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비야 2021. 12. 6. 13:54

 


CHAPTER 2


어차피 샐 수 없는 겨울이니
서로 끌어안으면 안되겠냐고


 

 

사명 이행

 

 

 

 설원 한가운데선 아무리 소리쳐 봐도 멀리까지 소리를 전달하기 어렵다고 했다. 겹겹이 쌓인 눈이 소리를 먹어버리기 때문이라 했는데, 솔직히 믿기진 않았었다. 어린 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스피어는 어차피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될 일 없을 테니 상관없다 여겼다. 살랑살랑 허공을 내려와 콧대에 앉은 눈꽃이 아직은 시리기보단 적당히 차가워 현실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모든 스물네 명의 조공인이 원으로 서서 카운트다운 되는 숫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삐, 삐, 삐,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식량이나 의약품, 다양한 무기가 놓여있는 창고가 있었고, 15초가 남은 상태였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이스피어는 허공에서 흩어지는 하얀 숨에서 시선을 떼어내 동맹을 맺은 조공인의 위치를 탐색했다. 이전에 상의했을 때 이런 형태로 게임이 시작되면 둘씩 뭉쳐서 보급품을 얻자 했었지. 바쁘게 움직이는 시선 가운데 언뜻 회색빛을 마주한 것 같기도 했지만, 이스피어는 무시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전나무, 자작나무, 삼나무……, 그런 것들을 헤아리던 도중 숫자는 끝내 0이 되었다. 무대 위 한가득 큰 소리가 울렸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모두 생각했다,

 

지금부터 이곳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조공인이 그러하듯 이스피어가 창고를 향해 달려 나가는 일은 없었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길을 밟으며 걸어가는 이스피어는 언젠가 꿈에서 이런 장면을 겪었던 것 같은 기시감을 겪었다. 그땐 꿈에서 깨어난 뒤 설레는 심정을 추슬러 안느라 힘을 써야 했는데,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그런 마음은 하나 없고, 뭐랄까. 숨을 내뱉었다. 허탈한 것 같기도 했다. 신발아래 뽀드득 소리 내며 밟히는 눈 소리가 오늘따라 거슬렸다.

 이미 주변은 폭력과 죽음이 난무했다, 대포 소리가 이미 몇 번 울린 것 같았다. 제게로 달려오는 남자 조공인을 덮쳐 눈밭을 구르는 렉서드에게 길게 시선이 머무르는 일은 없었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공포에 젖어 있었다. 추위나 그런 새카만 감정들로 떨고 있었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세찬 바람이 불지 않아 비교적 조용한 날씨였다-만들어진 날씨도 날씨라 부를 수 있다면-. 손을 들어 앞 머리카락을 한 차례 털어낸 뒤로 이스피어는 느긋하게 무기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의 무기는 당연히 창이었다.

 지척에서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러기 전에 앞선, 익숙한 음성이 있었다. 다만 이전에 이스피어와 대화했을 때와는 현저히 다른-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넌 적이구나.”

 이상토록 그 음성을 듣고 난 다음에서야 진정한 겨울이 끼쳐온 기분이 들었던 이스피어는 차가운 창대를 붙잡곤 눈을 길게 감았다. 난 겨울을 좋아했나? 별안간 사계절의 정취를 그려본 뒤 눈을 뜬 이스피어는 팔이 반대로 꺾인 채 고통에 바닥을 기어 다니는 조공인을 한 번, 그리고 고개를 들어 배낭을 어깨에 걸쳐 매는 아이작을 한 번 바라보았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공포에 젖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욕조 안에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어둡고 날카로운 감정을 품었던 시기는 당장 기억하지 못하고, 이스피어는 그의-여느 때와 같이 무심한 얼굴을 보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소리를 들은 아이작이 마저 무기를 챙기다 말고 이스피어를 바라보았다. ‘언젠 날 피해 다니더니, 왜 또 갑자기 아는 척이야?’라고 묻는 것 같은 얼굴에 이스피어는 곧장 딴청 피우듯 표정을 관리했다. 이스피어가 헛기침을 한 번 하곤 말했다. 이봐, Twelve. 하지만 눈을 마주친 다음에는 잠시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아서, 말을 잇는 사이론 묘한 공백이 감돌 따름이었다. 겨우 말한다.

 “……눈밭은 체온 유지가 중요한 거 알지?”

 “……그래.”

 “육포나 더 챙겨가.”

 집으려던 육포를 더 가져가지 않고 아이작이 있는 쪽으로 그것을 밀어주는 건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아이작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아이작과 마찬가지로 배낭 하나를 둘러맨 이스피어는 망설이지 않고 뒤를 돌았다. 남자의 얼굴을 더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였다.

 쌓인 눈 위를 밟을 땐 그 자국이 한참이나 사라지지 않는단 점에서 겨울이 싫었다. 감정이라 부를 수도 있는 발자국이 하염없이 소리를 냈다.

 느닷없이 그것이 부끄러워지고만 이스피어는 제게로 손을 흔드는 렉서드와, 동맹을 맺은 1구역의 나이크와 체루에게로 뜀박질했다. 이스피어가 가만 생각했다. 아. 차라리 눈이 모든 세상을 덮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럼 자신이 걸어온 길도 보이지 않을 테니까.

 

* * *

 

 게임이 시작한 지 한나절이 지났다. 해가 빨리 저무는 겨울은 그 속성답게 이른 어둠을 드리웠다. 대포는 총 여섯 번의 소리를 울렸다. 이스피어가 속한 1-2구역 동맹은 보급품 창고를 벗어나와 적절한 은신처를 찾는 과정에서 두 명의 조공인을 만났고, 둘 다 죽였다.

