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어공주 AU
* (https://www.youtube.com/watch?v=QFJiCe5bc20&list=PLwlXCM2eQbcdh-VywnPhx8tW4auw8eG4F&index=8)
보름달이 만개하는 바다 위 인어에 대한 얘길 들어봤니, 찬연한 푸른빛 감도는 그곳에는 바다의 딸이 있다더라 절망보다도 어두운 머리카락은 파도 일렁임에 너울거리고 태양보다도 밝은 두 눈은 모든걸 꿰뚫어본다더라 꽃 향 스며드는 사월의 밤바다는 무엇도 거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여 그야말로 바다라고 그것을 닮아 자애로운 손가락이 뻗어져나오면 하나 부디 도망쳐나오라고 바다는 너무나도 그 딸을 사랑하기에 드넓고 끝을 모르는 사랑을 가로채간다면 바다 밖으로 모든 저주를 걸어버릴거라고, 죽여버릴거라고…
*
…그러나 동대륙의 왕자, 아이작 딜라이트가 그 전설 속 바다의 딸을 만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었다. 끝나지 않는 회의에 지쳐 바람이라도 쐬러 밤의 바닷가를 거닐던 날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면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었고, 아이작은 그에 무심코 동대륙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인어의 이야기를 떠올렸었다. 인어라니.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찰박,
무심코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시선 끝자락에 그가 보이지 않았더라면. … 아이작은 끝까지 '인어'란 생명체는 허구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마땅히 생각했을 것이었다. 멍하게 그 곳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면 은은한 노래 소리가 바닷가에 울려퍼졌다.
잘 자라 우리 아가 ……
앞뜰과 뒷동산에 ……
달빛에 흠뻑 적셔져 바다 물결이 빛에 수군거리듯, 기다란 흑색 머리카락 또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착각이 들었다. 백옥보다도 새하얀 피부에 보름달보다도 밝은 금안. 상체로는 아예 나체였고 하체로는 인간의 다리가 아니라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있었다는 점만 뺐다면, 틀림 없이 대륙 제일의 미인이었을 그것을 보며 아이작은 수 십 초를 더 멍하게 서있었을 것이었다.
인어가 부르는 노래는 동대륙의 자장가였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작의 어머니가 어린 아이작에게 불러주곤 했던 그 노래였다. 아이작은 홀린 듯 그곳으로 걸어갔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폈다. 인어의 몇 발자국 뒤에 다다라서, 침착을 가장해 말을 걸었다.
"… 노래를 아주 잘 부르는군."
"─새들도, …… 엄마, 깜짝아!"
첨벙, 바위 위에 걸터앉은 채 노래를 부르던 인어가 화들짝 놀라 바다에 뛰어든 소리였다. 물방울이 조금 튀기는 것에 아이작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인어의 꼬리가 완전히 바다에 푹 잠겼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와 함께 그 인어가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신기하단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상의 바위를 두 손으로 붙잡아 몸을 반쯤 숨기는 모양새였다. 그래봤자 얼마나 가려진다고. ... 아이작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떠오른 비소를 숨겼다. 그는 한 쪽 무릎을 바닥에 대며 몸을 숙였다. 조금이라도 인어와 눈높이를 맞추고자 한 행동에는 아이작이 전설을 곱씹어보며 인어에 대한 내용을 떠올렸던 이유가 있었다. 바다의 사랑을 받는다고. 안 그래도 요즘 해양 문제로 대륙이 시끄럽던 때였다. 연이은 회의 때문에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던 아이작이었으나, 스스로 그 제정신이 아닌 상태를 눈치챌 리는 만무했다.
"저, 혹시 누구세요? 절 아세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중에 그 인어가 드디어 입술을 열어 말했다. 노래를 부를 때의 목소리와는 퍽 다른 음색이었다. 좀 더 둥글둥글하고, 앳된 목소리. 속으로 감상평을 읖조리며 아이작이 인어의 눈을 마주했다.
"… 동대륙의 왕자, 아이작 딜라이트다. ... 그대는 인어임에 틀림없는 듯 한데.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나."
