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물단지도 못 되는 골칫덩이 공주는 별궁에 유폐돼 잊혀진 존재로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지. 듣기론 맨발로 풀잎을 짓이기고 풀물 든 옷을 수치심도 없이 입고 다닌다나봐. 미친 것이 분명해.
아니, 그런 소식이 중요한 게 아니야. 이것 들었어?
무얼.
바다 건너 있는 나라 콜키스에서 풍랑을 해치고 파도를 건너뛰어 한 상단이 도착했다니까! 한 몫 챙기려면 지금이 제일 중요하니 어서 뛰시게!
아니, 상단이라니, 그 나라와 우리 나라의 교류가 드디어 허락된 모양인가? 국왕께서도 깜짝 놀라셨겠군….
무슨 일이 벌어지든 오늘도 이 테살리아에 람(* 테살리아가 섬기는 태양신)의 자비가 가득 내려온다면…….
* * *
하얀 털실뭉치 하나가 어딘가로 팟팟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 정체는 실뭉치도 구름도 아닌 바로, 이 테실리아의 잊혀진 공주였다지만 말이다. 샤파시 람 테실리아-나라의 유일한 공주는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부여잡아 맨 다리를 드러낸 채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소문대로 풀잎 짓밟는 맨발, 더럽게 풀물이 든 하얀 옷. 그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은 여자는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공에 붕 뜬 발이 바닥에 내려앉을 때마다 하얀 옷이며 하얀 머리카락이 허공에 하늘하늘 휘날리고 있었다. 곧 사라질 그림자를 새겨놓기라도 하듯 하얀 꽃잎이 이따금 팔랑대며 바닥에 떨어졌다.
이윽고 숲을 벗어나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시녀들을 볼 생각에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잘끈 감으면서도 달아오른 가슴은 도통 진정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요정?”
실낱같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햇빛에 감았던 눈을 뜨고 앞으로 나아가던 몸을 멈추면 뚝, 반동에 꽃잎 몇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부스스 허공에서부터 등으로 가라앉는 머리카락, 구름이 햇빛을 가리는 그 때에 샤파시는 고개를 기울이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누구…?”
자신과 비슷한 색의 새하얀 머리카락이며 짙게 탄 피부색, 저녁 노을을 한가운데서 장식하는 태양빛으로 타오르는 눈동자. 자신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자는 장성한 사내였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으며, 테살리아의 통상적인 복장을 따르지 않는 이국적인 옷을 입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눈동자가 마주쳤을 때면 문득 가슴이 아릿한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 원인은 가쁘게 뛰어온 탓으로 치부해버렸다. 기이한 적막이며 대치를 깨트린 것은 사내의 물음이었다.
“시녀인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묘하게 찌푸려진 사내의 얼굴을 보다보면 샤파시는 본래의 목적이며 기묘한 감정, 치맛자락에 힘겹게 담아둔 꽃의 존재들을 죄 잊어버리고 말았다. 얼굴을 와그작 찌푸리며 맹랑하게 사내를 바라본다.
“시녀? 아니에요. 샤파시는 이 궁의 유일한 공주인걸요.”
‘궁’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초라하고 낡은, 소외된 곳에 위치한 건물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간소한 식사와 몇 안 되는 장신구, 귀한 신분임을 결코 증명하지 못하는 복식들에 샤파시가 불평이나 의문을 가졌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므로.
유폐된 궁, 폐위된 것이나 다름 없는 골칫덩이 공주. 대외적으로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것조차 모르는 샤파시를 바라보던 사내는 납득하지 못한 듯 얼굴을 더 구겼다. 그가 샤파시에게 더 가까이 걸어왔다.
“공주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는데.”
하지만 샤파시는 ‘공주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없다’는 말을 또 처음 들어보았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며 동시에 발등을 타고 그림자가 샤파시의 몸을 기어올랐다. 그림자에 잠기며 어깨를 쓰다듬는 오싹한 기분, 어깨를 떨면서도 공주는 물러서지 않았다. 입술이 댓발 나온 얼굴을 보면서도 사내는 단순히 꽃내음의 근원지를 찾듯 샤파시가 치맛자락에 담아둔 꽃들 위로 가볍게 시선을 내렸다.
