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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은 뭔가가 다를 수 있을까요?
(느리게 눈을 감는다.)
영원의 일요일
w. 요한
20200329
KPC 이스피어 틸다, PC 아이작 딜라이트
1. 87번째 루프
방금 전까지 당신의 눈앞에 있던 이스피어가 거대한 트럭에 치여 날아갑니다.
점멸하는 헤드라이트,
추락하는 몸.
인간의 몸이 낼 수 있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둔탁한 소리가 나고,
이스피어는 바닥에 처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콘크리트 바닥을 타고 피가 번져나가기 시작합니다.
익숙한 광경에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당신은 생각합니다.
아,
벌써 87번째구나.
이스피어가 맞이한 것은 전형적인 죽음입니다.
2. 88번째 루프
헉.
온 폐부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거친 숨을 뱉으며 아이작은 몸을 일으킵니다.
이제는 악몽 같이 느껴지는 오전 6시의 알람소리입니다.
이스피어는 아이작의 눈 앞에서 다시 한 번 죽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광경으로는 조금도 놀랍지도, 손이 떨리지도 않습니다.
... 그래야만 했습니다.
아이작은 질려버린 눈으로 알람을 끄고 마른 세수를 합니다.
이스피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당신의 옆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
기괴하게 비틀린 관절, 웅덩이처럼 고이기 시작하는 피는 모두 꿈결 같습니다.
얕은 잠에서 깬 건지 잠긴 목소리로 아이작에게 말을 겁니다.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그의 기억은 아이작에게는 아주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어제' 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떤가요,
당신은 아직도 여전히 이스피어를 사랑하나요?
미안. (손을 뻗으며 말했다.)
... 깨웠어? 더 자. (익숙하게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그러고나면 이스피어가 꼭 해버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가벼운 두통이 엄습합니다.
당신의
오늘
에서 하루 일과가 되어버린 그 말.
SANC 0/1
기준치: | 40/20/8 |
굴림: | 32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이성치 감소 없음.
(손이 시려울 테니 장갑을 끼고 나가자, 네 키만한 눈사람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해줘, 나는 옆에 너를 닮은 눈사람을 만들어볼래. 그 모든 사소롭고도 평화로운 일상의 언어들을 내뱉지 않고, 그저.)
좀만 더 자자, 아이작.
주말이잖아.
내 품 안에서 좋은 꿈을 꿔야지.
(가볍고, 일상적이기만 한 언어들에 아이작은 어린아이처럼 순순히 그 말에 넘어갔다. 오늘은 다를거라고 또 다른 희망을 품는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아직은 주말이지. 아직은.)
... ... 잘 자, 피어. 일어나서 봐.
(네가 잠들길 기다리며 눈을 감고 있었다.)
어느덧 이스피어는 까무룩 잠에 빠져듭니다.
평화롭기 그지 없는 일상의 한 조각일 풍경인데.
오늘은 다를거라고 오늘만큼은 다를거라고,
그렇게 되뇌인지 88번째의 오늘입니다.
이런 일그러진 사랑이라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과연 이스피어는 그걸 받아들여 줄까요?
... 아이작, 이제 무얼 할까요.
같이 잠에 빠져들건가요?
게으름 끝에 돌아오는 결과는 지옥과 비슷할 뿐이라고요.
그러나 당신은 익히 겪어온 87번의 오늘을 통해, 아무리 부지런했어도 일상이 지옥으로 탈바꿈할 수 있음을 경험해왔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이스피어를 위한 것을 멈출 수 없었죠.
이스피어는 당신이 행복해지기 위한 마지막 기회였으니까요.
문득 아침을 준비하던 아이작은 회중시계를 꺼내 내려다봅니다.
이스피어가 당신의 마지막 행복인 시점에서, 이건 당신에게 주어진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아이작,
관찰
판정.
기준치: | 75/37/15 |
굴림: | 60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회중시계입니다.
단 한 번도 떨어트리거나 긁혔다고 해서 흠집조차 난 적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시계 구석에 작게 녹이 슨 것 같습니다.
기분 탓일까요?
......
어느덧 시계는 8시 쯤을 가르켰고,
잠에서 깬 이스피어는 눈을 부비적거리며 당신이 있는 곳으로 내려옵니다.
고마워.(나긋하니 이야기한다.) 네가 항상 날 위해주는 행동에 기쁨을 느껴.(담담한 진실을 내뱉는다. 고개를 숙이고 식기를 들어, 팬케이크를 조금 잘라내며 계속 이야기했다.) 네가 날 위해 팬케이크를 만들어 줬으니까, 설거지는 내가 할게. 내가, 널 위해서.(이스피어가 자주 내뱉곤 하는 말이었다.)
(고맙다는 한 소리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아이작 뿐일 것이다. 괜히 민망해지는 마음에 마주치는 시선에 슬그머니 눈을 피해 접시를 응시했다. 혀끝은 단데, 입 안은 썼다. 기분이 가볍게 들뜨다가도, 결국엔 손끝이 저린다. 지독하게 행복한 주말. 영원한 우리의 주말. 포크를 짓씹는다.)
... ... 그래도, 피곤하면 그냥 둬. 알았지? (됐다고 말해도 결국엔 거절할 것을 알아서, 아이작은 이런 말이나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 뭘 하려고? 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듯 했다.) ... 주말이잖아.
87번.
그 모든 숫자 동안 이스피어는 꾸준히 집 바깥으로 나갔던가요.
한 번도, 예외 없이요.
(곧이어 짓궂은 얼굴을 할 때면, 아이작은 당신을 멀뚱히 보았다. 말 없이 또 내딛기를 한걸음, 또 한걸음. 바짝 붙을듯한 시선이길 또 몇 번. 덜컹. 하고 아이작이 식기를 싱크대에 넣는다.)
네가 ... 원한다면.
(재미없는 답이었다. 어차피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네 머리카락 끝을 손 끝으로 쥐었다가, 살며시 뒤로 떨어지며 놓는다.)
빨리 나올게.
(입을 맞출까 했지만 관두기로 했다. ... 씻기 전이니까.)