"와, 왕자! 그 전에, 인간은 처음 만나봐요. 사실 오늘 처음 바다에 나오게 되었거든요. ... 이름은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저는 바다의 딸이에요. 여태껏 잠을 자고 있다가 오늘에서야 수면 위로 나왔는데 왕자님을 만나게 될진 몰랐네요. 이럴 줄 알았다면─,"
"… 잠깐, 잠깐."
이야기를 듣던 아이작은 다정한 미소를 그리며 멈추라는 듯 손을 보였다. 종알종알 떠들어대던 인어는 딱 입술을 다물었고 고개를 크게 갸웃거릴 뿐이었다. 인어라는 생물이 이렇게 말이 많을 줄은 몰랐다. 아이작은 속으로 생각하며 더 웃음을 짙게 그렸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아니, 오해를 하나 정정해줄까 싶어서."
"오해라면?"
"이름 말이야."
"네."
"바다의 딸이라기엔 너를 지칭하기엔 너무 광범위한 말이지. 조금 더, 개인적이고 긴밀한 이름이 필요해. 내가 나를 땅의 아들, … 이라 표현하지 않고 '아이작 딜라이트'라고 표현한 것처럼 말이야."
땅의 아들이라. 스스로 뱉은 단어이긴 했어도 우스움을 참을 수 없었다. 아이작은 자그맣게 실소를 흘렸다. 인어는 그의 말을 듣더니 방긋 웃음지었다. 경계심이 어느덧 다 풀린 듯 살금살금 바위 위를 올라와 처음 아이작이 목격했던 것과 비슷하게 바위 위에 걸터앉아 그를 보았다.
"그런 거라면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그래서 바로 말을 했지."
"아, … 그건 그렇구나."
인어는 말이 많고, 너무 순진하다. 다른 말로는 멍청하다. 아이작은 신랄한 생각을 했지만 겉으로 상냥한 모습을 거두지는 않았다. 갸웃거린 고개를 바로 한 인어가 눈매를 휘어 웃었다. 천진난만해 보이면서도 언뜻 자애로워 보이는, 아이작이 아무 뜻 없이 생각하기에는 바다만 같았던 웃음이었던가.
"이스피어라고 해요. 이스피어 틸다. 제가 직접 지은 이름인데, 어때요?"
"… 그대와 같이 아름다워."
"아름답다? 좋은 뜻일까요, 아이작?"
"곧장 이름을 부르는 건가? 뭐, 좋아. 나도 이스피어라 부르지. … 그래, 아름답다는 좋은 뜻이야. 보기에 아주 조화롭고, 균형이 있어서. … 좋다는 뜻이지."
"그렇구나. 내게 좋은 말을 해주어서 고마워요."
인어, 이스피어는 이 별 것 아닌 대화가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 후후 웃으며 하반신의 지느러미 끝을 살랑거렸다. 아이작은 움직이는 꼬리의 끝을 흘끔 바라보다, 다시 이스피어를 바라보며 느리게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가장 겉옷을 벗어 이스피어의 어깨로 둘러주고, 앞을 조금 여며주었다. 뭘 하는 거예요? 눈을 땡그랗게 뜨면서도 하나 경계 없이 이스피어는 그가 하는 행동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여며주는 겉옷을 물기 어린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내게 왜 이걸 걸쳐주는 거예요? 물에 들어가게 된다면 흠뻑 젖어버리고 말텐데."
"… 이스피어, 혹시 가족이랄 사람, 아니, 인어인가. … 가족인 인어들이 있나? 너를 기다리는 존재라던가."
이스피어는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무겁게 떨어진다. 그렇다면 모든 바다가 나의 가족이겠지요. 그들은 나를 사랑하니까요. 아이작으로선 쉽게 짐작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스피어는 별로 신기할 것 없이 웃으며 당신이 걸쳐준 겉옷을 조금 더 여몄을 따름이었다. 옷자락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했다. 이것이 육지의 향인가? 아이작은 그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 하기로 했다.
"아무튼 그러하다면, 제안할 것이 있는데."
