 찜찜한 증언을 사실이라고 확정짓고 싶은 걸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어지. 자신도 결국 이 家를 멸시하는 유 家의 사람이기 때문에? 혼란한 마음이 가라앉을 틈이 없으니 그는 부쩍 시선을 숨기듯 눈을 맞추는 일이 없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여전히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서 답했다.)
이신아:바깥에 나오시는 때가 아예 없으신 것 같아서…. (잘 마주치지 않는 눈을 의식한 건지, 아니면 그냥 무의식적으로 당신의 벽을 느껴서인지. 어색한 웃음만이 입가에 그려진다.) …….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재능은 없었다. 애초에 대화를 나눌만한 사람이 어디, 살아오며 얼마나 주변에 있던가. 결국 남몰래 의지하던 대상인 당신과 자신의 관계도…. 당신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주지 않으면 이처럼 쉽게 끊기고 마는 것을.
하지만. 신아는 관계를 조금이라도 이어가고 싶은 자신의 욕심을 걱정이라는 단어로 감싸본다. 애써 입을 열어본다.) 조금 드, 드실만한 것이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도련님께서 좋아하시는 약과라던지…. (마주할 대상이 없으니, 그의 시선도 허공 언저리를 어색하게 배회할 뿐이었다.)
유이혜:형님께서 맡아주신 일이 있는데... . 제 그릇이 너무 작은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네요. (
불편하다. 그는 제법 눈치가 빠른 편에 속했다. 기민하게 상황을 읽어 스스로가 곤란할만한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은 그가 자찬할만한 장점 중 하나였다. 그러니 당신이 자신에게 은근히 의지하고 있단 사실을 모를리 없었다. 다만 어째선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실이 묘하게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서로의 가문에 얽힌 감정이나 사정 때문이 아니라 뭐랄까. 굉장히 사적이고,
배덕한... . 그는 이 모든게 형님이 자리를 오래 비운 탓이리라 여기기로 했다.) ... ... (이 불편함이 거둬지기 위해선 냉정히 당신을 내칠 줄도 알아야 했다. 다만 어째서인지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무언가가 목구멍을 단단히 틀어막기라도 한 듯 입만 벙긋거리길 몇 초.) ... ... 그럼. 마실 것과 함께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래. 잠시 쉴 시간은 필요하니까. 그냥. 그 뿐이다. 애써 당신을 쳐다보지 않는 것이 그 증거라는 양, 스스로를 향한 핑계를 정당하다 결론짓는다.)
이신아:아…. 당장은 도련님께서 이 집에 주, 주인이시니까요. (침묵이 길어질수록 바구니를 매만지던 손길은 느려져간다. 이런 상황일수록 상대방의 반응을 예측하는 건 쉬웠다. 대부분 거절하거나, 아니면. 지금처럼. …당신의 윤허 아닌 윤허에 신아는 흐리게 미소지었다.
동정하는 끝에 한 자락을 내어주거나. 그게 조금 슬펐다. 자신이 원한 답이었음에도.) 피곤하실 테니…. 기력에 좋다는 차를 함께 끓여올게요. (조금은 급하게 자리를 뜨게 되는 것이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그래도.
당신을 곤란하게 하는 건 오늘로 마지막이라고, 스스로에게 약속하노라면 죄책감이 조금은 덜어지는 것 같아서. 돌아서는 길 몇 번이고 그렇게 되뇌일 뿐이다.)
바구니를 들고 자리를 뜬 신아는 곧 약과 몇 개와 국화차를 끓여 가져옵니다.
약과 몇 개는 붙어 떨어지지 않는 상태라 손으로 붙잡아 떼어내야 합니다.
향긋한 국화차가 두통을 줄여주는 것 같긴 하지만….
거리를 두고 옆에 걸터앉은 여자의 존재는 영, 불편함이 떨어지질 않네요.
(놓인 다과상을 가만 바라보다가 서로 달라붙어있는 약과를 떼어내 한쪽을 당신에게 건넸다.) 형님께, 서운하지는 않으신가요?
이신아:(자신에게 내밀어질 줄은 몰랐던 터라, 당신의 얼굴을 흘끔 바라보다 닿지 않는 시선에 고개를 숙이며, 받아든다. 그러나 먹지는 않고.) 서운…해야 할 건 제 쪽이 아닐지도 몰라요. (어색하게 웃는다.)
유이혜:(약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가 멈칫. 팔이 굳는다.
왜? 라고 묻고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그게 마치. 그 날, 당신을 목격했다고 말하던 하인의 증언을 다시금 되살리고, 사실이라 시인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 ... 왜입니까? (쏟아지는 질문을 억누르고, 머릿속을 정리해 최대한 담백하게 뱉는다.)
이신아:(당신의 질문에 얼굴에 난감함이 불쑥 차올랐다. 이번만큼은 당신이 미묘한 경계로 차 있는 것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한참 다른 이유 탓이다.) 제, 제가, (약과를 만지작거린다.) 아내의…. 의무를 다하지 모, 못해서…? (그리 말하는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도 같았다.) 그. 그것도 그렇고, 그냥. …여러가지로요. (급히 말을 마무리짓는다.)
유이혜:(다만 당신의 새빨개진 얼굴의 이유를 자각하지 못한듯, 그의 얼굴이 마주 빨개지긴 커녕 그게 뭐냐고 항의하듯 콱. 미간이 구겨진다.) 1년간 독수공방 시키고 그 뒤에 또 며칠 씩 자리를 비우는데 도망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형수께선 이미 아내의 의무를 다 하고 계신 겁니다. 혹여라도 형님께서 그런 소릴 하거든 제게 이르세요. (마치 뒷배라도 되어주겠단양.)
이신아:아. 아니. 그. (순식간에 이어지는 말들에 입술을 달싹달싹하며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되려 당신의 반응에 얼굴은 더 화끈화끈 달아오를 뿐이었다.) 아. 아니에요. 그건 다 사, 사정이 있으셔서 그런 거니까…. 그리고 저도, (…입술을 다문다.)
…아, 아무튼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손등으로 뺨을 꾹 누르다가.) 조, 조금 있다 치우러 올게요. 간만의 휴식 시간인데 혼자 계시는 게 편하실 듯 하니까….
유이혜:사정은 무, (슨. 그렇게 말하며 또 성토를 하려다 스스로 물러나겠단 말에 한풀 꺾이듯 아, 네. 하며 답한다. 그러다 반쯤 몸을 돌린 당신을 향해.) 좀 더 있다가 가셔도 되는데요. (확 튀어나온 말을 붙잡지 못한다.) ... ... 저야, 뭐. 일이라고 해봤자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 뿐이지만. 형수께선 이 집안 곳곳을 쏘다니며 험한 일을 하시지 않습니까. 좀 쉬세요. 행여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거든 제 핑계를 대셔도 되고요.
이신아:(그런 당신을 잠시 멍하니 바라본다. 그러니까. …당신은 알까? 어느 순간부터
당신은 자신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단 걸. 그것에 뭔가 울컥, 감정이 올라오는 것 같아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기대하지 마. 의지하지 마. 더 이상은 안돼. 더 이상은….) …마땅히 할 일을 하는 것 뿐인데요. (손사레를 칠 때에서야 손에 여전히 약과 하나가 들려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 소리를 내고는. …다과상에 다시 약과 하나를 내려놓았다.) 쉬엄쉬엄 하니까 괜, 괜찮아요. 도련님. 이만 물러날게요.
그리 말하며 신아는 완전히 몸을 돌려 자리를 뜹니다.