엉망진창인 생각을 안고 아이작은 화장실로 들어갑니다.
샤워를 하면서도 뒤죽박죽인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습니다.
오늘도 나가겠군요.
이미 다닐만한 곳은 모두 다녀봤습니다.
이제는 같은 일정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나마 가지 않았던 장소는 ... ...
물기 어린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거실로 나온 당신.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을 하던 이스피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킵니다.
입을 엽니다.
공원에, 어떤 행사를 한다던데.
가볼래?
... 행사?
공원에 행사가 있었던가?
기억을 되짚어봐도 공원에는 가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이스피어는 어디서 그런 소식을 들은 걸까요.
대체 오늘의 무엇이 달랐길래, 공원의 소식을 들어왔을까요.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이스피어가 기다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거실로 나옵니다.
그리고 할 말이야 또 뻔했습니다.
당신은 이스피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말했을 겁니다.
머리 말려줘?
매일같이 부탁했을 소리니까요.
느긋하게 준비를 하다보면 어느덧 오전 10시 언저리.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아직은 눈이 쌓여있지 않습니다.
오후 3시가 될 즈음이면 눈이 내리겠죠.
그 전에 이스피어가 죽지 않는다면,
쌓여가는 눈을 볼 수 있을텐데.
아이작은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3. 반복되는 일상
[공원]
공원으로 향하며, 아이작은 가만 생각합니다.
꽤 사람이 많은 걸 보니, 이런 곳에서 이스피어가 죽어버린다면 감당하기 힘들어질 것 같다고.
하지만 더는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그나마 오늘 공원은 적당히 한산한 편입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공원에서의 데이트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공원에는 분수대와 꽃밭, 행사 중인 부스들이 있습니다.
겨울에도 꽃이 핀다 했던가요.
당신의 오늘은 2월 말에 위치한 일요일.
꽃밭이라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꽃나무들이 우거진 자그마한 숲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코스이기도 했습니다.
피어있는 꽃은 막 봉우리 진 동백꽃과,
연한 붉음을 품은 매화꽃.
남은 꽃들은 아직 피어나지 않았음에도,
동백꽃과 매화꽃 만으로도 풍족한 기분이 듭니다.
(당신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가볍게 짓누른다. 마주친 눈에 그저 눈매를 씩 휠 뿐. 고개를 아주 살짝 뒤로 무르며, 그 거리에서 말한다.) '애타는 사랑'이래.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어 입을 맞추려다가, 고개를 살짝 무르는 동작에 멈춰섰다. 거절의 의사인가? 애매해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순간 나오는 말에, 조금은 불만스럽게 말한다.) ... 그래서 지금 애타게 하는거야?
내게 키스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지,(당신을 품 안에서 놓기 싫다고. 평생 제 품 안에 당신이 끌어안겨져 있었으면 좋겠다고, 아이愛.)
(당신과 얽었던 팔을 풀어내었다. 한 걸음 뒤로 무르고, 그러나 보란듯 두 팔을 벌렸다. 내게 안겨들라고. 그리하여 내 빈 품을 언제나처럼 채워버리라고.)
하고픈대로 해.(말한다.)
(떨어지는 온기가 아쉽다. 잠깐 입 안에 넣었다가 뺏긴 사탕처럼 탐이 난다. 맛보고 싶다고 외친다. 허락이 떨어지면 아이작은 망설임도 없이 발을 딛는다. 당연하듯 허리에 팔을 두르고, 당신을 당기고, 안고, 추위에 달아오른 볼에 입을 맞추고.)
... 피어.
(입 안에 넣은 사탕이 입안을 전부 베게 한다고 해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싶게 만들지마. (간결하고 담백한 입맞춤이 얼굴 곳곳에 맺힌 뒤에야 말한다.)
(입맞춤이 멎은 후에는, 마무리하듯 당신의 목덜미에 무게 없이 입술을 스치듯 내리누르고, 정말 완전히 당신의 품을 벗어나고 만다.)
(봄의 나비가 날개를 나풀거리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당신의 손을 붙잡고 앞서 걸어간다.)
금슬이 좋은 부부가 살았대.(그러면서 이야기하는 것은 저 붉은 꽃의 전설. 옛 이야기.) 하루는 남편이 육지에 볼 일이 있어서 배를 타고 떠났는데, 돌아오질 않는거야.(학교 선생님이 얘기를 해줬던가. 수업시간이 하도 지루하다 불만을 터트리던 아이들에게 잠을 깨우기 위해 읊어주었던가.) 아내가 병들어 눕다 못해,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어. '내가 죽거든, 남편이 돌아오는 배가 보이는 곳에 묻어주세요.'하고.(그래서 나는 그 아내가 어디에도 묻히지 못했겠구나,하고 생각했어. 말을 덧붙였다.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분수대였다.)
(목덜미에 덯는 입맞춤에 잠시 숨을 멈추고 당신의 등 뒤로 제 손을 꽉 쥐었다가 핀다. 잠시지만 바짝 긴장하듯한 몸을 눈치채지 못할리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굳이 숨길 생각도 없었다. 때때로 당신은 자신이 애타는 제스처를 좋아하곤 했으니까.)
(품에서 벗어난 온기가 하염없이 그립다. 하지만. ... 이스피어는 이미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 길을 막아서며 다짜고짜 입술을 들이미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이었다. 언제나 허락하는 것은 당신. 하지만 참는 것은 아이작의 몫이다. 하지만 그 잠깐의 허락이라면 몇 번이고 참을 수 있었다.)
... ... 너무 책임감 없는데. (그렇게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작의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라고 하면 ... 대부분이 행복한 결말이었으니까. 실제로 아이작은 어떤 이야기든, 새드엔딩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차라리 새로운 사랑을 찾았으면 나았을 걸.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 설마. 전설이 그게 끝이야? (아니지? 그렇게 묻는 투로 바라본다.)
깨끗한 물이 흐르는 분수대에 다다릅니다.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미관을 꽤 아름답게 만듭니다.
물이 뿜어진 위에는 작은 무지개도 떠 있습니다.
