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제랄 페르난데스."
검격으로 일던 연기바람은 가라앉았고, 곧 섬뜩한 정적이 시작되는 성 싶었다. 엘자를 막아선 제랄을 바라보던 그가 폭소하지만 않았더라면.
아하하! 하, 하하…. 그의 웃음이 저물어감에 따라 엘자는 정신을 차리고 검을 되잡아, 일어섰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각오하고 이 자리에 선 거야."
어느덧 그의 옆에 선 엘자가 하는 말에 제랄이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그래? 사람에게… 그게 가능하던가? 제랄의 속삭임에 엘자 또한 입을 다물었다.
사람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생존본능을 저버릴 수 있는 것은. 그것을 거스를 수 있는 이유는 필사의 각오이기 이전에, 그의 이성을 좀먹고 있는 마검의 영향이 컸을 테다. 라티오의 왼손은 검을 쥔 부분부터 침식당해, 이미 그 위로 새까만 핏줄이 돋아나고 있었다. 직전 목격했을 때보다 범위가 크다. 완전한 침식까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다.
둘은 기감을 곤두세우며 웃음을 뚝 멈추고 고개 숙인 채 멈춰 선 라티오를 바라보았다. 아직 이성이 있는 상태인가? 이미 잡아먹혔나. 차갑게 돌아가는 머리는 상대의 상태를 확실히 관측하라 이르고 있었다.
엘자는 제랄이 이 자리에 오게 된 경위를 묻지 않았다. 제랄도, 엘자의 상태를 묻지 않는다. 서로의 곁을 지키며 적에게 집중한다. 남자는 여자를 지켜주었고, 여자는 다시 일어서 검을 쥐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가만히 있던 라티오가 입을 열었다.
"엘자 씨를 지키려 오신 건가요?"
그의 얼굴이나 목덜미에는 이미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직 마검과 싸우는 중이군. 이성이 남아있는 상태다. 하지만 엘자는 그것에 되려 입 안이 써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이성을 좀먹고 있는 마검 이전에, '지금' 그의 정신을 붙들고 있는 건 그 개인의 의지였기에. 언제나 그런 상대에게는 자신 또한 필사의 각오로 임하는 엘자였으나, 지금은 그 경우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어느 순간에서도 망설이지 않았던 엘자 스칼렛은 적이 스스로 죽길 택한 이 순간 최초로 흔들렸다.
다만 제랄이 말했다.
"…널 막으러 왔다. 라티오 데누마."
죄악을 마주보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 그것에 균열이 일던 엘자의 마음이 빠르게 다잡혔다.
눈을 크게 뜬 라티오는 곧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자격으로?"
멈췄던 시간이 움직인다. 큭, 제랄이 헛숨을 들이키며 마법 위를 파고든 마검을 바라봤다. 그의 천체 마법이 검날 아래 깨져가고 있었다. 마법을, 물리적으로 베어낸다? 천일신의 갑옷을 제외하고 그런 무기를 본 적은 없었다. 그의 마법이 다 깨져나가기 직전 보인 틈에서 엘자의 공격이 라티오를 향했으나, 손쉽게 그것을 피해낸 라티오는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또 치열한 공격을 주고받는다.
"죄악은 언젠가, 그 값을 치루게 만들죠. …설마. 고작 감옥에 갇혔던 것으로 속죄가 전부 끝난다 생각하는, 건가요?"
페어리테일이 해체되었을 때 향할 곳이 없어졌던 엘자는 크림 소르시엘과 동행한 적이 있었고, 그때 그들은 몇 번이고 합을 맞췄다. 그때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는지, 엘자와 제랄의 연계로 라티오는 확실히 밀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구뇌성九雷星에 이은 홍앵의 궤적에서 벗어나지 못한 라티오의 왼팔이 피로 덮였다. 큭! 라티오가 튀는 소리를 삼켰다. 그러나 그의 마검은 허공에 튀는 핏방울마저 남기질 않았다. 오히려 라티오의 체력이 떨어져갈수록 그의 공격은 예리해졌고, 사나워졌으며, 거침없어졌다.