기껏 붙어있던 약과를 떨어뜨려 놓았더니, 먹지도 않고 다시 내려놓아진 약과가 처량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돌아서 가던 신아가 순간 우뚝 걸음을 멈춰섭니다.
어깨를 움찔거리던 신아는 고개를 들었다가, 급히 자리를 빠져나갑니다.
찰나 머물렀던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핏방울
하나.
그러나 기둥을 붙잡고 덜컥 돌아가려던 몸은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이해 가지 않는 광경에 순간 생각이 멈춥니다.
금방까지 멀쩡히 대화를 나눴던 형수께서 갑자기, 왜…?
홀린듯 그리로 다가가보면 새하얀 얼굴을 적신 핏방울이 하나 둘 바닥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투둑, 툭. 쉴 새 없이 떨어지는 피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신아가 , 형수가 멍하니 손을 들어 입가를 더듬어봅니다.
(눈이 감긴다…. 곧 털썩! 몸이 쓰러진다.)
그렇게 형수께서 갑작스레 졸도하고, 한 시진 하고도 반 시진이 흘러, 비보悲報가 유 家의 대문을 넘어옵니다.
“도, 도련님! 지금 이 家에서 소식이 도착했는데,”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쓰러지셨고, 애초에 소식이 닿기도 전 쓰러진 형수께선 이틀째 고열에 시달리는 중입니다.
의원이 유 家를 방문하였으나 이 열병의 원인은 도무지 알 수 없다 하는군요.
그저 몸을 차게 만들어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처방 뿐입니다.
신아가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쓰러진 지 하루 하고 반나절 지난 때였습니다.
시체를 수습하는 중인지라 상이 시작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해야 할까요.
…집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나요…?
유이혜:형수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질문에 답하기보다 이것이 먼저라는양 급히 묻는다.)
이신아:(어지러움에 눈을 몇 차례 굴린다. 이불자락을 쥐었다 폈다 거리다 침상을 짚고 상체를 일으킨다. 쿨럭, 밭은 기침이 절로 터져나오고. 가슴은 욱신거려 아프다.) 전 괜, 괜찮아요. 그것보다…. 도련님…. (떨리는 손으로 당신을 붙잡는다.)
무, 무슨 일이…?
유이혜:... ... . (이걸 어떻게 말해야하지? 행여나 고열에 시달리던 형수께서 또 쓰러진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목숨이 위태로울지 모른다.) ... ... ... 몸이 조금 회복되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만 이 답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을테다. 당신이 알아야하는 어떤
진실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이신아:도련님, 이건.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하려다, 다문다. 붙잡았던 손이 힘없이 떨어진다. 그래. 당신의 답에 결국, 무언가를 직감하고 만다. 너무도 쉽게. 어쩌면, 이미 예상했던 것처럼.) …
이현 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나요?
유이혜:(
미심쩍으리만큼 상황을 짚어내는 당신에게 이상함을 느끼지도 못하는지, 그저 난처한 표정만 보이다가.) ... ... ... 그게. (사실을 고할수밖에 없다고 전한다.) 형님께서... ... . 전사하셨습니다.
이신아:……. (소리 없이, 이불을 쥔 손이 구겨진다.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쥐었다가 서서히 힘이 빠지는데 마치 그 모습이…. 무언가
체념한 사람같기도 하더라.) 저, (무어라 말하려 입을 벌렸어도 더 말은 이어지지 않는다. 온통 머릿속이 백지가 된 것처럼 어지러움마저 멀어진다.) ……알려주셔서….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속삭이듯 답한다.) 감사,해요….
……. (이불 위에 놓인 손을 바라본다. 멍하게. 그러다 고개를 들어.) 장례식은…. (한없이 공허한 눈빛.) 언제쯤…?
유이혜:... ... ... 내일. 형님께서 오실겁니다.
이신아:(당신의 말에 그렇군요, 가느다랗게 중얼이며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다. 긴 침묵만이 이어지다가.) ……. (크게, 숨을 들이켜고, 천천히 뱉는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는다. 손 안의 것을 부숴버리고 싶은 사람처럼 거세게 힘을 주었다가, 또 힘을 풀고. 천천히 어깨가 구부러지며 상체가 무너진다.)
…죄송해요, 도련님께서도, (다시금 숨을 들이켠다.) 힘드실 텐데….
더이상 형수께선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하니, 당신은 휴식을 권하며 방을 나올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현실감이 떨어지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1년이란 긴 시간을 전쟁터에서 지내왔음에도 무사히 돌아왔던 형님이 갑작스럽게, 단순히 동향을 보고하는 임무에서 이렇게 돌아가시다니요.
떠나기 전 ‘뭔가’ 불길하다 말씀하셨던 말이 있어 그랬을까요.
곱씹어 생각할수록 결코 형님이 평범하게 돌아가시지 않았으리라는, 그런 믿음만이 확고해집니다.
그 생각은 형님께서 집에 돌아오신 다음날, 더욱 확고해집니다.
손과 발부터 서서히 검게 썩어가기 시작하는 형님의 사체,를, 마주하게 되니….
당신은 그 모습을 어머니께 차마 보여드릴 수 없었습니다.
장례식의 한 구석에는 상복을 입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대는 형수가 앉아 있습니다.
아직 열이 다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저리 나와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도 안쓰럽지만은,
돌이켜 생각해보니 저것이…. 저런 행동조차 만약 연기라면? 그런 의심이 스쳐 지나갑니다.
병의 징조가 없던 형수께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신 시간이 마치, 형님이 돌아가신 때와 너무도 딱 맞아 떨어진 데에서 비롯된 의심입니다.
겨우 침상을 벗어나온 정 부인이 오열하며 형수의 옷을 붙잡고 강제로 일으켜 세웁니다.
“네가 기어코 내 남편에 이어 내 아들까지 죽이는구나!!!”
제대로 된 항변도 표하지 못하는 형수는 고개를 숙입니다.
“애초에 너를 우리 집에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어! 애초에 너를….”
그리고 어머니는, 말릴 새도 없이 손을 치켜들곤….
그는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뺨을 붙잡지도 않고 그대로 서 있습니다.
유이혜:....!! 어머니! (화들짝 놀라 그제야 제 어머니의 손을 확 붙잡아 말렸다.)
정 부인: 이거 놓거라! 이것이 지금 우리 집안에 망조를 들였어! 망조를…!
그러나 어머니의 기력은 머지 않아 다 쇠하여, 하인들의 부축을 받고 자리를 떠납니다.
조문객도 자리에 없으니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당신과 형수 뿐입니다. …또 이렇게, 불편한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네요.
하지만 당신이 형수에게 신경을 쓸 겨를은 얼마 없었습니다.
... ... 형수를 안으로 모시고 얼굴을 식히실 수 있도록 적신 천이라도 가져다드려라.
(그리 말하며 조문객을 만나러 먼저 발걸음을 돌린다.)
형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고, 당신은 먼저 발걸음을 돌리던 때입니다.
이미 문 밖에 누군가의 인영이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허락도 내리지 않았는데 벌써 들어오다니? 그런 생각과 함께 당신이 문을 열면….
이 家의 장자, 즉 형수의 친 오라비인 사내.
눈이 마주치자 그는 가늘게 뜨며 고개를 숙입니다.
…분명히 무표정한 얼굴일 텐데, 왜 그가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요?
이성욱: (
이것 참, 중얼거리더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생전 고인께서 나향에 찾아오셨을 때 많은 도움을 전해주셨죠.
그리고 그는, 나향 전투의 선봉장이던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형님의 죽음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지요.
