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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커뮤니티

[천화연] 각자의 선

by 여우비야 2020. 7. 20.

 

 

 

 그 무엇도 자신을 휘두르려 들지 않았다면, 화연은 항상 웃었다.

 모든 것이 기꺼웠다.

 

 

 화연도 알고 라움도 알았다. 그러나 화연은 종종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구태여 타인을 이해하려고 든 적은 없었으나, 라움의 행위만큼은 이런 화연에게도 의구심을 안겨주었다. 이상한 일이지. 이쯤 되면 알아서 다 떨어져나가야 했는데. 화연은 라움의 외로움을 알았다. 화연 또한 외로웠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들 한다. 화연은 인간이니, 마땅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타인을 침범하지도 타인에게 침범당하지도 않았지만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는 즐겁다. 누군가가 살아가는 모습은 재미를 안겨다준다. 같이 온기를 누릴 수 있게 했다. 화연은 자신이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임을 지겹게도 알았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했을 것이다. 그 증거로 우리는 무리를 형성하지 않았나.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은 무릇 그러했다. 누구나 다 외롭기 때문에 관계를 맺고, 또 나약하기 때문에 서로를 채워줄 사람에게 이끌린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인 덕분에.

 그런데 그녀는 어떤 말을 했더라. 라움은 말했었다. ─네, 만약 할 수 있다면.

 죽음의 신을 이 곳에 묶어두어서 모두가 살 수 있고 다 같이 봄을 불러올 수 있다면, 저는 능히 그렇게 할 거에요.

 

 말이… 안 되지 않나? 불가의 연속이다. 화연이 라움에게 난처랄 것을 경험하는 와중에도 라움은 꾸준히 말을 이어나갔다. 손에 쥐었다가도 금방 날아가는 게 행운이고, 그 사이로 딱 맞춰 찾아드는 게 불행이잖아요? 화연씨, 죽지 마요. 가지 말아요. 저랑 계속 같이 있어줘요. 집착하는 사람은, 싫어해요? 라움은 화연을 보았다. 화연도 라움을 보았다. 라움도 알고 화연도 알았다. 그러나 화연은 그녀의 앞에 존재하는 것이, 위치하는 것이 진짜 '자신'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라움이 선 너머에 있었기 때문일까.

 화연이 라움의 선과 선善을 건드렸기 때문일까.

 

 "인간이기 때문에 외로워질 거라고 했죠. 화연씨. 저는 외로워지지 않을 거에요. 여러분이 여기에 있는 한, 생존자가 이 땅에 숨쉬는 한, 겨울이 이 곳에 있는 한 저는 절대 외롭지 않아요. 그리고, 화연씨가 외롭게 두지 않을 거잖아요. 그렇죠?"

 

 우리는 인간이기에 필연적으로 외로워 질 것이다. 라움은 봄을 위해서라면, 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인간이길 포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라움은 외롭지 않다. 가슴으로 이해할 순 없었어도 머리로 이해할 수는 있었다. 화연이 라움을 외롭게 두지 않을 것이라는 라움의 말은 맞았다. 화연은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시계 초침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똑딱, 똑딱. 소리와 함께 화연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이고, 눈을 뜨며 고개를 들어올린다.

 고장난 녹음기가 된 라움이 있었다. 기계는 아무리 잘 사용하다가 어느 날 작동을 멈춰버리곤 했는데. 지금의 라움이 딱 그 짝이라고, 화연은 생각했다. 그녀는 아무 표정 없이 화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습관처럼 눈을 깜빡인다. 똑딱. 깜빡. 똑딱. 깜빡. 라움의 눈은 여전히 빛났다. 화연은 가끔 그 빛자락 사이에서, 광기일 뿐인 집착을 목격했다. 어쩐지 한숨이 나오는 기분이었다. 그를 참지 않은 화연은 스스럼없이 가벼울 뿐인 숨을 뱉는다. 공기는 무척이나 차갑고 날카로워 이 뿐일 숨인데도, 하얀 자욱을 화상처럼 남긴다.

 

 "모두 믿고 싶은 걸 바라보며 살아가요. 무엇이 잘못되었나요? 저는 사람을 믿어요.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저마다 생존을 위해 애쓰는 이 모습이."