허덕이면서도 라티오는 무너지지 않았다. 상대의 마검에 잡아먹힌 마력 탓에 엘자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엘자에게 향하는 공격을 방어연금진으로 막아낸 제랄은 몸에 황금빛을 두르고, 가속했다. 그 사각을 경계하듯 허공에 띄워진 엘자의 검이 날을 세웠다.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럼 왜 날 막죠?"
"죄없는 자들에게까지 형벌이 주어지니까."
"그들은 죄가 없지 않아요, 제랄 씨."
눈으로 보고 육체로 피할 수 없는 제랄의 속도를, 그는 검의 힘을 빌려 피해내고 있었다. 마검이 제랄의 팔뚝을 얕게 스쳤다. 집요하게 달라붙는, 핏줄을 닮은 검의 의지. 피와 마력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접촉하지 않고 제압하려 하니 시간은 점점 더 지체되고 있었다.
틈을 노려 검을 휘두른 엘자가 한 번의 휘두름으로 공간 저 끝까지 튕겨져나가고, 검 끝은 아슬아슬하게 제랄의 머리를 피해갔다. 잘려 떨어지는 푸른 머리카락 일부에 제랄이 숨을 들이켰다.
"엘자 씨도 제게 시인했어요, 방관은 죄라고, 그러니 당신 이전에 자신을 먼저 벌하라고… 하!"
실소한 라티오가 비틀거렸다. 점점 비대해지는 검의 몸체에 균형이 기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랄이 입에 고인 피를 뱉으며 그 앞에 섰다.
"촌극이라도 하자는 겁니까?"
"…네가 죽인 이들 중 무고한 사람이 정말 한 명도 없었다 단언할 수 있겠나? 라티오. 그건 새로운 죄다. 널…."
제랄이 망설였다.
"더한 어둠에 끌고 가는…."
"─지금 날, 동정하는 겁니까?"
큭, 날카로운 마력이 그를 중심으로 한 차례 퍼져나갔다. 콰직, 그가 만들어낸 공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엘자가 혀를 찼다. 이게 깨지기라도 하면 민간에 피해가 갈 텐데. 같은 생각을 한 제랄이 엘자를 바라보았다. 주변을 지켜줘. 눈짓에 담긴 의미를 파악한 엘자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멈출 수 있어. 더한 어둠으로 향하지 마. 그 말은 지금, 어둠의 길을 벗어날 수 있게 된 제랄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폭주하기 시작하는 라티오를 마주하는 제랄은 과거의 죄가 또다시 그의 목을 졸라오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죽을까도 생각했었다. 살 자신이 들지 않았다.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모두 버렸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너무도 끔찍한 것으로 느껴져, 그의 생살권을 차라리 엘자에게 쥐어주려 했다.
그때 그는 제랄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음으로는 속죄할 수 없으며,
살아야지만 죄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고.
그렇게 마주하는 것이 지금이었다. 괴로웠다. 은사를 받게 되면 당당히 죄를 벗어던지고 이젠, 자유롭게 사람을 사랑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는 그의 죗값으로 죽음을 원했고,
동시에 죄 없는 자들까지의 죽음을 원하고 있었다.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가 징벌자로 거듭나 새로운 피해자를 일궈내고 있었다. 애초에 그럴 권리는 누구로부터 올 수 있지? 탑의 주인이었던 제랄으로선 라티오를 막을 수 없었다. 크림 소르시엘의 마스터로선 라티오를 막아야 했다. 정의내리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말로는 그 무엇도 증명할 수 없어요."
"날… 죽이고 싶어하는 심정을 이해한다."
살아가고 싶다. 행복해지고 싶다. 그런 감정은 마크를 새긴 뒤 다 내려놓은 줄 알았는데. 제랄이 헛웃음을 삼켰다.
"그러나 네가, 만약."
꽉 쥔 주먹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멈추지… 않겠다면."
"않겠다면?"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감았던 눈을 뜬 제랄은 라티오를 마주 보았다.
"내가 널 막겠다."
