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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EAR&MARPASHI/썰&연성

[아이피어] 나쁜 버릇 下

by 여우비야 2020. 12. 20.

 

단언컨대 그것은 완전한 해결이 아니었다.
이스피어 틸다의 문제점? 친구들에게 묻는다면 다 같은 소리를 했을 테다.

"피어는 참 오만해."

하고.

*

 

 스크린에서 재생되는 영화는 한창 후반부를 달리고 있었다. 남자주인공인 줄 알았던 놈을 걷어차고 진짜 남자주인공에게로 향하는 여자주인공의 얼굴이 보였다. 둘은 감동의 재회를 하고 그대로 키스를….

 

 "어쩜, 로맨틱해라."

 

대체 어느 부분이? 이해하지 못한 아이작이 연신 감탄사를 흘리는 이스피어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표정은 평소와 똑같지만 반짝이는 눈이, 그가 정말 저 상황을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스피어는 아이작이 별다른 물음을 건네지 않아도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운명같은 사랑, 멋지지 않아? …그다지. 잘 생각해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야. …그렇다면 나도, 뭐. 이스피어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작.

 

 "─우리는 저런 거. 하지 말자."

 

 아이작의 손가락을 파고들어 얽는 손길이 단단했다. 툭. 아이작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이스피어가 화면을 응시한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열린 입술에선 흘러가듯 목소리가 넘친다. 사람은 더럽고, 이기적이니까. 사람이 하는 사랑도 얼마나 더럽겠어. 잠시 숨을 고르다 말했다.

"나도 해봤어."

 …그 태연한 말에 어깨를 끌어안은 아이작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한참 망설이다 물었다.

 

 "어땠어?"

 "뭘 어땠겠어."

 

 아이작에게 더 몸을 붙여오며 이스피어가 눈을 감았다. 중얼거렸다.

 끔찍했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왔다. 영화 속 인물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아이작과 이스피어는 계속 현실을 살아간다.

 

*

 

 이스피어의 나쁜 버릇은 계속됐다. 흥미가 돋는 사람을 발견하면 어김없이 꼬셔내 연인이 되었고, 길들인 다음에 무너뜨렸다. 이스피어는 약속대로 매번 아이작과 함께였으며, 그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아이작은 무언가… 충족되지 않는 기분이 켭켭이 쌓여가는 느낌을 받기 마련이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은 손을 쥐었다 펴기를 몇 번.

 

 기어이 참고 참았던 것들이 터지게 된 그 날은 데이트를 끝마친 이스피어가 드물게 화가 나서 돌아온 날이었다. 아이작의 자취방의 키패드를 입력하고 들어오는 사람이 이스피어밖에 더 있었을까. 현관문 쪽으로 아이작이 마중을 위해 걸어나가던 참이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그를 마주한 순간.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번 이스피어가 아이작에게 안겨들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가는 그의 품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허리를 껴안는 팔에는 과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있었다.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등을 마주 안아 쓸어주었지만 사고를 정리하기가 힘든 상태였다. 속이 타들어갔다. 일정한 토닥임이 몇 십 초를 넘게 계속될 무렵 이스피어가 입을 열었다.

 

 "…자존심 상해."

 "…무슨 일이 있었는데?"

 "몰라, 그냥."

 "…그냥?"

 

 입술을 짓씹는다.

 

 "그딴 놈이 날 휘두르려 들잖아…."

 

 연인에 대한 이야기였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던 아이작은 그것이 다만 분노에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분노, 그리고 두려움. 아이작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입 언저리까지 치고 올라온 언어가 있었다. 화가 있었다. 하나 먼젓번 해야 할 일은 이스피어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이었다, 이스피어가 눈치채기 전에 두려움을 사그라뜨려주는 것이었다. 더 상처받지 않도록.

 토닥임이 잦아들면 이스피어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이작.

 

 "위로해줘."

 

  품에서 고개를 든 이스피어의 발갛게 물든 눈가와 몇 번을 물었는지 터진 입술, 매섭게 떠진 눈초리. 그것이 점차 완연한 서러움으로 젖어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이작은, .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게 이런 뜻이었을까. 이스피어가 그의 목을 끌어안아 내리는 것에 아이작이 눈을 감았다. 곧이어 맞닿는 입술. 아이작의 두 손은 이스피어의 두 귀를 덮었다. 그가 아이작에게 그리했던 것처럼 위로를 돌려주었다. 아이작은 내내 만족할 수 없는 기분을 가졌지만 그의 숨이 제게 먹혀드는 지금에서는 아주, 아주 조그마한 충족감을 느낄 수는 있었다.

 입술을 떨어뜨리며 그가 눈을 마주보았다. 아이작이 표정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그까짓 충족감보다 한층 큰 불안이 있었다.

 

 "…헤어져."

 "아니. 오기 생겨서라도 못 헤어져."

 "이스피어."

 

 질책하는 목소리가 당장 답했다.

 

 "그깟 놈이 뭐라고 널 망쳐."

