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멘토와 훈련과 밀회
멘토와 훈련과 밀회
이스피어의 멘토는 당연하게도-오스틴이었다. 훈련 일정을 새로 짤 필요는 없었다. 이스피어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만드는 부분은 몇 번이고 그가 되새겨준 대로 행동하고 있었으니 문제없었고, 스폰서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이스피어는 하나 걱정할 것 없었다.
훈련센터에서의 나날은 재미가 좀 떨어졌던지라 이스피어는 훈련을 하기보단 다른 조공인들 사이를 기웃거리게 되었다. 현실을 아직도 다 받아들이지 못한 10구역 조공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장을 연습하는 9구역 조공인의 옆으로 가 함께 위장해보며 웃는다거나 하는 기행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조공인은 그런 이스피어를 괴짜 보듯 바라보았다.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조공인 중 가장 많이 언급 받는 사람이 당최 무슨 목적으로 본인에게 접근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이스피어와 갈등을 빚은 조공인도 있었다. 불거진 싸움은 그와 같은 2구역의 남자 조공인-렉서드가 나서서 정리했지만, 이후로 이스피어는 확실히 조공인들 사이에서 이상한 것을 바라보듯 한 시선을 받았다. 렉서드조차 이스피어를 이해하기 힘들어했음에도 이스피어는 멈추지 않았다.
“얘, 거기서 뭐 해? …그건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그리고 그 기행이 12구역의 한 남자에게 미치기까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대상, 아이작 딜라이트는 홈을 파 둔 나무토막의 사이로 나무 막대를 마찰시켜 불을 피워내는 중이었다. 이스피어가 생각하기론 그렇게 해봤자 나무토막에 불이 붙을 것 같지 않았다.
아이작이 말없이 고개를 돌려 그런 이유에서 친히 발걸음한 이스피어를 바라보면, 정작 그 둘을 제외한 주변에서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번처럼 또 싸우게 될까 봐 긴장하는-혹은 흥미로워하는-눈치였다. 12구역의 남자 조공인인 아이작 딜라이트 또한 이번 헝거 게임의 또 다른 유명 인사였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는 무려 헝거 게임의 첫 자원자이자, 남자 조공인 중 제일 큰 덩치와 위협적인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다른 조공인들에게 첫인상을 물어보았을 때 정말 저 청년이 12구역의 사람인지 의심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을까. 아이작은 지금 동맹이 없는 유일한 조공인이었다. 그렇다면 이스피어는? 렉서드가 알아서 1구역과 동맹을 맺었다. 착하기도 하지.
또 너야? 아이작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스피어는 태연하게 눈썹을 까딱이며 웃었다. 아이작이 말했다.
“뭘, 여기서 하면 안 돼?”
“그렇게 하면 힘이 너무 들잖아. 기술을 써서 하는 게 더 쉽단 말이야.”
“더 쉬워?”
이렇게 하면 되는데. 무덤덤하게 말을 마치자마자 나무 막대 끝에서부터 서서히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아이작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더 허스키하고 섹시하다는 감상에 채 집중하지 못하고, 이스피어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엥?”
“왜?”
“어라?”
“그러니까 왜.”
“이게 되네? 난 한 번도 안 됐었는데!”
마른 풀잎을 불사르며 몸집 키우는 불꽃이 눈동자 안에서 금빛으로 일렁였다. 저것도 나쁘지 않네. 그런 생각을 하며 살며시 웃음 지은 이스피어는 냅다 아이작의 옆에 주저앉아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이작은 난데없이, 또 스스럼없이 붙어오는 행동에 그런 이스피어를 바라보았다. ……꾸물꾸물. 그가 거리를 벌려 다시 앉았다. 단번에 놀란 눈동자가 그의 뺨으로 붙어왔고, 아이작은 그것을 모른 척했다.
“왜애, 내가 다른 방법도 알려줄게.”
“무슨 생각이야?”
“싫어?”
“계속 다른 애들한테도 이래왔잖아.”
경계한다고 말하기엔 아이작의 표정은 줄곧 무덤덤했고, 거리를 벌려 앉은 것도 그리 특별한 의미는 없어 보였다. 그에 따라 이스피어는 개의치 않고 거리를 좁혀 앉았다. 이전처럼 어깨가 맞붙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스피어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애들은 날 싫어하던데.”
아이작이 생각했다. 거짓말.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스피어는 조잘조잘 말을 이어나갔다.
“너 같은 애들 말곤 다른 애들, 나 상대도 안 해줘. 내가 더 편하게 불 피우는 기술 알려줄게. 응? 그 대신 너도 금방 한 방법 나한테 알려줘.”
하지만 그것이 거짓말이었다 한들, 아이작은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게임이 시작되면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될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모두가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던 상태였는데, 이스피어와 아이작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작이 느릿하게 답했다.
“네가 하기엔 힘들어 보이니까. 필요하면 불러.”
그가 이스피어를 향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스피어는, 아이작이 탐이 났다. 금색 눈에 빛이 번뜩였다.