그는 당신을 바라보다 하인들의 부축을 받고 방을 빠져나가는 신아를
턱
붙잡습니다.
그의 시선이 신아의, 붉어진 뺨으로 향합니다.
이성욱: (잠깐의 웃음소리.) 넌 여전하구나.
(그리고 고개를 숙여…. 무언가를 속삭인다.)
이신아:…….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인 채 다시 하인들의 손길에 이끌려 떠나간다.)
“목련나무에 꽃이 예쁘게 피었더구나.”
“바람이라도 좀 쐬러 가는 건 어떻니?”
…그 말 뿐으로, 남매의 해후는 끝이 납니다.
헌화와 분향 등 조문을 마친 그는 따로 당신에게 만남을 청합니다.
이성욱: 잠시…. 따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요?
유이혜:(화를 내리라 생각해 마음을 단단히 먹었건만. ... ...
웃어? 평범치 않은 대화에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간을 구긴채 한참을 있다 뒤늦게서야 답한다.) ... ... 예.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여유롭게 집 안 곳곳을 구경하며 당신의 뒤를 따른 그는, 따로 마련된 방에 들어서자마자 당신에게 무언가를 건넵니다.
이성욱:저희도 어떻게 고인께서 돌아가시던 길에
변을 당하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작금의, 여동생에 대한 일은 하나 언급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분명 떠나가실 때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말이죠.
그런데 떠나신지 이틀 쯤 되었나, 정찰을 하던 녀석들이 돌연 이것을…. (고개를 작게 저었다.)
유이혜:... (그러나 그는 성욱이 내미는 검을 냉큼 받아들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당신을 바라보고.)
동생분의 일은 죄송합니다. ... 저희 어머니께서 최근 상실을 많이 겪으시여 심신이 고르지 못하였습니다. 이번 일은 제가 잘 갈무리하여 마무리짓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노여움 푸셨으면 합니다. (내 사과나 받고 말하자. 하듯 목례하는데... 답하지 않으면 성욱의 팔이 빠지든 말든간에 고개를 숙이고 있겠단듯 요지부동이다.)
이성욱:(그러나 당신의 사과에 되려 눈썹을 까딱이질 않나,
왜 사과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감추지도 않고 보인다.) 뭐…. (눈을 굴리며.) 괜찮습니다. (선뜻 답한다.) 여러모로 부족한 동생을 보낸 저희 탓도 크겠지요. (또, 선뜻 말했고. …죽은 이신강과는 그리도 사이가 좋아보이던데, 이쪽과는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그리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며, 그는 당신이 받지 않은 검을 당신 옆 바닥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유이혜:(사과를 받는듯한 말에 고개를 들기는 했으나.) 아뇨.
하물며 산길을 쏘다니는 미물조차 제 핏줄을 귀히 여기는 법을 알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통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저희 가문에 보내신 것만으로도 걱정이 크셨을텐데 이렇게 찾아오셨을 적에 불편한 상황을 보이게 되다니 부끄럽지요. 진정 배움이 깊은 이는 말로 하지 않아도 뜻을 전할수 있다 하더인데, 부러 관심을 쏟지 않는척 눈치를 주시니 짚고 넘어가지 않을수가 없네요. (저가 하고 싶은 말을 실컷 늘어놓고, 그제야 검을 살폈다.)
어디서 발견된 것이라 하덥니까? (그리곤 답할 새도 주지 않겠단듯 질문을 이어간다.)
이성욱:(허, 당신의 말에 순간 그의 입술 사이로 숨이 터져나온 것 같기도 했다. 홑팔짱을 낀 그의 얼굴이 살며시 위로 들렸다가 제자리를 찾는다. …더 물어뜯진 않겠다는 양 순순히 답했지만.) 절벽 및 숲 속에서 발견되었다더군요. 말은 그 위에서 누군가의 손에
죽임당한 채 있었다고 하던가…. (턱을 매만진다.)
유이혜:...
누군가라고 한다면. (예상가는 이를 말해보란듯 시선을 들어올린다.)
이성욱:……
호족. (어깨를 으쓱인다.) 한낱 산적, 도적 무리에 당하실 분이십니까?
아마 계획적인 습격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유이혜:형님께서 호족무리를 상대했단 겁니까?
단신으로? (그게 더 말이 안 되지 않나?)
이성욱:자세한 사정은…. 안타깝게도, (그는 정말 안타깝다는 듯 웃었다.) 저희도 모르는지라…. 추측일 뿐입니다.
뭐…. 저희 측에서 알고 있는 것들은 이 정도 뿐입니다. (허리를 바로 세워 앉는다.) 유 장군께선 약 4-5일간 함께 머무르시며 저희를 도와주시다가, 떠나셨고. 그 뒤 영문을 알 수 없이 돌아가셨다. (고개를 끄덕인다.) 떠나기 전에도 이상한 징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이혜:(묻고싶은 건 많으나.) ... ... 알겠습니다.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성욱:그리고. (당신을 바라본다.) 신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만.
유 장군께서 이리 되셨으니 유 家에선 추후 신아를 어찌 할지. (입꼬리를 살짝 끌어당기다 만다.)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유이혜:(논하기엔 좀... ... . 이르지 않나? 싶어 자연스레 미간을 구겼다.) 이 家에서 따로 원하는 것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이성욱:얘기가 빠르시네요. (탁자에 손을 턱 짚으며 몸을 가까이 한다.)
저희는 유 家에서 계속 신아를 받아주길 바랍니다. …한 번 결혼한 여자가 친정으로 돌아온다 한들 어디 쉽게 받아들여지겠습니까? (어쩌면 당신보다도 신아에게 가까운 사람일 그가, 그를 물건처럼 당신에게 떠넘기려 했다.) 그러나 죽은 전 당주의 부인으로 남아있는 건 신아에게도 괴로울 일일 테지요.
(눈이 가늘게 뜨인다.) 기왕이면 이제 유 家의 주인이 된 처남께서 신아를 받아주셔도 괜찮고요.
... ... .
지금은 형님의 상중에 있습니다. 결례가 될만한 말은 삼가주시죠. (짓씹듯이 말하고서.)
이 얘기는 굳이 지금 논하지 않겠습니다. 이만 돌아가주십시오.
남자는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우며, 천천히 옷매무새를 갈무리하며 일어섭니다.
가늘게 뜬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 접힙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니 불길한 공기가 뱀처럼 다리를 타고 오르는 듯 일순 소름이 끼칩니다.
이성욱:오는 길에
목련이 하나 둘, 피기 시작했더군요.
누가 알겠습니까? 거기서부터 목련꽃 향기를 따라 산으로 쭉 내달리면….
높게 깎아지른 절벽이 있단 사실을요.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가 등을 돌려 떠나갑니다.
다짜고짜 웬 목련 얘기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걸까요?
거기서부터 쭉 목련 향을 따라 산 쪽으로 향하면 나온다는 절벽.
쿵, 불길하기 짝이 없는 직감이 당신의 머리를 거세게 친 듯 머리가 아파옵니다.
홀린듯 자리에서 일어난 당신은 형수의 방으로 향합니다.
당신의 명령을 따라 하인들은 형수를 옮겼을 테고, 형수께선 방에서 쉬고 계실 테니까.
유이혜:형수님! (급히 부르며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을 열자 보이는 건 꺼진 촛불과, 열린 창문.
이어 당신은 상이 치뤄지고 있는 방으로 향합니다.
방에 없다면, 반쯤 혼절하신 어머니는 하인들의 손에 방으로 옮겨지신 지 오래이니 남아있을 사람은,
유이혜:(주변을 돌아다니는 하인들을 향해,) 형수께선 어디계시냐! 본 이가 있는게냐?!