"… 왕자라는 신분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인간들 중에서도 높은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어요. 바다에선 모든 생명이 동등하지만, 바다와 육지는 무릇 다른 법이니까요. …… 그런 당신께서 제게 친히 제안할 것이 무엇일지, 궁금하네요."
"나와 같이 가지 않겠나?"
"어디를 향해서요?"
"이 제국의 왕성으로."
"나를. … 데려갈 수 있어요? 아니, 그 전에. …… 왜 나를 데려가고자 하나요?"
"그대가. …"
바다의 딸이기 때문이지. 아이작이 입술을 다물며 느릿한 웃음을 그렸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이 인어를 구슬리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이스피어의 이용 가치를 따지려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는 한편 아이작은 선한 사람의 낯을 연기하며 인어에게로 손을 뻗어 물에 젖은 옆머리를 조심히 넘겨주었다. 이스피어는 아무 것도 모르겠단 표정으로 눈을 깜빡일 따름이었고. 아이작이 더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그대가 마음에 들어서."
"… 마음에 든단 건. ……"
"친해지고 싶다는 이야기야."
아이작의 손길에 옅게 떨던 이스피어는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며 가까이 다가온 아이작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았다.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기를 몇 초, 이스피어는 "...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웃음을 피웠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아이작의 눈에 익숙해져버린 그 웃음이다. 순진하기 짝이 없고 그러나, 또 순수하기만 한 그 웃음 말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요.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단 말씀이시죠."
"… 말하자면 그렇지."
친구라는 단어는 단언컨대 아이작과 평생 연이 없다시피 했던 단어였으리라.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왕족으로 길러진 아이작은 꿈에 가득 찬 단어들을 믿지 않았다. 우정이나 사랑, 애정 따위의 것들 말이다. 진실한 우정과 진실한 사랑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지. 그렇게 제 어미가, …… 생각을 그만둔다. 어찌되었든 이 인어에게 친구라는 단어는 퍽 꿈에 젖어있는 단어임에 자명했다. 머릿속이 꽃밭인 자이니 친구라는 것에 일종에 환상을 가졌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바다가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어요. 정확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요."
"… 사람들의 이야기?"
"네, 바다 속에 있으면 바닷가 근처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종종 들려오곤 하거든요. 이야기가 섞일 때도 많지만 몇몇 이야기는 유독 잘 들려오기도 하는 법이라. … 친구란 그런 것이랬어요. 서로의 나약함을 끌어안아주고, 서로에게 탐탁치 않은 부분이 있더래도 그걸 감안하고, 도닥여주는 게 친구라고요."
"……"
하지만 직접 이야기를 듣게 되니, 아이작에게 이것은 허무맹랑하고 또 허무맹랑한 이야기임에 틀림이 없었던지라. 아이작은 순간 무얼 말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입술을 다물어버렸다. 금방까진 저 이야기를 듣는다는 점을 가지고 타대륙의 정보를 알아올 수 있을까 이런저런 가늠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머릿속이 새하얗다. 이스피어는 이런 아이작의 속도 모르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바다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당신에게 너무나도 많은 폐를 끼칠지 모르겠어요. 육지로 나가기 위해 두 다리를 얻을 수는 있는데, 그렇게 되면 아파서 잘 걸어다니지도 못할 테고. … 바다가 너무 많은 경고를 들려주거든요."
"… 두 다리를 가질 수 있나?"
"네. 앞서 말한대로, 당신께 폐가 될 정도로 연약한 다리가 되겠지만요. 그래도 괜찮나요?"
아이작은 손으로 입가를 매만지며 떠오르는 미소를 숨겼다. 그래, 그러나 결국 바다의 딸이지.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사용 가치는 크나크다. 친구 놀음을 해주는 것으로 바다의 딸을, 나아가 바다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훨씬 남는 장사다. 아이작은 손을 입에서 떼어내고 다른 한 손을 이스피어에게로 내밀었다. 다정하고 또 다정한 음성을 뱉었다.
"나와 친구가 되어, 이스피어."
"… 나를 잘 보살펴주어야 해요. 말했듯이, 육지는 처음이니까."