 "날 망치려고 하는 게 아니야. 그런 놈들을 망치려고 하는 거지."

 

 아이작은 질끈 눈을 감았다. 아. 뭔가 알아차릴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이스피어의 그 나쁜 버릇은, 단순한 분풀에서 비롯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직감.

 아이작이 이스피어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문득 발 밑이 일렁인다는 착각이 들었다.

 

 "이스피어. 난 바보가 아니야."

 "…내가 자학이라도 하고 있다고, 그런 말을 하려는거야?"

 "진정해.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잖아."

 "그럼 뭔데?"

 

 아이작은 본디 이런 때의 이스피어를 말리지 않았다. 집념과 오기로 가득 찬 상태의 이스피어는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 되었다. 막아서야 할 때라는 직감이 울렸다. 숨을 느리게 뱉어낸 아이작이 붙잡은 이스피어의 손등을 매만졌다. 눈을 내리깔았다.

 

 "이스피어. 이건 분명한 낭비야. 네 시간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해."

 "나도 알아. 그리고 난 충분히 내 시간을 아끼고 있어. 보상받고 싶다는 심리가 뭐가 잘못인건데?"

 "그 과정에서 네가 지금처럼 상처를 받잖아."

 "상처받은 적 없어." 

 "울었잖아."

 

 이스피어가 입술을 다물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말문이 막힌 모양이다. 손에 힘이 들어가는 모습에 아이작이 짧게나마 생겨난 침묵을 깨트렸다.

 

 "이스피어, 난, 바보도 아니지만, 또…."

 "…."

 "인형도 아니야."

 

 그가 손을 놓았다. 한 손으로 짙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발 밑이 일렁이던 착각은 어느덧 그를 거의 다 집어삼킬 듯 했다.
하지만 반면, 이스피어는 '놓아진' 손에 그를 바라보았다. 이해하지 못해서 황망하게 아이작을 바라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말을 듣자마자 서슬퍼렇게 심장에 내리꽂히는, 그래. 죄책감 때문이었다. 이스피어가 입술을 벌렸다 다물었다. 아이작. 속삭이며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닿지는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이스피어는 스스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허공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아이작의 숨이 다소 거칠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작은, 인형이, 아니다. 그것이 본인의 입에서부터 흘러나왔다는 사실에 이스피어의 심장이 아프도록 뛰었다. 미친놈. 미친놈. 그렇게 진심으로 대해주겠다고 해놓고. 뭐? 사람에게 진심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고 이야기를 해. 이가 갈렸다. 이게 진심이고 최선이었나? 이래놓고 그를 아껴주었다고, 소중하게 대해주었다고 이야기했나? 이걸 또. 이제서야 깨달았다고?

 까마득한 상처가 자존심을 쪼개듯 내리그어졌다. 아이작을 외롭지 않게,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던 사람이 지금, 상처받은 그의 앞에 서 있다.

 …멍청한 놈. 이스피어가 곧장 내뱉었다.

 

 "아이작. 미안해."

 "…."

 "내가 잘못했어."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의 심정이 된 이스피어의 손가락이 자꾸만 꼼질거렸다. 아이작의 답은 한참 뒤에 흘러나왔다. 네가 잘못한 게 뭐 있겠어. 그 말에 더욱 새파랗게 질리는 것은 이스피어의 얼굴이었다. 눈을 질끈 감곤 생각할 새 없이 그의 손을 붙들었다. 얼굴을 덮은 손을 차마 떼어낼 수는 없어 금방 떨어지는 손은 애매하게 다른 한쪽 손을 향했다. 두려움을 띄고 그 살갗을 자꾸만 더듬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죽 흘렀다. 명백하게 이스피어의 오만이 불러온 화였다. 빼도박도 못할 제 잘못이다.

 아이작이 얼굴을 덮었던 손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어느덧 맨 얼굴을 마주한 이스피어가, 숨을 급하게 삼켰다.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도망칠 생각도, 그러고픈 마음도 없다.

 

 "미안, 미안해. 아이작."

 "이스피어."

 손을 뻗었다. 아이작, 떠나지 마. 이스피어가 속닥이자 곧 그가 이스피어를 끌어안았다.

 "…이스피어. 내게…."

 

 어깨에 고개를 한참 묻은 아이작은 이스피어가 한 말의 주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말은 항상, 내가 생각하던 것이었는데. 눈을 감았다. 이스피어의 떨림이 느껴졌다.

 

 "내게 무엇이 부족해?"

 "아이작."

 "내가 다 해줄 수 있어. 너도 알잖아."

 "…."

 "또, 네가 말했잖아. 우린 그런 거, 하지 말자고. 그러니까."

 

 그러니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완벽'하겠느냐고.

*

 이어져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앞서 말문을 뗀 것은 이스피어였다. 더듬거리며 말하길,

 

 "다시는, 널…. 기만하지 않을게."

 

 그 마른 음성에는 미묘하게 젖어든 끝이 있었다. 아이작이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맞췄다.

 

 "그럼. 헤어질거야?"

 "응."

