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루스] The Witch Garden
프레헨을 빠져나온 키루스는 머글 세계로 향했다. 맨 땅에 헤딩하는 격과 다름없었지만 놀랍게도 돈은 있었다. 일레온에게서 뜯어낸, 아니, 투자받은 자금이 나름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6학년 시절 다니엘이나 샤밀, 미네르바와 같은 사람들에게 몇 번 조언을 구한 적이 있었다. 머글 세계에서 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요? 요식업계나 차라리 내 밑으로 들어오라는-?-추천을 받긴 했었지만, 7학년 시절과 반년이라는 세월 동안 고민한 끝에 그가 결정한 일은,
꽃집이었다.
놀랍게도. 진짜.
이유는 별 것 없었다. 과거를 잘 기억해내지 못하는 키루스다 보니, 고향 집의 담장을 대신했던 나무가 어떤 나무였는지 궁금했다. 2학년 시절 올리브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다. 두꺼운 가시로 이루어진 나무에, 어떤 계절이 되면 주황색의 동그란 열매가 맺혔었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열매가 맺히기 전 흰 꽃이 피었던 것도 같다.
단지 그 나무의 이름이 궁금해 가게를 열었다. 이름은 <마녀 정원 The Witch Garden>. 프레헨의 추적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던 키루스였건만, 가게 이름도 이름이고 대로변에 떡하니 가게 문을 연 건 용감무쌍한 행동임에 틀림 없었다. 에버튼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뒷목 좀 대신 잡아주려나? 그런 생각이 들었음에도 키루스는 아침마다 화분을 바깥으로 옮기고, 밤마다 화분을 안으로 옮겼다.
끊어진 인연이 그립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따금 떠오르는 이름들은, 있었다. 상상은 불쑥 일상을 침범한다. 마법약을 연구할 거라던 니그리티아에게 자신이 직접 기른-마법약에 필요한 약초를 보여준다던가, 머글 세계로 떠난다던 스칼렛이 어울리지도 않게 꽃집을 연 자신을 보면 지을 경악 어린 표정이라던가. 말고도 다른 학생들은 다 어떻게 지내려나. 지키지 못한 약속이 새삼스럽게 손에 꼽힌다.
제일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이름이야 분명하다.
자신이 저택을 떠나올 때 자신에게 같잖은 고백이나 건네던 세일로 프레헨.
키루스는 언제든 분노한 프레헨의 가주의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대비하며 살았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시간이 흘러도 경계는 누그러들 새 없었다. 아무리 머글 세계라 한들 대로변에서 떡하니 장사를 하는 것은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는, 누가 먼저 자신을 찾아낼지가 궁금했다. 역시 소식을 접하게 된 가주일까? 아니면 세일로일까? 키루스의 짐작으로 세일로는 자신을 향한 마음을 접었을 것 같았다. 그 애는 유약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또 세일로는… 멍청했으니까. 아무리 상처를 받았다 하더래도 자신을 뒤따라올 가능성이 있었다.
세일로 프레헨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자신을 떠받들여 줄, 자신을 안정시켜 줄, 자신을 변함없이 사랑해 줄 사람을 찾는다. 그 역할은 여태껏 키루스가 감당해 왔지만 훅 떠나버렸으니. 대타를 찾을까? 아니면 키루스를 찾아올까?
누가 찾아오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방향이 정반대로 갈렸다.
4개월이 지났고,
어느날 키루스는 건너편 도로 너머에서 익숙한 금색을 발견했다.
세일로 프레헨이다. 어쩐지 너무 감감무소식이라더니. 세일로가 나름대로 저택 안에서 정보를 차단했던 모양이다-그럴만한 능력이 세일로에게 있었던가?-. 앞으로 가주가 될 귀하신 몸이니 자신의 행적을 뒤쫓기도 쉬웠던 모양이고. 골목길에서 몸만 살짝 빠져나와 동태를 살피는 모습이 우습게만 보였다.