"친구 하나만 보고 바다를 빠져나오는 것인데 어련히 잘 챙겨줘야지. 그 점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최선을 다할 테니."
이스피어는 아이작의 생각대로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물기가 어려있었지만 생각보다 따스한 손이었다. 아이작은 더욱 환히 웃음지었다. 그 웃음을 물끄러미 바라본 이스피어는 조심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던 것 같았다.
…
그리하여 바다의 딸은 걸터앉은 바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반신의 지느러미가 갈라져 비늘이 사라지고 보드라운 맨 살결이 되어 '다리'가 생겨나 그 중 하나의 끝이 모래사장을 짚기까지. … 바다의 저편에서 무언가 울부짖는 음성을 들었던 것만 같았다. 이스피어는 손을 붙잡고 최초로 땅에 발을 딛는 고통에 정신이 팔려 그를 듣지 못했고, 아이작은 그 이기심으로 바다의 비명을 못 들은 척 했다. 한 손으로 아이작의 손을 잡는 것은 무리였는지 이스피어는 크게 휘청이며 또 다른 손을 아이작에게 뻗었다. 아이작은 그 손을 단단히 붙잡고 제게로 끌어와, 인간의 온전한 몸을 입은 이스피어를 품에 안아주었다.
"하나 말하지 않은 점이 있었는데, 알 지는 모르겠군. … 인간은 보통 옷을 입고 다닌다는 점을 말야."
"… 당신이 옷을 입고 있으니 나도 알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지금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거죠?"
"그대가 그 상태로 왕궁으로 돌아가면, 내게 겉잡을 수 없이 난감한 문제가 생겨버릴 것이란 이야기야."
이스피어는 두 다리로 땅을 짚고 서 있는 것마저 벅찬지 표정을 잔뜩 찡그린 채였다. 아이작은 그것에 아주 조금, 가슴이 울렁이는 기분을 느꼈지만 착각이라 치부하며 저를 지켜보고 있을 호위 기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견디기 힘들다면 우선은 주저앉아도 돼, 이스피어. 상냥히 속삭인 아이작은 이스피어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앉혔다. 이스피어는 거부하지 않고 숨을 내몰아쉬며 모래사장에 주저앉았다. 아이작은 최선을 다해 아래로 시선을 주지 않으려 했다. 눈을 뜨고 이런 아픔은 처음 겪어봐요! 나는 아마, 제대로 오래 걸어다니지도 못할 거예요. 이런 거에는 절대 익숙해질 수 없을 테니까요. 어느 사이에 아이작에게 다가와 새까만 망토를 건넨 호위 기사들을 다시 물린 아이작은 고통에 고인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내는 이스피어에게서 제 겉옷을 벗겨내고 망토를 단단히 둘러매주었다.
"처음 겪게 된 고통이니 당장 걷는 건 무리일 것 같군."
"바다가 왜 내게 경고했는지 알 것 같아요.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를 벗어나오려 했기 때문에, 그래서 받는 벌인가봐요."
"그러나 괜찮아. 내가 그대를 안고 들어갈 테니까."
"오늘은 당신이 나를 안아주겠다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순 없을거란 걸 알아요."
"언제까지고 그리 해줄테니 걱정 말아."
"그러지 않을 걸 알아요."
"… 이스피어.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
망토를 두른 이스피어를 가뿐히 안아들고 왕성으로 되돌아가던 아이작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동시에 땅을 향해 늘어져 물기를 뚝뚝 흘리던 머리카락도 허공에 뜬 두 다리도 흔들림을 멈추었다. 이스피어는 아이작의 품에 안긴 채 주변 정경을 자꾸만 두리번거리다 멈춘 발걸음에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신뢰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대가 날 이렇게, 배은망덕한 사내로 취급하니. … 조금 서운해."
"그런, 아이작. … 결코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는걸요. 저는 당신께 최대한 폐를 끼치지 않고자 하는 의도에서 말한 거예요. 지금도, 당신이 그렇게 똑똑하지 않았다면 내게 옷을 입힐 생각을 하지 못했겠죠. 그랬다면 옷을 입지 않은 나를 그대로 왕성에 데려가서, 난감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을 일이잖아요."
