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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EAR&MARPASHI/썰&연성

[아이피어] Buddy

by 여우비야 2022. 10. 15.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존재가 들어왔다더라. 그게 너 맞니?"

빛 들어오지 않아 더욱 새까매진 머리카락만 살랑거렸다. 그 가느다란 움직임에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존재'인 아이작은 공허한 눈동자를 일순 눈꺼풀 뒤에 감췄다. 죽인 숨소리가 그럼에도 가느다란 소리를 안고 새어 나온다.
또래로 보이는 그 애는 어둠이 두렵지도 않은지 아이작의 곁으로 살금살금 기어 왔다.

"얘, 묻잖아."

살가운 웃음이 얼굴 위로 피어날 때 아이작은 어깨를 움츠렸다. 아,
손가락이 닿았다.
…암흑에 익숙해진 아이작의 눈동자는 그때에서야 상대의 눈을 마주했다. 그러면 휘어지는 눈매. 밀실 안에서도 빛나는 착각을 들게끔 만드는 금색 눈동자. 뱀처럼 아이작의 손등을 기어오르는 손가락은 도통 멈추질 않았다. 손목을 타려다 멈칫거리더니, 밑바닥을 살살 긁듯 아이작의 손바닥을 뒤집는다.
나무 덩굴처럼 손가락이 엮인다. 손바닥과 손바닥을 밀착한다. 아이작은 그 틈으로 땀이 맺히는 것만 같아 숨을 들이켰지만, 곧 느리게라도 마른 입술을 열었다.

"…나일 걸."
"네가? 진짜?"
"……그런 게 중요해?"

서로의 숨소리며 목소리를 제외하고선 적막만이 흐르는 밀실 안, 아이작은 몸 안쪽을 불규칙하게 두드리는 심장 박동으로 하여금 입술을 다문다. 숨을 가다듬기 위해서.
사실은 아직까지 그 감각이 생생했다. 모든 신체 부위가 으스러지듯 갈려나가던, 아니, 어쩌면 정말로 갈려나갔을지 모르지. 순간은 영원처럼 끔찍했다. 차가운 아스팔트 도로가 그날따라 뜨겁게 느껴졌던 건 부서진 몸에서 흘러나오던 피 때문이었겠지. 그리고, 그리고.
말 그대로 부서졌던 온몸이 재조립되던.

"그럼, 중요하지."

회상回想으로 거칠어졌던 숨을 눈치챘던 것인지, 그도 아니면 단순히 본인이 하고 싶어서 그랬는지. 소녀는 손을 마주 잡은 것도 모자라 아이작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기 시작했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그 무게는 잠겨들던 아이작의 정신을 확 끌어올렸다. 아이작은 다시 입술을 다물곤 숨을 가라앉히는 데 집중했다.
소녀는 참 나긋하게도 말했다.

"앞으로 내가 네 버디buddy가 될 거니까."
"…버디?"

먼 허공을 향하려던 아이작의 시선이 붙들린 것도 그때였다. 아이작이 뒤늦게 소녀를 바라보았지만, 그 앤 이미 눈을 감은 채 온기를 즐기고 있었다.

"넌 세상을 구할 귀중한 재료가 될 거래."
"…."
"세상을 구원할 네가 도망치면 큰일이 생기니까. 네가 이곳에 자발적으로 구속될 수 있도록… 내가 널 묶어두는 도구가 되는 거야."

그 목소리는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섞여 들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들떠 보이기까지 느껴졌다. 그 괴리에 아이작은 어떤 답도 할 수 없었다.
죽었다 살아났다는-충격적인 일을 겪었을 뿐인 자신이 갑자기 왜 이 밀실에 갇히게 되었는지, 그런 자신이 무슨, 난데없이 세상을 구원할 사람이 되었다는 건지, 그리고 자신에게 들러붙는 이 소녀는 대체 누구인 건지. 아이작은 무엇도 알 수 없었다.
마주 잡은 손 중 아이작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은 채였다. 소녀만이 손에 힘을 주어 아이작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를 떨쳐내고 있지 않는 것도 아이작 쪽이었다. 아이작은 새까만 방 안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워낙 당혹스러운 일을 겪어서 그런 거겠지. 어쩌면 꿈일지도 몰라. 다시 일어날 때가 되면 평소처럼 할머니께서 날 깨워주실지…….

"있지, 내일부터 잘 부탁해."

흐려지는 의식 가운데, 아이작은 불행히도, 자신과 함께 차에 치여 도로 위로 쓰러지셨던 할머니의 뒷모습을 잔상처럼 그려내고 말았다.

"제일 효율적인 목줄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

악몽의 시작이었다.


* * *


아이작 딜라이트, 열여섯, 남자, 조모와 함께 장을 보고 돌아오던 중 덤프트럭에 치여 조모와 함께 즉사.
그리고, 다시 살아남.

병원으로 이송된 해당 개체는 몸에 생채기 하나 남지 않은 상태로 확인되었다. 더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 본 기관의 개입이 이루어졌고, 해당 개체는 연구동으로 이송되었다. 버디는 제일 높은 적합도를 보일 것으로 판단된 2-12이 선발되었다.
자세한 실험은 내일부터 진행하는 것으로….

"──!"
"쇼크사 위험 있습니다. 약물 더 투여해주세요."
"───, ──…!"
"저항이 심합니다. 차라리 한 번 더 죽이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연구동으로 이송된 그다음 날을 맞이한 실험 개체 41, 아이작 딜라이트는 새벽 나절부터 난생처음 겪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어디까지 죽지 않고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마치 그런 정보값을 알아내기 위해 실험을 진행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세상을 구원한다'는 목적을 가진 실험이라기엔 너무, 너무 이상하지 않나? 수 십 번을 …… 반복하던 아이작의 두 손목은 그렇게 몸부림쳤음에도, 죽음을 반복하는 사이 깨끗한 살결만을 보이고 있었다.
입을 틀어막은 입마개 탓에 비명 소리는 묵음 처리된다. 사지를 결박한 구속구는 모든 종류의 저항을 묵살한다. 육체는 몇 십 번을 죽어가는데 마음은 꾸준히 독살되어가고 있었다. 산 채로 말려 죽어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가장 아이작의 마음을 꺾어가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연구원들 너머, 새하얀 옷을 차려입고 새하얀 의자에 앉아있는 그 소녀였다. 죽기 직전 핏줄 터진 눈으로 바라볼 때면 살며시 웃어주고, 되살아난 직후 새하얀 눈자위와 함께 바라볼 때면 두 손 주먹 쥐고 뭐라 입술을 달싹이는 그의 친구buddy.