80번 가량의 일요일은 눈이 내리기 전까진 날씨가 꽤 좋은 편이죠.
(물이 흐르는 분수대를 바라보았다. 육지로 떠나 돌아오지 못한 남편과, 그를 기다리다 병들어 죽은 아내. 당신은 항상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는 결말을 좋아했으니까. 이스피어는 아직까지 당신에게 동화는 동화일 뿐이라는 말을 해준 적 없었다. 역린과도 같은 그 말을 내뱉을 생각은 전혀 없기도 했다. 당신에게 행하는, 그러니까 일종의 교정 행위는 몇 년이고 공들여 작업해야 할 것이었으니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이스피어는 실패라곤 모르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러니까 말야. 바다에서 죽었더래도, 시체로라도 돌아와야 하는 게 네가 생각하는 '사랑'일텐데 말야.(그 남편에게 당신을 대입해본다. 당신이라면 정말 죽었더래도 시체가 되어서라도 돌아왔을 것만 같아서, 이유 없는 웃음이 흘렀다.) 아이작, 그렇다면 네가 이야기의 결말을 지어줄래?(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분수대를 바라보는 채로.) 남편은 실종되었고, 부인은 죽어버린 상태에서. ... 부인이 묻힌 그 자리에서 동백꽃이 피어났다던. 그 이야기가. ...(답은 이스피어도 잘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 ...
... ... 저 곳에서 행사중인 부스가 있대. 거기 가 볼래?
... ... 기왕이면 다시 살아서 보는 게 낫잖아. 간혹 전설들은 너무 이상해. 사람 목숨을 너무 헛으로 써버려. (습관처럼 아이작은 이야기속에 자신을 대변시킨다. 애초에 자신이라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혼자 두고 떠나는 일 같은 거. 이별같은 건 없어야만 한다고.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내가?
(문득 들려오는 제안에 아이작은 멀뚱하게 눈을 깜빡인다. 분수대를 응시하고 있는 당신의 눈에 얼핏 무지개 빛이 물든듯 했다. 당황스러운 제의였다. 어쩜 당신이 늘어놓는 것들은 아이작이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것들 뿐인지. 문득 이제와서, 당신과 함께하게 되었던 그 시초의 순간을 떠올린다.)
... ...
(말없이 머리를 굴려가다가, 이은 말에 고개를 돌린다. 그래. 이 이야기는. ...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
그냥, 뭐, ... 구경이나 하는 거지. 무대에선 공연도 한다던데? 조금 살펴보고, 재미 있으면 지켜보고,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자.(천천히 어깨를 으쓱였다.)
공원의 중앙은 한적하더니, 점차 행사를 하는 곳으로 걸어가자 저 멀리,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몰려있었다는 듯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보입니다.
아이작,
행운
판정.
기준치: | 50/25/10 |
굴림: | 86 |
판정결과: | 실패 |
... ...
그래도 분명, 행복한 시간을 즐기던 중이었지요?
뭔가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가 들려옵니다.
점점 가까워지더니,
네.
예상대로.
브레이크가 고장난 것처럼 달리며, 손을 마주잡고 있던 이스피어를 들이받습니다.
당신은 무의식 중에서라도 이스피어의 손을 놓지 않고자 힘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매번 그랬듯,
손은 풀리고야 맙니다.
이스피어와 오토바이는 행사 중인 공연장에 처박힙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지고, 온통 아수라장이 된 그 사이.
허전해진 손만을 내려보았던가요.
고개를 들어 이스피어를 바라보면, 오토바이에 들이받힌 채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아직 꺼지지 않은 엔진이 소리를 내며 돌아갑니다.
그 참혹한 꼴을 당신은 마주하고 있습니다.
어때요, 끔찍한가요?
아니면 이 광경마저 언젠가의 루프에서 본 나머지 어떠한 감흥도 없습니까?
SANC 0/1
기준치: | 40/20/8 |
굴림: | 91 |
판정결과: | 실패 |
이성치 1 감소.
지독하도록,
추운,
겨울입니다.
......
3-1. 88번째 죽음
죽어가는 이스피어를 바라보며 큰 좌절에 휩싸입니다.
하지만 그 좌절과는 별개로 더 이상 극적인 반응은 나오지 않습니다.
87번인 걸요.
88번 시간을 돌리는 동안 이스피어는 87번을 죽었습니다.
88번의 좌절입니다.
오늘도 88번째, 행복해질 수 없었습니다.
언제가 돼서야 아이작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이스피어와 함께요.
습관적으로 주머니의 회중시계로 손을 가져갑니다.
이스피어를 바라보노라면, 피투성이가 된 이스피어는 손가락 끝을 고통으로 까딱거릴 뿐, 비명조차 신음조차 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당신, 이스피어가 죽기까지 기다리나요?
(그래. 나는 아까 네가 말한 이야기가 어떻게 바뀌어야할지를 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알아, 피어. 그 이야기는 말이야. ... 처음부터 잘못 된 거야. 헤어져선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어. 헤어져선. 헤어져서는 ... ... .)
돌아가자, 피어.
집으로 돌아가자.
집으로 가자.
동백꽃에 얽힌 전설을 떠올립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 압니다.
하지만 그건 처음부터 맞지 않는 이야기니까요.
돌아가요, 당신.
돌아가자고요.
당신의 죽음을 인내하며,
기어코 숨이 멎은 당신 앞에서 회중시계를 누릅니다.
집으로 가요.
우리만의 동화를 적어내리러.
우리만의 영원한 결말을 향해.
4. 88번째와 그 이후
회중시계의 버튼을 누르고, 중력이 역행하는 기분을 느낄 무렵 당신이 들은 건―
시계의 초침 소리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죠?
수십 번의 루프 동안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요.
2. 89번째 루프
헉.
온 폐부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거친 숨을 뱉으며 아이작은 몸을 일으킵니다.
이제는 악몽 같이 느껴지는 오전 6시의 알람소리입니다.
이스피어는 아이작의 눈 앞에서 다시 한 번 죽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광경으로는 조금도 놀랍지도, 손이 떨리지도 않습니다.
... 그래야만 했습니다.
