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ro헤도ro AU
사건의 발단이 언제였더라. 짐작할 수 있을 것처럼 문장을 써두긴 했지만 짐작은 개뿔,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냥 기억나는대로 최근 일을 늘어놓아보자면….
먼저는 꽤 오래 지내던 거처의 위치가 발각되어 질기게도 추격당했다. 아가씨의 고양이들을 한보따리에 바리바리 싸들고 도망치려니 안에 있던 옷이며 현금, 가전제품같은 건 미쳤냐고 챙길 엄두도 못 냈다. 한 손엔 고양이 보따리, 한 손엔 아가씨를 들고 폭주 기관차마냥 도망치는 와중에도 총알은 제 집 방문하듯 친근하게 그의 다리를 지나다녔다.
그의 전신은 물론이고 아가씨의 어깨와 고양이 몇 마리도 끝내 곤죽이 되었다. 보자마자 연기를 내뱉어 치료하기야 했다만, 끝내 아가씨의 눈에선 고통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반쯤 갈린 그의 머리는 당연히 뒷전이었다.)
툭, 물방울 하나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얼마나 크겠냐 싶겠지만, 그렇다면 손에 쥔 고양이 보따리가 심장 위로 굴러 떨어진 것 같던 충격은 어디서 찾아왔을까.
반나절을 따돌린 끝에 간신히 은신처에 아가씨와 고양이들을 풀어둘 수 있었다. 추격이 완전히 끊긴 게 아니었던지라 뒷골목의 쇠파이프를 뜯어낸 아이작은 몸을 최소한으로 치료했다. 머지 않아 개들이 또 쫓아올 것이다. 피범벅이 된 얼굴을 너덜한 소맷자락으로 훔쳐낸 아이작이 퉷, 입에 고인 피를 뱉었다.
그 사이 고깃덩이가 되어 한 데 엉킨 고양이들을 죄 살려낸 아가씨도 순백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상의 모습은 지는 해와 함께 어둠에 잠겼는지 흙먼지며 피, 살점으로 더러워진 살갗이 보기에도 답답했다.
그런 아가씨를 바라보던 아이작은 역시 고려했던 작전을 저 하늘 너머로 던져 치워버렸다.
추격자. 그러니까 ‘개’들. 아이작이 과거 몸담았던 조직의 마법사들은 너무도 끈질겼다. 애당초 아이작과 아가씨의 인연도 그 조직의 명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는가.
1년 전 쯤인가. 아이작은 죽은 것을 되살리는 마법을 지닌 아가씨, 이스피어를 납치하여 조직에 넘기기 위해 틸다 가에 투입되었다. 말이 납치지, 납치가 불가능한 때엔 다른 마법사가 소유할 수 없도록 차라리 살해하는 것을 전제로 둔 임무였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는 건물 더미에 깔린 아가씨를, 죽음 목전에 잠들던 여자를 그냥 두지 못해 꺼냈다. 치료하여 곁에 두었다. 끝내는 지금처럼 영원할 추격을 감당하면서까지 이스피어를 보호했다.
이유따윈 모른다. 알아내려 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생각 이전에 몸이 움직였다.
단지 어떤 사람이라도 그를 버리고 떠나려는 사람에게 그 새하얀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노라면….
“아이작.”
“…예, 예? 아가씨.”
부름에 상념에서 깨어난 아이작은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익숙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시야를 맞추자면,
아. 정말이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눈빛이다. 텅 빈 유리알처럼 공허한 금빛 눈동자가 그의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것은 되려 비어있기에 들어서는 빛을 하나하나 귀히 세공하여 산란시킨다. 인간적이지 않아 사물에 가까운 아름다움. 이런 눈빛을 가진 자야지만 원초적인 공포-죽음-에서 인간들을 구원할 수 있는 걸까. 상념이 스친다.
“우리 ‘집’으론 언제 돌아가?”
질문에 끙,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온 아이작이 도르륵 눈을 굴렸다.
“이제 그곳으론 못 돌아가요, 아가씨. 대신 빨리 새 집을 찾아볼게요.”
“…….”
아가씨의 눈은 끝부분이 위로 뾰쪽 올라가 고양이를 연상하게 했다. 다만 그런 눈을 저렇게 큼지막하니 뜨고 다니면 그 눈매가 둥글둥글해지는 착각이 일었던지라…. 지금처럼 그런 눈을 꿈뻑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이작은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며 ‘그래서 무얼 원하세요?’라고 말하고픈 욕망에 빠졌다.
사실은 죽은 걸 소생시키는 마법이 아니라 타인을 조종하는 마법을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작은 남몰래 그렇게 의심하곤 했다.