그런 생각을 할 즈음이면 또,
─탕!
깔끔한 고통과 함께 그의 모든 고통이 무無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저항과 증오와 분노를 체념으로 승화시키는 순간이 다시 그에게 닥쳐왔다.
소녀는 웃었다.

'힘내.'

차라리 죽음을 바라게 되는 순간이 닥쳐오기까지.
그렇게 계속.


* * *


기진맥진한 아이작의 머리를 다정히 쓸어주는 손길이 있었다. 애초에 아이작이 힘겹게 머리를 뉘인 곳도 소녀의 무릎 위였다. 손을 내칠 기운도, 몸을 움직일 힘도 없던 아이작은 소진된 사람마냥 겨우 입술을 열어 물었다.

"넌 대체 뭣 때문에 나한테 이러는 거야?"
"…무슨 의미로 묻는 거야?"
"무슨 목적이든, 무슨 이득을 얻기 위함이든, 아무튼 날 실험 대상으로 쓰려는 건 알겠어. 근데 거기에 왜 너라는 존재를 내 옆에 붙여두냐는 말이야."

그 물음에 아이작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길이 느려졌다. 생각에 잠긴 탓이었을까. 음, 하는 소리가 한참 지나간다.

"선생님이 말씀하셨을 때, 버디는 실험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존재라 하셨어."
"네가?"

의도치 않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내가 실험받을 때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네가?"
"…아, 역시 나중에 좀 졸았던 거 티 났어?"
"심지어 졸기까지 했어?"

이젠 황당하기까지 했다. 아이작이 이렇게까지 물었는데도 소녀는 찔리는 구석 하나 없는지 태연히 콧노래나 흥얼거렸다. 양심도 죄책감도 없나보지.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아이작의 뺨을 살짝 매만지다, 장난치듯 귓불을 쓸기 시작했다.

"버디의 존재 의의는 실험체에게 안정을 주는 거야."

아. 그 목소리다. 아이작이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너에게 정을 붙이는 거야. 네가 나에게 정을 붙이게 하는 거야. 네가 내게, 내가 네게 소중한 존재가 되도록 하는 거야. 그렇게 된다면…."

마치 꿈결을 걷듯, 목소리는 선율을 읊는 것만 같았다.

"너는 더 이곳에서의 생활을 견뎌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점점 이곳이 좋아질 걸. 나가고 싶어지지도 않을 거야."

귓불 위를 노닐던 손가락이 턱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듯했다. 입술 아래를 스친다. 입꼬리를 지나 뺨을 타, 감은 눈동자 위를 빙글 돈다.
손바닥이 아이작의 눈가를 덮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언젠간 네게 내 이름을 받고 싶어…."

그러면 나도 네 이름을 부를 수 있겠지. 소녀의, 그런 중얼대는 음성을 들을 적이면… 아이작은 한 치 앞 보이지 않는 미래가 두려워지곤 했다. 어떤 일을 당해도 죽지 않는 자신. 빠져나갈 구멍 없이 철저히 감시되고 있는 이 공간. 실험실로 옮겨지는 동안에는 아예 사지가 결박된 채 어떤 수도 쓸 수 없는 상태로 이동되고,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그런 생각에 골몰할 수도 없이 고통에 몸부림친다.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너덜너덜해진 마음은 이미, 꺾인 것만 같았다.
그런 와중 유일하게 위로를 받는 게 친구인지 뭔지, 그가 고통에 버둥거릴 때 방관하기만 하던 이 소녀의 온기며 목소리라는 게 무엇보다도 끔찍했고.

"…너. 이름이 없어?"

아픔이 지워지지 않은 탓이다. 죽음의 잔상이 족쇄처럼 그의 온몸을 휘감아 밑으로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이라도 이 생활에 익숙해져서 탈출할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 거짓된 안도감 따윈 내쳐버리고 두 다리로 서서 도망칠 수 있을 거야.
소녀가 속삭였다.

"번호는 받았어. 2-12. …하지만 이름을 지어주는 건 내 버디, 네 몫이니까. 공란이야."
"……."
"그러니까, 그들에게 '순종'해 줘, 버디."

그리고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아이작은, 상대를, 소녀를.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이 끔찍하기 짝이 없는 존재를….
소녀가 웃었다. 속삭인다. 글쎄.

"얼마 안 지나서 알게 될 거야."


* * *

DAY 1: 내구성 및 고통 감내도 조사
DAY 2: 내구성 및 고통 감내도 조사
DAY 3: 샘플 채취
DAY 4: 화학반응 조사
DAY 5: 재생 메커니즘 조사
DAY 6: 재생 메커니즘 조사
DAY 7: 재생 메커니즘 조사
DAY 8: 재생 메커니즘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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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5: 재생 메커니즘 조사



* * *


며칠이 흘러도 고통과 죽음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2주 정도가 지난 지금, 아이작도 어느 정도 실험의 목적을 깨닫고 있었다.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는 원인을 분석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내는 것.
목적 자체는 선하기 짝이 없다. 그 과정에서 아이작의 어떤 동의도 없이 반인륜적인 실험이 강행되고 있다는 점만이 문제였지. 한없이 죽고, 죽고, 죽고, 죽고, 죽고, 또 죽으며. 아이작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곳에 오기 전 봤던 뉴스에서는 또 새로운 전염병이 여러 나라를 휩쓸기 시작했다고 한다. 치사율이 말도 안 되게 높다던데 백신은 개발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아이작의 신체와 죽음에서 부활하는 원리를 파악해 백신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이 병뿐만이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난치병이고 불치병이었던 죽음의 그림자를 다 걷어낼 수 있다면? 지금도 전 세계에서 시시각각 죽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을… 그를 통해 살려낼 수 있다면.
헛된 망상일 뿐임을 알았다. 피해자인 자신이 가지기엔 조금 우스운 생각이지도 않나 싶은 마음도 조금. 결국 그 구조를 밝혀내는 건 자신이 아니라 연구원들이지 않나. 언제 한 번은 실험이 끝난 뒤 소녀에게 그런 물음을 건넨 적이 있었다.

