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나무만 무성한 이 오래된 저택, 사시사철 메마른 땅, 빛 들지 않아 어두운 숲이 우리의 세계였다. 낡아빠진 소총이나 발리스타를 어깨에 걸치고 소복이 쌓인 눈밭 위를 헤칠 때면 이따금, 멀리서부터 동족을 부르는 늑대 울음소리가 들리곤 했다. 그래도 청년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유별나게 해가 빨리 지는 이 땅이었더래도, 산짐승들은 기이할 정도로 그에게 위해를 끼친 적이 없었다.
단지 안타까운 점은 오늘의 사냥이 고작 토끼 한 마리로 그쳤다는 점에 있었다. 저장해둔 식량이 있으니 한동안 괜찮겠지마는, 저주받은 저택에는 그의 동거인이 있었다. 먹을 입도 두 개라는 얘기였다. 내일은 더 이른 시간 대에 나와야 하려나. 매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침마다 저를 붙잡고 도통 놓아주질 않는 여잘 보면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꼴랑 토끼 한 마리를 들고, 옅은 등불에만 의존하여 숲길을 빠져나왔다. 본능인지, 아니면 그의 기억력이 좋은 건진 몰라도 돌아가는 길을 잊어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마, 후자는 아닐 테지만 말이다.
그의 기억은, 5개월 전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아. 아니다. 거진 반 년이 되어갔지. 이런 사고의 흐름도 그의 머리가 썩 특출나지 못하다는 말에 신빙성을 붙여주고 있었다. 어느덧 그가 저택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걸음을 빨리 한다.
첫 기억은 어째서인지, 자신을 보며 힘껏 눈물을 참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일 년 동안 겨울이 반 년을 훨씬 넘게 차지하는 땅이니까, 저택에는 마땅히 이렇다 할 꽃이 존재치 않았다. 뒷마당에 심어진 동백나무를 빼면 말이다. 여자는 딱 그 꽃잎만큼 새빨개져선 기어이 그의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었다.
그의 이름은 아이작 딜라이트, 여자, 이스피어 틸다의 약혼자라고 했다. 큰 사고를 당한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있길 어언 2년. 기적처럼 남자가 깨어났다고. 그러나 사고의 여파인지 뭔지, 기억을 죄 잃어버리고 만 것 같다고.
무릇 번성한 가문의 저택이라면 캄캄한 밤에도 주홍빛 빛들이 입구를 밝히고 있기 마련이었다. 다만 그들이 사는 이 저택에는 이렇다 할 사용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밤이면 직접 장작에 불을 지펴야 했고, 아침이면 직접 음식을 만들고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빨아야 했다. 아이작은 어둑어둑한 저택의 입구를 지나 1층의 창고에 사냥감을 보관하고, 또 장작으로 사용할 마른 나무토막들을 들어 계단을 올랐다.
여자의 가족은 온 나라를 휩쓴 전쟁에 휘말려 죽었다고 한다. 남자의 가족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러니 그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어쨌건 그가 자발적으로 이 숲을 나가려 들지 않는 한.
그들에게는 그들밖에 없었다.
저 복도 끝에서부터 연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문이 반쯤 열린 것을 확인한 아이작이 살포시 얼굴을 찌푸렸다. 다만 문을 열었다. 얼어붙은 뺨에 실내의 연한 온기가 끼쳤다. 여자를 부르기까지 망설임은 없었다.
"이스피어."
은은한 빛이 넘실대는 가운데 눈이 맞…는 일은 없었다. 최근 여자는 독한 열병에 걸렸다. 그가 오늘따라 더 숲을 돌아다니는 데 많은 시간을 소요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장작을 난로 곁에 내려둔다. 그리곤 반쯤 열려있었던 문을 확실히 닫았다. 아이작은 곧 침대에 반쯤 걸터앉아 손을 뻗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 그 근원을 헤집듯 그의 손가락이 잠든 이스피어의 입술 위를 스치다, 결국 살갗에 닿지도 못하고 떨어졌다. 아이작은 다른 손으로 한쪽 손을 감싸 쥐었다. 바깥의 온도가 떠나기엔 아직 일렀던 탓이었다.
부름에도 여자는 영 깨어나질 못했다. 아이작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스피어. …일어나 봐."
내가 나간 뒤로 잠만 잤을 거 아니야. 나직이 중얼대는 말엔 작은 가시도 없었다. 손끝만 간신히 땀에 젖은, 이스피어의 머리카락을 젖혔다. 그때에서야 감긴 눈이 파르르 떨렸던가. 긴 동면에서 깨어나듯 흐려진 시선만 아이작을 향했다. 잠 기운 때문인가. 열기운 때문인가. 둘 다 일수도.
