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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썰&연성

[나르디] 인지에 관하여.

by 여우비야 2020. 11. 7.

 

"아. 듣고 있어어."


* 나르디 로판 에유 (니나의 소설 속 영애 빙의기^^)





 비체텐타 공작 가의 새 주인은 여러모로 많은 시샘을 받아야 했다. 다정한 언어로 표현하길 시샘이었지, 그것은 실상 온갖 살해 시도를 포함한 단어였다. 사유도 제각각이었다. 한낱 여자라는 것이 떡하니 제국의 세 기둥 중 한 기둥의 머리를 가진다는 점에서, 헤르디 비체텐타가 영 속내를 못 믿을 인물이라는 의견에서, 검무 대련에서 그에게 참패하였던 기억에서…, 여러 열등감과 시기, 무시, 오만 따위가 뒤섞여 검은 늑대를 끌어내리고자 했다. 당연히 속 모를 여자, 관통하는 이빨, 오한의 비체텐타, 헤르디 라르샤 비체텐타는 자신의 목을 조르는 이들을 좌시하지 않았다. 음식에 독을 탄 시녀는 경동맥을 꿰뚫는 쇠의 감각을 마지막 기억 삼아 눈을 감아야 했고, 평민으로 변장하여 시내를 산책하던 그를 습격한 자객은 배 가죽이 뜯겨 선홍빛 내장을 까마귀의 양식으로 주어야 했다.

 있지, 할 거면 좀 더 본격적으로 해보라구.

 그러나 제국의 두 번째 기둥, 콘체르타의 백금빛 휘장에 눈을 부릅뜬 머리가 길고 긴 핏길을 만들어냈을 때에는 좌중이 죄다 경악했던가. 노쇠한 콘체르타의 가주는 시꺼먼 피가 기어이 백금빛 신발을 더럽히자 성노하며 자신을 모욕한 헤르디 라르샤 비체텐타를 향해 검을 빼들었으나 휘두르지 못했다. 서슬퍼런 검날이 목을 겨누는데도 하나 흔들리지 않던, 그, 새까만, 웃음이. 분노가 공포로 뒤바뀜은 어떠한 이유에서였나. 혈혈단신으로 적국의 수도를 꿰뚫던 검은 궤적의 무용담이, 드래곤의 심장을 갈아 마셨다던 괴의한 소문이, 그도 아니면 비체텐타는 광기를 뒤집어 쓴 자들이다. 하던 젊은 황제의 말이 뒤늦게 떠올랐던 것일까. 확실한 것은 그가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텅 빈 눈동자에서 콘체르타의 옛 가주를 떠올렸단 점이었다. 두 기둥의 첨예한 대립은 황제의 재빠른 개입으로 흐지부지 되었지만 이후로 비체텐타의 새 주인을 향한 술수와 모략은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이 사건들로 인하여 제국민들에게 인상 깊게 남게 된 문장은 하나 뿐이 되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헤르디 비체텐타는 미친 인간이다.' 무척이나 간단하고 명료한, 요약이었다.


 헤르디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자신을 몰라도 한참을 모른다고. 그는 저를 위협하는 모든 시도에 철저하게 응대했지만 그것은 그 시도가 자신에게 '닿았기' 때문이었다. 헤르디 비체텐타는 기본적으로 권력 다툼에 흥미가 있지 않았다. 머리를 굴리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잘할 수 있었지만 귀찮지 않나? 내가, 굳이? 제가 죽을 때까지 제 식솔들을 충분히 먹여 살릴 돈이 있었고, 제국에서 손꼽히는 무력을 지닌 자신이 있었으며, 권력, 음,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제국에서 세 번째 안으로 드는 명성을 지니고 있으니 차고 넘치지 않나. 그러니 헤르디가 바라는 것은 지극히 사소할지도 모르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제 가문의 사람들이 언제까지고 평안한 것, 자신에게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는 것. 최소한의 의무를 지켜내며 뽀동뽀동 놀겠다는 말이었다. 아마 헤르디는 앞으로도 자신이 이 일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헤르디. 저는 니나예요. 니나 하인드위거."

 "음."

 "실제로 뵈니까 정말 피부가 고우시네요, 어쩜! 머리카락은 또 그렇게나 비단같으셔서……."

 "으음~"

 "기념으로 악수라도 해볼 수 없을까요? 아, 여기서는 너무 무례한 행동일려나? 미안해요, 하지만 이 마음을 주체할 수 없네요. 거기다가, 헤르디는 이런 예법들에 그렇게 신경쓰는 편도 아니시잖아요."

 "흐으으음~."


 불현듯 나타난 이 여자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누구더라?"