아이작은 질려버린 눈으로 알람을 끄고 마른 세수를 합니다.
이스피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당신의 옆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
엔진이 돌아가던 소리, 오토바이 바퀴에 깔려 까딱거렸던 피투성이 손 끝이 모두 꿈결 같습니다.
얕은 잠에서 깬 건지 잠긴 목소리로 아이작에게 말을 겁니다.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그의 기억은 아이작에게는 아주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어제' 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떤가요,
당신은 아직도 여전히 이스피어를 사랑하나요?
그러고나면 이스피어가 꼭 해버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가벼운 두통이 엄습합니다.
내려다보았다. 손을 뒤로 둘러 당신의 뒷머리를 살살 쓸어주었다.)
오늘따라 어리광이 심해, 아이작.(이스피어는 매번 기민하게 당신의 이상을 알아차렸다. 단지 눈썰미가 좋아서 그랬을지, 아니면 그 대상이 당신이라 그랬을지.) ... 오늘 아침은 내가 할까?(당신의 등을 일정한 박자로 토닥여준다. 달래듯이.)
... ... 꿈에서 피어가 너무 보고싶었나봐. (뒤늦은 핑계를 대며 품에 얼굴을 문대다가, 살며시 떨어진다.)
아니, ... 괜찮아. 그냥. ...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쉬어, 아이작.(그것이 못내 발을 간지럽게 만들어서, 이스피어는 단잠에서 깨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당신의 어깨를 붙잡아 침대로 내리누르며.) 널 위해, 아침을 만들어주고 싶네.
... 응? (몸을 일으키는 네 모습에 조금 당황해 아이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몇 번 보지 못할 흔치않을 얼굴임은 확실했다. 몸을 일으키려다가도 네 손에 눌리니, 아이작은 한껏 가련해보이는 얼굴을 하며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제 어깨를 붙잡은 손에 살며시 제 손을 겹쳐 잡는다.)
... ...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돼? 아니면 도와주는 거라도 ... ... .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다시 일으키고, 침대 바깥으로 발을 빼 완전히 일어난다.) 프렌치 토스트도 좋고. 버터도 아직 남아있던 것 같은데?(종알거리며 당신을 침대에 두고, 주방으로 내려가려 문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오늘이 지나갑니다. 여느 때와 같이요.
소소하게 베이컨 토스트를 구워먹었다느니, 그런 차이점을 제외하면 모두가 똑같습니다.
아침을 먹고, 누군가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누군가가 씻고 나오고.
이스피어의 머리를 말려주고. ...
그러면 이스피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오늘 하루 뭘 하고 보낼지에 대해 묻습니다.
라면서요.
그나마 가지 않았던 장소는 도서관과 유원지 정도였나요.
(나가지 말자고 말하고싶다. 나가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 그랬다간 당신이 저를 쳐다볼 시선이 두려웠다. 그 안에 담긴 감정따위도. ... 다신 보지 못할지 모르는 웃음같은 것도.)
(결국에 머릿속으로 계산을 이어갔다. 유원지와 도서관 중에 ... 안전한 곳이 있다면 어딜지. 그런 것들을 한참이나 계산해나가다 입을 연다.) ... 도서관 갈까?
얼마만의 의사 표현이야, 아이작? 아침부터 괜히 기분 좋아지네.(때는 오전 8시 즈음의 일이었다.) 좋아, 가자. 가서 어려운 책은 말고-, ... 적당히 소설책들이나 빌려 와야겠다.
(웃음을 따라하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가, 다시금 거둔다.)
오늘은,
다를까요.
3.반복되는 일상
[도서관]
도서관으로 향합니다.
그리 크지 않은 크기의 시립 도서관입니다.
사람도 없고, 꽤 깨끗한 곳이라 이런 곳이라면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 거라는 기대를 했던 과거도 있었죠.
그러나 아이작은 습관처럼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오늘은 다를거라 말하는 것도 자기 세뇌에 가까운 행위.
이스피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아이작과 함께 도서관으로 향합니다.
오늘도 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오후 3시쯤이 되면 눈이 내리겠지만, 쌓여가는 눈을 볼 수 있겠지만, ......
아차,
오늘
의 당신과는 눈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던가요.
무심코 도서관 안으로 들어서며, 이스피어의 옆모습을 바라봅니다.
80번 가량의 일요일은 항상 날씨도 좋고, 햇볕도 화창합니다.
그리 말하며 이스피어는 소설 코너로 향하려 몸을 돌립니다.
아이작, 당신은 어쩔까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죽음이 이스피어의 곁을 도사리지 않는 듯 했죠.
그러다 보면, ...
아이작,
자료조사
판정.
기준치: | 70/35/14 |
굴림: | 24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핸드아웃 공개.
누군가가 중간 부분의 페이지를 아예 뜯어가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 같은데요.
괜스레 짜증과 허탈함이 밀려왔던가요?
당신도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있었죠.
그들은 잊혀진 채로 그곳에 있을까요?
어쩐지 노스탤지어가 드는 내용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 저 멀리서 소설책을 하나 고른 이스피어가 당신에게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스피어가 당신이 든 책을 살피려 눈을 가늘게 뜨자,
아이작,
행운
판정.
기준치: | 50/25/10 |
굴림: | 68 |
판정결과: | 실패 |
무언가가 우리의 위로 그림자가 지고 있었습니다.
재앙 앞에서 한낱 인간이 무력했듯,
우리는 손 쓸 새 없었습니다.
기우뚱 무너지는 책장.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올려 책장에 얻어맞고 말아, 아이작은 옆으로 튕겨져나오다시피 하며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 ...
다시금 까딱거리는 이스피어의 손 끝을 바라봅니다.
상당한 무게 탓에 어떻게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도서관에 있던 몇 명이 달려오지만 역부족입니다.
애초에 사람이 없던 도서관인 게 문제였을까요, 아니,
애초에 문제는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아이작은 알고 있습니다.......
아이작, 이스피어가 죽는 걸 기다립니까?