그 날 마음을 접지는 못한 모양이다. 키루스는 세일로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감히 명명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호감이라고 표현하자. 세일로는 여전히 키루스에게 가진 호감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지긋지긋한 마법 사회를 반쯤 벗어난 몸이니 키루스는 이제, 스스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선택지는 여럿 있었다. 첫째, 다시 한번 세일로를 뻥 걷어차고 이번에야말로 추격에 쫓기는 삶을 살아간다. 둘째, 자신에게 가진 호감을 이용해 프레헨을.
……프레헨을 무너뜨린다.
그런 생각이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를 강타하자, 키루스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화분을 놓쳐버렸다. 저 멀리서 그걸 지켜보던 세일로가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어차피 여기까지 오진 못할 것이다. 겁이 많으니까.
깨진 조각이 발치를 나뒹구는 모습에도 키루스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불사조 기사단엔 대의를 표방하는 치들이 많았다. 지금 이 사회는 잘못되었으니까. 당연히 고쳐야 하는 게 아니야? 평등한 사람인데 피 하나로 급을 나누는 게 이상하잖아! 그 가운데서 누군가 키루스에게 입단 사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들어왔냐고? 내가 머글본 마법사라서? 핏줄 하나만으로 수많은 불평등을 경험해서? 당시에는 그런 보편적인 이유를 입에 담았지만,
결국 그가 원하는 건 복수였다.
자신의 부모님을 죽이고 제 삶을 유린한 프레헨을 향한 복수. 다른 순수혈통들은 상관이 없다. 우선해야 할 대상이 눈앞에 있었으니까.
천천히 몸을 굽혀 깨진 조각을 주워나가기 시작했다. 세일로를 이용해 프레헨을 무너뜨릴까. 아니면 자신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복수를 그들에게 해주어야 하나. 추가 후자로 기울자 또 다른 선택지가 키루스 앞에 놓였다.
세일로를 이용해 프레헨을 무너뜨릴까. 아니면 그들이 내게서 사랑하는 부모를 앗아갔으니,
이번엔 그들이 사랑하는 세일로를 앗아가 줄까.
겁쟁이인 세일로 프레헨이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기까진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충분한 시간 동안 고민해 보면 될 일이다. 키루스는 차곡차곡 쌓이는 무거운 마음들을 내려놓기로 했다.
* * *
키루스의 고민이 끝났다. 10일이 지난 어느 날 키루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골목길에 숨어있던 세일로에게 말을 걸었다.
"세일로. 너 거기서 뭐 해?"
"ㅇ, 어?! …키룻, 으아아악!"
나자빠진 세일로를 바라보던 키루스는 가만히 팔짱을 꼈다. 얜 어쩜 달라지질 않니.
마녀 정원 안으로 초대받은 세일로는 키루스가 내어준 차를 보고도 곧장 마시지 못했다. 키루스는 솔직히 그가 자신을 보자마자 한심하게 매달리거나, 뭐, 일단은 과거부터 들먹일 줄 알았다. 키루스는 얼그레이를 한 모금 마시며 낯빛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세일로의 얼굴을 감상했다.
"머글 세계까진 어쩐 일이야?"
"어, 어? …아, 그, 그게, 우연히 볼 일이 이, 있어서…."
우연이라고 말하기에 세일로는 처음 발견된 그날부터 10일간, 꼬박꼬박 출근도장을 찍었다. 솔직히 경찰에 신고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다 무턱대고 마법이라도 사용하면 큰일이니 가만히 있었지만. 키루스가 찻잔을 반쯤 비울 때까지 세일로는 입조차 대지 않았다.
"그럼 볼 일 보러 가는 게 좋지 않아? 바쁠 것 같은데."
"뭐? …아냐. 나 안 바빠. 키, 키루스가 차까지 내주기도 했고…."
"그래?"
키루스가 찻잔을 탁 내려놓았다.
"그런 것치곤 한 입도 안 대는데. …홍차 싫어해?"
"어, 어?!"