"…아이, ……왔어? 언제…."
"금방. …저녁 빨리 준비해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아니면, 좀 씻고 싶어? 물 덥혀올…."
그때 아이작의 손등 위로 뜨거운, 뭔가가 올라온다. 하던 말을 잊어버린 아이작은 시선을 내렸다. 이스피어의 손이 그의 손등 위를 겹쳐 쥐고 있었다. 그의 몸은 아직도 실내의 열기로 녹지 않았다. 손을 뺄까, 하다 망설이던 그는 끝내 다른 손까지도, 이스피어의 이마 위로 올렸다. 열감기에 든 사람들은 이렇게 차가운 걸 찾나보다. 그런 생각으로. 머뭇거리다 이어 말한다. 다소 생뚱맞은 얘기로.
"그리고 나 나가면 문 제대로 닫고 다녀. 아까도 보니까 좀 열려 있던데."
"…실수였다고 말하면, 안 믿을 거면서."
"요즘 계속 그러잖아."
"아프다 보니 내 머리도 좀 나빠졌나 보지."
그 말을 할 때 이스피어의 시선은 그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남자가 느끼기에 그건 그냥, 여자의 습관이었다. 키 차이 때문인가. 아니면 그의 목 살갗에 우둘투둘한 부분이 있긴 한데 그 부분을 보고 있는 건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더래도.
느릿한 하품을 흘리던 이스피어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두통에 얼굴이 조금 일그러지긴 했어도.
"나, 씻고 싶은데. 온몸이 축축해. 찝찝하고…."
"시간 좀 걸려. 조금 더 누워있지 그래."
"그럼 너… 또 나가야 하네?"
"그래야지."
이스피어의 시선이 일시 밤 내려앉은 창문 바깥을 향했다.
"물 받아오면… 나 씻는 것 좀 도와줄래?"
아이작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겹쳐 잡은 이스피어의 손이 자그맣게 떨렸다.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여길뿐이다. 아이작은 담담하게 답한다.
"안 그래도 너 혼자 두면 욕조에서 기절할 것 같으니까."
그저 이럴 때마다 그의 얼굴에 미미하게 실망감이 스쳐 지나가는 게.
아이작에겐 못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 * *
"-아이작은 원래 안 이랬는데."
욕조에 거의 늘어지다 못해 하얀 김 폴폴 나는 물에 그의 머리가 잠기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결국 간단하게 겉옷을 벗고 이스피어와 함께 좁은 욕조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좁은' 욕조였던 까닭에 그는 이스피어를 자신의 위로 앉히고 뒤에서부터 그를 안았다. 이러면 액체처럼 또 흘러내리는 일은 없겠지. 팔 안쪽이며 맞닿는 부분에서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감촉은 한 구석으로 밀어둔다. 본격적으로 그의 언 몸도 함께 녹아내리는 기분이기야 했다.
이스피어가 열기운에 흐려진 이성으로 그렇게, 말하지만 않았더라도.
아이작은 잠시 침묵했다.
"'원래'가 뭔데?"
아이작의 어깨에 뒷목을 기대고, 고개를 한껏 젖힌 이스피어는 신음 섞인 숨을 파 터트렸다. 그러다 데굴 고개를 골려 사선으로 아이작을 올려다보며 하는 말이란.
"내 약혼자였던 아이작."
그래.
제정신이라면 그가 결코 내뱉지 않을 말 말이다.
속에서부터 뭔가가 끓어오르는 기분이 들었지만, 아이작은 참고 넘겼다. 물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몇 가닥을 옆으로 넘겨줄 뿐이다.
"지금의 나도… 네 약혼자야."
실수로 치부하기엔 그는 아이작이 깨어난 뒤로도 몇 번, 이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너는 날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거겠지.
'기억을 잃은 아이작 딜라이트는 기억을 잃기 전의 아이작 딜라이트가 아니다'라는, 그냥, 당연한 사실일 뿐인 그런 생각을. 가시처럼 마음 한 구석에 계속 꽂아두고 있다든가, 꺼끌거리는 모래알처럼 혀 밑에 계속 눌러두고 있다든가.
아이작은 이 정도에서 이스피어가 그만 눈치채고, 차라리 입을 다물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이번 열병은 또 얼마나 독한 모양인지. 어느덧 몸을 반쯤 돌린 이스피어가 아이작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손가락이 아이작의 목을, 그곳을 가로지르는 우둘투둘한 면을 매만졌다.
"아이작은… 원래 나랑 같이 안 씻어줬어. …부끄러움이 많아서…."
