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커뮤니티

[세이루스] After Graduation

여우비야 2023. 4. 22. 17:40

 
 
 "괜찮아?"
 프롬 파티가 끝난 후 일레온은 키루스를 붙잡아 세웠다. 괜찮냐고? 무슨 의미로 묻는 말인지 알았다. 그래서 할 말이 없었다.
 키루스는 효과적으로 세일로를 자극했고, 세일로는 이전에 없을 정도로 분노했다. 끝끝내 키루스의 과거를 건드릴 정도로 화가 난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근처에 없었다.
 안 괜찮아. 키루스는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일레온은 그에 미안해했다. 내가 괜히 네게 도와달라고 했나봐. 프롬 파티에서 그와 사귀는 사이임을 밝힌 건 일레온이 일면식도 없던 상대와 약혼하게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름이라도 프레헨인 키루스는 좋은 방패막이 되어줄 것 같다며 제안을 했었고, 세일로의 반응을 우려해 시기를 늦추고 늦춘 것이 그나마 이때였다.
 조금 더 키루스가 참았더라면, 이보다는 좋은 결과가 나왔을까. 그래도 다행인 점은 세일로와 있었던 갈등이 가십 거리로 오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전에 없이 세일로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니 애꿎은 학생들만 몸을 사리곤 했다. 원래 그런 세일로를 다독이고 제어하는 것은 키루스의 역할이었지만, 그 키루스가 원인인 상황이니. 키루스는 잠시 한숨을 삼켰다. 좋지 않은 상상이 불쑥 튀어나와 머리를 찔렀다.
 만약,
 가주님께 이 소식이 전해졌다면….
 아. 키루스는 아찔한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그 무게가 문득 실감된 까닭이었다. 내가 어떻게 마법사가 됐는지 정말 몰라? 숨이 다소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세일로의 목소리가 연이어 머릿속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그만 말해. 그만.
 우리 부모님이 부모님이 돌아가신 널 훌륭한 마법사가 될 수 있게 '도와주셨'-
 "-키루스."

 부름에 그가 반사적으로 짧게 숨을 들이켰다. 방황하던 눈이 일레온을 바라봄으로써 초첨을 잡았다. 키루스는 흔들리던 숨을 바로잡았다. 수복은 빠르다. 나쁜 상상은 빈번히 키루스를 괴롭히곤 했으니까. 키루스는 괜찮다는 뜻으로 어깨 위에 올라온 일레온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고개를 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그럴까."
 둘의 거래는 사실상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니 지금부터의 대화 주제로는 '언제까지 연인 놀음을 계속할 것인가' 따위의 화제가 맞았다. 그게 맞았을 텐데.
 
 …키루스는 자신이 들은 말을 의심했다. 멍하니 입술을 벌리다가, 살짝 눈을 크게 뜨다가. 끝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를 마주하던 일레온이 슬쩍 미소 지었다.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모습도 지금만큼은 키루스의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키루스가 찬찬히 주먹을 쥐었다.
 "키루스. 불사조 기사단에 들어올래?"
 생애 두 번째 기회가 그에게 주어진 순간이었다.
 
 
 * * *
 
 
 "내가 저택을 떠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지, 집을… 나가? ㅇ, 왜? 그,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리고… 내 집도 한 번… 보고…싶고." 
 "……어떤 집이었는데? …지금 집보다 더… 좋아?"
 "……기억이 안 나…."
 "…기억이 안 나는데 왜 그걸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야?"
 
 "이해가 안 가, 키루스."
 
 7학년을 지나 졸업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와 보내는 첫날.
 키루스는 과거의 꿈을 꿨다.
 