…그것은 겨우 죄를 벗어던질 수 있었던 제랄 페르난데스가 새롭게 죄를 업겠다는 말과도 같았다. 속죄의 기회를 저버리고, 단지 과거의 그와 같았던 라티오를 전력으로 막아내기 위해. 동시에 그를 막아 살려내기 위해.
처음 선언했던 목적은 변하지 않았다.
엘자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라티오 데누마. 그를 막아서기 위해 그가 이곳에 왔다. 라티오는 그와 같은 죄를 이미 저지르고 말았다. 그가 여기서 죽게 된다면 그는 영영 속죄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살아야지만, 죄를 갚을 수 있다.
그러니 살릴 것이다.
* * *
엘자 씨의 검이 균열 근처에 박혀 있었다. 마력이 담긴 검. 더이상 공간이 깨져나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는 것이겠지. 아까도 민간인부터 챙기시더니… 그러고보면. 어느 순간부터 난 제랄 씨랑만 싸우고 있었지. 바닥에 쓰러진 라티오가 작게 쿨럭였다.
머리가 멍했다. 숨이 거칠다. 흐려진 정신 가운데 마검은 계속해서 말을 걸어온다. 이봐, 고작 이 정도였어? 네 각오는 이것밖에 안 됐던 거냐?
일어서, 일어서서 죽여. 내가 힘을 빌려주고 있잖아.
라티오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닥쳐, 머저리야. 네가 힘을 빌려줬는데도 이렇게 졌잖아.
……왜 그는 제랄 페르난데스에게 졌지? 힘겹게 돌아가는 머리가 그 답을 요했다. 마검은 그의 생명을 내어준 댓가로 그에게 힘을 주었다. 그가 더 빨랐다. 그가 더 강했고, 더 처절했다.
그런데 왜 졌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라티오의 눈이 힘없이 제랄을 향했다. 곳곳이 흙먼지며 핏방울로 더러워져 있었지만 제랄은 흔들림 없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 이제 죽이려는 건가? 솔직히 그는 제랄이 했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누굴 동정해, 감히? 이건 내가 선택한 내 길이다. 죽은 가족들의 원을 갚을 유일한 길이다. 빛을 동경하면서도 어둠으로 온 그가 맞이해야 할 마땅한 최후였다. 같은 어둠에 있다면.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분명히.
하지만.
……제랄 페르난데스는 쓰러진 그를 끝내지 않았다.
그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아. 알겠다. 그런 사과라도 해서 조금이라도 본인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고 싶은 거다. 끝없이 등 뒤를 따라오는 그림자같은 악몽에서 하룻밤이라도 벗어나고 싶어서,
어느덧 그의 근처로 다가온 엘자가 말했다.
"그게 아니다, 라티오."
아니라고? …그럼 뭐지. 그럼 뭔데요, 엘자 씨? 소진된 체력, 빼앗긴 생명력. 말할 기력도 없어 라티오는 간간이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그가 만들어낸 공간은 이미 다 사라져, 엘자와 함께 걸었던 수목원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날이 흐리지 않아 구름을 벗어난 햇빛이 그의 얼굴 가로 비춰들었다. 눈이 부셔서 눈을 감았다.
엘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라티오의 손을,
여전히 마검과 융합되어 있는 왼손 위를 겹쳐잡았다. 단숨에 엘자의 손을 타고 마검의 탐욕이 타고 올랐다. 그 모습에 라티오가 숨을 크게 들이키며 어깨를 움찔거렸다. 힘겹게 외쳤다.
"엘자, 씨…. 그만……!"
여자는 손을 떼지 않았다. 그 아래에서 애써 라티오의 왼손만 발버둥 칠 뿐이었다. 그마저도 그가 힘을 주면 잠잠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손……을,"
"제랄은 자신을 위해 사과하는 게 아니다."
"……."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아. 용서받고 싶어서 사과하는 것도 아니야."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라티오는 동요하는 눈을 숨기지도 못했다. 엘자의 말을 이은 것은 제랄이었다.
"날 향한 증오로라도 계속 살아라, 라티오. 죽으면 끝이다. 죽으면, 모든 게…."
