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마음에 묻어두었던 첫 아이가 기어이 마음에 사무쳐…
깜빡, 눈을 감았다 뜰 적마다 지는 노을 빛에 눈이 아려옵니다.
몸을 가볍게 훑고 지나가는 바람은 제법 선선합니다.
저무는 낮에 따라 싸늘해지는 공기도 그리 걱정되지는 않아요. 옷도 충분히 두껍게 입었거니와,
…정착한 곳으로부터 현재 지나가고 있는 이 갈대숲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무려 3일을 꼬박 걸어 이 자리까지 왔으니 그럴 법도 합니다.
그래도 얼마 안 남은 곳에 목적지가 있었다는 게 위안 아닌 위안이었을까요.
지금,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던 것인진 기억나나요?
새벽을 먼저 맞이하는 쪽은 보통 당신의 아내였습니다.
그는 잠이 필요 없는 요괴였고 해가 뜨기 전 밖으로 나서 주변을 살펴보는 걸 좋아했으니까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영원하여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요괴의 삶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곁에만 있어도 얼어붙을 것 같던 온기며 냉기 서렸던 숨은 결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체질이 아니었으나,
지금와 그는 제법 ‘인간’같은 몸이 되었습니다.
정확히는… 당신과의 아이를 몸에 뱄을 때로부터.
…제법 인간같은 몸이 된 혜담은 해도 뜨기 전 새벽에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름이 되면 더욱 잠드는 시간이 늘어났고, 피곤한 일이 있거나 한 날도 일찍 잠에 들었어요.
덕분에 당신은 이제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식사를 차리고, 가옥을 정리하는 역할을 도맡게 되었습니다.
혜담:(해가 얼추 다 떠오른 이른 아침, 뒤늦게서야 당신을 찾아 나온다.) 윤님…. (살짝 떨어지는 눈꼬리를 보아하니 오늘도 또 식사 준비며 청소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임윤:일어났어요? (마당을 정리한 뒤 젖은 풀을 한 켠으로 모아 작은 불씨를 틔웠다. 인기척에 돌아보며 손을 털었고.)
더 자지 않고.
혜담:(그런 당신을 보다가, 이슬비마냥 포슬 웃었다. 잠기운이 얼굴에 자그맣게 들러붙어있는 모습은 이제는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 (자그맣게 피어나는 불꽃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어 동 튼 하늘을 올려다본다.) ……
오늘따라 날이 좋아서요….
임윤:... 그러게요. (좋다는 말은 너와 함께한 시간 동안 늘 들어왔으나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에서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찾을 수 있었다. 웃는 얼굴은 전처럼 시리지 않다. 그러나 다가가 느슨하게 흘러내린 겉옷 여며준다.) 그래도, 이제 곧 날이 추워질 겁니다.
혜담:(여며주는 당신의 손 위로 그의 손이 덮인다. 다가오는 당신에 살그머니 햇빛이 가려 선다. 그가 천천히 당신의 손등을 매만졌다. 상념에 빠진 탓이겠지.) …곧 추석이라느니, 이웃들은 곧 고향집에 방문해야겠다며 말이 많더라고요. (올려다보던 시선을 당신에게 돌렸다. 곱게 웃는다.) 이번 해엔 가족들을 뵈러 가지 않으시나요?
임윤:예, 매년 그 멀리까지 다녀올 필요는 없지요. 안부 대신에 다들 무탈하다는 연통을 받았습니다. (곱게 웃는 얼굴을 보면 늘 수면같은 마음에 잔물결이 일었다. 하여 잠시 꽉 닫히지 않은 문 안으로 시선을 둔다.) 이 쪽에서도 부쳐야겠군요. ...당신과 아이들 모두 건강하다고요.
혜담:(아직까지는 당신의 가족을 함께 보러 갈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진 이 마을에 남아 아이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아직은.) …두 분께서 모두 좋아하시겠어요. (다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축축 늘어지는 상념이 자꾸만 발목을 붙잡아, 이곳에 있으면서도 혜담은 구름 위를 걷는 눈빛을 보였다. 몽롱한 시선이 재차 하늘을 향한다.)