 담장은 가시 달린 나무가 대신하고 있었고, 집은 하얬다. 정원이 있었고. 엄마랑 아빠가 있었다. 엄마랑 아빠가 있었다.
 살해당하기 전의 모습으로.
 왜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살아난 건지, 왜 그때 자신은 데려가지 않은 건지. 물을 새도 없이 키루스는 단걸음에 달려가 둘에게 안겼다. 이상하게 시야가 흐려 품에 얼굴을 묻었다. 어둠의 형태는 되려 친숙하고 따스하다. 왜 우느냐며 당황하는 아버지의 물음에도 키루스는 답할 수가 없었다.
 당신들을 떠나보낸 그날은 이상하게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사실 제대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문제는, 그가 프레헨에 오기 이전의 기억 전부를 그렇게 취급해버리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제 그는 과거를 반쯤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가시나무의 이름을 떠올릴 수 없었다. 집 벽의 어느 부분이 페인트가 낡아 떨어져 속살을 내보였는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어느 부분을 밟았을 때 삐걱였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리고 내 집도 한 번 보고 싶고. 그렇게 세일로에게 말했던 것 치곤 키루스는 이제, 고향이 어떤 지명을 가지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그러니 '내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영영 잃어버렸으니까. 다시 되찾을 수 없으니까.
 "원래 이렇게 울던 애가 아니었는데…."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건 아니에요? 가서 한 번 봐야 하나."
 행여 생긴 상처를 확인하기 위함인지 품에서 떨어뜨리려는 손길이 야속하기만 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어둠에서 날 일으켜 세우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 흐려진 부모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떠나가면 차가운 현실만이 키루스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얼굴을 마주할 수 없다. 하지만 꿈에서 깨고 싶지도 않다. 뒤죽박죽인 마음은 정리되지 않는다. 두서없이 빌 뿐이다. 그 저택으로 날 돌려보내지 말아줘요. 그곳에서 눈을 뜨게 만들지 말아줘요, 보내지 말아요, 엄마, 아빠, 제발,
 세일로에게 날 보내지 말아줘요!
 
 그대로 키루스는 꿈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에 절어 있었다. 상체를 일으켜 세우면 머리에 몰려있던 피가 떨어져 내리는 착각이 든다. 이렇게 옛 꿈을 꾸고 일어날 즈음이면 항상, 생각하고 만다.
 당신들은 왜 날 살려뒀을까.
 내가 정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을 것 같았나?
 문을 열고 나온 키루스는 새벽의 적막한 복도를 맨발로 걸었다. 초상화도 다 잠들었을 시간. 그가 당도한 곳은 세일로의 방문 앞이다.
 이대로 안으로 들어간다면 세상모르고 잠들어있을 세일로가 있을 것이다. 7학년이 올라가기 전 그는 일레온과 헤어졌고, 다정한 말을 가장하며 세일로와 화해했다. 그렇게 평탄하고 문제 없이. '이전'과 비슷한 학교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단순하고 철없는 꼬마.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인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기서 문을 두드리면 넌 어떤 의심도 없이 문을 열어줄 것이다.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난 역겨움을 누르며 다정한 말을 읊어줄 테고. 네 허락이 떨어진 뒤엔 방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글 것이다. 그런 뒤엔 무방비하게 놓인 네 하얀 목을,
 "……."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었다.
 키루스는 프레헨이 싫다. 동시에 본디 자신의 성이었던 단어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도 끔찍하게 미웠다.
 오늘도 그는 방 문 앞에 다 다다르고서 발길을 돌렸다. 다시 잠들지 말라는 양, 다시 잠들 수 없을 것이라는 양 창살 너머로 새벽 녘, 동이 터와 시퍼런 빛이 발끝을 간질였다. 방으로 돌아온 키루스는 깃펜을 들었다. 프레헨의 부엉이는 사용할 수 없다. 내용이 감시당할지도 모르고,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일 수도 없었다.
 편지는 다이애건 앨리로 향하는 다음 날이 되어서나 상대방에게 전해질 테다. 첫머리를 쓰는 손길은 막힘없었다.
 To Illeon,
 
