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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From./썰&연성

[디어프롬] 첫 만남

by 여우비야 2024. 4. 27.

 


 

 

 "여기가 맞아?"

 "여기가 맞아?"

 인파의 한가운데 서있는 남매는 똑같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속닥이고 있었다. 이곳은 영국의 킹스크로스역, 구체적으로 말하면 9 승강장과 10 승강장 사이에 위치한 곳이었다.

 남매는 아무래도 성별이 다른 쌍둥이인 모양이었다. 둘 중 낡고 해진 안경을 쓴 쪽만 안경을 고쳐 쓰며 편지를 들여다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둘 사이에서 수상쩍은 대화가 오갔다.

 "9와 3/4 승강장은 안 보여."

 "나도 안 보여."

 "그러니까 추측할 수 있는 건 9와 10 승강장 사이의…."

 소년, 헤니언의 고개가 조금 떨어진 옆의 기둥으로 향했다. 소녀, 밀라의 고개 또한 그리로 향했다. 안경이 없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눈을 한껏 찌푸린 채였지만 말이다.

 보이는 건 새하얗기만 한 기둥이다. 헤니언이 비장하게 말했다.

 "저곳인데 말이지."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승강장임을 표시하는 문이나 승무원은 보이지 않았다. 둘은 다시금 머리를 맞댄 채 속닥였다. 이 편지가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한 건 아닐까? 그렇지만, 누가 골탕 먹이려고 3/4란 애매한 단어를 적어두었겠어? 다이애건 앨리에 갔을 때를 생각해 봐, 밀라, 그때도 벽이 움직여서 문이 되었잖아. 하지만 오빠, 그렇게 따지면.

 밀라가 기둥 앞으로 터벅 터벅 걸어가서 기둥에 손을 확 짚었다.

 "그럼 이것도 문이라는 소리─, 꺅!"

 "밀라!"

 그리고 손을 짚은 그때, 밀라의 신형이 기둥 뒤로 확 기울어 넘어졌다. 깜짝 놀란 헤니언이 생각을 거치지도 않고 그리로 달려 나갔다.

 마땅한 충돌 없이 기둥을, 벽을 뚫고 넘어 보이는 광경은….

 밀라가 눈을 깜빡였다.

 "왕자…?"

 거꾸로 뒤집힌 시야와 급하게 자신을 붙잡아 안은 누군가의 얼굴. 음영 진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때마침 근처에 서있다가 입구에서 대차게 넘어지려던 소녀를 붙잡은 소년, 엘리엇이 자그맣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밀라가 눈을 깜빡였다.

 "밀라, 갑자기 이게 무슨─, 우왓!"

 그러나 사고는 연달아 이어졌다. 밀라를 쫓아 무거운 짐을 들고 달려온 헤니언이 엘리엇의 옆에 서있던 소녀와 부딪힐 위기에 직면하고 만 것이었다. 헤니언과 소녀, 낸시의 눈동자가 삽시간에 커졌다.

 우당탕!

 "…아야야…."

 "…이, 이럴 수가. 세상에, 당신. 괜찮아요?"

 다행이었던 점은 헤니언이 낸시와 부딪히기 직전 몸을 옆으로 굴러 충돌을 피했던 것이었다. 덕분에 안경은 낸시의 발치까지 쭉 날아가고, 꾹꾹 눌러 담은 짐가방은 바닥을 굴렀지만 말이었다. 헤니언 또한 그런 신세를 면하진 못했다.

 "오빠, 괜찮아?!"

 "미, 미안, 괜찮아…?"

 로뎀의 쌍둥이가 하워드 쌍둥이를 대면한 첫날이었다.

 

 * * *

 

 한편, 그런 사정들로 승강장이 시끄러운 와중. 이미 한 객실을 꿰차 앉아있었던 흑발의 소녀, 올리비아가 불편한 숨을 내뱉었다. 구불거리며 어깨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등 뒤로 다시금 넘길 뿐이었다.