 

 성라움은 매번 천화연의 선을 넘나들었다. 그리고, 천화연은 지금 이 순간. 생각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기어이 선을 넘었다고. 정확히는 천화연이 성라움의 선을 넘었고, 성라움이 천화연의 선을 넘어왔다고. 영역을 침범한 이상 관계는 정리되어야만 했다. 나 답지 않은 짓을 했지. 라움의 페이스에 휘말려 든 까닭이었다. 턱가를 손으로 매만지며, 화연은 시계 초침과 함께 눈을 굴린다. 검은 눈이 반시계 방향으로 굴러가는 것이 선명하다. 자욱을 남긴다. 둥글기만 한 시선 끝자락은 다시금 라움을 향했다.

 가늠하는 것이었다. 화연이 생각하고 있는 날 것의 언어로 라움의 봄(선)을 찢어발길지, 아니면 우리가 서로 침범한 이 발자국을, 마치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워버릴지를. 발자국 따위. 발 끝으로 문대버리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눈을 감고 뒤를 돌기만 하면 당장 보이지 않는 땅바닥. 고개를 치켜들기만 하면 마냥 드넓은 하늘이 보일텐데 말이다. 사람을 믿는다. 이처럼 모순적인 문장이 어디 있을까.

 … 그렇게 화연은 여느 때처럼 웃는다. 양 입꼬리를 끌어당기고, 가늘게 눈을 접어 웃으며 라움을 되돌아본다.

 

 "언니. 내가 무슨 말을 해주길 바라요?"

 

 접어 웃던 눈을 제대로 뜬다. 고장난 녹음기마냥 라움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져나갔듯, 화연의 표정 또한 서서히 녹아내린다. 빗물에 온갖 것이 쓸려내려가듯 감정도, 웃음도, 무엇도 죄다 사라졌다.

 

 "다시 돌아갈 기회를 줄게. …"

 

 선善이 없는 화연의 선이 그어졌다. 피곤과 난감과 귀찮음이 옅게 어린. 낯이다. 발 코를 세운 화연은 그대로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당신과 저 사이의 선을 그었다. 눈에 너무나도 선명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부정하거나,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화연은 다시 돌아갈 기회를 주겠다 말을 했지만 돌아간들 앙금이 남을 것을 알았다. 혹처럼 떼어지지 못할 테다. 지긋지긋하게 라움을 붙어다닐 테다. 그림자보다 독하게.

 이래서 싫었던 건데. 하나 먼저 선을 넘은 것은 화연이었으니 이 기회를 주는 것도 마땅하다 생각했다. 매일같이 라움이 화연의 선을 재보듯 했었다지만 정말 그 선을 넘어온 적은 없었으니까. 

 

 "눈 감고 뒤 돌아."

 "고개를 들면. 내가 그었던 선이 없어지는 거야."

 

 집착은 땅거미처럼 드리운다지만 그 집착마저도 화연의 선 바깥이었다면, 화연은 아무렴 좋았다. 인간인 화연은 타인을 필요로 했으니 당신의 말마따나 자신은 라움을 외롭게 두지 않을 것이었고. …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나쁘지 않은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수를 한 번 친다.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라움을 응시하는 화연이 있었다. 입을 열어 말하기를, 자. 선택하세요.

 

 까딱하단 잘릴 지 몰라 사실 언니라면 모르는 척 잘 할 수 있잖아요, 다 알아 나는 종종 언니가 내 앞으로 다른 무언가를 겹쳐본단 걸 천화연이 아닌 무언가를 혹은 사람을 시야에 담아버리고 마는 것을. 믿고 싶은 걸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언니는 어쩌면 봄이 오지 않을 걸 알고 있어 떠나가지 않겠단 약속을 믿고 싶었던 것처럼 봄의 도래를 믿는거지, 광신도가 되어서 비난하는 거 아냐 그저 알려주는 거지 봄의 도래를 믿듯 나의 약속을 믿어도 된다고 항상 곁에 있을 천화연을 그 문장을 못으로 박아 벽에 걸어놓아도 된다고 하지만 이 이상을 넘어오려고 탐하려고 들 생각은 버리라고 까딱하단 잘릴 지 모르니까 지금껏 그래왔듯 나의 선을 위해, 언니의 선善을 위해,

 … 모르는 척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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