(이게 아니다. 이건. 아니다. 이게 아니잖아. 우린 이러면 안 되는거잖아. 머리가 깨질듯 아프다. 방금까지 손을 뻗으면 닿았는데.)
(닿았는데.)
...
아니야, 피어. 우리는. ...
우리는 이렇게 끝나면 안 돼.
(눈을 감는다.)
그리하여 회중시계를 누릅니다.
집으로 가요.
우리만의 동화를 적어내리러.
우리만의 영원한 결말을 향해.
3-2. 89번째 죽음
아, 89번째 죽음입니다.
이번에도 새삼스러울 정도의 좌절이 당신을 휩쓸고 지나갑니다.
너의 이름을 닮았어.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동시에 무력감과 실소도요.
이런 식으로 이스피어는 아이작을 또 떠나갑니다.
왜 그는 당신을 떠나갈까요?
이래서야 시간을 돌리는 게 무슨 소용입니까?
이제 당신은 이스피어가 죽기 전에 습관처럼 회중시계의 버튼을 눌렀을지 모르겠습니다.
딸깍.
딸깍.
시간이 돌아가지 않는 것을 보니 이스피어는 아직 죽지 않았나봅니다.
그가 죽어야만 시간이 돌아갑니다.
그가 죽어야만.
.......
어쩐지 시간이 돌아가기 전, 이스피어의 시선이 당신을 향했던 것 같습니다......
SANC 0/1
기준치: | 39/19/7 |
굴림: | 48 |
판정결과: | 실패 |
이성치 1 감소
4. 89번째와 그 이후
2. 90번째 루프
헉.
온 폐부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거친 숨을 뱉으며 아이작은 몸을 일으킵니다.
이제는 악몽 같이 느껴지는 오전 6시의 알람소리입니다.
이스피어는 아이작의 눈 앞에서 다시 한 번 죽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광경으로는 조금도 놀랍지도, 손이 떨리지도 않습니다.
... 그래야만 했습니다.
아이작은 질려버린 눈으로 알람을 끄고 마른 세수를 합니다.
이스피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당신의 옆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
책장 아래 깔려 바르작대던 신체, 까딱이던 손가락과 이스피어의 거칠었던 호흡은 모두 꿈결 같습니다.
얕은 잠에서 깬 건지 잠긴 목소리로 아이작에게 말을 겁니다.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그의 기억은 아이작에게는 아주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어제' 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떤가요.
당신은 아직도 여전히 이스피어를 사랑하나요?
그러고나면 이스피어가 꼭 해버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 오늘따라,
... ... 눈이 내렸나?
피어, ... 눈이 보고싶어? (목 부근에 얼굴을 파묻는다. 아직. 아직 있어. 아직 너는 살아있다. 아직 옆에 있다. 그 작은 확신을 갖고 싶은 사람처럼.)
(이스피어는 눈꺼풀을 들어올려 자신을 옥죄듯 끌어안은 당신을 내려다본다. 당신의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문득 이스피어에게, ... 위화를 심는다.)
... ... 아이.(당신의 등 뒤로 손을 올려 등골을 타내려가듯 근육을 더듬듯 살결을 쓸어내려주며 무언가 '다른' 당신을 달래는 것은 습관에 가까운 행위였다. 함께 자는 것을 유독 좋아했던 당신을 마주 끌어안아주었던 것에서 파생된 행동.) 아이, 아이작.(숨이 조금 막혀왔지만 그것보단 당신의 낯선 어리광이 더 중요했다. 이스피어는 이 위화의 원인을 기어코 밝혀내야 했을 성격이었으므로.) 내 얼굴 봐봐, 응?(달콤한 말로 당신을 꼬여내듯 말할 수 밖에 없던 것이었다.)
... ... 응, 피어. (마주 대답을 하는 목소린 되려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러니 그 억눌린 감정들이 행동으로 드러날 수 밖에. 저를 쓰다듬고 어르고 달래는 손길이 길어질 수록 아이작은 더 깊게 파고든다. 온몸으로 가지말라고 말하기라도 하듯이.)
... (다만 끝까지 널 거부하기란 어려운 것이라, 아이작은 천천히 고개를 드는 수 밖에 없었다. 불안한 초점, 불온정한 숨, 옅게 붉어진 눈밑까지. 초조하고, 불안한 감정이 너무나도 잘 보이는 얼굴이었다.) 피어,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아이작이 붙어왔다. 뺨을 맞대어 부비는 꼴이 짐승이라도 되는듯 싶었다.)
몇 번도 아니고, 무려 90번입니다.
무슨 소리냐면 90번이나 이스피어의 시체를 봐왔다는 소리입니다.
피어, 어쩌면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죠.
지금 끌어안고 있는 것이 살아있는 온기가 없는, 심장이 뛰지 않는, 움직일 수 없는 시체일까봐.
아이작은 도무지 불안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고,
그것은 당신에게 어쩌면
최초
의 균열을 선사합니다.
(뭐지? 그런 생각이 처음 부유했다. 뺨을 부비는 것을 받아내며 이스피어는 지금도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 아닐지, 잠시 상상해본다. 그도 그럴 것이 한낱 악몽 따위로 당신이 제게 이리 굴 리가 없지 않은가. 당신을 길들이는 것이 이스피어, 자신이었기 때문에 당신이 제 예상 밖으로 벗어나는 행위에는 몹시도 치밀해지고 심각해지는 이스피어였다. 그러니까, 이건. ... ...)
무슨 일이야?(그리하여 이스피어는 드물게 딱딱한 어조로 당신에게 물었다.)
아이, 무슨 일이야.
네가 몇 번이나 죽게 내버려뒀다
고.)
(그러니 아이작 딜라이트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떠한 것에도 솔직해질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딱딱해지는 어조에 문득 고개를 든 것은 공포심에 가까운 복종심이었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 아니. ... 그게. (그리고 그 텅 빈 공백을 채우려고 연 입은 어떠한 것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 ... ... 아. 악몽을. (더듬거리듯 말한다.) ... 악몽을 꿔서. ... (그리고 도망치고, 숨듯이 다시금 얼굴을 묻으려 품을 파고든다.)
(감히?)
