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커뮤니티

[그렌] 해야 할 일

여우비야 2023. 9. 16. 18:22

 
 
 "멍청아, 먼지투성이라고. 거기."
 어서 나와. 병원에서 퇴원한 지는 한참 되었는데도, 동생은 여전히 큰 소리가 나면 무작정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그걸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건 언제나 그렌의 역할이었다. 손에 잡힌 팔뚝은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으나, 그래도 안아줄 생각은 없었다. 아, 진짜. 신경질적으로 뱉는 목소리에도 떨림은 그대로다.
 "이제 그런 일 없을 거라고 말했잖아."
 하물며 다친 정도를 따져봤을 때 더 크게 다친 건 그렌의 쪽이었다. 거기에 덤터기 써서 혼나기도 그 혼자였지. 그렌 포스터! 얌전히 심부름을 간 줄 알았더니 동생을 끌고 백화점으로 놀러나 가! 물론 그 끝엔 눈물 섞인 걱정도 있었다. 엄마가 너무너무 걱정했잖니….
 그렌이 생각하기엔 정말 별 일 아닌 사건이었다. 동생 녀석 손 잡고 신나게 시식코너나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화재 경보음이 울리지를 않나. 혼란이 장악한 일대며 급류처럼 도망치는 사람들이며, 중간에 놓쳐버린 동생을 겨우 찾았을 때 이미 그의 목덜미는 화끈거림으로 그렌의 머리를 툭툭 치고 있었다. 야, 너 다쳤다고! 빨리 도망치라고! 이 불길 속에서! 아, 시끄러워. 일단 얘 좀 데려가고. 창고였나 화장실이었나 그도 아니면 시식코너 구석이었나.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정전이 내려앉았던 백화점의 1층. 그때도 그렌은 동생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있었다. '너희들, 지금 거기서 뭐 하는 거니!' 도망치던 어른 한 명이 그와 그의 동생 둘을 옆구리에 달랑 걸치지 않았다면 큰일이 일어났기야 했겠다. 빠져나온 직후, 불이 붙은 가판대가 그리로 넘어졌었으니까. 그래도 무사히 잘 살아나왔으니까 된 거 아닌가? 아슬아슬하게 구조대원들의 손길로 빠져나온 백화점은 몇 십분 뒤 무너져 내렸지만, 어쨌건 그렌은 그리 큰 유감이 없었다. 이 바보같은 동생 놈만 빼면 말이다. 스스로를 어둠에 가둔 사람의 입은 쉽게 열리질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기어이 일 년이 지나도록. 그렌은 동생을 끄집어냈고, 끌어냈고, 인교했다. 어느 때의 동생은 먼지투성이였고, 어느 때의 동생은 목이 손톱자국으로 덕지덕지였고, 어느 때의 동생은 얼굴이 다 젖도록 눈물범벅이었다. [ ─ 지난 16일에 발생한 홀든 백화점의 유해 수습이 오늘부로 종료되어 … ] 아니. 이제 그런 일 없을 거라고. 너 살았잖아, 우리 무사히 빠져나왔잖아. 등신같이 언제까지 집에만 있을 건데, 나가서 놀고 좀. 어? 형이 축구공도 새로 사 왔다고, 인마! [ … 사망자는 총 84명으로 추정 … ]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기적처럼 걸어 잠근 문이 열릴 때가 찾아온다. "형." "…뭐." 예나 지금이나 심드렁한 그의 어투에 동생은 잠시 웃다가, 버썩 마른 얼굴을 쓸어내린다. 어둠에 짓눌려 웅크려진 등이 작게만 보인다. 그 애는 물었다. "그런 일이 또 안 일어날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
 
 …그날, 2월 16일. 그렌은 자신과 동생이 백화점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건 단순한 운이었으며, 백화점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죽은 사람은 두 자릿수를 넘긴다는 걸 알았다. 죽음이라는 개념은 어린 그렌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에 있었으나 그 죽음에, 폐인과 같았던 동생의 1년을 대입해 보면 얼추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엄청 싫은 걸 겪었다는 거잖아. 엄청 싫고, 아무튼 불합리한 일을 겪었다는 거지? 그건 뭔가 이상해. 그건 잘못됐어. 그렌은 1년 새 반쪽이 된 동생을 바라보다가,  끌어안아주지도 격려나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않고, 그저 손을 뻗어 덥수룩한 머리를 세게 헝클어뜨렸다. 악!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망나니야! 짜증에 찬 비명이 들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멍청아. 너 그래서 학교엔 어떻게 돌아갈래? 분명 적응 못하고 낙제받을 걸?" "너 진짜진짜진짜 싫어." "그럼 언젠 좋아했냐?" 엉킨 머리카락 사이로 천천히 손이 빠져나온다. 동생의 갈색 눈동자가 그를 향할 때, 그렌은 그제야 씩 웃어 보일 수 있었다. "너 형 안 믿냐?" "어." "아, 빡도네." "악!" 다시 헝클기 지옥으로 돌아온 걸 환영하마, 동생아. 그렇게 한참을 티격태격 싸움을 이어갔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툭 내던지듯 말했고. 걱정 마, "내가 그런 일 다시 안 일어나게 해 줄게." 그때부터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이 되었다.
 