 아무리 이스피어라도 타인을 죽이는 행위 자체에 즐거움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뭐, 건방지게 자길 내려다보던 사람이 제 발아래 깔렸을 때의 쾌감은 알 법 했다만, 그렇게 남을 깔아뭉개는 것과 죽이는 것은 달라도 너무 다른 문제이지 않았나.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바로 그 ‘타인을 죽이는 행위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는’ 자들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겁에 질려 뛰어가다 상대가 넘어진 꼴이 마치 토끼 같았다 말하며 마구 웃어제끼는 1구역의 두 남녀를 바라보는 이스피어의 눈빛이 갈수록 뾰족해지자 옆에 있는 렉서드만 괜히 눈치를 살피느라 안절부절못했다.

 상스러운 것들. 혀를 쯧쯧 찬 이스피어는 그런 생각을 해놓고선 대포 소리의 한 원인이 되는 조공인이 둘러 입고 있던 외투를 바닥에 깔고 누웠다. 타닥, 탁, 타들어 가는 모닥불이 일렁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눈이 천천히 감겼다. 시끄러운 웃음소리와 자신을 조심스레 토닥이는 렉서드의 손길도 점점 멀어져갔다. 그렇지만 기어코 해이해지는 이스피어의 정신을 일깨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내용이야 너무 뻔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대로 아직 밤이 무르익지 않은 까닭에……이스피어는 잠들 수 없었다.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그가 기껏 눕혔던 몸을 일으키자 렉서드의 의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높다랗게 이야기하던 체루가 일어난 이스피어를 발견하곤 물었다.

 “피-어, 자려는 거 아니었어?”

 나이크가 키득거리며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우리가 시끄럽다고 말하려 일어난 거 아냐? 알겠어, 알겠어. 목소리 더 낮출게.”

 “시스. 왜 그래?”

 이스피어가 1구역의 조공인을 차례로 바라보다 렉서드를 끝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이번 헝거 게임의 무대는 겨울이기도 하고. 먹을 게 구하기가 쉽지 않잖아?”

 “뭐어, 그렇지.”

 그런데 그게 왜? 체루가 장난스럽게 발끝을 까딱이며 물어보았다. 이스피어의 웃음이 밤처럼 짙어졌다.

 “보급품 창고에 음식이 얼마 없었잖아. 그마저도 건조식품! 그래서 이번 헝거 게임에서 중요한 점은 난, 무엇보다 ‘시간’이라고 생각했거든…….”

 렉서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간?”

 “하기야, 동물이 돌아다니는 걸 보지도 못했고 사냥하러 바깥에 나갔다가 눈사태에라도 휘말리면…….”

 “그리고 어떻게 같은 사람을 먹을 수 있겠어. 그건 예전 일로 금기시된 거나 다름 없잖아.”

 체루의 말에 이스피어가 잠시 굳었다. 사람을 먹는 행위를 문제 삼지 않고 그것이 암암리에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을 식량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런 이유를 든 체루를 이스피어가 잠시 한심하단 듯 바라보았다. 저런 애랑 동맹을 맺다니. 렉서드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아닌가? 동맹은 아버지께서 지시하셨던 것인가? 그렇다면 이해는 된다. 저런 멍청한 것들 사이에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 명성도 높아져만 갈 테니까. 또. 저런 멍청한 것들은 이용하기도 쉽겠고. 이스피어가 말을 이었다.

 “……음식을 챙겨간 조공자를 알고 있거든. 그 애가 어디로 향했는지도 대충 예상이 가.”

 “시스, 그건 언제 본 거야?”

 “Wow, 그래서 이스피어.”

 기대감 서리기 시작한 꼴통들의 눈을 마주하는 이스피어는 서서히 진심을 먹고 자란 웃음을 한가득, 얼굴 위로 그려낼 수 있었다. 말했다.

 “너희가 심심해 보이기도 하니까.”

 정작 아이작에게 육포를 밀어준 것은 이스피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모르겠다. 멈추지 않고 바깥으로 눈이 쏟아지듯 이스피어의 가슴 한 쪽에 짜증인지 불안감인지 뭔지, 찝찝한 것들이 이스피어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것이 기인하는 감정이나 생각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당장은 그 모든 것을 외면하며 둘을 배웅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면, 이스피어는 실패했다. 혀를 찰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둘 다 사이좋게 팔 하나씩을 잃고 돌아왔다.

 여자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고 남자는 겁에 삼켜졌다. 꼬인 혀를 애써 풀어나가며 나이크가 전달한 말들을 취합해볼 때 그 내용은 이러했다.

 이스피어의 말대로 움직인 그들은 어둑한 밤에 혼자 잠들어있는 아이작을 발견할 수 있었고 함께 그를 기습하기로 했다. 하지만 나이크가 아이작을 칼로 찔러 죽여버리기 전에 목이 졸릴 때의 소리를 듣고 싶다길래-이스피어는 한숨을 참지 않았다-, 그에 동조한 체루가 밧줄로 아이작의 목을 졸랐다. 졸랐는데. 사실 그 뒤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한다. 잠에서 깬 아이작은 당황했으나 재빨리 그의 뒤에 매달린 체루를 아예 한 손으로, 메꽂았다. 나이크와 아이작의 눈이 마주쳤다. 나이크는 들고 있던 단검으로 아이작의 흉부를 꿰뚫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손목을 억세게 잡아챈 아이작이 빨랐다. 손쓸 새 없이 나이크의 팔이 꺾였다. 그것은 메어쳐진 뒤 부러진 늑골 탓에 제때 일어나지 못한 체루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일이었다. 그는 손쉽게 두 명분의 팔을 부러뜨렸다.

 쓰러진 그들을 보던 아이작은 충분히, 죽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죽이지 않았다. 나이크는 겨우내 발작하듯 몸을 떠는 체루를 추슬러 돌아왔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이스피어는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금치 못했다. 나이크 체셋은 도대체 왜 목이 졸리는 소리를 듣고 싶다는-하잘 것 없는 이유를 가지고 기습에 실패했으며 체루 바이터는 왜 그 특기인 위장술을 살리지 못하고, 하. 그래. 기습 자체가 위장술의 취지와는 맞지 않았지. 이건 이해할 수는 있었다.