에팔레치아 산맥 근처에 위치한 12구역은 판엠에서 제일 빈곤한 구역이다. 오스틴이 이스피어에게 각 구역을 설명해주었을 때 12구역은 주로 우울하며, 석탄 가루가 잔뜩 묻어 어둡고, 굶주림에 배곯는 사람들이 대다수라 하는 설명이 끊임없이 이어졌었지. 이스피어는 아이작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새까맣진 않은데. 하기야 그렇게 따진다면 제 손에도 석조 가루가 묻어있어야 하지 않았나. 별것 없는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도와준다고 하면 난 거절하지 않아. 그래서 말인데, 훈련하면서 어려운 부분은 없어? 네 멘토는 누구야?”
“로이드라고, 몇 회더라. 아무튼, 몇십 년 전 우승자.”
“로이드? 근데, 그 사람은 여자애 쪽만 도와주던데. 뭐 밉보인 게 있어?”
“내가 마음에 안 드나 보지.”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마약 냄새가 난단 말이야.”
이스피어가 손가락으로 코를 움켜쥐었다. 얼굴을 과장되게 찌푸리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아이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냄새도 알아? ……너도 해?”
“난 안 했지! 궁금하긴 해. 그래도 몸을 아예 망치긴 싫어. 아직은.”
“아직은?”
“아무튼. Twelve. 넌 그러니까, 지도받는 거 없지? ……무기도 못 정한 것 같던데. 맞아?”
아이작은 이스피어가 말을 돌린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보단 앞서 저를 지칭하는 데 쓴 단어가 신경 쓰여 미간을 찌푸리게 되었다. 입 안에서 한 번 단어를 굴려본다. Twelve? 미심쩍은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답은 해야 하니까.
“난 너처럼 훈련받으면서 자라진 않아서. 그냥 되는대로 연습하고 있거든.”
“날 알아?”
“사람들이 다 네 얘기만 하던데.”
“그건 사람들이 얘기하는 나잖아.”
“그렇다고 내가 너한테 개인적인 관심을 가져야 해?”
물 흐르듯 이어지던 대화가 끊기는 것에 이스피어는 표정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태어날 적부터 숱한 사람들의 이목을 받으며 살아온 그에게 이런 유의 무관심은 괄목할 만했다. 색다른데?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래? ……난 네가 궁금한데.”
이건 진심이었다. 아이작도 그것을 간파했다. 하지만 간파했을 뿐이지, 그는 그것에 특별히 감동하거나 마음이 술렁이게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택한 것은 적당한 무시였다. 그가 말했다.
“저번에 연습해본 건 그거였어. 단검.”
“……나도 봤어. 명중률이 엄청 떨어지던데.”
무시당하는 것에 개의치 않는, 키득거리는 소리가 거슬리지 않았다. 아이작이 눈을 깜빡였다. 이스피어가 계속 말했다.
“Twelve, 너는 힘이 좋아. 저번엔 과녁을 맞히다 과녁을 아예 넘어뜨렸잖아? 그게 네 특기야.”
“힘이 좋은 거?”
“그래! 아마 남자애들 중에서도 네가 제일 셀걸. 일단 렉서드보다 힘이 좋은 건 확실해.”
거리가 조금 더 좁아 들었다. “이건 비밀로 해야 해, 알겠지?” 부러 그의 귀에 속닥거린 이스피어가 흘끔 바라보는 쪽엔 2구역의 남자 조공인인 렉서드가 독초와 약초를 구별하고 있었다. 연잇는 이스피어의 속닥이는 소리에 아이작은 미약한 간질거림을 느꼈다.
“사람들은 네가 그 무기를 더 연습하지 않길 바라고 있어. 명중률만 오르면 정말, 사람 쉽게 죽일 것 같다면서.”
“아까는 다른 사람들이랑 안 친하다더니, 잘 알고 있네.”
“다른 무기는 별로 안 끌려?”
아이작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이스피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얼굴을 바라보곤 아이작이 답했다.
“……다른 무기보단 이게 나을 것 같아서. 일단 몸에 익혀두면 대체하기가 쉬울 것 같은데.”
“아하. 하긴, 넌 돌멩이만 던져도 사람 하나 쉽게 쓰러뜨리겠다.”
아이작은 무언가를 던지는 시늉을 하는 이스피어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다 고개를 들면 서로의 눈이 곧장 마주쳤는데, 환하게 웃던 이스피어의 얼굴에는 어느덧 옅은 미소만이 남아있었다. 아이작은 그 미소가 돌연 생소하게 느껴져 눈을 깜빡여야 했다.
“연습하러 가자. 내가 도와줄게.”
속닥이는 통에 가까이했던 몸을 떨어뜨린 이스피어가 꾸물거리며 아이작의 손을 잡았다. 아이작은 그 와중에도 생소함을 곱씹고 있었는데, 그 생소함이 무엇이냐 하면 ‘이스피어 틸다는 왜 아이작 딜라이트를 도와주려 하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더 세세하게 파고든다면 ‘왜 저렇게 자신을 입맛 다시듯이 바라보는지’가 되겠지만, 그건 판도라가 받은 상자 안쪽에 존재하는 영역 같아 열어보기가 꺼려졌다. 일단 아이작은 이끄는 손길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런데 넌 연습 안 해?”
