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쫓기며 누군가 손을 붙잡아 저와 함께 달아나는 상상을 했다. 해묵은 과거가 뒤집어지는 순간은 그만큼 극적이나 꿈결 같아 현실감을 자못 떨어뜨렸다. 칼같이 잘린 단발머리 사이로 레몬향의 궤적이 스치는 것만 같았다. 삶이 엉망진창으로 무너지는 때에도 저를 끌어올려주려고 힘을 내는 사람이 있구나,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있구나.
때때로 미래를 기약한다는 것이 축복처럼 느껴질 적이 있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더라도, 하다못해 '호그스미드에 함께 가자'는-하잘 것 없는 이야기더라도 그런 약속들을 곱씹노라면 현재에 닥친 어려움이 크기를 줄였다.
"제가 나쁜 걸까요?"
그렇게 떠도는 소문과 관련하여 뭇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답은 제각각이었다.
"난 그냥. ... 네가 잘 헤쳐나가길 바랐을 뿐이야.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 아니면 지금 넌 내가. ... 나쁘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네 자기중심적인 면 때문에 선배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을지도 몰라. 아닌 척했지만, 그래서 부담스러웠는지도."
열네 살의 리리아 터너는 옳고 그름을 분간하는 힘이 떨어진다. 세상에 휘둘리고, 겨우내 '지금의 시대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최근이었다. 특히나 게일 켄드릭스라는 사람은 속내를 보여준 적 없어 와닿는 조언을 듣기도 어려웠다. 어쩌면 리리아는 정말 자신이 나쁘냐는 물음에 대한 답보다는, 술렁이는 마음을 진정시켜줄 품을 원했을지도 몰랐다.
"있잖아, 리리아."
리리아는 고개를 들어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다독임을 들었다. 에스텔 애티커스는 손을 잡는 것조차 어색해하나 곁에 조용히 머물러주는 시간이 길었다. 조곤조곤 내놓는 말은 푸른색이 주는 신용을 힘입어 가슴에 녹아들었다. 리리아는 비죽 튀어나온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눌러 닦아냈다.
에스텔 애티커스가 말을 잇는다. 나쁘지 않아. 지금 사회에서 머글본 마법사들은 수많은 불확실한 상황에 놓여있잖아. 누굴 믿는 것 자체가 불안하게 느껴질 수 있는 상황이야. 나쁘지 않아. 순간순간 느끼는 네 감정을 탓하면 안 돼. 너는 네 가장 좋은 편이 되어줘야지.
손을 잡는 것조차 어색해하던 에스텔은 기꺼이 리리아의 위로를 위해 손을 내어준다. 천천히 손을 엮어 붙잡으면 언뜻 저보다 낮은 체온이 끼쳐오나, 그마저도 희미한 미소를 지어내게 하는 까닭은 그 속에 담긴 온유함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쁜 사람 같진 않아. 그러니까. 조금 기다려주면? 물론 선택지 중 하나로."
그런 음성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억지로 납득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납득하려 노력해보는 시도를 거치게 하며 날 선 마음을 부드럽게 녹인다.
"대신, 내가... 이렇게 말했으니까 같이 기다려줄게."
그럼 조금 덜 불안할까? 처음 겪는 비자발적 도피는 레몬향이 났고, 사탕을 굴릴 때 이따금 혀가 베여 느껴지는 아릿함보단 달콤한 맛을 가져다주었다. 특히나 어린 마음엔 단 사탕을 입에 담은 뒤로 계속 사탕을 입 안에서 굴리고 싶어 애가 타는 것이다. 하지만 욕심을 내면 안 돼. 마시멜로를 다시 먹기 위해선 10분어치의 인내가 필요하다.
리리아는 울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론 저보다 한참 나이 많은 선배를 기다려달라는 말이 억울하게 들려오기도 했지만, 그 말을 꺼낸 것이 에스텔. 당신이니까. 가슴을 진정시킨다. 새콤하고도 단 향에 집중했다.
"……약속하신 거예요?"
아마 에스텔 애티커스는 그 말에 온호한 미소를 짓겠다. 리리아는 맞잡은 손에 아주 조금, 더 힘을 주었겠고. 그러니 리리아는 더 인내하기로 한다. 믿어보기로 한다. 아쉬움이며 서글픈 마음을 한데 모아 억누르고선.
"함께, 기다려주시기로요."
* 해당 타래는 여기서 끊어져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도 드네요… 자유롭게 부탁드립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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