"…슨… 얘길……."
"행복해지길 포기하지 마."
"……."
그런 라티오를 향해 엘자가 얼굴을 찌푸리듯 웃었다.
"살아라. 라티오."
원수의 말에. 구원받은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살아가도 된다고? 내가? 아무 생소하고 낯선 것을 전해들은 기분이 들었다. 그 애는 고된 노동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병마에 그만…. …그 날로부터 라티오 데누마는 죽은 가족들에 발 묶인 삶을 살아갔다. 과거에 얽매여 분노와 고통을 통제하지 못해 끝내 복수심으로 타오르는 남자가 되었다. 복수가 아니고서야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
그래, 멈추고 싶었다. 사람을 죽여갈수록 황폐해지는 마음에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기분이 들어, 예전 그가 밟고 서 있었던 빛의 길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지만 이제 그가 생심코 돌아갈 수 있겠냐고 몇 번이고 직접 되뇌이던 나날들이 있었다.
이제 와서 그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는 이미 수라修羅였다. 살인자였다. 그러니 그 죗값으로 스스로 파멸하길 선택했건만.
"죽음으로는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어."
제랄이 확언했다. 그때 엘자는 제랄에게 그렇게 말했다. 죽음으로는 속죄할 수 없으며 살아야지만, 죄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고. 제랄은, 이제 엘자와 함께 라티오의 왼손에서 마검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빼앗기는 피와 마력에도 그 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더 흔들리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라티오는… 엘자의 옆에 있는 제랄을 바라보았다.
어둠을 벗어나 빛으로 향하고 있다. 어둠에 잠겨죽길 택했던 라티오. 그와 다르게.
"…그만…해."
"큭, 떨어지지 않아."
"…생각보다 깊은 곳까지 침투해 있어…."
라티오가 소리쳤다. 그만해. 그만. 그만,
내가 살아서 죗값을 치르게 하지 말아줘!
"─그,만…!"
그 순간 커억, 라티오의 몸이 크게 접히더니 왼손이, 마검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제랄, 뒤로 물러나! 주변으로 퍼지는 사악한 마력과 먹잇감을 찾아 맴도는 촉수같은 것들에 제랄이 침음했다.
이미 늦어있었나? 절망을 닮은 감정이 마음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가 주변을 보호하는 마법을 두르는 사이 엘자는 이미 그 가운데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검이 뻗어져나오는 촉수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포기하지 마, 정신 차려!"
"엘자, 위험해!"
"포기하지 마, 라티오 데누마!"
검은 촉수는 라티오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으므로 그 목소리는 마치 꿈결에서나 들려오는 것처럼 아주 멀리 있었고, 또 뭉그러져 있었다.
복수가 끝난 뒤에도 살아가리란 생각은 한 적 없었다. 언젠가 자신도 자신이 죽인 사람들처럼 죽겠거니, 손을 놓아버린지 오래였다.
그런데 살라고? …이 죗값을 살아서 치르라고?
이때에서야 처음으로 라티오는 자신이 벌인 짓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아니, 후회했나? 모르겠다. 그저 그 미래가 막연히 두려웠고, 그것을 피하고 싶었고, 아예 모르는 척 하고 싶었다.
그래. 그는 죽음으로 그의 죄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눈을 떠!"
이대로 영영 눈을 감아버린다면 편할 텐데 말이다. 죽은 가족들과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고. 아니. 아닌가? 난 더러운 살인자니까 무고한 우리 가족과는 다른 곳으로 갈까?
"죽음을 각오한다는 건 절대 강한 게 아니야,"
그냥 다 놓아버리고 만다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강함이야!"
……깜깜해지는 시야 가운데, 라티오가 흐리게 웃으며 생각했다.
당신은 어떻게…….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다시 눈을 뜰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다시 눈뜨게 했다.
"─이, 바보 마스터가!!!"
투명한 상자같은 마법이 그의 몸을 가뒀고, 그 안에서 그의 '시간'은 멈추었다. 라티오는 그 마법을 사용한 마도사를 알고 있었다.