임윤:... 그럼요. (몽롱한 시선을 오래 바라보았다. 당신에 비하면 인간의 수명은 턱없이 짧다. 스쳐지나가는 바람을 붙들어둘 수 없듯이 시간도, 목숨도 영 손에 쥘 수 없는 것이었으나 그래서 더욱 기민하고, 더욱 유난하게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미련이나 슬픔, 혹은 그리움 같은 것들. 요즈음 미지근한 체온이 도는 네 손을 가벼이 움켜쥐고 손등을 쓸어본다.) 아이를 생각하시나요?
혜담:(길고 긴 세월에서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망각은 축복이나, 그 축복을 거슬러서라도 남기고싶은 것이 있다. 그러니 그는 산 채로 저주받은 존재요, 섭리며 이치에 거스르는 요괴나 다름 없었다. …검은 곱슬머리, 처진 눈매며 자신을 부르던 그 목소리는 언제까지고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혜담은 지금처럼 일상의 몇 순간들을 바쳐 과거를 거닐어야 했다.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시린 빛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네. (심장이 찢기던 아픈 순간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오늘따라 유독… 선명하네요.
임윤:한번 가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높낮이 없는 말투로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신의 아이는, 이제 감히 나의 아이이기도 한데... 아비가 새파랗게 어리다는 이유로 보여주지도 않으시렵니까? (그리곤 옅게 웃는다. 네가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길 바랐다.) 분명 좋아할 겁니다. 당신이 발걸음한다면요.
참으로 담담하게 읊은 말에 감겼던 혜담의 눈이 크게 뜨입니다.
아무리 고요한 호수라도, 작은 변화에도 전체가 흔들리는 법입니다.
점차 힘이 실리는 그의 손에서 당신은 이미 답을 알았습니다.
갈대숲을 그렇게도 지나왔는데, 산등성이는 아직도 저 멀리에 있는 기분입니다.
하나 붙잡은 손은 뜨겁진 않더라도 차갑지 않았고, 그것을 느끼게 된 지 나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아니었겠습니까.
흔들리는 갈대잎처럼, 파문 인 호수처럼 계속 그의 마음은 술렁였던 모양이죠.
혜담:(느리게 입을 열었다.) 처음 봤을 땐 정말로, 막 걷기나 시작했을까….
붙잡으면 아플까, 그렇다고 혼자 두면 넘어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을 서 있기만 했어요. (바람결에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임윤:(잠자코 네 말에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옮겼다. 이따금 앞서서 자잘한 돌을 툭 걷어차 치워주거나,) 그래요.
혜담:(시선은 갈대밭 너머, 산등성이로 죽 박혀 있었다. 가슴팍 위로 손을 얹어보며 숨을 고르게 내쉴 뿐.) 어린 인간은 곧잘 울던 모습만 봐서 그런가, 울지 않고 저를 계속 쫓아오는 모습이 신기했어요. …전쟁이 막 끝나가던 때였으니, 부모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애를 두고 갈 수밖에 없던 것이겠죠. (여전히 그는 세상을 다정하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임윤:... 그렇군요. (네 시선이 머무는 그 어딘가에 아이는 잠들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여전히 다정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인간을 보고, 풀과 나무를 아끼는 설녀. 그와 함께 걷는 자그마한 몸집을 상상한다. 사람이 아닌 네 이야기에서 놀랄 만큼의 생기를 느끼며 걸음 지체하지 않았다.)
혜담:두고 가려 하고, 또 떨어뜨리려 해도 세상에는 마음처럼 되지 않는 점이 너무나 많더라고요…. (그러니 그들이 '신'이 아닌 '요괴'라 불리는 것이렷다. 결국엔 그들 또한 인간처럼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가 한 손을 뻗어 지나치는 갈대잎 사이로 둔다. 스치는 잎사귀들, 부드럽고도 종종 아리다.) …그런 점은 윤님을 닮았네요. (자그맣게 웃는다. 늘어지던 분위기가 잠시 활기를 띈다.)
