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토록 속죄가 끝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사람을 죽인 죄는 또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갚아지지 않는다. 용서받으리란 기대는 가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형벌이었고, 동시에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여 그는 히스이 여왕에게서, 피오레 왕국에게서 내려진 은사에도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이걸로 정말… 끝인건가? 자유라고? 언젠가 이치야가 자신에게 한 말이 떠올랐었다. 곁에서 행복하게 만들어줘야 할 사람이 있지 않느냐고.
내심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인간이니까. 더 바라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눈을 감는다면, 이대로 정말 죄가 다 사라졌다며 그 착각 속에 살 수 있으리라고.
…그러나 제랄은 라티오를 막아섰다. 그것은 새로운 죄의 선언이었다. 죗값을 거부해 상대의 의지를 무참히 꺾어서라도 그 생을 존속시키고, 동시에 죄 없는 사람들의 죽음을 막겠다고.
제랄은 라티오가, 그의 길드원들이 자신을 향한 증오로라도 살아가길 바랐다. 복수를 이루기 위해서 목숨마저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 어떤 질타라도 받을 각오는 마쳐져 있었다. 다짜고짜 칼이 눈앞에 들이밀어져도 할 말은 없었다. 그도 세뇌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는 되려 감사 인사를 받았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무척이나 복잡한 심상을 가지게 했다.
엘자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옳은 일을 한 거다."
그 말에 당장 안심하는 자신이 조금은 싫었다. 뒤늦게나마 마주 웃었다.
"그런 걸까?"
너는 언제나 옳은 말을 하니까. 정말 자신이 네 말대로 옳은 일을 했노라고, 더 계산하지 않고 무작정 믿어버리고 싶었다. 제랄은 엘자의 손목을 놓았다. 어느덧 아까의 장소가 아닌, 근처 나무 곁으로 자리를 옮긴 후였다.
평상복으로 환장한 엘자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그를 본다. 자리를 옮긴 이유가 무어냐는 듯 묻는 것 같았다. 파악했으나, 답지 않게 제랄은 망설였다.
첫마디는 언제나 힘겨운 법이다.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
"…생각하진 못했어."
느릿느릿 말하는 제랄을 바라보던 엘자는, 이번엔 그가 먼저 제랄의 손을 붙잡았다. 더 흔들리지 말라고 지탱해주듯이.
"너무 너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지 마라."
뒷말을 잇는 데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자유로운 손으로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린 제랄은 엘자를 마주보았다.
"결국엔… 욕심이 들더라, 엘자."
그 말을 그에게 한다는 것 자체가, 그 욕심이 엘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소리였다. 엘자는 신중하게 제랄을 들여다봤다. 긴장한 입매며 종종 떨리는 눈빛.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미약하게 움찔대는 손가락.
……어? 이거…….
설마?
순간 그런 상상을 가져버리고 만 엘자의 입매가 뒤틀렸다. 사고가 마무리 진 지금은 화창한 오후였다. 선명한 햇살 아래 감춰질 곳이라고 해봤자 지금 들어선 나무 그늘 뿐. 발갛게 달아올랐던 그의 뺨을 그늘 때문에라도, 제랄이 제대로 바라보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엘자가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숨을 들이켰다.
"무, 무슨… 욕심?"
아니겠지. 대마투연무가 시작되기 전, 해변에서의 때를 제외하곤 그런 분위기를 가진 적이 없으니. 이번에도 착각일 것이라며 엘자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는 너를 사랑했고, 사랑한다. 그러나 너는 나를 앞으로 사랑하기'만' 할 것이다. 그러기만 할 것이라고… 엘자는 여지껏 생각해 왔다. 애매하게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던 분위기를 그렇게 견뎌왔다. 견뎌오다 지쳐 미라와 카나의 소개로 사태가 이렇게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그래, 제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를 앞으로 사랑하기'만' 할 것이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것은 지금껏 존중이라 이름을 붙여왔지만 제랄은 사실 알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 그것은 회피였다. 미처 엘자를 향한 사랑을 끊어낼 수가 없었기에 '약혼자가 있다'는 애매한 말로 관계를 뒤로 하고 도망쳐나온 것이다. 자신이 그 이후를 감당할 수 없는 죄인이었으니까.