뒤늦은 아이작의 물음이 이스피어의 귀를 두드렸다. 이스피어는 흠, 소리를 내며 아이작을 잡지 않은 손으로 귀를 후비적거리는 시늉을 했다.
“난 그런 거 안 해도 강해.”
“……?”
잠깐 고장 나 있던 아이작이 고개를 털며 다리를 움직였다. 진심이라면 정말, 끝없이 오만하군. 한참 뒤 홀로 생각할 뿐이다.
* * *
“얘, Twelve! 너 오늘도 버벅거리고 있구나?”
“아니, 아니. 이건 이렇게 자세를 잡, 어. 그거! 맞아, 그렇게.”
“그러고 보면 이거, 응용하면 이렇게도 할 수 있어. 따라 해봐.”
“너 진짜 잘 배운다. 완전 스펀지네. 볼은 전혀 안 말랑거리는데.”
“이것도 한번 해볼래, Twelve?”
탁. 내던진 단검이 과녁의 한가운데를 꿰뚫자, 그가 느릿느릿 손목을 돌리며 물었다.
“넌 왜 날 Twelve라 불러?”
“……응?”
“그러는 네 이름은 Two야? 아니면 2구역?”
아이작은 훈련 내내 설렁설렁 창을 휘두르는 둥 마는 둥 하는 이스피어를 자주 눈에 담았다.
아이작은 다른 건 몰라도 그의 멘토이자 부모가 예전에 창으로, 뭐, 헝거 게임에서 날아다녔다던-?-우승자라는 것과 그에게 훈련받으며 자란 이스피어 또한 창을 다루는 게 특기라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훈련장에서의 이스피어는 거의 훈련을 하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훈련장을 배회하거나, 다른 조공인들 옆을 깔짝대거나 하며 있는 것이 일상이었다. 도통 무슨 자신감인지. 그렇다고 다른 훈련을 열심히 하느냐면 그것도 아니었으니…….
아이작은 이스피어의 그런 심리를 구체적으로 파헤쳐볼 생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 쪼만한 여자애가 언제까지고 제 등 뒤에서 저를 끌어안다시피 한 채 자세를 교정해주는 행동들을 방관할 생각도 없었다.
얍 소리를 내며 아이작을 품에서 놓아준 이스피어가 혼자 단검을 던졌다. 던진 단검은 앞서 과녁에 박혀버린 아이작의 단검 손잡이를 맞혀 옆으로 튕겨 나갔다. 키득거림이 그에게서 터져 나왔다.
“아니지, Twelve. 설마하니 내가 네 이름을 모를 리가 없잖아.”
빙글 돈 이스피어가 손을 뻗어 아이작의 코를 툭 두드렸다.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이름을 부르면 정이 들잖아. ……넌 그것도 몰라?”
소신 있게 말한다면 아이작은 저를 뒤에서 끌어안던 이스피어 틸다를 더 귀엽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겼다. 멀대같은 사내가 어디, 귀여운 구석이라도 있던가? 자기보다 한참 작은 여자애가 한참이나 오만하게 굴며 가르쳐 준 지식을, 자신이 어떻게 활용할지도 모르면서 꾸준히 자신에게 접근한다는 게. 아무래도 그의 눈에는 그런 것이 순진하게 보이기 마련이었다.
“정이 들어?”
“무슨 소리인진 알아?”
“알아. 근데 넌 생각보다 정에 약한 편인가 보네.”
“왜, 그게 놀라워?”
“다른 사람들은 네가 친한 척하다가 뒷통수 때릴 것 같다고 하던데.”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 게임이잖아!”
아마도 이스피어가 아이작의 속-귀엽다는 사고방식과 관련한-을 알았더라면 배를 부여잡고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게임이 시작되면 난 누가 앞에 있어도 망설이지 않을 텐데. 조용히 생각하다 되묻길.
“다른 애들보단 네가 중요하지. 그래서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물음에 천천히 눈을 굴리는 아이작이 살아온 세계는 언제나 불친절했다. 길거리를 굴러다니는 딱딱한 빵 한 덩어리조차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곳에서 아이작은, 개중에서도 유독 불행과 깊게 연루된 삶을 살아왔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또 하루하루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 매번 ‘오늘’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까.
“글쎄. ……어쩌면? 아니면.”
그래서 그는 다시 말하지만, 이스피어가 너무도 순진하고 순수하게 보였다. 오만한 아가씨, 구정물 묻은 적도 없을 만치 잘 자라난 친절, 혹은 가면을 쓴 여자는 확실히 자신을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었지. 뱀 꼬리보다도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어쩌면, 아니고…….”
