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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월백] 낭화애담浪花愛談: 파랑이 이는 자리 플레이 로그

여우비야 2021. 1. 8. 03:46

노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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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은 유독 하늘이 맑은 날이었습니다.
 
초겨울이라기엔 날씨는 여름의 끝자락이라도 닮은 것처럼 선선했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이 처마에 달린 풍경의 종을 딸랑딸랑 흔들면,
 
당신은 으레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대곤 하는 사람들을 무시한 채 불현듯 담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죠.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막연한 이끌림에 대문 밖을 나오면, 눈을 찌르는 햇살에 한순간 눈을 찌푸렸던 것도 같습니다.
 
고개를 휘휘 저음과 동시에, 당신이 담벼락에 기대앉은 한 여자 아이를 발견한 것도 그때였습니다.
 
무료한 눈빛을 감추려는 티도 내지 않고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웬 이상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 아이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당신을 바라보는데.
 
아. 딱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상한 감정이 울렁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아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짐작하기 쉬웠습니다. 보나마나 당신의 어머니의 초상을 방문하기 위한 객들 중 아이의 부모가 섞여 있는 것이겠죠.
 
머잖아 떠나갈 인연이었어야 할 텝니다.
 
그러나 지루함만이 언저리에 감돌던 아이의 금안에 일순 다른 것이 섞여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면 곧.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어린 월백:... ... 너도 심심해서 나왔어? (치마를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린 서하:... (자신에게 먼저 말을 놓는 이는 처음 봤기 때문인지 대번 미간을 찌푸리며 경계하듯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더냐?
 
어린 월백:'너'? (그 말에 대번 얼굴을 콱 찌푸리더니.) 너가 아니라, 연월백이야! ... 그러는 너는 누군데. (심통난 것처럼 홑팔짱을 끼고 당신을 바라본다.)
 
어린 서하:연월백? ...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 자신이 알고있는 궁인들의 이름을 생각해보지만 마땅히 생각나는 게 있을리가. 하지만 노서하에게 있어서 제 앞에 있는 이 어린 아이의 행태에 어색함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도리였다. 그도 그럴게, 지금까지는 제 연배의 배는 될 법한 이들도 제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으니까. ...) 나, 나는, ... (처음 겪어보는 일에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이다가, 곧 고개를 조금 치켜든다.) 노서하다! 왕가의 자손이거늘. 무엄하다! (제 어미가 종종 해오던 말투를 따라해가며 말을 잇는다.)
 
어린 월백:... ... 허, (그러나 월백은 당신의 말에 당황하는 듯 하더니, 되려 코웃음을 치고 만다. 허리에 손을 얹으며 당신이 고개를 치켜드는 것을 따라 저도 고개를 치켜들고는, 눈을 가늘게 떠 대답한다.) 서하? ... 네가 왕가의 자손이면 다야? (이런 대답은 분명, 창滄이라는 나라에 대해 기본 지식이 부족한 월백이기에 보일 수 있는 반응이었으리라.) 네가 왕자면, 나는 공주야! 어머니께서도 매번 나한테 공주, 공주 하시거든? (흥.) 그렇게 따지면 너도 , 아니지. 왕자께서도. 저에게 참 무엄하십니다?
 
어린 서하:... 뭐? (노서하는 ...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모두가 말하는 지고하고 유일하신 황자가 아니었나. 비록 그의 황족서열이 애매하다고는 하나, 이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 그, 그럴리가 없다! (유일한 황자는 당혹스러웠다.) 내가 아는 공주는. ...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으나, 이는 황가에서만 아는 비밀이었기에 차마 당당하게 아니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그는 괜히 끙. 소리만 냈다.) ... 일단은 그렇다고 해주마. (흥. 하는 소리를 내며 노서하가 새침하게 제 앞에 선 아이를 지나쳤다. 괜히 할 말이 없으니, 이런식으로 복수아닌 복수를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무얼하던 중이었느냐?
 
어린 월백:흥. (본인이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나는 엄마의 하나뿐인 공주인데. 새침하게 제 앞을 지나가는 모습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까딱거리던 월백은, 그럼에도 지나치는 당신의 손을 붙잡으며 다시금 맨 처음에 내었던. 살가운 목소리를 흘린다.) 너무너무 심심했던 거 있지. 어머니가, 오늘 뵈러 온 분이랑 무척이나 친한 친구셨대.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그 분의 아들한테까지 날 소개시켜 주고 싶었다나? ... 아무튼, 울고 있는 엄마를 보는 건 처음이었어. 기분이 묘하더라. (시선이 잠시 아래를 향했다. 아주 조금 풀 죽은 듯한 모습을 취했을까.) 너도 비슷한 거 아니야? 나랑 놀자! (옷자락을 놓곤 당신의 손을 내밀었다. 환하게 웃는다.) 놀아주면, 지금까지의 '무례'는 특별히 용서해줄 테니까 말야.
 
어린 서하:(이 곳에 뵈러 온 사람이라면. ... 잠시 노서하의 표정이 낮게 가라앉았을까. 어린 아이가 견디기엔 너무버거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고귀하신 황자였고, 하나뿐인 황가의 아들이었으며. 지고한 노인장도 제게 고개를 숙이는 작자였다. 그리고 노서하는 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제 감정을 숨길줄 알아야한다는 소릴 들으며 자라왔다. 엉엉 울며 아버지에게 매달리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으나. 글쎄. 원래 어린아이일수록 빨리 자라고 싶은 마음도, 욕심도, 의무감도 큰 법이었다. 노서하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킁, 소리를 냈다.) ... 누가 무례라는 것이냐! 상황 파악이 안 되는구나! ... 내 아주 바쁜 몸이나, 특별히 네가 허툰 일을 벌이지 않도록 잘 감시해야겠다. (흥. 소릴 내며 제 허리춤에 두 손을 대고서 가슴을 활짝 내민다. 결국엔 저도 함께 놀고싶단 마음이겠지.) ... 헌데, 뭘 할 것이냐?
 
어린 월백:(작은 훌쩍임에 의아한 티를 냈지만, 그 뿐이었다. 월백은 결국 허락하는 당신의 모습에 자그마한 웃음을 흘린다. 자연스럽게 당신의 손 한쪽을 그러잡아 걸음을 옮긴다.) 결국 허락 할거면서, 거절하긴. (흥흥거리는 웃음 소리를 흘리지만, 곧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글쎼? 이 나라는 처음 오는 거라, 어딜 가야 할지 모르겠어. ... 근처에 구경하기 좋은 곳이 있다면 좋을텐데. 꽃밭이 있으면 더 좋고! 어머니께 화관을 만들어 가져다드리면, 조금이라도 덜 힘들어하실지 몰라. (때가 초겨울인 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 했다.)
 
어린 서하:어, 어어? (갑자기 손을 붙잡아 오는 손길에 그는 다시 한 번 당황했다. 어느 나라에서 온 지는 모르겠으나, 이렇게 외간 사내의 손을 덥석덥석 잡는 것으, 어어. 머릿속이 복잡해 말만 더듬거리며 제대로 된 단어를 뱉어내진 못했다. 하지만 이내 발걸음을 느리게 딛었다.) ... 꽃밭이라면. ... 내 아는 곳이 한 곳 있다. (제안하는 목소리가 꽤 조심스럽다. 이전의 고개를 치켜들던 모습은 어딜 간 건지. 그새 기가 죽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어린 월백:(선선히 불어오는 바람. 아, 분명 겨울인데 이미 지난 여름을 떠올리게 한다. 월백은 문득 고개를 돌려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본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창의 푸르름. 어느새 기가 죽은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높다랗게 웃음을 터트린 월백은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준다.) 그곳으로 데려다줄래? 꽃이 아직까지 피어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 ... 서하라고 했지, (갑자기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그런데 왜일까? 이름이 좀. 익숙한데. (깜빡.) 너는 내 이름, 안 익숙해?
 
어린 서하:(이번엔 버럭 화내거나 거부하는 게 아니라, 활짝 웃는 당신을 보았다. 노서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뒤늦게서야 쭈뼛쭈뼛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발걸음을 돌려 궁 안쪽으로 향했다.) ... 네 이름? 연 월백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는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지만. ... 마땅한 답을 찾을 순 없었다.) 적어도 내게 낯익은 이름은 아닌 듯 한데. ... (연씨 가문은 들은 바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린다.) 혹시 이제라도 내 이름이 생각나 벌을 내릴까 무서워서 그러는 것이냐? 내 은혜로운 군주가 될터이니, 지금이라도 고개를 조아리거든 특별히 용서해주겠다! (엣헴. 어린 목에서 나오지도 않는 헛기침을 한다.)
 
어린 월백:(고개를 바로 했다.) ... 익숙치 않다면 되었지, 뭘. 나도 잘못 들은 건가봐. (콧잔등을 찡긋거리다 말 뿐이었다. 그런데. ... 자꾸 반응이 이 따위라니. 황자라고 사람들이 다 오냐오냐 하며 키웠나봐.) 나한테 벌 내릴 거야? ... (확 손을 놓지만, 표정에는 언뜻 숨길 수 없던 장난기가 섞여있었다.) 그럼 나, 너랑 안 놀래. 친구한테 벌을 주는 사람이 어디 있는데. (걸음도 뚝 멎었다. 태연하게 당신을 제 '친구'라 칭한 월백은 시침 뚝 떼듯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다. 어쭈. 뒷짐까지 졌다.)
 
어린 서하:어? (노서하는 어째 당신의 앞에서 당황한 얼굴밖에 보여주질 않는 것 같았다. 놓지 않을 것처럼 꽉 잡고 있을 땐 언제고, 이제와서 이렇게 팽 고개를 돌리면 어쩐단 말인가. 제 또래를 상대해본 경험이 없었으므로, 그 표정에 장난기가 섞인 걸 눈치챌 수 있었을리가. 결국은 당신의 앞에서 발을 동동구를 뿐이었다.) 내, 내가 언제 벌을 주겠다 하였느냐! 내게, 요, 용서를 빌면 봐주겠다 했잖느냐! (괜히 저가 큰소리를 낸다.)
 
어린 월백:(큰 소리에 두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목소리 좀 낮춰! 그리고, 생각을 해봐, 황자님. (입술을 삐죽이고선.)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이 마땅히 없는데, 용서를 빌어야 하는 내 입장. ... 이상하지 않아요? (고개를 숙여 코를 콕 찔렀다. 그리고선 다시 맨 처음처럼 혼자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치켜드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건 간단해!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용서를 안 빌어도, 봐줘. 응? 그렇다면 다시 손 잡아줄게. '친구'도 되어줄 거고 말야.
 
어린 서하:... ... ... ... . (한참이나 당신을 쏘아보았다. 눈 아프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먼저 꼬리를 내리는 건 역시나 노서하 쪽이었다.) ... ... 해주면 되지 않느냐! (오늘 처음 보는 얼굴이건만. 왜 이렇게나 이기기가 힘든지. 아마 '논쟁'이라는 것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제 어미의 입김이 세기도 센 탓에 노서하의 의견은 늘 채택이 되거나, 제 어미 앞에서 막히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약속하면 될 것 아니냐. (마음에 안 든다는 태도긴 해도 말이다.)
 
어린 월백:(놀랍게도 월백이 만난 상대 중에선 당신이 제일, 월백을 오래 기다리게 했단 사실을. 당신은 알까? ... 당신의 말을 듣고 월백의 고개가 조금 더 치켜올라간 듯 했다. 이내 당신에게 한 손을 내민다. 새끼 손가락만을 든 상태로.) 약속 하는 방법은 알지? (흐흐, 이상한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린 서하:(마치 악귀와 약속이라도 하는 것처럼 새끼손가락을 든 그의 눈이 비장하기 짝이 없다. ... 이게 아닌데! 결국 불만이 잔뜩 담긴 얼굴로 새끼 손가락을 스윽 내밀었다. 차마 먼저 손가락을 굽혀 걸지 않는 것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어린 월백:(자존심도 세긴. 이번에는 월백이 먼저 손가락을 굽혀 걸었다. 위 아래로 두어 번 흔들고 나서야, 이전처럼 손가락을 엮어 마주 잡는다.) 너. 친구 없지. (다시 걸음을 옮기며 하는 소리가, 딱 그랬다.)
 
어린 서하:... ... (그는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었다. 퍽퍽 소리를 내며 걸음을 딛는 것으로 대답을 다 했을까.)
 
어린 월백:... 내가 첫 친구인거면,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해줘도 좋지 않아? (눈을 꿈뻑였다. 못내 불만스러운 표정.)
 
어린 서하:충분히 다정하지 않느냐. (나름. ... 그래. 나름, 그랬다.)
 
어린 월백:더 다정하게 대해주면 안돼? 갑자기 소리도 치지 말고, 음. 나한테 무엄하다고 하지도 말고, 무섭게 째려보지도 말고. ... (당장 우다다 튀어나오는 말들이, 그 짧은 새에 쌓인 게 얼마나 많은건지.) 그런데, 꽃밭은 아직 멀어?
 
어린 서하:아니, 그러면 네가 ... ! (길을 걷다 홱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벌써 두 개나 어기고 있었다. 소리도 쳤고, 째려보기도 했다. 으, 으음. 노서하는 어색하게 제 눈을 굴리며 이번에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뭐. 어떻게 말하라는 것이냐? ...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참거라. (그리 말하며 쫄랑쫄랑거리는 그의 걸음이 빨라진다. 목적지에 가까운 탓이리라.)
(노서하가 당신을 이끈 곳은 어린 우리에겐 조금 크게 느껴지는 어느 궁이었다. 궁인들은 어딜 갔는지 거의 텅텅 비어있다시피 한 궁에는 화려하게 동백꽃이 피어있었다. 너무도 화려하지만, 묘하게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곳이란 인상이 강하게 남는 궁.)
자. 이 곳이다. (그리곤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고 자랑하듯 말했다. 이 순간 만큼은 어른스러운 척 하는 황자가 아니라 제 또래다운 얼굴이었다.)
 
어린 월백:... 지금처럼 이야기하는 것도 딱 좋고? 그래도 약속은 잘 지켜주네. 서하 너, 최고야. (대단한 비밀이라도 이야기하는 양 속닥이는 것은, 어떻게 보면. ... 말을 길들이려 당근을 건네주는 모습이 보였던 것도 같다. 당신의 걸음이 빨라지는 것에 덩달아 월백의 걸음도 다소 방정맞아지며, 결국 정체를 모르는 궁에 입성하게 되는 것이다.) 와아, (감탄이 흘러나온다. 휘황찬란한, 그러나 못내 쓸쓸해보이는 정경. 월백은 한순간 정신이 팔려 그 위용에 입술을 떡 벌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먼저 내뱉게 되는 말이,)
... 너. 진짜 부잣집 도련님이었나봐! (이런 것이라는 점이. 당신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그런데 서하야, (몸을 바싹 붙인다.) 저 꽃. 뭐야? 내가 살던 곳에선 본 적이 없는 꽃이야. ... 너무 예쁘다. 이름이 뭐라고 해? 겨울에도 꽃이 피다니, 신기해! (와다다 말을 쏟아내다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면.)
... ... (자랑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아하하! 눈물이 찔끔 흘러나올 정도로, 허리를 반쯤 굽히고 크게 소리내어 터트리는 웃음이 쓸쓸한 궁 안을 가득 채웠다.) 너. 그동안 엄청 외로웠나 보구나? (다정한 기운이 가득한 손이, 당신의 양 손을 붙잡아온다. 가늘게 휜 눈매가 앳되다.) 자랑하고 싶었던 거. 그동안 어떻게 참았어?
 
어린 서하:황자라는 말은 어디로 들은 것이냐? (불만이 내포된 목소리가 중얼거리듯 했다. 당신을 째려보진 않았지만, 대신 허공을 노려보았으니 됐을까. 당신이 감탄하는 것을 보다 그제야 다시 목소리가 원래의 크기로 커졌다.) 동백꽃이라 하는 것이다. ... 어머니가 아주 좋아하던 것이라 마당에 잔뜩 심어두셨지. (그의 눈에 다시 슬픔이 고이기 시작할 무렵, 커다란 웃음소리에 놀라 눈물이 다시 쏙 들어가버린다.) ...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내가 언제 그랬다고. ... (또 다시 허공을 노려본다.) 이거 놓아라. (괜한 소리를 해댄다.)
 
어린 월백:(그러나 그 중얼거림을 들은 월백의 낯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웃음이 당장 사그라들더니.) ... ... 단순한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라, 황자였다고? (정말, 당신의 말을 단순한 허풍쯤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한참의 시간이 그렇게 지나지만 월백은 이내 기운을 차리고 웃는다.) 흠! 흠, 아무튼요, 황자 전하. (정말 기운을 차린 것은 아닌 모양.) 놓으라 하시니 놓아야겠죠. ... 흠. (고개를 돌리며 뒷짐을 졌다. 손가락을 꼼지락대다가.) 아무튼. 제 평생 저렇게 예쁜 꽃은 처음 봤어요! ... 봤나이다? 보았습니다? (갸웃.)
 
어린 서하:(갑자기 태도를 바꾸니, 노서하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인간상이라 하면 단편적으로든 완벽히 파악할 수 있단 자부심을 늘 지니고 있었건만. 자꾸 이리저리 튀기만 하니 그로선 제대로 당신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 갑자기 뭐냐? (존대를 해대며 어색하게 구니 대번 노서하 또한 어색함을 느끼며 주춤 걸음을 뒤로 물린다.) ... (꽃을 잠깐 힐끔거린다.) 꽃이 마음에 드는 것이냐?
 
어린 월백:... ... 전하인지 몰랐거든요. 전 또, 으레 남자 아이들이 그러했듯 전하께서 거짓말을 하시는 줄 알았나이다. (실토했지만, 걸음을 물리는 당신의 모습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눈을 굴리다 당신이 물러난 만큼 성큼, 다가간다.) ... 마음에 듭니다만, (반대편으로 고개를 기울인다. 슬그머니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내심 당신이. ... 꽃을 꺾어다주길 기대하고 있다!)
 
어린 서하:(아마 이번만큼은 당신의 기대에 차는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노서하는 많이 망설이고, 주춤거리다 곧 작은 꽃가지 하나를 꺾어 당신에게 건네주었다.) ... 받거라. 네가 그. ... 다정이니 뭔지 하니까. ... (원래라면 이런 짓을 했다간 아주 많이 혼날테다. 하지만 이젠 저를 혼낼 어미도 없었고. ... 왜였을까? 그저, 그냥. 마음이 복잡해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제 추억의 파편을 나눠줌으로서 이 슬픔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네게 주마. ... 그러니 이상하게 굴지 좀 말거라. 처음처럼 차라리 건방지게 굴란 말이다. (제게 예의를 차리니 또 그게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그는 제 할말을 쏟아내곤, 당신을 슬쩍 쏘아보는 듯 하더니 곧 몸을 홱 돌리며 정원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어린 월백:(꽃을 건네받음과 동시에 월백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미소는 그토록이나 찬연했다. 선연했다. ...) 전하, 제가 생각해보았는데, 아마도 우린. ...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들뜬 기색을 감추지 않고 정원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당신을 졸졸 쫓아가며, 월백은 당신이 꺾어다 준 꽃가지를 소중히 품 안에 안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전하, 혹시, ... ...
 
월백이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벌렸던, 조심히 갓 움튼 꽃잎을 손가락으로 건드려보았던 그때였습니다.
 
"……아!"
 
"…월백아!"
 
다급한 외침은 아주 귀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달프고, 애간장을 녹이게 만들었습니다.
 
월백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에, 월백은 그 외침에 퍼뜩 고개를 돌려 멍하니 서있다가 외칩니다.
 
어린 월백:... 엄마!
엄마, 나 여기 있어요!
 
나인 몇을 대동한 채 치맛바람을 휘날리며 달음박질 해 오는 여자는 푸른 빛이 감도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졌습니다.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에 서하는, 그 자가 다름아닌 천 부인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죠.
 
천 부인! 당신의 어머니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친우'이지 않습니까. 비록 혼례를 치룬 뒤 창을 떠나게 되었다지만 주고받던 서신은 쌓이다 못해 탑을 이룰 지경이었습니다.
 
곧 창에 방문하여 그 집 여식을 소개해줄 것이라며, 그 자리에는 당신도 동행하게 될 것이라며. 자랑하듯 화상을 보여준 것이 막 최근의 일이었는데....
 
당신을 옆에 두고 차마 걸음을 떼지 못해 얼쩡거리던 월백을 번쩍 들어안안은 천 부인은 몇 번이고 그 뺨을 쓸어댑니다. 이마를 맞대며 무어라 중얼거리는데, 아마 천지신명께 감사인사라도 드리고 있는 듯 하였죠.
 
혼비백산하여 질린 낯이 그나마 풀리게 된 것은 천 부인이 당신을 바라볼 때였습니다.
 
동그랗게 뜨인 흑안이 당신과 눈을 마주하면 동그랗게 뜨였고, 천 부인은 놀란 기색을 띄다가 희미하게 웃으며 월백을 품에서 내려줍니다. 그리고는,
 
그리고는 당신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대뜸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아니겠어요.
 
당신은 천 부인의 눈동자 틈에서 월백에게서 본 다정함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월백의 다정은, 분명 부인에게서 배운 것이 틀림 없다는, 생각이....
 