 * * *
 
 나쁜 놈들은 싫다. 남들 다 지키는 규칙 멋대로 어기고, 주변에 민폐만 끼치는 놈들. 그래도 특수부대에 들어오며 다양한 악惡을 접하게 되면 나름의 기준이란 게 생기기 마련이었다. 왜, 가끔 보는 영화에는 꼭 그런 빌런이 나오지 않는가.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악당에게 합류해 버린' 놈이라던가, '목숨이든 소중한 사람을 저당 잡혀 억지로 악당의 편에 서게 된' 놈이라던가. 제길, 말하고 나니 거기서 거기 같긴 하네. 어쨌건 중요한 점은, 매체 속에 나오는 인물이 현실에서도 나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단 것이었다. "제, 제발! 억지로, 억지로 시켜서 그랬어! 이대로 내가 잡혀가게 되면 처자식이…!" "아, 그럼 처음부터 불법적인 일에 손대질 말던가." 가장이 붙잡혀가고도 괜히 신경이 쓰여, '조직'의 마수가 남은 가족들에게 닿지 않도록 손을 쓰는 건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싫었다면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노력해 보지. 결국 그곳에 남았단 건 또 다른 방관이지 않아? 근데 그렇게 따지면 저 놈에게 사주를 맡긴 놈이랑 거부할 수 없어 수행한 저 놈이랑 비슷해지는 거 아닌가. 특수부대에 입단한 초반, 그렌의 기준은 수차례 혼란을 삼켰다. 그가 규정하는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악인은 어디까지 악인인가. 그러니까, 그는 어디까지를 동정하고 어디까지를 잘라내야 하나. 혹은 도움을 주어야 하나. 오래간만에 만난 동생은 퀭한 그의 얼굴을 보곤 물었었다. "그래서. 관둘 거야?" "엉? 내가 미쳤냐?" "지금까지 신세한탄하던 건 누구 입이더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나쁜 새끼들 잡아 족치는 거 아주 맘에 들고. 직업 만족도 짱이야." "그럼 난 왜 굳이 부른 거지. 진짜 짜증나게." 그렌은 대충 말을 무시하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벌어진 입술에서 말이 흘러나오는 건 몇 초 뒤의 일이었다. "난 영화 속에서만 봤는데. 현실에서도 진짜 있더라. 쓸만한 이능력 가졌다고 가족 목숨 인질로 잡혀서, 이리저리 조직 아래에서 구르게 된 놈이." "동정해?" "근데 그놈이 어쩔 수 없더라도 죄를 지은 건 맞잖아. 사람이 죽었다고. 제법." "동정하네." "빌어먹을, 그 상황이 이해가 가서 문제라고. 진짜." 한참 테이블을 두드리던 동생은 막 하이스쿨을 졸업한 나이였다. "…그럼 딱 '직접' 잘못한 만큼만 벌 받게 해." "뭔 생뚱맞은 소리야?" "본인이 저지른 만큼만 대가를 받게 하라고." 그리고 그 시킨 놈들은 그보다 훨씬 더 벌 받으면 되지, 뭐. 동생은 웃었다. "형은 그런 놈들 잘 족치잖아." 그리고 그게 형이 하는 일이고.
 
 * * *
 
 돌아와서, 우선, 그렌은 로즈 한을 동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자는 버젓이 '사병'의 이름을 업고 이곳으로 왔고, 자신을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늠하기까지 했다니까.
 "원치 않게 사병 노릇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많은 것이, 달라진다. 사실은 사병의 이름을 벗고 그 죄악에서 벗어나고 싶다 외치는 것 같으니까.
 "속내를 말씀드리자면··· 뭐 하나 원해서 한 일 같은 건 없었어요. 그냥, 제가 속한 갱단의 보스는 야욕이 큰 사람이고 미구엘은 막대한 선납금을 턱턱 안겨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업가죠. 그것뿐이에요···."
 그리고 죄악의 대가를 물어야 할 놈들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아뇨. 선택권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요."
 그것이 동생에게 약속한, 그렌 포스터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당신이 싫어하는 사병의 말을 왜 이렇게 진지하게 들어줘요?"
 "……."

 그는 범죄자의 교화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원치 않았던 일이며 이제,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도와주는 것이 응당 그가 해야 할 일.
 여자가 조직에서 벗어나 무관한 사람이 되는 일은 무척이나 힘든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 분명했다.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으로 봐서는 조직에서 벗어나긴커녕 이 호텔에서 비명횡사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와주세요."
 라고,
 "그 말이 진심이라면, 거절할 생각은 없어요."
 누군가가 말한다면.
 
 "도와주지, 그럼."
 처음은 감, 둘째는 어리숙하기 짝이 없는 여자의 모습.
 마지막은 그 볼품없는 떨림.
 자신의 행운을 맹신하는 것치곤 당신은 다가올 미래를 너무나 두려워해.
 그렌이 손을 내밀었다.
 "그렌 포스터. 원래 내가 그런 놈들 족치는 거에 재능 있걸랑."
 그제야 구김 없는 미소를 보였다.
 "믿어. 너 같은 애들 도와주는 게 내 일이야."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말 투성이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