임윤:...놀리시기는. (뒷말에 문득 웃었다. 민망한 기색이 스쳤으나 곧 평온한 얼굴로 돌아온다. 그 어느날처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아이가 아비를 닮는 것은 당연하지요. (다소 뻔뻔한 농을 던지며 같은 불완전함을 위로했다. 당신의 불완전함만은 선하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며.)
후후 웃으며 고개를 앞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역시 장난을 친 것이 맞는 모양이었습니다.
어느덧 우리는 길었던 갈대밭을 벗어납니다. 발목을 스칠까 말까 한 풀잎들이 발 아래 수북합니다.
해 질 녘, 거기다 산길이니 원래라면 지난 3일처럼 민가를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 맞았습니다. 하다 못해 밤을 지낼 은신처라도요.
그럼에도 이 마지막 날 걸음을 멈추지 않은 것은… 혜담의 시선이 머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겠죠.
언제나 온화하게, 풍랑에 흔들리지 않던 당신의 여자는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그야 당연합니다, 첫 아이를 묻은 날 혜담은….
어느덧 그 흔한 국화꽃도 자라지 않은 풀숲 앞입니다.
나무가 빙 둘러싸고 있는 이곳은 그 흔한 비석도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한 가운데 자리로 당신의 손을 놓은 혜담이 걸어가자…
구름 뒤로 숨은 달이 모습을 드러내기라도 했는지 시퍼런 달빛이 번져듭니다.
혜담은 어딘가에 무릎을 디디고 어딘가에 손을 짚었습니다.
한참이나 몸을 숙여 짚은 손등 위로 귀를 대보다가, 또 몸을 들어올립니다.
밤임에도 그리 춥게 느껴지지 않는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야 당연합니다, 첫 아이를 묻은 날 혜담은…
제 마음을 함께 묻어놓았지요.
임윤:여기에요. ... (말 없이 네게 다가가 손을 털어주고, 흙자국 선연한 무릎을 정돈해 주었다.)
(잠자코 주머니에서 가져온 씨앗 한주머니를 꺼낸다.) ... 원래라면 봄에 오는 게 맞겠습니다만은,
다가올 겨울도 마땅히 견딜 수 있을 겁니다. 단지 생이 짧을 뿐 그렇게 약하지 않으니까요.
혜담:(마음으로 낳은 내 아들, 누구보다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 누구보다 강인했던 내 아이. 미련을 져버릴 수 없어 깨끗해진 손으로도 다시 제 마음이 묻힌 곳을 더듬고, 쓸고, 하염없이 또 그러다….)
(기어이 새 생명 묻히는 광경에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울음이었나. 아닌가. 중요하지 않았다…. 가다듬은 목소리를 낸다.)
그땐 너무 제가 서툴렀지요.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더 좋은 옷을 입혀주고, 좋은 음식을 먹여주고, 좋은 이름도 내 지어주었을 텐데….
임윤:... (네 어깨를 감싸 안고 손바닥에 씨앗을 조금 나누어주었다. 눈앞의 이 무덤이 제 것이 되는 훗날을 찰나에 그릴 수 있었기 때문에.) ... 더 좋은 옷을 입혔어도, 좋은 음식을 먹였어도 후회는 남았을 겁니다. 그것이 유한한 것들이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생의 증거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마음껏 후회하되 절망하진 말라고 했다.) ...
이름은 지금이라도 하나 선물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혜담:(…하나, 둘, 이제는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그곳에서 배웠던 것처럼 씨앗을 심기 시작한다. 꽃이 피어날 다음 해와 또 만개할 그 다음 해들을 기약하며.)
…이름 말인가요. (혜담偕談의 이름은 아이가 지어준 것이었다. 어린 나이더래도 알고 있는 한자가 있던 것을 생각해보면 좋은 집에서 태어난 아이 같기도 했고, 하지만 해와 혜를 헷갈렸던 걸 보면 역시 아이답기도 했고.)