천 부인: ... 태자 전하. 우선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건네고 싶습니다. 제 딸이 타지에 살아 창滄에 무지하였나이다. 혹, 실례를 끼친 것은 아닌지요.
 
실례라는 그 단어에 찰나, 월백의 표정이 굳습니다. 번쩍 제 어미의 팔을 껴안으며 서하에게 눈치를 줍니다.
 
아마도 뜻을 해석해본다면… '용서해주겠다는 거, 거짓말은 아니셨겠죠?' 이지 않았을까요?
 
어린 서하:(월백을 흘끔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대의 여식이 나와 시간을 보냈으나, 거기에 염려할만한 일은 없었으니 걱정하지 마시게. (방금 전 당신의 앞에서 고개를 치켜들던 꼬맹이는 어딨고, 그는 곧 인자한 태자의 얼굴을 하였다.)
어마마마께선. ... ... (망설이는듯 하다, 천천히 다시 입을 연다.) 만나고 온 겐가?
 
천 부인: (깊은 미소를 짓는다.) 예. 조금 더 좋은 자리에서 전하를 뵐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참 야속한 분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즉 눈가는 붉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천 부인이 서하를 본다. 당신을 향해 손을 뻗는다.) 전하. 혹시. ... 손을 붙잡아도 되겠습니까?
 
어린 서하:(아무 말 없이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 그 틈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는지도 모르겠다.)
 
천 부인: (자그맣게 감사를 읖조리며 손을 느리게 붙잡았다. 가만 당신의 손을 매만지며, 그리로 시선이 내려가 있다가 입술을 떼어 얘기한다.) 마지막으로 나눈 서신에 그런 글귀가 적혀있었죠. 만일이라도 저와 제 여식이 창에 자리잡게 된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들이 되자고. (고개를 들어 당신을 본다. 눈빛이 올곧다.)
전하. 아무리 전하께서 아무리 이 나라의 파도이시며 귀중하고 담대한 자라 하지만, 저는 전하께서 이 슬픔을 감당하시기에 벅찰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조금은, 위험한 말을 꺼냈다.) 그러하십니까?
 
어린 서하:... ... ... 나는, (그렇게 말하며 흘끔 월백의 낯을 살폈다. 쉽게 꺼낼 수 없는 주제이기때문이었을까. 제 또래 앞에선 입밖에 내고싶지 않은 이야기인것 같았다. 이마저도 그의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나는, ... 이 나라의 황자다. 어머니께선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려선 안 된다 내게 몇 번이나 말하셨다. 그러니까 나는. ... ... 나는, 잘 해낼 것이다. ... 그것이 어머니가 바라는 길일테니까. ... (손을 꼼질거렸다. 그는 거짓말에 서툴렀다. 그러니 제 앞의 천 부인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겠지.)
 
천 부인: ... 그러하십니까. (천 부인은 그저 다정히 웃음지으며 당신의 손을 강하게 붙잡아주었다. 더이상 파고들지 않는 것은 어린 당신을 향한 배려였겠지만, 중간에 월백을 덩달아 흘끔거리는 시선에는 언뜻 장난기가 섞여있는 것도 같았다.) ... 비록 전하를 안아드리며 위로할 염치도 자격도 없습니다만, 그저 저와 제 여식이 전하의. ... 고충을 달래드릴 수 있는 작은 존재가 되어드렸으면 하는군요. (그제서야 손을 놓았다. 당신과 눈을 마주치며 애틋하게 웃었다.) 저도 전하께서, 전하의 어머니가 바라는 길을 걸어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함께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월백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리고는 묻길,) 혹. 곧 이사하게 될 저희 자택에 자주. ... 놀러오시지는 않으시렵니까? (장난스럽게 웃음 짓는 얼굴은 딱 월백이 웃는 모습을 빼닮았다.)
 
어린 서하:(노서하는 그런 천부인과 월백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볼이 조금 붉은 티가 나는 것이, 이 미묘한 만남으로 인한 설렘인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날씨 탓인지는 아무도 모를테다.) 약속하마.
 
천 부인의 환한 웃음과 그제서야 모든 정황을 파악해 파리하게 질린 월백의 얼굴, 그네들과 한 약속. 그것들을 통해 한 순간으로 끝날 것만 같았던 인연은 계속 이어집니다.
 
드넓은 바다를 앞에 둔 이곳. 창滄을 바탕으로, 연월백과 노서하. 당신의 이야기가 쓰여지기 시작합니다.
 
편찬된 책의 맨 앞 장에는 이런 글귀가 써있겠지요.
 
……바다에 머무르자 우리 그렇게 살자, 저녁놀 밟고 날아 거품 이는 물결에 뉘고 살자.
 
천일의 야화를 품은 바다로 가자, 수평선 접붙여 맞닿는 바다서 살자.
 
마침내 어둔 밤 사르고 해 타올라 밝으면 새벽이 올 것이다, 흰칠한 구름 노닐어 새파란 바다로 가자, 물 탁 풀어 연해진 창극과 감색 바다 서로 입 맞추는 곳에서 살자…….
 
사금처럼 부서지는 모래가… 머리칼 헤쳐 놓은…
 
바다서 살자…….
 
낭화애담浪花愛談
 
: 파랑이 이는 자리
 
w. 헤르츠
 
20200106
 
연월백, 노서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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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답방 나인들이 용포를 조심스럽게 빨아 말리고, 좋은 계절을 맞아 솜이불을 일일이 튿어 볕에 말리니 바야흐로 춘삼월 봄입니다.
 
창에서 흔히 비유하기를, 왕은 너른 해양이고 태자는 활기찬 파도라고 하죠. 상징에 맞게 태자궁의 전반적인 생김새도 카랑카랑하게 몰아치는 파도 모양을 닮았습니다.
 
날씬한 푸른색 처마, 비취빛 문살 틈으로 햇살이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잘 세탁하여 널어 둔 태자의 아청색 용포 역시 파도를 닮아 푸르게 빛납니다.
 
그러나 동궁에 갑자기 찾아온 봄이 반드시 아청색 용포나 알알이 움튼 매화며 연산홍의 탓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래도록 제자리를 갖지 못했던 안주인께서 마침내 조만간 태자궁으로 오실 모양입니다.
 
금상 폐하께서 갑작스레 미리 약속되었던 정혼을 물리고 간택령을 내린다 하시어 안팎으로 말들이 많았습니다만, 이내 명을 거두셨으니. 오래 기다렸던 월백이 소박을 맞을 일은 없게 되었습니다.
 
태자의 가례를 위해 가례청이 설치되었고, 조용하던 관상감도 혼례 길일이 언제인가를 논하느라 바빠졌습니다. 덩달아 시강원(*태자의 교육 기관)의 일도 늘어났지요.
 
지금의 태자인 서하는 갑작스럽게 저위에 올라 왕실의 가례 절차에는 익숙지 않으니 익히고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오늘도 서하는 평소보다 배는 길어진 듯한 교육을 간신히 끝마치고 막 시강원에서 나오던 참입니다.
 
그때 급히 달려오는 자가 있었습니다. 춘추관의 젊은 직각으로, 연월백의 손윗 사촌형제가 되는 사람이었죠.
 
직각은 주위를 살피더니 난처함 반, 익살 반이 섞인 얼굴을 합니다.
 
그리고 무심한 척 하며 서하에게 서찰 한 통을 건네주는 게 아닙니까? 이어 속삭인다는 말이 이렇습니다.
 
직각: ... 그 애가 몰래 전해 주라고 어찌나 매섭게 쏘아보던지, 으름장을 놓으며 부탁하는 것을 받아왔사옵니다.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소신은 모르는 일로 치겠습니다, 전하.
 
노서하:... (애써 딴곳을 보며 저 또한 장난이라도 치듯 말을 툭 던진다.) 내가 굳이 누군가에게 고하지 않아도 이미 네가 뛰어오는 소리로 궁의 모든 나인들이 알아챘겠구나. (직각의 손에 있는 서찰을 받아들며 내용물을 살핀다.)
 
직각: ... ... 큼! (헛기침을 하며 서찰을 받아 펼치는 당신을 흘깃거렸다.)
 
서찰을 펼쳐 보면 월백의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
 
전하께서 근래에 아무런 열정을 보이지 않아 주시니, 임오시는 길 오가다 못해 발 아래 돌이 모두 모래 되었다는 시구가 남일이지 않습니다.
 
자꾸 이러시면 꿈에서도 뵙지 않을 것입니다.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보시는 즉시 남대가로 나와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는 써 있는데, 건네 준 직각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솔직히… 서하가 보기에도 별로 급한 내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남대가라면 궁궐 남문 바깥의 저잣거리를 말하는 것인데……. 보고 싶어서 투정을 부린다고 생각하면 이 서찰은 그냥 편지가 아니라 연서가 될 수도 있겠네요.
 
옆에서 직각이 계속 표정을 다듬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일 것입니다.
 
기웃거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서 있던 직각은 몇 번 헛기침을 한 후에야 간신히 웃음기를 덜고 덧붙입니다.
 
직각: 솔직히 그 애와 전하께서 연분 맺은 것이야 어디 사는 누가 모르겠습니까? 다만 여러 일로 가례가 몇 해나 미뤄진 것도 사실이고, 얼마 전에 폐하께서 간택령을 내리신다고 시끄럽기도 했고…. (눈을 굴렸다.) 그 아이가 말로는 괜찮다, 괜찮다 하는데. 내심 애가 닳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렴 어르신들끼리 잘 진행하고 계실 것이야 소신도 그 아이도 잘 알고 있사오나, 그래도 슬쩍 달래 주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눈빛을 보낸다.)
 
노서하:(서찰을 다 읽자마자 직각이 읽지 못하도록 착 접어둔다.) 말이 많구나. (알았단 의미였다.) 이제 하다하다 내 사생활에도 간섭을 할 작정이더냐? (불만스런 소리를 늘어놓다가 말끔히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길.) 내 너에게 명할 것이 하나 있는데. ... ... 혹여나 거절할 것이냐? (사근사근한 웃음이 분명 숨기는 게 있는 얼굴이었다.)
 
직각: ... 금방의 일은, 춘추관의 직각이 아닌 월백이의 손윗 사촌 형제로서 있었던 것으로 쳐주십사, (딴청을 피우다 뒷말을 듣곤, 표정이 대번에 안 좋아진다.) ... ... 명 받잡겠나이다, 저언하. (표정을 가다듬으나 기운이 빠져 흐물흐물한 것이 눈에 보였다. 일을 허투루 처리하는 성격은 아니긴 하지만.)
 
노서하:(그는 곧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툭, 툭. 두번 쳤다.) 내 오늘 필사 해야할 서책이 두개 남았는데... .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잘 부탁하마. (단번에 생략했다.) 하하. 수업이 남은 게 아니니 얼마나 다행이더냐? 너와 내가 닮은 얼굴은 아니지 않더냐? 자. 그럼 이만! 이따 밤에 보자꾸나! (^^~)(그는 손을 흔들며 자리를 훌쩍 떠버렸다.)
 
직각: ... ... 저, 전하~~!!
자, 잠깐만요, 전하! 아직 이건 받고 가셔야지 않겠습니까! (훌쩍 뛰어서 당신을 붙잡지도 못하고, 애매하게 허공에 손만 휘저었다.)
 
그러며 뛰어온 직각은 다급히 당신에게 귀한 청금 비단으로 감싼 작은 함을 바쳐 올립니다.
 
직각: 태, 태후 마마께서 전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노서하:(그 말에 잠깐 멈짓했다. 태후.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이름이었다. 지금 저걸 곧장 받아 잘 받았다며 서신이라도 보내지 않으면 금방 성을 낼 것이 눈에 훤했으나. ... 지금은 그런 걸 신경쓰고싶지 않았다. 손에 쥔 사찰이나 제 품에 넣는다.) 내 궁에 가져다 놓거라. 지금은 잔소리보다 더 급한게 있어서 말이다. (그러며 또 웃는 얼굴로 어깨를 툭, 툭 친다. 뭐. 그렇다고 해서 월백이 잔소리를 안 할 것 같진 않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그리울 다름이었다.)
 
결국 직각은 당신의 말에 거절할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입니다. 어쨌거나 당신과 태후의 사이가 썩 좋지만은 않다는 것은, 알 사람은 알 만한 이야기였으니까요.
 
직각: ... ... 열심히 필사 해두겠습니다. 모쪼록. ... (한숨.) 좋은 시간 보내고 오십시오.
 
직각이 물러나는 것을 보며, 당신은 다시 걸음을 옮깁니다.
 
자꾸 이렇게 늦장 부리다간 꿈에서도 보지 않겠다 했으니까요.
 
아무튼, 봄은 봄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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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하는 궐 밖에서 가장 큰 저자인 남대가로 향했습니다.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한 다음 날이라도 되는지 손에 꼽을 정도로 하늘이 맑았습니다.
 
멀리 산 능선을 뒤덮은 철쭉, 어린아이들이 바구니에 담아 파는 산수유며 유채가 산뜻하게 마른 냄새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왕의 어심이 때때로 변덕스럽고 치졸하다 한들 창은 아직 살기 좋고 부유한 나라입니다. 백성들이 밝은 표정으로 오가고 있었습니다.
 
멀리 월백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습니다.
 
곱게 차려입은 채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것을 보니, 역시 ‘별로 안 급한 것 같다’는 인상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연월백:전하? 기다리다 목이 쏙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눈치라도 주려는 양 헛기침을 했다.)
 
노서하:그래? 어디 빠졌는지 한 번 보자꾸나. (말하며 요리조리 당신의 목을 살펴본다. 그리곤 과장되게 미간을 찌푸리며 갸웃거리길.) 안 빠졌는데?
 
연월백:전하가 오셨으니, 다시 돌아온 것이겠지요? (눈치도. 자그맣게 중얼거리지만, 당신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맞았다.) 근래에 하시는 모습을 보아하니, 전하께서 제게 마음이 쏙 떠나간 게 아닐지 두려웠던 까닭에. (눈썹 까딱.) 서신을 보냈습니다만. ... 제 진심이 전달되셨습니까?
 
노서하:그대가 그런 걱정도 하는지는 몰랐군. (웃으며 말하고야 있지만, 마찬가지로 꽤 신경쓰고 있던 모양인지, 당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는 눈치였다.) 그래서 내 이리 서신을 받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 아니오? 바람만큼 빨리 달려온 것 같은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연월백:(솔직하게 말하면, 요즘 일이며 공부며 바쁘게 치여사는 당신에게 숨 좀 돌리라고 불러낸 것이기야 했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으니, 이내 평상시와 같은 미소를 그린다.) 오늘은 저녁까지 보내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헌데. ... 흠. (주변을 휙휙 둘러본다. 자연스럽게 당신의 팔을 껴안아오며.) 어느 곳 먼저 들려보시겠습니까? 거리 먼저 향해볼까요?
 
노서하:(자연스럽게 제 팔을 껴안으며 붙는 동작에도 그는 당황하거나 놀래지 않았다. 평상시와 같은 행동이기야 했으니까. 저 또한 익숙하게 당신에 맞춰 자세를 편히 고치고, 제 팔을 껴안은 손에 제 손을 살며시 얹었다.) 좋지. 혹 눈여겨 보는 것이라도 있는 것이냐?
 
연월백:노리개요! (대번에 답한다.) 어릴 때부터 지니고 다니던 노리개였는데, 엊그제 갑자기 없어진 게 아니겠습니까? 어디 흘렸는지 통 모르겠는데. ... 이를 전하께서 아실 일도 없잖습니까. (발 코로 탕을 툭툭 치는 것이 꽤. ... 속상해보였다.)
 
노서하:노리개? ...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고보면 익숙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을까.) 혹 누가 가져갔단 생각은 안 해보았느냐? 더 찾아보지 않고. 새 노리개를 사는 것으로 과연 그 마음이 풀릴까 싶은데.
 
연월백:... 누가 가져가겠습니까? 솔직히, 그리 특출나게 예쁜 것도 아니었거니와, 어머니께서 어릴 적 장터를 구경시켜주며 사주신 것이라 비싼 값이 나가는 것도 아닌데. (괜히 당신의 팔을 더 끌어안아본다. 표정이 내내 뚱하게 있다가, 한숨을 지으며 표정이 얼추 풀린다.) 기껏 나들이나 왔는데, 계속 이리 있는 것도 즐겁지는 않습니다. 정 마음이 쓰이신다면 전하께서 달래주시지 그러십니까. (살살 웃는다.)
 
노서하:글쎄. ... 개인적으로 널 칠투할만한 일이 있는지도 모르지. (가령, 이렇게 태자의 팔을 끌어안는 것이라던가. 노서하는 당신이 제게 붙으며 살살 웃음지을 때마다 따라하듯 입꾈를 부드럽게 끌어 웃었다.) 오호라. 내가 직접 이리 행차했는데도? (도발적으로 눈썹을 까딱거렸다.) 곤란하군, 그래. 그럼 내 정인께서 마음이 풀리시도록 어디 이 거리에 있는 모든 것을 사들이라 해볼까. 혼례는 아직이지만 이런식으로 도장 찍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는 제가 뱉은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중얼거리더니 돌연 진심으로 소리라도 지르려는 듯 크흠. 목을 가다듬는다.) 여- (-봐라. 그의 큰 목소리의 시작이 대번 장터 한가운데서 울렸다.)
 
연월백:질투? 아니, 폐하께서 맺어준 형식상의 혼례를 어찌 시기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속이 좁은, ... ... (텁. 반사적으로 서하의 입술을 월백의 손바닥이 틀어막은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런 당신이 월백을 바라보면, 월백은 답지 않게 쩔쩔매는 표정으로 식은땀이나 하나 흘리고 있었던 것 같다.) ... 내가 미쳐! (급하게 당신을 끌고 장터 모퉁이 안으로 몸을 피신했다. 덕분에 당신의 허리를 반쯤 끌어안게 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왜이리 능청스럽게 자라셨습니까? 자고로 태자라 하심은-, (그리고 이제는 월백의 잔소리가 시작될 차례였던 듯 하다.)
 
노서하:(그리고 그런 당신을 내려다보는 것 또한 그의 심심찮은 재미 중 하나였다. 노서하는 상냥함을 빙자한 웃음을 내짓다가, 곧 당신의 손길에 힘없이 끌려 장터 모퉁이에 들어갔다. 바짝 붙은 서로의 몸이 당신은 신경쓰이지도 않는 걸까? 제 허리를 붙잡은 손을 한 번 바라보다가, 시작되려는 잔소리에 이번엔 그가 입을 텁 틀어막았다.) 어허. 태자라니? 지금 내가 태자라 한 것이냐? (그리곤 장터쪽을 한 번 슥 턱으로 까딱거린다.) '서하 도령'이라 하셔야지. 응? (곱게 눈을 접는 웃음이 얄밉기 짝이 없다.) 그리고, 분명 내게 달래달라 하지 않았느냐? 내 나름 정당한 행동을 취한 것이거늘. (그는 아주 뻔뻔스러웠다.)
 
연월백:(텁. 눈살이 찌푸려진다. 읍읍 소리를 내어보다 당신의 손을 붙잡아 떼어내며 매섭게 당신을 쏘아보는 것이 아닌가.) 아하, '도령'이란 말씀이시지요. 그렇다면 참 잘 되었습니다. 감히 이 창에서, 누가 파도께 손찌검을 하겠냔 말입니다. (요놈의 입! 월백이 아프지 않게 당신의 입술을 찰싹찰싹 때렸다. 덕분에 몸이 더 붙게 된 것은 신경이 쓰이지도 않는지 입술을 삐죽인다.) 도령께선 한참 바쁘시던 사이에 뱀이라도 몇 마리 잡아드셨나 보지요.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 이러시다니. 이러다 제가 홧병이라도 들게 되면 어쩌시려고 이럽니까. (대답이라도 해보라는 양 당신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는데, 남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온 것만으로도 당신을 취급하는 것이 대번 험해지니. 말만 태자고 존대를 갖추는 것일 뿐, 당신을 이렇게 허물없이 대하는 것은 천지에 연월백 한 명 뿐일 것이다.)
 
노서하:(얄밉도록 웃고있는 얼굴은 당신이 찰싹거리며 입술을 때리자 금방 찌푸려졌다. 눈을 꾹 감고 있다가 손이 멈추고 나서야 슬쩍 눈을 뜬다.) 홧병나거든 내가 책임질터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물론, 안 나도 그러기야 하겠지만. (제 볼을 콕콕 찌르는 손가락에도 아무런 제지 없이 있는 그는 이런 상황이 참으로 익숙한듯 싶었다. 남들이 보거든 경을 칠 것이었으나, 그에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게 당신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당신에게 끌리는 것이었다. ... ... 물론, 친구 쪽으로?) 그리고 내 경험상 그대는 이 정도로는 홧병이 나지 않을 것 같네만? (정말이지 얄미웠다.)
 
연월백:흥. 도령께서 책임져주지 않으셔도, 저는 이미 멋들어진 정혼자가 있는 까닭에. 안타깝지만 이 마음은 거절해야만 하겠습니다.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불현듯 진지한 표정을 그리며 고개를 돌린다. 가련한 척 제 손을 마주 잡고는.) 그 분께선 도령과 다르게 참으로 다정하시고, 과묵하신 분이시거든요. (손을 풀고 홑팔짱을 낀다.) 매번 저의 마음에 열을 올리는 분보다야. 도령이 아닌 저의 전하께서 훨-씬 탐이 나는 신랑이 아니겠습니까?
 