 이스피어가 이를 갈자 그 앞에서 렉서드의 도움으로 겨우 부러진 팔을 맞춘 나이크만 눈치를 살폈다. 이스피어가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러면 동맹을 맺은 수확이 없었다. 나름대로 써먹을 곳이 많으리라 생각했던 1구역의 두 남녀는 이제 짐 덩어리 뿐이 되었다. 이렇게 화가 날 일이 아닌 것을 알았다, 알았지만, 이상하리만치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아이작.

 ……아이작 딜라이트!

 시꺼먼 남자가 이스피어만의 창을 쥐어본 이후로 내리 이스피어의 머릿속을 맴돌던 그 이름은 철자가 그려지는 것만으로 가슴에 짜증을 일게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이스피어로 하여금 당장 창을 쥐게 종용했다. 나이크의 눈에 밤보다 어두운 것이 한 아름 들어찼다, 그는 본능으로 인해 입을 열어 외쳤다. 그는 자신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만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사, 살려줘! 봐, 체루는 이, 이런 상태지만, 난 아직 아냐. 이스피어. 난 제정신이고, 이 팔을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잠깐! 시스, 정말로 죽일 생각이야?”

 하지만 그 모든 나이크의 구걸이며 렉서드의 만류는 여자의 정신을 더욱 사납게 만들 뿐이었다. 렉서드는 긴가민가한 채로 이스피어의 앞을 가로막아 섰지만 이스피어를 제지하기 위해 팔을 붙잡고 있거나 하지는 않았던 상태였다. 이스피어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스스로 쓸모없어진 건 알고 있나 봐?”

 “잠, 아냐, 난……!”

 기어코 눈물을 머금던 얼굴이 경악으로, 공포로, 분노로 감정을 바꿔 끼웠다. 무너져내렸다. 피가 튀었다. 이스피어는 내뻗다 절명한 손을 앞에 두고 눈을 감지 않았다.

 무거운 창대는 손안에서 가볍게 한 바퀴를 돌았다. 나이크의 잔떨림마저 완전히 멎어버린 것을 확인한 이스피어가 렉서드에게 눈짓했다.

 “여자는 네가 죽일래?”

 “시스, 지금, ……아니,”

 렉서드는 짙은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내가 할게.”

 그렇지만 끝내 렉서드는 그런 답을 내놓았다.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스피어의 눈빛은 죽은 것 위에 머무르지 않았다.

 오늘 밤은 자기엔 글렀다. 이스피어는 눈밭 위에 적어두었던 모든 계획을 발로 뒤덮었다. 가루 같은 눈송이가 손쉽게도 쓸려나갔다.

 그렇게 밤의 장막이 걷히고 해가 떠오를 때까지 울린 대포 소리를 계산하면, 하루 동안 스물 네 명 중 열 명이 죽었다. 이스피어가 그나마 경계하던 대상은 두 명 정도였지만 그중 하나는 어제 죽었다. 남은 7구역의 한 명은 훈련 시간 때의 모습으로 추측해 다른 생존자와 팀을 맺었을 테고, 그 동맹으로 유력한 사람은 8구역, 혹은 11구역……어쩌면 두 구역이 함께 있을지도 몰랐다.

 남은 오합지졸들이야 뭉치든 말든 아무렴 상관없었다. 아버지는 완전무결한 승리-쟁취-를 원하셨다. 그러니 이스피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이스피어는 렉서드와 함께 움직였다. 이런 필드에서 은신처를 형성할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었고 캐피톨의 게임메이커들은 개연성 있는 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특기가 있었으니 설산 근처는 눈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위험했다. 그런데도 산에 숨었다면 동굴을 찾았겠고, 탁 트인 눈밭은 사냥당하기 최적화되어 있으니 피해야 했다. 1-2구역 동맹이 그러했듯 그나마 숲속이 제일 은신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숨기에도 좋고, 눈사태를 대비하기도, 혹시 모를 식량-야생동물을 만나기에도 좋았다.

 해가 가장 높은 하늘 위를 지나는 시기였다. 이스피어와 렉서드는 미처 지우지 못한 누군가‘들’의 흔적을 발견했다. 머잖아 피어오르는 연기를 볼 수 있었다. 이스피어는 상대 무리 가운데 부상자가 있음을 확인했다. 정신을 채 차리지 못하고 열에 앓아 신음하는 남성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왜 저들이 눈길에 난 흔적을 채 지우지 못했으며, 아직도 지지부진하게 전날의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인지 추측할 수도 있었다.

 곧 죽을 청년을 놓지 못하는 일원이 있었나 보다.

 그런 감정은 지금처럼 저들의 발목만 잡아 죽음에 더욱 속히 이르게 만들 뿐인데도 말이다. 이스피어가 혀를 찼다.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 녀석은 카이클을 살려서 돌려보낸 거지?”

 “그럼 뭐해, 팔을 아예, ……하필이면 돌아오는 길에…….”

 “싸이코같아, 걔. 왜 또 직접 죽이지는 않고,”

 “그래도 덕분에 생명은 부지했잖아.”

 “하. ……그나저나 또, 숨을 곳을 찾아야 하는데. 막막하다.”

 “우리 처음 시작했던 곳에서 해가 떠오르는 방향으로 7구역, 그, 여자던가. 달려가는 걸 보긴 했는데. 거기가 숲 쪽이었지?”

 “거긴 왜?”

 “그냥. 거기가 몸을 숨기기엔 제일 좋을 것 같았잖아, 분명,”

 “잠깐.”

 “…….” 

 “……거기 누구야?” 

 은신이 들킨 직후 렉서드가 그들 앞에 눈을 뿌려 시야를 방해하는 것이 시작이었다. 이스피어가 자리에서 튀어 나갔다. 귀 아픈 비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세 명 중 두 명을 죽이고, 한 명을 놓쳤다. 역시나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는 찜찜하다면 찜찜했지 절대 즐겁지 않았다. 추적을 포기한 이스피어가 머리를 고쳐 묶으며 재차 1구역을 욕했다.