흐려지는 말끝은 그 탓이었다. 거만한 여자가 자신을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아 보여서. 아이작으로선 그가 자신을 배신하기보단 자신을 계속 도와주면서, 자신을 이용해 먹을 것 같단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그저 웃었다.
“어쩌면이 아니라, 맞네. 그렇지?”
장난스러운 손길이 그의 볼을 살짝 꼬집곤 떨어졌다. 아이작은 그렇게 떨어진 손길처럼 이스피어가 제게 둔 관심도 손쉽게 떨어질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밤, 아이작은 복도에서 이스피어가 렉서드와 입 맞추는 장면을 목격했다.
* * *
2구역의 남자 조공인인 열여덟 살의 렉서드 파웰은 특별히 금을 녹여 바른 듯 햇빛 아래 잘게 부서지는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이었다. 이스피어는 손가락 사이로 헝클어지는 그 머리카락의 감촉을 좋아했으므로, 밀 에버그린의 연인이었던 렉서드가 그 관계를 정리하고 이스피어의 곁으로 오기 위해선 어떤 ‘증명’이 필요했다.
헝거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2구역 내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명예였고 렉서드는 이스피어처럼 그 명예를 쫓던 청년이었다. 그는 이스피어의 옆자리와 더불어 그 명예를 쟁취하기 위해 조공인으로 발탁되었지만, 사실 그는 머리를 잘 굴리는 편이 아니었다. 덕분에 연인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는 있었어도, 이스피어로선 그를 장기 말 이외의 취급을 해줄 이유가 없었다.
아니면 장난감이라던가. 평소처럼 미소 띤 이스피어가 장난스럽게 손끝을 굽어 청년의 등을 더듬었다. 어깨를 잠시 움츠러든 렉서드가 불만 어린 시선을 쏘아 보냈다.
“─그러니까, 시스. 그 12구역 놈한텐 그만 신경꺼. 틸다 씨도 탐탁 않게 생각하고 계시잖아.”
그는 이스피어의 미들네임에서 일부분의 단어를 떼어낸 것을 애칭으로 부르곤 했다. 코끝을 비벼오는 행동에 자그마한 웃음이 터졌다. 이스피어는 제게 달라붙어 오는 온기를 밀어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묵직하게 끌어안는 품이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 아빠는 너도 별로 안 좋아해.”
“나 정도면 괜찮지 않나.”
“아빠 눈이 워낙 높으셔서.”
그리고 너같이 멍청한 애를 좋아하실 리가 없잖아. 속으로 그런 말을 꿀떡 삼켜내며 그가 웃었다. 죽는 날까지 그것을 알아차릴 일 없었을 렉서드는 이스피어의 허리를 양껏 끌어안은 채 불평불만을 주르륵 쏟아내기 시작했다.
“볼 때마다 어딘가 꺼림칙해. 인상도 더러워…….”
“아닌데? 잘생겼잖아.”
“그래 놓고선 잘하는 것도 별로 없잖아. 둔한 곰처럼 이곳저곳 혼자서 방황하다가 멀리서 누가 화살이라도 쏴 맞춰 죽어버릴걸.”
“둘이서 나 몰래 싸웠어? 이렇게까지 싫어할 이유가 없는 것 같단 말이지.”
“시스, 넌 누구 편이야?”
“난 내 편이지.”
“……자기 전에 내 방 들려주면 안 돼? 같이 있고 싶어.”
렉서드도 참 웃긴 사람이었다. 자신이 물론 강하고, 아름답고, 세간의 주목을 몽땅 받는-헝거 게임에서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뽑히는 사람이라지만, 어쩜 옛 연인을 쉽게 내팽치고 이렇게 내게 엉겨 붙나. 물론 이스피어는 다가오는 입술을 피하지 않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옷깃만 스치던 벽에 이스피어의 등이 온전히 맞닿고, 렉서드의 손바닥이 그 옆을 짚어 그림자를 만들어낸 뒤 나지막한 숨결이 입술 사이로 얽히고 흩어지다 입술이 비틀려 떨어질 즈음이었다. 가느다랗게 뜨인 이스피어의 시야 안쪽으로 검은 형체가 아른거린 것도 그 순간이었다.
아.
살며시 커지던 금색 눈동자는 곧 환하게 휘어 웃음을 그렸다. 입술은 다시 맞붙었는데 상대방의 허리를 끌어안던 이스피어의 손은 떨어져 허공에서 자그맣게 인사하듯 곧게 펴져 흔들렸다. 굳은살 알알이 박힌 손가락이 한데 모여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아이작 딜라이트가 언젠가부터 둘을 보고 있었다. 아마 직전에 그가 발견한 것이겠지. 이스피어는 아이작의 얼굴에서 동요를 찾아볼 수 없었고, 비단 동요가 아니더라도 다른 것을 발견해낼 틈도 없이 그는 자리를 떴다. 발소리를 굳이 감추려 들지 않는 모습 탓에 렉서드가 곧바로 입술을 떼어냈다.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던 이스피어는. 아니지, 이미 웃고 있었던 이스피어는 평소처럼 자그맣게 욕하며 아이작이 떠난 자리를 노려보고 있는 렉서드를 달랠 생각도 못 했다. 그림자가 짙게 남았던 모서리 밑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알아차리지 못한 렉서드는 짜증스럽게 입술을 깨물었다.