세일로가 어깨를 크게 떨었다. 아, 아냐! 나 홍차 좋아… 으악! 또 급하게 차를 들이마시려다 혀를 데인 모양인지, 사방팔방 난리를 쳤다. 결국 손수 찬 물을 떠다 앞에 놔준 키루스를 바라보는 세일로의 시선이 묘했다.
그래, 키루스는 금방 '직접' 물을 떠 왔다. 지팡이를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묘한 시선을 모르는 척하던 키루스는 다시 자리에 앉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손을 얹은 채 세일로를 빤히 바라보다 조용히 말할 뿐이다.
"그거 마시고 가."
"……어?"
"너 바쁜 거 내가 다 아는데 어떻게 붙잡고만 있겠니?"
그리고, 키루스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여유로울 때 다시 와. 그땐 네가 좋아하는 차를 내줄게."
두 번째 추가 기울어진 방향은…….
* * *
"키루스, 그거 도, 도와줄까?"
그 이후로 세일로가 키루스의 꽃집에 방문할 때마다, 둘은 '이전'과 같은 평범한 대화를 나누었다. 세일로가 좋아하는 꽃의 향은 정원 안을 감돌았고 키루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세일로는 단숨에 그 분위기에 녹아내렸다. 그가 바라던 안온함, 평화, 사람, 그 모든 게 이 자그마한 꽃집 안에 다 있었으니까.
키루스는 눈을 깜빡이며 화분을 들어 올리려던 동작을 뚝 멈췄다. 이유를 요구하듯한 키루스의 눈을 바라보던 세일로는 허공에 손을 휘적이다가, 슬금슬금 곁으로 왔다.
대신 화분을 들어 올리며 슬쩍 시선을 피한다.
"무거워 보여서…."
멋진 모습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용감하게도 그는 호랑가시나무 분재가 담긴 화분을 품에 안았다. 겁이 많은 그 치곤 노력이 가상하다,고 키루스는 생각했다.
여기로 옮겨줘. 인도하는 키루스를 따라 화분을 옮긴 세일로는 정장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며 정원 안을 둘러봤다.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근데, 키루스네 가게엔 가시 달린 나무가 많네…."
근처에 떨어진 이파리 하나를 주워 들던 키루스가 잠시 행동을 멈췄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일어섰지만.
"그런가?"
"그, 그런 편이지! 보통, 음. '꽃'집에선 꽃을 주로 파니까. …근데 키루스네 가게엔 가시 달린 나무가 많아서 좀 무서워 보인달까."
예쁘고 아기자기한 꽃들을 더 많이 들여놓으면 손님들도 더 많이 찾아오지 않을까…? 눈치를 보듯 말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의견을 꾹 누른 뒤 말을 마친다.
물론 이 정도로 짜증이 팍 올라오기엔 세일로와 함께 한 세월이 있었다. 키루스는 세일로의 의견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냈다.
"찾고 싶은 나무가 있어서. 꽃집에서 다루는 나무들을 다 살펴봐도 도통 보이질 않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키루스는 이 말이 세일로에게 어떻게 들릴지 짐작하질 못했다. 하다못해 옆에서 빛나기 시작한 세일로의 눈을 봤다면 화제를 돌리기라도 했을 텐데.
"무, 무슨 나문데? …나한테 알려줘 봐."
하필이면 상념에 잠겨있는 탓에, 그 눈을 바라볼 새가 없었다. 키루스가 별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두꺼운 가시로 이루어진 나무에……."
* * *
"이 나무 마, 맞아?"
세일로가 조심스럽게 가져온 작은 묘목을 보던 키루스는,
기분이 저 밑까지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굳은 입술을 움직여 작은 미소를 그린다. 묘목에 박혀있던 시선을 들어 올려 세일로의 눈을 마주한다.
입술을 벌려도 음성은 탁 막힌 것처럼 뒤늦게 튀어나온다.
"─맞아."
운향과의 과일나무. 높이는 3미터까지 자라나며, 5cm 정도의 가시가 나 자란다. 잎은 3줄 겹잎의 모양. 하얀 꽃은 5월에 개화해 곧 저물면, 주황색의 탱자 열매를 맺는다.