“…그, 예전 집은 왜 찾으세요?”
“두고 온 게 있어.”
“두고 온 거요?”
“응.”
그리고 지금.
그 둥글둥글한 눈 앞에서 그의 육체는 또다시 이성을 배반하였다.
“…뭘 두고 오셨는데요?”
* * *
결론부터 말해 아이작은 예전 집에서 이스피어가 두고 온 물건을 가지고 오는 것에 성공했다. 예상대로 예전 집은 마법사 놈들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징그러운 놈들. 추적에 쓸만한 물건이나 단서라도 보려는 건지 뭔지. 아이작의 생각보다 개의 수가 많긴 했지만 아이작은 즉사하지만 않으면 뭐든 치료해내는 마법을 가진 마법사였고, 그런 이유에서 그는 ‘즉사만큼은’ 피하는 데 도가 터 있는 사내였다.
하지만 같은 이유에서, 아이작은 목숨에 지장이 가지 않을 법한 공격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마지막 남은 마법사의 목을 뜯어내기 직전 그 놈의 마법이 아이작의 피부에 스며들었다. 뭐지? 처음엔 이상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굴러 떨어진 머리에서 가면이 떨어져나갔다. 마법사의 얼굴은 반쯤 녹아있는 상황이었다. 눌어붙은 피부가 간신히 얼굴이란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상태. 아이작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긴 세월동안 무언가가 차근차근, 그의 얼굴을 갉아먹은 것이었다.
높은 확률로 그 자신의 마법에 영향받았으리라.
이스피어가 말한 물건을 챙기고 돌아오는 길에서부터 이상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시야가 빙 돌아가며 일그러졌고, 다음 순간 아이작은 휘청이다 무릎을 바닥에 박고 주저앉았다. 투둑, 축축한 것이 코에서 떨어져 입가를 타고 바닥에 떨어졌다. 코피다.
30초 뒤. 그의 몸에 난 모든 구멍에서 일제히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아이, 썅…."
독이었다.
* * *
‘마허릿의 불사신’이란 거창한 이명을 달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은, 사실 아이작은 쓰레기와 시체더미를 뒤져 간간이 생존하던 꼬맹이 하나였다. 고작 꼬맹이 하나.
아무리 그가 생과 사의 기로에서 악착같이 생으로 돌아오는 능력을 가졌다고 한들 힘이, 힘이 없다면 버러지일 뿐인 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가 가진 능력은 ‘유일한’ 수단이 아니었다. 최초로 뒷골목을 벗어날 수 있었던 기회가 온 건 순전히 운이었지만, 그 이후는 아니었다.
불사신, 아이작은 지독하게도 끈질겼다. 악착같았다. 한 번 문 상대는 이빨이 다 뽑혀져나가도 턱뼈가 뜯겨져나가도 포기하지 않았다.
매번 죽음이란 절벽에 내몰린 상황에서 어떻게든 복귀할 수 있었던 건 능력의 덕도 있었지만 그 이전에. 그의 정신력 덕분이었다.
마법을 뱉고, 삼키고, 뱉고, 삼키고, 뱉고, 삼키고, 또 뱉고, 삼킨다. 그의 피부 아래로 스며든 독은 혈관과 뼈를 녹이고 근육을 찢었고 오장육부를 젤리처럼 뭉게갔다. 아이작은 제대로 걸을 수 없는 몸을 초 단위로 회복시키며 걸어갔다. 재차 마법을 뱉고, 삼키고, 뱉고, 삼키고, 뱉고, 삼키고, 그렇게, 그가, 새로운,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계속 그리했다.
끔찍한 작열통 한가운데 활활 불타는 뇌가 제발 죽여달라고 그만 삶을 포기해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와중에도 끝내 현관문 앞에 선 그는, 그의 돌아올 곳이 되어 준 여자의 앞에서야 무너질 수 있었다. 핏물로 흐려진 눈을 꿈뻑이며 바라본 상대의 상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최대한 이스피어를 눈에 담으려 눈에 힘을 주었다. 그가 녹아내리는 성대를 회복시키며 말했다.
“여기요. 아가씨가, 부탁한 거….”
시시각각 뭉게지는 손가락으로도 놓지 않았던 물건을 건네자 마침내 그의 두 다리가 풀썩 꺾이고 말았다. 힘빠진 종이인형마냥 이스피어의 위로 엎어진 그의 시선이, 정신이 까무룩 어둠에 잠겨들었다.
“……아이작?”
상대가 그의 몸을 끌어안는 듯 했다. 그 손길이 지나는 곳곳마다 불길이 치달았다.
아, 정말이지.
뒈지게 아프네!