“저 기분 나쁜 놈, 뭐야? 설마 우리 이야길 다 들은 거야?”
“그런 건 아닌 것 같던데.”
“기분 잡치네, 진짜. 시스, 복도에서 더 이러지 말고 이만 내 방에,”
“─아무튼, 오늘은 너 혼자 자야겠다.”
어어? 이스피어의 말이 끝나기도 전 렉서드는 당황하며 몸을 뒤로 무를 수밖에 없었다. 두 손이 당장 렉서드의 어깨를 밀쳐내고 있었다. 당황한 그는 이스피어의 한쪽 손을 탁 붙잡곤 “시스, 왜 그래?”하고 물었지만, 이스피어는 그런, 하잘것없는 일에 신경을 쓸 생각이 없었다.
바보여도 한참이나 바보인 렉서드는 화를 내거나 기분이 나빠야 할 순간에도 미련하게 어버버 거리는 것 특징이 있었다. 이스피어는 그런 렉서드의 아둔한 점을 싫어했으나 예외적인 상황이 있었다면,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이었다. 이럴 때만큼은 네가 참 좋아. 다시 한번 더 밀쳐진 채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명목상 연인은 내버려 두고, 이스피어는 콧노래를 부르며 그림자가 꼬리 말고 기어간 복도 위를 쫓았다.
입술 안쪽으론 숫자가 찬찬히 발음되고 있었다.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영이나 일을 세지 않은 데에는 각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는 똑, 똑.
“이봐, 문 열어봐.”
여자는 순간 상대의 출신 구역과 맞게 노크를 열두 번 해줄까 싶은 마음을 가졌고, 대신해서 자신의 구역 숫자에 맞게 노크를 두 번 하는 것으로써 겨우겨우 그 욕구를 참을 수 있었다-참았다고 말하기도 뭣했지만 말이다-.
문을 두드린 손을 어정쩡하게 허공에 들고 있던 이스피어가 생각하기로, 방 안에 있던 아이작-여자의 목표물은 아마도 문을 두드린 상대가 이스피어인 것을 바로 눈치챈 모양이었다. 닫힌 문 너머로 한참이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니까. 그는 아이작이 제 목소리를 듣고 한숨을 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열린 문을 보았고,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청년이 저를 내려다보는 모습에 씩 웃음 지었다. “안녀엉.” 무를 수 없도록 열린 문 안쪽으로 발을 한 걸음 내딛곤 문틀에 팔을 기대 올리는 자세가 퍽 익숙해 보였다. 이스피어가 눈썹을 까딱이며 물었다.
“아까 나 봤지. ……근데 왜 아무 생각도 없는 표정 지었어?”
다짜고짜 그런 물음을 건네는 행동은 상대에게 배려가 없는 행위인 건 물론이고, 또 보통의 화자가 생각한 의도와는 반대로 대화의 진척을 방해할 뿐이라는 것을 이스피어가 모를 리 없었다. 다만 그가 아이작을 찾아온 이유는 그를 추궁하려 함이 아니었다. 그가 아이작을 찾아온 이유는, 단순히 그를 골려주기나 하며 시시껄렁 시간을 때우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그는. 당연히 상관이 있을 아이작의 입장과는 달리 아무렴 상관없었다. 빙그레 웃음 짓는 이스피어의 입술이 열렸다.
“너 키스해본 적 없지.”
그렇게 별안간 뭔, ……별……같은 상황에 노출된 아이작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는 이스피어의 물음에 조용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되돌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제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행동이 태연해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물었다.
“그럼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해? 그리고 키스 해봤냐는 소리는 왜 나오는데?”
아이작은 그가 자신을 향해 손 흔들던 장면이 지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거의 바로, 다시 이스피어를 마주하게 된 상황이 달갑지 않았던 모양이다-그럴 수밖에 없었다. 인정한다-. 자기가 떠나자마자 바로 따라온 건가? 쟨 할 일도 없나? 그런 생각도 하던 아이작이 연이어 말했다.
“다른 사람이랑 그러고 있는데 이상한 표정 짓는 게 더 징그러운데.”
그래도 어쨌거나 아이작은 별생각 없이 이스피어에게 손짓했다. 그를 방 안으로 들여오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이스피어는 그에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장 이게 무슨 횡재냐! 싶었다. 그가 냉큼 안으로 들어와 문을 탁 닫았다.
그리고선 바로 금속이 맞붙고 돌아가는 달칵 소리가 울렸다. 아이작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 소리인지 바로 눈치채고 하아, 짙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와 이스피어의 허리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실 이스피어는 제게로 지는 그림자가 기꺼워 웃었고, 슬쩍 몸을 움직인 그가 문고리 앞을 가로막으면 아이작의 무감정한 눈은 이스피어를 응시했다. 그러면 히죽 웃은 이스피어는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냉큼 뻗어진 팔을 끌어안으며 자연스레 팔짱을 끼었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작의 표정은 얜 대체 뭘 하는 거지? 라고 말하는 양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이스피어가 시침 떼며 눈을 끔벅였다.