"자, 작은 마님께선 잠시 바람을 쐬고 싶으시다며…."
유이혜:(답을 듣자마자 밖으로 향한다, 목련나무를 지나,
절벽으로.)
그때에서야 당신은 다시금 이성욱이 들어왔을 때, 신아에게 어떤 말을 속삭였는지를 떠올립니다.
당시에는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서 흘려넘겼는데 이때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말.
하나 둘 피기 시작한 목련꽃은 좋은 향기로써 당신을 이끕니다.
이 끝에 펼쳐질 광경을 그저 아름다운 것으로만 포장하려는 것처럼요.
곧이어 눈에 담기는 장면은 곧 부서질 듯 찬란합니다.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노란 해가 붉은 빛을 온 사방에 퍼뜨립니다.
절벽을 한 걸음 앞둔 여자의 하얀 머리카락은 붉은 빛에 물들어 분홍빛으로 빛나고,
바람에 휘날리는 검은 치맛자락은 그림자에 잠길 것 같습니다.
한 걸음, 땅을 박차고 떨어지는 발은 허공을 딛습니다.
순간 뒤돌아본 노란 눈동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신아:(눈물로 붉어진 눈이 빛을 등지고 당신을 바라본다.
도련님? 그리 속닥이는 듯 하며 천천히 몸이 기울어진다.
뒤로.)
유이혜:(헉, 헉. 몰아쉬던 숨을 잠재울 틈도 없이 손을 뻗는다. 당신에게.
닿았나? 닿아야 한다. 반드시. )
다급히 뛰쳐나간 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함이 서려 있었습니다.
풀잎 휘날리고, 바람 스치는 가운데 당신은 끝내,
기울어지던 몸이 붙잡는 힘에 걸려 추락을 멈춥니다.
눈물로 번진 얼굴에 겨우 저물어가던 태양 빛이 닿아 붉습니다.
이신아:…도련님이 어떻게…. (멍하니 물었다.) 이곳에….
유이혜:미쳤습니까?!?! (진정하자마자 곧장 외쳤다.)
대체 왜 죽으려 하는 겁니까. 아무리, 아무리. 괴롭다고 해도, 그래도. (말이 횡설수설 튀어나온다.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화가 이토록 나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으니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길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하나였다.) 대체 왜 이런 짓을... .
이신아:(손이 자신을 붙잡는다. 어둠을 해치고 빛을 들여가면서,까지. 생각해본 적 없는 상황에 더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눈꺼풀을 깜빡여도 눈물 한 방울이 간신히 떨어질 뿐. 알린 적도 없고, 당신이 이곳을 알 수도 없을 텐데. 어찌 이곳을 알아 왔을까.
당신은 왜 내가 무너질 것 같을 때마다 불쑥 나타나 나를 쥐고 흔들까. 왜, 왜 하필 이제와서.)
…….
제가…. 도련님의 말을 다치게 했어요. (뜬금없는 고해였다. 이유를 묻는 당신의 물음에 답하기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고백.) 그러니까…. (숨을 들이켠다.) 이현 님을 죽인 건….
유이혜:(그러나 당신의 고백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와락 당신을 끌어안았다.) 아니. ... 됐습니다. 다. 됐습니다. 전부. (마치 그 말이.
당신이 살아있으니 전부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런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의 입밖으로 나오는 문장은 아니었지만 당신의 어깨를 안은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것만으로도 그 의미를 알기에 족했다.) 다신. ... ... 다신, 이러지 마세요. 다신. (그는
진실이 아닌 다른 것을 택했다.)
이신아:(저 짙은 수렁으로 자신을 끌어당기던 힘이 죄 사라진다. 밑바닥이 아닌 당신이…. 자신을 품에 안는다. 당신의 힘으로 온 몸을 붙잡는다. 자신에게 살라 이른다. 죽지 말라고. …왜? 나는 고작 당신의 형수이고, 당신의 형을 죽인 여자일 뿐인데. 이상하게 멈춘 것 같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이 메이지 않아. 심장도, 크게 뛰지 않아.) …아뇨, 들으셔야 해요. 들어야 해요, 도련님은, (힘없이 늘어져있던 손을 들어 당신의 어깨를 붙잡아 밀어낸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로라도 당신을 본다. 호소하듯이, 설득하듯이.) 제가. (숨이 턱 멎는다.) …제가 이현 님을 죽였어요. 다, 다 제 잘못이에요. 그러니까…. 저를, 그냥….
유이혜:그래서, 나보고 뭘 어쩌란 말입니까. (당신의 앞에서만 서면 이성이 마비된다. 답잖은 행동을 하고, 선을 지키기 어렵고. 왜 당신은 이리도 여리고, 약하고, 쉴새없이 흔들리며 괴로워해서. 내 눈이 당신을 벗어나는 걸 거부하는가.) 당신 탓이니. 죽게 내버려 달라고요? 죽든 말든 상관말라, 그것입니까?
하물며 정녕 당신 탓이었다 하더라도 그리 내던지지는 말았어야지. 차라리 내 손에 죽었어야지. 내게 조금이라도 미안하다면, 정말로 그런 거라면. (원망스런 목소리가 울린다. 답답한 마음에 팔에는 힘만 들어찼다.) 어찌 내게 이리 잔인하게 군단 말입니까.
(제 혈육의 아내를. 그가 죽어 싸늘한 찬 몸으로 돌아온 오늘. 그의 생의 물건을 넘겨받은 오늘. 기어이 당신을 끌어안고야 말았으니. 결코 이전의 생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거부한다. 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돌아가지 않겠다. 그것이 결코. 당신의 삶보다 귀하지 않기에.)
이신아:(나는 그냥, 그래. 난 그냥.
포기하고 싶다. 모든 아픔으로부터, 배척과 고난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이제는 삶이라는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다. 비록 도망치게 될 그곳이 또다른 지옥이라 할지라도, 이토록 내가 나약해서…. 붙잡힌 손을 풀어보려 힘쓴다.) 제게…. 제게
제발 마음 쓰지 말아요, 도련님. (그건 차라리 절규를 닮았다.) 원망이든 동정이든 상관 없으나 제 마음만큼은 제발 흔들지 말아주세요, (그러나 삶으로 묶인 손은 풀어낼 수 없으니. 끝내 그는 고개를 떨구며 울었다.) 결심했던 것들이 다 흐려져요….
저를, 저를 죽이라 말하여도 듣지 않으실 거잖아요, 그야, 도련님은, 도련님은…. (떨군 고개를 들어올리며 당신을 바라본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 보이는 당신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던가.) 너무 다정하시니까….
유이혜:묻지도 아니하고 그걸 어찌 안단 말입니까? (하지만 당신의 말대로 그는 당신을 해할 생각일랑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 .)
... ... (너무 다정하시니까. 당신의 말을 들은 유이혜는 어떠했지? 그의 표정은. 살며시 몸을 떨어트린 뒤 마주한 그의 얼굴은. 미소짓고 있었다. 아니. 괴로워하고 있었다. 단순한 희, 노, 어떤 것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그런 얼굴로 그는 당신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뻗어 당신의 젖은 뺨을 닦았다.) 전, (마침내 열린 입은.) ... ... 다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고백이었다. 그래. 그가 정말 다정했더라면. 이치를 아는 사내였다면. 가족을 우선했을 것이고, 형님의 명을 따랐을 것이고, 당신을.)