 이스피어와 렉서드는 죽인 자들의 소지품을 챙긴 뒤 자리를 떴다. 해가 질 때까지 다른 무리를 찾아다니다 끝내 특별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기존의 은신처로 돌아왔다. 이스피어는 습격한 곳에서 챙긴 육포를 우물거리며 먹었다. 하루가 또 끝났다.

 헝거 게임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사회자나 아버지, 뭇 캐피톨 시민들 등-에겐 아주 자극적인 장면의 연속이었을 거라고, 이스피어가 생각했다. 이스피어는 동료를 직접 죽였고 지극정성으로 타인을 보살피던 무리를 죽여 와해시켰다. 아무래도 둘 중 전자가 더 충격적으로 와닿았겠지?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께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입 안에서 육포가 질겅질겅 씹혔다. 게임이 끝나면 적당한 시기에 쓸모 없어진 것들을 잘 잘라내었다며 날 칭찬해주실까? 미끼로라도 사용하지, 너무 이른 판단을 했다며 날 나무라실까? 육포는 썩 맛이 없었다.

 시체를 처리한 렉서드가 조용히 누워있던 이스피어를 부르기까지 이스피어는 상념의 바다 가운데 둥실둥실 떠다녔다. 이스피어를 물끄러 바라보던 렉서드가 말했다. “죽이지는 말지 그랬어.” 가라앉은 음성에 이스피어가 고개를 돌렸다. 습관처럼 웃었다.

 “왜?”

 물음은 간결했다. 타오르는 불길에 장작을 하나 더 던져넣은 렉서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둑어둑한 밤 안에서 빛을 쫓는 것은 지성 있는 생명체들의 본능이라 주변을 경계해야 마땅할 상황이었지만, 이스피어도 렉서드도 태연하게 늘어져 있었다.

 머뭇거리던 렉서드가 답했다.

 “생각보다 동맹이 많아, 시스. 오늘 만난 녀석들도 동맹을 맺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애들이잖아.”

 “그건 그렇지.”

 “짐작 가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너 때문일 거야.”

 “그래. 아마도 나를 견제하기 위해서. 또 겨울이기도 하니까……뭉칠 수밖에 없었겠지.”

 그리고 이스피어는 거듭 아이작을 떠올렸다. 그 애를 제외하곤 최소한 두 명끼리는 뭉쳐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잠깐. 난 또 왜 걔를 생각하고 만 거야? 표정을 살포시 찌푸리는 이스피어를 앞에 두고 눈치 없는 렉서드가 말을 덧붙였다.

 “1구역, 걔들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기도 했으니까. 우린 앞으로 먼저 견제당할 거란 말이야.”

 하지만 렉서드가 얼마나 제 걱정을 피력해보든, 이스피어는 렉서드의 한탄 섞인 말을 반쯤 흘려듣고 있었다. 과연 렉서드는 이스피어가 자신을 어떻게 미끼로 쓸까 고민했던 것을 알았을까?

 거기다 내가 그 사실을 또 모르게? 작게 코웃음을 쳤다. 이스피어는 몇 명이 제게로 달려오든 간 그 위기를 해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오스틴의 딸이었고, 짱이었고, 완전 강했으니 말이다.

 모쪼록 중요한 점은 캐피톨이 바라는 헝거 게임의 우승자가 되는 것이었다. 강력한 인상을 남기며 적당히, 뭐, 이것을 지켜보는 국민에게 오락 요소도 주고. 무엇보다 캐피톨에게 반항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다물려있던 입술을 열어 말했다.

 “확실히, 나를 추적해서 오는 애들이 많긴 하겠다. 오늘은 눈이 내리지 않았으니까.”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은 꼬리 역할을 하는 눈결이 될 테다. 누가 꼬리를 쫓아 머리를 잡을까. 누가 잡힐까.

 “그래, 그러니까. 우리도 다른 동맹을 맺는다거나 하는 건 어때?”

 “이런 상황에서 새롭게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건 마음에 안 내키는걸. 되려 배신당할 것 같단 말이야~.”

 덧붙여 렉서드야 몰랐겠지만 이스피어는 이런 미지근한 일상에 초조해지던 중이었다. 아버지가 바라는 자신은 이렇게 전전긍긍하며 뱀처럼-눈길 아래를 기어 다니기보다 짐승처럼 상대를 덮쳐 물어뜯어야 했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이스피어가 한 가지를 제안했다.

 “아까 우리가 죽인 애들. 걔네가 말하던 거 들었지.”

 “응, 뭐. 그랬지.”

 “해가 떠오르는 방향으로 7구역의 여자. 포웨나가 향했다 했어. 이곳과는 좀 반대되는 위치에 있었지만 결국……이곳은 원형 필드니까.”

 “시스, 넌 포웨나를 굉장히 경계하더라.”

 “걔가 그나마 제일 잘하잖아. 문제는 그 동맹 쪽에 몇 명이나 있는지 모르겠단 거야. 역으로 우리가 당할지도 모르니까.”

 금빛 눈동자가 렉서드를 꿰뚫듯 바라보았다. 기시감이 훅 끼쳐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살짝 움찔거린 렉서드는 이스피어가 천천히 웃음 짓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해가 떠오르는 방향이면, 하얀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던 곳이지. 이 필드는 사실, 크게 다섯 개나 여섯 개 정도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어. 가운데를 중심으로.”

 “구역?”

 “나무의 종류로 쉽게 구분할 수 있지.”

 그가 속살거렸다. 렉서드.

 “네가 도와줘야 할 게 있어.”