 소란스럽기 짝이 없다. 가능하다면 어서 빨리 그 '방음 마법'이라는 것 좀 배우고 싶은데 말이다.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맞은편에 앉은 흑발의 소년, 파사드만 희미한 한숨 소리에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왜 그러시나요, '누님'?"

 "……."

 부모들이나 다른 자들이 없어도 꼬박꼬박 저 존댓말과 호칭은 빠트리지 않는다. 혹여 모를 상황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기보단 제 속을 긁기 위한 것이 틀림없었다. 올리비아는 파사드를 바라보다, 시선을 다시 창 밖으로 돌렸다. 명백한 무시에도 굴하지 않은 파사드가 무어라 말을 더 붙일 참이었다.

 똑똑,

 둘의 고개가 동시에 복도 쪽 창문으로 향했다.

 고아하니 웃고 있는 한 소녀가 눈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남아있는 자리 좀 있을까요?"

 최초의 음성. 그것에서 파사드는 바로 소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면을 보았다. 올리비아는 그냥 관심이 없어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불청객을 응대하는 역할은 소년이 도맡을 것이란 걸 알아서였다.

 그 예상대로 파사드가 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아…. 다른 곳엔 자리가 없는 모양이죠?"

 "네, 이곳밖엔 자리가 안 남아있는 것 같아서요…."

 창 너머의 소녀, 캐롤라인이 우는 척 흉내 내며 반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곁에 서있던 또 다른 소년, 샨의 멍한 얼굴이 보였다.

 안 그래도 올리비아는 반응이 없어 재미없던 참이었는데 때마침 알아서 '장난감'이 굴러 들어와 주니 거부할 것이 없던 파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기차가 출발하기까지 시간이 이렇게 남았는데 자리가 없긴 뭘 없어, 그러나 파사드는 그런 스타일에 집착하는 편이 아니었다. 저 소녀도 그런 모양이었고.

 파사드가 웃었다.

 "그럼 뭐, 들어오시죠."

 

 * * *

 

 "그렇게 많이 다친 것 같진 않은데…."

 "오빤 맨날 그러더라. 적어도 깨끗하겐 닦아둬야 나중에 고름이 안 찬다고!"

 또 다른 객실, 헤니언 하워드는 여동생 밀라 하워드에게 상처를 치료당하고 있었다. 난감한 웃음을 걸친 채 이따금 아야, 아야야, 소리를 내는 그를 맞은편에서 바라보는 건 로뎀 남매였다. 낸시와 엘리엇이 서로를 돌아보다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있어 주목할 점은 이것이었다.

 "그래도 바닥이 돌바닥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헤니언, 이라 스스로를 소개한 소년이 쓰고 있던 동그란 안경이 어느새 그의 여동생, 밀라의 얼굴에 씌워져 있었다는 점.

 덕분에 치료에 열중하는 그들을 두고 낸시와 엘리엇은 서로 속닥거릴 수밖에 없었다. 리엇, 원래 안경은 둘이서 나눠 쓰는 것이던가요? 아니지 않았던가요, 누님?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렇다면 저들은 대체 뭘 하는 걸까요? …안경을 쓰는 게 불편해서 평소엔 맡기고 다닌다던가…?

 끝내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

 "저기…. 하워드 양."

 "네?"

 상처에 붙은 이물질을 어느덧 다 닦아낸 소녀, 밀라가 눈을 깜빡이며 엘리엇을 돌아보았다. 의아한 것은 헤니언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이 생긴 둘이 똑같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니, 살짝 민망해진 엘리엇이 자그맣게 웃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안경에 관한 걸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낸시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둘처럼 하나의 안경을 나눠쓰는 건 처음 보거든요."

 눈을 꿈뻑이던 헤니언이 아, 소리를 내며 밀라를 돌아보았다. 어깨를 으쓱인 밀라가 다시 헤니언의 얼굴에 다소 큰 안경을 씌워주었다.

 "별 건 아니야. 그냥. 우리한테 안경이 하나밖에 없었거든."

 이번엔 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오빠보다는 제가 조금 더 시력이 좋았거든요."

 낸시와 엘리엇이 고개를 기울였다.

 "저, 죄송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아."

