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자면 진실을 알고서도 ...특별한 감흥이 없었다. 그래. 우리는 정부의 도구로구나.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이빨이 갈리고, 이빨이 닳아 해질 때까지 쓰이다, 버려지는구나.
...거기서 끝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에일듯 스쳤다. 헤르마는 건물 옥상 위 두 다리를 내놓고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떨어진다 한들 죽을 일은 없을 테다. 그 또한 생존 본능은 완전히 거세되지 않은 모양이니까.
다만 천사의 목소리로 힘들어하던, 은퇴를 마쳤던 선배들의 모습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왜지? 기분이 이상한데, 이유를 모르겠다. 진실을 알았다 한들 자신은 여전히 판도라의 히어로고, 따라서 이 삶 마땅히 시민의 안녕을 위해 바쳐야 하는 것이 맞을진대....
"....... "
헤르마는 탁한 숨을 내뱉었다.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빼앗겼거나.
그대로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무게 중심이 허공을 짚는다, 그대로, 헤르마가 난간에서 떨어진다.
아찔하게 몸을 스치는 바람, 정말, 베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온몸을 감싸는....
"...."
그리고 눈을 뜨면 기숙사의 방 안이다. 아이온에게 은근슬쩍 자랑하고 만 거대한 동물 침대와, 오후 엘이 건네주었던 곰인형이 헤르마를 푹신하게 반겨주고 있었다.
깜빡, 깜빡, 눈을 자꾸만 깜빡였다. 취객, 다른 이능력자, 아니지. '인재'의 일원들이 제게 건네주었던 이야기가 불쑥불쑥 수면 위로 떠올랐다.
냉기로 얼었던 팔뚝이 시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동상까진 가지 않았지만 목을 스치던 위협이 심장을 콱 쥐어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약을 먹어야 하나. 먹지 말아야 하나. 기본적으로 명령은 복용을 이야기하니, 역시 끊지 않는 것이 맞다. 그렇다 해서 이 사건을 상부에 알리는 행동도 하지 않는다.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현재 처지에 분노하지도 좌절하지도 않는다. 그저 헤르마는 명령을 따른다. 지금에서는 그 명령권자가 케이일 뿐이고, 어쩌면 다른 히어로 선배들일 뿐이다.
곰인형을 더 끌어안으며 숨을 내쉰다. 죽는 것도, 자유를 상실한 것도, 목줄 차고 시민의 개가 되는 것도 상관 없다.
그저, 헤르마가 정녕 두려운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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