노서하:(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며 가련한 태도로 마치 다른 사람을 묘사하는 양 구는 당신을 바라보며 그가 눈썹을 까딱거린다.) ... 그래? 거참 이상하군. 내가 알기로 그대의 정혼자는 다정하긴 커녕 곁에 있는 이들의 속이나 썩이다 홧병에 들리고, 말이 많아 정혼자에게 날이면 날마다 입술을 맞는다 들었거든. (태연하게 방금전 겪은 일들을 나열하곤 은근슬쩍, 홑팔짱을 끼고 있는 당신의 허리를 두 팔로 안았다.) 그러니 그런 작자보다야 여기 있는 내가 낫지 않겠는가? 돈이 많아 그대를 고생시킬 일 없을테고. 힘도 잘 쓰니 그럭저럭 일도 잘 할것이고. ... 뭐. 얼굴도 이정도면 봐줄만은 하지. (스스로에게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연월백:... ... 징그럽게 왜 이래요, (허리를 껴안는 당신을 밉지 않게 흘겨본다.) 그래도, 스스로 어떻게 행동하는 진 잘 알고 있는 듯 하니. 제가 또 아량 넓게 봐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며 팔짱을 풀어 장난스럽게 당신의 목을 끌어안는 것이다.) 뒤엣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도령의 정혼자께서는, 도령이 더는 본인의 정혼자를 놀리지 않고, 다정하게 시전 거리나 돌아다녔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볼 콕콕.)
 
노서하:애정표현에 징그럽다니. (핀잔같은 말을 건네지만 곧 자신의 목을 끌어안는 당신의 행동에 말끔한 웃음을 보였다.) ... 이정도면 다정하지 않나? (이렇게 달콤한 애정행각도 하고 있는데. 타인의 눈치라도 살피듯 속삭이는 음성으로 물었다.) 저잣거리의 물건을 모두 사들이는 것도 나름 파격적인 구애인 것으로 알았는데. 삼류 소설에 나올만한 장면이지 않느냐? '어이. 여기부터 여기까지. 전부 계산한다!' 이런 것 말이다. ... 정혼자께선 이런 취향은 아닌 모양이지?
 
연월백:애정행각이요? 무슨. ... (으으, 대번 표정을 찌푸리며 당신의 어깨를 붙잡아 밀어내었다.) 남들이 보면 오해살 만한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흠, 물론. ... 저희가 혼례를. ... 올리게 될 것이기는 하지만. ... ... (그제서야 민망함이 찾아온 것일까?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하는데, 볼이 조금 발갛게 달아오른 상태다. 하지만 곧 한숨을 내쉰다. 혼례라니. 이렇게 서슴없이 대하는 친우와 혼례라니! ... 물론,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지만 말이다.) ... 아무튼, 그런 돈 낭비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도령께선 좀 더 백성들의 일상을 깨우쳐야 할 필요가 있으십니다. (입술을 삐죽이며 당신의 손을 붙잡았다. 시전 거리로 향하려는 셈이다.)
 
노서하:(제 어깨를 붙잡아 미는 것에도 딱히 이렇다할 불만사항따위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도 이런 상황 자체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돈낭비라니? 마땅한 값을 지불하는 것이지. 뭐. 타인의 눈에는 그리 보일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좋지 않느냐? 매일처럼 물건을 팔러 나오는 상인들이거늘. 나는 구애에 성공하고, 상인들은 물건을 팔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지. (당신이 제 손을 붙잡자 자연스레 손을 마주잡았다. 이젠 이런 것에 어색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구혼이니, 구애니, 혼례니 말해놓고. 정작 그는 부끄럼없이 굴고 있었다. 아무생각이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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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친구인지, 정혼자인지. 아무튼 손을 맞잡은 당신들은 시전 거리에 들어섭니다.
 
다양한 상점가가 즐비한 남대가의 중심 저자는 전병과 유밀과, 강정, 과편, 숙실과, 생강 정과를 좌판에 잔뜩 늘어 놓은 주전부리점부터 시작하여 비녀나 노리개 따위를 파는 장신구점,
 
서책방, 장터 국밥, 국수 점포, 수도에서 가장 품질 좋은 용정차와 벽라춘을 들여 두었다고 홍포하던 다관, 백화주며 숙수전진이 유명한 객잔…….
 
멀리 서역이나 서천에서 이곳까지 와 이국적인 차림새를 한 상인들도 복작복작하니 명실상부 수도의 제일 번화가라고 할 법합니다.
 
연월백:(익숙하게 장신구점으로 걸어간다.) 아무튼, 여기서는 평범한 도령과 아씨일 뿐입니다. 아시겠죠, 서하 도령? (눈치를 준다.)
 
노서하:(그는 샐쭉 웃었다.) 알겠습니다, 월백 낭자.
 
장신구점에 도착하면 호객 행위를 하는 주인장이 푸근한 미소를 띄며 당신들을 맞아주네요.
 
물건들을 살펴보면, 참 화려합니다. 나비, 꽃, 구름, 파도. ... 다양한 모양에 다양한 문양이 그려진 노리개들이 즐비합니다.
 
연월백:(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도령. 물론 제게 어울리지 않는 노리개가 있겠습니까만은, 그래도 가장 어울릴 만한 노리개는 무엇 같습니까?
 
노서하:(앞선 뻔뻔스런 발언에 조금 웃음이 샜는지도 모르겠다.) ... ... (살짝 속닥거린다.) 아직도 다 산다는 의견은 기각입니까?
 
연월백:(고개는 계속 앞으로 둔 채 당신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는다.) 제가 하도, 일편단심인 여자이지 않습니까?
 
노서하:읍. (소릴 내며 옆구릴 반대쪽으로 접었다가 이번엔 다시 소리를 높여 말했다.) 어디 한 번 볼까. ... ... (중얼거리며 노리개를 하나씩 들어 당신의 저고리쪽에 슬쩍 대보았다. 그 모습이 퍽 진중하고 심각해보였을까.) 색은 어떤 것이 좋습니까? 그대의 머리색이 어두운 편이니 밝은 것이 좋을듯 하긴 한데.
 
연월백:(덩달아 표정이 심각해준다. 당연히 제 노리개를 골라주는 일에 당신이 진지해져야 하고, 또 고심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당신의 호의와 배려, 애정이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까닭이겠지.) 그럼 밝은 걸로 할래요. 봄을 닮은 분홍색도 좋고, 개나리 색도 무척이나 좋은데. 아, 아니면 하늘색은 어떨까요? (들떠보인다.)
 
노서하:분홍색, 노란색, 하늘색이라. ... (중얼거리며 말한 색깔의 노리개들 중에서 괜찮아보이는 것을 골랐다. 분홍색과 노란색은 나비, 꽃이었고 하늘색은 아무래도. ... 파도쪽에서 골라야할텐데. 노서하는 갸웃거리다 곧 손을 뗐다.) 하늘색은 색은 좋지만 파도쪽에서밖에 안 보이는군. 나야, 상징적인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당신은 '파도'의 베필이었으니, 뭐. 나름의 영역표시기도 하겠지만. 당신은 그런 걸 퍽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후보에서 제하기로 한다.) 벚꽃과 나비로 장식된 것과 개나리 노리개 중 뭐가 좋습니까. (결국 두 개로 좁혀진 후보를 제 손에 놓고선 당신에게 보여준다. 노리개가 잘 보이도록 밑의 수술들을 손수 정리해 떨어트리는 섬세함도 잊지 않았다.)
 
연월백:어디어디, 봐봐요. (당신의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쏙 내밀어 노리개를 보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신나보이는 것이 분명한 미소가 입가에 내내 걸쳐져있다.) 흐으음. (고개를 한참이나 갸웃거리며 고심하는 듯 싶더니.) 이걸 어쩔까요, 도령? (비밀스럽게 속닥인다.) 벚꽃과 나비, 그리고 개나리 노리개. ... 둘 다 마음에 드는데. (웃음이 터졌다.) 아~. 어디 멋지고 늠름한 정혼자님이 떡하니 나타나셔서, 둘 다 사주시면 좋을텐데요. 그렇게 된다면 너무, 너무~ 너무~ 기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반짝이는 눈빛을 띄고 당신을 보았다.)
 
노서하:(정작 노서하는 노리개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거리는 당신을 보는데 말이다. 이래서야, 남들이 보기엔 각별한 정인사이로 보이겠다. 그래도 나름 특별한 사이기는 하다만. 노서하는 곧 자신을 바라보며 능청을 떠는 당신을 보고 졌단듯 한숨섞인 웃음을 뱉고, 주인에게 노리개 둘을 모두 넘겨주었다.) 내 정인께서 이것을 둘 다 마음에 들어 하신다 하니. 둘 다 주시오. (그리곤 당신에게 너스레 떨길.) 이걸로 그럼 내 점수 좀 땄나?
 
연월백:직접 달아주시기까지 한다면. 점수 좀 드리겠습니다. (양 팔의 소맷단을 그러잡고 손을 들어주었다. 어서 노리개를 달아달라는 것처럼 말이다.) 남은 하나는 노리개 하나가 낡아 해지고 나면 차고 다닐 예정이옵니다.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노서하:그렇다면 첫번째 노리개를 잘 골라야할텐데. ... ... (당신의 저고리단 끝을 매만지며 색을 가늠하듯 바라보다가, 시선만 들어올려 당신을 마주한다.) 뭘 먼저 하고싶은지도 안 알려줄겁니까?
 
연월백:왜 첫번째 것을 잘 골라야 합니까?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깜빡이다가.) 안 알려드릴겁니다. (진지한 표정을 그리려 해본다. 곧 실패하고 웃음짓지만 말이다.) 특별히 선물해주셨으니, 도령께서 원하는 것을 먼저 차야 수지에 맞지 않겠습니까. (무슨 논리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
 
노서하:먼저 해질 것을 고르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곧 주인에게 계산이 끝난 것을 전해받으면 노리개들을 하나씩 저고리에 대본다.) 이것으로 특별하다니. 앞으로 내가 줄 것의 내용물을 아시거든 낭자께서 깨나 놀라겠군, 그래. (곧 장난스런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한참이나 고민하며 이리저리 따져보다, 곧 노란색 저고리를 달아주었다.) 개나리가 마침 필 때니 이것을 지금 달고, ... 벚꽃이 장식된 것은 내년 봄에 달아드리도록 하리다. (만족스러운 답이냐는 듯 당신을 보며 웃는다.)
 
연월백:(노리개를 받아, 곧 개나리 모양의 노리개를 달아주는 모습에 환하게 웃음짓는다.) 어머, 저는 몇 해 동안은 계속 차고 다닐 생각이었습니다만은. ... 그리 말씀하시면, 남은 해 동안 이 노리개를 아껴줘야겠습니다. (실실 웃으며 노리개의 은색 술을 손으로 한참이나 매만져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곤.) 남은 노리개는 제가 가지고 있을까요?
 
노서하: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 노리개가 질려지면 어쩐단 말입니까? 이 분홍색 노리개가 불쌍하지도 않으신지. (괜한 소리를 늘어놓다가, 여전히 제 손에 남아있는 노리개를 손으로 쥐었다.) 아니. 이건 그럼 약속대로 내가 가지고 있다가 내년에 달아드리도록 하지요. 새해가 되고 새 꽃이 피거든, 그 날 다는 것으로. 먼저 나가 계시지요. 나는 주인장에게 이것들을 간직할만한 주머니라도 하나 달라고 하겠소.
 
연월백:... ... 먼저 내쫓으시는 겁니까? (괜히 뚱한 소리가 튀었다.)
 
노서하:(당신을 내려다보다 돌연 장난스런 목소리로 속삭인다.) 나랑 잠시 떨어져있는 것이 그리도 싫습니까?
 
연월백:(노려보았다. 고개를 휙 돌리곤.) ... 먼저 나가있겠습니다!
 
월백이 잽싸게 가게를 박차고 나서네요, 괜히 그것을 지켜보던 주인장이 웃음을 터트리곤 합니다.
 
"주머니만 만들면 되겠습니까?" 물음을 건네옵니다.
 
노서하:...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하다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것 말고도. ... (저가 필요한 것들을 몇 개 추가한다.)
 
... ...
 
생각만큼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추가해서 주문한 것들까지 포함한 주머니를 들고 나오면, 월백이 멍하게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퍼뜩 고개를 돌려 당신을 바라보았을까요. 두툼한 주머니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 뿐입니다.
 
연월백:연약한 낭자를 이리 홀로, 내버려 두시다니요? (슬쩍 주머니를 곁눈질했다.)
 
노서하:외로웠습니까? 재회의 포옹이라도? (능청스럽게 양 팔을 벌린다.)
 
연월백:징그러워, (중얼거리며 앞서 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 평소보다 걸음이 조금 느린 듯 하다.) 참. 그러고보면, 지난 주에 폐하께서 저를 부르신 일도 있었는데. 전, 아니지. 도령께선 알고 계시던 일이셨습니까?
 
노서하:... 폐하께서? (그 말을 듣자 금방 당신을 따라잡으며 이번엔 그가 먼저 손을 잡아챘다.) ... 혹 신경쓰이는 말이라도 들었습니까?
 
연월백:... ? (눈을 꿈뻑이며 잠시 당신을 돌아본다.) 별 일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와 저를 입궐하라 부르셨습니다만. ... 진짜 못 들으신 이야기인가 봅니다. 저에게 도령을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하시기까지 하셨는데. ... ... (눈을 굴린다.)
 
노서하:(다행히도 쓸데없는 말은 아니었군. 근데, 왜 이런 표정일까? 여전히 의문을 가진 얼굴이 참으로 신경쓰였다.) 그래서? (덧붙일 말을 해달란 의미로 되묻는다.)
 
연월백:... 그게 다이지 말입니다. (이번엔 살그머니 눈을 피했다.) 아니, 그냥요. 예전처럼 다정하셨는데. ... 그 직후에, 갑자기 혼례를 물리고, 간택령도 내리셔서. ... 놀랐단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진짜 별 거 아니었다.)
 
노서하:... 폐하께선 그럴수도 있을 나이니까. (정말 그런가? 원래 이런 일이 생기거든 전조증상이라도 있어야 하는 법인데. ... ... 그가 과연 전조증상을 목격한적이 있단말인가?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더는 자세히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혼례는 예정대로 진행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대가 아니면 누가 내 옆에 선단 말입니까?
 
연월백:... ... 그런 걸까요? (더 말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월백이 정말 납득하는 기색을 표하지 않고 있는 것은 쉬이 눈치챌 수 있는 일이었겠다. 조금 더 걷는 속도를 늦추며 이야기한다.) 낯간지러운 말도 잘 하십니다. 아무튼. ... (괜히 저 멀찍이 모여있는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보낸다.) 저도 다른 사내와 혼인하는 건 싫습니다. (한숨을 쉰다. 소름이 끼친다는 듯 어깨를 떨었다가, 슬쩍 시선을 건넨다.) 지금 그 말. 믿어도 되겠습니까?
 
노서하:(그래. 이 말에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우리 둘 다 마찬가지일테다. 그가 약속할 수 있는 것에는 늘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이것만큼은, 약속해줄 수 있었지. 그는 말끔히 웃으며 당신에게 제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지요. 약속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연월백:... ... (당신을 빤히 바라보다가, 새끼 손가락을 마주 내민다.) 다른 사내와 혼례를 치룰 바에야, 평생 독수공방하며 살 겁니다. 저. (당신이 좋아서라기보단 다른 남자들이 죄다 싫어서였지만, 다른 의미론 그만큼 당신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도 되지 않았을까? 멀뚱히 당신을 보고만 있었다.)
 
노서하:(그리곤, 그가 손가락을 걸며 위아래로 두어번 흔들었다.) 독수공방이라니. 그런 걱정일랑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그럼. (여러차례 당신에게 확신을 줄 말을 건넨다.) 또 가보고싶은 곳은 있습니까?
 
연월백:(흔들리던 손가락을 한참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풀고 금방 살펴보았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가르켰다. 히죽 웃는다.) 탈놀이를 하는 모양입니다만.
 
노서하:(그런 당신을 보며 따라하듯 웃었다.) 진귀한 광경이군. 놓칠수야 없지. (과장해 말하며 당신의 손을 붙잡고 후다닥 탈놀이 하는 쪽을 향해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연월백:... ... 잠깐! 천천히 가요, 천천히! (조금 당황이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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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게 벌려 선 백성들 사이에서 광대들이 탈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본래 탈극이라 하면 평민들이 높으신 분들을 희화화하여 다소 속된 내용을 공연하는 문화입니다만, 오늘은 저속한 내용이 아니라 창의 백성들이라면 누구나 즐긴 나머지 당대에는 약간 뻔한 내용이 된 <쌍옥루>입니다.
 
‘창’을 건국한 태조 대왕과 요절한 정인 신씨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지요.
 
<쌍옥루>의 내용을 모르는 창 백성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기왕 나왔으니 잠깐 보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릅니다.
 
연월백:(도착할 즈음에는 과장해서 숨이 벅찬 듯 했다. 밉지 않게 당신을 흘겨보다가,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앞 자리로 가고 싶은데. ...)
 
노서하:(노서하는 그런 당신의 바로 뒤에 찰싹 붙어있었다. 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몸을 살짝 굽혀 당신에게 속삭인다.) 앞으로 가고싶습니까?
 
연월백:... 목마라도 태워준다, 그런 소리를 하실 거라면 사양입니다. (고개를 쭉 빼며 발뒷꿈치를 열심히 들어보았다.)
 
노서하:... (그런 생각은 아니었는데.) 혹시 해주길 바랐습니까? (괜한 소리를 뱉는다.)
 
연월백:... ... ... ... (찰싹!)
그래서, 어떻게 앞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노서하:(읍)
사이를 파고드는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 않겠습니까? (입을 살살 문지른다.) 예를 들어. ... 저기? (인파 사이를 콕 집어 말한다.)
 
연월백:와. (붙잡은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바로 걸음을 옮긴다.) 잠시만 비켜주세요~. (끙끙 지나가서, 겨우겨우 앞자리를 사수할 수 있었다.)
 
겨우 앞자리를 사수하자마자 이렇게 딱 맞을 때가! <쌍옥루>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이 보입니다.
 
<쌍옥루>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
 
전 왕조 말기, 명망 높은 수군통제사였던 태조 대왕이 폐주의 폭정을 견디다 못해 여러 차례 명을 어기고 백성들을 구출했습니다.
 
폐주가 보낸 암살 위협에서도 벗어나 수도로 입성할 때쯤에는 이미 옥새 없이도 왕이라 불렸으나 정작 태조 대왕을 기다리던 신씨는 폐주를 섬기던 간신의 음모에 빠져 목숨을 잃은 뒤였습니다.
 
태조 대왕을 그리다 심장이 돌덩이처럼 굳어 버린 신씨를 화장하여 바다에 뿌렸는데, 흰 거품이 발치로 날개처럼 일어 그의 발목을 적시더라는 장면에서는 이미 마르고 닳도록 아는 내용이더라도 배우들의 연기가 좋아 훌쩍이는 자도 몇 있었습니다.
 
태조 대왕이 그 파도꼴을 따 왕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보물을 만들었다는 전설도 백성들 사이에서는 유명하지요.
 
완결부에서 태조 대왕이 자신을 섬기는 충신에게 묻기를,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더냐?" 하니.
 
충신이 "사람의 마음인가 합니다." 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보입니다.
 
그에 월백이 당신의 손을 붙잡아 살짝 당기더니 묻습니다.
 
연월백:... ...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더냐? (흉내내며 웃는다.)
 
노서하:... 사람의 마음인가 합니다. (레파토리같은 말을 반복하며 따라 웃었다.)
 
연월백:... 그런 거 말고. 진짜 전하가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째려보는 척을 했다.)
 
노서하:흠. ... (제게 질문이 들어오자 그제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 같았다.) 마음이지. (그리고 대답은 영 재미가 없다.)
정확히는. ...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지만.
그럼, 그대가 생각하는 깊은 것은? (이번엔 당신에게 되묻는다.)
 
연월백: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입니까? (눈을 깜빡이며 뜻을 헤아려보려 하지만, 그냥 그렇구나. ... 하고 말게 된다. 음. 그렇구나.) 대체 얼마나 깊게 다른 사람을 생각해보셨길래 그러십니까. (놀리듯 말하다가.)
음. ... ... (돌아온 질문에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가장 깊은 것이라 하면. ... 아무래도 두려움이지 않겠습니까? (뜻 모를 소리를 했다.)
 
노서하:어떤 생각이든간에. (대답을 대충 갈무리했다.) 두려움? (이번엔 그가 되물었다.) ... ... 그럼 그대는 그토록 두려워한 무언가가 있었단 소리인가?
 
연월백:... 궁금한데. (흘리듯 이야기한다. 고개를 다시 앞으로 되돌리고는 말한다.) 비단 제 얘기 뿐이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을 통틀어 말한 것일 뿐일진대. ... 어디에나 있으니, 언제든지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니덥니까.
 
노서하:... 흠. 그렇군. (그리고 그는 이런 걸 넘어가지 않고 꼭 콕 집어 말하는 편이었다. 사람을 궁지에 몰기라도 하듯말이다.) 그래서, 그대의 것은? (자연스럽게 물었다.)
 