그러나 제랄은… 엘자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엘자가 자신에게 가지는 감정의 이름이 자신이 그에게 가지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다. 고로 그가 진정 엘자를 위했다면, 애매한 핑계를 대지 않고 확실히 끊어냈어야 함이 맞았다.
결국 그는 그런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애매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이었다. 너는 정말 이런 날 사랑해? 그리 묻고싶은 심정이 불쑥 솟아올랐지만 정말 물어볼 순 없었다.
해야할 것은 지난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닌, 앞으로 나아가는 것.
"살아가고 싶다는… 욕심 말이야."
그제야 제랄은 마음을 놓고 웃을 수 있었다. 자. 이로써 엘자를 놓아줄 기회가 끝이 났다.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으니 이제 답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괜히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어 대신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오늘따라 큰 심장소리가 몸을 울리고 있었다. 그의 말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엘자의 얼굴을 마주보니, 괜히 긴장감에 머리 속이 엉키는 기분이 들었다.
"여왕에게서 은사를 받았어."
"제랄…."
"평생 내 속죄는 끝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 끝나지 않는 건 맞겠지. 하지만 고작 그거 하나 가지고…."
…욕심이 나서. 중얼거리며, 제랄의 엄지 손가락이 엘자의 손등을 느리게 쓸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을 텐데, 너무도 유혹적인 의미로 전달되기 십상인 행동이었다. 기껏 마음을 진정시킨 엘자의 얼굴이 다시금 달아오른 것도 그 이유였다.
쿵, 쿵, 크게 뛰는 심장 소리를 더는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손등을 쓰는 행동의 의미, 말하는 내용의 목적을 짐작하는 데에도 이미 과부화된 머리는 힘겹게 돌아가고 있었다. 살짝 떨어뜨렸던 고개를 들어 그가 제랄을 봤다.
"그럼, 네가 하려는 말은…."
누군가 마른 침을 삼켰다. 엘자의 말에 제랄은 더디 맞잡은 손을 당기기 시작했다. 손을 빼내려면 충분히 빼낼 수 있을 힘이었다. 피하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을 속도였다. 그렇게 그는 천천히…….
엘자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크게 뛰는 심장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솨아아, 옅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그 심정을 대변하듯 술렁이는 소리를 냈다. 손바닥 안에 땀이 차는 것 같았다. 제랄이 맞잡지 않은 손으로 엘자의 등을 둘러 안았다. 엘자는 지금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좀처럼 구분하기가 어려워 어지러움을 느꼈다.
"내 속죄는 끝나지 않을 거야. 앞으로 또 이런 날이 올지도 몰라. 그땐 정말 용서받지 못할지도 모르지…."
떨림을 애써 억누른 음성이다.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를 들으니 요동치던 엘자의 심장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의 한쪽 손이 제랄의 등을 느린 손길로 둘러 안았다.
"그래도 살아가야지만 내 죄를 씻을 수 있고, 그것에 내가 살고 싶다는 욕망을 조금이라도 편승시킬 수 있다면,"
제랄이 숨을 들이켰다. 끝내 고해하듯 말했다.
"……너를 사랑하는 것만큼은 자유롭고 싶어."
그에 엘자의 손 끝에 구부러지듯 힘이 실렸다. 크게 뜨인 눈이 곧 감기고, 얼굴 위로 미소가 그려진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어딘가 고장이라도 난 게 틀림 없었다. 놀라기보다도 기쁘다. 여태껏 남몰래 마음을 앓던 순간이 아쉽거나 헛된 시간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보상받았다는 심상이, 그저 하염없이 벅차오르는 마음이 앞서는 게 이상했다.
많은 감정이 억눌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변했구나, 제랄."
제랄이 더욱 깊게 엘자를 끌어안았다.