"나 혼자 괴로운 걸로 세상이 조금은 더 괜찮아지고 있는 게 맞아?"

그때 소녀가 뭐라 말했더라. 특유의 그 나긋한 목소리로, 그럼!

"분명… 지금도 더 좋아지고 있을 거야."

…그러며 얌전히 자신을 끌어안아 주었지. 아이작은 그랬던 생각이나 곱씹으며 실험을 버텼다. 몰아치는 아픔 가운데서 의식이 점멸되고 다시 컴퓨터가 재부팅되는 것처럼 멀어져 가던 이명이 가까워지고, 다시금 눈을 뜨고. 그러기의 반복.
날이 갈수록 그의 영혼은 갈기갈기 찢겨 바랜 빛을 보이는 것 같았다.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이 남의 일처럼 멀어지는 순간이 올까?
그러면, 그때 그는 '아이작'일 수 있을까.

실험이 끝나면 침대로부터 이동기구로 구속을 옮기고, '방'으로 이송되는 것이 평소였다. 방만큼은 도망칠 구석이나 수단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이 기관도 안심을 하는 모양이었다. 피로 젖은 몸은 샤워를 하며 씻고, 엉망이 된 옷은 쓰레기통에 넣고 새 옷을 입으면 된다. 시간이 되면 식사가 배급된다. 그 모든 과정을 소녀가 함께 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

이동기구로 옮겨지기 전 구속구가 풀린 그 사이가.
길었다.

날이 갈수록 그의 영혼은 갈기갈기 찢겨 바랜 빛을 보이는 것 같았다.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이 남의 일처럼 멀어지는 순간이 올까?
그러면, 그때 그는 '아이작'일 수 있을까.


무기력한 그의 눈동자가 트레이 위에 올려진 메스를 향했다. 재생된 직후의 몸 컨디션은 언제나 최상이었다.
따라서 그의 손에 메스가 들린 건 한순간이었다. 뇌의 판단을 거치지 않은 채 왜소한 연구원의 뒤를 잡았다.
너무도 많은 죽음을 경험한 탓일까. 이제 아이작은 싫은 죽음의 방식을 여럿 손꼽을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경동맥이 절단되는 죽음이었다. 피가 빠져나가는 감각이 너무도 생생하고, 또 죽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었으니까. 차라리 절단으로 인한 쇼크사가 낫다 생각할 정도로.
아니,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중요한 것은, 그가 몸소 경동맥의 위치와 깊이를 깨달은 점에 있었다. 그가 쥔 메스가 연구원의 목 위를 차분히 짚었기 때문이다. 대번 실험실 안에 긴장감이 증식했다. 아이작은 애써 숨을 가라앉히려 들며 경계를 세웠다. 그의 눈동자가 뭇사람들을 훑던 와중, 무심코 소녀를 향했다.
소녀는 웃고 있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생각한다.
왜?
…혀를 깨물어가며 현재에 집중한다. 저까짓, 존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은 탈출하는 게 중요해. 겁에 질려 떨기 시작하는 연구원을 추스르듯 더 깊게 메스를 눌렀다. 아이작이 문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낮은 목소리로 경고한다.

"나처럼 피가 터져 나와도, 이 사람은 못 살걸."
"……사, 살려, ……살려…주…."
"조용히 해."

하지만, 이곳으로부터 어디까지 벗어날 수 있을까.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실험체의 가치가 이 연구원과 감히 저울질만 하긴 한가? 아이작이 보아온 이 기관은 정의나 대의를 표방하는 데 미쳐있었으니, 마찬가지로 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서라면. 이 인질에는 그리 큰 가치가 없었다.

"움직이지 마.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이 사람을…."

그래도 조금이라도 이 연구소의 구조를 알아낼 수 있다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탈출할 기회는 찾아올 것이다. 이제 와 그의 유일한 장점은 죽지 않는 것에 있었으니 기회라면 얼마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실험실의 문에 거의 다 가까워진 때였다.
자그마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철컥, 하는.

총 장전음도.

"실험 개체 41, 움직임을 불허한다."

큰 소리를 내며 아이작의 앞으로 무릎 꿇려진 것은 소녀였다. 그리고 소녀의 뒤통수를 죽음보다도 무겁게 누르고 있는 것은 총구였다.
이 비정상적인 광경에 아이작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이 사람을 죽여버리겠다' 선언한 것과 달리, 얼어붙은 채 꼼짝 못 했다. 또 다른 군인은 심지어 삼단봉을 빼어 들고 위협적으로, 아이작이 아니라 소녀에게 그 끝을 겨눴다.
모른 척할 수 없는 선명한 협박이며 징조였다. 발 밑이 무너지는 착각이 들었다. 거칠어진 숨을 급하게 삼킨 아이작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소녀는 겁에 질린 기색은 아니었다. 그저 곁눈질로 두 군인을 훑어보더니 아이작을 향해, …고개를 젓는다.

"무의미한 인질극을 관두고 투항해라."

그것을 마주하면 아이작은, 그냥, 묻고 싶어 졌다.
너… 그거 무슨 의미로 한 거야?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는 거야? 아니면 이 사람들에게 순종하라고 내게 눈치라도 주는 거야? 허망함이 속을 그득그득 채우는 것 같기도 하면서 속을 다 텅 비워내는 것 같았다. 부러진 마음으로부터 오는 격통은 차라리 몸이 갈리는 게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아프다. 거칠어진 숨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소녀의 머리가 꿰뚫리는 상상이 든다. 자신이 수 차례 겪었던 죽음처럼, 그러나 자신처럼 살아나지 못할 소녀가….
아.
끔찍함이 두 눈을 파내는 것 같았다.

"……."

끝내 아이작은 '무의미한' 저항을 관뒀다. 연구원을 해방시켰다. 기껏 얻은 탈출의 실마리를 제 손으로 놓아버리고, 두 손을 들고, 구속당했다. 재갈을 물고 눈을 덮는 안대의 형상에 잠자코 눈을 감았다.
최초의 굴종이며 굴복이었다. 고작 2주 남짓한 시간을 함께 한 소녀만을 위해.