* * *
그렇게 그는 일주일 가량 생과 사를 넘나들며 독과 싸웠다. 그의 마법이 독의 치유까지엔 미치지 않는단 사실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진즉 알고 있던 상황이었다. 과거에 나름 대비를 다 세워두기도 했다. 예로 조직에 있었을 때의 그는 틈이 날 때마다 치사량 직전의 양이 되는 독을 자신에게 투여하여 쌩으로 버텨 내성을 얻던 미친놈이었다. 그런 미친 짓거리를 통해 그는 마취약도 제대로 통하지 않을 정도로 어지간한 독의 내성을 몸에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있었던 건데, 웬걸.
녹아내리고 있었던 마법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법사 자신의 수명마저 갉아먹을 정도로 강력한 독은 아무래도 규격 외의 마법이었다.
확실히 '녹아내리는' 고통은 과거 그가 겪었던 고통과는 차원을 달리 하고 있었다. 마법사의 지갑을 훔치다 걸려 내장이 전시당했을 때보다, 상대 조직에 잡혀 삼일 밤낮으로 갖가지 고문을 당했을 때보다도 지금이 더 정신줄을 놓기 직전이었다. 정보를 캐내야 하니 뇌는 남겨두어야 했던 고문과 달리 이 독은 뇌까지 잘근잘근 녹여 삼켜서 그런가.
손가락이 잘리고 팔이 부숴지고 뼈가 박살나고 내장이 뭉게지고 어그러지는 고통에는 이골이 나있던 아이작조차 자살욕구가 치밀 정도였다. 그 놈을 그렇게 쉽게 죽이는 게 아니었는데! 열 바퀴 돌아있는 정신으로도 그리 생각했다.
쿨럭,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내뱉고 녹아내린 안구 탓에 무엇도 분간할 수 없어 입을 열자 하니 혀가 제 말을 듣지 않아, 그는 다시금 마법을 뱉고, 삼키고, 또 그러기를 반복했다. 지옥같던 고통이 찰나 잦아드나 싶지만 그것은 또다른 시작이다. 그의 삶은 언제나 그랬다. 아니, 누구나의 삶이 다 그런 형상이겠지. 나아지나 싶으면 나락으로 처박히는 게 대개의 인생이지 않나.
그러다보면 마법조차 고갈되어 아무리 켁켁되어도 고통이 잦아들질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렇담 이 짓거리를 한 지 한 삼일쯤 지났으려나.
꼴딱꼴딱 넘어가려는 숨을 간신히 붙들고 있다보면 그가 토해낸 내장 조각을 누군가가 닦아주는 손길이 있었다. 손가락이 스친다. 시체마냥 차가운 온도. 말랑거리는 살결. 익숙하다. 그러지 않았어야 했는데.
아가씨다. 그것에 안심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대상을 찾으려 그가 눈동자를 굴렸다. 시선이 닿았나. 모르겠다. 그래도 곁에 있단 건 확실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는 아주 잠깐만 삶을 내던지고 죽음이란 또다른 고향에 발길을 딛는다….
…헉!
어느 순간 숨을 터트림으로써, 그가 생이란 지옥으로 복귀한다. 누군가가 일시정지를 눌렀던 그의 삶을 0초로 돌리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입맞춤이란 형태를 통하여서 삶을 부여한다.
'다시 또 와.' 친숙한 죽음이 그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래. 한순간 잊었던 사실을 되새겼다. 그는 죽지 않는다. 그를 죽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의 곁엔 죽음을 다스리는 천사가 있으니까. 햇살 지는 낮 노란 꽃더미를 한아름 끌어안고 언제든 자신을 삶으로 이끌고 돌아가는 아가씨가 있었으니까.
그래….
다시 삶이란 박투의 시작이다.
* * *
몇 번의 죽음과 소생을 거치며 끝내 독을 이겨낸 그가 완전히 정신을 되찾은 건 4일 뒤의 일이었다. 겨우내 죽음이란 고향에서 삶으로, 짐을 싸들고 돌아온 그가 처음으로 발견한 건 옆구리에 콕 박혀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던 그의 아가씨.
그러나 감격보다 앞서는 경악이 있었다.
찐득하게 녹아내린 살덩이, 핏덩이들이…. 그의 몸과 이스피어의 몸에 잔뜩 붙어있었다. 심지어 몇몇 곳엔 파리나 구더기가 꼬여 있기까지 했다!
그 참혹한 광경과 끔찍한 냄새-사실 후각 세포가 피로해져서 냄새는 별로 나지 않았다-에 아이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아….”
단전에서부터 우러나온 한숨이 허공에 터졌다.
그래도 그 뒤로는 무난히 일상으로 복귀해가는 듯 했다.