 

* * *

 

 새벽부터 이스피어와 렉서드는 그동안 머무르던 소나무 숲을 빠져나와 자작나무 숲으로 진입했다.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발자국의 숫자로 유추했을 때 길을 걸어간 자들은 세 명에서 네 명 정도였고, 부상자가 있었던 이전의 운 좋았던 상황은 다시 연출되지 않을 테니 이스피어는 계획적인 기습도 위험부담이 크다 싶었다. 이스피어는 미리 덫을 파둔 곳으로 상대를 유인해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웠다. 꼬리 끝에서 확인할 수 있던 숫자는 포웨나를 포함하여 넷. 지금까지 만났던 동맹 중 제일 숫자가 많았다.

 주변 지형을 꼼꼼히 살펴본 이스피어는 렉서드와 함께 소리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적당한 공간을 찾기 위해 근처 숲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발견할 수 있었던 적합한 장소에서, 이스피어는 아침 댓바람부터 함정을 설치해나갔다. 차디찬 겨울 공기에도 살짝 땀을 흘릴 정도였다.

 도중에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들려 급하게 창을 붙잡았었지만, 그건 또 단순히 새가 날아가는 소리였나보다. 숨을 내쉬며 떨어지는 하얀 깃털을 잡은 이스피어는 아주 찰나에, 자신에게 활이 있었더라면 날아가는 새를 죽음으로 묶어둘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을 가졌지만……붙잡고 있던 창대는 여전히 차가웠다.

 괜히 하얀 나무의 몸통 위로 새겨진 눈 모양이 이스피어를 감시하는 기분이 들어 이스피어는 함정을 설치하다 말고 창으로 나무를 콕 찌르기도 했다. 그런 사소한 일들을 지나 어떻게든 함정의 설치가 끝났다. 설계 자체는 간단했다. 렉서드와 함께 나무와 나무 사이에 줄을 묶어 그 위를 눈으로 덮는 등의 몇 작업이 있었으나 어차피 그것들의 용도가 눈속임, 시간 끌기에 불과했던 사유였다.

 일단 작전의 시작은 지금처럼 무리에서 떨어진 자들을 급습하는 것이었다. 식량을 구하러 나온 건지, 아니면 주변을 정찰하기 위함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스피어와 렉서드가 저들을 쓰러뜨리고, 그 소리를 듣고 쫓아 나온 남은 이들을 유인해 먼젓번 올가미를 드리운 곳으로 달려 나가는 것. 그리고 이스피어의 멋진 솜씨를 보여주며 경쟁자를 죽여 마무리하는 것까지. 이 얼마나 완벽한 작전인가!

 이스피어와 렉서드는 실제로 그렇게 하려 했다. 그렇게 유력한 경쟁자를 제거하고, 남은 조공인들을 하나하나 처리해가려고 했다. 성공률도 나름 높으리라 여겼다.

 이스피어가 ‘덫’에 걸려버리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고개를 내려 발목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시뻘건 핏물이 새어 나왔다. 하얀 눈이 붉게 물들어갔다. 눈 아래에 숨어있던 뾰족한 톱날 모양의 엉성한 덫이, 나뭇가지 사이로 비친 햇빛에 그 날이 한차례 번뜩였다.

 그리고 그때 이스피어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기보단, 아마도 웃음 지었다.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적과 공황에 빠진 렉서드의 멍청한 얼굴과, 아! 함정을 팔 때 들려왔던 소리는 새의 것이 아니었던 것을 깨달았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여자가 하나 더 보였다. 4구역의 에이미였다. 남자, 카이클을 간호하던 여자였다, 이스피어와 렉서드가 놓쳐버린 한 명이자 함정을 설치할 때 자신들을 감시했던 시선이었다. 에이미는 가슴이 찢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스피어는 창을 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스타의 여정은 원래 험난한 법이었다.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의 한 恨은 질기게도 이스피어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급한 대로 달려드는 둘을 렉서드와 함께 제압하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발목을 물은 덫은 확실히 제거해야 했던 이스피어는 렉서드가 에이미를 상대하는 동안 급하게 덫을 제거하려 했다. 했지만. 제기랄. 저도 모르게 욕을 짓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상처가 더 벌어졌다. 부러지지는 않은 뼈가 보였다. 맨눈으로 말이다. 이걸 과연 다행으로 쳐야 했나?

 급박한 상황 속 이스피어는 쓰러진 상대의 옷을 찢어 발목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감싸 묶고, 렉서드 측에 가세해 에이미를 치려 했었다. 하지만 그때 멀리서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본래 이스피어와 렉서드의 뒤를 치려 했을 두 명이 쫓아오는 모습과 함께 경악 섞인 비명이 들렸다. 이스피어가 혀를 찼다. 이스피어는 렉서드를 한 번 바라보았지만, 끝내 뒤돌았다.

 쫓아오는 한 명이 석궁을 들고 있었던 이상, 또, 다른 한 명이 이스피어가 경계했던 7구역의 포웨나였던 이상. 렉서드야 어찌 되든 이스피어는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렉서드를 버리고 도망치는 이스피어에게로 추격이 붙는 것은 시간문제였다-남은 인원이 에이미와 합세해 렉서드를 처치한 뒤 제게로 올 테니-. 함정을 설치해둔 곳으로 이스피어가 절뚝절뚝 달음박질했다. 피가 빠져나간 덕인가. 그도 아니면 고통 때문인가. 추위가 송곳처럼 몸을 꿰뚫어왔다.

 이스피어와 렉서드가 함정을 설치하는 모습을 본 에이미가 남은 자들에게 정보를 공유해 역으로 그들이 이스피어와 렉서드를 공격한 것일 테니, 노골적으로 함정이 설치된 곳을 향해 달리는 자신을 상대가 끝까지 쫓아올진 알 수 없었다. 쫓아온다면 함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했고, 쫓아오지 않는다면 무사히 도망칠 수는 있겠다. 아니.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스피어의 머리가 맹렬히 돌아갔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뒤집힌 판을 역으로 뒤집을 수 있을까? 만약 늦게 도착한 둘이 이미 이스피어와 렉서드가 설치한 함정을 제거한 뒤였다면? 렉서드는 죽었다고 봐야 했다. 혼자 남은 자신이 어디로 도망칠 수 있지? 발자국보다 짙은 핏자국은 어떻게 지워야 하지?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승리로 끌어낼 수 있겠나.