하지만 그날 소녀는 방에 돌아오지 않았다. 밀실은 여즉 어두웠다. 추위보단 지독한 절망과 적막이 아이작의 몸을 떨게 만들었다.

도무지 잠에 들 수 없어 혼자서 그 모든 밤을 견뎌내야 했던 아이작은, 새벽이 되어서야 열린 문 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다급함이 눈을 채우고 있었나. 역광을 진 소녀는 살짝 눈을 크게 뜨다 나긋하게 웃었다.

그것을 마주하는 아이작은 그야말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소녀를 부축하던 손길을 탁 놓고 문을 닫아버리는 군인의 인영. 그 행동의 원인을 선명히 보여주는 다리의 붕대, 곧장 주저앉을 듯 심하게 절뚝이는 걸음.

"잠도 안 자고. 나 기다렸어?"

다가온 소녀는 지체 없이 아이작에게 와락 안겨들었지만… 아이작은 그를 차마 마주 안을 수 없었다. 묻고 싶었다.
너 왜 부축받으면서 와? 왜 그렇게 걸어? 무슨 일을 당한 거야? 그들이 네 다리를 부러뜨리기라도 한 거야?
내가 탈출하려 시도한 그 대가를, 너에게 대신 준 거야?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자 아이작은 주체할 수 없이 몸을 떨기 시작했다. 역겨움에 구토감이 치밀었다. 끔찍했다. 자신이. 이곳이, 이 기관이, 연구원이, 군인이, 이런 실험을 묵인하는 국가가, 모든 세계가, 그리고, 무엇보다,

소녀가…….

다만 하염없이 겁에 질린 아이작의 등을 다정히 쓸어주는 손길이 있었다. 특유의 그 말투로, 그 나긋한 목소리로 말한다.

"네가 탈출하고 싶어 했는지 몰랐어. 알았다면 미리 말해줬을 텐데."

뭘 말해주는데. 그런 목소리도 꺼내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 버디. 이번은 처음이라 많이 봐줬대. 하루도 안 지나서 내가 돌아왔잖아? 그런 거지."

크게 꺾여버린 마음이 다시 제대로 붙을 수 있을까. 아이작은 처음 실험을 경험하게 된 날을 떠올렸다. 기진맥진해 돌아온 날 소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한 말도.
소녀에게 정이 붙는다면, 그래서 소녀가 소중한 존재가 된다면 그땐 정말 이곳의 생활을 견뎌낼 수 있게 되는 걸까. 점점, 이곳이 좋아져서 나가고 싶어지지도 않는 걸까.
아이작은 소녀로부터 숨 쉴 수 있는 곳이 나 있는 것처럼 천천히, 그러나 강하게 소녀를 마주 끌어안았다. 그래서 내가 네게 이름을 지어준다면, 네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때도 그는 '아이작'일 수 있을까.

"……너는…."
"…응?"

빛 한 점 들지 않는 좁은 방, 유일하게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지금 뿐이고, 또 서로에게서 뿐이라.
아이작은 고해하듯 내뱉었다. 손끝이 떨렸다.

"너는, 끔찍해…."

소녀가 나직이 웃었다. 그래?

"그건 조금 슬픈 일인걸…."

그러니 언젠가는 그런 이름을 붙이도록 하자, 너는 끔찍하고, 역겹고, 나를 이 지옥에 묶어두는 족쇄이자 숱한 고통 가운데 가장 끔찍하게 날 아프게 할 수 있는 존재인 걸로, 그러니까,

오직 너만이 날 두렵게 만들 수 있잖아.


* * *

DAY 16: 재생 메커니즘 조사 및 순종 교육
DAY 17: 재생 메커니즘 조사 및 순종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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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28: 재생 메커니즘 조사 및 구속구 해제 테스트



* * *


'순종'할수록 기관은 조금씩 많은 것을 베풀어주었다. 처음에는 방 안에 설치할 수 있는 조명이었고, 그 다 음은 소녀와 함께 누울 수 있는 침대였다.
침대가 방에 들어온 날 기관은 보란 듯이 실험실까지 향하는 과정에서 안대를 풀어주었지만, 첫 반항에 바로 소녀의 다리를 부러뜨린 놈들이었다. 눈은 두 개가 있으니까, 혹시 몰라 아이작은 두려움에 차 눈을 감고 실험실로 이동했다.

서서히 죽는 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잡생각을 하기보단 소녀의 반응을 관찰하는 게 시간을 보내는 데 더 좋아서, 실험을 진행할 때면 어느새 소녀를 보는 게 일상이 되고 있었다.
오늘도 소녀는 막바지 즈음에 이르러 조금 졸았다. 사실, 조금이 아니라 좀 많이.


* * *

DAY 32: 재생 메커니즘 조사 및 구속구 해제 테스트
DAY 33: 재생 메커니즘 조사 및 구속구 해제 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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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45: None


* * *

처음으로 실험이 없는 날이 주어졌다. 그 날은 소녀와 함께 하루 종일 뒹굴거렸다. 소녀는 새로 생긴 침대를 어찌나 좋아하던지, 실험이 끝나면 씻지도 않고 냅다 침대에 누워버리곤 했다. 때문에 방으로 돌아오면 아이작이 소녀의 뒷덜미를 잡아 욕실에 집어넣는 게 일상이 되곤 했었지.
끈덕지게 아이작에게 달라붙은 소녀는 곧바로 잠에 빠져들 것처럼 늘어져 있었지만, 아이작이 자느냐 물음을 건네면 또 그건 아니라고 따박따박 답했다.
천장을 바라보던 아이작이 물었다.

"다음 물품은 뭘 신청할래?"

조명, 침대, 그리고 그 다음으로 받을 '상'이 뭐가 좋겠냐는 것에 소녀는 콧소리를 흘리며 아이작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텔레비전 같은 건 이곳에 안 들여와줄 거 아니야. 아니면 책 좀 달라고 하는 건 어때?"
"책?"

희미한 조명 빛 아래,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아이작은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불현듯 스치는 궁금증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넌 뭘 하다 여기에 온 거야?"
"응?"
"예를 들면, 난 학생이었다가 사고로 그렇게 되고. 여기로 온 거고. …그러는 넌 바깥에서 뭘 하다 이곳까지 온 거냐고."