잠에서 깬 이스피어는 아이작의 뺨을 콕콕 찌르며 “아이작이다. 진짜 아이작.” 같은 말을 중얼거렸고, “그럼 제가 진짜 아이작이지, 가짜 아이작이겠어요?” 같은 답을 한 아이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읏차, 이스피어를 안아들었다. 둘 다 꾀죄죄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었으니, 목적지는 당연히 욕실이었다.
무어라무어라 쉬지 않고 종알대는 아가씨를 박박 씻기는 일은 확실히 막 병상에서 일어난 몸으론 고단했다. 무엇보다 이전 집은 욕조가 가득 찰 정도로 고무오리가 가득했는데, 급하게 구한 이번 집엔 고무오리가 고작 다섯 개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아가씨의 불평불만을 곁들인 목욕은 장장 세 시간에 걸쳐 끝이 났고, 아이작은 간신히. 정말이지 간신히 욕실에서 빠져나와 선풍기 앞에 아가씨를 앉힐 수 있었다. 핏덩이와 고름, 이제는 안녕이다! 다만 수건으로 탈탈탈 긴 머리를 털어주면 아가씨는 평소처럼 노곤노곤한 표정을 짓…지 않고, 거울 너머의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일상을 벗어난 그 시선을 뒤늦게 눈치챈 아이작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뜨거워요? 그럴 온도는 아닌데.”
머리를 말리고 있던 헤어드라이기의 바람을 제 손등에 쏘아본 아이작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스피어가 도리도리 고개를 젓자 그의 표정은 점점 미궁에 빠져갈 뿐이었다.
“아니면 가운이 불편해요? 옷 새로 입혀드려요?”
3시간의 목욕에 지친 터라 대충 걸쳐준 가운은 끈이 묶여있지 않아 앞섶이 쫙 벌어져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추울만한 온도는 아닌데. 아이작이 끈을 묶어주려 헤어드라이기를 옆에 내려놓고, 이스피어의 허리를 반쯤 끌어안으려던 때였다.
그래. 시작은 이랬다.
쇽.
“…….”
“…….”
“아가씨?”
“…….”
이스피어의 몸이 앞으로 크게 숙여졌다. 하지만 고개를 반쯤 돌려 아이작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는 여전해, 그 자세가 다소 기괴했다.
“…….”
눈을 꿈뻑인 아이작이 다시 가운의 끈을 묶어주려 한 번 더 몸을 기울이자, 후다닥! 이번엔 몸을 크게 돌려 아이작을 마주보는 자세로 엉덩이를 뒤로 뺐다. 이게 고양이인지 사람인지, 도통 분간이 가지 않는 모습에 아이작의 얼굴엔 물음표만 더 새겨지고 있었다.
“…알겠어요. 뭔진 모르겠지만 안 할 테니까 다시 와서 머리나 말리죠, 예?”
“…….”
그러자 그의 말마따나 ‘뭔진 모르겠지만’ 문제가? 해결된 모양이었다.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자리로 돌아온 이스피어가 얌전히 등을 돌려 앉았던 것이다. 아이작은 다시 되찾은 평화에 더 말을 붙이지 않고 열심히 머리카락을 말렸다. 지치기도 지쳤으니 함께 만두나 사서 먹고 늘어지게 잠을 잘 요령이었다.
이번 일은 잠깐의 기우라고 생각했다.
* * *
정말 이 뿐인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지기까지 했다.
'문제'가 정확히 뭐냐고? 그래. 좀 직관적으로 말한다.
아가씨가 그와 얼굴이 가까워지는 상황을 피했다!
저 일을 시작으로 조금이라도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려 하면 고양이처럼 스윽 빠져나가 경계를 하고 보니, 응당 아가씨에게 무력행사를 할 이유도 마음도 일절 없는 아이작은 두 손을 든 채 난감해했다.
무엇보다 그 덕에 ‘미묘한’ 분위기가 잡힐 때에도 아이작은 고통받아갔다. 이를테면 그런 순간 있지 않은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늦저녁, 다 꺼져가는 전등불 하나 딱 키고 낡은 구식 텔레비전을 함께 시청하던 아가씨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릴 때.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그 자세 그대로 말간 목소리를 내어 말할 때.
“아이작.”
이전이었다면. 그러니까 평소였다면 아가씨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 졸려.”
‘나 외로워.’
하고.
…….
예의 ‘그런’ 상황인 줄 알고 익숙하게 고개를 숙이려던 아이작의 행동이 딱 멈추었다. 그런데. 엉? 엥?
‘그게’ 아니라고? 그냥 졸리시다고?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어안이 벙벙하여 이스피어를 바라보자, 이스피어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눈만 꿈뻑꿈뻑이며 아이작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재촉까지 했다.