 생각 끝에 이스피어는 도망치던 방향을 틀었다. 함정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마땅했다. 다섯 명이 한꺼번에 자신과 렉서드를 치지 않고 시차를 둔 이유를, 그렇게 두 명이 뒤늦게 온 이유를 생각해봐야 했다. 자신들이 설치한 함정을 이미 해체했거나 그걸 역으로 사용하기 위해 위치를 바꾸거나 했겠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자신이 도망칠 곳은 뻔했으니까!

 이스피어는 새벽에 미리 봐두었던 장소 중 하나로 달렸다. 다리가 시시각각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겨울을 닮은 계절에 하얀 숨을 내뱉으면서도 웃을 수 있었다. 통각이 둔해져 한계 이상으로 달릴 수 있었다. 눈밭에 계속 남고 있을 흔적을 지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우선은 살아남을 테다. 이스피어는 생각했다.

 유독 앙상한 나뭇가지로 우거진 곳, 이스피어가 도망쳤으리라 생각하고 뒤쫓았을 때 도망치지 않은 이스피어가 창대를 겨누었을 때 그들에게 생길 당황이라는 틈과 그사이를 찌르고 들어갈 때 필요한 평정심이며, 또.

 ……멈춰선 이스피어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눈이, 여전히 내리지 않고 있었다.

 이번의 위기를 이겨낸 뒤로도 이스피어가 자신의 흔적을 지울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앞으로 이스피어에게 남은 것은 꾸준히 쫓기게 될 미래뿐이라는 말이었다. 숨을 들이켰다. 피가 빠져나간 탓에 창백한 안색으로도 그는 눈빛을 가다듬었다.

 이제는 버릇처럼 떠올리는 사람이 있었다. 이스피어는 튀어나오려는 헛웃음을 애써 억눌렀다. 그렇다고 그려내는 사람의 형상을 흩뜨리진 않았다. 그림자를 닮은 머리카락과 달을 담은 눈동자와 언제나 무덤덤하던 얼굴. 자신을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남자는, 돌이켜 생각해보면 막상 자신에게 특별한 위해를 끼친 적이 없었다. 되려 자신에게 호의적이라면 호의적이었던 아이작의 얼굴을 떠올려 본 이스피어가 자그맣게 웃었다. 그렇지만 상념은 여기서 갈무리되어야 했다.

 이스피어가 앞으로 제게 닥쳐올 적을 향해 겨눈 창끝도 응당 흔들리지 않았다.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은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를 바라보았다. 귀를 기울인다. 모든,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와 스산한 바람 소리와, 그사이로 오는,

 발소리.

 전신에 힘을 준 이스피어가 그대로 창을, 던졌다. 일직선으로 날아간 창이, 나뭇가지를 해친 날 끝이 발자국의 주인에게로, 그러니까.

 아이작에게로, 이스피어의 창이 던져졌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이스피어의 호흡이 멈추었다. 순식간에 입술이 벌려지더니, 저도 모르게 외쳤다. 눈이 마주쳤다.

 “──피해!”

 캉! ……. 청명하다 싶기까지 한 소리가 울렸다. 이스피어의 창은 남자가 반사적으로 휘두른 둔기에 맞아 바닥에 떨어졌다. 눈을 깜빡였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스피어의 모든 긴장과 불안은 단숨에 허탈함으로 승화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자신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덫에 걸려버린-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인 이스피어 틸다에겐 분명히, 아주 암울하고 암울한 미래만이 남아있었다.

 남아있었다고 생각했다.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생각지도 못한 탈출구가 있었나 보다. 어린 이스피어가 깜깜한 지하실에서 보았던 달의 한 조각처럼, 그런데도 불구하고, 빛이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아이작이 이스피어를 구하러 온 것인지, 죽이러 온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이스피어는 당연하게 아이작이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무의식중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이스피어가 찰나 자조적으로 웃었다.

 “……너 여기서 뭐 해?”

 비록 아이작은 황당함을 감추지 않고 그런 바보 같은 말을 건넸지만, 땅에 떨어진 창을 줍지도 못한 이스피어는 추위에 얼어있던 고통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에 잠시 어깨를 떨 따름이었다. 이스피어가 잠시간 답하지 않고 심호흡했다. 그리고 나서야 굳은 입술을 움직였다.

 “뭘, 하냐니?”

 욱신거림이 발목을 타고 머리를 찌르기 시작했다. 이스피어는 내색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날 쫓는 애들을 치우려 잠복하고 있었던 거지. 뭐.”

 네가 올 줄은 몰랐지만! 잠시 멍해지던 정신을 다잡은 이스피어는 그때에서야 엉거주춤 몸을 숙여 창을 주웠다. 남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경계에 손끝이 닿았다. ……이스피어가 조용히 숨을 흘렸다.

 결국엔 그래 봤자다. 찰나 아이작이 저를 구하러 왔단 생각에서 안도감을 얻었던 주제에, 이스피어는 그대로 손을 내젓곤 말을 이었다.

 “아무튼, 빨리 가. 네가 여긴 왜 와? 아니. 애초에 어떻게 이곳으로 온 건데?”

 하지만 아이작은 이스피어의 말을 자연스레 무시하고 시선을 내렸다. 끝이 향하는 곳은 아직도 핏물이 새어 나오는 곳이었다. 아이작이 말했다.

 “소란스럽길래. 그래서 왔는데.”

 “그래? ……곧 내게로 올 거야. 휘말리기 전에 너는 빨리 가기나 해.”