(... ...누가?)
... ... 아이작.(이젠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 이스피어는 묵직하게 차오르는 분노를 만끽하는 자세를 취하며, 나지막히 당신을 불렀다.) 내게 사실을 말하지 않고, 네 여린 마음이 괜찮을 것 같아?(협박처럼 들렸을지 모르겠으나 내뱉는 말은 진실되었다. 이스피어는 당신을 애정을 품고 대해야 했으니까. 다만 당신이 정확히 무슨 일을 겪었을진 몰랐기 때문에, 이스피어는 당신이 몇 번이고 몇 십 번이고 이미 무너진 상태라는 걸 짐작할 수 없었다.)
말 해야지.
네가 날 잘 안다면,
... ... 정말이야. ... (당신이 속아넘어가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럴듯하게 보이려면, 적당히 거짓과 진실을 섞는 수 밖에 없었다. 마냥 진실도, 마냥 거짓도 아닌 말. 어쩌면, 당신도 이런 아이작을 보는 것은 처음일테니 곱게 속아넘어가줄 줄 또 누가 알까?)
... 며칠동안 계속, ... 악몽을 꿔서 그래. 거기서 피어가 계속. ...
(죽어서.)
...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아 몇 번이고 목소리를 가다듬어야 했다.) ... 계속, 심하게 다쳐서. ...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자꾸 떠나니까. 근데 해줄 수 없는 게 없으니까.
(속죄라도 하고 싶은거야? 네가 그렇게 물으면 어쩌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이 몇 십 번의 굴레를 넘어, 오늘에서야 무너지며 아이작은 네게 그렇게 말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날 용서해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까.) ... ... ... 미안. (품을 빠져나올 듯 아이작이 침대를 밀고 일어나려 했다.)
나는 너에게 그 어떤 거짓말도 하지 않아, 아이작.(푹신한 침대에 새까만 머리카락이 흩어진다. 이제 막 산등성이를 넘어 이른 햇살이 창문을 넘실거려 발 끝을 간지럽히는 오전 6시. 이스피어는 담담히 당신을 바라보았다.) 네게 거짓말 하지 않아, 나는.(그 때 내가 네게 말했지. 네가 내게 온다면 나는 널 기어코 행복하게 만들어 줄거라고. 너라는 인간이 내게 종속된다면 네가 포기한 네 인생의 대가로 네가 바라 마지 않을 동화 속의 결말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잖아.(이스피어는 말했다. 너를 아껴주겠다고. 애정해주겠다고. 네가 여태껏 경험치 못한 일상을 영위시켜 주겠다고. 그래서 난 어떤 거짓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난 네게 언제나 다정할 것이고, 그래서 난 너를 버리거나 널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럴 거라고.) 그런 내가 네게는 별다른 약속을 걸지 않았어. 네게 거짓말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어.
그야 네가 어떤 거짓말을 하든, 난 지금처럼 알아차렸을 거니까.(당신을 붙잡았던 것을 보란듯 놓아주었다.) 이 방을 나가려거든 나가. 도망치려면 도망쳐봐.(담담한 시선이 당신을 흔들림 없이 응시했다.)
하지만 넌 그러지 못할걸.
... ...
(약속. 하필이면 왜 꺼낸 말이 그거냔 말인가. 그 많고 많은 언어들 중에 하필 당신이 고른 게 왜. 아이작은 자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제 눈 앞의, 절대자에게서 떨어지는 애정을, 안식을 거부할 수 없다고. 먼저 약속을 깨버린 건 너잖아, 피어. 네가 먼저 내게서. 내가 절대로 닿지 못할 곳으로 떠나버렸잖아. 약속을 깨버린 건 너야. 너라고. 그렇게 아무리 속으로 외쳐봤자, 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아이작은 제 입술을 꾹 문채 마치 울먹이기라도 하듯 시선이 흔들린 채 당신을 본다. 그래. 그 말이 맞아. 나는 절대로 도망갈 수 없다. 절대로. 하얀 침대시트 위에 흩어진 새카만 머리카락을 본다. 거미줄 위에 누운 포식자같은 태도였다. 그리고 아이작은. 자신은. 이 거미줄을 끊고 도망가지 않는다. 거미줄이 없더라도 도망가지 않을테다. 그거야. 우린 약속을 했으니까. 당신이 있을 곳에 행복이 있음이 분명하니까.)
(그렇게 아이작 딜라이트는 무너진다.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당신을 향해 어설프게 세워두었던 벽조차 완전히 무너진다. 전의를 상실한다. 영원같은 애정, 평화와 비슷한 형태의 복종을 택한다.)
... ... 피어.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아이작이 손을 뻗어 자신을 붙잡았던 손을 붙잡아 입을 맞췄다. 원한다면 발에 입을 맞췄을 것이다. 언젠가 들은, 너의 악행을 맨몸으로 받아낼 의지가 있었다. 잔뜩 더러워진 신발을 핥으라고 해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렇게 다시 네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난 절대로 널 떠나지 않아. 절대로. ... ... 포기하지 않아.
네가 믿지 않을까봐, ... 이걸로 날 증오하게 될 것 같아서 두려워.
(모든 승리자는 당신이다. 공포감에서조차 당신이 깃발을 쟁취했다.)
(너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겠구나.)
(우리가 헤어질 때는 분명 누군가의 죽음 뿐이겠구나. 진실인지도 모르는 진실을 그렇게 생각하며, 이스피어는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당신의 뺨을 쓸었다. 감히 어떤 악몽일지 몰랐던 그 현실에게 경고하듯, 당신은 오롯이 나의 것이라고 보여주기라도 하듯 이번에는 이스피어가 몸을 기울여 당신의 뺨에 제 뺨을 부볐다. 당신이 제게 그러했듯 짐승같은 분위기를 모방하며 그러면서도 본연의 고아한 자태는 잃지 못하고,)
약속할게.(자신도 모르게 이미 어겨버리고 만 약속을 입에 담는다.)
내가, 네게.
