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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썰&연성

[윤담] 겨울비

by 여우비야 2022. 12. 5.

인간 임윤 X 인간 혜담


 

 

 

 

 

 날 때부터 열병과 함께 숨을 터트린 아해는 자라서도 비만 오면 앓아누웠다. 돌이 지나기 전에 죽을 거다. 기껏해야 열 살이나 넘기겠어? 그렇게 금이야 옥이야 둘러싸고 댕겨도 시집도 못 보낼 겨. 제 아무리 질겨봤자 서른이나 넘기겄소? 저래 약해서 애 낳다 사경 넘게 생겼는디. 저런 반푼일 누가 데려간다겠서?

 아무리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라지만, 자네 진심인가? 자식 볼 생각은 하지도 않는 게 좋아. 한데 장자인 자네가….

 

 우리는 더 이르게 헤어질 거예요.

 예, 압니다.

 한 철이면 지는 꽃들이 덧없진 않던가요?

 이유 없는 죽음이 있다덥니까?

 이유 있는 죽음이 모두 사랑스럽던가요?

 적어도 그대는 아닐 성 싶소만.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 자, 갑시다.

 우리 영원할 한 철을 누리러…….

 

 

 * * *

 

 

 새벽이었다. 전날에는 눈이 내렸다. 날이 궂어질 적이면 적마다 앓아눕는 여인을 보살피느라 그는 동분서주했다. 또 떨어지지 않는 열에 늦은 밤까지 얼마나 조마조마했던가. 겨우 호전된 상태에 마음 놓고 잠든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어둠 가운데 눈을 떴다. 빗소리가 들렸다. 옆 자리는 차게 식어 있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남자의 정신이 번뜩 깨었다. 옆이 비어 있었다. 늦게까지 정신도 차리기 힘들어하던 아내의 자리가…….

 윤은 두꺼운 이불을 걷어내고 등불 하나 밝힐 생각 하지 못하고 일어섰다. 어디로 갔지? 혼란스러움에 어둑어둑한 내부만 두리번대던 그는 문득 빗소리에 정신이 팔렸다. 창호문으로도 막아지지 않는, 제법 선명한 소리.

 작게 열려있던 틈으로 손가락을 넣어 드르륵 문을 열었다. 남자의 시선이 밑을 향했다.

 "……부인. 말도 없이 나가십니까."

 겨울비가 토독토독 내리고 있었다. 동텄을 시간이건만 먹구름 진 하늘은 도통 빛을 보여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기둥에 몸을 반쯤 기대앉은 여자는 뭘 하고 있었는진 몰라도 눈만 굴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천천히 웃으며 손을 뻗었다. 윤은 한숨을 삼키듯 손을 마주 잡았다. 그 옆으로 앉고, 손과 함께 다른 손으로 여자의 어깨를 붙잡아 기둥이 아닌 자신에게 몸을 기대게 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차게 식은 몸이 느껴졌다. 열은 좀 떨어졌나. 완전히 낫진 않은 모양이었다.

 과연 여자가 입술 새로 내는 음성은 얼깃 몽롱하다.

 "빗소리가 들렸어요…."

 "두터운 외투를 둘렀어야지요."

 "금방 돌아가려 했지요."

 "지금 내가 누굴 안고 있는지 잊으셨습니까?"

 아무리 그가 여자를 은근히 타박하고 타일러 보아도 지금처럼 여자는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아내의 웃음소리에 특히나 마음이 물렁해지는 남편이었으므로 이번에도 숨을 삼킬 따름이었다. 몇 초간 침묵이 사이를 스치는 동안 혜담은 윤의 품에 뺨을 기대며 조금씩 더 몸을 늘어뜨렸다. 찬 기운이 막아져서 그런가. 멀어졌던 졸음기가 다시 그에게로 손짓해오는 것 같기도 했다.

 이리 와, 이리 와, 하고.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그런 것들을 따라가려 하다 보면 꼭 탈이 나곤 하더라. 혜담은 짧은 생동안 익히 그런 것들을 체감한 바 있었다. 품에 묻었던 고개를 떨어뜨린 것이 그 이유였다. 잊었던 겨울바람이 날카롭게 뺨을 스쳤다.

 "겨울은 꽃이 피지 않는 계절이라 다행이에요."

 대신 마주 잡은 손은 풀지 않기로 했다.

 "반대하지 않으셨습니까."

 "겨울에도 이렇게, 가끔은 비가 내리니까요."

 그에 윤은 입을 다물었다.

 막 피어나는 꽃이면 모를까, 어느 정도 핀 꽃은 거센 빗줄기에 쉽게 고개를 떨구곤 했으니까. 차게 식은 얼굴이며 마주 잡은 손을 한 번 들여다보던 윤은 시선을 옮겨 보슬보슬한 빗방울에 살짝 젖은 치맛자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니 제 품 안에 놓고 비도 눈도 맞지 않도록 해주어야 하는데. 마주 잡은 손에만 작게 힘이 들어갔다. 천천히 여자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윤님?"

 어찌 꽃도 아닌 한 생生명을 그렇게 가둬놓을 수 있을까. 체념과 순종으로 얼룩진 눈을 여자가 보았나 보다. 불러놓고 또 말이 없는 걸 보면.

 봄이면 꽃내음을 맡고, 여름이면 옷을 걷어 개울가에 발을 담그고, 가을이면 떨어지는 낙엽을 손에 쥐어도 보고, 겨울이면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밟아야 하는 것이 무릇 인생인데. 윤은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럼에도 떨어졌던 여자를 다시 제 품에 안고, 어깨에 고개를 묻는 것은 그도 이기심을 가진 사람인 탓이리라.

 그렇게 하나, 둘, 속으로 수를 좀 세다가.

 ……놓아주고선.

 "이만 들어갑시다. 밤공기가 차요."

 한 철이나마 약속했으니 그래도 겨울 지나 봄꽃 피어날 때까진 새벽마다 함께 해주어야지 않겠느냐고. 임윤은 그런 심정으로 동백나무를 마당에 심지 않았다.

 

 

 * * *

 

 

 하필이면 문을 열었던 윤이 문을 다 닫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던지라, 돌아온 방은 제법 한기가 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여자를 깊게 안을 핑곗거리가 늘어나는 셈이니 아무렴 좋다고, 윤은 생각했다.

 혜담은 단단히 자신을 둘러 안은 손길에 문득 웃음이 샐 뻔했지만, 입꼬리만 꿈틀거리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겨울마다 남자가 밤을 설치는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여 오늘도 꿈마다 나오는 여자며, 아이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으련다. 자신과 닮은 얼굴로 눈꽃을 눈에 담은 그 여자를, 그런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들꽃처럼 웃음 짓던 그 아이를,

 자꾸 이리로 오라 부르는 목소리를, 그래도 그 혼자만의 비밀인 것으로 하자.

 한 철이나마 약속하지 않았나.

 그저 잠에 오롯이 몸을 맡기기 전, 속닥일 뿐이다.

 

 그의 남편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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