"……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야, 이스피어."
"제게는 똑같아요. 아무리 친구 사이에선 폐를 끼쳐도 용서해주는 거라지만, 그렇다 해서 그걸 면죄부로 쓸 수는 없는 거잖아요."
"…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 어떻게요?"
"다른 사람의 눈이 있을 땐, 그대가 최대한 걸어보는 걸로 하고. … 나와 단 둘이 있을 땐, 내가 그대를 품에 안을 수 있게 해줘."
"…… 그렇지만, …"
"나도 최대한 양보한 후에 내뱉는 말임을 생각해주지 않겠어?"
이스피어는 그리고 한참 말이 없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은 이스피어는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잊고 얌전히 아이작의 품에만 안겨있었다. 이스피어에게서 대답이 흘러나온 것은 한참 뒤였다.
"당신의 말대로 할게요. 대신, 절대 살이 찌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 그에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던 것 같았다. 보름달이 천지만물을 환히 비추는 날이었다. 아이작은 불현듯 품에 안긴 이 생명체의 무게가 참으로 적당하단 생각을 지었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인어라는 생명체를 안아들어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기면 전달되는 그 무게가 알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품에 얌전히 안겨있는 바다의 딸은 바다에서 태어났다기엔 따스한 온기를 지니고 있었고, 고운 음성은 듣기에 시끄럽지도 않고 상당히 예뻤다.
쿵, 쿵. 아이작의 심장이 느리게, 그러나 크게 뛰었다.
*
그 소식 들었어? 왕자님께서 의문의 여인을 왕성에 데려오셨다고 하시던데.
다리 병신이라며. 거기다 출신도 모르고, 신원도 파악이 안된다 하던데.
서대륙에 약혼녀까지 계신데 … 이런 소문이 돌아도 될지 몰라, 왕자님께서 다 뜻이 있으시겠지만 걱정이 크네.
*
… 친애하는 아이작 왕자님께. 이야기는 잘 전해들었습니다. 설마하니 인어라는 것이 실존할 줄은 몰랐습니다. 불거졌던 소문은 책임지고 잠재우도록 할 테니, 왕자님께서도 동대륙에서의 소문을 잘 감당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근래의 회의에서 ……
*
오늘도 이스피어는 시종들과 도란도란거리며 동대륙의 상식을 알아가거나, 아이작의 빈 시간을 이용해 아이작에게 글을 배우며 하루를 보냈다. 어느덧 고통을 참는 법을 배운 이스피어는 길게 걷는 것은 힘들어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제 다리로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아이작은 그것에 한시름 놨다,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묘한 허전함을 느껴야만 했다.
이스피어는 배움이 빨랐다. 육지에 대해 하나 상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기에 거의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시작한 개인 교습은 생각보다도 속도가 붙었다. 글을 가르친 것도 3주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어지간한 서적을 읽어볼 정도가 되었으니,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물론 이스피어는 상식 면에 있어서는 진도가 더뎠다. 시녀들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 돌아가는 것을 익히라고 했더니, 오늘은 시녀들과 꽃밭에 나가 꽃잔디를 얽어 난데없는 화관을 만들어왔더랜다. … 서류를 적어내리던 손이 한순간 멈춘다. 피식, 웃음이 흐른다.
그는 집무실을 향해 걷고 있던 저에게 뜬금없이 다가와 불쑥, 화관을 내밀던 이스피어를 떠올려보았다. 그때 이스피어가 무슨 말을 했더라.
"바다 속에서도 참 예쁜 꽃이 많이 피어있는데, 사실 육지에 비할 바는 못 되는 것 같아요. … 아무튼, 당신을 위해 시녀 분들께 배워서, 만들 수 있었어요. 머리에 써볼래요? 아니면 제가 머리에 써볼까요?"
"… 시녀?"