 아이작이 전후 사정을 파악한 것을 깨달은 이스피어는 괜히 휘적이는 손짓을 더 빨리했다. 아이작의 시선이 이스피어의 손끝을 스쳤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음울한 듯 침잠되어있었고, 색깔로 따지자면 잿빛이었다. 12구역 출신답게 잘 어울렸지. 이스피어는 혼자 그런 생각을 했다. 아이작이 회색빛 음성으로 말했다.

 “그 상태인데 퍽도 걔들을 다 상대하겠다.”

 이스피어의 눈썹이 꿈틀거렸으나 이스피어는 곧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마냥 웃으며 답했다.

 “난 당연히 처리할 수 있지. Twelve, 너한테만 알려주는 건데, 이건 사실 일부러 다친 거라고! 그래야 걔들이 방심……잠깐. 너 뭐 해?”

 입술을 꾹 다문 아이작이 이스피어에게 다가오자 이스피어는 묘한 불안감에 휩싸여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뒷걸음질 치려 해도 짜릿한 고통이 발목을 붙잡아 쉽지 않았다.

 “뭐야, 왜 그래? 빨리 가란 말 안 들려?”

 “다시 말하지만,”

 “뭔데!”

 “내 이름은 12구역이 아니라 아이작이야.”

 그리고 아이작은, “Hey, I, ……Twelve!” 이스피어를 냅다 들쳐 안았다. “What?” ……그래. 가마니처럼 말이다.

 당황한 이스피어가 아이작의 목을 다급히 끌어안았다. 슈트의 소재 자체는 얇았다. 단숨에, 괜히 살이 광범위하게 맞붙는 느낌이 올라왔다. 이스피어가 조용히 숨을 참았다.

 이스피어라는 짐 덩어리를 둘러업은 아이작은 목적지며 목적을 알려주지 않고 막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추적자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으니 이런 실랑이로 시간을 소요해도 괜찮을 정도의 여유가 있었지만. 아이작의 목을 껴안은 이스피어의 손끝이 오므라들었다. 괜스레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드는 건 피를 흘린 탓일까?

 더듬거리며 물었다.

 “너 뭐, ……뭐 하는 거야?”

 “가만히 좀 있어.”

 “아니, 날 데리고 어딜 가려는 거냐고. 내려줘. 뭐하러 날 데려가, 분명 추격이 붙을 텐데,”

 그러나 잠깐의 발버둥-혹은 반항-은 아이작이 다시 한번 이스피어를 고쳐 안는 것으로 잠잠해졌다. 으, 아버지의 목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어. 꿍얼거리며 눈을 질끈 감는 이스피어의 그런 사정을 알 수 없던 아이작은 계속해 걸었다.

 물건처럼 이송되는 이스피어가 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왜 그는 자신을 데려가나.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스피어는 마침내 그 미약한 반항마저도 포기했다. 이스피어가 아이작의 품 안에서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 소리가, 눈길 밟는 소리가, 그리고, 누군가의 심장 소리가.

 자작나무 숲을 빠져나와 넓게 펼쳐진 벌판을 지나던 때였다. 입술만 달싹이던 이스피어가 희미한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어디로, 가?”

 “내 은신처.”

 “그게 어딘데?”

 “너랑 같이 다니던 애들이 저번에 습격했던 곳은 아니야.”

 “알고 있는데, 왜 날 구해.”

 아이작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귀여운 구석 하나 없는 남자였다. 속으로 불만을 읊조린 이스피어가 살며시 감았던 눈을 떴다.

 강하게 천으로 동여 묶은 발목에서부터, 그런데도 새어 나온 피가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핏방울 맞은 하얀 눈밭이 도화지라도 된 것처럼 붉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스피어가 알고 있는-겨울에 피어나는 꽃도 붉은 꽃잎을 가지고 있었다. 대저 꽃향기에는 벌레가 이는 법이니 꽃을 꺾어가야 함이 마땅했는데, 어차피 핏자국을 지운들 발자국까지 다 지울 수는 없어 포기해야 했다. 무엇이든 간.

 느릿하게 열리는 입술이 건조한 공기에 바짝 마른 채였다.

 “어떻게 날 찾아왔어?”

 “……왁자지껄하길래. 먹을 걸 구하러 나왔다가.”

 “그걸 ‘왁자지껄’이라 표현할 수 있었던가?”

 “딴지 걸 거면 그냥 자.”

 이스피어가 잠시 화난 눈썹을 그리며 아이작의 뺨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냥 입 다물고 자라니? 점점 제 의식이 흐릿해지던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그냥 때려 맞춘 건가? 이스피어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떠보기도 하다 다친 발목을 부러 움직여보기도 했고-덕분에 악 소리를 흘려 아이작의 이상한 눈초리를 받았다-, 입술을 벌려 숨을 뱉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든 별것 아닌 순간 사이에서.

 불현듯 이스피어는 아이작의 등 너머로 펼쳐진 새하얀 광경을 목격했다. 희미해지던 시야가 바로 잡혔다. 눈을 깜빡였다. 생경한 감정이 심장을 옥죄어왔다.

 그러니까. 아무리 겨울날 하늘이 맑아봤자 가을날 하늘에 비할 바가 못 되었는데, 그런데도 어쩜 당장 하늘은 아득히 높아 평생 닿지 못할 것처럼 느껴졌는지 말이다. 또 그 아래로 하얗게 쌓인 눈은 하얀 바다를 이루는 것처럼 햇빛을 받을 때마다 윤슬을 일궈내는데, 왜 그로 하여금 이스피어가 눈을 감지 못하게 만드는 것인지, 겨울 아래 나무들이 잎을 떨궈서라도 추위를 버티는 이유는 그 몸통에 새겨진 눈으로 이스피어를 감시하기 위함이 아니라-바로 이런 광경을 보기 위해서라고……. 이스피어가 무심코 생각하게 만드는 것인지.