“나 졸리다니까.”
아이작이 목덜미를 긁적였다.
“…예에. 뭐. 자러 가요.”
하며, 침실로 들어가는 날도 한 두 번이지.
이런 일이 몇 번을 반복하며 이어지자 아이작의 인내심은 조금씩 조금씩 한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래.
속된 말로 쌓였다. 제기랄!
그의 순진한 아가씨를 앞에 두고 그득그득한 욕망을 억누르는 것도 슬슬 힘들었다. 자괴감과 자기혐오가 소용돌이치듯 그의 마음을 찢어발기는 한 켠, 부정할 수 없는 욕망이 그럼에도 슬금슬금 제 자리를 늘리고 있었다. 염치도 없는 것.
더군다나 이스피어는 그가 모르는 순간마다 그가 알 수 없는 일을 꾸미는 것 같았다. 손가락 끝에 바늘같은 게 자꾸 찔려 다쳐오시는데, 아니, 웃긴 게 숨길거면 제대로 숨기던가 상처가 나면 쫑쫑 그에게 걸어와 당장 상처 치료를 요구한다. 대놓고 ‘나 뭐 하고 있어요’를 티내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물어봐도 답은 없고 숨기고 싶어하는 눈치니, 아이작은 눈 가리고 아웅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또 조금이라도 얼굴이 가까워질라 치면 휙 몸을 돌려 피하고, 경계하고, 냅다 방으로 들어가버리니 원.
끝내는 욕망의 승리였다. 일주일이 두 번 지나고서도 상황에 진전이 없자 그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요즘 왜 그러시는 거예요?”
“…나?”
“예. 아가씨요.”
“내가 뭘?”
“요즘 자꾸 피하시잖아요.”
“뭘?”
“저를요.”
“아이작을?”
“네.”
바보같은 문장이 짧게짧게 오간 뒤에도 이스피어 특유의 맹한 표정은 여전했다. 도르륵, 한 바퀴 눈을 굴린 이스피어가 몇 초 뒤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아니. ‘그래’,도 아니고 ‘그럴지도’는 또 뭐예요?”
아이작이 황당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긁적였다.
“이유나 들어보자고요. 불편하셨던 게 있으셨어요?”
“…….”
“원래는 그. 저. 뭐냐.”
“…….”
“…그….”
아이작은 이성과 욕망과 도덕-존재하긴 했나?-사이에서 갈등하며 말을 절었다. 하나 이미 서두를 꺼냈으니, 칼을 뽑은 자는 무라도 썰어야 하는 법이었다.
“아가씨도…. 좋아하셨던 거 아니에요?”
“…내가. 뭘?”
지금도 봐라. 예전이었다면 집고양이마냥 그의 품에 폭싹 안긴 채로 물어보았을 질문이었는데, 지금은 소파에 앉은 엉덩이를 들썩이지도 않았다. 조금 기분이 술렁술렁 묘해진 그에게 순간 섬뜩한 가정이 스쳤다.
설마.
‘설마…. 질리셨나?’
질린 건가? 자신에게?
…왜?
갉작, 갉작, 초조함이 쥐처럼 마음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를 애써 무시하며, 아이작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저랑. …저랑 하는 거요.”
“…….”
이어진 것은 정적이었다. 아이작은 지금이 자신이 자살해야 할 타이밍인지 10초정도 고민했지만, 어차피 죽음이란 회피를 택해도 바로 살려낼 대상이 눈앞에 있었으니. 그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뜨린 것은 이스피어의 쪽이었다.
“아이작이랑 하는 건 좋아.”
“그럼 왜,”
덜컥 말을 내뱉으려던 아이작이 가까스로 입술을 깨물어 자신을 제어했다.
“근데. 그러면 왜 제가 가까이 가면 피하시는 거예요?”
“음….”
째깍, 째깍. 길어지는 이스피어의 고민을 따라 있지도 않은 시곗소리가 아이작의 머리를 어지럽히는 것 같았다. 원래 그는 이렇게 생각이 많은 놈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여러모로 저 골때리는 아가씨를 만난 뒤에 뒤집혀갔다. 그가 지키던 원칙도, 존재하지 않던 삶의 목적도, 그리지 않던 미래도.
그러니 이스피어 틸다. 그의 아가씨는 그에게 딱 하나만. 단 한 가지만 지켜주면 되었다. 이리저리 엇나가고 다른 길로 새기 일쑤인 당신임은 이미 알고 있으니 다른 건 다 상관이 없다.
적어도 아가씨는,
그가 곁에 머무르는 것만큼은 허용해야 했다.