연월백:... 제 것? 무엇 말입니까? (딴청을 피웠다.)
 
노서하:...
그대의.
두려움.
(콕 집는다.)
 
연월백:... 탈놀이가 끝났네요? 이만 다른 곳으로 갈까요?
 
노서하:...연월백.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고 뚝 걸음을 멈췄다. 입을 열기 전까진 움직이지 않겠단 심산이었다.)
... 좋아. 그럼 서로의 것을 공유하기로 하지. 누구부터 시작할텐가? 그대부터?
 
연월백:(탁, 멈춘 손에 앞으로 나아가려던 몸이 걸려 멈춘다. 불만스럽게 당신을 바라보지만, 살며시 눈을 피하고 마는 것이다.)
저. 이런 분위기 싫어하는데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도령께선 낯간지럽지도 않으십니까?
 
노서하:아. 먼저는 좀 그런가? 그럼 나부터 하지. 음. ... (당신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별 게 아니라는 듯 술술 말을 잇기 시작했다.) 난 아직도 내 이복누이의 생사가 두려워. 그가 살아있다고 해도, 아니라고 해도 내게 좋을 것이 없으니까. 그리고 이런 내 생각이 누군가에게 들키는 것도 아주 두렵다. 누가 날 이복누이의 실종과 관련된 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정없고 무심한 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싫으니까. (술술 뱉은 것 치곤 꽤 어두운 내용이었다.) 어때. 이정도면 좀 말 할 생각이 드나?
 
연월백:도, (무어라 제지하기도 전에 술술 말하는 당신을 흘겨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을 들으면 표정이 다소 아연해지더니. ...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마는 것이다. 월백이 속으로 앓는 소리를 삼켰다. ...) ... ... 들키는 게 두렵다 하시면서. 저에게는 얘기 하십니까? (괜히 투덜거려볼 뿐이다. 실종과 관련됐을 리가 없잖은가. 정없고, 무심한 사람이라고? 자신과 함께 있는 당신은 매사 다정했는데. ... 맞잡은 손을 자그맣게 꼼지락거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월백이 겨우내 입을 열어 말했다.) ... ... 게 두렵습니다. (목소리가 작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노서하:... 그대는 내가 어떤 말을 하던 허풍이라고 믿고 아무한테도 전하지 않을테니까. (사실 이 발언은 장난에 가깝고, 그래. 당신이 가장 믿음직스럽기 때문이겠지. 그는 그런 낯간지런 말은 굳이 입밖에 담지 않았다. 당신이 멋쩍어하곤 했으니까. 꼼질거리며 애써 말하는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노서하는 결국 한걸음 가까이 붙어 다시 한 번 묻는다.) 뭐라고? 잘 들리지 않았다.
 
연월백:...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는 당신을 바라보다 휙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약간 붉혔을까. 맞잡았던 손을 놓고 황급히 머리를 정리하는 척을 했다. 뚱한 표정.) ... ... 다치는 게, 싫다고 했습니다.
 
노서하:(그 말에 몇 번 눈을 꿈뻑거린다.) ... 그대가, ... 다칠 일이 뭐가 있다고? (그야, 그럴것이. 전쟁이 갑자기 일어날 일은 없었고. ... 당신은 귀한 집 규수지 않았나. 다칠만한 일은 하지 않을 게 뻔한데.)
 
연월백:... ... 예전에 있었습니다. (쥐꼬리만한 목소리로 답했다. 다시 당신의 손을 잡고 그제서야 걸음을 옮긴다.) 아무튼, 아직 갈 곳은 많지 말입니다. (북적대는 인파를 힘겹게 해치며 걸어간다.)
 
노서하:... (예전? 예전 일까지 합해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단 말인가? 기억을 잘 되짚는다. 그러다 곧 당신의 손에 끌려 걸음을 옮기지만. 몇발자국 앞선 당신의 곁에 훌쩍 다가가 붙는다.) 아무튼. 그렇담 내 그대가 절대 다치지 않도록 하지요.
 
연월백:매번 붙어다닐 것도 아니고,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 ... 어? (황급히 뒤돌아본다.)
 
월백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면, 당장 인파 사이로 뛰쳐나가는 어느, 검은 그림자가 보입니다.
 
당신은 월백이 놀란 까닭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월백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한 움큼 잘라 갔습니다!
 
연월백:아, 아니, 그. ... ...
... ... 저기요! (냅다 뒤쫓아 달렸다!)
 
서하, 그런 월백을 쫓나요?
 
노서하:아아니 저게 (황당하긴 했지만 일단 따라 쫓았다.) 연월백!
 
월백, 민첩 판정.
 
연월백:
민첩
기준치: 55/27/11
굴림: 74
판정결과: 실패
아, 아이~, 아. ... ... ! 아, 씨, (급하게 숨을 고르며 자리에 쭈그려앉았다.)
아, ... ... 왜이리 숨이 차지.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인영을 놓친 곳만 억울하게 바라본다.)
 
노서하:아니, (급하게 쫓아왔다.) 그렇게 혼자 가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가슴께를 붙잡은 당신의 어깨를 안았다가,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쫓을 함께 눈으로 좇았다.) ... ... 아무튼. 더,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 (옅은 한숨을 뱉으며 당신의 몸이나 얼굴 이곳저곳을 살폈다.)
 
연월백:아니, 아. ... 하아. (당신이 제 이곳저곳을 살펴본들 월백의 시선은 줄곧 그 자리만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억울함과 옅은 서러움에 발만 굴렀다.) 아니, 왜, ... ... (그래. 월백은 서러워졌다!) 왜 남의 머리카락을. ... ...
 
노서하:... ... (달랠 길이 없었다. ... 그저 머리를 열심히 쓸어주고, 안아주고,, 등을 도닥거려주고, 괜찮다 괜찮다 주문처럼 중얼거릴 뿐이었다.)
 
연월백:(기껏 당신 기분이나 풀어주려고 데리고 나온 나들이었는데, 제 기분이 나빠지면 어쩌잔 말인가. 그래. 월백은 나름. ... 멘탈이 강했다. 당신의 위로에 점차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 ... 돌아가면 머리부터 다듬을래요. (대신 짙은 복수심이 남은 듯 하다.)
(당신의 품에 안겨 서러움에 다소 붉어진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았다. 눈가를 손등으로 쓱쓱 닦다가.) 기분 전환 하고 싶은데. ... 아직 시간 돼요?
 
노서하:그럼, 그럼. (달래듯한 목소리로 당신의 등을 도닥거리다가, 슥슥 눈가를 닦는 손을 치우곤 제 손으로 살살 눈가를 몇 번 쓸어주었다.) 되지.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답한다.) 저녁까지 보내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연월백:(눈가를 쓸어주는 손길에 표정이 다시 서글퍼지다 말았다. 아냐. 정신 차리자. 혼자 고개를 젓고는.) ... ... 그럼 다시 가요. 걷다보면 좀 나아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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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점 치시오!’하고 등에 철학관 깃발을 꽂은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홍보하는 소년이 있습니다.
 
행인 몇이 ‘저 집이 그리 용하다더라’ 하는 이야기도 들리고요.
 
내내 풀 죽어있던 월백이 그 목소리에 조금 기운을 차리며 묻네요.
 
연월백:... 저희도 재미 삼아 궁합이나 볼까요?
 
노서하:(그가 말끔히 웃었다.) 자신 있나?
 
연월백:올해의 운수나 보러 가도 좋고. 분명 궁합을 본다면, 썩 좋게만은 안 나올 것 같아서. (흥.)
 
노서하:... (흠.) 나는 미신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 글쎄. 궁합이라. ... 좀 궁금하긴 하군. (당신의 손을 살짝 잡아 끌었다.) 들어갈까?
 
연월백:저는 올해의 운.수.가 궁금해서 가는 건데요? (악센트를 주며 살짝 버티다가, 못이기겠다는 것처럼 끌려간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다 들어가게 된 철학관은 아무래도 나름대로 주역 공부를 했다는 사람이 주인이어서인지 일반 점집과는 달라,
 
귀기 서린 물건도 없고 무당집처럼 알록달록한 천끈도 없이 약방이나 서책방처럼 정갈한 가정집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사람 하나 없는 문으로 들어서면 대뜸 마흔쯤 되었을까 싶은 남자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큰절을 올립니다.
 
그런데 그 횟수가 한 번에서 그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안경과 더불어 가리개 좁은 것이나마 갓까지 눌러 써 서생 같은 남자는 사배를 올렸습니다.
 
임금과 중전, 그리고 태자에게만 올릴 수 있는 네 번의 절 말입니다.
 
남자: 이번 주간, 저의 점괘가 상서롭고 길하여 필시 귀인을 손님으로 맞이할 시기겠기에. ...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차분히 설명했다.)
동쪽으로 난 문과 서쪽으로 난 문이 하나씩 있는데, 동쪽 문으로 어깨에 푸른 파도와 용의 기상을 걸머진 분이 들어오시니. 나라의 대들보이시겠거니 짐작하였습니다. ...
 
어디서 미리 두 사람의 일정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은 언행인데, 생각해 보면 오늘의 나들이는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니 이 자가 당신의 방문을 어떻게 들었겠습니까?
 
용하다는 소문이, 아무래도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노서하:... (하지만 그는 미신을 믿지 않으므로, 미간을 찌푸리고 보았다. ... 부러 티를 내려고 하진 않았지만.) ... 그래. 그대가 용하다 하던데. (그는 우선 월백을 자리에 앉혔다.) 일단, 앉지. 뭘 말하려는지 궁금해지는군.
 
안으로 들어서서 월백을 먼저 앉히면, 남자는 반상 반대편에 무릎을 꿇고 앉는군요.
 
남자: 해서. ... 무엇 먼저 말씀하면 될는지요. (눈을 내려 마주치지 않으며 말했다.)
 
연월백:(흘끔, 서하를 바라보다가. ...) 사주를 풀어보는 것도 나쁘지야 않겠죠? (어디서 들은 건 많다.)
 
노서하:(월백의 물음에 옅게 웃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이런 곳에 온 적이 없어 무지하니, 네가 궁금한 것이 있거든 무엇이라도 물어보거라. 아. 궁합이란 것은 아주 관심이 많으니 잘 대답해야 할걸세. (미묘한 경고 비스무리한 것을 던진다.)
 
남자: (그저 허허롭게 웃는다.) 그래도 필요한 것은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태어난 날짜와, 시각을 알려주신다면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연월백:(진짜 본격적이네. 속으로 생각하고는 먼저 입을 연다.) 저야. ... 2월에, 열 두번째 날에 태어났지요. 태어난 시각은 언제더라? 자시였던 것 같네요.
(당신을 본다.) 전하께서는?
 
노서하:(마찬가지로 곰곰 생각해보더니,) 4월 첫째 날. ... 술시였던 것 같군.
 
남자: 우선, 태자비 되실 분의 사주부터 풀이하자면. ... ... 이상하게 물이 범람하던 시기에 태어나셔서, 그 범람이 잦아들게 했던 태양의 기운이 드신 듯 합니다.
영민하시고, 사람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것을 잘 하시는 군요. 자라나신 곳은 원래 아주 뭍이시라 바라시는 뜻 전부 펼치시는대로 운수대통한 삶을 사실 예정이셨으나, ……이사를 하신 모양이십니다? 조금 이 운수라는 것이 꼬인 듯 한데… 아니, 아닙니다. (불시에 안색이 묘해진다. 입술을 달싹거리다 혼자 고개를 젓는다.)
 
연월백:... ... 대박. 어머니께서, 제가 태어날 즘에 홍수가 들었다고 했거든요. (당신의 팔을 무심코 껴안았다.)
 
노서하:... (그는 짧게 웃음지었지만 안색이 묘해진 순간을 놓치진 않았다. 순간 눈빛이 날카롭다.) ... ... 한데? ... 왜 뒷말이 없느냐? (대답을 요구한다.)
 
남자: 아직은 확신할 수 없어,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전하의 사주를 풀어보자면. ...
... 전하께서는 달月의 기운을 타고나 과연 동궁의 주인이 되실 분이신데, 성정은 사실… 썩 바다王에 맞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렇다고 파도에만 머무르실 명은 아니시고, 무엇보다 머잖아. 스스로 바다가 되고자 하는 계기를 얻게 되실 것 같습니다.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두 분의 궁합도 필요하십니까? (장난스럽게 웃는다.)
 
연월백:... (서하를 흘끔거린다. 몸을 기울여 속닥인다.) 썩 바다에 맞으시는 분은 아니시래요. (장난스럽다.)
 
노서하:몰랐느냐? 난 알고 있었는데. (꽤 심각한 주제긴 했지만 가볍게 넙기며 말을 있는다.) ... 그래.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았지. 우리 궁합이 어떻던가? 앞서 말 했지만 대답을 아주 잘 해야할걸세.
 
연월백:(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남자: 우선. ... 두 분께선 아주. ... 천생연분이라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첫 시작은 순조롭다.)
본디 하늘의 이치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달이 지면 해가 떠오르듯, 두 분께선 서로를 아주 보완해주실 관계라는 이야기입니다.
진솔하게 말씀드리자면 전하께선… 원래 사람 간 인연이라는 것이……, 잘 형성되지 않으실 분이셨습니다만. ... 우연찮게 맺어진 인연이 있으십니다. 그것이 태자비께서와 연관이 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인연이란 것이, 몹시도 괴이하고 신묘로워. 두 분의 명을 상당수 비튼 것이 보입니다.
 
연월백:(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를 들었다. ...)
 
노서하:... 명? (헛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열하다가 꺼내는 것이 다른것도 아닌 '명'이라니.) ... 얘기가 좀 무거워지는군.
 
남자: ... ... 참! 그러고보니,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좀, 갑자기 말을 떠올리기 일쑤라. (멋쩍게 뒷목을 쓸어내렸다.)
전하께 드릴 말씀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초년운이 평탄하신데, 성년 무렵에 크게 액운이 끼어 있습니다. 가족이나 친지에게 연달아 흉수가 들 것 같기 때문에. ... 올해 봄에는 특히 산山과 합이 몹시 나쁘다고 풀이되는데, 곧이곧대로 산에 가지 말라는 내용이라기보단 그늘진 곳에 오래 숨은 것과는 합이 잘 맞지 않는다는 쪽으로 해석되는 수입니다. 다만… 원체 귀하신 분이시라, (조금 웃었다. 금방 표정이 좋지 못해졌지만 말이다.) 바다의 너른 기운이 전하를 지켜주는 형국이니…. 큰물을 가까이 두시면 조금이나마 나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주저한다.)
모으고 흩어짐이 일정치 못하니, 얻고 다시 잃을 운수입니다. 금년의 운수는 새 일을 도모해봄이 바람직하군요. 목마른 말이 산에 올랐는데 샘이 전혀 보이지 않아 애 타는 격이며, 하늘이 차고 땅이 희니 외로운 새가 그 안을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외부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 ... 태자비께 올릴 만한 말씀이온데.
... ...
 
별안간 남자가 입술을 텁 닫아버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계속해 냅뒀다간 입을 스스로 열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로군요.
 
서하, 대인기능 판정을 통해 숨긴 것을 말하도록 유도해봅시다.
 
노서하:... ... 얘기를 '잘' 하라는 말이 잘 전달이 안 된 모양이지?
위협
기준치: 70/35/14
굴림: 56
판정결과: 보통 성공
 
당신의 음성에 남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느리게 말문을 뗍니다.
 
남자: 우선… 연초부터 이익은 없더라도 풀리기야 하겠습니다. 하는 일에 무척이나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망령되이 움직이게 되면 하는 일을 이루기도 전에 실패하기 쉬우니, (월백의 눈을 진지하게 마주한다.)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허나……. (살짝 고개를 떨구다 말며 다시 눈을 바라본다.) 그것이 옳은 것인지, 옳지 않은 것인지 헷갈릴만한 상태시라면. 하고싶은 대로 하신다면 그것이 맞는 길이 될 것이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곤 그제서야 말을 꺼낸다.) 태자비께선 올해의 운이 굉장히 나쁘십니다. 큰 살이 꼈으므로 반드시 방비가 필요하신데, 이런 말씀. 다시 한 번 올리기 송구스러우나, ... 삿된 기운이 태자비 전하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식은땀이 흘렀다.) 선대의 원한과도 얽힌 음모로 보입니다. 전하와 마찬가지로 큰물 기운을 보하시면 도움이 되겠으나, 본시 살기란 것은 물살을 꿰뚫고 날아가는 법인지라. ...
(뒤늦게 말을 붙였다.) 그러나 본디 점괘란 것이 이렇게 꿰어 보면 길하고, 저렇게 꿰어 보면 흉한 것이니 말입니다.
방비를 견고히 하십시오. 옥체에 해가 끼쳐지지 아니하도록 말씀입니다. ... (눈치를 살피다 고개를 숙였다.)
 
노서하:헛소리! (쾅!! 노서하가 소리를 지르며 책상을 내리쳤다. 그의 눈 곳곳에 살기가 베었다. 그래, 물살을 꿰뚫고 날아가는 살기처럼. ...) 네 놈이 지금 감히 세간에서 떠들어대는 '용하다'란 말에 취해 내 앞에서 어불성설을 퍼뜨리며 혓바닥을 놀리는 것이냐?
 
남자: ... ... 더 할 말이 없사옵니다, 전하. (고개를 조아렸다.)
 
연월백:(그러나 그 소리에 놀란 것은 남자보다도, 월백이 우선 그러했다. 순식간에 험악해진 분위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굴렸을까.) ... ... 그, (월백이 목격할 일 없었던 지금, 당신의 모습은, 사실, 조금. ...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 조심히 당신의 옷자락을 붙잡는다.) ... ... ... 전하.
점괘란 것이. ... 그러하다지 않습니까. (입꼬리를 끌어올려본다.) 용하다고 말했다 해도, 결국. 그. ... 그리 용하지는 못했던 모양이지요. (손이 살짝 떨렸다.)
 
노서하:(제 옷자락을 붙잡는 손길에 그제야 고개를 돌려 당신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입술을 깨물었던가. 그는 스스로를 자책하듯 입을 열었다.) ... ... 괜히 왔다. 헛소리만 늘어놓을 줄 알았다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떠는 손을 잡는 손길은 평소 당신이 겪고, 봐온 '그' 노서하가 맞았다.) 가자꾸나. 날이 많이 늦었다. 데려다주마.
 
연월백:(하지만 당장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성노한 당신을 끌고 일어나 철학관을 나오려 문틀을 밟는데, 순간,)
... ... 아! (순간 심장께에 강한 통증이 스쳐지나간다. 전신에 힘이 풀려 휘청거린다.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이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노서하:...! (본능적으로 당신의 몸을 잡아채 안았으나, 그 얼굴에는 당혹감이 만연하게 드러나있었다. 현재의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에도 그에겐 한계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을 묻듯, 그 불똥은 뒤에 앉은 남자에게로 향했다.) ... ... 설마, 네놈이... (그의 목소리가 그르렁거리듯 했다.)
 
연월백:... 전하! 아닙니다, 그. ... 잠깐, 급체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지금은 괜찮습니다! (저를 잡아채 안는 당신의 옷을 황급히 붙잡았다.) 제가 착각한 것 같습니다. 고정하세요. ... (당신의 뺨을 붙잡아 제게로 돌리며 눈을 맞춘다.)
 
노서하:... ... (제 뺨을 억지로 돌리는 당신의 손을 밀어낼수도, 거부할수도 없다. 노서하는 괜히 입술만 짓씹다가, 곧 허리를 숙이더니 당신의 다리 밑에 팔을 넣어 번쩍, 하고 당신을 들어올렸다.) 우선 당장은 의원에라도 가서 조금이라도 쉬는 게 좋겠다. (그의 발걸음이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
 
연월백:아니, 잠깐. ... 꺅! (순식간에 안긴다. 무심코 당신의 목을 껴안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진짜 괜찮습니다! 이거 내려주세요! ... ... 전하! (둘 다 침착하지 못하니, 상황이 나아질 일이 없다. 월백은 숨을 가다듬고 당신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부딪히듯 맞댄다. ... 아야.) 제 목소리. 듣고 계십니까?
 
노서하:윽, (소릴 내며 그제야 노서하가 당신을 바로 보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게, 대체 무슨 짓이냐고 묻는 것 같기도 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제 손을 놓거나 당신을 내려주는 일은 없었다.) 내 오늘 네 어리광을 모두 받아주겠으나, 이것만큼은 도저히 양보 못하겠다. ... 그러니까 좀 얌전히 있거라, 힘 빼지 말고. (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강요섞인 화법이었다.)
 
연월백:(하지만 이번만큼은 월백도 손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 미신같은 건 믿지 않으신다 하셨지 않습니까. 괜한 점쟁이의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모습은 전하답지 않습니다. (눈썹 사이를 좁혔다.) 조금 진정하세요. 전하답지 않습니다.
(강조하듯 연달아 말했다.)
 
노서하:네가 믿으니까 문제인 게 아니더냐! (그가 다시 한 번 소리를 높인다. 물론, 점쟁이를 대할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네가 몸이 아플 정도로 이리 마음을 쓰는데 내가 어찌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그의 시선에 옅은 안타까움까지 엿보였을까.) 나 답지 않다 말할거라면 의원에 가서 내 진정하게 약이라도 지어 먹도록 하마. 그러니 이건 절대로 양보 못 한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다시 걸었다. 이번엔 그래도 당신이 안정감을 느낄만큼의 속도기야 했다.) ... 다시 오거든 내 그 놈의 목을 쳐버릴 것이다. (농담같지 않은 소리를 중얼거리기도했고.)
 