노곤노곤한 기분 탓인지 이스피어의 눈은 반쯤 감겨 있어 아이작의 눈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낯선 감정들이 아이작의 가슴을 답답하게 채우고 있었다. 모멸감? 괴로움? 불안감? 아이작은 아직 이것들을 정의 내릴 방도를 몰랐다.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만 조금 힘을 줄 뿐이다.
종종 이스피어는 손톱으로 목의 우둘투둘한 부분을 긁었다. 그 갉작대는 느낌이, 이스피어가 직접 그의 가슴을 후벼 파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아픈 건가. 모르겠다. 답답한 건 확실한 것 같은데.
뭐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이작은 그냥 입술을 다물었다.
눈치란 걸 상실해버린 이스피어는 중얼중얼 대며 계속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넌, 처음엔 나한테 존댓말을 썼었어. 그리고, 내가 조금만 장난쳐도 확, 붉어져선 도망치고. 내가 자꾸 외롭다는데 나랑 같이 자주지도 않고, 또…."
그 말을 들으며 아이작은 생각했다. 난 기억이 없으니까 이런 말투를 쓸 수도 있는 거잖아. 네 장난은 당황스럽긴 하지만 도망은 또 왜 가는데? 네가 외롭다는데 같이 자주지도 않는 그 남자는 좀, 아무리 나였다지만 얼간이 같아.
"그리고 언제는…."
"…."
"……아이작. 나 아파…."
무심코 팔에 더 힘이 들어갔던 모양이다.
아이작은 다급히 사과의 말을 중얼거리며 이스피어의 허리를 매만져주었다. 그러나 곧, 그는 무심코 위로를 찾는 사람처럼 이스피어의 어깨에 코를 박고, 등허리를 굽혔다.
"그렇지만…."
"…응?"
"……이 저택은 너무 춥잖아."
그는 변명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딱 붙어서 잘 수밖에 없지 않냐고. 사람은 없고, 너는 외롭고, 이곳은 춥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침묵하던 이스피어가 그의 목을 매만지던 행동을 멈추고, 양껏 머리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물이 식기 전엔 나가자. 속닥임과 함께.
* * *
저택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지하에 내려가지 않을 것.
거울을 들여오지 않을 것.
* * *
"슬슬 기름이 떨어졌어. 한 번… 숲을 나갈까 하는데."
그 말을 하며 아이작의 눈치를 살짝 살피던 것을, 그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래도 그는 충분히 많은 것을 묻지 않아 주었다. 자꾸만 번복되는 '기억을 잃지 않았던 아이작'과와의 비교하며, 악몽을 꿀 때마다 떠나지 말라며 아프도록 자신을 붙잡는 이스피어의 행동이며, 그의 손목 안쪽에 짙게 남은 흉터까지,
묻지 않고 있잖아.
그런데 넌 왜 자꾸 불안해하지?
"음, 난, 일단 혼자 나가고 싶긴 한데. 아무래도 네가 반대할 것 같으니까."
"…당연하지."
"그래, 뭐, 네가 생각하는 대로 숲엔 늑대도 있고, 아무튼 위험하긴 하니까. 너랑 같이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이스피어."
"…응?"
"내가 같이 안 갔으면 하는 것 같이 말하네. 너."
끔찍한 침묵이 흘렀다. 그것을 먼저 깨트리는 건 이스피어 쪽이었다.
"그럴 리가."
그러면 아이작은 대놓고 말하고 싶었다.
그 말을 하는 네가 얼마나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지. 넌.
끝내 이스피어는 아이작과 함께 저택과 숲을 벗어나야 했다. 작은 시장이 형성된 민가까지 내려오는 덴 제법 시간이 걸렸고.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거리로 나오기 전, 이스피어는 단단히 아이작의 외투를 둘러 입히며 당부했다.
"답답해도 로브 벗으면 안 돼."
"추우니까?"
"바보. …춥기도 추우니까 그냥 입어. 우리 둘 다 뺨 다 얼었으니까. 봐."
이스피어의 손이 아이작의 뺨으로 닿을 때, 아이작은 그 행동을 모방하듯 이스피어의 뺨 위로 제 손을 올렸다.
차가움도 옮겨 붙을 수 있구나. 새삼스러운 것을 배우는 통에 아이작의 눈이 조금 가라앉는다.
"우릴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그러면 그냥, 모르는 척 해. 되도록 얼굴 보지 말고."
"…이스피어."
호명하자 아이작의 손에서부터 또다시 떨림이 느껴졌다. 또다시 이스피어가, 눈빛에 불안을 품는다.