 "아이, 참. 헤르디도! 금방 말했잖아요, 니나 하인드위거예요. 남작이었나? 어디였나, 하여튼 그 쪽 영애인데…,"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닌데~."

 "하인드위거 자작의 첫째 영애입니다. 최근 생사를 오갈 정도로 크게 앓아누웠다 이틀 전에 깨어났다 하는데, 행동에 이상함이 보였다 합니다. 본인이 누구인지 정체성에 혼란이 오고, 몸에 익혀두었던 예법에 대한 것을 싸그리 잊어버린 둥 기억도 일부 상실된 것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어머어머, 어떻게 이런 사소한 정보를 다 기억할 수가 있어요? 역시 세 기둥 중 하나인 공작가는 달라도 한참 다른가봐요. 무서울 정도야."

 "저리 치워."

 "예."


 헤르디이이이─ 끌려가면서도 끝까지 저를 부르짖는 그 음성은 무시하는 것에 하나 어려움이 없었다. 헤르디는 느긋하게 마시던 홍차를 한 입에 털어넣고 니나 하인드위거라는, 요근래 제일로 별났던 여자에 대한 기억을 싸그리 한 구석에 몰아넣었다. 잊어버렸다는 소리였다. 그의 충실한 집사가 며칠 뒤 심문을 끝마치고 관련 정보를 헤르디에게 전달하기까지 말이다.


 "공작님의 이 침범되다 못해 붕괴한다고 합니다…."



*



 선.

 그것은 헤르디의 전 인생을 관통해서 빼놓을래야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또 중요한 단어였다. 공작 가의 모든 사람들은 알 것이다. 헤르디가 태어나기 전부터 공작 가를 위해 헌신해온 자들조차 그의 방에는 들어가는 것은 고사하고 얼씬조차 할 수 없음을, 헤르디 비체텐타가 연무장을 쓸 적에는 사람들이 근처에서 싸그리 사라진다던가, 그는 몸시중을 일절 받지 않는다던가 하는 것을 말이다. 그는 지독하리만치 개인적이었다. 아마 공작 가의 후계자,라는 타이틀이 더욱 그가 이야기하는 선이란 것을 더 견고하게 한 까닭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름 애정했던 전 공작은 그리 일렀다. 무엇도 너를 침범하게 두지 말라, 였나? 헤르디는 그 말을 충실하게 지켰지만 비단 그것이 아버지의 유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원래부터 그런 족속의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흘러가게 두면서도 선 안에 무언가가 저를 공격하는 순간, 대상을 관통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는, 어느 강박. 혹은 책임감?

 그것이 '침범'되다 못해 '붕괴'한다고……. 철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던 손길이 멎었고, 상념을 갈무리한 헤르디 비체텐타는 평범한 영애가 겪었다면 미쳐버려도 아무 말 없었을, 그 모든 혹독한 심문을 거치고서도 제가 들어서자마자 기운이 되살아난 여자를 바라보았다. 생각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말 하지 말라 했더니 그 말은 또 잘 들었다. 느릿하니 웃음지었다.


 "이제야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네에. 해서, 기분은 어때?"

 "기다리느라 목이 빠질 뻔 했지 뭐예요? 그나저나, 며칠이고 묶인 손이 너무 아파요, 헤르디."

 "풀어줘."


 예. 간결한 대답 후 곧장 풀린 구속에 여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말 한 마디만으로 어느 의문도 품지 않고 움직이는 공작의 수족들. 여자의 눈 안에서 어느 불씨가 튀더니, 조금씩 타오르기 시작한 것을 목격한 자는 방 안의 모두였겠으나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헤르디 혼자 뿐이었다. 눈꼬리 옆을 손가락으로 짚고 관자놀이까지 쭈우욱 찢어올리듯 손가락에 머리를 기댄 헤르디는 멈추지 않고 계속 가늠하듯한 시선으로 니나를 응시했다. 살을 에일듯한 살기가 가느다랗게 서려있는 것을 니나 또한 목격했던 것 같다. 여자는 생각했다. 아. 헤르디가 나를 저울질하고 있구나! 정답이었다. 여자가 읽었던 소설 중에는 꽤 잦은 부분에서 헤르디가 타인을 두고 저울질하는 모습이 묘사되곤 했는데 그것은 대상이 헤르디의 선을 침범할지, 침범하지 않을지를 두고 보는 생각의 활동이었다. 지금 살려두어도 저를 침범해오지 않을까? 헤르디는 쾌락을 좇는 살인마가 아니었으므로 참, 합리적인 사고 방식이 아니었나. 니나는 떠올렸다. 그런 헤르디가 끝내 저울질에 실수를 하고 말았기에, 그 나비효과로 벌어졌던 스토리를. 헤르디의 결말을, 마지막 대사를.