확실히 소녀는 아이작이 이곳에 온 때부터 너무도 익숙하게 버디라는 개념을 잘 알고 있었고, 아이작이 실험을 받는 내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웃기까지 했으니. 아이작은 마땅히 소녀가 연구원들과 한 패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아이작이 벌인 짓 때문에 지금까지 다리 한쪽에 깁스를 차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감았던 눈을 뜬 소녀는 도르륵 눈을 굴리고 있었다.

"몰라. 기억날 때부터 여기였어."
"…여기였다고?"
"나 같은 애들이 몇 있어. 다들 버디가 되기 위해 교육받지."

41번이라는 번호가 아이작에게 붙은 이상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섬찟한 기분에 아이작이 살짝 표정을 찌푸렸다.

"나 같은 실험체들 곁에 착 붙으라고? 너처럼?"
"응!"

당당하게 답하니까 또 할 말이 없어진다.

"아무튼. 그래서 난 바깥에 가본 적이 없어."
"…근데 텔레비전은 어떻게 아는데."
"선생님이 보여주니까?"
"책도 읽었어?"
"너 나 무시해? 왜, 나 글도 읽고 쓸 줄 안다. 왜!"

아이작을 따라 얼굴을 살포시 찌푸린 소녀는 아이작의 뺨을 왁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아파. 뭐 하는 거야."
"넌 그런 것들도 겪고 이게 아파? 물론, 아프라고 꼬집는 거지만!"
"오늘이 지금껏 유일하게 쉰 날인데, 오늘은 안 아파도 되는 거 아니야?"

퉁명스러운 목소리에서야 소녀의 손이 떨어져 나오지만, 이글거리는 눈빛은 도통 가라앉을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괜히 시선을 피한 아이작은 허공을 노려보기나 했다.

"그래서. 책 신청하면 뭐 신청할 건데."
"흥."
"…삐쳤어?"
"흥!"

어쩔 수 없이 아이작은 두 손으로 소녀의 뺨을 조물거려주기 시작했다. 언젠가 소녀가 기억나지도 않은 이유로 심통이 난 적이 있었는데, 소녀가 직접 자신의 화를 풀어주려면 이렇게 해달라 하던가.
하여간. 참 별나다.

"…바다 사진이 보이는 책이 있으면, 그거 신청하고 싶어."
"……바다?"
"응. 나 거기 가보고 싶거든. 못 가겠지만."

그 말이 문득 아프게 들려왔다. 착각인가, 싶어 눈살을 찌푸리다 말 뿐이었지만.

"그러니까 사진으로라도 실컷 보고 싶어. 선생님 말로는 비린내도 나고, 신발도 많이 더러워져서 갈 만한 곳이 못 된대."
"…그래도 네가 보기엔 아름다운 곳인 거 아니야?"
"응. 비린내 나면 입으로 숨 쉬면 되고, 신발이 더러워지면 맨발로 갔다가 씻으면 되는 일 아닐까?"

그러더니 또, 바스스 웃는다. 아마 저 작은 머리통으로 바다에 간 자신을 상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이작은 그 상상 가운데 자신이 함께 있느냐 묻고 싶었지만, 직후 자신이 애초에 왜 그런 물음을 건네나 어이가 없어져 관뒀다. 뺨을 주물거리던 손을 떼어낸 그가 다시 천장을 올려다본다.

"가서 그냥 보기만 하고 싶은 거면, 사진으로 보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지."

조금은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유 모를 심통이 난 까닭이다.
그에 눈을 둥그렇게 뜨던 이스피어는 조금 더 깊게 그를 끌어안으며 웅얼거렸다.

"왜? 나 지금은 다리 아파도 나중 되면 나을 거야."

괜히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안 되면… 네가 나 업어주고 가면 안돼?"

아니. 숨까지 막히는 것 같기도. 목이 졸린 사람마냥, 아이작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왜."

그러면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한다.

"내가 네 버디니까."

그는 소녀가 두려웠다.


* * *

DAY 52: 재생 메커니즘 조사
DAY 53: 재생 메커니즘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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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64: ■■ 이론 검증 4차 시도



* * *



연구의 양상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듣기론 어떤 박사의 이론을 실험해본다 했다. 죽음에 상당수 무뎌진 아이작은 그러든가 말든가, 실험을 진행하는 내내 소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바닷가의 사진이 담긴 책을 받은 뒤 아이작은 실험 내내 졸음과 사투를 벌이는 소녀를 위해 스케치북과 펜을 요청했다. 마침 오늘 지급받은 채 이곳으로 온 건데 말이다.
소녀는 저 공책에 무엇을 그릴까? 아니면 무엇을 쓸까? 그런 단순한 게 궁금해졌다. 안타깝게도 누워있는 상태론 소녀가 뭘 그리는지, 쓰는지 살펴볼 수 없었지만 말이다. 막상 이 쪽을 보고 웃어주거나 입을 달싹거리지 않아줘서 그런가. 이건 또 이것대로 서운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자기만 심심한가. 이쪽도 이젠 좀 심심해지는 여유가 생겼는데.
그렇게 괜스레 심통이 난 아이작이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할 때였다.
소녀가 이쪽을 향해 스케치북을 돌려 보여준다.

"…아."

순간 막을 수 없이 헛웃음을 닮은 숨이 터졌다. 당황한 아이작은 손을 들어 입을 가리려 했지만, 맞다. 실험 중이었지. 꼼짝하지 않는 몸에 아이작은 결국 한 번 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미친 사람을 바라보듯 한 연구원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스케치북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 힘내, 내 버디! ]
[ 근데 나 벌써 졸리다. 어떡해? ㅠㅠ ]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은 진짜였구나. 근데. 글씨 쓰는 건 좀 연습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씨가 너무 삐뚤빼뚤하잖아…."

중얼거림은 전기톱 소리에 묻힌다.


* * *

DAY 74: ■■■ 이론 검증 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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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87: None



* * *


두 번째로 주어진 휴식 날이었다. 아이작은 방 안을 채운 몇 책들과 스케치북, 큐브와 몇 피젯 장난감을 바라보다 그 가운데 앉아있는 소녀를 눈에 담았다. 낑낑대며 뭔갈 쓰고 있는 모습이다. 깁스를 푼지는 꽤 오래됐다. 바닥이 차가워서 조금 걱정이 되긴 해도.

"제대로 쓰고 있어?"