“징그러워? 네가 안 해봐서 그런 거겠지. ……그리고 나 목말라. 물 좀 대접해줄래?”
아이작의 표정이 그의 생각을 대변했다. 얜 대체 뭘 생각하며 다니길래 이렇게 뻔뻔하기까지 한 걸까?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가 물었다.
“얼마나 있으려고?”
“먼저 들어오라고 한 건 너잖아.”
“일단 이 손부터 좀 놔.”
나무 덩굴같이 얽혔던 팔이 풀렸다. 아이작은 아무런 표정 없이 이스피어를 몇 초 동안 바라보았지만, 이스피어의 말대로 마실 것을 대접해주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등 뒤로 “나는 레몬주스로 줘!” 하는 팔짜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들은 아이작은 속으로 생각했다. 언제는 물 달라며.
결국 양심도 없는 그는 오밤중에 물도 아닌 레몬 주스를 얻어먹은 사람이 되었다. 그것도 꼴깍꼴깍 아주 잘 마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이작은 제 앞엔 물도 주스도 내려놓지 않고, 이스피어가 컵을 내려놓은 뒤에서야 입을 열었다.
“정말 그것 때문에 찾아온 거야?”
“으응.”
“왜?”
“궁금해서.”
“무엇이?”
“네가!”
이전에 들었던 것 같은 소리가 다시 들려옴에도 그는 고작해야 2구역의 종잡을 수 없는 여자는 레몬주스를 좋아하나보다, 그런 생각을 회색 눈에 담고 동시에 테이블 위에 올려진 텅 빈 잔을 눈에 담아냈다. 그리고 레몬색 눈을 가진 이스피어는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대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언제나 한데 올려 묶고 다니던 머리카락이 다 풀린 상태였다. 호선을 그린 입매 사이로 장난스러운 음성이 튀어나왔다.
“있지이.”
“한 번에 용건까지 다 말할 수는 없는 거야?”
“저번에 필요하면 부르라고 했잖아.”
“…………그래.”
말도 참 안 듣는다. 아이작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연히 언제나 꿋꿋한 이스피어는 눈빛을 본 척도 않고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아이작 쪽으로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눈매 접히는 얼굴이 자연스러웠다. 속삭였다.
“그거, 진심이야?”
“…답을 알면서 굳이 되물어보는 건 무슨 심보야?”
“아무런 대가 없이 날 도와준다는 게 이상하잖아.”
투명한 컵 표면에 맺혀있던 물방울 하나가 컵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잠시간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던 이스피어는 몸을 바로 하며 두 다리를 끌어모아 가슴 쪽으로 당겨 안아, 그 위로 팔을 올리고 그 위로는 또 볼을 기댔다. 자연스럽게 기울어지는 시야 가운데로 언제나 변함없던 아이작의 표정이 담겼다. 그것을 앞에 둔 이스피어는 입맛 다시듯 혀로 입술을 핥아낼 수밖에 없었다.
무엇으로든 상관없으니 저게 변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사랑이든, 절망이든, 공포든, 아픔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뭐라도 좋으니까.
망가뜨리고 싶다. 그가 말했다.
“차라리 네가 내게 뭔가 바라는 게 있어야 마음이 놓일 텐데.”
기왕이면 직접! 아이작은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양 이스피어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순전한 이스피어의 생각으론 그랬다.
“내가 배신해주길 원해? 그렇게 종용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배신할 거야?”
“네가 먼저 날 적으로 둔다면.”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어딘가 만족하지 못하는 심정이 들었던 이스피어는 손을 들어 입술을 툭, 툭, 두드렸다. 손톱은 입술의 갈라진 틈을 갉작이다 잡아당기기도 했다. 지금이 겨울이 아니라 망정이었지, 공기가 건조한 계절이었다면 입술이 뜯어져 피가 새어 나왔을 것 같았다.
무엇이 그리 성에 안 찼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테다. 아이작이라는 사람이 절대로 자신을 먼저 배신하지 않을 것 같아서, 아니. 배신하지 않을 거라서. 어떤 근거를 통해 그런 결론이 도출되었냐 물어도 답할 말이 없었다. 그저 아버지의 훈련 아래에서 자라며 이스피어는 생각보다, 이성이나 논리로 따질 수 없는 어떤 감각을 통해 살아남은-비유다-순간을 꽤 많이 겪었을 뿐이었다.
생경한 감정이 차오르자 그는 끓어오르는 충동을 참을 수 없어 덜컹, 사이에 놓여있던 테이블이 한쪽으로 기울어 휘청이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가 어느덧 테이블 위에 무릎 한쪽을 올리고 몸을 앞으로 쭉 내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고양이마냥 고개를 갸웃거리는 꼴이, 만약 이스피어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그것은 흥미롭게 좌로 우로 허공을 휘적거리다 지팡이처럼 뾰족 세워져 끄트머리만 둥글게 말았을 것이 분명했다. 이스피어의 웃음소리가 후후 흘러나왔다.
