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피어] 나쁜 버릇 中
"누구야?"
"누구."
"금방 도망 간 후배."
"그건 선배가 알 필요 없는데."
"그래? 그럼 하던 거나 마저 할까?"
"안돼, 나 이제 집 갈 거예요."
"뭐? 이렇게 굴 거야?"
"응."
이스피어는 심드렁하게 눈 앞의 남자에게 핸드폰 번호를 입력해주었다. 왜 이렇게 자꾸 질척댄담. 잘못 골랐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 눈 앞에 뒤돌던 아이작의 모습이 계속 아른거렸던 까닭이다. 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무심코 입술을 핥았다. 되도않는 스킨십을 시도해오는, 오늘로 1일째인 연인을 버려두고 친구들에게 다가가며. 이스피어는 계속 같은 생각 위를 맴돌았다. 아이작은 왜,
"……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이스피어의 중얼거림에 친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걔는 '그런 거' 아니랬지?"
"응. 아이작한테는 진심이야."
"사귀는 건 아니라며."
"다른 놈들처럼 기만할 생각도 없고, 애초에 그런 걸 뼈져리게 싫어해. 우리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도 그 애한테는 가치가 없어."
"그래? 실연당한 표정 같았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럼 잘못 봤나봐."
대체 뭘까, 입술을 매만지던 이스피어는 자연스레 이야기의 화제를 돌리며 수다를 떨었다. 반으로 돌아와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황급히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아이작.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나보네. 이스피어의 눈이 날카롭게 뜨였다. 아이작은 타인을 혐오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사랑하냐, 하고 묻는다면 그는 사랑 자체를 제 삶에서 분리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으니 얼토당토 않는 소리라고 답했겠다.
이스피어는 아이작과 약속을 했다. 그것은 이스피어의 삶에 있어서 무척 큰 도박이었다. 처음 자신이 그에게 다가갔을 때 보였던 눈빛에는 확실한 혐의가 있었기 때문에 이스피어는 그의 경계를 가늠하는 데 상당수의 시간을 들였다. 그런데… 아이작은 자신을 싫어했던 모습과 달리 너무 쉽게, 자신의 곁을 내주었다. 이스피어가 아이작 딜라이트라는 인물 자체에 욕심을 가지게 된 이유였다. 나쁜 버릇이 도져 그에게 접근한 건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알 수 없는 사람이라니? 이스피어는 아이작이 탐이 났다. 그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아. 무너뜨리고 싶다….
태연히 아이작의 곁에 다가간 이스피어는 정리해둔 가방을 뒤로 매며 말을 붙였다.
"돌아가자."
누구나 경계란 걸 가지고 있다. 타인이 자신에게 영향을 끼쳐도 되는 범위를 아우르는 단어다. 완전한 타인, 친구, 가족. 대체로 그 경계는 여러 선으로 그어져있기 마련이다. 이스피어만 해도 타인에게 적용되는 선과 놀잇감에게 적용되는 선, 친구와, 진짜 친구에게 적용되는 선이 다 달랐다. 아무튼 이스피어는 나쁜 버릇이 향하는 사람들의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차근차근 서로가 분간되는 한계를 녹이고 흘려보내 온전한 상대를 마주했을 때. 그러니까 자신이 그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존재가 되었을 때 말이다…. 그는 그 순간에 상대를 훌쩍 떠나가버리는 것을 좋아했다.
한데 아이작과 함께 있으면서 깨달을 수 있던 점이라곤 그에게는 경계가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뿐. 다른 것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아이작에게는 선이 하나 뿐이었다. 자신과, 타인.
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얘 진짜, 가지고 싶다. 그것을 발견한 날에는 도저히 그것을 믿을 수 없어, 몇 번을 곱씹어 생각했었다. 감탄과 희열에 찬 이스피어가 내릴 수 있던 결론도 하나 뿐이었다. 정말. 이건 놓칠 수 없다. 그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변함 없었지만 그것보다는 이제 그의 선 안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앞서나왔다.