 그 더러운 여자가 떠나가는 날이었다. 악독한 자의 죄를 끝 날까지 씻어주지 못하겠다는 양 살결에 고이나 흐르기에는 애매할 정도의 부슬비가 내리다 못해 안개가 끼는 새벽이었다. 군중의 성난 함성과 비난이 빗발치는 길을 맨발로 걸음걸음하여 대패질 하지 않은 나무 계단을 오르고 오르면 광장의 첨탑에 온전히 오를 수 있었는데, 그곳에 기어이 무릎 꿇려진 검은 짐승이 있었다. 여자, 엘레나는 하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었다. 콘체르타의 젊은 후계자와 메체렌타의 괴물 공작이 당장 그의 안색을 살펴왔다. "힘들다면 보지 않아도 좋아." 꾸며내지 않은 다정이 곁든 목소리에 엘레나는 살살 고개를 저었다. 가슴께에 닿아오는 하얀 곱슬머리가 덩달아 흔들렸다. 시선은 오로지 창 너머, 몇 겹의 사슬로 포박되어 비난과 저주의 한 가운데 꿇은 금수를 향하고만 있었다. "힘들지 않아요." 숨이 헐떡여지는 것을 막으려는 양 하얀 손수건이 입술을 꾹 틀어막았다. 엘레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양 옆으로 휙휙대는 광경 속에서도 그, 새까만, 여자는,

 지독하리만치 선명했다…. 하여 엘레나는 몇 번이고 집씻듯 말하는 것이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시퍼런 칼날이 부슬비에 젖어 일순간 번쩍이고, 번개와 같이 여자의 목을 잘라내며 머리카락이 허공에 비단처럼 흩어지고, 새빨간, 또 새빨간 피가 첨탑을 타고 흘러내려 희열로 소리치는 민중의 발치를 시꺼멓게 뒤덮을 때까지, 이내 첨탑에는 흔적만이 남을 때까지.

 과연 엘레나의 손수건 아래에 감추어진 입꼬리가 전에 없던 행복을 품고 짙은 호선을 그려내고 있던 것을 누가 알았을까.


 "이겨서, 좋겠네?"


 죽기 직전의 헤르디 비체텐타를 제외하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겠지. 그러니, 이젠 아무도 모르게 될 일이었다. 엘레나는 마지막 눈물을 떨구며 그제서야 입을 덮었던 손수건을 떼어내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때였다.


 니나는 고심하고 고심하다 첫 마디를 꺼냈다. 저번에는 너무 들뜬 나머지 말 실수를 어지간히 했다고, 심문을 받으며 줄곧 되뇌었던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헤르디, 비록 저번에는 제가 실수를 했다지만. 저는 그렇게 멍청한 여자가 아니에요."

 "쓸모를 입증할 생각?"

 "헤르디의 '선'을 위해서요."

 "네가. 왜?"

 "제가 헤르디를 좋아하니까요."

 "난 그런 건 안 믿엉."

 "알아요."

 "장기말이 되려구?"

 "헤르디의 곁을 가질 수 있다면 아무렴, 좋아요."

 "그렇구나."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지던 와중 헤르디가 손가락 끝을 까딱거렸다. 이미 언질받은 것이 있던 집사는 니나에게 한 서류를 건네었다. 니나가 이야기했던 엘레나라는, 그 병약한 영애에 대한 정보가 적힌 서류였다. 헤르디는 다시금 손을 내려놓고 철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친구가 되고 오는 걸 첫번째루 할까?"

 "어떡하죠? 저는 이 사람이 너무 싫은데, 연기 하려면 벅차겠어요."

 "하인드위거 영애에게 방 한 켠을 내어줘. 손님으로 대접한다."

 "아앗. 벌써 가시는 거예요, 헤르디?"


 자그마한 손이 헤르디의 손을 망설이지 않고 잡아왔다. 헤르디는 또한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뿌리쳤다. 니나는 그것에, 손끝에서 피어나는 일종의 통증을 느끼는 것이었다. 뒤돌아본 헤르디는 참 순하게, 악독하게, 선을 긋곤 웃었다. 흘러가듯 이야기했다.


 "칭찬은,"

 "칭찬은?"

 "친구가 되고 돌아오면."

 "…"


 니나도, 알 수 없는 아리송한 이 여자도 따라 웃었다. 네에, 헤르디. 헤르디의 신형이 심문실 바깥을 나서면 그의 집사가 니나를 안내하기 위해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니나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당신의 선을 위해서라곤 했지만요, 헤르디. 당신도 아시겠죠? 니나는 천천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헤르디의 웃음을 그렸다. 손끝에 닿았던 그 감각을 기억했다.

 

  저는 그 선을 침범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고 말 거예요.


 밤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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