약속해, 아이.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란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당신에게 보이지 않을 얼굴에는 서늘함만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도 더 달콤함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겠다. 고개를 슬쩍 들어 어딘지 모를 허공을 쳐다보며 읖조렸다.) 그러니 말해. 나는 너의 추악함마저도 애정하기로 약속했잖아?
(아이작 딜라이트는 홀리듯이 손을 뻗었다. 왜 그랬어? 라고 누가 묻는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동화 속 이야기처럼, 잘 짜인 각본 속의 행동처럼. 그냥 그렇게 손이 뻗었다고. 그렇게 네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금방 제 볼에 닿았던 볼에 입술을 부빈다. 피어. 속삭이듯 이 모든 행동의 원인을 쫓아 뱉는다. 안식을 찾는다. 왜 키스하지 않았냐고 또 묻는다면. ... 이성이 엇나갈만큼 고취된 상황 속에서도 아이작 딜라이트가 아주 약간의 이성과 눈치는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래. 네가 화낼까봐.)
... ... 알았어. 그럼 말할게.
(살짝 떨어진 채 숨을 고른 아이작은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디부터 말해야할지 고민하기보단, 모든 것을 말하는 편이 나앗으므로 아이작은 제 감을 따라 움직였다. 어느 순간 시작된 당신의 죽음. 그리고, 되풀이. 알람소리, 당신이 춥다고 말하는 음성, 아침을 먹고, 씻고, 외출하고. ... 그러고 나면 늘 있던 죽음까지도. 처음에는 악몽인 줄 알았으나, 지나치게 현실적인 꿈인줄 알았으나. 그것이 아니었다고. 모든 것이 반복되어가고 있고, '오늘'이 끝나지 않고 있다고. 제게 주어진 죄는 바로
영원한 주말
이라고.)
널 잃고싶지 않았어. 너는 내게 약속했으니까. 그래서 시작했는데. ... 피어, 나는. (변명같이 말을 덧붙인다. 구차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면.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가 살그머니 시선을 올려 당신을 본다.)
아흔 번이나 되어서야 무너진 너도 참 너답긴 한데, ... ... 우선 네게 제일 필요한 말을 해줘야 할 것 같네.(지극한 죄인罪人이 되어 눈을 맞추는 것조차 벅차하는 당신을 보았다. 그래, 나의 죽음이었다면 감히 당신을 이토록 몸 사리게 만든 이유가 납득이 가지. 죄를 감형하는 판결을 내리듯 심심한 감상을 속으로 읊은 이스피어는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이다 말았다.) 난 너 안 미워해. 내가 죽었던 것도 기억 안 나고, 하물며 기억 했더라도 죽음의 원인이 아니었던 네게 화살 끝을 겨누었겠니?(다만 당신이 우습기 그지 없는 생각을 품었다고 비웃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조곤조곤 이야기하며, 당신이 제가 말하는대로 생각하게끔 유도하는 것은 이스피어의 전문이었다.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아이. 이것은 네가 행복에 가까워지도록 하는 발판이 될 테니까.)
그러나 아이, 고생했어.(당신이 겪어왔을 아흔 번의 무참을 잊지도 않았다. 이스피어는 상벌이 확실한 사람이다. 당신이 홀로 겪어야 했을, 저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흔 번의 '오늘'을 무시할 위인이 되지 않았다.) 네가 내 죽음을 견디기 어려워서, 혼자 그 많은 오늘을 겪어야 했을 것에 가슴이 아파.(모두가 다 진실이다. 매번 그래왔다.) 그리고 기뻐. 네가 날 위해 그렇게 해줬다는 게. ...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내게 듣고 싶은 말이 있어? 아니면, 내게 받고 싶은 행동이 있어? 이루고 싶은 일과가 있어?(그렇게 눈매를 휘었다. 당신을 이 현실에 결국 안주하게 만드는 예의 그 웃음이다.) 네 노고에 대한 보답이야.
오늘
나의 하루를 네게 줄게.
(더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약간의 균열이 났을 뿐, 당신이 오늘 모른척 넘어갔다면 버틸 수 있었겠지. 어떻게든 시간은 갔을 거고, 죽음은 찾아왔을 것이며, 다시 시간이 돌아가는 식으로. 이게 버틴다. 라는 말이 어울린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오늘의 이 행동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에게 말하며 당신이 용서한다는 듯이 웃었고,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심지어 기쁘다, 고까지 하지 않나! 아이작은 실로 그것이 가장 놀라웠다. 아이작은 오늘 하루 잘한 것을 듣는 어린아이처럼 입을 꾹 다문 채 당신의 말이 끝날 때까지 앉아 기다렸다.)
듣고 싶은 말이나, 행동 ... ?
(지금껏 아이작은 대부분 원하지 않는 일정을 소화했다. 정확히는, 당신의 의지에 따른 일정들. 물론 그것이 싫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번과 같은 '사건'만 아니었다면 아이작은 불구덩이라도 당신이 가고싶다면 안고 구경시켜줄 의향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고, 제게 상을 주었다. 아. 이 얼마나 달콤한가. 충성의 보답으로 따라오는 이것들이. 아이작은 단 한 번도 열지 않았던 입을 연다. 계산없이 원하는 것을 뱉는다.) 그럼 ... ... .
... ... 키스하고 싶어.
(이번엔 눈치없는 타이밍은 아니었지? 속으로 되내이지만 그런 계산은 머릿속을 떠난지 오래였다. 이정도는 당신도 조금 봐주지 않을까. 그런 속편한 소리만 늘어놓을 뿐이다. 당신의 팔목을, 손목을, 손을 차례대로 쥐었다.) 그리고, ... ... 오늘은 밖으로 가지마. 같이. ... 집에 있자.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집에서도 할 수 있는 건 많으니까.
이리 와.
키스하자, 내 아이.
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오전 7시 반의 일이었습니다.
아이작,
행운
판정.
기준치: | 50/25/10 |
굴림: | 58 |
판정결과: | 실패 |
이스피어,
행운
판정.
기준치: | 80/40/16 |
굴림: | 99 |
판정결과: | 실패 |
그렇기에,
오후 3시.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끊임없이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렇기에,
오후 6시.