바쁜 사람을 쓸데없는 일로 붙잡았다 생각을 했었다. 아이작은 이스피어가 내민 화관으로 시선을 옮겼었다. 화관이니 뭐니, 우정이나 사랑만큼 하나 관심 없던 것임에는 분명했으나.
"… 그대가 쓰고있는 건 한 번 보고싶네."
이스피어는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었다. 항상 맑고 깨끗해보이고, 하염없이 순수한 웃음이었다.
"원래라면 당신을 위해 만들어온 것이지만! … 당신이 바라는대로, … 쨘. 어때요? 바다가 육지의 꽃을 머리에 달다니, 우스꽝스러워 보이나요?"
"… 아니, 아주 잘 어울리는군. … 예뻐."
"아름답다거나, 예쁘다던가. … 사실 잘은 모르겠지만, 난 당신에게 잘 보이면 되니까요. 당신께 아름다워 보이기만 하다면 난 다 좋아요."
이스피어가 거짓 하나 없는, 바다처럼 맑은 말을 뱉으며 눈을 휘어 웃을 적이면 아이작은 종종 가슴이 꾹 죄여오는 기분을 느꼈다. 쿵, 쿵. 심장이 뛰는 소리가 크게 느껴졌었던 것 같았다. 그 박동을 무시하고자 아이작은 손을 뻗어 화관을 쓴 이스피어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어주었다. 꽃이 망가지지 않게 무척 조심스러운 손길이었으나 본인은 알아차리지 못했을 그 손길.
… 똑똑, 집무실의 문으로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념이 깨진다. 아이작은 한참 멈춰서 글을 쓰지 않았던 제 손을 내려다보며 무심코 혀를 차다가 문 밖의 호위 기사에게 들어오라 이야기했다. 서류를 다시 적어내려가며 시선을 그리 고정한 채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어찌 보면 무료함이나 귀찮음에 젖어있던 음성이었고 모습이었지만, 아이작은 이내 호위 기사가 내뱉은 말에 몸을 굳힌다. 뚝, 깃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던가.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전한 호위기사를 노려본다. 묻는다.
"이스피어가 어딜 갔다고?"
*
"잘 자라 우리 아가. … 앞뜰과 뒷동산에. ……"
아이작을 처음 만났던 그 밤바다로 걸어나온 이스피어는 바위에 걸터앉아 발 끝을 바다에 담갔다. 흥얼거리며 노래를 불렀고, 세상 근심이라곤 하나 모르는 낯으로 잔잔히 웃으며 언젠가 바다에서 주워들었던 자장가를 읊으며 노래했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지만 아이작이 제게 붙여준 사람들의 수도 꽤 되었고, 이젠 다리에서 올라오는 고통도 한결 참을 만 했다. 어떤 시녀가 그렇게 말했던가, 고통은 익숙해져서 전혀 좋을 것이 없노라고. 고통에 익숙해진단 건 어른이 되어가는 것과 동일하다지만 어쨌거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슬픈 일이라 했나.
그렇지만 이스피어는 아이작에게 되도록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아프긴 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아프진 않았고, … 물론 처음엔 너무 아파서 눈물을 찔끔 흘리긴 했지만. 하여튼 사람들은 다 견딜 수 있는 고난과 견디지 못하는 고난이 있다고 했잖은가. 이스피어는 지금까지 견디지 못할 고난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고 자란 바다에 인간의 다리를 담그고 있으면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다리를 찌르는 듯한 아픔이 사그라든다. 아이작이 그렸던 다정한 웃음을 흉내내듯 웃은 이스피어가 허리를 숙여 바다에 담긴 제 다리의 살결을 어루만지고 있던 때였다.
"─ 이스피어,"
"… ?"
이제는 잠결에도 쉬이 떠올릴 수 있을만큼 익숙해진 음성이 저를 부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음성의 주인을 바라보면 역시나, 아이작 딜라이트. 당신이다. 이스피어가 더 환히 웃음짓곤 상체를 반쯤 돌려 아이작을 바라본다.
"그 예전처럼 산책이라도 나왔나요? 우연이에요, 저도 때마침 산책을 나온 중-,"
"바다로, 돌아가고 싶었어?"