연월백:(높아지는 언성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당신을 조금, 밉게 바라보는 것도 같았다. 곧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안타까움이 스쳐지나갈 정도가 되면 고개를 푹 숙이고는 했지만 말이다.) ... 마음을 써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냥. 오늘따라 체력이 평소같지 않은 듯 한 것이. ... 고뿔 기운이라도 있는 건가, 돌아가면 약탕을 지어 먹으려고 했습니다.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린다.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또한, 억울함이나 서러움이 섞여있다.) 그런데. 자꾸 저한테 화내기만 하실 겁니까? ... 전하와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 ... (입술을 꾹 깨물었다.)
 
노서하:그러니 더더욱 네 체력에 신경써야지 않겠느냐. (답지않다. 당신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을 안고있는 그는 지금 누가봐도 초조하고 불안해서, 금방 일을 칠 것 같지 않은가. 그런 건 그답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였다.) ... 가고 싶은 곳? (그 얘기에 잠깐 흔들렸다.) ... ... 꼭, ... 지금이어야 하느냐? 조금 있다가는? ... ... 의원에 가서 맥이라도 짚어보면 안 되는 것이야? (간절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장난스레 말했던 '구애'의 장면이 지금이라면, 딱이라고 표할정도로.)
 
연월백:(이거다! 월백은 당신의 흔들림을 곧장 눈치채곤, 아닌 척 입을 열었다.) 곧 해 질 녘이지 않습니까. 그때 즈음에, 꼭. ... 노을 지는 바닷가를, 전하와 함께 구경하고 싶었는데. 지금 가도 늦을지 모르는데. ... 이 때 아니면 또 언제 뵐 수 있단 말입니까. (월백이 모르는 척 당신의 품에 자세를 고치는 듯 머리를 부볐다. 당신이 간절한 만큼 월백도 간절했다. 왜냐면, 지금의 몸상태는 정말. ... 평소와 똑같이 건강할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의원을 가서, 뭐? 어떻게. ... 자신이 얼마나 건강한지 검진이라도 받고 오라는 말인가? 월백이 애달픈 눈으로 당신을 보았다.)
 
노서하:... ... ... 지금. 반드시. 말이냐? (그는 당신의 계획대로 아주, 열심히 흔들리고 있었다. 당장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자니 몸상태가 염려됐고, 그렇다고 그냥 의원으로 가자니 '다음'을 기약할 시간이 제게 없었다. 그는. ... 아주 여러가지로 바빴으니까.) ... ... (결국 그는 한참이나 당신을 바라보며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 ... 아주, 잠깐이다. (백기를 들고 만다.)
 
연월백:... ... 제가 말을 빌리는 곳을 압니다. 그러니, 이제.
... 내려주시렵니까?
 
노서하:... ...
말로 설명하거라.
 
연월백:(표정이 찌푸려졌다.)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르켰다. 멀지 않은 곳이다.)
 
경망스럽게 월백을 안아든 채 역참처럼 말 몇 마리를 따로 데리고 있는 곳으로 향한 당신은 그제서야 월백을 품에서 내려주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월백의 몸상태를 고려한 당신이 말도 함께 타기로 했지만 말입니다.
 
해변까지 가기 위해서, 승마 판정이 필요합니다.
 
노서하:
승마
기준치: 70/35/14
굴림: 1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x
 
어느덧 해 저물 무렵, 말은 해변 근처 마굿간에 잠시 매어 놓고 두 사람은 천천히 걷기 시작합니다.
 
소담스럽고 높이 낮은 기암절벽 사이에 좁다랗게 난 백사장이 보입니다.
 
모래사장으로 가는 길에는 유채꽃밭으로 뒤덮인 갯바위가 줄을 지어 섰습니다.
 
오솔길 위로 잘 여문 산수유와 매화가 명주실처럼 나부끼며 떨어지니, 한삼 비단신 신은 발끝으로 능라 밟듯 사뿐사뿐 움직이면 가는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고 지나갑니다.
 
해변가를 걸어가며 월백이 시조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獨倚山窓夜色寒
 
산창 홀로 기대서니 밤기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매화나무 가지 끝에 둥근 달 떠오르누나
 
不須更喚微風至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 이니
 
自有淸香滿院間
 
맑은 향 저절로 뜨락에 가득하여라
 
연월백:(가만 해에 물들어버린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꼭 보여드리고 싶었다구요.
 
노서하:(당신을 뒤따라 느린 걸음으로 걷다 물음에 답한다.) - 아름답구나. (그것이 누굴 향한 말인지 과연 당신이 알런지. 다만 그의 입술 끝에는 분명 미소가 걸려있었다.)
 
연월백:(천천히 걸음이 멈췄다. 당신을 뒤돌아본다.) ... ... 아까는 왜, 그러셨습니까?
 
노서하:무얼 말이냐? (정말 무엇을 묻는지 모르겠단듯 그는 여유로운 느린 걸음으로 당신을 향해 걸었다. 어느순간 발은 당신을 따라잡아 이번엔 그가 조금 앞서 걸었다.)
 
연월백:... (다시 발걸음을 뗀다. 당신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평소답지 않게 구신 것 말입니다. (손을 뻗어 당신의 손을 붙잡았다.) 역시. 일이 과중하셨던 것이 맞았지요? 어떻게, 사람 숨 돌릴 틈도 안 준단 말입니까. (다소 엉뚱한 이유를 가져다 붙인다.)
 
노서하:(당신이 제 손을 붙잡자, 그제서야 그가 뒤돌아 잡힌 손을 한 번, 그리고 당신을 한 번 보았다.) ... 월백아. (목소리가 답잖게 조금 무거웠다.) ... ... 아무래도 나는 네게 말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두려운 모양이다. (마찬가지로 엉뚱한것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다.)
 
연월백:(무거운 것을 느꼈으나, 느끼지 못한 척 평상시처럼 밝게 답한다.) 그렇다면요? (... 이런 분위기, 진짜 싫은데. 당신이 눈치껏 제 너스레에 맞춰주길 바랄 뿐이다.) ... 설마하니, 이젠 황제가 되는 것이 두렵다고 하실 것은 아니겠지요?
 
노서하:(그가 당신이 이런 분위기를 싫어하는 걸 모를리 없었다. 혹시 부러 장난이라도 치려는 걸까? 하지만 장난이라고 보기에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차분해보였다. 맞잡은 손에 살며시 힘을 준다.) ... 널 잃는 것이 두렵다. (마치 연심을 고백하기라도 하듯한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 내 입으로 미신은 믿지 않는다 했지만, 그 점쟁이란 작자가 너에 대해 말할 때 어찌나 겁이 덜컥 나던지. (제 모습이 웃기기라도 하다는 양 숨소리같은 웃음소릴 냈다.) 그 순간 왕이니, 업이니, 의무니 아무 상관없으니. ... 널 데려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거든 믿겠느냐? (물으며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일말의 장난기라도 있었던가. 하지만 노서하는 곧 시선을 거두며 다시 바다 쪽을 보았다.) 왕이 되거든 나는 폭군이려는 모양이다. (그제야 농같은 소리를 흘리며 딴청을 피웠다.)
 
연월백:(차분한 표정에 월백의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한다. 다만, 설렘 따위의 이름을 붙일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당신과 자신의 관계가 변해버린다는, 일종의 '불안'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널 잃는 것이 두렵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월백은 멍하니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난데없이 을 다 하시고. ... ... (그래. 월백은 그것을 하나의 농담으로 듣고 싶었다. 마지막 말만이 아닌, 당신의 차분한 표정이나 진중한 목소리, 덜컥 흘리는 숨과 제 손을 붙잡는 온기 전부가.) 뭐, 하기사. 저도 전하께서 그런 점괘를 들으셨다 생각하면, 심장이 떨어지기야 합니다만은. (태연하게 시선을 바다로 돌리는 척 하지만 심장이 너무, 크게 뛰고 있었다. 숨이 조금 막혔다.) ... 다 미신입니다. 지금 와서 보니, 저보다도 놀란 것이 전하십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저녁이 오기 전에 일찍, 전하를 보내드리는 것이었는데. (별 것 아닐 것이다.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분명 그렇다. 그래. 나도 그렇게 놀랐겠지. 다짜고짜 점쟁이의 멱살을 틀어잡았을지도 모르겠다. ... 그런 상상을 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노서하:(정말로 이건 별 것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 미묘한 감각은 시작조차 하지 못한채 끝만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지. 진지하게 목소리까지 깔아가며 이야기할 때는 언제고, 이제와 그는 태연하게 웃고있었다. 당신의 속도 모르고.) 됐다. 네 말대로 쉬어야 할 필요가 있기도 했고. 오랜만에 얼굴도 좀 보고싶었고. (지나가는 말처럼 하고서 다시금 천천히 손을 잡은 채 걸었다.) 여튼 그러하니. 이제 네가 평생 내가 폭군이 되지 않게 잘 감시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평생을 논하는 목소리는 가벼웠다.)
 
연월백:(태연하게 웃는 당신을 보며 월백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삼킨다. 그래. 봐, 역시 착각이었잖아. 다시금 함께 걷는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 삐걱대던 감정이 원래대로 맞물렸다. 잡은 손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폭군의 끝은 대개 좋지 않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저는. ... 잠 잘 때 만큼은 편히 잠들고 싶습니다. (조금 투덜거리는 음성을 흘리곤, 당신에게 긴 시선을 주었다.) '평생' 말입니까? (목소리가,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에 언뜻 파묻히다시피 했다.)
 
노서하:그러니 잘 감시해야한다는 것이지 않느냐? 내가 다른 이들은 몰라도 네 말 하나는 잘 들으니 말이다. 지금도 보거라, 결국은 네 고집대로 이 곳에 오지 않았더냐? (마찬가지로 투덜거리는 음성을 냈다. 하지만 곧 파도소리에 들리지 않은 목소리를 자세히 들으려는 듯, 혹은 그저 얼굴이 보고싶은건지. 그가 뒤돌아 당신을 보았다.) 그래, (그는 정말이지, 당신의 말이라면 놓치지 않았다.) 평생 내 곁에서 말이다. (그가 웃었고, 손을 쥐었고, 우리는 파도 앞에 서있었다. 당장 들리는 것이 심장소리인지, 파도소리인지 알지 못할 만큼 곳곳에 소리가 퍼졌다. 파도가 발끝까지 몰려왔다.)
참. 그러고보니 네게 줄게 있다. (말하며 그는 품을 뒤적거려, 아까 노리개를 팔던 가게에서 받은 주머니를 꺼내 당신에게 내밀었다.) 직접 열어볼테냐? (여전히 입가에 미소가 폈다.)
 
연월백:(노을의 붉음이 저를 돌아보는 당신의 뒤로 번져 눈에 스며들었다. 조금은 찬 춘삼월의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을 간지럽히고 지나가, 월백은 멍하게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당신의 눈을 마주보았다. ... ... 어라? 알 수 없는 감정이 울렁거렸다. 당신은 웃었고, 우리는 손을 쥔 채 파도 앞에 있었다. 여린 파도가 발끝에 닿아올 듯 말 듯 살랑거리매, 그 웃음소리가 어김없이 발목을 휘감아 잡아오는지라. 월백은 이름 모를 감정에 하염없이 휘청거리고 있어야만 했다.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서 제 잔소리를 그리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노을빛 때문일까? 월백의 뺨이 다소 붉어보였다.) 앞으로는 아끼지 않고 말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맞추면, 당신을 따라 입꼬리를 끌어올렸고 말이다.)
... 어쩐지 먼저 내쫓으시길래, 숨기는 것이 있겠거니 싶었습니다. (콧바람을 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당신이 내미는 주머니를 받아들였다.) 무엇이길래 이토록 숨기는 데 공을 드셨었는지. (주머니를 열어보는 손길 끝에 들뜸이 묻었다.)
 
노서하:(그가 과연 노을빛에 숨겨진 얼굴을 보았을까? 다만 당장은 태연히 당신의 손 밑을 받쳐주며 당신이 주머니를 열어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주머니를 천천히 열고나면. ... 그 안에는 작은, 붉은색 꽃의. ... 비녀가 들어있음을 알아챌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비녀가 동백꽃 모양임은 당신도 잘 아는 사실일테고.)
... 네가 하도 내게 무심하다 말하니, ... (나름의 핑계를 대듯 사족을 붙였다.) 마침 옛 생각이 나는 물건이 보여 사두었다. 네게도 잘 어울릴 것 같고. 네 입으로도 너는 뭐든 잘 어울린다 하지 않았느냐? (혀가 긴것을 보니, 아무래도 마음에 들까 걱정이 되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 잠시의 침묵. 그 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 어떤가. 마음에, 드느냐?
 
연월백:... ... 비녀? (그렇게 속닥였나? 월백은 시야에 노을빛보다 짙은 붉음이 들어오자마자 한아름 꽃을 품에 안은 것처럼 환하게 웃음짓는다, 당장 고개를 들어 당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그렇게 기쁨으로 젖어있을 수 없었다.)
(와락! 주머니와 함께 비녀를 손에 쥐자마자 월백이 한 팔로 당신의 목을 끌어안으며, 단숨에 안겼다. 청명한 웃음소리가 구름보다도 높게, 바다보다도 깊게 터진다. 지금까지의 시름이니 설움이니 뭐니 모든 것들이 지금, 이 순간의 행복에 잠겨 사라졌다. 당신의 목을 끌어안다가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품에 고개를 부빗거리다가. 고개를 들며 웃는 월백이 입 열어 말했다.) 순간, 오늘이 제 생일인 듯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대체 어쩐 일이신지, 여전히 꿈인가 생시인가 합니다. (당신을 놀리듯 말하지만 그 눈은 밤하늘 별보다도 반짝인다. 곧 월백이 품에서 떨어져나와 당신의 손에 비녀를 움켜쥐게끔 하고선.) 직접, 달아보시겠습니까?
 
노서하:(조금 긴장해있던 얼굴은 당신이 그를 끌어안자마자 멍청하게 풀어졌다. 멍한 얼굴로 당신을 마주하던 노서하가 뒤늦게 당신을 보며 마주웃었다.) 그리 좋더냐? (반짝거리는 눈을 보고서,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다만 당신이 그의 손에 비녀를 움켜쥐게끔 하자, 조금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을까.) ... 이상하다 놀리면 아니된다. 알겠느냐? (괜히 엄포를 놓고선 쭈뼛쭈뼛 당신의 머리에 살살 비녀를 꽂아주었다. 자세가 조금 미묘한지도 모르겠다. 그는 당신의 몸을 돌리거나, 저가 뒤로 가기보단 당신의 한참 위인 제 키를 이용해 거의 당신을 품에 안다시피 하며 비녀를 꽂아 이리저리 모양을 잡았다.)
(그렇게 또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몸을 살짝 떼어냈다.) ... 자. 됐다. (비녀 모양을 바라보다가, 당신을 보며 옅은 웃음을 보인다.) 잘 어울리는구나.
 
연월백:전하께서 어디, 저에게 이런 선물을 본격적으로 주셨던 적이 있습니까? 물론 있었겠지만 지금 순간만큼 좋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일까? 우리가 곧 혼인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일지, 그도 아니면. ... 피식 웃는다.) 당장 경鏡이 없으니, 비녀를 꽂은 것이 이상해도. 전하를 놀릴 수가 없지 않습니까. (참 아쉬운 일이 아니냐는 듯 당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를 돌리거나, 당신이 뒤로 가기보단 끌어안듯 하며 비녀를 꽂는 모습에 이상하게, 가슴이 술렁거리는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 숨 막혀요. (부러 그런 말을 흘리며 몸을 달싹거리는 것도 같은 이치에서였다. 당신의 품을 빠져나가면 조금이나마 이 술렁거림이 잦아질 듯 하여서.)
(어쨌거나 당신은 한참이나 비녀를 꽂느라 저를 끌어안고 있었던 것 같고. 당신이 몸을 떼어냈을 때 월백은. ... 꽤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손을 들어 꽂은 비녀를 가만 매만져보고는 입술을 삐죽인다.) ... ... 이상하게 꽂으신 것. 아닙니까? (괜히 투덜거려 보았고.)
 
노서하:이런 걸 보면 넌 재미 좀 보고 살려고 나와 혼례하려는 것 같구나. (부러 불만이 담긴 목소리로 툴툴거린다. 하지만 그의 손길이 여전히 다정한 것은 당신도 쉽게 눈치챌 수 있는 것이리라. 괜히 투덜거리고 입술을 삐쭉이는 당신을 보던 노서하는 숨소리같은 웃음을 흘렸다. 품에서야 떨어졌지만, 여전히 머리즘에서 떨어지지 않은 손이 머리카락 끝을 간지럽게 쓸었을까.)
(그리고 일순, 그가 고개를 숙였고)
(소리조차 없이 조용히 당신의 이마 즘에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그것이 다름아닌 그의 입술이란 건 당신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리라.)
(노서하는 저지른 일을 모른척하듯 반박자 늦게 발걸음을 도로 뒤로 돌렸다.) 자. 이제 가자꾸나.
 
연월백:... 전하가 자꾸 건덕지를 주시는데, 놀리지 않고 어떻게 배깁니까. (당신은 오늘따라 웃음이 많은 듯 했다. 역시 서신을 전달시키길 잘했지, 머리카락 끝을 쓰는 손길에 무심코 간지럽단 양 웃음을 터트리다가.)
(찰나에 몸이 굳었다.)
... ... (이마에 와닿는 감각, 당신이 등을 돌릴 때까지 멍하니 있던 월백의 눈동자가 느리게 당신을 쫓는다.)
(손을 잡는 것도, 껴안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렇게 허물없이 지내온 세월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 금방의 것은? 자각하자마자 얼굴이 새빨갛게 불타올랐다. 당장 당신을 쫓아가 손을 붙잡았다.) ... 지, 지금 뭐, ... 하셨습니까? (따지듯이 묻는 음성이 평소답지 않게 당황에 가득 차 있었다.)
 
노서하:(그러나, 반대로 저지른 당사자는 너무나도 태연했다. 마치 방금 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뻔뻔스럽기까지 했다.) 뭘 말이냐?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단 순진한 태도로 당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연월백:(그 표정에 억울해지는 것은 월백이다.) 저한테! ... ... (대뜸 소리치나 얼굴만 더 빨갛게 익어갈 뿐, 당장 뭐라 말을 잇지 못한다. 한참 뒤 기어들어가듯 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다.) ... ... 저한테, ... 하셨잖습니까! (매섭게 당신을 쏘아본다.)
 
노서하:(당신이 억울해하고, 잔뜩 익은 얼굴로 기어들어가듯이 말하면 말할수록, 그는 더 뻔뻔하고 대담하고 얄미운 인간의 얼굴을 하며 당신을 보았다. 능글맞은 웃음이 얼굴 위로 덧그려지더니, 아까 전처럼 다시 몸을 낮춰 당신을 보았다.) 그러니까. ... 뭘 말이냐? 무엇을 말하는지 내가 알아야 해명이라도 할 것이 아니야?
 
연월백:(흠칫,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가.) ... ... 이이! (대뜸 당신에게 손가락질 하더니 분에 찬 신음소리만을 내었다.) ... 능구렁이! 여우! 뱀! ... 이 요괴! 어쩜 저를 이렇게 농락하실 수가 있습니까!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노서하:... ... , (하는 웃음소리가 터지고 만 것은 결국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당신이 늘 승기를 잡는 듯 하였으나, 그것이 뭐라고 이렇게 돌변하여 당황한 얼굴을 보인단 말인가. 그래. 그게 뭐라고. 노서하는 파도소리가 잠길만큼이나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허리를 굽혔다가, 폈다가. 끝에는 눈에 살짝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가 진정하며 당신을 제대로 본다.) 뭘 그리 놀란 얼굴을 하는 것이냐? 아. 혹시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러느냐?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럼 이리 오거라. 내 제대로 네게 입을 맞춰주마. (그리고 태연하게 당신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연월백:(뭐가 저렇게 웃기지? 아니. 대체, 왜 저렇게 웃냔 말이다. 손가락질 했던 손은 어느덧 꾹 주먹을 쥐고 있었고, 월백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뱀 요괴임이 분명한 눈 앞의 당신을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하고, 제게 손을 내미는 당신을 바라보며. 월백은 팽 몸을 돌려 걸어간다.) 이만 돌아갈 겁니다. (목소리가 싸늘하기 짝이 없다. 흥! 콧바람을 쳤다.)
 
노서하:(결국 팽 돌려 걸어가는 당신을, 노서하가 반박자 늦게 쫓아갔다.) 월백아! 네 지아비를 놓고가면 어쩐단 말이냐? (당신이 성을 낼 소리를 또 늘어놓는다.)
 
연월백:... ... 이이, 진짜, ... ! (성을 내며 뒤돌아와 당신의 손을 꾹 붙잡는다. 다시 성큼성큼 바닷가를 돌아 걸어간다.)
 
어느덧 해는 완전히 수평선과 맞닿아, 찬란한 등빛이 잘 부서진 유리알처럼 바다 위로 흩어졌습니다.
 