곧 샤파시를 본다.
“이름이 뭐지?”
샤파시-람-테살리아는 댓발 튀어나온 입술을 집어넣지 않았다. 어딘가 불퉁한 기색으로 답할 뿐이다.
“…샤파시.”
그리고 공주는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남자와 더 상종하고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몸을 돌려 원래의 목적지를 향해 다시금 탓탓 뛰어갈 생각으로써 다리 근육을 긴장시켰지만,
그 앞을 태연히 가로막는 남자의 몸체가 있었다. 이번에는 샤파시도 남자를 마구마구 째려볼 수밖에 없었다.
“샤파시는 바빠서 가야 할 곳이 있는데요. 길을 잃은 거라면 다른 시종들한테 물어보세요!”
요리조리 퇴로를 찾아 몸을 좌우로 기울여대보지만 얄밉게도 남자는 거구였으므로, 딱히 몸을 기울이지 않고서도 효율적으로 공주의 진로를 방해할 수 있었다. 태연자약하게 팔짱을 끼는 모습은 제법 열받는 모습이기까지 했다.
“어딜 가는 거지? 왕을 암살하러 가기라도 하나? 자객이야?”
“…시녀들과 같이 놀 건데요. 내가 공준데, 아버지를 왜 암살해요?”
그런 실랑이는 몇 번을 반복했고, 기어이 “샤파시 좀 그만 귀찮게 해요!” 라는 소리가 터져나오고 나서야 샤파시는 시녀들에게로 성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한 세 걸음 걸어봤자 사내의 한 걸음에 손쉽게 잡아먹히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 남자는 이제 공주의 뒤를 졸졸 쫓아가고 있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거짓말일 수도 있지 않나?”
“거-짓-말-아니야! 샤파시는 이 나라의 유일한 공주야!”
“이 나라에 공주가 있단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어.”
“당신이 바보라서 모르는 거겠지!”
공주는 숫제 진심으로 남자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아마 치맛자락에 든 꽃만 없었더라면 ‘공주’이면서도 남자의 어깨나 가슴을 퍽퍽 때려버렸을지 모를 일이었다. 일그러진 공주의 얼굴이 풀린 것은 비로소 시녀들을 발견했을 때였다.
“…공주님! 저 자는….”
“데일라! 이상한 남자가 자꾸 나를 괴롭혀!!!”
구명줄을 찾은 사람처럼 시녀들의 뒤로 쇽 숨어버린 공주를 바라보던 남자는 재밌는 광경을 발견했단 것마냥 한쪽 눈썹을 까딱거렸다. 시녀는 총 세 명이었다. 개중 제일 나이가 들어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서 남자에게 묻길.
“공주님께 어떤 무례를 저지르시기라도 하셨나요?”
시녀들 틈에 숨은 공주는 한쪽 눈에 눈물을 찔끔 매단 채 ‘빨리 저 사람을 혼내줘!’라고 말하는 것처럼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남자는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아 입매에 힘을 주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시녀들 사이로 손을 내뻗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에 어떤 방해도 없이, 남자는 공주의 손을 붙잡아 들어올리는 데 성공한다.
손등 위로 남자의 입술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는 선량한 미소를 덧그렸다.
“본 왕국에 잠시 신세를 지게 된 상단주, 카마르입니다. 짧은 시간이겠지만 그동안 잘 부탁드리지요,”
샤파시만이 알 수 없는 오한을 느끼고 있었다.
“‘공주’님.”
…샤파시는, 아무래도 저 남자가 아주아주 싫어질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며 공주는 손등을 움찔 떨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던 남자-카마르는 떨림을 진정시키듯 손에 살며시 힘을 준다. 매너있고 자상하기 짝이 없는 기사를 모방한 그 모습에 시녀들은 벌써 홀라당 넘어가버린 것만 같았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은 두 사람 사이만을 가로지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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