"왜?"
"나, 무슨 범죄자라도 돼?"
그래도 아이작 딴에선 제법 깊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물은 말이었다. 이스피어는 그가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서 이름이나 죽은 가족, 뭐, 약혼자의 지위, 쑥맥같았음, 이런 정보만 얘기해줬으니까.
폐망한 저택에서 사는 청년 둘. 되도록 숲 안에 숨어 살고, 이렇게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와도 이스피어는 자신을 숨기기에 급급했으니까. 그래. 차라리 아이작이 범죄자라서… 그것을 숨기려고 숨어 산다면 앞뒤가 나름 들어맞질 않았나.
이유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심증일 뿐이나 그는 간혹 꿈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들었고, 기억도 없었으면서 소총을 다루는 스스로의 몸짓에서 익숙함을 느꼈고, 또, 그의 몸엔 흉터가 제법 많았으니까. 그것들은 이스피어가 말한 '큰 사고'에 해당되기 어려운 종류의 상처들이었다.
칼로 베이거나, 아니면 총탄에…….
아이작은 답을 요구하듯 이스피어를 바라보았다.
"…너 혼자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어?"
의외였던 건 이스피어의 입꼬리가 자그맣게 실룩거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웃음을 참는 것처럼.
잠깐. 웃음을 참는 것처럼? 아이작이 얼굴을 구겼다.
"너 왜 웃어?"
"…안. 안 웃었는데? 봐. 나 안 웃고 있어."
"참고 있잖아."
"아니야, 바보야!"
결국 아이작은 이스피어에게 어깨를 한 대 얻어맞았다.
"…참고 있었으면서."
그 중얼거림이 이스피어에게 닿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아무튼. 그런, 건 아니야. …근데."
"근데?"
다만 웃음을 참던 그 묘한 표정이 굳어감에 따라, 아이작의 심장도 조금 출렁였다.
"…비슷할 수는 있어. 범. 음. 범죄자랑."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돼, 피어."
"아냐. 진짜 아니라니까!"
그럼 뭔데? 그런 식으로 몇 번 더 실랑이가 이어졌다.
이스피어는 그때마다 계속 말꼬리를 흐렸다. 정확한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기름을 구매하고, 또 말린 육포나 간단한 저장 식량을 찾아다니던 때였다. 기름통을 든 아이작은 이스피어의 말을 따라 상가에서 조금 멀찌가니 서 있었다. 가격을 깎고 있는 건가? 이스피어와 상인의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따라 아이작의 신경도 조금씩 주변으로 분산되기 시작했다.
바로 옆 매대에는 반짝대는 장신구가 놓여 있었다. 머리핀도 있었고, 귀걸이나 목걸이, 반지 같은 것들. 투박한 디자인이 대다수였지만 그래도 왜 그렇게 눈에 들어왔던지. 아마 이스피어가 일상에서 빈번히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는 성격이었던 탓일지. 이스피어를 한 번, 매대를 한 번, 그렇게 고개를 몇 번 움직인 아이작의 발이 슬금슬금 장신구 쪽으로 옮겨갔다.
돈은 이스피어에게 있는데. 그래도 기왕이면 몰래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걸 어쩌지. 재차 이스피어를 바라봐도 그는 상인과 실랑이 중이었던지라, 이쪽으로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어 보였다.
사람들과 대화하지 말라고 했지. 그리고 얼굴을 보여줘도 안 된다고 했고. 아이작은 어느 정도 어중간한 거리를 유지하고 서서 흘끔흘끔, 장신구들을 훔쳐보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예비 도둑이라 생각해도 반박하기 어려운 모양새였다.
진주 귀걸이도 이스피어에겐 어울리겠지. 저 은색 목걸이도 이스피어의 목에 걸리면 낮이나 밤이나 반짝거릴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그가 쭉 매대를 훑어보았던 때였다.
제일 끄트머리에 있던 경鏡이 보였다. 각도가 잘 맞아서 그런지 본인의 눈과 마주쳐버린 아이작은 순간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나. 나인가? 그야 기억을 잃은 뒤 스스로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 낯설 법도 했다. 물론 몸이 기억하고 있는 모양인지 낯설지 않으면서도 이성으로는 낯선 이 기분은, 참 묘하다고밖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장신구 매대를 지키는 사람은 잠시 마실이라도 떠났는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홀린 사람처럼 아이작이 거울로 가까이 몸을 움직였다.