처음 소녀가 스케치북에 쓴 글을 보고 충격을 금치 못한 아이작은 그날부로 밤마다 소녀에게 '글씨 연습'을 시켰다. 아이작이 어떤 문장을 써주면 그 글씨를 최대한 똑같이 따라 쓰는 간단한 방식이었다. 이걸로 겸사겸사 소녀에게 느꼈던 초반의 몇 얄미움도 해소하고.
침대에서 내려온 아이작은 소녀의 옆에 앉았다.

"손 아파!"
"아플 정도로 시킨 적 없는데."
"그리고 쓸 거면 재미있는 문장 좀 써줘. 그렇지, 버디, 네가 학교란 곳에서 배운 지식이라던가, 소설 구절이라던가. 그런 건 없어?"
"소설 구절은 아직 이르지. 고리타분한 문장 좀 더 쓰다 익혀봐."
"우우."

성난 반응을 무시한 아이작은 고민하던 끝에, 스케치북에 문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


그 문장을 바라보던 아이작은, 괜히 소녀를 바라보다가.

"내가 불러볼 테니 그대로 써볼래? 안 보고."
"우우우우."
"부른다? The only thing we have…."
"뭐? 자, 잠까아안!"

그리고 완성된 소녀의 문장을 살핀 아이작은, 또 허물없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The only ? we ? … to fear es fear etself.

"너 글 다 배웠다는 거 거짓말이지."


* * *


그러니 언젠가는 그런 이름을 붙이도록 하자, 너는 끔찍하고, 역겹고, 나를 이 지옥에 묶어두는 족쇄이자 숱한 고통 가운데 가장 끔찍하게 날 아프게 할 수 있는 존재인 걸로, 그러니까,
오직 너만이 날 두렵게 만들 수 있잖아.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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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00: 학회 발표 준비 및 순종 장치 마련



* * *


"연구에 진척이 있대? 드디어?"
"아까 주워듣기론 그렇던데. 넌 나보다 훨씬 한가하면서 왜 못 들은 거야?"
"졸린 걸 어떡해."
"잠꾸러기. …맨날 나보다 늦게 일어나면서."
"자도 자도 졸리단 말야…."

도란도란 얘기를 떠들고 있던 저녁이었다. 실험이 끝난 뒤, 아침이 되기 전 문이 열렸던 것은 소녀가 다쳤던 날을 제외하곤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 예상치 못한 방문이었다. 문이 열리는 것에 깜짝 놀란 아이작은 무심코 소녀를 뒤로 감추듯 몸을 일으켰다.
군인 둘이 어떤 언질도 없이 방 안으로 침입했다. 군화 밑으로 소녀의 피젯 토이 중 하나가 밟히는 모습이 보인다.

"…실험입니까? 사유를 말씀해주세요."

아이작은 응당 그 목적이 자신에게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군인은 말 없이 아이작 대신 곁에 있던 소녀의 팔을 우악스럽게 쥐어 일으켰다. 그 모습에, 순간,
아. 눈앞이 시뻘게지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작이 책을 들어 소녀를 끌어내는 군인의 뒷머리를 가격하려던 순간이었다.
─탕!
시퍼런 통증이 알싸하게 책을 든 팔을 관통했다. 이윽고 멈추지 않고 총탄은 세 번 더, 아이작의 다리와 남은 한쪽 팔을 꿰뚫었다. 책이 떨어진다. 소녀는 끌려간다. 아이작은 주저앉는다.
가슴 안을 찢는 무력함에 아이작은 지독히도 건조하게 생각했다.

이대로 죽고 회복해서 다시 덤벼들까.

망설이지 않고 혀를 깨물려던 아이작을 멈춘 것은 다시 총을 겨누는 군인이 아닌, 소녀였다. 문가에 다다른 채 고개를 돌려 아이작을 바라보는 눈빛이 여즉 빛난다.
그가 첫 날 보았던 금색에서 하나 바랜 점 없이.

"버디."
"…데려가지 마."
"별 일 아닐 거야. 과민반응 하긴!"

소녀가 웃는다.
문이 닫힌다.

"나 금방 다녀올게."

피 웅덩이 속, 희미한 조명 빛 아래 지는 그림자. 그 가운데 아이작 혼자만이 남았다.
이젠 죽음보다 두려운 적막 가운데 갇혔다.


* * *


…그리고 약속대로 금방 돌아온 소녀는 별, 이상한 목줄을 차고 있었다. 어느새 혼자 죽고 되살아나 몸 상태를 회복하고, 엉망이 된 방 안까지 치운 아이작은 그런 소녀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말을 골라보려 하지만 잘 될 턱이 없었다.

"그게. 뭔. …뭐야?"
"참고로 말하는데, 내 취향 아니다?"
"아니. 그게. ……아닌 거 맞아?"
"야!"
"아야."

어깨를 때리는 손길은 하나도 아프지 않지만 아이작은 부러 아픈 소리를 흘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소녀의 몸 곳곳을 돌아보아도 다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 '첫 사건'이 있고 나서부터 아이작은 '순종'적이기 짝이 없었으니. 되려 소녀가 다쳤더라면 반발심만 부추겼을 테다.

"…그래서 이게 뭔데."

드물게 소녀는 말하길 꺼리는 티를 냈다. 시선을 피한다거나, 분명 아무것이 아닐 텐데 아무것도 아니라며 화제를 돌리려 한다든가.
결국 아이작이 양손으로 소녀의 어깨를 붙잡고 나서야 그가 실토했다.

"~그러니까. 버디. 네 실험에서 드디어 뭔가, 학회에 발표할 만한 진척이 생겼다나봐. 나도 정확한 건 모르지만."
"그래서."
"참, 자꾸 재촉하네! …그래서, 어, 내가 듣기로는."

머뭇거린다.

"…네가 직접, 학회에 얼굴을…."
"……뭐?"
"…비춰야 할 것 같아서."
"뭐라고?"
"……그래서. 네가 허튼짓 못하도록 나한테, 채웠어."
"이걸? …."
"응."

