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피어] 겨울이 할퀴고 간 자리
* 해리포터 AU / 예언의 아이 아이작 딜라이트와 또 다른 예언의 아이 이스피어 틸다, 7학년의 전쟁 이후
학교는 잔잔한 비탄에 휘감겨 떠들썩할 날이 없었다. 전쟁은 모두에게 있었다. 우리는 살아남았고, 살아남지 못한 학생들 틈에 뒤엉켜 계단을 올랐다. 식사를 했다. 잔잔한 빛 아래에서 춤을 췄다.
언젠가 악몽에서 도망친 아침에는 수업도 듣지 않고 네 손을 잡아 이끌어 온 학교를 누볐다. 처음 너와 제대로 마주했던 3층 복도를 지났고, 초상화들의 원성을 지나 소망의 거울이 자리했던 천문탑의 창고로 향했다. 함께 수업을 들었던 교실을 돌아다녔고 때로는 성 바깥으로 나가 퀴디치 경기장을 걸었다. 끝내 향할 곳이 없어지면 7층 복도를 세 번 왔다 갔다 하며 거닐었다. 말도 없이 널 떠났던 호그와트의 정문을 향할 순 없었다.
반문 없이 날 따른 너도 아마 악몽에 시달렸나보다, 네 위로 한껏 드러누우면 귀를 가슴 위로 댔다. 심장 소리를 찾으려 부단히 애를 썼다. 불안감에 떨리는 손을 마주 잡아주는 네 손도 함께 온기를 찾고 있었다. 쿵, 쿵, 일정한 박동에서도 한참 안정을 찾을 수 없어 나는 숨을 가쁘게 내쉬어야 했다. 필사적으로 그랬다.
전쟁이 끝났다. 예견된 죽음 또한 빗겨났다, 아니,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가 무던히 아파 나는 숨을 죽였다. 눈을 감고 몸을 웅크렸다. 또 다른 죽음이 우리를 발견할 수 없도록.
네가 말한다.
"난 이미 오래 전부터 죽어있었어, 피어."
내가 말했다.
"넌 날 만난 뒤로 살아가기 시작했잖아, 그래서 난 그런 널 다시 죽이고 싶지 않아 떠났어."
하지만 넌 죽었고, 난 실패했다. 너는 속으로 말을 삼킨다. '차라리 난 예견된 죽음이 빗나가지 않아도 괜찮으니 계속해서 옆에 있어달라고 말하고 싶었어. 살기 위해 널 위험에 밀어 넣고 무사하길 바라는 게 아니라, 죽어도 상관없으니 한 순간이라도 너와 함께 있고 싶었어.'
우리는 길게 대화할 수 없어 입술을 닫았다. 서로의 숨소리나 종종 뒤척이는 소리만 방 안을 종종 울렸다. 그럼에도 쉬이 잠들 수 없어 가끔은 눈물을 삼켰다. 졸업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잠들 수 없었다. 너도 그랬다. 잠에서 깨어난 뒤 붙잡은 손이 떨어질 때면 죽은 네가 눈 앞에 나타났다. 부모님은 한껏 걱정하며 손수 지은 약을 보내주시곤 했지만, 몇 번은 마시지 않고 잠을 잤다. 죽은 네가 꿈에서 날 질책할 때면 난 내 안에 있는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줄어드는 기분을 느꼈다.
불빛 아래에서 함께 춤을 출 때, 내가 말했다.
"졸업하면, 우리 같이 살까?"
망설이던 너는 이렇게 답했다.
"……그래도 돼?"
나는 조금 웃었던 것 같다.
"그럼. ……너 없으면 이제 나, 못 자."
네 심장은 살아있는 자의 특권을 누리듯 세게 뛰었다. 너는 얌전히 답한다.
"……응."
나는 이번엔 확실히 웃었다.
"같이 살자."
이기심으로 네 온 생을 붙들어 너를 죽였다. 그러고서도 다시 널 붙잡는다. 끌어당긴다. 밑바닥으로.
그대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를 찾아갔다.
* * *
"저를 도구로 써달라 말했던 것은 분명히 저였지만, 이젠 저희의 역할이 끝난 것을 알아요."
정정한 모습대로 늙은 마법사는 코를 찡긋거리다 희미하게 웃었다. 그 안에 깃든 자책과 애환을 못 알아볼 이스피어가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가증스러워 그가 내밀어준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교장, 라파니엘이 답했다.
"이스피어, 네가 또 다른 역할을 달라 말했더래도 난 그것을 거절했을 거란다."
그는 문득 라파니엘과 처음 독대하게 된 5학년 때를 떠올려보았다. 그때만 해도 레질리먼시에 속수무책으로 내면을 내어주곤 했는데, 지금 그의 스승은 그에게 레질리먼시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역시 밉살스럽다.
라파니엘이 조용히 물었다.
"바라는 것이 무엇이니?"
끝끝내 차를 마시지 않은 이스피어가 말했다.
"피델리우스 마법의 비밀 파수꾼이 되어주세요."