손에 잡힐 듯한 저녁놀이 하늘을 살라 먹는데…… 불현듯 널리 치솟은 파도가 피할 틈도 없이 성큼 다가와 두 사람의 발목을 온통 적셔 버립니다.
 
흐벅진 매화 꽃잎이 소나기처럼 머리칼 위로 쏟아지고,
 
산들바람인 줄로만 알았던 바람이 휘황히 불어와 두 사람을 휘감더니 옷자락을 온통 헤치고,
 
맞잡은 손 주변을 실타래처럼 빙빙 돈 후에야 흐너져 사라졌습니다.
 
마주친 눈동자에 새벽별처럼 뜬 눈부처가 깜빡, 깜빡, 빛을 냈습니다.
 
철썩, 쏴아아 쏴아아…….
 
숨을 죽이고 귀 기울여 들으면, 바다가 흰 거품 같은 팔을 벌리고 이리 오라고 손짓하듯이, 내가 너희를 안아 주겠다고,
 
이 창의 들보 될 두 사람을 굽어 살펴 줄 것이라는 듯이 내쉬는 숨소리가 곧 파랑波浪 이는 자리인 것처럼…….
 
그러나 삶의 모든 좋은 순간이 으레 그러하듯이,
 
연월백:... ...
전하.
 
아름다운 철은 지극히 한때고, 꽃 여물어 움트는 시기 또한 몹시도 짧아 괴로운 것이 봄이라…….
 
얼굴이 희게 질린 채, 월백이 가슴을 움켜쥐고 당신의 품으로 쓰러집니다.
 
서하, 월백. SANC 0/1
 
연월백:
SAN Roll
기준치: 65/32/13
굴림: 1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노서하:
SAN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44
판정결과: 보통 성공
 
연월백:(불현듯 오한이 몸을 휘감았다. 심장이, 심장이 아파 얼굴을 아프게 일그러뜨렸다. 당신의 손을 꽉 붙잡으며 이내 휘청거리다 자리에 주저앉는다.) ... ... 저, 몸이, (말을 채 잇지 못한다. ...)
 
노서하:월백아! (제 품으로 쓰러지는 당신을 받아들었으나, 여전히 당혹감이 남아있었다. 방금 전 우리가 보냈던 달콤한 순간은 파도에 쓸려가는 모래알이나 다름없단 것처럼,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지, ... 지금 당장 의원으로 가마. 조금만 참거라. (그리고 노서하가 다시 한 번 당신을 번쩍 안아들었다.)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월백아. 정신을 잃으면 안 돼. (다급함이 묻어나오는 음성, 뜀박질, 벅찬 숨소리.)
 
연월백:(눈이 깜빡, 깜빡 거린다. 호흡이 가쁘다. 당신이 저를 안아드는 것에도 힘없이 품에만 안겨있다가, 겨우내 심장께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가느다란 숨만을 내쉰다. 아프다. ... 아파.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 그. 몸살 끼가 도진 것인가, 하, (스스로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는지 힘없는 웃음 소리를 낸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다.) ... ... 전하, 진정하세요. 오늘따라 몸이, ... 좋지 않다 싶었습니다. 마침 제, 제 집에, 어머니를 살피던, 의원이 계시니까. ... ... 아으, (몸을 더 크게 움츠렸다. 반사적으로 눈물이 고였다.)
 
노서하:세상 어느 몸살이 이런 증상을 보이단 말이냐! (또.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만 해도 두 번째였다. 당신은 나름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노력일지도 모르겠으나, 노서하에게 있어선 그것은 되려 화를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창백하게 질려가는 얼굴을 보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만다.) 몸이 좋지 않거든 쉬었어야지. 내가 의원을 보러가자 할 때 말을 들었어야지! (그렇게 외쳐봤자 본인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당신의 상태가 좋지 않아보였으니 보내는 것이 맞았다. 당신이 아무리 눈을 반짝거려도, 부탁이니 제발 들어달라며 빌고빌며 애간장을 태워도 그냥 제 고집대로 밀고나갔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따위가 물밀듯 밀려들어온다. 괜히 당신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곧 마굿간에 도착하면 당신을 다시 말 위에 올려주고, 자신은 당신을 감싸안듯 뒤에 올라탔다.) 내게 기대거라. 금방. 금방 도착할 것이다. (불안해서 벌벌 떠는 목소리로 누굴 안심시키겠다는 것인지. 웃기기 짝이 없다.)
 
연월백:(오늘만 해도 두 번째였다. 당신이 외치는 말들에 월백은 불안하게 뛰어오는 심장에서 일순 통증을 느낀다. 막연하게 올라오는 건 서러움이다. 그야, 약속하지 않았나.) ... ... 다정하게, 대해주겠다 하셨잖습니까. (울음에 떨리는 목소리가 겨우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소리도 치지 말고, 무섭게, 안 하겠다고, 하셨으면서. ... ...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어 묵묵히 손등으로 힘겹게 얼굴을 훔쳐내기만 했다.) 전 그냥, 전하가 하루 뿐이라도 즐거우셨으면 했는데. (이 화살 끝이 적어도 당신을 향하지는 말았어야 함을 알았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월백은 유례 없이 아픈 상태였고, 오늘만 해도 두 번째로 당신의 낯선 면모를 보고 겁에 질렸으며, ... ... 엄마가 보고 싶었다. 이렇게 몸이 아플 때면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가만 훌쩍이면서도 말에 오르게 되면 순순히 당신에게 제 몸을 기대는 모습이 웃겼을지도 모르겠다.) 집 갈래요. ... ... 집에 갈래. 데려다줘요. (마냥 고통만이 아닌 다른, 어떤 기억들로. 몸이 더욱 떨려왔다.)
 
노서하:왜, (돌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당신을 보자 노서하는 그제서야 제 불찰을 깨닫고는 입술을 짓씹었다. 머릿속에서 온갖 욕지기 따위가 오가다가, 곧 입술을 꾹 물며 한 손엔 말 고삐를 다른 한 손에는 당신의 허리를 안은채 몇 번이고 도닥거렸다.) 알았다. 알았어. 내가 다 잘못했다. 전부 잘못했어. ... 약속을 어겨 미안하다. (애타는 마음을 어찌할 바 몰라, 그는 결국 계속해서 형태모를 사과만 늘어놓았다. 허리를 안은 손에 더욱 힘을 준다.) 네 집으로 가마. 의원은 항시 자리에 있는 것이냐? (이번에는 목소리가 조금이나마 다정했다.)
 
연월백:(이번만큼은 그 위로가 제대로 먹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월백은 관계에 있어서 어느 실수, 오해가 있었을 때, 그것을 바로잡고자 마음 먹었을 때 그렇게 매정할 수가 없었으므로. 자신에게도, 당신에게도 풀어야 할 상황이 있으니 적어도 월백이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을 때에서야 관계는 회복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고통에 눈두덩이까지 욱신거리는 착각이 들어 눈을 질끈 감고, 월백은 허리를 꼭 끌어안는 당신의 팔 위로 손을 올리고 가만 심호흡했다. 다시금 눈물을 훔쳐냈다.) ... ...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한참을 내달려 도착한 연 가의 대문은 날이 어둑해졌는데도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동안 월백은 꾸준히 고통을 호소했고, 당신은 그것을 달래주며 온갖 진땀을 다 흘린 상태였죠.
 
곧 당신과 월백의 도착을 알아차린 하인들이 행랑채에서 버선발을 신고 달려나왔고, 곧 천 부인이 의원을 부르라 명하며 월백에게 달려온 것은 금방의 일이었습니다.
 
천 부인: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월백을 끌어안으며, 서하를 바라본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 ...
 
노서하:(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인지라, 그도 월백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잣거리나 해변을 다니던 중 갑자기 통증을 느꼈다. 처음에 바로 의원에 데려가려 했으나 본인이 워낙 완고하게 됐다 하기도 하였고 아주 잠깐 그러다 말기에 돌아오는 길에 의원에 들리려 했는데. ... ... (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내 불찰이다. 빨리 의원에게 보이는 것이 우선이야. 월백이 말로는 이 집에 의원이 있다하던데. 혹, 평소에도 이런 일이 있던 것이냐?
 
천 부인: (침착하게 서하의 말을 들으며 엄마, 울먹이며 자신을 끌어안는 월백을 자연스럽게 추슬러 안듯 했다.) 이전에는 없던 일입니다. 몸 하나는 뭇 사내만큼 건강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 ...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의원에게 진단을 받게끔 하겠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선 이만 돌아가시는 편이 좋으실 듯 합니다. (묘한. ... 축객령이다.)
 
노서하:... ... (이해할 수 없는 처사에 노서하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아무리 그가 이제 원치 않더라도 태자의 신분이라곤 하나, 그동안 쌓아두었던 인정마저 저버리는 작자는 아니었다. 아파 쓰러진 제 정혼자를 두고 돌아가라니.) 월백이가 정신을 다시 차릴 때까지 있어야겠다. 무슨 영문인지는 나도 알아야 할 것이 아니더냐!
 
천 부인은 당신의 말에 무언가 난감한 기색을 표합니다. 당신과 월백이 쌓은 유대를 알지만, 그럼에도 당신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는. 어떤 '비밀'이라도 있는 것 같은 표정.
 
허나 그것에 대답하는 것은 내내 천 부인을 끌어안고 있던 월백이었습니다.
 
연월백:(품에서 고개를 돌려 당신을 바라보는데, 어찌나 울었는지. 눈가가 붉다. 힘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 이만 돌아가주세요, 전하. 상태가, 나아지면. ...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 ...
 
천 부인: (서하가 무어라 반응하기 전 하인들을 시켜 월백을 안쪽으로 옮기게 했다. 흐트러진 옷깃을 가다듬고 다소곳하게 당신의 앞을 가로막듯 섰다.) 다음 날, 상태가 어떻든지간에 소식을 드리겠습니다, 전하.
 
노서하:월백, (안쪽으로 들어가는 월백을 따라 걸음을 딛으려다, 제 앞을 가로막는 천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부러 입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답답한 마음, 분노, 슬픔, 미묘한 서운함까지 섞여 원망스러운 온갖 감정들이 안에 있었다.) ... ... 천부인. (경고조같은 목소리였으나, 더한 동작은 없었다. 노서하는 월백이 안쪽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그 모습이 사라진 뒤에야 숨을 내쉬었다.)
... ... ... .
내일 동이 트자마자 다시 오겠소.
 
천 부인: (그런 당신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다 말한다.) 아이가. 아플 적이면. ... 좋지 못한 기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아직은 그 아이가 준비되지 않은 듯 하여 이리 행하지만. 나중에 몸이 낫고 나면 물어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천천히 몸을 숙였다.)
살펴 돌아가시지요, 전하.
 
노서하:... (뒤로 걸으며 닫힌 문을 또 한참.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걸음을 애써. 애써, 또 애써. 그렇게 등을 돌려 돌아갔다.)
 
가슴이 이토록이나 답답합니다.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마다 천근만근한 추를 매달기라도 한 것인지, 푹푹 땅 아래로 꺼져들어가는 것은 비단 당신의 한숨 뿐만이 아니겠습니다.
 
여즉 노리개를 달아주며, 비녀를 발견하며 환하게 웃음짓던 월백의 얼굴이 선명한데요. 태자궁의 문턱을 넘으며 왜, 철학관에서 들었던 말이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본시 살기란 것은 물살을 꿰뚫고 날아가는 법이라…….
 
먹먹하게 젖은 마음은 당신의 방에 놓여져있는 '비단함'을 발견하면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서하, 그것을. ... 열어보나요?
 
노서하:... ...
(한숨을 푹 내쉬다, 이내 비단함을 열어본다.)
 
비단함 안에는 청금석에 금테를 두른 쌍가락지가 한 쌍 들어 있습니다. 금선으로 아주 세밀하게 파도 모양을 그려 놓았고, 함 윗부분에는 음각으로,
 
낭화지환浪花指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파도가 부딪힐 때 하얗게 해지는 물방울이 꽃 같다는 시어를 담은 반지는 어쩌면, 오늘 월백의 손가락에 끼워졌을 수도 있었겠군요.
 
과연 그럴듯한 이름을 가진 반지의 한 주인은 여기 있고, 한 주인은…….
 
유독 아름다웠던 바닷가의 정경이 떠오르는 까닭은 왜일까요? 그러나 이제와 월백을 그곳으로 데려가 반지를 끼워줄래도, 이미 석호해변은 당신에게 끔찍한 추락감만이 남은 장소가 되어버린지라.
 
당신은 다시 함을 닫아버릴 뿐입니다.
 
밤이, 깊어집니다.
 
x
 
하지만 다음 날, 아침부터 무슨 일이 생길 것을 예고하기라도 하듯이 종일 불길한 비가 내렸습니다.
 
한 단 높게 쌓은 어도가 잠길 정도로 물이 불어, 포졸들이 천변으로는 지나다니지 못하도록 길을 막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날씨 따위가 나쁜 것은 이제와 생각해 보면 아무 문제도 아니었구나 싶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날 아침입니다.
 
천지가 뒤집혔습니다.
 
월백의 부모에 대한 역모죄 고변이 잇다라 들이닥쳤습니다.
 
새벽 무렵 월백의 상세가 더욱 나빠져 와병하였다는 소식이 당신과 임금께 전달되어, 임금께서 친히 태의와 함께 귀한 약재까지 보내셨다더니.
 
해가 정오 무렵을 향하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고발을 듣고 대단히 진노하여 월백의 부친인 대사간을 당장에 추포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쁘게 돌아가던 가례청에서도 어찌할 바를 몰라 모든 일을 멈추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태후께서 계신 영곤궁에서 급히 당신을 찾는다는 연통까지 옵니다.
 
당신, 이런 상황에서 어찌 행동하나요?
 
노서하:(급하게 옷을 챙겨입었다. 이래저래 바쁜 아침이엇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냔 말인가. 제 아버지의 정신이 오늘내일 하고 있단 소식은 알고있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 ... . 일단 발걸음을 서둘리 했다. 역모죄로 잡혀왔다 한들 돌연 목을 쳐버리는 일은 없을테니. 방도를 찾아야한다. 태후를 먼저 방문하기 위해 영곤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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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한 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것은 영곤궁도 마찬가지라, 태후궁 나인들이 모두 입조심을 하며 당신과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고개를 수그리고 움츠러든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내부로 들어서면 얼굴이 희게 질린 태후와……,
 
익숙한 얼굴일까요? 잘 알지는 모르겠습니다.
 
실종된 전 태녀의 호위무사. 호련이 있었습니다.
 
태후는 온후하고 차분한 노인으로 평소 경거망동하지 않는 편이나, 월백을 서하의 짝으로서 아껴 주신 분인 만큼 작금의 상황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치입니다.
 
호련은 건조한 눈으로 무뚝뚝하니 서 있기만 합니다.
 
당신이 들어온 것을 발견한 태후는 한숨을 쉬며 건세수를 하더니,
 
태후: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 (탄식하며.) 주상은 제가 말려보겠으니, 태자. 그대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알아보셔야겠습니다. ...
 
노서하:(가장 필요한 순간에 사라진 당사자 중 한 명이 제 눈 앞에 있었다. 두 눈을 의심했을까. 아니면 책임을 물기 위해, 혹은 진실을 알기 위해 소리를 높여야했나. 우선 태후께서 제 아비를 돌본다 한다면. ... 자신은 다른 방도를 찾아야했다. 하지만 그것보단 우선. ...) 태후마마, ... 이 자가 어찌 여기에 있습니까? 혹시 ... 태녀가 돌아온 것입니까?
 
그제서야 요지부동했던 호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예를 갖춥니다.
 
이다희:태녀 전하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십니다. 다만, 태자 전하의 사태 파악을 위해 저를 보내셨습니다.
 
노서하:('아직'? 그렇다 하면. ... 돌아올 의향이 있단 의미인가? 미간을 찌푸렸다.) ... 사태파악이라. 굉장히 묘하게 들리는군, 그래. (노려보듯한 시선.) 이 순간 가장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인물이거늘. ... 하지만 노아란은 창滄에 해가 될만한 일을 꿰할 이는 아닌데. ... 태녀가 뭐라 말하더냐. (의중을 알아차리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노서하는 제 이복동생이 늘 불편했다.)
 
이다희:우선 확실시 해드릴 점은, 태녀께선 섵불리 몸을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밝혀드립니다. 이미 기이하고 삿된 주술로 목숨을 잃을 뻔 한 정황이 있어, 실종이란 연막을 터트려 뒤에서 잔당들을 추적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당신의 노려보듯한 시선, 불편하단 몸짓. 모든 것에 반응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위험을 감수하고 저를 보낸 까닭은, 태자 전하의 정혼자를 위함이지 않겠습니까. (당신을 바라보는 눈이 참 올곧았다.)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잇는다.) 태녀 전하께선 실종 전까지, '대역'을 쓰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태자 전하께선 관심이 없으시니 잘 모르실 일이셨겠지만, (묘하게 당신을 건드리는 발언이었을지도.) 그때, 태녀 전하의 '대역'이 죽기까지 겪게 된 증상이 현재 태자비 전하의 증상과 비슷하기 때문에.
하고픈 말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전하께서 태자비 전하를 살리고자 원하신다면. ... 바삐 정보를 얻으라는 독촉과 더불어. 주상 전하를 견제하고 있으라는 말을 전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다.)
 
노서하:... 삿된 주술? (그렇게 말하자면, 뭔가. ... 짚이는 흔적이 있었다. 어제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다 갑자기 월백의 머리카락을 한움쿰 잘라갔던 이가 있지 않았나. 그 당시에는 제정신이 아닌 이처럼 느껴졌으나. ... 삿된 주술에는 저주를 걸 인간의 일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에서 들은 것 같았다.) ... 주상 전하를?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설마 네가 말하는 그 삿된 주술을 주도한 자에 주상 전하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냐? (원래라면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지껄인다며 소리라도 지르며 경을 쳐야하는 것이 맞는 도리였으나. ... 노서하는 제 아비를 잘 알았다. 특히나 제 아비의 최근 동향에 대해선. ... ... . 더군다나 제 눈 앞의 이는 농이라곤 하나도 모를 작자기도 했고.)
 
이다희:(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말했다.) 주상 전하가 그 주동자 무리에 끼어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원체 영명하고 침착하셨던 분이 아니십니까. 그러나 최근의 모습들을 보면, 이미 무리의 손아귀에 넘어가심이 맞는 듯 하다고. 태녀 전하께서 판단하신 바 있으십니다.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가 있으시나 주기는 아마 빈번하고도, 드물 지 않습니까? 짚이시는 바가 한 둘은 있으실 겁니다. (가령, 월백이 '임금께서 자신을 불러 입궐하라 이르시며 이전처럼 다정하게 대해주셨다.'며 말했던 것 따위가 말이다.)
진솔하게 말씀드리자면 저희는 제가 창에 온 것만으로도 무리를 한 상태입니다. 도피 생활을 유지하며 무리를 쫓는 것마저 벅찬 지경이라, 어쨌거나 태자비 전하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태자 전하의 손에 달렸습니다. 태녀 전하의 대역께선 끝내 피를 토하고 쓰러져 승하하셨으니. ... 아직 그 상태는 아니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은.
 
그 말을 듣던 태후도 조심히 말을 덧붙여 오는군요.
 
태후: 그렇습니다, 전하. 호련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당시 상황이 이상했던 것이, 모든 일이 지나치게 빠르게 처리되었지 않습니까. 주상 전하가 태녀 전하께서 실종된 전후의 승정원 일기마저 세초(기록을 파기)하셨던 일도 있으시니. ... 당시에는 태녀 전하의 실종이 불명예스럽다 생각하셔서 그리 하신 줄 알았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혼란스럽습니다.
 
앓아 누운 월백, 끌려왔다는 대사간, 태녀의 실종에 얽힌 진실.......
 
태후가 나서서 일을 정리합니다. 우선 월백에겐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과 의원을 보내 몸을 살피게 하고, 임금에게는 직접 가서 이야기를 해 보겠으니 서하는 아란이 실종되기 전후의 기록 따위를 찾아 보라고요.
 
승정원일기를 세초했다 하나 궁에서 모든 기록을 전부 다 지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동궁일기(태자의 교육일지)나 일성록(왕의 일지)도 있지요.
 
특히 개중에선 임금 부처와 태자 내외만이 열람할 수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당시부터 지금까지 근무하던 관원들이며 궁인들도 차고 넘치니 우선 상황을 좀 알아 보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보를 살피려면 어디로 움직여야 할까요?
 
기록을 보관하는 곳이라면 국사 기록 기관인 춘추관도 있고, 왕실 서고인 경륜각도 있습니다.
 
병증과 관련된 사건이니 내의원에도 그 대역을 비밀스럽게라도 시료한 기록이 남았는지 확인하면 좋을 테고, 지금 서하를 모시는 태자궁 궁인들 중에도 태녀의 시기부터 그대로 동궁에 남았던 자들이 있습니다.
 
어느 곳부터 향할까요?
 
노서하:(우선은 춘추관으로 향했다.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하고 혼란스럽지만. ... 당장 제 앞에 놓인 일들을 해결해야했다. 게다가 태녀라면 그 또한 믿을 수 있었으니.)
(다만 노서하는 영곤궁을 완전히 떠나기 전 뒤돌아 호련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 ... 태녀께 건강히 지내시라 일러라. (그것이 고작이었다.)
 