(한참, 땅만 바라보다 말했다.)
아이들의 이름은, 다 윤님이 지어주셨지요. (눈을 휘어 웃었다.)
임윤:(아직 굳지 않은 땅은 생각보다 무르게 파인다. 옴폭한 곳에 나란히 파종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휘어지는 눈꼬리를 마주했다. 당신의 그 마음은 사람 아닌 것들 사이에서 멸시되기에 충분하고, 단절되기에 충분하고, 완전해지기에 부적합했으나 제가 언젠가 차오르게 담았던 연민과 닮았고, 꺼지지 않는 불씨와 닮았고, 인간의 가장 질긴 마음인 희망과 맥을 같이했다.) ... 선담善談. (기어이 내뱉는 한마디였다. 너는 선하다. 네 사랑을 받는 모든 것들이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할 것이다. 이듬해 필 꽃도, 발 아래 묻힌 심장도, 함께한 아이마저도. 짧은 것들이 사랑하는 너는 기어이 선하고 말 것이다.) ... 당신의 첫 마음을 그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난.
혜담:(다시금 수면에 파문이 인다, 출렁,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부표가 그러나 제 자리에 남아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결국엔 짧은 것들이 붙잡아주는 생이다. 첫 아이를 만나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삶으로 살다가, 당신을 만나 이제야 사람다워 졌는데.)
(이곳은 언젠가 당신의 터가 되겠지. 끝을 알면서도 혜담은 웃음을 터트렸다. 유한하기에 타오르는 불꽃이야말로 그의 마음을 녹였지 않나. 그저 한 가지를 물었다.)
다음 해에도 함께 와주실 건가요? (답을 알면서도.)
임윤:... 봄이 오면 비석을 세우러 옵시다. 임선담, 그렇게 쓰였으면 좋겠네요. (네 어깨를 감싸 안고 함께 보드라운 흙을 덮는다.) 지금 심은 씨앗이 얼마나 자랐는지 기대하면서... 내기해도 좋고요. (두 아이가 더 크면, 다 같이 와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덧붙이며 네 눈가를 소매로 문질러 닦아주었다.)
혜담:…시간이 흐른다면, 아이들도 함께 해도 좋겠지요. 길이 머니 더 자란 다음에서야 올 수 있겠지만….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선다. 당신이 닦아주었으니, 자신이 다시 닦을 필요는 없었겠다. 흙 묻은 무릎가를 다시금 털고, 손을 털고.) …발목까지는 자라지 않겠습니까? (목소리가 한결 가벼웠다.)
임윤:... (여러 해가 지나 선담의 존재를 알게 될 아이들을 생각하며 조금 웃었다. 발목까지는, 소리에 부러 질 생각으로,) 아뇨, 무릎까지는 우거져 있을 겁니다. (두고 보세요. 가벼운 투로 으름장 놓는다. 언젠가 나는 당신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아주 가까이에서 어루만지며 뒤섞이는 날이 올 거예요. 그러나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 다시 만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나와 우리의 첫째 아이가, 그 다음엔 당신과 내가, 까마득한 생의 뒷면에서 두 아이를. 어깨를 내려놓으며 눈을 마주한다.)
…지난했던 과거가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냈다고 한들, 과거에 파묻혀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법입니다.
책 속의 인물은 결말을 맞이해야 하고, 그 끝에서 우린 현실로 돌아와야 하죠.
그러니 당신들은 참으로 순수했고 찬란했고, 또다시 선했던 그 날의 얘기를 이곳에 덮어두기로 합니다.
몰입하여 이는 격통에 울고 무너지다가도 일어섭니다.
순수했고 찬란했고 또다시 선했던 그 시작에서부터,
이제 당신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언젠가 여러분의 이야기가 결말을 내릴 때까지,
행운처럼 되돌아 만나게 될 이 날吉日을 그리워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