창 밖으로도 잔뜩 쌓인 눈이 곧잘 보였던가요.
어둠이 집니다.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오늘을 견뎌내던 우리.
재앙이라는 것은 본디 그런 법이죠.
대처할 수도 없고,
막아낼 수도 없다는 것을.
아이작,
듣기
판정.
기준치: | 70/35/14 |
굴림: | 100 |
판정결과: | 대실패 |
둘 밖에 없는 공간이었는데도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습니다.
마치 웃음소리 같아요.
그렇게 순간,
'당신'은 온 몸에서의 탈력감을 느끼며 힘을 잃습니다.
삐 ──────,
이명이 들립니다.
아, 이게 무슨 일이죠.
쓰러지는 것이,
당신이 아닌,
자신이라고요.
당혹감을 숨길 새도 없이 고통이 발끝부터 차오릅니다.
죽음을 예감한 것처럼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합니다.
주마등 같은 기억들이 스쳐지나가고,
한 번,
눈을 깜빡였을 때에 당신의 눈 앞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의 이스피어가,
두 번,
눈을 깜빡였을 때에 그 뒤론,
검은 머리칼의,
아름다운 남자가......
그가 손가락을 딱 튕깁니다.
그렇게 모든 시간이 정지합니다.
시간이 정지되는 걸 알 수 있다니, 느낄 수 있다니.
신기하지 않나요?
그것도 아이작, 당신과 이스피어, 저 남자 셋만 빼놓고서 말이에요.
검은 머리칼의 남자를 바라보면, 그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회중시계와 같은 회중시계를 들고 있습니다.
마치 시계의 추처럼 흔들리고 있는 회중시계와 함께 그가 속삭이는 것처럼 머릿속에 소리가 울립니다.
"너는 죽을 것이다."
"시계를 이스피어에게 건네, 그러면 시간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할 테니."
직감처럼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남자가 화려하게 웃습니다.
이스피어에게서 시선을 거둬 아이작을 바라봅니다.
"아니면 네 죽음으로 내가 이 잊혀진 세계를 처분하는 걸 도울 수도 있지."
"선택해, 아이작."
"이스피어가 했던 일을 네가, 네가 했던 일을 이스피어가 하게 될 뿐이야."
자, 아이작.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건가요?
한 번 맛본 전형적인 죽음의 고통과 공포에 굴하지 않고,
당신이 겪었던 그 모든 고독과 기약 없는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이스피어에게 회중시계를 건넬 건가요?
아니면 이 모든 반복을 당신의 죽음으로 끝낼 건가요?
상냥하고, 또 상냥한 손길이 당신을 어루만집니다.
우리를 주제넘게 갈라놓는 그것이, 더는 우릴 갈라놓지 못하게 하겠다 말했던 걸 기억해.
너의 추악함마저도 애정하기로 약속했던 날 기억해.
설사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우리의 약속은 영원해.
(그대로 고개를 숙여 당신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죽음. 그것을 온 몸으로 경험하고 있음에도, 시계를 넘겨주게 되었을 때 있을 죽음의 연속들이 그리 두렵진 않았다. 어차피, 피어. 알잖아. 내게 있어 공포는 너 하나면 충분하다. 이건 어쩌면, 네가 아닌 다른 것을 주인으로 둘 뻔한 것에 대한 벌이 아닐까. 아이작은 속으로 생각했다.)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좋을텐데.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시계를 넘겨주면,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함께할지 모른다. 당신은 똑똑하고, 완벽하고, 적어도 자신보다는 잘 할테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죽음과 재앙은 예기치 못하게 찾아오는 법이다. 그 안에 있을 자신의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신은 포기하지 않을 게 뻔하니까. 실패를 죽는 것보다 싫어할 당신이 좌절하는 게 싫으니까. 눈 앞의 당신이 망가지지 않길 바란다. 당신의 위에 그 어떠한 것도 서있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피어. 나는. ... ... .)
피어, 나는, ...
(안간힘을 쓰듯 힘을 모두 끌어모아 당신의 손을 쥔다. 아. 이제야 비로소 당신이 차갑지 않다.)
나는, ... ... 행복해.
(애초에 모든 약속은 아이작의 행복을 목표로 두고 있었다. 그러니, 피어. 내가 행복하다고 말하는 지금 우리의 계약은 모두 끝나는 거야. 우리의 약속은 모두 이룬 셈이 되는거야.)
(나는 당신을 위한 동백이 될테니. 그러니 너는 떠나. 배를 타고 영영 가.)
(모두 말하고 싶었지만, 짧은 단말마밖에 나오지 않았다. 상관없다. 어차피 당신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테니까. 그 이상으로 자신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걸로 됐을거라고. 아이작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피어. ... ... (목구멍 끝에 말이 걸려 나오지 않는다. 가. 하고싶은 말은 단 한마디 임에도.)
너를 떠나라고.
내 사랑, 너를 두고 가라고. ... ...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그토록 당신이 애정하던 이스피어의 웃음이 유독 선명했나요.
당신으로 인해 분리되었던 세계의 평행선이 다시 하나로 교접하는 게 느껴집니다.
당신의 죽음을 통해 세계는 다시 원래 자리를 되찾을 겁니다.
당신은 동백인 채 이곳에 남겨지고,
이스피어는 배를 타고 멀리 떠나가겠죠.
나는 내가 이기적인 걸 알고 있음에도, 문득 이렇게까지 이기적인 걸 알아차리면 놀랄 수 밖에 없어.
이 장난 같은 시간의 반복 속에서 해방되는 겁니다. ......
아이,
아이작.
나도 결국 인간인가봐.
서서히 의식이 어둠에 잠기고,
죽음이 목전으로 다가오던 찰나......
내게 네가 머물러야 한다 말해.
째깍.
"그렇지."
째깍.
"세상은 항상 생각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단다."
불길한 시계 초침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던 것 같습니다.
아이.
END C. 떠오른 세계
이스피어 생환, 아이작 로스트?
이후로 세계는 어떻게?
...
집으로 가요.
우리만의 동화를 적어내리러.
우리만의 영원한 결말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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