스킨십 자체가 싫어진 것이라면 그가 그것에 맞추면 될 일이다. 중요한 건 몸을 맞대고 섞고, 욕망에 휘둘리는 그런 순간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직전에 스친 섬찟한 예감. 고양이를 제외하면 수많은 것에 쉽게 싫증을 내는 그의 ‘아가씨가 그에게 질렸을지도 모른다’는 문장. 그것만 아니라면 되었다. 아이작이 초조함을 누르며 말했다.
“그, 이제 와서 싫어지신 거면 그냥 편하게 말씀하셔도 되니까,”
“자꾸 생각나.”
“-예?”
그런 그의 말을 가로채간 것은 이스피어가 허공으로 눈을 돌리고 툭 말을 뱉었다. 아이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람. 그의 고개가 기울었다.
“뭐가요?”
답지 않은 침묵 끝에 아가씨가 말하길.
“아이작이 죽는 거.”
“제가 죽는 거요?”
…예상치 못했던 답변이었다. 자신에게 질렸나 싶던 두려움에 까맣게 우글거리던 사고회로가 동작을 멈추었다. 좌로도 우로도 굴러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섰다. 되려 차분해진 아이작이 그를 돌아보는 이스피어와 눈을 마주했다.
진상 공개의 시간이었다.
“아이작이랑 키스하려고 하면 자꾸 아이작이 죽어있던 게 떠올라.”
아이작으로선 엥스러운 답변이었다. 대체 왜 어디에서 자신의 죽음이 상기된단 말인가? (아이작으로선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입을 맞춰야 살릴 수 있으니까. 이번의 아이작은 과하게 잠꾸러기였어.”
아이작은 자신이 죽어있을 때 홀로 살아있었을 이스피어가, 어떻게 그를 소생시키는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에 생각이 다다른 아이작의 입술에서 아, 숨이 터지듯 새어나왔다.
그러니까.
아가씨는 그가 홀로 싸우러 나갔을 때의 일을 알 수 없다.
동시에, 그는 아가씨가 홀로 살아남겨졌을 때의 일을 알 수 없다.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 터진 모양이다. 이처럼 거부의 형태로.
아이작은 고민했다. ‘에이, 뭐 그런 것 때문에 그러세요. 앞으론 그럼 안 죽어볼게요. 저 믿죠?’ 같은 말을 어떻게 지껄일 수 있을까. 세상은 넓고 빌어먹을 마법사들은 다양하고 그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전지전능한 신에 가까운 마법사는 차라리 목전의 아가씨가 더욱 가까웠지 않나.
인간의 형상을 입은 신을 탈취하고자 눈독을 들이는 개들은 수없이 많으니, 그를 지키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 해야하는 그는 모순적이게도 누구보다 더 죽음의 경계에 자주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숱한 죽음으로 아가씨에게 그가 없는 외로움을 알려준 모양이었으니까. 아이작이 물었다.
“입을 맞추면, 제가 죽었던 게 떠올라요?”
“응.”
“아가씨는 입을 맞춰서 절 살리시니까요?”
“응.”
끄덕끄덕 기울어지는 고개를 보던 아이작은 그러나. 그에 불현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거리를 두고 서있던 몸을 움직여 소파에 앉은 이스피어의 앞으로 느릿느릿 걸어가기까지 했다.
“그럼 해결은 쉽겠네요.”
선뜻 가볍게 내뱉은 말은 지금까지 그가 고민해왔던 결에도 이스피어가 받은 상처와도 어울리지 않았으나, 무거운 분위기를 반전시키기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피어 앞에 선 그가 이스피어의 도주를 방해하듯 두 손으로 소파 등을 짚으며 몸을 숙였다.
약속은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면 될 일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건 아이작과 맞지 않았다. 그는 진득한 감정의 골과는 원체 연이 없는 사람이었으니.
얼굴이 가까워지자 이스피어가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지만, …피할 기색은 없어보였다.
그런 이스피어를 내려다본 아이작이 찰나에 생각했다. 다소 유치한 생각이었다. 2주라는 시간동안 자신이 그러했듯 아가씨도 그러했을까.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몸이 달았던 것처럼 아가씨도 좀, 그랬을까? 아가씨도. 자신처럼 애닳아했었을까.
새까만 속내를 입술 아래로 감쳐물은 그가 조용히 웃었다.
“아가씨는 계속 그렇게 절 살리세요. 저는 그럼 ‘다르게’ 입 맞추면 될 일인 거죠. 뭐.”
“…….”
아이작의 말에 살며시 기울어지는 고개가 사랑스러웠다. 이스피어의 시선이 그의 입술에 닿아있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이번의 침묵은 이전과 달랐다. 긍정. 그 뜻에 그가 고개를 숙였다.
