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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EAR&MARPASHI/썰&연성

[오르아이] Blomming 17

by 여우비야 2024. 5. 1.

때는 5월 17일. 오르페 벵글러가 감기에 걸렸다.

대체 봄도 다 지나가고 여름 내음이 풍겨오기 시작하는 요즈음에 웬 감기냐며 본인도 어이가 없었던지, 오르페는 메롱한 상태로도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결국 조퇴를 결정한 오르페는 교실을 떠나기 전 아이샤에게 말을 남겼다.

"나 집 간다."

당연히 아이샤 레브는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했다. 이유라 하면.

"리. 지금 지, 집에 아무도 없잖아. 혼자서 괜찮겠어? 내가 하, 학교 끝나면 바로 가서…."

"아 됐어, 귀찮게 뭐 하게. 우리 집 오지마. 나 간다."

"오, 오르페!"

때마침 오르페를 제외한 벵글러 가-아버지, 어머니, 쌍둥이 동생 둘-는 집을 비운 상황 때문이었다.

감기에 걸린 오르페가 필연적으로 방치되어야 하는 상황에 아이샤는 떠나는 제 소꿉친구를 붙잡았지만, 머잖아 울리는 수업 종소리에 그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 * *

 

열기운이 가득해 땀은 나고 몸은 으슬으슬 추운데, 그렇다고 잠이 오는 건 또 아니었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오르페가 침대를 뒤척이며 한 손으로 톡톡 스마트폰을 두드려댔다. 그 나잇대 학생들마냥 숏츠나 릴스를 탐방하던 때였다.

띵! 메시지가 왔다. 아이샤로부터였다.

'벌써 하교 시간인가…?'

[리 많이 아파? 나 수업 끝나고 집가는 중]

오르페가 톡톡 화면을 두드렸다.

<ㄱㅊ>

<걱정하지 말래도>

<뭐... 좀 심심하긴 해>

[그래?]

[배는 안고파?]

<ㅇㅇ 아까 뭐 시켜먹음>

[그래? 죽 사가려 했는데 안 사도 되겠네]

사실 죽이 아니라 치킨을 시켜먹은 오르페는 자기도 모르게 윽 소리를 냈다. 괜히 찔리네, 이거.

[금방 가서 간호해줄게 기다려]

"…오지 말라니까…."

오르페가 중얼거렸다.

<올 정도 아니라니까. 곧 있으면 시험이니까 공부나 해>

[8-8...]

[ㅠ-ㅠ...]

그리고 답장은 오지 않았다. 드디어 포기를 한 건가 싶어, 화면을 끄고 오르페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깜빡 선잠에 들었던 모양이다.

 

"…아."

눈을 뜨니 이미 하늘은 어둑해졌고, 머리맡의 핸드폰은 빛을 내며 진동하고 있었다. 비몽사몽한 중에 오르페가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봤다. 부재중 전화 한 통. 아이샤였다.

달칵,

"어…, 왜."

[오르페, 자, 잤어? 전화 안 받길래 거, 걱정돼서….]

"넌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큼, …그래서 왜 전화했냐?"

[아까 심심하다길래…. 좋은 새, 생각이 나서.]

"좋은 생각?"

목을 벅벅 긁으며 부스스 상체를 일으킨 오르페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게 뭐지. 핸드폰 너머로 멋쩍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베란다로 나, 나와볼래?]

"엥?"

몸을 일으키니 조금 현기증이 나는 것도 같았다. 땀에 축축하게 젖은 몸이 다시 떨리는 것 같아 오르페가 잔기침을 했다.

드르륵, 베란다로 통하는 문을 여니 아직 온전한 여름이 다가오지 않은 것을 증명하듯, 서늘하면서도 선선한 바람이 훅 불어왔다. 바람에 눈을 가늘게 뜬 오르페가 익숙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려,

"오, 오리!"

잠옷 차림으로 옆 집 베란다로 나온 아이샤를 바라보았다. 오르페가 통화를 종료했다. 아이샤의 손에 들린 것을 보니 절로 웃음이 샜다.

"웬 종이컵?"

멋쩍어하면서도 제법 바보같은 얼굴로 웃은 아이샤가 손에 들린 종이컵 하나를 오르페에게 던졌다. 휙,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질 뻔한 것을 겨우 붙잡은 오르페가 종이컵 바닥을 뚫고 이어진 실을 보았다. 그가 재차 헛웃음을 흘렸다.

"시, 심심하다길래…. 그런데 오르페는 집에 오, 오지 말라고 했으니까…."

"…이게 무슨 바보같은 짓이야?"

열 일곱 살이나 먹어놓고 초등학생마냥 종이컵 두 개 들고 노는 지금이 믿기지 않았던 오르페가 뺨을 긁적이다가, 그러면서도 종이컵을 입에 가져다댔다.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샤도 제 손에 들린 종이컵을 귀에 가져다댔다.

"잘 들려?"

아이샤가 자그맣게 웃음을 터트렸다.

"으, 응…."

실타래 하나를 두고, 베란다와 베란다 사이로 간질간질한 음성이 오갔다.

"애초에 전화로 하면 되잖아."

"그렇지만 전화는 나, 낭만이 없는걸…."

"얼씨구. 요즘 자꾸 '낭만'같은 거 찾는다?"

"…그건 리가 나, 낭만을 모르는 거지…."

"그러게 만화 좀 그만 보라니까."

"마, 만화가 아니라 소설이야!"

"그게 그거 아닌가?"

"오르페!"

밤바람에 땀은 다 마른지 오래였다. 막 떠들다보니 그 사이 바람결에 열기운도 함께 실려 떠나갔는지, 한결 나아진 기분에 오르페가 빨갛게 익은 아이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입술을 꾹 깨물고 눈을 가늘게 뜬 아이샤가 머뭇거리다 종이컵을 입가에 가져다댔다. 그에 장난스레 웃은 오르페가 종이컵을 들어 귀에 댔다.

겨우 실을 타고 전해진 음성은 무척이나 작아, 귀를 바짝 대고 있지 않았더라면 놓칠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무어라 했냐면.

─오르페,

"아프지 마."

마치 다 떠나간 봄이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때는 5월 17일.

열 일곱의 여름이 막 다가오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