(뺨을 쓸어내는 손길은 따뜻하고, 다정했다. 복잡한 감정이 담겼던 눈빛은 어느순간 당신만을 담아서 꼭. 가장 귀한 여인을 담듯. 연인을 담듯 흐려진다.)
내 옆에 있으세요. 내 옆에서, 웃고, 울고, 화내며. 당신의 삶이 저주와 같이 느껴지거든 내게 주세요. 기꺼이 당신의 나락이 되어드릴테니... .
이신아:(왜 눈물을 닦아내는데, 그런 손길에 더 눈물은 떨어지고 마는 걸까. 왜 진정된 줄 알았던 숨은 애정 어린 시선 앞에서 가빠지고 마는 걸까. 이제야 내던질 수 있게 될 줄 알았는데 당신은 왜, 다시금
살고 싶게 내 마음을 흔드나. 당신의 손길이, 눈빛이, 복잡하던 그 모든 표정에서 드러나는 감정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언제부터? 그런 질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드러난 감정에서 그는 한없는 죄악감을 느낀다. 드러난 감정에서 그는, 한없는, 위로를 받는다…. 이기적이게도.)
(거절해야 한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이제라도 이 손을 뿌리치고 저 밑으로 몸을 던져야 하노라고 수도 없이 외치는 마음이 시끄럽기만 하다. 메마른 입술을 연다. 어쩌면 체념하듯이.) 결국, 결국 도련님도 저를 미워하게 되실 거예요. (차라리 그러길 바라는 사람처럼 말한다.) 도련님도…. (저를 떠나실 거예요. 그 말만큼은 끝내 미래를 향한 저주로 박힐까봐 두려워서 내뱉지 못했다. 그래. 이곳까지 다가온 당신이 다시 떠나가지 않기를. 그는 동시에 그것을 무엇보다도 소망했다.)
유이혜:(확언과도 같은 문장에서 그는 당신의 과거를 읽는다. 당신이 이리도 확신하게 됐을 모든 시간들을. 자신이 알고, 또한 모르고 있을. 어떠한 맹세도, 선물도 그 확신을 쉬이 누그러뜨릴 수 없으리라. 다만 그는 붙들어야만 했다. 당신도, 당신의 생도.) ... ... 우리 유 家는 다섯 살이 되면 받는 선물이 있습니다. (그리 말하며 품 안에서 꺼내든 건. 작은
단도였다. 그의 손 한 뼘만한, 당신에겐 조금 크고. 그에겐 조금 작을.)
굳세고 더럽혀지지 않을 마음을. 그리하여 영광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라는. 하여 이것을 행운의 상징 삼아 앞을 가로막는 어떤 것이든 거칠게 헤쳐나가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당신의 손에 조심스럽게 쥐어주었다.) 당신이 그 생을 제게 주신다면. 내 영광은 이제 당신의 것입니다. 애초에 당신을 마음에 담은 것에서 그 영광은 흐려졌으니. 내 마음이 무너졌다는 것은, 생이 끝난 빈껍데기에 다름없단 의미입니다.
그러니 정녕 그때가 온다면.
함께 죽겠나이다.
그 칼은, 다섯 살의 당신이 선물받은 이후로 녹슬지 않고 그때의 빛을 유지하는 단도.
영광을 더럽힐 바에는 죽음을 택하라는 의미가 담긴 그 칼은 무엇보다 무거웠으니.
당신의 마음만큼 무거운 칼은 이제 한낱 여인의 손에 놓입니다.
가져서는 안 될 마음을 가진 당신, 형님을 죽였다 고해하는 여인을 끝내 마음에 품기로 확정하였으니….
숱한 사람들이 짓밟은 꽃대가 차마 부러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이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아니. 돌이킬 수 있더라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추락하던 여인을 끌어안은 죄로 당신은 스스로 위에서 떨어졌으니 어떤 나락이 찾아와도 굳세게 감당해야만 합니다.
당신이 무너지는 때엔 당신 품 안의 여인도 필히 꺾이고 말 터이니….
형님의 장례식이 마무리 되고도 몸이 회복하실 때까지 기다렸다 소식을 전했건만, 전해들은 뒤 바로 뒤로 넘어가시려는 모습에 얼마나 놀랐던지요.
그래도 설득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습니다.
이대로 형수가 이 家에 돌아간다 치면 법률에 따라 유 家의 재산을 일부 가져가야 할 텐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또 결혼한 뒤 과부가 된 여인이 어디로 향하겠느냐.
한 번 사람을 집에 들였다가 내쫓으면 유 家의 명예가 어디로 가겠느냐.
그런 말들에 결국 어머니도 집을 꺾으셨습니다.
형사취수제가 생겨나게 된 배경도 얼추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 아니덥니까.
형님이 죽었으니 형수는 재산을 물려받게 되는데, 형수가 혈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다시 혼인하게 되면 원래 혈족의 것이었던 재산이 혈족의 바깥으로 유출되니….
“그래도 어찌 네 형을 죽인 여자와 새로이 혼례를 치루는 걸 내 눈으로 볼 수 있겠느냐?”
“그 여자앨 우리 집에 남겨놓기는 하겠지만은, 혼인식을 새로 올리는 것만큼은 허락 못 한다!”
이신아:저, 저는 정말 상관 없어요. 도련님.
소식을 전하자 방에서 열을 떨어뜨리고 있던 신아는 손사레를 치며 괜찮노라 말할 뿐입니다.
이신아:그냥, 그 전에 이 결정을 취소하셔도. 저는 당연히….
유이혜:당연히... ... 뭐요? (빤히 본다.)
이신아:(빤한 시선에 어쩔 줄 몰라하다 고개를 숙였다.) 괘, 괘, 괜찮다고…요…?
이신아:(입술을 달싹였다. 아뇨. 그 이전에.) …저…를
부인삼아 주시는 거, 것부터요.
제가 한 입으로 두말 할 사내처럼 보이셨습니까?
이신아:……. (여전히 당신이 준 유 家의 단도는 제게 속해 있었고. 아무리 시선을 피해도 꽂히는 시선에는 승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더라. 결국 화끈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꾹 눌러낸다.)
(그렇다면 이를 어쩐담. 자신이야 상관 없다지만, 자신따윌…. 신부로 들이는 당신에겐 다시 있기 힘든 경험과 기회일 터. 자신만이었다면 상관 없었겠지만 당신이 함께 있겠다 말하니….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혼례를 올리지 않는 것은 괘, 괜찮지만요. (살며시 시선을 들어올린다.) 저보단 도련님이 괜찮으실지…. 걱정이에요. 그러니까, 도련님은 처음이시니까….
유이혜:(당신의 말을 가만 듣고 있다가. 무언가 마음에 안든다는듯 무표정한 얼굴로 빤히 바라보던 것도 잠시. 후.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길.) 일단 그
호칭부터 제대로 정리해야겠습니다. 계속해서 절 도련님이라 부르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뭐. 따지고보면 틀린 호칭이 아니기야 했지만... .)
이신아:(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절벽에서의 사건 이후로 신경쓰고 있던 부분이긴 했었다. 속으로 여러 차례 연습해본 적도 있었다. 용기가 나지 않아 한 번도 입 밖으로 뱉어본 적 없었지만. 손을 꼼질거리다 입을 벌린다.) ……. (무어라 중얼거린 것 같은데 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는다. 본인도 그걸 알았는지 다시금 고개를 들어올리며 말하길.) …
이혜…님…?
유이혜:(새로운 호칭을 들은 그는 팔짱까지 낀채 뭔갈 곰곰 생각하는듯 하더니... ... .) 다시. (서당서 채점이라도 하듯 까탈스런 시선으로 당신을 보았다.)