 "앞으로는…."

 "고칠거야. 이런 버릇."

 

 미안해. 재차 속삭이는 이스피어가 결국 눈물을 떨구었다. 숨을 흘린 아이작의 신형이 이스피어에게 기울었다.

 

*

 이후. 이스피어의 나쁜 버릇이 끝이 났다.

*

 

 "아주 청춘들을 즐기는구만?"

 

 새 학기, 새로 부임한 체육 교사의 헛웃음이 흘러나오는 동시에 주변 아이들의 입에서도 웃음이 터졌다. 이스피어는 자신에게 헐렁거리는 아이작의 체육복 상의 끝자락을 집어 들어올리다 말곤 환하게 웃으며 애교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선생님~. 청춘인 김에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돼요?"

 "꼴깝 떨지 말고. 아이작 딜라이트, 너는 운동장 다섯 바퀴다."

 "쌤 너무해!"

 

 이스피어가 눈꼬리를 축 내리며 아이작의 허리를 끌어안노라면 봐주는 것 없다며 재빨리 으름장을 놓는 체육 교사의 얼굴에도, 웃음이 걸려있다. …금방 뛰고 올게, 피어. 손을 풀어달라는 것처럼 이스피어의 팔을 두드린 아이작이 작게 웃었다. 이스피어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몇 초 더 그를 끌어안고 있다 팔을 풀어주었다. 떠나기 전 어깨에 하는 입맞춤은 덤이다. 안 그래도 교복 차림이라 갑갑할텐데, 짜증나네. 몰래 교사를 째려본 이스피어가 괜히 체육복에 박힌 아이작의 명찰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아이작이 운동장을 다 돌고 이스피어에게 돌아왔을 땐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체육쌤 저주할거야. 무섭게 눈초리를 올리며 속닥인 이스피어는 젖은 아이작의 앞머리를 쓸어넘겨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

 "전날 비가 올 줄 누가 알았겠어."

 "분명 일기예보도 봤었단 말이야."

 "그리고 그 날도, 내 집에서 잤었고 말야."

 

 발 코로 운동장 바닥을 두드리는 모습이 퍽 신경질적이었다. 아무튼 미워. 그것에 아이작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며 선이 그려진 코트로 걸어가다보면 아이작과 이스피어에게 다가오는 신형이 있었다. 어라, 반장? 앞서 그를 발견한 것은 이스피어였다. 막학년, 반에서 선출된 그는 여러모로 의욕이 넘치는 학생이었다. 이스피어에게 물통 하나를 건네는 그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거렸다.

 

 "더운데, 좀 마시라고."

 

 이스피어가 눈웃음쳤다. 아이작에게 보란듯 팔짱을 꼈다.

 

 "뛰고 온 건 아이작인데?"

 "큼, 왜 이래? 둘이 같이 마시라는 거지. 그런데…."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는 반장의 모습에 이스피어가 순간. 눈을 날카롭게 떴다. 옆에 있던 아이작은 그것에, 뭐랄까. 데자뷔를 느낄 수 있었다. 먹잇감을 노리는 사냥꾼의 눈빛, 같은….

 아이작이 이스피어를 부르기 전 반장이 말을 꺼냈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둘은 무슨 사이야? 혹시, 사귀는 사이?"

 

 물음에 이스피어가 입술을 매만졌다. 입꼬리가 더욱 올라가며 웃음이 짙어지는 것에 아이작의 심장도 같이, 불안감으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니지, 이스피어? 팔짱을 풀고 급하게 손을 엮어 잡으려 하면.

 우리 사이? 뱀처럼 속살거리는 음성, 동시에 아이작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는 손길이 있었다.

 그의 볼과 이스피어의 입술이 맞닿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더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사이랄까?"

 

 아이작도, 반장도 쩍 굳었다. 이스피어만이 태연했다.

 

 "아, 참고로 사귀는 사이는 아니야. 그런데 우리. 빨리 가봐야겠다. 체육쌤이 또 화낼 것 같은데?"

 

 총총 아이작의 팔을 끌고 가는 이스피어의 걸음이 가볍기만 했다. 허공에 흩날리는 이스피어의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이작이 허,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틀리질 않는지.

 

 "그런데, 아이작."

 "응?"

 "쟤, 왜이리 꼬셔보고 싶게 생겼을까?"

 단번에 아이작의 표정이 굳었다.

 "…이스피어."

 "하하,"

 

 장난이야! 높다랗게 웃음을 터트린 이스피어가 고개를 돌려 아이작과 눈을 마주쳐왔다. 태양 빛을 똑닮은 눈, 예쁘게 접히는 눈매와 입술 사이로 보이는 고스란한 이빨까지. 붙잡은 그의 손을 끌어 손등에 입술을 꾹 억누르며.

 아이작의 완벽이, 이스피어의 완벽에게 고했다.

 

 "약속했잖아."

 "…."

 "걱정 마, 내 사랑."

 

 

 "지킬게."

 

 바야흐로 새로운 해의 첫 4월.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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