하나뿐인 선을 뚫고 들어가려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를 기만하고픈 탐심이나 자신의 일상, 다른 유희를 위한 시간과 감정 소모 따위들, 또…. 오늘따라 유독 시선을 맞추려 들지 않는 아이작의 뒤를 쫓아 걸어가며 이스피어는 그를 기다려주었다. 그러고보면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아이작이 자신의 약속을 한 차례 거절한 이후의 상황이었다. 아쉽긴 했어도 미련을 털어버리려 했던 이스피어는 마침 좋은 장난감을 발견한 상태였다. 자신에게 공개 고백을 하려던 것에 괘씸한 마음이 들어 실컷 가지고 놀다가 버리려고 했는데, …우연찮게 아이작이 얻어 걸렸었지. 제 손을 붙잡으며 뭐라 말했었지? 가면 안 되냐고 물었었나?
"……한 거야?"
"……미안. 잠깐 못 들었어, 뭐라고 했어?"
아. 실수했다. 이스피어는 앞질러 걸어가던 아이작의 곁으로 거리를 당장 좁혀 손을 붙잡으려 했다. 했는데. …아이작이 손을 밀어냈다. 거부하는 것이 확실했다. 그 날 그가 먼저 이스피어의 손을 붙잡아온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사랑과 소유욕은 다르다. 이스피어는 아이작이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를 소유욕으로 명명했었다. 아이작이 자신을 사랑하게 될 일은 없을 것이지만-사랑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이스피어가 많은 시간을 투자하긴 했다. 그가 아이작의 방 침대에 누워있어도 미간을 찌푸리기보단 자연스럽게 이불을 덮어주게 되기까지 관계가 진전했다. 이스피어가 만족할 수 없다 뿐이지 이미 아이작에게 이스피어는, 유일하다는 단어를 붙여도 될 만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자신을 붙잡고, 말한 것이다. 약속하자고.
그러니까 이 행동도 소유욕, 질투같은 감정에서 기인한 행동으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려나.
"사귀기로 한 거냐고… 물었어."
"괜찮아 보여서 그냥, 뭐. 응. 사귀자고 했지? …그런데,"
이스피어는 드물게 망설이듯 입술을 다물었다. 여기서 밀어붙여야 할지 달래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돌아와 이야기하자면, 아이작의 선은 단 하나뿐이라서. 그것을 뚫겠다고 다짐한 순간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를 기만하고픈 탐심이나 자신의 일상, 다른 유희를 위한 시간과 감정 소모 따위들, 또.
자기 자신의 경계까지.
간단한 이야기다. 이스피어 틸다가 아이작 딜라이트를, 진심으로 아낀다는 말이다.
"너. …질투해?"
"……그런 거 아니야."
"그럼 기분이 왜 안 좋은거야?"
"내가 뭘."
반 박자 늦게 내뱉어진 목소리에는 거짓말이 참 티가 났다. 이스피어는 웃음을 참으려 잠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시 손을 붙잡아볼까. 어느새 아까처럼 벌려진 거리에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스피어가 입술을 열었다.
"아이작. 네 걱정이 정확히 뭔진 모르겠는데, 깊게 생각하지는 마."
"…."
"어차피 내가 가지고 노는 사람이야. 내 버릇…이라고 해야하나? 한동안 심심했거든."
"……뭐?"
"얼마 안 가서 헤어질 거란 얘기야. 너랑은 다르게, 음. 그래, 장난감처럼. 장난감처럼 잠깐 즐기고 싶어서 사귀는 거라고."
담담한 목소리는 계속해 이어졌다. 거듭 말하지만 너랑은 달라. 뭐, 처음에는 너한테도 그러려고 접근하긴 했었지만, 이제 그런 게 중요하진 않지? 너도 눈치챘었고. 지금 있어서 내게 제일 중요한 사람은 너니까. 너에게도, 아마 그럴거고. 솔직히 말하면 나 좀 억울해. 우리는 오히려, 서로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에 완벽한 관계지 않아? …그러니까, 아이작.
이스피어가 손을 뻗었다.