* * *
우리는 7학년을 졸업했다. 외딴 곳에 있던 별장을 찾아갔다. 개수해야 할 곳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우린 성인 마법사가 되었으니 주저할 것은 없었다. 우리는 직접 팻말을 만들어 집 앞에 꽂았다.
영국 서니 주의 리틀 쉴징에 위치해 있는 『프리지아 1번지』
그 아래엔 우리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아이작 딜라이트와 이스피어 틸다.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내가 말했다.
"근데, 서니 주니, 리틀 쉴징이니 해도. 결국 우리가 다 지은 거잖아."
나를 따라 한참이나 팻말 위를 손가락으로 쓸어보던 네가 말했다.
"그렇지만 피어, 네가 꼭 '프리지아 1번지'라는 이름을 쓰고 싶다며."
"그건 그렇지. ……그래도 너한테 불만이 있었다면 네가 말했을 거 아냐."
"난 네 의견이라면 다 좋아."
재차 너는 말을 삼킨다. '네가 떠나지만 않는다면.'
새로 지은 집-프리지아는 꽃 이름을 따온 것이 무색하게도 수리할 때 하얀색과 푸른색의 페인트를 사용했다. 집을 지은 다음에 우린 각자 짐을 옮겼고, 짐을 풀고, 짐을 풀다 지쳐 함께 침대에 드러누워 한적한 시간을 지냈다. 너도 나도 현실감이 찾아오지 않아 꿈속을 부유하는 것 같았다. 주먹을 쥐었다 힘을 풀 적이면 밀려들었던 수마가 몰려나듯 숨이 트이곤 했다.
오후의 적요寂寥한 햇살이 창문을 넘어 다리를 데웠다.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에 감았던 눈을 뜬 너와 마주한다. 그럴 때면 자그맣게 웃음이 나왔다. 네가 전혀 죽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사한 처음 저녁은 함께 식사를 만들었다. 나는 처음 보는 머글 기기를 어떻게 다룰지 몰라 한참을 헤매다 사고를 칠 뻔 해, 하마터면 주방에서 쫓겨날 뻔 했다. 결국 억울한 마음을 품고 요리를 하는 너를 뒤에서 끌어안고 네가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날의 오믈렛은 두 개 다 망했지만 덜 망한 쪽이 내 앞 그릇 위로 올려지자,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호그와트에서 졸업한 지 처음으로-실제로 첫 날에 우리는 함께 누웠다. 네 품을 느끼다 보면 돌연 파고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제 난 혼자 악몽에서 깨어나지 않아도 되겠다. 여름날 늦게 파고드는 추위에 몸을 떨지 않아도 되겠고, 기어이 찾아든 아침에 눈을 뜨면 곧 눈을 뜰 네가 날 보며 웃고 있겠구나.
나는 그 행복감을 참을 수 없어 말했다.
"내일은 같이 늦잠 자자."
"……그러다가 아예 오후까지 자버리면?"
"그럼, 그냥 자는 거지. ……하긴. 넌 범생이라서 그런 일탈도 못 해봤으니까."
그러면 너는 얼핏 다정히 말한다.
"아니야, 피어."
"……뭐가 아닌데?"
"넌 그런 류의 일탈에 있어선 전문가잖아."
"잠깐. 너 뒷 말 마저 말하지 마."
"그런 널 따라다니던 나니까, 어느 정도 그런 일탈에는 익숙해."
"……하지 말랬지, 이 못된 뱀!"
급기야 나는 네 배를 간지럽히기 시작했고, 간지러움에 굴복한 너는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미 전쟁은 끝났잖아.
그러니 조금 더 널 괴롭힌다 해도, 날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제로 아침에 눈을 뜬 너는 잠결에 젖은 얼굴을 하고서도 희미하게 웃었던 것 같다. 그러면 내가 물었다,
"지금 무슨 생각 해?"
너는 고분고분히 답했다.
"아침부터 얼굴 보니까 너무 좋아. 피어."
"행복해?"
"네가 여기 있어서 너무 행복해."
부재가 전제된 문장은 한순간 가시처럼 내 가슴을 찔러들었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웃었다. 네 손을 끌어 내 심장 위로 가져온다.
"그래. 꿈 아닌 거 알지? 다시 한 번 만져봐, 내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직접 확인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더 짓궂게 말했다. 네 곧은 손은 손가락 끝까지 펴져 살결 위를 덮었고, 그 아래로 박동하는 내 심장이 있었다. 너와 달리 내 것은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것이었다. 가느다랗게 숨을 내쉬고 있노라면 내 생존을, 나아가 부재하지 않음을 확실히 알아차린 네가 내 위를 덮었다. 우리는 입을 맞췄다.
그렇게 우리 근처의 시간만 느리게 부유하는 채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는 손을 잡았고, 서로를 껴안았고, 대화를 하고, 또 집 근처를 산책하며 걷다가, 아주 가끔은 바깥으로 나들이를 나가고, 또…….
……어느 날은 부모님께서 선물을 보내오셨다. 편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피어, 요즘 우리가 머글 물건을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는데, 이 물건이 참 신기하더라. 부엉이가 들고 가기엔 너무 무거운 물건이라 너희 집 앞에 가져다 놓았단다. 아직도 그 애랑 같이 살고 있는 건진 몰라도, 한동안은 푹 쉬면서 지내려무나. 종종 소식 알려주고.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집 앞에는 무슨, 무거운 고철 덩어리 하나가 놓여있었다. 벙쪄있는 내게로 네가 이름을 알려주었다. 텔레비전? 이름 참 멍청하게 생겼다.