"네 덕분이야, 엘자."
엇갈린 시간이 이제서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른 감상은 없었다.
지금만큼은 당장의 감정을 만끽하고 싶었다.
* * *
"왜 죽으려 했어?"
얼추 치료가 끝나자마자 돌아온 말이 이런 것들 뿐이라니. 라티오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에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려 덮었다. 그마저도 바로 우악스러운 손길에 끌어내려졌지만.
얼핏 마주한 길드원-베니의 얼굴은 충격과 배신감에 차 있었다. 그를 보고 나니… 라티오는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지르려 했는지, 어렴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착잡한 손길이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
"……미안."
"내가 사과하라고 했어? 이유를 묻는 거잖아, 이유를!"
라티오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럼 무어라 말해야 할까. 아이 사냥으로 인해 가족들이 다 죽어버린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은 거기서 벗어나올 수 없었다고?
그런 심정이야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 모인 모두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라티오는 변명을 중얼거렸다.
"너희들이라면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나봐."
그 말에 베니와 더불어 다른 두 길드원도 함께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의 마음을 파괴하면서까지 복수에 골몰하던, 골몰해야지만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던 나날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들은 베니가 조금씩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어? 그것에 라티오가 바보같은 소리를 흘리며, 상체를 벌떡 일으켜세웠다. 눈물을 훔칠 생각도 없이 베니가 중얼거렸다.
"다음부턴 이러지 마. 막상, 직접 보니까 너무 괴로웠어."
그 말에 베니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던 테이즐이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안 하는 게 낫겠더군요. 그런 방법은. ……솔직히 심장이 저 밑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목적만을 같이 하기 위해 모인 인연인데. 어쩌다 우린 이렇게 서로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나. 라티오는 자신의 행동들에 길드원들을 하나하나 투영해보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자리에 털썩 드러누웠다.
확실히 존중해주기가 어렵네. 그런 방식은.
라티오가 머뭇거리다 입술을 열었다. 얘들아.
"……우린 길을 잘못 걸어온 걸까?"
누군가 먼저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다급한 얼굴의 길드원 하나가 라티오를 찾았다. 마스터, 그게.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당장… 내려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직감한 라티오는 기껏 다시 누운 것이 무색하게도 몸을 일으켰다. 곁에 있는 길드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돌아보다, 겉옷을 걸쳐 입는다.
그가 앞을 바라보았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러겠네. 누구시래? 예상은 가지만."
입술을 꾹 깨문 길드원의 낯빛은 이미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평의회에서…… 왔습니다."
결국엔 살고야 말았으니, 남은 건 죗값을 마주하는 일 뿐인가.
복수는 한동안 접어야할지도 모르겠다. 라티오는 덤덤히 생각했다. 그래…. 내뱉는 음성은 텁텁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흔들리지 않는 미소로, 제 길드원들을 돌아보는 것 뿐이었다.
"나 다녀올게."
* ^_^... 다음 화는 에필로그가 될 것 같네요 바라기로는 제랄엘자의 꽁냥대는 부분을 일단 좀 더 넣어보는 걸로,,, 사랑이 성사되는 과정까지는 잘 쓰는데 막상 이후는 뭔가 잘 안써지네요,,, 얘네가 원작에서 꽁냥을 안 해대서 캐붕같아서 못 쓰는 걸지도 모름 근데 이렇게 생각하니까 좀 짜증나네 하,,,.
* 솔직히 제랄이 진짜 사랑 접고 엘자만을 위한 ,, 선택을 하려 했다면,,, 약혼자같은 어설픈 변명 말고 확실하게 엘자 끊어냇어야 봣다고 봄 그러지 못햇던 건 결국 제랄도 엘자를 사랑해서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런,, 욕심이 반영돼서 약혼자 드립이 나온 게 아닐지??? 그냥 일케 생각하고 싶을 뿐 ()
* 아휴,,, 사상대립 적는거 어렵네요 창작이고 자기만족용이니까 논리 구멍은 봐주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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