 
* * *
 
 
 졸업 이후 반 년이 지났다. 예비 가주로 이런저런 업무에 치여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세일로와 달리 키루스는 한가하기만 했다. 그에게 주어진 일은 고작해야 세일로를 보필하는 것에서 그쳤다. 그가 마땅히 차기 가주로서 행동해야 할 행동거지를 교정해 주거나, 일정을 대신 조정해 주거나 하는-보잘 것 없는 일 투성이.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밤마다 키루스는 저택의 창고며 숨겨진 공간을 돌아다녔고, 지금 목에 건. 어머니의 목걸이를 제외한 유품이 따로 없는 것을 다 확인했다.
 언젠가 보냈던 편지의 답은 당당히 프레헨의 저택에 당도했더라. [너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수신인도 적혀있지 않고, 너무도 짧은 문장이라 저택의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이다. 단순한 장난 편지로 취급한 것일지도 몰랐고. 어쨌거나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이 저택에선 이제 더 볼 일이 없었다.
 그 길로 키루스는 하루 만에 단출한 짐을 다 싸들고 정문으로, 당당히, 걸어 나갔다. 기실 목걸이와 지팡이만 있다면 다 두고 나와도 상관없었겠지만, 키루스는 그나마의 짐이라도 이 저택에 남아있길 바라지 않았다. 그의 흔적이 이 저택 어디에도 없길 원했다.
 누구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순종적이었고, 제 의사를 밝힌 적이 없는 머글본 마법사였다. 프레헨은 자비라도 베풀듯 키루스를 이곳에 데려오고, 쭉 방치했다. 세일로를 제외한 저택의 모두가 그랬는데, 하물며 거진 10년간 이 저택에서 살아온 그의 짐이 캐리어 하나에 다 담길 것이라고 누군들 상상했을까.
 유일하게 그의 손목을 탁 붙잡아 저지한 세일로마저도 모르고 있었을 텐데.
 "어, 어디 가. 키루스?"
 이상하게도 그는 이런 부분에서 특히 예민한 감을 보였다. 단순히 외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겨도 될 장면을 굳이 와 붙잡았으니까. 아닌가. 원래 외출할 용무가 있을 때 일일이 보고하듯 행선지를 말하던 키루스였는데, 어떤 말도 없이 나가려니까 그게 눈에 걸렸을 수는 있겠다.
 붙잡힌 손목을 바라보는 키루스의 붉은 눈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음성조차도 건조했다.
 "여기선 더 못 지낼 것 같아서. 나갈 거야."
 세일로의 반응은 말하면서 예상한 그대로다. 뭐? 라며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짓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 나간다니? …집을?"
 분명 세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나 크고, 따뜻하고, 평화로운 집을 떠난다니?' 왜 스스로 고생을 자처하냐는 듯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매스꺼울만치 순수하다. 키루스는 이전처럼 올라오려는 거북함을 꾹 누른다.
 그러면 언젠가 있었던 대화와 비슷한 결의 말이 이어졌다. 내게 화나는 일이라도 있었어? 왜 떠나려고 하는 거야? 화나는 일은 없었어. 여기선 내가 내 쓸모를 찾지 못해서 떠나는 것뿐이야. 키루스가 쓸모없다니, 누, 누가 그래, 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난…….
 논점을 흐리는 세일로의 말투는 지긋지긋하다. 그래도 마지막이니, 키루스는 더 감정을 쏟지 않고 떠나려고 했다. 세일로가 '그 말'을 하지만 않았더라면.
 
 "조, 좋아해."
 
 …세일로가 붙잡은 손목이 아려왔다. 키루스는 조용히 숨을 멈췄다. 그 머뭇거림을 기회라고 여긴 것인지, 세일로가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키루스를 좋아하니까. …떠나지 마."
 그야말로 오만과 건방이 정점을 찍은 발언이었다.
 그대로 조금씩 시간이 흐르며, 점점 키루스는.
 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몸이 급격하게 큰 숨을 원했고, 심장이 분노로 뛰다 못해 손가락 끝까지 경고음을 닮은 박동을 울려댔다. 숨을 쉴 때마다 기도가 아팠다. 입꼬리가 비틀대며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하!"
 터져 나오는 경멸을 참을 수 없었다. 여태껏 잘 숨기고 지내왔던 혐오감이 깨진 조각처럼 햇빛을 받아 빛을 퍼트렸다. 그늘 안에서 침잠하던 눈동자 안에서 최초로 빛나는 그 감정은, 누구도 그 이름을 부정하지 못할만치 선명했다. 키루스는 힘을 주어 거세게 세일로의 손을 뿌리쳤다.
 그대로 그는 저택을 빠져나왔다.
 등 뒤의 세일로가 얼마나 냉정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든 간, 그건 키루스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세일로는 세상에게서 사랑받고 있는 존재와 다름없었으니, 또 비루한 자기 연민에 빠져있을 게 분명했다. 자신을 좋아한다며 고백하던 것도 이까짓 거절에 처참히 꺾일 마음이 분명했다.
 진정으로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는 이래선 안 됐다. 그래선 안 됐다. 그러지 않았어야 했다.
 
 키루스는 '진정한' 사랑의 형태를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은 감히 세일로가 떠들고 다니는 사랑에 견줄 수조차 없었다.
 세일로는 키루스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것만이 진실이다.
 그것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