호련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군요. "명 받잡겠나이다."
 
발걸음이 무겁지만 당장 앞에 있는 일들은 막중한 것들 뿐입니다.
 
춘추관으로 향합니다.
 
x
 
국사 기록 기관인 춘추관은 다른 궁내 관청과 별다를 것이 없지만, 중요한 기록물을 다수 보관하는 곳이기에 관리가 엄중합니다.
 
진입 전, 행운 판정이 가능합니다.
 
노서하:
행운
기준치: 45/22/9
굴림: 46
판정결과: 실패
 
재판정이 가능합니다.
 
노서하:
행운
기준치: 45/22/9
굴림: 95
판정결과: 실패
 
마지막, 재판정이 가능합니다.
 
노서하:
행운
기준치: 45/22/9
굴림: 41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아직 오후인 시기라 관원이나 숙직자가 돌아다닐 시기. 주상 전하의 눈치를 보는 자들은 이 시각에 태자가 난데없이 춘추관 앞에 나타난다면, 다소 수상한 눈빛을 보낼 만 했죠.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처음으로 만난 자가 월백의 사촌형제인 젊은 직각이었던 것은 행운이라 말할 만 했습니다.
 
직각: (당신을 발견하고 황급히 다가와 예를 차렸다.) 전하.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노서하:(목소리를 낮게 했다.) 당장 춘추관 내의 기록을 살펴야겠다. 혹, 이 곳을 돌아다니는 이들이 많더냐? (그리곤 더 속삭이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월백이와 관련된 중대사항이다. 대사간이 역모라는 누명으로 새벽에 돌연 추포하였단 소식은 이미 들었겠지?
 
직각: (표정이 대번 좋지 않아졌다.) ... 꽤 됩니다. 아직 퇴청하기까진 시간이 남은지라. ... 저, 그렇다면 전하. (미간을 좁히다가.) 차라리 그렇다면, 위험하시겠지만 사초를 직접 열람하시는 것이 낫겠습니다. 오늘 부근에 관직을 선 자가 이르게 퇴청을 하기도 하였고. ...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직각은 관원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로 당신을 잘 인도해냅니다.
 
곧 어렵지 않게, 당신은 태녀가 실종된 시기의 사초를 꺼내어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훑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
 
임금이 좌의정을 굉장히 자주 불러 독대하였는데, 그런 후에는 반드시 머리가 아프다며 지밀상궁을 불렀다고 합니다.
 
단순히 ‘지밀상궁 김씨가 들었다’ 정도로 쓰여 있지만, 그가 들었다 나간 후 침전에서 ‘달고 톡 쏘는 냄새’가 났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행간에서 사관의 탐탁찮은 어조가 눈에 띕니다. 더불어 기록의 앞뒤를 잘 살펴 보면, 좌의정이 편전에 든 날짜 전후로 반드시 임금의 어심이 크게 바뀌어 전날 내렸던 전교를 다음날 뒤집어 엎는 일이 잦았습니다.
 
*
 
태녀가 실종되기 석 달 전쯤, 임금이 좌의정의 ‘도성 북문 근처의 절 ‘계명사’ 전각 하나를 새로 꾸밀 것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에 동의하였다고 합니다.
 
계명사는 전대 태후들이 종종 찾아가 기도를 올리고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던 절이라 왕실 소유인데, 현 태후는 불공을 드리는 일에 그다지 흥미가 없어 오래도록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허락한 듯합니다.
 
*
 
태녀가 실종되기 한 달 전쯤 임금이 잠시 와병하여 태녀가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태녀의 일처리에 대해 전날에는 크게 칭찬하였다가도 다음 날에는 같은 일을 두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하교(심한 욕설을 돌려 표현하는 어휘)를 하셨다고 합니다.
 
임금의 성노가 잦은 데 반해 그 기준은 공고하지 않아 태녀가 국사를 돌보는 데에 있어 크게 어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임금이 특별히 노한 처결은 태녀가 예문관 대교로서 새로이 부임한 좌의정의 아들을 징계한 건,
 
그리고 계명사 전각을 꾸미는 두 차례 공사에 있어 좌의정이 재산을 착복하였다는 상소가 올라왔으니 사실인지 철저히 조사하라 명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왕의 손으로 직접 처분을 없었던 것으로 돌려놓은 다음 주에 좌의정의 아들이 크게 승차(승진)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은 이정도 뿐이로군요.
 
서하, 다른 곳으로 향해보도록 합시다.
 
노서하:(좌의정. ... 계명사. 유독 자주 눈에 띄던 것들을 천천히 속으로 읊었다. 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 달고 톡 쏘는 냄새가 났다는 것은, 정신을 혼란캐 하는 약이나 향을 쓴 것일수도 있으리라.)
(다음으로 경륜각으로 향했다.)
 
x
 
경륜사는 궁궐에서 가장 큰 2층짜리 서고입니다.
 
평상시에도 인적 없는 전각에다 비까지 와 특별히 드나드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행이네요.
 
안에는 서책이 대단히 많은데 무엇부터 골라 보아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서하, 자료 조사 판정이 필요합니다.
 
노서하:
자료조사
기준치: 60/30/12
굴림: 44
판정결과: 보통 성공
 
당신은 책상 위에 쌓여있는 태조 실록에 유독 시선이 가는 것에, 그를 먼저 읽어보기로 합니다.
 
다음과 같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전 왕조의 폐주가 삿된 사술에 홀려 나라일을 그르쳤는데, 이 무리들이 새 나라가 건국된 후에도 세력을 유지하여 폐단이 심하므로 태조께서 친히 ‘골로낙 신도들’의 잔당을 모두 소거하라 명하였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
 
‘골로낙 신도들’에 대한 언급은 많지 않으나, 전 왕조가 쇠할 무렵 강성했던 사교 무리로 추정됩니다.
 
당시에는 퍽 사악하고 끔찍한 취급을 받은 모양이지만 백성들에게까지 그 위명이 퍼지면 오히려 세를 불릴 수 있으므로 조정 내부에서만 쉬쉬하였다고 합니다.
 
*
 
저잣거리에서 탈극으로도 공연되는 <쌍옥루>의 내용이 아무래도 각색이 아니라 실제 역사인 듯합니다.
 
태조 대왕의 왕후 신씨가 심장이 돌처럼 굳어 급사하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태조는 왕후 신씨를 갑자기 잃은 일로 크게 상심하여 매해 그의 기일이 다가오면 반드시 정무를 쉬고 바다를 거닐며 신씨를 추모했다고 합니다.
 
*
 
태자궁 권역 몇몇 전각이 그 위엄과 걸맞지 않게 부실하다 하여 재공사를 명하였는데,
 
특히 태자궁 후원 호수 위의 누각 연흔정 건물을 태조 대왕께서 직접 재설계, 점검하셨다고 합니다.
 
전각 현판도 태조께서 직접 쓰셨는데, 그가 이르기를 ‘훗날 만일 나라에 재액이 닥친다면 반드시 내가 이 현판을 적은 뜻을 헤아려라’ 하였다는 구절이 보입니다.
 
*
 
실록을 다 읽으니 눈이 조금 쑤셔오는 것도 같았습니다.
 
골로낙의 신도들? ... 심장이 돌처럼 굳어 급사하였다?
 
빨리, 다른 곳으로 향해봐야겠습니다.
 
노서하:(골로낙 신도들이라니. ... 아란이 세웠다던 대역의 급사가 혹시, 이것과 관련있지 않을까? 훗날 물어볼 수 있는 날이 오거든 물어야겠다.)
(연흔정으로 향한다.)
 
연흔정으로 향하기 위해, 중간에 위치한 태자궁으로 먼저 걸음을 옮깁니다.
 
x
 
태자궁은 전각 전체에 청기와를 사용한 동궁 권역입니다.
 
오후 햇살이 느리게 반짝이는 시간 쯤에는 푸른 빛이 기세 좋게 몰아치는 파도처럼 보여 절경이지만, 이토록 세차게 비가 내려서야…….
 
순간 번쩍하고 뇌편이 명멸하더니 눈 몇 번 깜빡인 후에는 천지를 울리는 우레 소리가 들렸습니다. 용마루에 걸린 암운이 쩌렁쩌렁 울음을 토했습니다.
 
태자궁 권역에는 침전이며 시강원, 검술을 연습하는 연무장, 서고, 부속 전각까지 여러 건물이 있으나 태조 대왕께서 특별히 설계하고 현판까지 적었다는 연흔정이 오늘따라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평소라면 한적하고 고요하여 쉬기에도 보기에도 좋은 호수에 나룻배처럼 고인 정자지만, 오늘은 특별한 불운이라도 암시하듯 귀기 서린 그림자를 내뿜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순간 멀리 편전에서,
 
어쩌면 북문 근처의 자해산에서,
 
혹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사특하고 악한 노래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환청처럼 들리는 이 저주스러운 악곡을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SANC 1/1D3
 
노서하:
SAN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13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이성치 1 감소.
 
억지로 정신을 다잡으며 다리를 건너 정자로 다가가니 과연 태조 대왕께서 직접 쓰셨다는 현판이 올려다보입니다. 연흔정連痕亭…….
 
지능 판정.
 
노서하:
지능
기준치: 80/40/16
굴림: 68
판정결과: 보통 성공
 
‘연흔’이라면, 지층이나 바위에 남은 파도 모양의 흔적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인데요. 태조 대왕께서 직접 지은 이름이라니 필시 보이는 것 이상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잠깐,
 
태조 대왕이 남긴 '파도'라고 하면,
 
당신이 가진 것이 하나 더 있지 않나요?
 
노서하:파도. ... (저도 모르게 그것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무언가 퍼뜩 떠오른 사람처럼 정신없이 품을 뒤적이다가, 이내 작은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쌍가락지를 살폈다.) ... 낭화지환浪花指環. (시어를 조심스럽게 중얼거린다.)
 
서하, 관찰 판정.
 
노서하: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1
판정결과: 대성공
 
순간, 다시 한 차례 번개가 번쩍이고,
 
잠시 밝아진 사위 안에서 현판 왼쪽 아래 기둥 중간 부분의 갈라진 틈에서 무언가 반짝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틈은 성인 남성의 손가락 서너 개가 들어갈 정도로 깊고 넓은데, 안을 더듬어 만져 보면 동그란 원 모양의 홈이 패여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크기가… 꼭 낭화지환과 딱 알맞을 것 같은데요. 끼워볼까요?
 
노서하:... (조심스럽게 안에 끼워보았다.)
 
달칵.
 
맞물리는 느낌과 함께 정자의 현판 한 쪽의 연결부가 훅 풀려, 다른 한 쪽으로만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됩니다.
 
현판으로 감춰졌던 가로대 안에는 낡고 오래된 책 한 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
 
‘창’의 전 왕조는 말기 무렵 나날이 부패하였고, 급기야 ‘골로낙’이라는 사시이비 신을 섬기는 자들이 세력을 불려 왕권을 좌지우지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허수아비 왕을 제멋대로 올렸다 폐위하기를 반복하며 나라를 어지럽히던 골로낙의 신자들을 몰아내 정리하고 새 왕조를 개창한 것이 ‘창’의 태조입니다.
 
정인 왕후 신씨마저 이들의 요사스러운 저주로 잃은 태조는 신자들이 돌아와 나라를 어지럽힐 것,
 
그리고 같은 저주에 당할 것을 우려하여 왕가의 후손들에게 특별한 유물을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쌍가락지 ‘낭화지환浪花指環’입니다.
 
파도 문양을 새긴 가락지라고 해서 낭화지환인데, 영험한 기운이 서린 청금석으로 만들고 몇 가지 주술을 걸어 두었습니다.
 
진실로 애정하고 신뢰하는 상대와 나눠 끼면 서로를 악운으로부터 지켜 주는 효과를 가지는 부적이라고 합니다.
 
왕후 신씨를 죽인 주술이 정확히 어떤 절차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는 모르나, 일단 걸리고 나면 드물게 통증을 앓던 대상은 갈수록 상세가 심해져 심한 몸살에 걸렸을 때와 비슷한 상태가 됩니다.
 
오한이 들고 운신이 힘들어지더니, 심장의 통증이 계속되며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 완연한 병색을 띠고, 급기야 내장이 손상되기 시작합니다.
 
심장이 완전히 굳고 장기가 손상되는 데에 나흘에서 닷새 정도가 걸립니다.
 
이 주문은 일단 시작되면 대상자의 ‘심장이 멎을 때까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고 적혀 있습니다.
 
후손들이 혹시나 다시 이 같은 재액을 겪게 된다면 이것은 모두 골로낙의 신자들을 모조리 없애지 못한 자신의 탓이니 스스로의 죄가 깊다고 한탄하는 내용으로 끝맺어집니다.
 
*
 
... ... 그러니까.
 
태녀의 대역을 죽이고 이제는 월백을 겨냥한 이것이 질병조차 아니고 삿된 주술임이 맞았군요.
 
심지어는, 일단 시작되면 결코. ... 중단되지 않는다고요?
 
SANC 1/1D3
 
노서하:
SAN Roll
기준치: 69/34/13
굴림: 67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치 1 감소.
 
오한이 들고 운신이 힘들어지더니, 심장의 통증이 계속되며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 완연한 병색을 띠고,
 
급기야 내장이 손상되기 시작한다, 심장이 완전히 굳고 장기가 손상되는 데에 나흘에서 닷새 정도가 걸린다…….
 
월백이 이러한 증상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죠? 바로 어제 저녁부터 시작해서, 오늘 새벽부터. ... ...
 
동백꽃 비녀를 끼워줄 무렵까지만 해도 새하얗게 태양처럼 웃어주던 사람이…… 그저 사특한 자들의 주술에 휘말려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니요.
 
순간적으로, 정말이지 어떤 사고도 판정도 결과도 없이 서하는 뚜렷한 불안감을 느낍니다.
 
위태롭게 걸린 연흔정의 현판이 끽끽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서하. 어떻게 하나요?
 
노서하:(내용을 확인하고 한참을 굳은 채로 서 있었다. 머리를 누구한테 얻어맞기라도 한 양 정신이 혼미했다. 숨이 멈췄고, 마치. 제 심장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 ... ...)
,
(그리고 숨이 돌아온 것도 순식간이었다. 노서하는 곧장 서책을 다시 원래 자리에 놓고, 현판을 고정시킨뒤 가락지를 뺐다. 손이 덜덜 떨렸지만 어떻게든 가락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당장. 월백을 봐야했다. 지금 당장.)
(발걸음이 빨라지는지도, 그게 얼마나 수상해보이는지도 모른 채 그는 여유를 잃어 월백의 처소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월백의 상태를 확인해 보아야겠다는,
 
논리도 근거도 없이 절박하며 본능적인 감각이 척추를 내달렸습니다.
 
당연한가요?
 
이것이 사랑인지 우정인지 과연 어떤 형태의 애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은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판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운명은 숫자의 크고 작음과 관계없이 두 사람이 처음 만나, 각자의 운명을 뒤틀고 새끼 손가락을 걸었을 때부터 또아리 튼 용처럼 얽혀 있었습니다.
 
지극히 내밀하고도 차가운 불길함이 뱃속을 저몄습니다.
 
굳어갈 정인의 것과 달리 지나치게 뜨겁고 빨라 북처럼 거대하게 두방망이질치는 자신의 심장.
 
홈에서 도로 꺼냈었던 낭화지환을 쥐고, 서하는 빗속을 내달립니다.
 
월백은 궐 동문 바깥 북촌에 살지요.
 
이모든 것이 그저 기분 나쁘게 잘 꿰여 맞춰진 우연이나 괴담 따위고, 월백은는 그저 고뿔처럼 잠시 지나가는 병에 걸렸음이 분명하다고……
 
직접 확인하고, 반지를 끼워주어야만 합니다.
 
결코, 그러해야만, 합니다.
 
.......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더냐?
 
사람의 마음인가 합니다.
 
.......
 
가장 깊은 것이 때로는 사람의 마음이고 때로는 천 길 물속이며 때로는 동짇달 한 허리 베어낸 달밤이라 하나……. 아니요,
 
전부 틀렸습니다.
 
깊은 것은 필시 달려가는 길 고개 너머너머 우묵하게 패인 두려움입니다.
 
북촌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는 거리가 어찌 이리 먼 것일까요? 스스로의 숨소리가 날카로운 갈퀴처럼 귀를 갉는 것 같습니다.
 
쥐새끼 한 마리 다니지 않도록 대문을 걸어잠근 북촌 길을 마구 달려 오르면, 창졸간에 가장이 끌려가면서 대문도 제대로 잠그지 않은 대사간의 고택이 나옵니다.
 
대사간의 집을 직접 가본 적은 없으나 사대부 가문의 집이란 어차피 구조가 다 같습니다.
 
이 시간이라면 월백은 분명 내실 쪽에 있겠죠.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식솔들도 모조리 끌려가기라도 한 것인지 내실로 달려들어가는 동안에도 사람 하나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창호지 너머로 불 켜진 방이 하나 보입니다.
 
그러나 서하가 어떤 최악을 생각했건 그것과는 약간 다른 양상이 눈에 담깁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실에는 월백이 있었습니다.
 
벽에 등을 기대 앉아서,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희미하게, 숨을, 쉬면서,
 
……한 손에 검은 물이 든 그릇을 쥔 채로요.
 
눈을 들어 당신을 바라보는 '올곧은' 금안이 보입니다.
 
당신, 잘 생각해봅시다.
 
연월백이라는 인간은 본시 어떤 사람입니까?
 
누군가, 삿된 것들이 그의 인생을 제멋대로 쥐어 잡고 흔드는 것을 용납할 만한 인물인가요?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것들을 가만 내비 둘 성격인가요? 무력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인가요?
 
당신은 답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시선도 그렇고요.
 
눈은 손에 쥐고 있는 흰 그릇으로 향합니다.
 
아직 마시지 않은 듯, 검은 물은 옅게 찰랑이고만 있었습니다.
 
연월백:... ... (손을 뻗었다.) 제게 끼워주셔야 할 것이, 있으실 듯, 한데. ... ... (옅게 웃는다.)
 
노서하:(이 상황에도 웃는 얼굴이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을까. 이상하게도 그렇게나 바삐 뛰어왔건만 당신의 얼굴을 보자 웃음이 나고, 안도감이 몰려왔다.) 얼굴 좀 보자, 월백아. (비에 흠뻑 젖어 손이 젖어 있었다. 그는 잠시 당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려는 제 손을 멈짓거리다, 이내 천천히 볼을 더듬어 고개를 제게 들려주었다.)
... ... 혹 내가 원망스러우냐? (당신이 뻗은 손을 붙잡아 매만지다 돌연 물었다.)
 
연월백:(차디찬 손이 얼굴을 쓰는 것에 몸이 떨려온다. 지그시 눈을 감고 당신의 손길을 느끼다, 느리게 뻗은 손부터 깍지를 꼈다. 자그마한 웃음이 흘린다.) 원망스러울 일이, 무엇, 있겠습니까. ... ... ? (잘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처럼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새어나왔다.)
 
노서하:... 이런 상황에 좀 원망하는 게 뭐 어떻다고 그러느냐. 어차피 날 원망할 수 있는 것도 너 뿐일텐데. (애써 웃으며 농따위를 던지지만 색색대는 숨소리에 제 심장까지 퍼져 저며오는 아린 감각을 느꼈다. 저를 밀어내지 않고 깍지를 껴 붙잡는 당신을 어쩌면 좋을까. 정말.) ... 자꾸만 약조를 어겨 미안하다. (다정하겠단 약조도, 다치지 않게 해주겠단 약조도. 전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엉망이었다.) 네가 기대한 것보다 내가 한심한 사내인 것 같아. ... ... (눈앞이 뿌옇게 변해 당신의 모습이 흐려지는 것은 빗물 탓인가 싶었다.) ... 그래도 난 네가 필요하다, 월백아. 네가 내 곁에 머무르길, 나와 함께하길, 나와 살아가길 바라.
... 자꾸만 약조를 어기는 나같은 놈이 감히, ... 너와 함께 해도 되는 것이냐?
 
연월백:(많은 말들을 해주고 싶지만 월백에게는 느껴졌다, 아, 이, 생生 자체를 조여오는 고통, 죽음, ... 두려움. 계속 마주 웃어주고 싶지만 그것이 제 눈을 가렸다. 저를 우매하게 만들고, 둔하게 만들고, 한 치 앞인데도 발을 내딛지 못하게 꽁꽁 묶는다. 시간이 없었다. 월백은 떨리는 입술을 열어 애써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전하, 저는. (마주잡았던 손을 풀어 당신을 향해 뻗었다. 고통에 떨리는대도 착실히, 당신의 눈물을 스치듯 닦아내는 손길은 부드럽기만 하다.) ... 잠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환하게.) 혼자 여행을 다녀올까 합니다.
(잔인하게 읊는다.)
찰나라지만, 그곳에는 전하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노서하:... (제 눈가를 닦아내는 손길을 제 볼위에 붙잡았다. 당장은 괴로울 수 있었으나, 그는 어떠한 반대의 의사도 보이지 않았다.) 그 뒤는?
 