본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겨울날 달을 품은 것 같은, 밑으로 연한 노란빛이 감도는 은색 눈동자. 새카만 머리카락과 그 위로, 뭐지. 새치인가? 새하얀 머리카락 몇 가닥-이스피어는 매번 이걸 봤으면서 왜 말을 안 해줬지? 아이작은 속으로 불평했다-. 그래도 그는 처음 보는 제 얼굴이 그리 나쁘게만은 여겨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눈동자에 언뜻 보이는 노란빛이 이스피어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해서 말이다.
그렇게 천천히, 별생각 없이 그의 시선이 밑으로 내려갈 때였다. 목이 보였다.
그 위에,
목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긴 상처가 나 있었다. 어설프게 꿰맨 자국이 보였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기억나는 게 없었다. 그것이 마치, 이스피어가 그렇게 여기듯, '기억을 잃기 전의 아이작 딜라이트'와 '자신'이 아예 별개의 사람이 된 것처럼 여겨져서. 아이작은 찰나에 절망스러워졌다.
누군가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다급함에 찬 이스피어의 얼굴이 보였다. 자각하지 못한 채 아이작이 입을 벌렸다.
"이스피어,"
다만 물음이 이어지는 순간은 당장이 아니었다. 그가 급하게 아이작을 끌고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발을 옮겼다. 아이작은 무력하게 그에 따라갔다. 기름통을 다른 손에 들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점이었을까.
겨울바람에 휘날리는 이스피어의 머리카락을 보며, 아이작은 그저 생각했다.
이스피어, 이 상처는 뭐야? 이게 그 '큰 사고'에서 난 상처야? 그래서 매번 네 시선이 이곳을 향했던 건가? 그래서 네가 습관처럼 이 위를 만졌던 거야?
하지만, 그렇다기엔 이 꿰맨 자국이 목 전체에 나 있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마치……,
잘린 무언가를 억지로 기워붙인 것처럼.
한 번 물어보면 다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염없이 무너질 것 같아서, 떨어져 내릴 것 같아서,
둘만의 저택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렇게…….
... 프랑켄슈타인 느낌의 아이피어...
이스피어 가족은 아버지가 예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금지된 과학에 손을 대서 시체를,, 되살려내는 걸 연구했었고, 그 모습을 어릴 때 발견해버리고 만 이스피어는 깊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저택에서 좀 혼자 떠돌고 다니다가 시종이든 다른 집의 자제이든 아이작을 만나서 약혼자까지 되고... 어머니는 그 중간에 결국 연구를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심. 이스피어는 다행이라고 생각함. 어머니가 연구를 하겠답시고 몰래 구해온 시체도 지하실에 여럿 되고... 감당할 수 없어서 이스피어는 지하실을 폐쇄함.
아무튼 아이작이랑 약혼자도 되고 행복해질 일만 남았는데... 전쟁이 일어나버림...
아이작 끌려감...
아이작,,,
,,,
죽어서 돌아와버림...
..........................
이스피어는 시체로 돌아온 아이작을 묻지 못하고 결국 본인의 손으로 폐쇄했던 지하로 내려감... 이때부터 한 2년동안 어머니의 연구를 이어받아 아이작을 살리는 데 힘을 쏟게 되는데 중간에 어쩔 수 없이 이스피어도 시체를 따로 얻거나 하는 일도 있었고... 해서 저주받은 저택이라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아 전쟁의 여파+소문 등으로 시종들이 다 떠나서 죽은 아이작과 이스피어만 남음
이스피어는 결국 아이작을 살리는 데 성공함... 하지만 목을 기운 흔적이나 기억이 다 날아간 것이나 어쩔 수 없는 흉터-부작용은 남아버리고,,, 그 과정이 정말 만만치 않았던지라 이스피어도 지금 조금ㅋㅋ 광기 상태긴 하고 ㅋㅋ
하지만 아이작을 살려내긴 했는데 '이전'의 아이작과 다른 모습들-반말을 쓰고 부끄러움이 없고 등등-이 자꾸 눈에 밟히니까 여러가지로 죄악감과 불안감이나... 이런 게 사라질리가...
저택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지하에 내려가지 않을 것.
거울을 들여오지 않을 것.
지하로 내려가지 않을 것 = 연구의 흔적과 시체.. 가 있어서... 그래서 이 저택은 정말 죽은 자들의 저택임 솔직히 말해서 '완전히'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이스피어밖에 없어서 이스피어는 계속 혼자만의 외로움과 불안감과 기타등등에 사무칠듯
거울을 들여오지 않을 것 = 거울이 없는 저택에선 아이작이 스스로 목에 어떤 상처가 나 있는지 모르니까...
..........................................................................
암튼 이런식으로 개 파멸났으면 좋겠다
의외로 해피엔딩 날지도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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