"이만 손 잡아도 돼?"
…….
그러나, 거절이었다. 느리게 뻗어진 손이 만류되고 돌아오는 것은 그의 첫 모습처럼 날 서린 시선. 타당한 이유 없이라도 자신을 탓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이스피어는 아이작의 현재 감정이 그렇다고 느꼈다. 감정이나 언어를 억누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스피어가 한참을 기다려줘도 아이작의 입술은 다물린 채 열릴 생각을 못했다.
싫구나. 이스피어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아이작은 옆으로 눈을 피했다. 굳이 시선을 따라갈 생각을 하진 않았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기분이 되어버린 이스피어는 입술을 매만지며 비음을 흘렸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아이작의 집에 놀러가서 다 보지 못했던 영화를 함께 볼 생각이었는데. 이런 상태라면 오늘은 안 가는 편이 좋으려나.
"혼자 있고 싶어?"
"……."
손가락으로 머리를 빙빙 꼬기 시작하며, 이스피어는 눈썹을 까딱거렸다. 이정도 되면 본인도 조금 기분 나빠진다. 아이작의 태도나 행동에서 기분이 나빠진 것이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스스로 짜증이 났다고 해야할까. 어쨌거나 아이작과 더 무슨 말을 하든 진척은 없어보였다.
그래, 뭐. 한숨을 삼켰다.
"…혹시나 말하는 건데 나. 화같은 건 안 났어. 그냥. …내가 바라는 건. …네가, 내가 한 말을 다시 생각해봐줬으면 좋겠다는 것 정도? 아니면 내일이 되면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것 정도."
너는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니까. 이스피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일 봐, 아이작. 몸을 돌렸다.
*
그리고 장장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이작의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쾅!
"대체 왜지??"
이스피어의 주먹이 책상에 내려쳐지는 것에 친구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저마다 시선을 교환했다. 옆에 앉은 친구, 린다가 빨대로 스무디를 쪼록쪼록 마시곤 물었다.
"아직도 안 풀렸어?"
"뭘까? 뭐지? 내 무엇이 부족해서 이런걸까? 나는 항상 완벽하단 말이야! 그렇게 철저하게 행동했는데!"
"들었어? 얘 자존심 상했나봐. 이스피어 틸다, 한 물 갔다."
와하하! 웃음소리가 새처럼 지나가는데도 이스피어는 심드렁하게 손에 턱을 괴었다. 툭, 툭. 다른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일정했다. 태양 빛을 닮은 눈동자가 수심으로 가라앉는 것에 친구들은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앞으로 밀어주며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근데, 역시 집착하게 되는 상대한테 연인이 생긴다고 하면. …사랑이 섞이지 않은 관계더라도 좀 그렇지? 피어가 한 행동에 섭섭함 느낄 만 했지?"
"좀 그렇지."
"아니, 그래도 아이작이랑 만나는 시간이 훨씬 많단 말이지? 그 애 앞에서는 연락도 안 하고, 아직 제대로 데이트도 안 했고…."
"와, 네 남친은 괜찮대? 제대로 꼬시고 있는 거 맞아?"
"그래서 지금 거의 방치중. 아직은 '작업'에 가망성 있어. 그런데, 계속 두 일에 집중하다보면 아이작이 정말 삐칠 것 같단 말이야."
"이대로 헤어지면, 너. 처음으로 하는 실패잖아."
"아~. 그래서 어느 쪽도 지금 포기가 안돼."
그런 자존심 상하는 일, 절대 못하지. 한숨을 푹 흘린 이스피어는 힘없이 케이크를 잘랐다. 시큰둥한 몸짓에 대신 답답해진 친구, 린다는 케이크를 잘라주곤 입에 케이크 조각을 쏙 넣어주었다. 이스피어가 그것을 냉큼 입에 물고 우물거렸다. 그냥 내치면 안돼? 안돼, 얘 진심이래. 우리한테도 진심인지 아닌지 모르는 애가 무슨 일로? 몰라, 쟤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 하여간 이것들이. 이스피어가 눈썹을 까딱거렸다. 뭐라 한 마디 쏘아주려는 때, 핸드폰만 바라보던 친구, 메르시가 입을 열었다.