연월백:(여름날 햇살같이 웃었다.)
평생 함께 하자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노서하:... ... .
(그제야 그가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조용히 품에서 가락지를 담아놓은 주머니를 꺼내, 당신 몫의 가락지를 약지에 끼워주었다.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그는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탄식하듯 덧붙였다.)
내 평생 너보다 애정할 수 있는 건 그 누구도, 무엇도 없을 것이다.
(그 뒤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붙이더니. ...)
(소리도 없이 이번에야말로. 마른 입술에 입을 맞췄다.)
 
연월백:(낭화지환. 반지가 끼워지는 것을 바라보며 은은히 미소가 맺히지만, 동시에 눈물이 고이는 것은 어째서였을까. 월백은 한참이나, 또 한참이나 끼워진 가락지를 매만질 뿐이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머리카락이 어깨 선을 타고 흘러내린다. 당신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다가오는 얼굴에. ...)
(지그시 눈을 감는다.)
(눈꺼풀 끝자락에 맺혔던 눈물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 가느다란 웃음이 터져나온다.)
... ... 이렇게 하시면, 제가,
(불현듯 고개를 숙이더니, 급하게 손바닥으로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아낸다. 하, 한숨 섞인 웃음이 새었다.)
제가. ... 또 한참, 두려워지고 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연월백:... 이렇게 못된, 지아비가 없습니다, ... 그렇지, 않습니까?
 
노서하:(입술이 떨어지자 터지는 웃음에 영문을 모른단 얼굴을 했을까. 하지만 이내 못 이기겠단듯 따라서 웃었다.) 뭐가 그리도 두렵단 것이냐. (여전히 빗물이 뚝뚝 떨어져 그 앞에 고이고 있건만. 그런것은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 좀 너그럽게 봐다오. 앞으로 평생 보고 살 얼굴이 아니더냐. (애써 능청스러운 말을 건넨다.)
 
연월백:... ... (뭐가 그리도 두렵단 것이냐. 질문에, 월백은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등이 무너진다. 손 틈 사이로 눈물이 무릎을 덮고 있던 이불을 적셨다.)
(눈물을 다시 한 번 닦아내는 손이 덜덜 떨렸다. 정말, '무언가가 두려워서 못 견딜 지경'인 것처럼. 애써 웃으며 당신을 바라본다.)
조금, 쉬고 싶네요, 전하. ... 저를 배려해주신다면, (당신이 거절하기 어렵도록 그런 단어를 내뱉는다.) ... 나가주시지 않겠습니까?
 
노서하:월백아. (제 얼굴을 보지 않고 자꾸만 고개를 숙이는 탓에 답답한 마음만 커져갔다. 이은 축객령에는 당황스런 표정이 드러났던가.) ... ... 내가 널 불편하게 하고 있는 것이냐? (평생은 약속하고서, 지금 당장은 떠나라 이르니. 당신의 마음을 살피기란 그에게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다.)
 
연월백:(천천히 눈을 접어 웃었다.) ... ... ... ... 예. (작은 끄덕임. 확실했다.)
 
노서하:(단칼같은 대답에 입술을 짓씹고서, 어쩔줄을 몰랐다. 어떻게 하면 당신의 마음을 다시 얻을 수 있는지. 그 방도라는 게 제게 있긴 한건지. 너무나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 ...
내가, ...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싫어진 것은 아니지?
 
연월백:... ... 정리할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손을 뻗어 당신의 손을 그러쥐었다. 빗물로, 눈물로 서로가 축축하다.) 전하, 아니라면. ... 잠시.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 그것을 가져와, 주시겠습니까?
 
노서하:알아보고 싶은 것? ... (당신이 요구하는 것을 말하자 그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 ... 무엇을 가져다 주면 되는 것이냐? 모두 말해다오. 아무것이나 상관없다.
 
연월백:... 제 노리개.
잃어버렸던 노리개. ... (눈이 일렁거렸다.)
... ... 가져와 주실 수, 있으십니까?
 
노서하:(한참을 찾고, 찾다가 잃어버렸다던 그것말인가? ... ... 그게 그리도 중요한 것이었나. 과연 찾을 수 있을까 망설이다 노서하는 답도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줘야한단 일종의 의무감이 든 탓이었다.)
알았다. 내가, ... 금방 다녀오마. 걱정말고 쉬고있거라. (그는 애써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당신의 볼을 쓸어주고 몇 번이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계속 네 곁에 있겠다. (계속, 계속.)
(그리고 그는 당신의 볼을 한참이나 쓸어주고, 쓸어주고. 또 쓸어주다. ...)
(당신이 앉은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차츰 당신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당신은 연월백과의 '평생'을 생각합니다.
 
오로지 그것만을 붙잡아야, 이 넘쳐 흐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천근만근한 다리를 움직일 수가 있었죠.
 
월백의 머리카락을 잘라갔듯, 월백의 노리개도 그들이 가져갔으리란 직감이 뇌리를 찔렀습니다.
 
초조하고 급한 마음에 고택에 매여 있던 말 한 필을 끌어 올라탑니다.
 
그러니 결국. 향해야 할 곳은 명확합니다. 계명사입니다.
 
노리개를 가져온 다음에는 정말로, 이제, 월백의 곁에 계속 있어야겠죠. 잠시 떨어지게 될 일이 있더래도, 우리가 한 약조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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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마 판정과, 은밀행동 판정이 필요합니다.
 
노서하:
승마
기준치: 70/35/14
굴림: 23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은밀행동
기준치: 70/35/14
굴림: 70
판정결과: 보통 성공
 
터질 듯한 가슴을 눌러 삼키면서 북쪽으로 달립니다.
 
빗물에 말발굽이 미끄러집니다.
 
파도 우는 소리처럼 암랄한 우뢰가 연신 동토를 살랐습니다.
 
비록 낡은 절이라 하나 태후들이 오가던 곳이라 길은 잘 닦여 있습니다.
 
이름대로라면 소박하고 고즈넉한 절이어야 할 것 같은데, 오르는 길마다 사당나무에 푸르고 붉은 천이 묶여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오 분 정도 달리자 계명사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헌데, 들어서자마자 무언가 이상합니다.
 
절이라면 아무리 작은 암자라도 응당 지키는 승려가 있을 것인데… 어째서 아무도 없나요?
 
대웅전 위치일 법한 전각 하나만이 안쪽에서 가는 촛불 불빛을 내고 있습니다.
 
말굽 아래에서 자갈이 둥글게 굴러 깎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전각 내부에도 인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없는 것은 사람일 뿐, 서하에게는,
 
지나치게 익숙한, 것들이...
 
고개를, 들어, 올리면,
 
있어야 할 불상 대신 벽면에 걸린 것은 화살을 맞아 엉망으로 찢기고 구겨진 정인의 초상화…….
 
그의 무수한 불운과 재액을 비는 부적,
 
아마도 사술에 사용했을 것이 분명한 영문 모를 잿덩어리,
 
활과 화살, 영문 모를 끈,
 
…그리고 초상화 앞에 밀짚으로 만든 인형이 한 채, 월백이 차고 다니던 해진 노리개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노서하:... ...
(노리개를 손으로 쥐었다.)
(숨을 쉬기 힘들정도의 감정이 몸속에서 화산처럼 터지는 것이 느껴졌다. 손끝이 파랗게 달아오를 정도로 차갑다가, 동시에 더웠고. 눈이 빠질 정도로 심한 두통이 일었다.)
(덕지덕지 붙은 부적을 찢고, 잿덩어리를 엎어버리고, 전각에 굴러다니는 물건이란 물건들은 모조리,)
(아무도 없는 전각 내부에 한바탕 소동이라도 인듯 커다란 소리가 이리저리 튀었다. 누가 들을까 걱정조차 안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노서하는 벽면에 꽂힌 화살을 뽑아서, ...)
 
노서하:(엉망으로 찢기고 구겨진 제 정인의 초상화를 벽에서 떼어냈다.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모든것이 깨지고 부서진 한 가운데, 그가 초상화를 든 채 멀거니 서 있었다. ...)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노서하는 초상화를 곱게 접어 제 품안에 넣었다.)
 
이제 더는 가슴을 새파랗게 차지하는 것에 슬픔이나 먹먹함 따위의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습니다.
 
분노!
 
그것의 이름은 명백한 분노입니다.
 
엉망으로 찢기고 구겨진 초상화를 끝내 제 손으로 찢어발기지 못하고 품에 넣고 마는 당신의 심정은 어찌나 참혹했던지요.
 
막히는 숨을 터트리며 고개를 돌려보면, 땅에 떨어진 밀짚으로 만든 인형이 눈에 들어옵니다.
 
인형의 가슴 정중앙에는 대못이 박혀있는데,
 
분명 밀짚으로 만들었을 이것에서 기이하게도 피하 흘러나오다 멎은 상태입니다.
 
... ...
 
멎은.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파옵니다. 멎은 피를 보자마자 가슴이 쥐어뜯기듯 차고 오르는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심장이 멎을 때까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고 했죠.
 
심장이 멎을 때까지.
 
월백이. ...
 
죽을 때까지.
 
당신은 결국 떠올리고 마는 것입니다, 당신의 정인이 한 손에 들고 있었던 그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은, 물.
 
이상하게 당신을 내쫓으려 들었던 월백과, 월백이 말하던 '여행'이며 그 '두려움'이며. ...
 
당신은 노리개를 짓이기듯 손에 쥔 채 다시 말에 타오릅니다.
 
언제나 당신은,
 
모든 것에서,
 
뒤늦고 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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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부를 꿰뚫듯 통증마저 이는 숨, 그것을 다듬을 새 없이 거칠게 문을 열어제낍니다.
 
아.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 때문에 온통 희뿌옇습니다.
 
제대로 보이지가 않아 눈물을 닦아내듯 빗물을 훔치고 나면,
 
선명한 붉은 색이 이제서야 눈에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동백꽃이 달린 비녀를 가만 매만지고 있는 월백의 옷깃이 온통 붉습니다.
 
들어온 당신을 바라보더니, 다시 한 차례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합니다.
 
그러나 불티처럼 날카로운 눈,
 
그것만은 도저히 병자의 것이 아니었죠.
 
당신을 내쫓은 사이 그 빌어먹을 '두려움'을 정리하기라도 한 것인지.
 
이전보다 확고하게 등을 꼿꼿이 펴고 앉아있는 월백은,
 
그럼에도 숨이 점차 연약해져 단어와 단어 사이로 호흡이 껄떡껄떡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연월백:... ... 이제, 전하께서는.
저에게 두 가지의 약조를 해주셔야만 합니다.
첫 번째는, (숨이 막혀와 가슴께의 옷깃을 쥐뜯어야 했다.) ... ... 이 방 서랍에, 화첩이, 있습니다. 읽어 보시면, 저의 선택에 대해, 실마리를. ...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저의 여행이 끝이 난다면, 반드시. ... (그러나 다짐한들, 두려움은 다시 가슴을 비집고 나오니.) 다시 볼 날이, 있을 것, ... 입니다.
제게, 약조해주세요. ... ... (피가 흐르는 입술을 틀어막았다. 눈빛이 어둠으로 깊게 가라앉는다.)
반드시, 살아남아서 보위에, 오르세요. 그리고,
 
연월백:반지를. ... ... 끝,까지,
버리지, 말아, 주시라고. ... ...
... ...
(갸냘픈 웃음을 토해내었다.)
계속 그러고만, 있으실, ... 겁니까?
 
노서하:(그는 마치, 방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현실이 아닌 것으로 거부하기라도 하듯 방문 밖에서 선 채 당신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모든 소리가 마치 이명처럼 들렸다.)
(하지만 당신이 마치 부르듯 잇는 소리에 그는 발걸음을 가만 두고 있을수만 없었다. 그래서. ... ... 아주 천천히. 어지러운 사람이 균형을 잡듯. 느리게. 방 안으로 발을 딛었다. 그래. 이것이 현실이었다.)
(끔찍한 지금이었다.)
(발걸음이 멈춘 것은 당신의 반대쪽. 마치. ... 신방에서 처음 마주한 신랑신부처럼 말이다.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으나,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나. 그는 손을 뻗었다. 핏자국으로 얼기설기 번져있는 저고리에, 어제처럼. 누더기같이 해진 노리개를 걸어주었다.)
내가,
 
노서하:... 좀 더 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마치 이 상황을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을 돌릴 방법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한 투.)
 
연월백:(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허덕이는 숨만 내쉬던 월백은, 당신이 겨우내 다가와 노리개를 걸어주자 꿈만 같이 웃었다. 어떤 고통도, 어떤 슬픔도 두려움도, 모조리, 다, 없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 ...)
(그러나 당신의 말을 들으면, 월백의 표정은 지체할 것 없이 굳어진다. 뜨이지 않는 눈에 힘을 줘 당신을 바라보며, 끌어올렸던 입매를 굳히며 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연다.)
전하.
... ... (눈을 길게 감았다 뜬다.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옅게나마 그린다.)
서하야.
나 좀 봐, 응? (손을 뻗어 뺨을 감싸, 제게 들어올린다.)
 
노서하:(하지만 당신에게 그 감각들이 사라진 것은 그가 모두 삼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 눈 앞, 당장 그와 눈이 마주치거든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을테니. 이름이 불리면 그가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들어 당신을 마주보았다.)
(혼기가 빠진 작자의 얼굴이 이럴까? 특유의 빛이 나던 눈은 번들대는 물기가 가득했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맺힌 눈물들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툭, 투툭, 툭. 그것이 빗방울 소리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을만큼.)
... ... 왕의 자리가 탐났다면 네가 아니라 나여야 했다.
네가 아니라,
(입술이 벌벌 떨려 더이상 열리지 않았다.)
 
연월백:(그런 당신을 안심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렇게 우는 당신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월백은 시간이 없었다. 곧, 죽음이 머잖았다. ...)
(네가 두려워하니, 내가 더 두려워할 수 없잖아. 울며 네게 안기고, 네게 입맞춤 받고 토닥임을 받으며, 종래에는 안심하고 눈을 감고 싶었던 건 나인데. 이상하게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라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사이로 흐르는 것은 웃음 소리가 아닌 핏덩이들 뿐이다.)
(월백은 당신의 뺨을 한참이나 쓸어주었다. 그러다가, 곧,)
(짝!)
(죽음을 앞둔 사람임에도 당신의 뺨을 때리는 손길은 매서웠다. 평소처럼 장난식으로 당신의 옆구리를 찌르거나 입술을 때리는 것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는. 그대로 월백은 당신의 목깃 부근을 붙잡아 제게로 끌어당겨, 이마를 맞댄다. 눈을 바라본다.)
정신, 차려. (얼굴이 일그러진다.)
 
연월백:이대로, 날, ... ... 허망하게, 아무, 말도 못, 하고, ... 보낼 셈이야?
(토해내듯 외쳤다.) 정신차려, 노서하!
 
노서하:(제 뺨을 때리는 손길에 조금은 번쩍 정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돌처럼 굳은듯 했던 그의 어깨가 움찔거리기는 했으니까. 그제야 그의 초점없던 눈이 당신에게 바로잡힌다.)
(도망치려, 도망치려 했다가 당신을 바라보기를 몇 번. 위아래가 달라붙어 벌어지지 않았던 마른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월, 백아. 나는. (하지만 말문은 막히기만 했다. 평소 그렇게 떠들어대던 모습은 어딜간거야? 당신이 핀잔하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난, 너 없이, (견딜수 없단 얘기일까? 있을 수 없단 얘기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결국 그 의미는 단 하나를 관통하고 있었다.)
... ... 약조,
하기 싫다.
(그게 이 이야기의 종말임을 알았으니까.)
 
연월백:... ... 아니, (속닥인다.)
넌 해야만, 해.
그것이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당신의 뺨을 쓰다듬던 손을 툭 떨궜다. 몸이 힘없이 기울어 당신의 품으로 떨어진다. 호흡이 너무나도 얇다, 가늘었다. ...) 잘, 들어, 이게, 내, ... ...
유언遺言이 될지 몰라. ...
있지,
 
연월백:듣고 있어?
 
노서하:(제게 쓰러지는 몸을 받아들었다. 그래. 너무나도 익숙하게. 몸에 베어있는 습관처럼. 당신을 제 팔에 눕히고, 어깨를 안아 자세를 고쳐주었다.)
... ...
응,
 
연월백:... 네, 네 잘못, 아니야. 네 잘못, 하나도 없어. ... 이걸 먼저, 말해줬어야 했,는데. 미안. (웃음이 샌다.) 몇 번이고, 더 말해줬어야, ... ... (덜덜 떨리는 손을 들었다.)
손, 손 잡아줘,
 
노서하:... ...
(애써 웃는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다, 좀 더 편한 자세로 고쳐주려는 듯 어꺠를 끌어안았다. 마치 이러면, 고작 이런 것으로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산다는 것인양 자꾸만. 그리고서야 덜덜 떨리는 손을 굳게 맞잡았다.)
... ... 그래,
(떨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단어는 고작 하나였다.)
 
연월백:... ...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곧, 긴 잠에 빠져들 사람처럼.) ... 나, 돌아올, 돌아올 거야. ... 믿어줄,거지? ... ... 응?
 
노서하:... ... ...
그래, ...
(손을 더욱 꽉 붙잡았다.)
 
연월백:(이제서야 잊은 줄 알았던 두려움이 몰려온다. 그래, 이것은 여행이 아니다. 지독한, 지독한 순례길이 될 것이다. 어쩌면 그대로 깊은 아래로 파묻혀버릴지 모르지. 그것이, 나는, 너무나도 두려워서, ... ...)
너는, 비록 오르게 될 자리에, 맞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나의 사랑스러운 파도야.
바다가 수호하는 자녀이고,
내 평생을 함께 할,
 
나의 큰물인데,
 
하는 말은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하고 그저 입술을 달싹이는 것으로만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서로 닿지는 않았으되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입맞춤이었고, 다음에 벌어질 전개를 반드시 알기에 심장을 쥐뜯는 일입니다.
 
두 사람 모두가 해가 해海로 넘어가던 그날의 바다를 떠올렸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월백은 눈을 감고 여행을 떠납니다, 다만 그 감긴 눈꺼풀 안에는 영명한 눈에 새겨진 은색 자욱이 짙게 남아있으리라고…….
 
아, 잠시 쉰다는 것이, 이리도 안온하고, 춥고, 떨려서…
 
생각이, 짧게, 끊겨서… 신랑 신부조차 되어본 적 없는 정인들끼리…….
 
'이' 감정만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어서, 판정하는 것도 아니어서… 수를 읽는 것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묘사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 있습니다.
 
그러나 날이… 희뿌옇게 새벽이 밝아 버리지 않겠어요,
 
당연한 일이지요, 오늘 꺼진 불이 그 하나뿐만도 아닌데… 새벽별을 잡아 죄어도 아침은 옵니다. 오고야 맙니다.
 
자란다는 것이 이럴 필요는 없고, 반드시 무언가를 잃어야만 성장하는 것도 아닐진대…
 
하지만 비가 멎었습니다. 많은 것들을 단죄해 마땅한 아침이 타오릅니다.
 
이제 당신은 가장 큰 것을 잃어버렸고, 대체 무엇으로도 그것을 갈음해야 할지 몰라 괴롭겠지만,
 
그러나 약속하였으므로.
 
이내 기다리는 것만은…….
 
노서하:... ... .
(죽어가는 정인을 끌어안는 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었으나, 그 어떤 것을 상상하든간 지금의 현실보다 끔찍할 순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온기. 저가 아무리 쓰다듬고, 숨을 불어넣듯 입김을 식은 몸 곳곳에 부어도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진실마냥. 그 몸이 계속, 계속해서. 계속해서. ... ... .)
(아. 끔찍한 아침이 온다. 당신을 잃은지 첫번째 아침이 온다. 지옥같은 하루의 시작인 셈이다.)
월백아,
(벌벌 떨리는 손이 입가에 말라붙은 핏자국 위로 달라붙었다.)
 
노서하:월백아, (사람의 핏기가 사라지는 것은 입술에서부터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었다. 입가를 문지를수록, 검붉은 핏자국 아래 하얗기만 한 피부가 보였다.)
... ... .
다, 다시. 다시 말해다오.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네가 남긴, ... ... .
(볼을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만져주고, 마치 잠든 정인을 깨우기라도 하듯 몇 번이고. 이름을 불러서,)
 
노서하:(그래. 이 짓을 새벽까지 하고 난 뒤에야. 당신의 발끝에 시간의 흐름을 보이듯 환한 빛그림자가 비치고 난 다음에야 이것이 지금임을 알았다.)
(당신이 행여나 숨이 모자랄까 숨마저 거의 멈추듯 쉬던 그가 그제야 소릴 내며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에 반응하듯 다시금 눈물이 멈춘 눈가에서 또, 또, 계속해서.)
(비가 멈췄는데, 우린 또 다시 젖어간다.)
(그리고 이 물기는 절대로 마르지 않으리라.)
 
모두가 끌려간 대사간의 고택에 살아있는 숨이 단 하나 남았을 때면,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를 닮은 것이 천지를 가득 매우듯 했습니다.
 
비가 멈췄으나 끊임없이 비가 내립니다, 아, 상흔처럼 남은 통증에 당신은, 노서하는, 정인을 잃은 황태자는.
 
비로소 지옥같은 하루의 첫 시작을 맞이합니다.
 
낭화애담浪花愛談 : 파랑이 이는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