 사람이라면 필경 이런 광경을 동경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불합리할 정도로 막대한 아름다움이 이스피어를 해득解得하게 했다. 말 그대로, 예뻤다. 탄식이 속을 메웠다. 어느덧 하얀 것이 나비처럼 나풀나풀 내려오기 시작했다.

 눈이 내렸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스피어가 숨을 멈추었다 내뱉고, 눈을 한 차례 깜빡이면 작은 눈송이가 눈꺼풀에 내려앉아 정신을 일깨웠다. 그렇게 무심코 벌어지고 만 입술은 누군가를 부르기에 이르렀다.

 “……Twelve.”

 “왜.”

 눈 뭉치처럼 둥글게 뭉개지는 발음에 아이작이 잠시 시선을 주었으나 이스피어는 줄곧 하늘을 바라보고 있어, 아이작의 고개는 다시 앞을 향했다. 그 또한 내리는 눈을 보았다. 이스피어는 아이작의 등 뒤로 한쪽 손을 뻗었다. 머잖아 차가운 눈송이가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이스피어가 물었다.

 “눈싸움해 본 적 있어?”

 지나온 길들이 새하얗게 지워졌다. 붉은 꽃도 이르게 핀 탓에 저물고 뱀 지나온 모양대로 남은 눈결도 사라진다. 손가락을 뻗어 모래사장에 무수한 낙서를 남긴들 이는 파도에 집어삼켜지듯 하얀 바다도, 드디어 저만의 파도를 일으켜냈다.

 이스피어는 아이작의 어깨에 내려앉은 눈꽃을 보았다. 눈꽃은 그 형태 그대로 녹지 않았다. 하도 시린 겨울이라 그랬나 보다. 이스피어가 생각하는 틈을 타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눈싸움?”

 “……그래, 보통 어릴 때, 다들 해보잖아.”

 뺨이나 귀에는 이미 감각이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한 차례 작은 바람이 불면 이스피어는 더 몸을 웅크렸다. 아이작을 세게 끌어안고 말았다. 다만 아이작은 당황하지 않고 이스피어를 한 번 더 추슬러 안았다. 그가 뜸을 들이다 답했다.

 “그런 건 너같이 좋은 출신의 인간들이나 할 줄 아는 거지. 아니면 생각 없는 어린애들이나.”

 “그래도. 원래 어리면 다들 생각이 없으니까.”

 아이작이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희미한 숨결조차 화상처럼 허공에 자욱을 남겼다. 널따란 벌판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갔다. 하늘로 높게 뻗어진 세콰이아 Redwoods 나무들이 이스피어를 반기고 있었다.

 “난 어릴 때 친구도 없고 집도, 돈도 없어서. 눈이 내리면 공짜 물 마실 생각에 신난 기억밖에 없다.”

 가루눈이 서서히 몸집을 불려 함박눈이 되어가고 있었다. 게임메이커들이 조작한 것인가? 그런데도 속절없이 아름다운 광경이라, 이스피어는 내뻗은 손을 아직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눈이 쌓여갔다. 아이작의 어깨 위로도, 이스피어의 머리카락 위로도, 한참을.

 눈꽃이 끝까지 녹지 않았다. 그래서 이스피어도 말했다.

 “나도 눈싸움해 본 적 없어. 그래서 물어본 거야.”

 그 말은 들은 아이작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그러면 돌연 아이작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가 있었다. 이스피어가 번쩍 고개를 들어 아이작을 바라본 이유가 그것이었다.

 웃음소리가 났다. 이스피어가 아이작을 보았다.

 그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

 이스피어가 짧게나마 숨을 멈춘 틈을 타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그럼 너도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행복한 아가씨는 아니었던 모양이네.”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던 것 같은 거리가 좁아 들어 당장 아이작이 이스피어를 안고 있었으니. 아이작은 이때에서야 이스피어같은 사람도, 자신과 비슷한 점이 하나쯤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이작은 그것이 퍽 유쾌했다.

 그리고 이스피어의 손끝은 괜히, 살짝 오므라들고 있었다. 입술을 벌렸다 다시 다물기를 반복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속을 간질이고 있었는데, 그것에 도통 이름을 붙일 수가 없었다. 결국 심호흡하던 이스피어는 어떤 정의도 내리지 못했다. 아이작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 속에서 눈을 감았다. 말했다.

 “난 지금도 행복해. 그러니까, ……그렇게 단정 짓지는 마.”

 이스피어가 잠에 빠져드는 것을 알고 있었던 아이작은 이스피어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되려 잠드는 것을 부추기듯 안아 든 팔에 힘을 주기까지 했다.

 눈꺼풀이 계속해서 감겨왔다. 아이작에게 답하는 와중에도 아버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그래선 안 됐는데, 그러니까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 됐는데, 아니, 애초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서조차 안 됐는데, 타인을 통해 희망을 품어선 안 됐는데 말이다.

 이 순간 이스피어에게 제일 짜증 나는 것은 그토록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 했던 아이작의 품에 자신이 안긴 지금, 제 가슴 속에 휘몰아치는 감정 속에 안도감이 있다는 점이었다. 간질거림이 있다는 점이었고, 안전하다는 생각 가운데서 이스피어가 당장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겠다는 점이었다.

 ‘참, 이상하지…….’

 본래 사방이 어두운 곳을 떠올려보라 하면 어린 날 갇혔던 지하실이 먼저 떠올랐는데. 하지만 현재 저를 끌어안은 아이작의 그림자는, 사방이 어둑한 이 품은 과거의 그 날과는 달리 자꾸만 잠이 와서,

 아마도 달을 닮은 빛이 저를 지켜봐 주어서 그런 것인가……,

 이스피어로선 흐릿한 추측만을 엮을 뿐이었다.

 

 결국엔 눈을 감았다.

 잠에 빠져들기 직전, 이스피어가 아주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우리는 깨어서 겨울을 지새워야 하니까.

 조금만, 진짜 조금만,

 

 “나, 조금만 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