"너, 진심이면. 지금도 걔 옆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답답해서 너희 만나러 온거야. 물어봐도 답을 안해줘. 그렇다고 계속 물어보기도 뭣하잖아."
"원래 그런 거 신경 안 쓰잖아."
"하지만, 하. …뭐라고 해야 해 이걸."
우물쭈물거리다 결국 이야기하고 만다.
"……진심으로 사람을 아껴주는 건 생각보다 어렵구나, 싶어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내가 알던 피어 맞아? 낯설어. 징그럽고."
"도플갱어인가봐."
"내일 지구 멸망 하는 거 아니지?"
"이것들이 진짜."
현실적인 조언을 해달라고! 이스피어의 분노에도 친구들은 깔깔거림으로 화답했다. 이스피어가 바라는 분위기가 나온 것은 이러고도 5분 가량의 놀림이 지나간 후였다. 후, 잘 놀렸다. 이런 날이 언제 오겠어. 나 한 4년 정도 젊어진 것 같지 않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환한 웃음으로 억누르던 이스피어의 주먹이 꾸우욱 쥐어졌다. 이제 집중 하세요? 네 언니.
"아무튼. 우리가 볼 때 너는… 걔 속을 파헤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소중하게 대해주고 싶다며."
"피어가 쓸데없이 조심스러워져서 말야. 징그러워~."
"에잇. 조용히 해."
"그러니까 궁금증도 접어둬보고,"
"자존심 상한단 말야."
"자존심 챙기다간 관계 쫑난다?"
"아이…."
"조용히 들어보라고."
"알겠다고요, 언니이."
말꼬리를 늘리는 이스피어의 모습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친구, 유진은 신경질적으로 다 녹은 아이스티를 빨대로 휘저었다.
"궁금증 접어."
"…그리고?"
"궁금해하지 말고, 그냥 달래봐."
"무작정?"
"첫 번째 이유, 네가 걔한테 진심이라서. 두 번째 이유, 그런데 네가 지금 있는 남친을 포기하긴 또 싫어할 것 같아서. 조금 위태로운 상황 아닌가? 우선순위를 걔한테 둔다면 관계 회복이 우선인 것 같아."
"그 말엔 나도 찬성. 피어, 일단 달래놓고 나중에 살살 꼬드기는거지."
"아냐, 그냥 꼬드기지도 마. 얼렁뚱땅 넘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야."
"왜? 난 걔 속내가 너무너무 궁금한데."
"네 궁금증이 중요해? 선 넘는 거고, 어차피 피어가 선택할 일인데."
둘이 신나게 대화하는 걸 바라보던 이스피어는 비음을 흘리며 메르시 쪽으로 기울였다. 어렵사리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스피어가 방긋 웃었다. 너는 어때? 속닥이는 말에 메르시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눈꺼풀이 두어 번쯤 깜빡이면 그가 고개를 숙이며 답한다. 관심 없어.
이스피어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
그 날 이후로 이스피어는 아이작에게 스킨십의 허락을 묻지 않았다. 처음, 자신을 혐오했는데도 곁을 내어주었던 그 특성을 이용했다고나 할까. 말 없이 손을 붙잡아오는 것을 거절하는 것도 몇 번이지, 그도 지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이스피어는 제게 한 손을 내어준 채 침대 위에 교과서를 펼쳐놓고 공식을 적어내려가는 아이작을 흘끔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엎드린 아이작의 어깨에 볼을 붙이고 같이 교과서를 내려다보았다. 볼살이 눌려 발음이 뭉그러졌다.
"숙제 있었어?"
"47p까지."
"언제까지?"
"내일까진데. …안 했어?"
"응. 망했다."
딴 짓 하지 말걸…. 황망하게 중얼거리며 아이작에게 더 바싹 몸을 붙이는 모습에 아이작이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눈썹을 까딱거린 이스피어가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아이작의 볼을 꼬집어 잡아당겼다. 때는 일요일 오후 3시. 장소는 아이작의 집, 방.