소녀의 목의 빈틈없이 장착된 초커는 힘으로 풀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아이작의 머릿속으로 나쁜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예를 들면 아이작이 '허튼짓'을 하려는 낌새를 보이자마자 소녀의 목에, 뭐, 신경독 같은 게 주입되는 상황이라든가. 아니면 이 초커 자체가… 터지는…… 상황, 이라든가.
시시각각으로 창백하게 질려가는 아이작의 얼굴을 보던 소녀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아이작은 결국 이불과 소녀의 품에 둘둘 말려 끌어 안겨지는 형을 당해야만 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한 시간 정도가 지난 뒤였다. 움직이지 않는 자세가 불편해진 아이작은 그제서야 조금 꼬물거리기 시작했다. 소녀는 꿈쩍 않았다. 아이작이 이불 안에서 소녀의 배를 툭툭 쳐도 똑같았다. 조금 얄미워지기까지 했다.
툭. 툭툭. …툭.

"흐응."
"이것 좀 풀지 그래?"
"흥."
"…너도 이불보단 나 끌어안는 거 좋아하잖아."

아이작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것처럼, 소녀는 확실히 아이작을 끌어안는 걸 좋아했다. 뭐라고 했었지? 껴안는 맛이 있다 했던가. 그 말대로 소녀는 불퉁한 표정을 조금 더 짓다가 꾸물꾸물, 아이작을 해방시켜주었다.
찌뿌둥한 몸을 풀어주는 사이 소녀는 침대 위를 뒹굴거리며 그런 아이작을 보고 있었다. 기지개를 켜고 팔을 내려놓은 아이작은 그대로 침대에 눕지 않고, 소녀를 바라보다 물었다.

"너 이름 가지고 싶다 했지."
"…응?"

…예상치 못한 발언에 1초, 2초, 대략 3초가 지난 뒤에서야 소녀의 눈이 크게 뜨이기 시작했다.

"응?!"
"대답이나 해. …너 이름 가지면, 내가 네 이름 지어주면."

어느새 벌떡 일어나 앉은 소녀를 보던 아이작은, 소녀가 찬 초커에 시선을 준다.

"…너도 내 이름 불러주는 거 맞아?"

일순 정적이 흘렀다.
그동안 아이작은 소녀를 너, 저기, 정도로 불렀고, 소녀는 아이작을 야, 당신, 버디, 내 버디, 친구야, 정도로 불렀다. 소녀는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둥그렇게 눈을 뜬 그 상태로 움직이질 않았고, 덕분에 민망함이 찾아오는 건 아이작 쪽이었다. 입술을 달싹이다, 조금 달아오르는 뺨에 항변하듯 말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네가 내 이름 부르고 싶다며."
"버디."

그런데 왜 나한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데?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던 아이작을 붙잡은 건 생각보다 진중한 목소리였다.
아니, 진중하기보단 어딘가 간절하고. 애달프고. 혹은 너무나도 감격한.
아이작이 소녀를 마주 보았다. 자신보다 더 달아오른 얼굴에, 동그랗게 뜬 눈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이불을 쥔 손은 또 얼마나 힘이 들어가 있는지, 떨리기까지 하는 것을 보라.
하지만 바보같이 보이기까지 하는 그 모습에 몇 천 번이고 멈췄던 아이작의 심장은… 새삼스럽게 존재를 과시하듯 소리 내어 뛰기 시작했다. 쿵, 쿵, 하고.

"나한테…."
"…응."
"이름 지어줄 거야?"

입 안이 마르는 것 같았다.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 아이작은 숨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고통에 무뎌진 몸을 일깨우듯 크게 뛰는 이 심장은 왜 진정하질 못하는지, 대체 저런 반응에서 뭐가 놀랐다고. 뭐가 긴장되느냐고, 대체 뭐가.

"…그래, 그러니까, -윽!"

품에 무언가가 와락 달려든다. 함께 뒤로 넘어간다. 넘어지는 통에 둔탁한 통증이 척추며 등에 퍼지지만, 쿵, 쿵. 뛰는 심장이 이끄는 시선에 잔뜩 상기된 소녀의 얼굴이 보인다.
아이작이 마른침을 삼켰다. 품에 안겨든 소녀를 본다. 최근 바뀐 샤워실의 바디워시는 새롭게 꽃 향기가 추가됐었나. 흐릿한 '바깥' 기억으로부터 아이작은 그것이 아카시아 꽃 향기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황홀한 시야 가운데 곧 소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저항할 수 없이 아이작의 시선도 그리로 향했다.
다만, 흘러나온 말은 예상과는 다소 결이 달랐다.

"그럼 나도 이제 네 이름 불러도 돼?"

하얀 꽃들이 바람에 휘날리듯 반짝이는 빛이 눈동자 안에 있었으므로, 아이작은 이런 순간이 되고 나서야 그동안 소녀의 눈동자는 제 빛을 다 발하지 않았던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기쁠 때 넌 이런 눈빛을 보이는구나. 이런 표정을 짓고, 이렇게 행동하는구나. 그런 깨달음이 머리를 스쳐,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웃음짓고 말았다. 기쁨에 찬 소녀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울린다.소녀가 그의 목을 확 끌어안아버린 탓이었다. 버디, 내 버디야.

"─아이작. ……이제 나를 조금 사랑하게 되었어?"

너무도 지독하고 끔찍한 물음이 아니었던가. 보이지 않는 목줄을 스스로 차겠느냐고, 다시 물어보는 꼴이지 않나. 처참함이나 굴종에 따른 수치심이 가슴 안을 저미는 한편에, 그럼에도 소녀의 등을 마주 끌어안는 손길을 막을 수 없는 자신이 있었다.
단지 생각했다. 너는 역겨워. 너는 내게 언제나 가혹하게 굴고 내가 어떤 저항도 반항도 할 수 없도록 내 영혼을 산산히 부숴. 넌 항상 내 의지를 찢고 내 마음을 꺾어버려. 끔찍하게 무서운 나의 버디, 나의 소녀,
나의,

"…그래,"

두려움이여.

"이스피어."

종래에 그가 사랑하고 만 그의 공포는 그의 품 안에서 흐느낌 닮은 숨을 내뱉었다. 감격이며 애정과 기쁨에 젖어 어쩔 줄 모르는 몸부림은 처절한 모습을 닮기도 했지만, 그런 부분은 아무렴 상관없겠거니 싶었다.
소녀는, 이스피어는.
뭐. …많이 특이했으니까.