이신아:(뭔가…. 뭔가 잘못이라도 했나? 시선에 당혹감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가? 마음에 안 드시나? 그럼.)
나, 나으리…? (갑자기 왜 이 쪽으로?)
(아니면.) …당주님? (더 이상해진다.)
유이혜:... ... 혹시 저랑 가깝게 지내는게 고까우십니까? (급기야 이런 생각까지 하고야 마는데... ... . 여보당신 소리를 바란것은 아니지만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괜히 부담 주지 말자 생각하며 일단 이 문제는 뒤로 접어두기로 했다.) 너무 성급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 다만 약식으로라도 혼례를 올리는 편이 좋을 것 같기는 합니다. ... 어머니의 눈을 피할 방법을 찾기는 해야겠지만.
이신아:그. 그. 그런 게 아니라!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아서…. (물론, 여전히 마음 한 켠으론 당신이 그 선택을 돌이켜 생각해보길 바라고 있었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그럼,
당신이 바랐던 호칭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또 고민해보았다가.) ……. (그래. 역시
당신의 첫 혼례식이니만큼, 최대한 성의를 담고 싶단 생각이 들기야 했다. 열이 오르는 이마를 손등으로 꾹 누르며 생각에 잠긴다.) 좋아…하는 장소가 있으신가요? 마을에서. 아니면 혼례를 치룬다면 하고 싶었던 것이라던가….
유이혜:(다만 그런 당신의 속을 모를 이혜는 그저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만 옆으로 갸우뚱. 기울이는 것이다.) 제... 기호에 맞추시려고요? (보통은 반대지 않던가. 생각하지만 혼례에 대한 건 형님과 당신의 혼례를 지켜본 것이 고작인지라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둘 사이에 늘 따라다닐, 동시에 있는 힘껏 무시해야만 할 '형님'의 존재를 부러 꺼내드는 것도 괜히 마음에 걸렸고.) 저는... 방에서 둘이 치뤄도 된다 생각합니다만... . (소란스런 일을 벌일 필요는 없으리라 여겨 한 말이지만, 당신에게 어찌 들렸을진 모르는 일이다.)
이신아:네? 네, 아무래도, 도련…. …생각이 중요하실 것 같아서요. (호칭 부분에서 말을 얼버무리다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데. 잠깐. …
방에서 단 둘이? 그 말을 듣자마자 생각이 그런…. 쪽으로 뻗쳐서 얼굴이 새빨갛게 터지고 만다. 펑! 아니? 잠깐.
그러고보면 지금도 방에 단 둘이….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이불자락을 어깨까지 끌어올린다. 앉아있는 터라 끌어올려도 다시 주르륵 흘러내릴 뿐이었지만. 아니. 그야.
부부가 된다면 물론.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아니. 그래도….)
(…잠깐. 난 왜 자꾸 이런 생각에만 빠져가는 거지? 주먹을 들어 제 머리를 콩 때렸다!!!)
그,러니까. 혼례는 단 둘이서만…. 치루어도 괜찮다는 마, 말씀이시죠?
유이혜:?!?!? (그리고 그걸 보는 이혜는 그저 당혹스러워서 일단 당신의 양쪽 손목을 붙잡았는데,) 왜. 왜,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아니, 예. 그. 그렇기는 한데. (무슨 상황인지 아직도 이해를 못했다.)
이신아:(하필 그렇고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손목이 잡히자 깜짝 놀라 소리를 작게 질렀던 것 같다.) 예. 예, 예?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분. 세상이 어지럽다.) 아니. 그냥. 그, (입술을 달싹거렸다.) 머, 머리가 어지러워서요…. 그래서 그냥…. (왜 자꾸 이런 추태를 부리게 되는지.)
…꽃…으로라도 방을 장식하게 해둘까요? (간이 혼례 쪽으로 말을 돌렸다.)
유이혜:피곤... 하신 거면 들어가서 쉬셔도 됩니다. (물론 단순한 피곤의 문제가 아니리라 생각하긴 하지만... .) 예에... . (애써 돌린 화제에 넘어가주는가 싶었지만 여전히 시선에는 불안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어떤 꽃을 좋아하십니까?
이신아:(화끈거리는 뺨을 꾹꾹 눌러댄다. 열이 떨어지질 않네.) …꽃이라면…. (조용히 눈을 굴렸다.) 그냥, 피어있는 것이라면 대부분 좋아해서요. (멋쩍은 웃음.) 마을을 돌아다니며 한아름 피어있는 것들을 준비해볼게요. (손을 꼼질거렸다.)
(이불자락을 바라보다, 당신을 본다.) 이런 것들로 괜찮으시겠어요? (머뭇거리다 손을 뻗어 당신의 손가락을, 잡아본다.)
유이혜:상관없습니다. (담백히 전하는 투에서 그의 의지가 보였다. 다만 손끝이 닿았을 땐 잠시 어깨를 움찔. 떠는듯 보이다가.) ... ...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도 아니니 천천히 진행해도 괜찮습니다. 당신께서 제 부인이 되는 것은 이제 정해진 사실이니 조급할 필요도 없고요. (지금까지 잘만 눈을 맞추다가, 막상 손이 잡히니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는 꼴이 조금 우스웠다.) ... ... 당신이. 준비가 될 떄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이신아:(제게 죽지 말고 살라 외치던 날, 그 날 마주했던 시선은 더할 나위 없이 확고했다.
믿어도 될까? 우습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당신은, 너무도 다정하고 굳센 사람이니까. 정해진 사실. 기다리겠다는 말. 그것들에 이미 다 짓밟힌 줄 알았던 마음이 간질거리며 한구석에서 제 존재를 알린다. 손끝이 움찔 떨리고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그저 고개를 숙인다. 부끄러움에 붙잡았던 손길은 힘없이 풀려 떨어진다. 당신은 왜 날 선택했나. 왜 날 마음에 품었을까. 여전히 답은 알지 못하는 채로.) …….네. (당장은 그런 답밖에 돌려줄 수 없었지만.)
그렇게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을 내려놓고 떠난 그 날부터….
사람의 마음은 한 치 앞 길을 모르니, 당신은 그저 맡은 업무에 집중하며 시간을 지나보냅니다.
유 家의 당주와 한 명의 무관으로서 바쁘게 일상을 보냈지만 이상하게 지치질 않는 요즈음입니다.
암묵적인 약속이 당신과 그 사이에 있어서 그랬을까요?
신부를 찾으러 갈 일은 없습니다. 당신이 직접 발걸음하면 될 일이니.
혼례식장도 신방도 고작 방 한 칸으로 같습니다.
문 앞에 서서 숨을 들이키면 안쪽에서는 향기로운 봄꽃 향기가 새어나오는 것 같고,
일렁이는 촛불 빛. 그 곁에 앉아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신부
의 인영이 비춰 보입니다.
문을 열면 혼례복을 차려입고 앉아있는 신부의 모습이 보입니다.
축하해주는 이도 없고, 꽃을 뿌려주는 이도 없는 단 둘만의 조촐한 혼례식.
…탁. 이윽고 문을 닫은 당신은 그 앞에 마주 앉습니다.
창문을 살짝 열어두었음에도 왜 이리 안쪽 공기가 덥고 답답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긴장한 탓일까요?