시작은 같다. 두 입술이 닿아 살며시 벌어진 사이로 숨결이 닿는다. 여기까지는 이스피어의 키스.
그렇다면 이제는 아이작만의 키스로 변주해야 할 때였다. 그래. 원래라면 아이작은 이곳에서 멈추었어야 했다.
이유를 말하자면 아가씨는 아이작과 같은 뒷세계의 사람이 감히 건드리지 못할, 새하얀 사람이었다. 물론 몸까지 섞은 마당에 그가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요점은 그에게도 미처 침범하지 않은 영역이 있다 이 얘기다. 자신의 더러운 욕망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이스피어도 자신과 비슷한 수준으로 자신을 욕망해야 했다. 그런 욕망의 선들을 먼저 넘는 건.
최소한 그는 아니어야 했다.
그랬는데.
아이작이 거기서 입을 더 벌려 혀를 미끄러뜨려 넣었다.
입 안. 지금까지도 감히 넘어서지 못했던 그 영역으로.
“…….”
긴장이 들어간 이스피어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소파를 짚었던 아이작의 손은 이스피어의 양 어깨를 감싸 부드럽게 쥐었다. 안으로 들어선 그의 혀는 부드럽게 입천장을 자극하고 있었다. 끝에 닿아 문대질 때마다 이스피어의 어깨가 움찔움찔 떨렸다. 입맞춤 아래 뭉그러지는 숨소리가 촉각의 형태로 전달되고 있었다. 아이작의 엄지 손가락이 둥글게 이스피어의 어깨를 쓸었다.
떨림이 가라앉는 듯 싶자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혀를 맞대어 얽기 시작했다. 이스피어의 두 손이 어느덧 아이작의 옷자락을 세게 붙잡고 있었다. 얽힌 혀가 꿈틀거릴 때마다 이스피어의 손도 따라 움찔댔다. 혀뿌리를 크게 휘감듯 움직여 끌어낼 때면 두 다리가 좁혀들기도 했다. 일련의 반응들에 그의 이성이 좀먹히기 시작했다.
그래. 원래라면 단순히 입을 맞추는 동작에서 멈추어야 했다. 그것은 이스피어가 너무도 새하얀 사람이라 그의 죄책감이나 있지도 않은 도덕심을 건드린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은.
여기까지 닿아버리면 그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혹여나 그의 아가씨를 아프게 만들기라도 할까봐. 아이작은 나름의 선을 그어 그 자신을 자제시켜왔다.
그런데 지금 자의적으로, 또 타의적으로 그 선을 훌쩍 뛰어넘어버린 상황에서 아이작의 이성은 역시나 그가 예상했던대로…. 시시각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폭탄 끝에 달린 줄에 불이 붙어 빠르게 타들어가고 있는 이 상황, 아이작은 직전에 가까스로 입술을 떨어뜨리는데 성공했다. 큼. 힘이 들어가려는 손에서 힘겹게 힘을 풀어내며,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했다.
“어…때요.”
그 사이 가빠진 숨은 자신을 통제하는 데 소모한 기력 탓이리라. 아이작이 살짝 부어오른 것처럼 새빨개진 이스피어의 입술을 번들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강렬한 욕구를 드러내는 몸을 이성이 호되게 질책했다. 여기서 끊어내야겠지. 더 하면 폭탄이 펑 터져버리고 말 테다.
아이작이 급히 마무리하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랑 앞으로 하는 건…. 이렇게 하는 걸로요.”
그럼 문제 없으시겠죠, 아가씨? 그가 고개를 들어올린 때였다.
금빛 눈동자가, 그의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것은 평소 텅 빈 유리구슬처럼 공허하게 비어있기에, 들어서는 빛을 하나하나 귀히 세공하여 산란시킨다. 인간적이지 않아 사물에 가까운 아름다움을 뽐냈다. 그랬는데.
…그는 그가 아가씨와 할 때. 그런 때에 아가씨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없었단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왜 그렇게 몰랐던 게 이렇게 많았지? 그는 자신이 천하의 멍텅구리임을 이렇게 또 깨달았다.
울렁이는 수면처럼 들이치는 파도처럼 일각일각 넘실대는 금빛이 본인의, 본연의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왜,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붉고도 노랗게 물들어야 할 해 질 녘 하늘이 이상하게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어버리는 어느 날. 그런 날처럼 아가씨의 눈이 선명하고도 선연한 색을 품고 아이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도 또렷하게 보였다. 이스피어의 생각이, 감정이, 아가씨가 바라는 것이.
그럼에도 구태여 음성을 통해 이르나니.