"웃겨?"
"…왜. 난 웃으면 안돼?"
…마음 약해진다.
"……아냐, 맘껏 웃어. 근데 내가 좀 열 받을 뿐이야."
"…숙제 보여줘?"
"됐어. 너한테 폐 끼치기 싫어."
이런게 무슨 폐야, 라며 아이작이 답하려던 참이었다. 책상 위에 두었던 이스피어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야, 대체. 중얼거린 이스피어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걸어갔다. 어깨에 닿았던 온기가 단숨에 식기 시작하는 것에 아이작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 …아. 제이, 자기야?"
사실 이스피어가 볼을 기댔을 때부터 공식을 적어가던 손은 멈추었다. 이스피어의 연인이다. 때는 일요일 오후 3시. 평범한 연인들이라면 벌써 약속을 잡아놨겠지. 데이트를 하자고 전화라도 걸었나? 아이작은 그런 이성적인…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런 예상은, 항상 벗어나질 않았다.
"만나고 싶다고? 뭐. …좋아."
아이작의 가슴이 불쾌함으로 뛰었다.
"어디서? 저녁에 만날까? 한 6시쯤에 시내에서…."
탁.
참지 못한 아이작이 핸드폰을 가로채가는 소리였다. 이스피어가 통화를 하며 지었던 웃는 표정 그대로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틸다? 왜 말을 하다……. 전화는 끊겼다. 아이작은 아무런 말도 없이 화면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이스피어는 빼앗긴 핸드폰을 가져오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묻기로 했다.
"뭐야? …내가 안 갔으면 좋겠어?"
이번에는 눈을 마주쳐야 할 때였다. 이스피어가 손을 뻗어 아이작의 뺨을 감싸 제게로 돌렸다. 버티려는 힘을 주다가, 반 박자 뒤에 힘을 풀며 순종적으로 고개를 돌린 아이작은, 글쎄. 이걸 무슨 표정이라 해야 했을지. 참 어렵다. 아이작이 응, 하고 속삭였다.
그럼 먼저 돌려줘. 안되겠다고 연락은 해야 할 거 아니야. 뻗은 손에도 아이작은 응답하지 않았다. …돌려줘, 아이작. 답이 없었다. 이스피어가 웃음을 지우기 시작했다.
"뭐하자는 거야?"
"…이스피어. 헤어지면 안돼?"
이스피어가 숨을 가다듬었다.
"아이작. 나는 일단, 네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모르겠어. 네가 말해주지 않았고, 또. 그러지도 않을 거잖아."
"이스피어, 나와 약속해줬잖아."
"그래. 그래서 우선 돌려달라고 지금, 이야기하는 거야. 네가 나를 존중하기 힘들어하는 상황에서도 내가 네 생각을 여전히, 존중하고, 있잖아."
아이작이 입술을 짓씹었다. 무표정의 이스피어는 이해 불가한 영역을 살피는 탐구자마냥 눈썹을 까딱거렸다. 마지막으로 말하는거야. 네가 날 존중한다면 돌려줘. 그러니 아이작은 그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지금의 상황은 죄다 아이작의 잘못에서 기인된 일일지도 몰랐다. 아니, 아이작의 잘못이다. 제 잘못이 맞다.
연인에게 문자 전송을 끝낸 이스피어는 침대 위로 핸드폰을 던지며 한숨을 푹 흘렸다. 날카로운 시선이 아이작을 향하는 것에,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스피어가 내렸던 입꼬리를 살며시 끌어올리지만 진심으로 짓는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이스피어는 아이작을 지나쳐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가 눈짓 하는 것에 아이작도 그 옆에 따라 앉았다.
이스피어가 아이작의 손을 붙잡아왔다. 아이작은 손끝을 움찔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내가 연인을 사귀면, 너에게 소홀해지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들어? 외롭지 않게 해주겠다 약속했으면서. 너를 외롭게 두는 것 같아서?"