“넌, 이 밤 중에 여자애가 혼자서 남자애 방에 찾아온 이유도 모르지?”
어쩌면 그것은 지금의 감정이며 낯섦을 버려두기 위한 도피 행위에 불과했다. 이스피어는 철저히 혼자로 키워졌다. 타인을 친구나 연인이라 부를 수는 있어도 그 관계 위로 진심을 흘려내는 것은 허용받지 못했다. 하여 이스피어는 지금같이 예상치 못했던 울렁거림을 바로 차단해내는 움직임을 학습할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지금 실제로 움직일 수 있었다.
콧날이 맞닿을 듯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걸쳐있자 아이작은 덤덤하게 이스피어의 얼굴을 붙잡아 밀었다. ……응? 붙잡아서. 밀어냈다. 말 그대로다. 아이작이 다소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너니까. 당연히 뭔가 도와주려고 했을 것 같았는데.”
“……저기이.”
“이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어서.”
“저기이이이. ……Twelve?”
“어차피 난 모르니까 네가 직접 말해봐.”
이런 오밤중에 날 왜 찾아왔는데?
질문을 던지면서도 어느 정도는 예상이 갔던 아이작은 손을 떼어내며 허공을 쥐듯 손가락을 작게 굽혔다. 볼살 특유의 말랑거리는 감촉이 손안으로 남아있었다. 이스피어는 여전히 충격에서 다 벗어나지 못해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볼을 부풀리며 일단은, 질문에 답한다.
“뭐. 내가 널 이런 밤 중에 도와줄 게 있나? 가르칠 만한 게 있나? 넌 힘도 좋고, 망설임도 없으니까…….”
이스피어는 썩 좋지 못한 표정이었다. 타인의 심리 따위를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는-관여하지 않으려는-아이작은 자신이 그를 밀쳐냈기 때문에 이스피어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용케 눈치챌 수 있었으나, 그는 그 사실에 별다른 감흥을 가질 수 없었다.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이스피어는 남몰래 이를 갈았다. 사실 티는 많이 났다. 날 밀쳐내? 자존심 상해! 다소 표독스러운 미소가 지어지면 멀어졌던 거리는 자연스레 다시 좁아 들었다. 콧날이 스치기 직전이었던 이전만큼은 아니었고, 그 대신 이스피어의 손이 아이작의 어깨를 은근히 어루만지듯 하며 무게가 실리게 된 상황이었다. 난 그냥, 속닥이는 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너랑 키스나 한번 해볼까 했지.”
아이작의 입술 위로 말캉한 감촉이 닿았다. 이스피어가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맞춘 것이다. 우습게도 그 순간 아이작은 그 감촉보단 이스피어가 고개를 기울이는 통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뺨에 닿아 느껴지는 간지러움에 신경이 가고 있었다. 그도 아니라면 뜨거운 숨결이라던가.
내리누르던 압력이 살며시 약해지는 것은 입술이 떨어지는 것을 뜻했기에, 아이작은 감지도 못한 눈을 그때에서야 한 차례 깜빡이며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려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단 점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입술이 떨어진 직전 물컹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살며시 아이작의 아랫입술을 핥고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그것에 그는 숫제 굳어버렸다. 아니, 어깨가 절로 굽어드는 감각에, 드디어 아이작이 반사적으로라도 이스피어의 어깨를 밀쳐냈다.
굳은 목소리가 그의 입술에서 터져나왔다.
“……너. 왜 그래?”
하지만 아이작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이스피어는 또다시 거부당한 상황에도 한껏 웃음을 터트렸는데, 당황할 줄 모르던 청년의 얼굴이 최초로 당혹감에 찌푸려진 얼굴이 당장 눈앞에 있으니. 비록 그 정도가 미미했을지라도 이스피어는, 도무지, 유쾌한 심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이작은 여전히 황망하여 “왜 그래? 어디 아파?” 같은 물음을 건네고 있었고, 사실 그럴수록 이스피어의 얼굴엔 못된 웃음만 덕지덕지 붙는데……그걸 혼자서만 모르고. 바보같이.
아이작이 더듬거리듯 물었다.
“정 나누기 싫어서 이름은 부르기 싫다고 했으면서, 이건. ……뭔데?”
길고 두껍지만, 남자 손이라 치면 나름 곱게 뻗은 손가락이 자신의 마른 입술을 한 차례 쓰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전율이 이스피어를 휘감아서, 이스피어는 자기 어깨를 다른 한쪽 손으로 쓸어내리며 몸을 바로 해 소파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자꾸만 이죽거리며 웃음이 흘러나왔다.
“게임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유난 떨긴.”