“아이작,”
그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
“…해줘.”
확실한 욕망이었다.
* * *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 것 같은 순간마다 아이작은 제 몸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자제하려고 용썼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아가씨의 입술은 퉁퉁 부어 오리가 되었다. 그걸 볼 때마다 아이작은 자괴감에 피지도 않던 담배라도 피우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아침 메뉴는 샐러드와 계란볶음밥. 볼을 둥글게 부풀리며 오물오물 잘 먹는 이스피어를 멍하니 바라보던 아이작이 돌연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래서 안 알려주실 거예요?”
“…?”
우물우물, 꿀꺽. 입 안에 들어있던 음식을 삼킨 이스피어가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무얼?”
아이작이 이스피어의 손을 가르켰다.
“계속 다치셨잖아요. 뭐 만들거나 하시던 거 아니었어요?”
“…아. 그거.”
순간 이스피어가 식기를 내려놓고 냅다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엥? 읭? 이렇게 오래 봤어도 행동이 도통 예측되지 않는 아가씨렷다. 아가씨, 밥은 다 먹고 가셔야죠! 이스피어를 뒤따라 일어나려던 아이작은 뭔갈 들고 돌아오는 이스피어의 모습에 동작을 멈췄다.
“아이작.”
손에 든 것은 이스피어가 아이작에게 전 집에서 가져와달라 부탁했던 것이었다. 그것을 손에 쥔 이스피어가 아이작에게 까딱까딱 손짓하자 아이작이 얼떨떨하게 제 손을 내밀었다.
설마. 진짜요? 여기서요? 갑자기요? 쏟아지는 의문들을 감히 입 밖으로 뱉진 않았다.
“아이작은 맨날 다치고 죽어서 오니까….”
그러니까 이걸 아침밥 먹다가 얘기를 꺼내신다 이 말이죠.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아이작이 눈을 깜빡였다.
이스피어가 그것을 아이작의 네 번째 손가락에 천천히 끼우기 시작했다. 그것의 무게와 달리, 음성은 한없이 가볍다.
“부적이야.”
그것의 은색 표면엔 삐뚤빼뚤하게 알파벳이 음각되어 있었다. 이걸 새기다 그렇게 다치셨던 건가.
“이번처럼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오라는.”
ISAC.
그만을 위한 은색 반지가 그의 약지에 끼워졌다. 사이즈를 제대로 알아보긴 한 건지, 반지를 낀 그의 손가락은 피가 통하지 않아 짙은 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피가 된통 그리로 몰려 온 신경이 반지에 집중됐다.
…고작 이런 것을 위해 계속 다치셨던 건가. 엉성하고, 사이즈도 제대로 맞지 않는 이 반지 하나 때문에.
“…아가씨. 이거 아가씨가 직접 새기신 거예요?”
그것을 깨닫자 풋, 큭큭…. 고상하지 못한 웃음소리가 그의 입술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스피어가 건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웃음은 더욱 커져 천장의 조명등을 뒤흔들었다.
하하. 아하하! 그의 웃음이 시끄러운지 어느새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는 이스피어를 배려해 간신히 웃음을 억누르긴 했지만, 어쨌거나 아이작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던 불안은 단숨에 휙 사라진 채였다.
이 엉뚱한 아가씨가 알고 선물해주었을진 모르겠지만, 통상적으로 반지는 '증표'였다. 구속구나 다름이 없었다. 거기다 아득바득 그의 약지에 끼우기까지….
웃음이 사그라들며, 이 순간 아이작은 있지도 않을 영원을 감히 바라게 된다. 사랑이나 애정, 소중함. 그런 건 여전히 모르겠다. 그런 걸 굳이 정의해야 하나? 싶기도 했고. 괜히 오글거리고. 토 쏠리고.
하지만 아가씨와는 오래오래, 가능하다면 영원히 곁에 있고 싶었다. 암. 이 세상 마법사 중 아가씨를 지킬만한 인물 중에선 아마 자신이 제일 뛰어났음에도 분명했고. 아이작이 가볍게 말했다.
“다음엔 그럼 아가씨의 반지도 같이 맞추러 가야겠네요.”
“내 건 왜?”
예전처럼 익숙하게 아이작의 무릎 위에 앉은 이스피어가 아이작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둥글게 뜨인 눈을 마주한 아이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가씨도 부적으로 하나 맞춰요.”
“나한테 부적은 필요 없는데?”
“왜 필요가 없는데요?”
“아이작이 있잖아.”
엄지 손가락으로 약지의 반지를 문지르던 아이작이 씩 웃음지었다.
“그럼, 부적 말고 다른 의미라고 하죠. 뭐.”
이를테면 '영원'이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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