"…그 새끼랑 키스했어?"
이번에도 아무 대답이 없을 것이라고 어림짐작한 이스피어가 짙은 한숨을 흘려보내려 할 때였다. 이스피어는, 아이작의 눈 안에서 선명한 질투를 읽어낼 수 있었다. 언제는 질투 아니라며. 톡, 톡. 아빠다리 한 자신의 허벅지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이스피어가 고개를 기울였다. 눈을 깜빡였다.
"했어. 또 궁금한 건?"
"손도 잡고, 포옹도 했어?"
"했어."
"……."
"…아이작."
이스피어가 가늠하듯 시선을 보내며 조심히 말을 꺼냈다. 나는 시간을 줬어. 너도 지금 네가 고집 부리는 걸 알거야. 네가 말 할 생각이 없다면 대안책을 찾아왔어야지. 그도 아니면,
"혹시. …위로가 필요해?"
내 진심이 부족했니? 그 말에 아이작은 눈을 살짝 크게 뜨곤 이스피어를 바라보았다. 왜 이 말을 내뱉은 이스피어의 얼굴 빛이 창백하게 느껴졌는지. 아이작은 다급히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쓸어주었다. 눈을 굴렸다.
"아니야. 그런 거."
"그렇다면?"
"…그냥, 넌."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아이작이 눈을 감았다. 그런데도 이스피어의 뺨을 쓰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이러겠지. 그 놈들에겐 진심이 아니라 했으니까. 나랑은, 다르게."
속삭이듯 말한 아이작이 말을 삼켰다. 아는데, 이 배신감은 왜 지워지질 않는걸까. 이스피어가 담담히 맞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도 나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 놈들은 죄다 장난감이고, 이스피어의 손에서 놀아나다가 버려질 것이다. 그 중에서 자신은 다르다. 이스피어가 자신을 버릴 일은 없겠지. 안다. 약속. 약속했으니까. 하지만. 그런데.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뭘 바라는 거야, 아이작? 왜 이런 환청 따위가 들려왔을까.
내가 너를 좋아해서 이러는 걸지도 모른다는 말은, 죽어도, 못 해.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더러운 감정이 솟구쳤다. 속을 난잡하게 어지럽히는 것에 아이작이 한 손으로 깊게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짙은 한숨을 뱉다가. 무심코 말했다.
"……위로해줘."
이스피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위로? 되묻는 말에 아이작이 눈을 길게 감았다 뜨며 이스피어가 제게 파고들 품을 벌렸다. 아이작의 생각대로, 어쩌면 바람대로. 이스피어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곧 무릎으로 침대 위를 기어와 아이작의 허리를 끌어안는 것과 동시에. …풀썩. 둘의 몸이 침대 안쪽으로 기울어졌다. 아이작의 가슴 위로 볼을 붙인 이스피어는 눈을 감고 잠시 그 온끼를 만끽하는 듯 했다. 기묘하게도 부글거리던 속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다. 그것의 근원지가 너인데. 왜일까. 그를 품에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추악한 욕망이 고개를 든다. 영영 이 품에 가둬두고 싶다던가, 그 애인이란 놈을 세상에서 없애버리고 싶다던가, 하는. 그런.
"…이스피어?"
상념을 잘라내듯 품의 이스피어가 불현듯 상체를 일으켜세우려 들었다. 놓아주기 싫다. …잠깐. 내가 그딴 생각을 했다고. 물씬 솟아오르는 혐오감에 아이작이 팔에서 힘을 풀었다. 아이작이 많은 것을 꾹 담아낸 눈빛으로 이스피어를 올려다본다. 그러면.
아. 아이작의 표정이 무방비하게 풀려나갔다.
이스피어의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선을 넘어 흘러내렸다. 아이작이, 못내, 애정하는, 또,
"있지, 아이작."
웃음이,
"키스해줄까?"
이스피어, 틸다가,
*
"대신, 다음부터 이러지 않겠다고 나와 약속해."
*
잔인하기 짝이 없는 그의 공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