초례상은 아니나 주물상을 앞에 둔 둘은 번갈아가며 절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유이혜:(괜히 어색한 기분이 들어 헛기침이나 할까 했지만, 엄숙한 분위기에선 이또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마른 침만 꼴딱 삼켰다. 긴장한 게 역력한 몸뚱이가 쉬이 움직여주질 않는걸 느끼며 천천히 허리를 숙여 절한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절을 올리면 옷만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침이라도 꼴딱 삼켰다간 그 소리마저 다 들릴까 싶어 긴장감은 점점 더해지고요.
그리고, 그건 신부의 쪽도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이신아:……. (긴장한 것이 역력한 모습으로, 이어 절을 올린다. 손끝이 떨리던 것을 당신이 보았을까.)
표주박 하나를 둘로 갈라 만든 술잔이 주물상 앞에 놓여있으니,
신랑과 신부는 서로 술잔을 나눠 합근례를 합니다.
미리 술을 따라놓은 표주박 술잔을 하나씩 쥐고, 목 너머로 넘깁니다.
단숨에 올라오는 더운 열기는 원래부터 밑에 고여있던 것인지, 아니면 술기운이라는 핑계를 빌려 올라오는 것인지.
그리고 합근이 끝난 뒤엔, 신랑 신부의 합방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앞에 두고 나니 목이 왜 이리 마른지, 마른 침만 꿀떡 삼켜집니다.
이신아:(마른 침을 삼키다가, 살금 고개를 들어 당신을 바라본다. 겨우 목소리를 내어 말한다.) 초, 촛불은….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긴 했다.) 촛불은 끄지 않으면…. 안 될까요? (긴장감으로 손이 꼼질거린다.)
유이혜:... ... 어... . (고민하는듯 하긴했지만.) ... ... 왜, 죠? (일단 묻는다.)
이신아:(꼼질…. 꼼질….) 어, 어, 어두우면…. 조금, 무서워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부끄러운 모양.)
유이혜:... ... 그러면. 어. (불을 안 끄면... 이제. 어. 그러니까.) ... ... ... .
(또 다시 침묵...)
... ...
그. 냥. 잘까요. (조금 포기했다.)
이신아:……. (술기운 때문인지 뭔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가라앉을 생각을 안 했다. 침묵 가운데 조용히 숨만 들이켜고 내쉬다가,) 저,랑은…. (슬쩍 올려다본다.)
그, (말문이 막힌다. 이를 어떻게 말하지.) …싫으세요? 그게…. (혹여나 당신이 뒤늦게라도 이 혼례를 후회하는 걸까 싶어, 걱정스러운 마음에 질문하지만. 당신에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르겠다.)
유이혜:ㅇ, (사레 들린다.) 켁, 콜록. 콜록! (심하게 들렸다.) 켁, 콜록... ...! (한참이나 콜록거렸다.)
(기침때문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얼굴이 시뻘겋게 익어서는.) 그. 큼. 그런. 그런 얘기가 ... 아니라. 그. 조금. 일렀던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 입니다.
이신아:(소맷자락으로 입을 가린 채 당신의 반응에 고민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일렀다고? 역시 성급한 결정이라며 후회하시는 걸까? 속은 타들어가는데 무어라 내뱉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보단 당신에게 맞춘 채 사고가 돌아간다. 그는 언제나 타인 위주의 삶을 살아야만 했으니까, 그 습관이 어디 갈까.) 부, 불…. 꺼도 돼요.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러다보니 뭔가, 조르게 되는 것 같은 애매한 상황이 이어지게 되었지만.)
유이혜:불을 끄면 무섭다고 하셨잖습니까. (뭐가 괜찮단 건지. 이쪽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부부의, 그. 큼. (헛기침.) 의무... 가 있긴 하지만. 지금은 워낙 바쁜 때이고, 정리되지 않은 일들도 있으니 말미가 있습니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다는 얘기입니다. (새빨간 얼굴로 말해봤자 그리 멋있진 않았다.)
이신아:……. (
하지만, 습관처럼 또 생각하고 만다.
저는 어차피…. 아니. 아니. 아니야. 지금은. 지금만큼은. 애써 생각을 끊어낸다. 살며시 이불자락을 손 안에 쥐고선.) 싫진…. 않단 말, 말씀이시죠? 도련, 아니. (입술을 달싹였다.) …
이혜 님은,요.
유이혜:그. ... ... 그. ... 렇... 죠. (더듬더듬 간신히 의사를 전한다. 상당히 격정적인 상황이기는 했으나, 요 며칠 전에는 마음이 식어버리면 죽겠다느니 아주 순애보가 따로 없는 말을 늘어놓았던 것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그땐 쉬웠던 말들이 지금은 왜이리 어려운지.) ... ... ... 자. 자죠! (냅다! 그냥! 자겠다는듯 이불을 들춘다!)
이신아:(하지만 당신의 과장되고-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행동에도 입가를 가린 채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곧 한쪽 손으로 땅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상체를 살짝 일으켜서, 어? 점점 얼굴이 가까워진다.)
(당신이 피하려고 했다면, 하다못해 말이나 행동으로 저지하기엔 충분한 속도. 땅을 짚지 않은 손은 머뭇거리다 당신의 한쪽 손등을 덮었고, 가까워지던 얼굴 끝에는 결국.) ……. (소리 없이 입술이 닿는다. 찰나에 가까운 시간. 곧 터질 듯 달아오른 얼굴이 다시금 멀어진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힘겹게 말한다.) 저, 전…. 지금이 좋아요. (답지 않게 의견을 말하는 이유는, 글쎄.) 더 늦으면…. (말끝을 흐리며 당신을 올려다본다. 선명한 어떤 감정을 눈빛에 담고.)
유이혜:어? (얼굴이,) 어? (점점,) 어어...? (가까워진다.)
(그리고 입술이 닿는다. 부드러운 감촉. 가까워진 숨소리. 달아올랐기 때문인지, 흔들리는 촛불 탓인지 붉게 물든 얼굴.) 저, 그. 저. (말만 더듬는다. 뭐지? 이게 뭐지?라고 계속 생각하는 사이... 천천히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한순간 솟아오른 열기와 함께 잠식된 그대로….
어색하게 느껴지던 감정들은 죄 사라지고, 서로에게 열중하기 시작합니다.
다만 한 꺼풀, 두 꺼풀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탈복할 즈음이었던가요?
어깨
부근에 닿은 당신의 손에 신아는 화들짝 놀라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웁니다.
이신아:…아, 그게. (흐려지던 시선이 잠시 초점을 되찾고, 곧이어 난감함이 스며든다. 우물쭈물거리다.) 저, 겉옷은…. (말끝을 흐린다.)
(제 옷자락을 만지작만지작 거린다.) 등에 흉한 상처가 있어서….
유이혜:(잠시 손을 움찔 떨며 떼어내려다, 손바닥으로 누르듯 가만 다잡곤) ... ... 싫으십니까?
이신아:(옷자락을 꼼질거리며 계속 매만지다가. 살며시 시선을 피한다.) 드, 등만 가리면…. 안 될까요? (어깨가 조금 움츠러든다. 곧 눈치를 살피는 시선이 이어진다.)
유이혜:... ... (침묵한다. 이해하고, 넘어가겠단 얘기인건지. 한참이나 말이 없으니 당신이 슬슬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할 때. 그가 대뜸 제 옷고름을 풀어헤치는 것이다. 말없이 잇는 행동들에는 이전의 열기는 없어 당최 이해할 수 없을 때.) 보세요. (하고 보이는 팔 죽지에는 곳곳에
흉터가 있었다. 찢기고, 베이고, 두들겨 맞던 고된 전장의 순간들을 보이는 흉터. 그를 앓게 했으나 끝내 명예란 이름으로 자리잡은. 그러나 당신의 눈에는 그저 끔찍할 흉터들이.) 끔찍하십니까? (일렁이는 촛불에 비친 그의 눈에는 어떤 망설임이나 근심도 보이지 않았다.)