학명으로는 Poncirus trifoliata.
"이게 마, 맞아? 진짜?!"
대번 환해지는 얼굴이며 반짝이는 눈동자는 키루스에게 열렬히 칭찬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키루스는 곧바로 그가 원하는 행동을 실천하지 못했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생각은 간결했다.
왜.
왜 네가.
그토록 되찾길 바랐던 기억이 원수의 아들 손에서 재탄생한다. 소중했던 추억이 지금의 기억에 덮이는 기분이 들어, 키루스는 무심코 꽃이 핀 쪽으로 손을 뻗었다.
"…키, 키루스."
"아,"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꽃을 만지려다 가시에 콕 찔린 손가락에서부터 곧 몽글몽글 피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놀란 세일로는 키루스보다 더 어쩔 줄 몰라하다 손수건을 꺼내 들고 말았다.
고작 핏방울 하나 난 것 가지고 크게 다친 것처럼 구는 세일로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학창 시절 때에도 그랬다. 몇 학생들로 인해 키루스가 복도에서 크게 넘어졌을 땐 사람들의 시선이 있으니 도망치다가도, 그는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땐 슬쩍 다가와 그의 안위를 살폈다.
6학년 시절 결투 클럽에서 발목을 삐었을 때도 대뜸 업어주겠다고 말하기도 했었으니까.
다만 그 이중적인 면모에 마음이 휘둘리던 건, 저학년 시절에서 끝이 났다. 키루스는 어쩔 줄 몰라하는 세일로를 보다 툭 물었다.
"근데 내가 집 나갔던 날 기억나?"
여태껏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던 '그날'에 대한 이야기다. 이는 키루스의 암묵적인 허락을 표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도 된다고. 혹은, 어디 한 번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해보라고.
"그, 그땐. …놀랐어, 키루스. 내가. 어. ……키루스에 대해서 잘 몰랐구나 싶었고."
세일로 프레헨에겐 관계를 회복하자는 말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이때다 싶었는지 세일로는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주된 내용은 그것이다. 내가 잘못했다-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 이후로 계속 반성하고 있다. 정말로 네가 함께 저택에서 지냈던 시절이 그립다. 바깥으로 나오니 고생만 하지 않느냐, 말하던 세일로는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장갑을 벗은 키루스의 손을 조심스럽게 매만지고 있었다.
핏방울은 멈춘 지 오래. 원예 작업이며 처음 해보는 일들로 키루스의 손은 터 있었다.
키루스는 특별히 답하지 않고 잔잔히 웃은 채 세일로를 보고 있었다. 세일로가 봤을 때 키루스가 기분이 좋아보이자, 점점 그의 반성의 언어는 수위를 높였다.
결국엔 기어이, 그 말이 흘러나왔다.
"키루스, 난 내 용서를 빌 수 있다면 네가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할 수 있어."
세일로를 이용해 프레헨을 무너뜨릴까. 아니면 그들이 내게서 사랑하는 부모를 앗아갔으니,
이번엔 그들이 사랑하는 세일로를 앗아가 줄까.
추는 전자로 기울었고, 5주간의 밑물 작업을 이어 큰 먹잇감이 수중에 걸려들었다.
키루스는 처음으로 세일로의 앞에서 진실된 미소를 보였다.
프레헨의 성을 가지게 된 뒤부터 키루스의 삶의 주체는 키루스가 아닌 프레헨에게 넘어갔었다.
그리고 이 순간,
세일로의 삶의 주체는 세일로가 아닌 키루스에게 넘어간다.
속삭이듯 물었다.
"너 진짜 나한테 미안해? 정말 뭐든지 다 해줄 수 있어?"
세일로는 기껏해야 보석, 장신구, 아니면 명품 따위의 요구를 상정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물론 그의 예상이 어땠든지 간에. 키루스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어디까지 증명할 수 있는데?”
마침내 판이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