그 안으로 그를 지배하고 있던 마검이 그의 몸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다. 라티오는 이 마법을 사용한 마도사도 알고 있었다.
분리된 마검은 곧 새카만 '공간' 안에 먹혀 봉인되었다. 라티오는 이런 마법을 사용한 마도사까지도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그가 세운 팔수스 길드의 마도사들이 사용하는 마법들이었으니까. 눈을 뜬 라티오가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마도사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베…니, 브리드, 테이즐……."
베니라고 불린 여성 마도사는 거의 울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단숨에 그의 옆까지 달려온 그는,
"야, 너 진짜 죽을래!"
"컥!"
"베, 베니! 마스터 목숨줄을 그렇게 조이면!"
"진정, 진정하십쇼. 아니 무슨 힘이 이렇게…!"
다짜고짜 쓰러진 라티오의 멱살을 잡아 흔들기 시작했다. 그가 동료들의 제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외쳤다.
"안 쓰겠다고 약속 했잖아! 누가 죽으랬어? 다짜고짜 죽어버리겠어?! 죽일 거면 죽이지 왜 네가 죽는데!"
팔수스 길드에 속한 마도사 셋이 단숨에 라티오를 둘러싼 것을 바라보던 엘자는 숨을 고르며 검을 역소환했다. 저들은… 중얼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길래. 데려왔지."
"그레이."
어느덧 쥬비아, 멜디와 함께 합류해있던 그레이였다. 쥬비아와 멜디는 각자 엘자와 제랄의 몸 상태를 걱정했지만 이전 전투와 비교했을 때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었어? 그리 묻는 그레이 옆에서 쥬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주변이 부서지거나 하진 않아서 다행이지만…. 시말서를 걱정하는 것이 여실한 음성에 괜히 찔린 엘자가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지? 시작하기 어려운 첫마디에 엘자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건…. 그 희미한 음성을 끊으며 누군가 말했다.
"─사실… 알고 있었어요."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겨우 폭주를 멈출 수 있었던 라티오였다. 엘자가 동료들 틈에서 걸어나와 그에게로 왔다.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팔수스 길드원들의 마법으로 폭주는 멈춘 것 같지만, 빼앗긴 기력은 되찾을 수 없을 텐데 말이다.
팔수스 길드원의 부축으로 겨우 상체를 일으킨 라티오는 잠시 다른 곳을 보다, 엘자를 바라보았다.
"누이가 죽은 건 결국 이 자리에 있는 누구의 죄도 아니었단 걸."
"……라티오."
엘자의 곁으로 제랄이 걸어나왔다.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것을 마주하는 라티오의 심정도 마찬가지로 복잡했지만, 라티오는 힘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라치오 데누마, 그의 누이는 노동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제랄 페르난데스가 누이와 같은, 수감자 위치였던 시절에.
"져버렸네요. 확실하게."
"……."
"왜 내가 졌을까요?"
그러나 지나간 것을 되묻는 것은 의미없는 행위임을 알았다.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라티오는 엘자를 봤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나요?"
주먹을 한 번 꾹 쥔 엘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나 자신은 약해. 언제나 약했다. …항상 날 지탱해주고 지켜줬던 건 내 동료들이었다."
동료들. 엘자를 향하고 있던 라티오의 고개가 천천히 앞으로 기울었다. 정말, 남은 기력마저 다 소진된 까닭이겠다.
서서히 정신을 잃어가며, 그 직전 라티오가 중얼거렸다.
동료들.
……그런가.
가는 웃음이 그려졌던 것 같았다.
이내 완전히 쓰러진 라티오를 추스른 팔수스의 길드원, 베니와 브리드, 테이즐이라 불린 세 명의 마도사는 라티오를 데리고 돌아가려 했다.
"…할 말이… 있다."
그들을 불러세운 제랄이 아니었더라면 마저 몸을 돌렸을 것이다.
제랄은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불안감? 초조함? 자세히 정의내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속죄를 위해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고, 그 대상이 눈앞에 있었다.