제가 하는 말도 끊어내고 물음을 뱉는 아이작의 낯을 살피면, 과연. 이스피어가 평소 보던 아이작의 얼굴보다 훨씬 굳어있는 얼굴이었다. 하여 이스피어는 제 말을 끊어낸 것에 가벼운 책망을 던지기보단 아이작을 걱정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었다. 그 표정을 바라본 아이작은 반면 멈추었던 숨을 다시 내쉬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거리고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 몸을 푼다. 산책을 나왔다고. 돌아가고 싶었던 건 아니지, 아직.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 바다를 구경하고 있었어?"
이스피어가 제 옆의 바위를 툭툭 두드렸다. 와서 앉으라는 듯한 손짓에 아이작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그 옆에 걸터앉았다. 급히 오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달빛 아래의 이스피어를 바라본다. 처음 만난 날만큼 환한 보름달이 뜬 날이 아니었던지라 그 날만큼 이스피어가 잘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무의식 중에 아쉬움이 든다.
"바다는 내게 어머니이자 아버지니까요. 가족을 보러 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잖아요."
"… 아무런 언질 없이 떠나가서 가슴이 내려앉았어. 다음부턴 나와 함께 오도록 해."
"네. 알겠어요. … 그리고, 돌아가고 싶냐는 물음에는. …"
아이작은 애써 태연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이스피어의 바깥쪽 어깨를 그러쥐고, 제게로 당겼다. 품에 안아 이스피어가 도망치지 않을 수 있도록. 제기랄, 아직도 심장이 급히 뛰고 있었다. 잘 진정되지 않았다. 아까 호위 기사에게 "틸다님께서 혼자 바닷가로 향하셨습니다. 감시하라 명하신 기사들이 곁을 지키고는 있으나, ……" 따위의 말을 들었을 땐 제대로 무슨 생각도 들지 않아서. … 어깨를 그러쥔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진득한 소유욕이 아이작의 몸을 휘감았지만 아이작은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앞으로는 이스피어가 혼자 있을 시간을 아예 만들지 말고 제게만 붙어있게 해야겠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했다.
"돌아가지 않아도 좋아요. 당신이 여기 있잖아요. …"
"… 그래?"
"나는 당신과 있으면 즐거워요. 대화를 하면 가슴이 가끔 이상하기도 하지만, … 아무튼 기분이 무척 좋거든요."
"… 나는 그대가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 그대를 아주 오래 보고싶어. 내 곁에 두고, 가능한 아주 오랫동안. …"
"혹시 아이작,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기분 좋은 것이. … 아름답다고 표현될 수 있는 걸까요? 당신이 처음 내게 말씀해줬던 것처럼요."
"아름답다는 기분이 좋다는 것에 마냥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단어는 아닐 것 같네. 그보다는. ……"
이스피어는 얌전히 아이작의 품에 안겨있었다. 근본 모를 만족감이 들어찼다. 아이작은 어깨를 쥔 손을 느슨히 하며, 제 가슴팍에 몸을 기댄 이스피어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앞으로는, 절대. 혼자 두지 말아야겠다. 아이작은 잠시 말을 멈추며 이스피어의 하얀 손 끝을 바라보았다. 보름달은 아니라지만 충분한 빛이었다. 이스피어가 지나가듯 한 이야기가 그러했던가. 바다의 딸은 바다 그 자체의 사랑을 받는다고. 모든 바다의 생명체가 그를 애정하고 아낄 것이라고. 아이작이 다물었던 입술을 열어 담담한 음성을 뱉었다.
"사랑스럽다는 단어가 어울릴 것 같군."
"사랑스럽다?"
"그래. 사랑스럽다. … 내게 해보겠어, 이스피어?"
"아이작, 당신이 사랑스럽다고요?"
"… 비슷한 말로는 사랑해,가 있겠지. 그 편이 나는 더 좋아."