그리고 아이작의 손가락과 대비되듯 한참이나 하얗고 보기 좋게 뻗은 손가락이 제 입술을 보란 듯 매만졌다. 붉은 입술이 둥그렇게 모아들더니 쪽 소리를 내곤 호선을 그렸다. 아이작이 답할 새 없이 그가 연이어 말했다.
“의미 부여할 필요 있어? 내가 말 안 했나? 난 남의 처음을 가져가는 걸 좋아하거든. 그도 아니라면, ……왜, 아이작. 너.”
처음으로 불린 이름이었다. 눈이 깊게 엉켜버릴 양 마주쳤다.
“나한테 정들었어?”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눈빛이 이러했을까. 아이작은 이스피어의 몇 개 알아차리지 못한, 그나마 알아차린 습관 중 이것을 제일 싫어했다. 질이 나쁘다는 이유였다.
그렇지만 그를 이루었고, 이루고 있는 것 중에서 악독하지 않은 것은 얼마나 될까. 입 다물고 있던 아이작이 말했다.
“……넌 이런 게 재밌어?”
그는 특별히 화난 상태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황당함을 가라앉히지 못하고는 있었다. 끝내 일어선 그는 뒷머리를 한 차례 쓸어내리고 이스피어를 향해 턱짓했다. 행위는 명확했다. 나가라는 뜻이었다.
“장난치러 온 거면 가. 어중간한 장난에 어울려줄 기운 없어. 씻고 잘 거야.”
그렇지만 테세우스가 되어버린 이스피어는 남의 방에 멋대로 들어온 주제에 축객령을 앞에 두고서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엉덩이가 소파에 착 붙어있었다. 뻔뻔함도 이쯤 되면 재능이었다.
“어중간한 장난 아닌데.”
아이작이 이스피어를 직접 일으켜 세우든, 혹은 들짐승같이 뒷덜미를 잡아 문 바깥으로 던져버리려 했든 내쫓기 위한 목적을 품고 몇 걸음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이스피어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흥 소리를 내며 아이작을 한 번 째려본 이스피어가 문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이작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이스피어라면 분명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절대로!
……그리고 그 예상은 문 쪽으로 걸어가던 이스피어가 돌연 침대로 방향을 틀어 풀썩 드러눕는 모습을 통해 현실이 되었다.
“…….”
아이작은 어이가 없어서 헛숨도 내뱉지 못했다. 여자는 그 모습을 앞에 두고서도 태연하게 웃었다.
“됐고. 오늘은 나 좀 재워줘. 그럼 대신해서─내가 좋은 걸 알려줄게. 응?”
이 세상 대체 누가 그런 말을 믿을까. 아이작은 그를 안아 들어 냅다 방 바깥으로 던져버리는 상상을 하며 팔짱을 꼈다. 고개가 작게 기울었다.
“도와줄 게 없다고 하지 않았어, 방금? 오늘따라 말을 잘 바꾸네.”
“변덕스러운 여자가 매력 있는 법이지.”
“그래서 더 신뢰가 안 가기도 하고.”
엉덩이부터 침대 끄트머리에 걸쳐 드러누운 상태라, 이스피어는 제게로 가까이 다가온 아이작의 다리를 타고 오르듯 다리를 들어 올렸다. 발끝을 까딱이며 아이작의 허벅지를 찔렀다. 느릿하니 웃으며 앞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면 드러나는 눈빛이 계속 욕망 따위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 눈을 바라보며 돌연 익숙한 불길함에 휩싸여 불청객의 입을 틀어막으려 입을 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스피어가 더 빨랐다. 그가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그런’ 쪽으로 가르쳐주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
짧은 정적이 흘렀다. 아이작은 참을 만큼 참았다. 그가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나가.”
“나랑 황홀한 시간을 보낼 생각 없어?”
아이작은 대답할 가치가 없다 생각했다.
“너도 분명 좋아할, 앗!”
말 그대로 이스피어를 번쩍 들어 올린 아이작은 기어코 침대와 물아일체 상태가 되어가던 여자를 내쫓는 데 성공했다. 아잉, 이스피어가 되도않는 애교를 부렸고, 아이작은 무시했다.
양손으로 이스피어를 들어안은 상태라 문고리를 잡아 여는 덴 조금의 버벅거림이 있었으나 어쨌거나 문을 여는 데 성공한 그는 그 앞 복도로 이스피어의 두 다리를 내려주었다.
“Twelve, 나 진짜 내쫓을 거야?”
열렬히 그를 쏘아보는 시선이 있었으나, 아이작은 가치 없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잘 해준,”
“잘 자.”
망설임 없이 문이 닫혔다.
“─다니깐.”
…….
콩! 누군가가 닫힌 문을 차는 소리가 났다. 입술을 잘근 깨문 누군가가 일부러 바닥을 세차게 밟는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으나, 소리는 차근차근 몸집을 줄여 머잖아 종적을 감추었다.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12구역의 조공인, 아이작 딜라이트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괜히 무언가가 핥고 지나간 입술 위가 간지러운 듯해 그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맞물리고 엇갈렸다.
단순한 착각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