그리고 그 날은 하루 종일 함께 텔레비전을 보느라 시간을 쏙 빼먹었다. 이런 요물이 다 있담! 텔레비전, 그러니까-TV 안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머글들의 이야기다. 그곳엔 정신을 아찔하게 하는 로맨스가 있었고, 이상한 그림이 움직이는 곳도 있었다. 또 상상도 못 한 범죄를 파헤쳐주는 것도 있었는데, 사실 그 프로그램 때문에 속이 좀 거북해지고 말아 잠시 찬 물을 마시러 나가야 했다.
어느덧 TV에 익숙해진 새벽 때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한 영화를 보고 있었다. 배 안에서 여자와 남자가 서로 가까워지는 장면을 그리는 영화였는데, 네 어깨에 기대서 눈을 깜빡이던 나는 나도 모르게 불쑥 말해버리고 말았다.
"이게 꿈이라면 영영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너는 내 어깨를 끌어안고 있었다. 나를 돌아보지도 않은 넌 가만 숨을 들이켜다 답했다.
"나도."
너는 지금이 꿈이 아니라는 말도 하지 않고 날 끌어안은 손에 힘만 줬다. TV를 선물 받은 오늘, 아침에는 악몽 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었다. 악몽의 내용은 언제나 비슷하다. 죽어서 하얗게 질린 너는 눈밭 사이에 차갑게 누워있고, 그런 널 아무리 흔들어도 넌 깨어나지 않았다. 손은 딱딱하다, 숨을 쉬지 않는다, 심장도 뛰지 않건만 나는 하염없이 가슴 위로 귀를 댔다. 겨울바람에 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댄다. 몇 번이고 그렇게 한다. 그리고 운다. 혹은 소리친다. 오열한다.
화면 속의 여자와 남자가 입을 맞췄다. 나는 묵묵히 입술을 움직였다.
"꿈이라면 깨지 말자. 그러면 너도 끝까지 모르는 척 해야해."
악몽의 그림자가 작금의 새벽까지 들이닥친 탓에, 나는 불안감으로 하여금 말을 덧붙였다.
"약속해줄 수 있지?"
너는 언제나 비슷한 말을 했다.
"네 말이잖아, 피어."
그래, 넌 날 좋아하니까.
"네 말이면 난 뭐든 해."
'네가 떠나지만 않는다면.'
곧 우리도 입을 맞췄다.
* * *
나는 잠결에 뒤척이다 속삭였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자는 듯했던 너는 머잖아 답했다.
"어딘데?"
"바다."
"바다?"
"너 없이 갔었는데, 네가 있었으면 했어."
이스피어는 사납게 휘몰아치던 비바람 속 자신이 절벽 위에 내몰렸던 순간을 떠올렸다. 매섭도록 얼굴을 때리던 빗방울, 자신에게 겨누어졌던 수많은 지팡이 끝에 감돌던 불빛과, 끝내 그 아래로 몸을 내던져야 했던 과거. 품 안에 자리했던 호크룩스.
너는 기민하게 그를 알아차리고 물었다.
"……그때?"
괜스레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어 네 품을 더 파고들었다.
"……응."
너는 한참이나 답이 없었다.
"가자. 어디든지."
나는 사실 그때 죽음을 결심하기도 했다. 추락하는 와중 올바른 때에 맞게 지팡이를 휘두를 자신이 없었고, 운 좋게 암초를 피해 바다에 빠진 뒤로도 거품 머리 마법을 성공시킬 자신이 없었다. 베인 상처로부터 빠져나오는 피가 눈앞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호그와트에 있던 너와 다른 이유로 죽어가고 있었다.
차디찬 바다에 맨몸으로 빠졌던 순간을 기억했다. 네게 보낸 편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은 편지를 떠올렸다. 네가 받은 상처가 어지간히 컸겠구나 싶었다. 그러니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서, 직접 사과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래도 웃으면서 널 봐야지, 자랑스럽게 내가 널 위해 파괴한 호크룩스를 이야기해주고, 내가 그것을 파괴하려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어떤 위험을 겪었는지 말하며 위로받아야지. 다급하게 날 끌어안는 네 품을 느껴야지. 꼭 그래야지.
그리고 겨우 호그와트로 돌아간 그날.
나는 죽은 너를 봤다.
네가 말한다.
"너만 있다면 난 어디라도 좋으니까……."
나는 다시금 이는 불안에 네 숨소리를 들으려 애를 썼다. 다시 잠에 빠질 때면 악몽이 시작될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눈 감은 채 꿋꿋하게 말했다.
"괜찮아. 내일은 더 행복해질 거야, 내 사랑."
답 없는 넌 나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내가 또 말했다. 내가 꼭 그렇게 만들어줄게…….
겨울이 할퀴고 간 자리를 안았다.
상처가 아물기까진 꽤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