왜 스스로도 이런 말을 꺼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바다에게 홀려버리기라도 한 건지. 이스피어가 살짝 고개를 들며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던 날과는 달리 머리카락은 물에 젖지 않아 비단같이 부드러웠고, 멀쩡히 옷도 잘 갖춰 입고 있었고. … 아이작은 무심코 이스피어의 입술을 향해 유심한 시선을 보냈다. 의아한 듯 살짝 삐죽여져있던 입술이 비틀려 열리면, 그 단아하고 앳된 음성을 뱉으면.
"사랑해요, 아이작."
"……"
"…이렇게요?"
… 정녕, 바다에게, 바다의 딸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인지. 사랑해, 사랑해요, … 사랑합니다? 단어가 뭉글뭉글하고 예쁜 것 같긴 해요. 종알대는 그 말들에 답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아이작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어깨를 껴안지 않은 손으로 이스피어의 앞머리를 살살 헤치고 넘겨, 드러난 그 하얀 이마에 기어코 입을 맞춘다. 아이작의 입술이 바닷 바람에 차게 식은 이마 위를 덮었다. 이스피어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여태껏 그래왔듯 아이작을 만류하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아이작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살며시 감았던 눈을 뜨고 밤 바다의 풍경을 뒤로한 이스피어의 금안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앞으로는 내게 그 말을 자주 써줬으면 좋겠어."
"… 내게 이 말을 들으면 힘이 나나요?"
"그래. 아주 힘이 나."
"…… 금방 한 행동은 뭔지 물어봐도 되나요?"
"… 기분이 나빴나?"
"아뇨, 따지자면 좋은 편에 속했는데. … 난 당신이 나를 만져줄 때 기분이 좋거든요. 사랑스러워서요?"
금방 배운 단어를 익혀보기라도 하듯 말을 내뱉은 이스피어가 살살 웃으며 당신의 눈치를 살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이스피어를 바라보던 아이작은 조금 더 웃더니 재차, 드러난 이마에 입술을 맞춰주었다.
"다른 자가 이러려거든 불쾌하게 생각해줬으면 해. 이건, 내가. … 그대에게만 할 수 있는 행위거든."
"신분의 특성 때문에 그런 걸까요? 아니면 우리가 친구라서?"
아이작은 답하지 않고 웃었다. 이스피어의 어깨를 살살 만져주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리둥절한 이스피어의 시선이 따라오는 것을 마주하다가 살짝 몸을 굽혀 이스피어의 몸을 안아들었다. 바다에 담갔던 두 발에서 바닷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스피어는 어쩌면 익숙하게 아이작의 품에서 자세를 살짝 고쳐잡았고, 아이작의 목을 둘러 껴안았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제게 안기는 이스피어의 모습에서 다시 충족감이 배를 불렸다. 아이작이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이마가 아닌 입술 위로 제 입술을 짧게 맞춘다. 살짝 입술을 떨어뜨리고, 지척의 거리에서 선한 웃음을 그린다.
"내가 좋다니 기쁘군. 하지만 밤바다는 추우니까 이만 들어가지. 함께 와인을 마실까?"
그 첫날보다도 이스피어를 안아들 때마다 만족스러움은 커져만 갔다. 아이작은 이스피어의 존재를 구태여 정의내리지 않았다. 커져가는 소유욕과 집착 따위를 방관했다.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마땅히 믿었다.
이스피어는 아주 가까운 그 거리에서 당신을 마주하며 웃었다. 이번에는 제가 고개를 움직여 아이작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덮는다. 쪽, 소리가 나도록.
"돌아가요. 저번에 먹었던 그 와인, 맞죠? … 맛있었어요."
그 말을 이후로도 왕성으로 돌아가는 내내 이스피어의 목소리는 끊길 틈이 없었다. 말이 많다,고 느꼈던 첫인상과는 달리 아이작은 이스피어가. … 이스피어의 목소리가 무척 듣기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보면 처음 만났을 때도 그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었나. 당시를 회상하며 이스피어를 한 번 고쳐안은 아이작은 되돌아 생각했다. 이스피어 자체도 결코 도망갈 수 없고, 그 누구도 이스피어를 결코 탐할 수 없게끔,
… 이 왕성은 이스피어를 효율적으로 가두기 위한 수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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