낙원의 탑이 피워낸 희생양들.
"그러니까… 미,"
"감사합니다."
그 중 한 명이 제랄의 앞에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죽으려던 마스터를 말려주신 건 당신들이겠죠."
제랄의 눈에 주먹을 꽉 쥔 남자의 손이 들어왔다. 분노와 증오를 잊은 것이 아니다. 단지.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지 그것을 억누를 수 있을 정도로 동료의 생환에 감격할 뿐.
제랄은 저 멀리 사라지는 팔수스 길드의 모습을 바라보다 엘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눈을 뜬 라티오는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속죄의 길은 험하기 짝이 없겠으나 그럼에도,
살다보면 언젠가 행복해질 수 있다.
눈에 붉은 머리카락이 비쳐들었다. 세상 곳곳을 내리쬐는 햇빛. 이는 바람에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수목원의 꽃잎들.
아름다운 광경 가운데 제랄은 불현듯 엘자의 손목을 쥐었다. 앞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제랄을 향했다.
충동이 일어 뱉었다.
"할 말이 있어, 엘자."
* 아마 다음 편이 진짜? 진짜 마지막 아마도... 뭔가.. 감정선을 끊을 수 없어서 휘리릭 써버리고 말았는데 라티오의 감정 변화는 아래와 같습니다.
* 엘자 만나기 전
가족들 죽음 > 죽은 자들을 대신해 내가 복수해주겠어! > 하지만 살인을 하면서 나도 망가지는 것 같은데 멈추고 싶다... 근데 이제와서 멈추는 건 말도 안되겠지?ㅠ > 나는 복수라는 명목으로 새로운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죗값도 언젠가 나에게 돌아오겠지? > 하지만 난 죽은 사람들을 대신해줘야 해. 나만이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내가 망가지기 전 제랄 페르난데스만큼은...
* 엘자&제랄이랑 싸우면서
엘자 씨를 만날수록 점점 더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더 강해져. 그러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끝을 내야겠다. > 제랄을 만남 >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설교질하려는 거?? 진짜 어이없네 무고한 사람이 아예 없었을 것 같냐고? 당연히 있겠지... 그러니까 내가 죽음을 각오하고 이렇게 싸우는 거아니야 > 그런데 내가 왜 졌지...? 진짜 이상하네 이해가 안가네... > 그런데 왜 이 둘은 날 살리려는 거지? 난 이대로 죽어야 하는 게 맞는데 > 살아서 죗값을 치르라고? …살아서? 그건 너무. 너무 끔찍하지 않나? 이런 걸 어떻게 마주보라는 거야?! > 살았네... 그리고 나한텐 동료들이... 있었지.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
> ......살아야 하는 건가?
* 이런 느낌으로! 라티오도 자기가 새로운 가해자로 범죄자로 살인자로,,, 있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제랄의 감정선은... 다음 화에서 최대한 풀어보는 걸로. ,. . . . . . ,. ., . ,. ., ,. .,. .... . . . . . ....
* 아래는 보너스 +)
"……멜디. 아무래도 저희가 있는 거 까먹은 거 같죠?"
"그러게, 쥬비아. 근데 갑자기 여기서 고백이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저번에도 느꼈는데 제랄은 정말 분위기를 못 살리는구나…."
쥬비아와 멜디가 서로 속닥거렸다.
"…그런데 그레이 님? 무슨 생각 하세요?"
"아."
그러다 곁에서 생각에 빠져있는 그레이를 부른다. 그레이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느새 드러난 상체를 가릴 생각도 않고 말했다.
"아니. 엘자는 항상 본인이 약하다고 하는데…."
"앗."
"오."
"저걸 정말 약하다고 말해도 되는 건가 싶어서……."
…셋이 있는 자리에 침묵이 돌았다.
"…이만 우린 빠져주자, 쥬비아!"
"…그, 그래요. 그레이 님. 저희도 이만 가기로 하죠!"
"…그. 그러지 뭐. 큼. 아무튼 다른 녀석들한테도 알려주러 가야겠구만…!"
그들은 눈치껏 자리를 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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