행복에 겨워 울기까지 하는 얼굴을 바라보던 아이작은 그 눈물이 제 뺨에 떨어지고 나서야 손을 들었다. 눈물 젖은 뺨을 훔쳐주기 시작한다.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손길.

"왜 울어."
"…기뻐서."
"넌 기쁘면 항상 울어?"
"이렇게까지 기뻐본 적이 없어서 그래."
"이름 지어준 게 그렇게 기뻐?"
"당연하지, 바보야."

너털웃음을 터트린 이스피어는 천천히 몸을 굴려 맨바닥, 찬 기운 올라오는 그 옆으로 사르르 누웠다. 바닥에 눌린 뺨이 조금 우습게 보인다. 히, 하고 웃을 때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가며 지워지지 않은 눈물 자국들은 또 어떤가. …그마저도 귀여워 보이는 게 참 심각한 일이라고, 아이작은 잠자코 생각했지만.
이스피어는 손을 뻗어 아이작의 콧대를 만지작대며 장난을 쳤다.

"난 지금까지 이름 없이 살아왔단 말야. 넌, 지금까지, 며칠이었지? 한 100일 정도밖에 안 겪어봤으니 모를 테지만."
"…보통은 이름 있는 게 정상이거든? 그리고 거기 눕지 마. 차라리 내 위에 누워."
"어제는 무겁다며 떨어지라고 하더니!"
"그거랑 그건 다르지. 거긴 침대고. 여긴 바닥이잖아."

결국 한숨을 쉬며 일어나, 이스피어를 들어 침대로 옮겨주는 것은 아이작의 몫이었다.

"날 추워지고 있으니까 이제 바닥에 눕지 마. 감기 걸려."
"이젠 나한테 이름 지어줄 정도로~ 날 좀 사랑하게 돼서 그런가? 걱정이 는 것 같기도?"
"평소에도 이랬거든."
"아야!"

약하게 때린 것 같은데. 이마를 부여잡은 이스피어를 보던 아이작의 얼굴에 사뭇 당혹감이 서렸다. …많이 아파? 중얼대듯 묻고 이마를 살살 쓸어주는 수밖엔.
물론… 그마저도 이스피어의 계략이긴 했지만 말이다. 악동처럼 짓는 웃음에 아이작이 한숨을 쉰 것도 머지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손을 거두진 않는다. 앞머리를 헤치듯 이마를 살살 쓰는 손길 아래 그가 묻길.

"…이름 마음에 들어?"
"응. 왜? …네가 지어준 거잖아."
"그래도. …피어fear라는 부분이 들어가 있으니까…."

아이작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는다.

"좋은 뜻처럼 안 들릴 것 같기도 해서."
"그게 중요해? …아. 아니면,"

눈을 도르륵 굴린 이스피어가 양껏 웃음 지었다.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불안해졌다.
저 웃음은 보통, 그가 아이작을 놀리기 직전에나 짓는 웃음이었던 탓이다.

"나한테 예전에 끔찍하다고 말했던 그 의미 그대로 담은 거였어?"
"──…아, 아니야!"

하지만 이 사항만큼은 아이작이 꼼짝없이 휘말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 소리를 흘린 아이작이 그만 웃고 그만 놀리라는 양 이스피어의 두 눈 위를 손바닥으로 덮어주었다.
마르지 않은 물기가 느껴진다. 뜨거운 온도도.
그런 것을 느끼던 때. 아이작은 괜히 이스피어에게 묻고 싶어졌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했어?"
"…무얼?"
"가장 효율적인 목줄 말야."
"사랑?"
"응."
"…으흠."
"…나를 보기 전부터 그렇게 믿고 있었잖아."
"음…~."

아이작이 만들어준 그늘 아래에서, 색색 숨소리를 흘리며 고민에 잠겼던 이스피어의 입꼬리가 느른하게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그랬거든."
"응?"

이스피어의 손이 아이작의 손목을 붙잡았다. 천천히 아래로 끌어내리며 드러나는 눈동자는, 이전보다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외로웠어."

잠시 침묵이 흘렀던가. 그에 이스피어가 나직이 속삭이며 두 팔을 벌렸다.
안아줘.
아이작은, 이제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방도를 몰랐다. 끝내 그의 신형이 기울어졌다. 덮듯, 무게를 담고 소녀의 위를 짓누르듯 강하게 끌어안다가….
마주 바라보며 소녀의 품을 파고들듯 고개를 숙였다. 깊게 체향을 들이마신다.
아카시아 꽃 향기.

"그럼 지금은?"

늘어지는 음성으로 그가 물었다. 살살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던 이스피어도, 느리게 눈을 감았다. 중얼댄다. 네가 있으니까 괜찮아.

그리하여 죽음을 경험하고 인간에서 실험쥐 따위로 전락한 열여섯의 아이작 딜라이트는, 그의 죽음을 방관하나 외로움에 사무치던 소녀를 만나 기어코 그를 마주 끌어안고 말았다.
온기를 떨쳐내기엔 점점 추워지는 계절이고, 또 너무나도 밤이 어두운 까닭이었다.

소녀에게 정이 붙는다면, 그래서 소녀가 소중한 존재가 된다면 그땐 정말 이곳의 생활을 견뎌낼 수 있게 되는 걸까. 점점, 이곳이 좋아져서 나가고 싶어지지도 않는 걸까.
아이작은 소녀로부터 숨 쉴 수 있는 곳이 나 있는 것처럼 천천히, 그러나 강하게 소녀를 마주 끌어안았다. 그래서 내가 네게 이름을 지어준다면, 네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때도 그는 '아이작'일 수 있을까.

언젠가 그렇게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 정을 줘선 안 된다고, 그래야 이곳에서 탈출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아프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이제 그의 유일한 아픔은 소녀의 존재가 되었다. 그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존재는 소녀가 되었다. 소녀만이 그를 견디게 해 주고, 소녀만이 그를 숨 쉴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때도 그는 '아이작'일 수 있을까.
아니.

그가 희미한 음성으로 소녀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 피곤함이며 수마가 조금씩 밀려드는 기분이었다.

"이스피어."
"…응?"
"잘 자라고 이야기해줘."

그 웃음소리 아래, 따스한 품 가운데,

"…잘 자, 내 버디,"

그곳에서야 그는 비로소,

"내… 아이작."

'아이작'으로 있을 수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