 낸시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네자 무언가 깨달은 듯한 헤니언이 작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출신'은 되도록 알리지 않는 편이 좋겠지만 이런 데에서 거짓말을 하기엔, 언젠가 들통날 이야기였으니까.

 "우리가 따로 가진 게 없어서. 안경을 하나 더 가지기는 어려웠거든."

 "……."

 아주 자그맣게 낸시의 입이 벌려졌다.

 로뎀이란 작은 세계가 깨져나가는 순간이었다.

 

 * * *

 

 "나는 파사드. 그리고 이쪽은 올리비아. 내 누나야."

 "캐롤라인이에요." 

 "……."

 "그리고 얘는 또 뭔가에 정신이 팔렸네. 이쪽은 샨이에요."

 분명 네 명이 한 공간에 있는데 말하는 사람은 두 명뿐인 기이한 상황이 이어졌다. 맞은편에서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은 파사드는 단 목소리로 올리비아를 소개했지만, 올리비아는 어느덧 움직이는 기차를 따라 변하는 풍경을 지켜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맞은편에 앉은 캐롤라인은 대답 없던 샨을 팔꿈치로 쿡 찔러보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슬쩍 살펴보니 올리비아란 소녀에게 줄곧 시선이 꽂혀있는 채였다. 객실에 들어오고부터 쭉 이 상태인데, 얜 또 뭐가 문제람. 곧 신경을 끊어내기야 했다.

 기이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건 파사드의 쪽이었다.

 "저번에 멀리서 본 적 있어. 우리 기억 안 나? 그때 메이든 저택에서 열린 파티 때 왔었잖아."

 "그럼요, 기억 못 할 리가. '조금 이상한' 사고가 일어나서 파티가 일찍 끝나버렸잖아요. 그땐 얼마나 서운했던지…."

 "그러게. 심지어 그때 정원의 분수에서 와인이 나오게 사고를 친 범인은 아직도 못 잡았다며? 난 금방 잡힐 줄 알았는데 말이야."

 "어떻게 주도면밀하게 계획했길래, 제대로 마법을 다루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런 짓을 벌인 걸까요?"

 파사드의 웃음이 짙어졌다.

 "범인의 윤곽이 대충 잡히나 봐."

 "글쎄요…."

 캐롤라인이 여유롭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가는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둘의 시선이 한 차례 허공에서 부딪혔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파사드가 눈웃음을 지으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우리 누나는 아까부터 한 마디도 안 하네. 오늘따라 몸 상태가 안 좋으신가. 멀미해?"

 "…말이 없는 건 제 오라버니도 같지만요. 혹시 이 기차에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건 아닐까요?"

 하하하. 호호호. 둘의 웃음소리가 객실 안을 가득 채웠다.

 파사드가 손을 뻗어 올리비아의 어깨를 감싸, 제 쪽으로 당겼다. 나른한 미소가 맺혔다.

 "아니면 너무 긴장한 상태인 걸지도 모르겠다."

 "신입생이라서요? 하지만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잖아요."

 "같은 '신입생'이라도 다른 점이 있긴 마련이니까."

 예를 들자면─, 파사드의 말이 이어지던 때였다.

 "파사드."

 "……."

 "혀 간수 잘해."

 여전히 시선을 창 밖에 둔 채인 올리비아의 음성이었다. 막연히 높지도, 그렇다고 확 가라앉지도 않은 차분하고 우아한 목소리. 파사드가 눈을 가늘게 휘어 웃었다.

 "네에, 누님."

 그래야겠죠. 어깨를 끌어안았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 궤적을 지켜보는 캐롤라인의 눈빛에 흥미가 돌았다. 그리고,

 쿵, 쿵.

 아까부터 이름을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던 샨의 낯빛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객실에 들어온 순간 햇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던 저 얼굴을 본 순간부터, 무심하여 어떤 것도 담지 않은 공허한 눈동자를 본 순간부터 샨은 말 그대로 올리비아에게 홀려 있었다.

 조용히 샨이 제 가슴께를 붙잡았다.

 '목소리, 예쁘다….'

 

 * * *

 

 질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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