이신아:(그래, 침묵 가운데 점점 초조해져 손톱으로 탁, 탁, 손가락 주변을 긁어나가기 시작하는데.) ─이, 이혜 님? (대뜸 옷고름을 풀어헤치고, 순식간에 옷가지를 옆으로 떨어뜨리는 당신의 행동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눈에 들어차는 맨살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당신의 말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려 담는다. 당신의 상처를. 끔찍한 흉터들을.) ……. (바람결에 흔들리는 촛불이 제 마음만 같았다.
하지만. 당신의 상처와 자신의 상처는 본질적으로 달랐으니까.) …이혜 님의 상, 상처는,
끔찍하지 않아요. (더듬더듬 입을 연다. 등을 가리는 겉옷을 무심코 더 여미듯 잡는다.) 누군가를 지키려다…. 아니면, 그냥 충忠을 따르다 그리 되, 되신 거잖아요. (멋쩍게 웃었다.)
유이혜:(그러면 이혜는 옷고름을 단단히 붙잡는 당신의 손을 잡아다, 제 손 위에 올리고 포개 붙잡는 것이다.) 나라의 명을 따라 움직여야 하는 '유 家'의 당주된 몸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 알려지면 모두가 제 경을 치러 달려들테지만. ... ... 결국 전쟁터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지옥일 뿐입니다. (그리곤 당신의 손을 천천히 끌어 상처위로 올려주었다. 새살이 돋아나 튀어나오고, 엉성하게 붙은 살결은 부드럽다가도, 거칠고, 탁한. 여러 천을 겹쳐 만든 누더기 헝겊같았다.) 내 상처는 그 모든 과거를 되짚어주는 흔적들입니다. 내가 해한, 끝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의 생들이 고스란히 이곳에 담겨있는 것이지요. ... ... 다만 동시에. 그곳에서 살고자 발버둥치던 내가 함께 있습니다. 그 모든 순간들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하는 제가 있을 수 있으니. 제게 흉터란 그런 것입니다. (제 몸을 내려보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당신을 바라보았다.)
부인의 흉터가 어찌 생겼을진 알 수 없겠으나. 당신이 나의 과거를 품겠다 하시거든 저 또한 그러고자 합니다. 그것이
죄이든, 어떤 것이든.
그러나 당신의 말을 들은 신아, 당신의 부인의 표정은 어떠했던가요?
그 말을 듣고 마냥 기뻐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울듯 웃는 얼굴.
누더기 헝겊같은 흉터 위로 올라온 손은 알 수 없는 떨림을 안고, 그러나 당신을 어루만집니다.
보이지 않는 여자의 흉터. 죄이든, 어떤 것이든 끌어안겠다 확고하게 말했으나….
그것이 받아들여졌을지는, 또한 미지수였던지라.
이신아:(흔들리는 촛불 빛, 아래에서, 가빠지는 숨을 애써 억누르며 문득, 말한다.) …어렸,을 때, (하나 노력해보아도 눌리지 않고 불쑥 튀어나오는 것들은 있기 마련인지라. 손끝을 떨며 이불자락을 쥔다.)
불이…. 났어요. 그 밑에 깔렸었는데…. (목소리가 흔들린다.) 그, 그때 상처가, 쉽게 지워지질 않네요. (마치 무언가를 덮고 싶어하듯 어딘가 초조하고, 다급한 음성이었다. 저 밑바닥의 상처를 가릴 짚을 겨우 찾아낸 사람처럼.)
유이혜:(이유를 들었으나, 어쩐지 개운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도그럴것이. 그런
사고에 의해 난 상처라면, 어찌.) ... ... 헌데, 어찌 끔찍하다 하신 겁니까? (다만 끈질길게 물을 생각은 없단듯 묘한 장난기 섞인 얼굴로.) 제가 그런 일로 면박을 줄 사내라 생각하신 겁니까?
이신아:며, 면박이라뇨! 그냥, 여, 여인의 몸에 이런 큰 상처는…. (대게 흠처럼 여겨졌으니까. 고개를 숙이며 울렁이는 속을 억누른다. 억누르고, 또 억누른다.) ……. (침묵은 길었다. 손톱이 탁, 탁, 제 손가락을 튕기듯 긁는다. 불안하게 눈을 굴리다가.) 오라버니가…. 절 구하다가…. 그, 그래서. (입꼬리를 잠시 끌어당긴다.) 그래서…. (잠시, 시선이 흐려진다.)
유이혜:... ... (
오라버니라고 한다면, 아마 그일테다. 이전에 찾아왔던 사람이 아니라. 당신을 처음 보았던 그 날 함께 있던. 당신을 아끼나, 끝내 당신을 남기고 떠나버린. 당신의 흐려진 시선이 마치 울음을 참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여 이혜는 당신의 손을 살짝 당겨 제 품에 앉히곤 끌어안아서.) 괜찮습니다. (무어가 괜찮다 하는지 스스로도 모른채.) ... 이젠, 제가 당신의 모든 순간에 함께할테니. 기쁜 일만 있으리라 말할 순 없겠지만, 저는 늘 곁에서 당신을 지킬 겁니다. (도닥거리고, 쓰는 손길엔 온기 뿐이다.)
이신아:- 아, (과거 어드메를 헤매다, 살며시 당겨오는 손길에 숨을 터트리듯 고개를 들어올린다. 그러면 제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온기가. 위로하듯 쏟아지는 음성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감히 이런 순간을 누려도 되는 걸까? 감히 누군가의 마음을 받고, 누군가의 위로 가운데 따스히 안겨있을 수 있다는 게 마치 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무릇 죄악은 그래서 더욱 달콤한 법이라….) 제가, (내뱉어선 안될 말을 꺼내고 마는 것이다.) 제가…. 어떤 사람이더라도요? (울 것 처럼 목소리가 떨려온다.)
유이혜:예, (하고 답하는 목소리가 단단했다. 그리곤 느릿느릿, 이마에 닿은 입술이 관자놀이, 볼을 따라 내려온다. 위로, 혹은 경외를 담은듯한 입맞춤이었다.)
그대가 어떤 사람이라도. (흔들림없는 맹세의 순간이다.) 제
부인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을테니까요.
이신아:(그리고 그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때, 순간 이마를 타고 내려오는 촉감에 깜짝 놀라 어깨를 떤다. 살며시 흘러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때에서야 신아는 자신이 어느 상황에 있었는질 다시금 자각했다. 당신의 품 안에 완전히 안겨있다. 거기다, 당신은 상의를 벗은 채…?) ……. (하지만 벗어나려 움찔대던 몸을 애써 억누른다.
당신도 떠나갈 거야. 그 문장이 서서히
당신이, 떠나가지 않았으면 한다는 문장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끝에 살며시 힘을 주다, 볼 즈음을 타고 입맞춤이 내려올 때 즈음 고개를 돌려선, 조용히. 입술이 맞붙도록. 찰나 감았던 눈을 뜨면 지척에서 눈이 맞는다. 이번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도, 당신은 끝내 그 상처를 어루만지고, 끌어안습니다.
아직도 미처 말 못한 것들이 있다는 것이야, 당연히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 조각만이라도 손에 쥔 것이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 무엇보다도 귀애하는 당신의 여인을 끝내 끌어안은 밤.
부부의 연이든 뭐든, 당신과 그 사이에
무언가
가 이어진 것만큼은 확실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